당신들 의 천국 분석 - dangsindeul ui cheongug bunseog

▣ 이해와 감상

지금까지 장편 소설에 대한 재래의 독법은 우선 수많은 등장 인물, 엇갈리는 숱한 사건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을 최대의 특징으로 삼아 왔다.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이나 사건은 독자와 더불어 성장한다. 말하자면,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상황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나 암시가 미리 주어지지 않고 무심한 현실의 한 단면을 제시하듯 그대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므로 인물과 사건은 시간의 진행에 따라서 차츰 변모와 발전, 소멸을 거듭하면서 이윽고 어떤 파국, 혹은 어떤 절정에 이른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장편 소설들의 기본적 전개 방식은 귀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청준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전개 방식에 있어 일종의 연역적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장편소설로서는 드물게도 몇 안 되는 등장 인물만을 갖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길이의 문제만을 제외하면 사건과 효과의 단일성 등 재래의 장편 소설 조건에 부응하지 않는 체계를 갖고 있다. 즉, 이 소설의 세계는 작가가 선택한 어떤 보편적 원리의 추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작품 구조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

또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 사이의 역학 관계와 대립 관계를 드러내 보인 후, 이 대립을 해소하는 길은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소재, 주제, 그리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가의 능력과 깨끗하고 지적인 문체 등으로 해방 이후 한국 문단이 거둔 최대의 수확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은 관념적 소설이라고 일컬어진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우선 일상적 생활 양식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관념화된 양식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행위의 세련을 가져오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단순화 또는 축소화되어 있는데, 이는 개인의 뇌리 속에서 또는 사회 의식 속에서 서로 충돌·화합·타협·대립하는 관념들의 양상을 집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청준은 이러한 관념의 의식을 파고드는 독특한 방법을 통하여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작업에 능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 배경 : 공간 - 소록도. 시간 - 5.16 이후

■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관념적

■ 특징

▪ 대화의 방식을 활용하여 상황에 대한 인물의 인식과 태도를 드러냄.

▪ 대화의 중간중간에 상대방을 추켜세우다 비판하기를 반복하는 억양법을 구사함.

■ 주제 : 인간의 진정한 삶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이상주의적 세계 추구.

■ 인물

▪ 조백헌 - 소록도 병원장. 나환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긍정적 인물.

▪ 이상욱 - 조백헌 원장과 갈등 관계였으나 원장의 사랑 정신에 감동하는 인물.

▪ 이정태 - 기자. 소록도를 취재함.

★ 이상향 건설에 대한 주제 의식

이 작품은 “인간 사회에서도 과연 천국의 건설이 가능한가?”에 대한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후, 그 대답의 실마리를 모색하고 있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소록도 나환자촌’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격리된 공간이면서도 엄연히 모순에 찬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중적 의미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간 설정 자체가 ‘현실 속에서의 천국(이상적 사회) 건설 가능성 탐색’이라는 작가의 집필 이도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없는 권력은 증오를 낳고 사랑이 없는 권력은 강요된 의무만을 낳는다는 점을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상 사회 건설에 대한 열망을 주제로 한 작품은 우리 고전 작품 속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박지원의 <허생전>과 허균의 <홍길동전>이라 하겠다.

이상욱이 말한 ‘당신들의 천국’과, 작가가 조백헌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당신들의 천국’이 지닌 의미

이상욱이 조백헌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당신들’은 소록도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을 가진 원장들을 가리킨다. ‘인간의 천국을 지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 한다는 것이 이상욱이 바라본 조백헌의 의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욱의 눈에 의하면 ‘천국’은 환자들을 더욱 나약하고 수동적인 피보호자로 만든다는 것을 뜻하며, 결국 ‘원장이 내세운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과 욕망, 행위가 제한을 당하면서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작가가 조백헌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이상욱이 말한 것처럼 ‘당신들’, 즉 원장들들의 천국이 결코 아니다. 작가는 소록도에 진정으로 필요한 천국이야말로 ‘당신들’, 즉 환자들과 주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다시 말해 그들의 자발적인 운명 개척에 대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의지가 발현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그리고 그곳은 지배와 복종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이라는 수평적 관계에 기초한 천국이었던 것이다.

▣ 줄거리

이 작품은 소록도 병원장인 조백헌의 이야기다. 모두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현역 대령인 조백헌이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 곳 환자들에게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 주기 위해 득량만 매립 공사에 착수하는 데서부터 그 공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21개월 동안, 나환자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제2부는, 매립 공사를 둘러싼 9개월 간의 병원장의 정신적 방황을 그리고 있다.

제3부는, 소설의 대단원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조 원장이 섬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후, 3월 달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소록도에 돌아오게 되고, 2년 후, 4월 달에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는 것을 그리고 있다.

표면적인 구조만으로 볼 때, 󰡔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이라는 야심 많고 정열적인 한 인물의 무용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그 조백헌의 단순한 제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복합적인 비판에 있다. 그 비판을 가능케 하는 인물이 이상욱과 이정태이다.

제1,2부의 기술은 조백헌에 관한 이상욱의 시선에 의지해 있다. 그의 시선은 조백헌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소록도에 천국을 세운다는 미명 하에 조백헌이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과시욕을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를 감시의 눈으로 지켜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소록도의 과거 때문이다.

소록도에서는 일제 시대의 병원장이었던 주정수가 나병 환자들의 낙원을 건설한다는 미명 하에 개인의 명예를 얻는 데만 열중하고 환자들은 강제로 노역시키고 임금까지 착취했다. 학대의 방법도 교묘하고 극한에 달하여 심지어 단종(斷種) 수술까지 자행되었다. 표면적 성과에 의해 공로자가 된 주정수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 앞에서 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

이러한 처참한 과거가 있었기에 소록도에는 바깥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뿌리가 깊이 내려져 있었다. 조백헌 원장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의지와 인내로 나환자들을 회유하고 결실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했다. 이러한 조백헌 원장의 사랑 정신에 결국에는 이상욱도 감동하게 된다.

작가는 또 이정태 기자의 눈을 통해 복지 사회의 건설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력과 사랑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고전여행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출처 : 사회(동아일보) 2008.5.26(월)-[理知논술/고전여행]당신들의 천국

더불어 사는 ‘우리들의 천국’은 단지 꿈일까

인간은 늘 꿈을 꾼다. 잘 때뿐만 아니라 깨어있을 때도 꿈을 꾼다. 밤의 꿈은 각자 꾸지만, 의식이 꾸는 낮의 꿈은 사람들과 함께 꾼다. 그래서 꿈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극한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피부가 짓물러지고 손발이 잘려나가는 질병인 문둥병(나병) 환자들이 그들이다. 감염성 질병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격리된 환자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깊은 좌절감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꿈이 겪게 될 험난한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환자들이 있는 곳은 전남 고흥 앞바다에 있는 소록도이다. 섬은 마치 전체가 공원인 듯 매우 아름답게 잘 다듬어져 있고 의료체계도 완비된 곳이다. 그러나 조백헌 원장은 부임하던 첫날 원생들의 탈출 사고 소식을 선물로 받는다. 병이 다 나아서 배를 타고 당당히 나가도 되는데 굳이 바다에 몸을 던져 탈출하려 하는 사람들. “이 섬에서는 죽은 자만이 말을 합니다.” 보건과장 이상욱의 조언은 낙원 같은 겉모습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배반의 역사이다.

섬사람들이 겪은 첫 번째 배반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정수 원장은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으로 그들의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낸다. ‘버려진 사람들’을 ‘생산하는 사람들’로 바꾸었고 사람답게 살겠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감사 앞에서 지배자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도취적 동정심이었다. 주 원장이 숭배와 보은의 대상이 되어갈수록 원생들은 강제 노역으로 비참해져 갔다. 결국 원생들이 주 원장의 동상을 만들어 바치던 날, 동상의 주인은 그 앞에서 살해되는 비극을 맞는다. 지배자의 내면에 도사린 자기 숭배가 불러온 배반이다.

두 번째 배반은 환자 사이의 배반이다. 나환자들의 출산을 막기 위해 강제 불임 수술을 자행하던 시절, 이상욱은 원생 전체의 침묵과 보호 아래 낳고 길러진 공동체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이상욱의 아버지는 주 원장의 권력에 잘 보이기 위해 오히려 같은 환자들을 착취하는 데 앞장서다 살해당한다. 억압받는 공동운명체 내부에서 벌어진 불신의 배반이다.

세 번째 배반은 사회 전체로부터의 배반이다. 병이 완치된 한민은 작가의 꿈을 안고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낸다. 그러나 읽어보지도 않고 반송되는 원고들은 세상의 차가운 거절을 보여준다. 조 대령이 득량만 간척사업을 추진할 때 소록도와 연결되고 싶어 하지 않는 육지 주민들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이다.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 시선은 소록도 사람들이 최후에 겪는 거대한 벽이다. 인간이라는 의식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실존의 배반이다.

 조백헌 원장은 배반에 지친 사람들의 내력을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극복을 시도한다. 조 원장은 우선 민주적으로 정책이 시행되도록 조직을 개편했다. 주민대표인 장로회에 힘을 실어주어 억울한 일이 없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축구팀을 조직하여 전남 축구대회에 참가한다. 소록도팀이 공을 몰고 가면 상대편이 태클을 해오기는커녕 도망을 가는 경기. 결국 우승컵을 안고 돌아오는 축구팀과 함께 섬사람들은 환호한다. “문둥이도 축구할 수 있습니다.” 조 원장의 말처럼, 우리에게 당연한 일은 그들에게도 당연하다.

 그러나 여전히 섬에서는 탈출사고가 발생한다. 제도의 보완도, 당당한 자신감도 불신의 벽을 넘지 못했다. 죽어서야 비로소 ‘환자가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있는 현실은 그들이 살아있는 주체가 아님을 역설한다. 소통을 거부하는 육지 사람들과 사회구조 전체가 이 섬을 ‘우리들’이 아닌 ‘당신들을 위한’ 천국으로 가둬 놓고 있는 탓이다.

이 글의 긴장을 해소시킬 작가의 대안은 바로 ‘자유’와 ‘사랑’의 조화다. 아무리 멋진 미래라도 원생들이 스스로 꿈꾸고 기획할 자유를 갖지 않는 한 그것은 원장들의 천국일 뿐이다. 선의를 왜곡하지 않는 신뢰가 가능하려면 뼛속까지 그들과 함께 하려는 애정이 필요하다. 그가 원장이 아닌 주민의 한 사람으로 소록도에 다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믿음이 시작되지 않던가. 자유와 사랑의 두 가지 길. 이청준이 제시하는 천국 건설의 소중한 씨앗이 우리 삶에서도 꿈꾸어지길 기대해 본다.

▣ 우찬제 서강대 교수 문학비평가- 당신들의 천국

해마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자선냄비와 함께 사랑을 호소하는 구세군의 종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그 종소리에 호응하는 크고 작은 손들을 보면서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은 말한다. 그대 행복을 원하는가? 그러면 사랑하라!

얼마 전 이 땅에서 가장 행복했을 수녀 두 분의 귀향 소식을 들었다. 40여 년 전 이 땅을 찾아와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와 더불어 사랑의 삶을 살았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안(71) 수녀와 마가레트(70) 수녀가 그분들이다. 가족보다 더한 가족애로 한센병 환자와 함께했던 그분들은, 지난 삶에 감사하며 조용히 이 땅을 떠났다고 한다. 사랑의 벼리를 조용히 확인해 준 사건이다. 그분들이 지녔던 것은 권력도 자본도 명예도 아니었다. 오로지 가장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가장 낮은 곳에서, 운명을 같이하면서 꿈꾸는 ‘우리들의 천국’에의 소망 하나였을 것이다.

작가 이청준의 소망 역시 그랬다. 그의 ‘당신들의 천국’(1976년)은 소록도를 무대로 한센병 환우들과 병원장의 갈등을 중심으로 천국에 이르는 길의 어려움을 고뇌한 소설이다. 조백헌 원장은 선한 의지로 나환자들을 위한 ‘당신들의 천국’을 구상하고 실천하려 한다. 그러나 환우들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에 의한 ‘당신들의 천국’에 회의하며 협력하지 않는다. 환우들은 자유 의지와 사랑의 교감에 기초한 실천적 힘, 위나 밖으로부터가 아닌 안으로부터의 자생적 의지나 운명에 기초한 ‘우리들의 천국’을 소망했던 것이다.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조 원장은 조용히 섬을 떠난다.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모색하고자 한 조원장의 반성적 이념과 노력은 더 는 구체적인 결실을 보지 못한다. 다만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추진 사건을 통해 ‘우리들의 천국’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사랑과 자유에 기초한 이 결혼이 암시하는 것은 일반의사에 입각한 공동의 행복 추구 가능성이다. 환자와 일반인, 우리와 당신들이 구별되는 천국이 아닌, 서로 교감하고 조화를 이루는 ‘우리들의 천국’의 씨앗이 거기서 자생적으로 움트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요컨대 타자와 구체적인 교감이 없던 주체의 선한 의지가 타자의 발견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테제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 본 소설이 곧 ‘당신들의 천국’이다. 거기에는 삶의 현실과 이상적 소망, 주체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교감 가능성, 개인의 진실과 집단의 꿈의 화해 가능성, 자유와 사랑의 허심탄회한 조화 가능성 등 여러 가지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이 집필될 때도, 그 이후에도 두 수녀는 줄곧 소록도에 살았다. 어쩌면 작가 이청준이 미처 끝내지 못한 소설의 완결편을 그분들이 감당하려 했는지 모른다. 이제 그분들은 떠났지만 그냥 떠난 게 아니다. 그분들이 실천하고자 했던 ‘우리들의 천국’에의 소망, 곧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완결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열아홉의 젊은 그대, 행복을 꿈꾸는가? 그러면 사랑하라!

▣ 참고: 自由와 사랑의 實踐的 화해- 김 현

이 글은 이청준(李淸俊)의 「당신들의 천국(天國)」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소설이 나에게는 근년에 발간된 가장 좋은 소설 중의 하나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소설에 대해서 하나의 평문을 초한다는 것은, 문학 비평가로서의 내가 소설가로서의 그에게 빚지고 있는 상당량의 부채를 갚고 싶다는 의욕의 한 표현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여러 복합적 이유 때문에, 몇 사람의 동세대 작가들이 글을 쓰지 못하고(혹은 글을 안 쓰고)있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정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면, 거의 순교자적인 태도로 작품에 달려들고 잇는 데서 연유하는, 그에 대한 존경심을 나는 어떤 형태로든지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존경심을 나는 이청준에게 뿐만이 아니라, 박 경리(朴景利)의 「토지(土地)」에 대해서도 느끼고 있다. 그 작가들의 제작 태도를 보고 있으면, 상업주의에 어떻게 영합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내 책을 사 줄 독자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에만 신경을 쓰는 듯이 보이는 작가들에게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크게 알려 주고 싶다. 박경리 「토지」는 그러나 아직 완결되지 아니한 작품이다. 거기에 대해서 짤막한 단평(短評) 한두 개로 자제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완결된 작품이고, 그런 의미에서 해석자의 분석을 기다리는 작품이다.

  한 작가가 시대적인 제약에 의해서 그가 드러내 보이고 싶은 작품의 주제를 직선적으로 내보이지 못하고, 그것을 우회적으로,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게 표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 문학사를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그런 우회적 수단을 발견한 작가들은 몇 되지 않는다. 카프 작가들의 예에서 극명히 보듯이, 대체적으로 작가를 억압하는 상황에서 도피해 버린 자신의 태도를 정황의 제약이라는 편리한 이유로 변명해 버리는 것이 통례이다. 일상적인 삶이라는 것을 경멸하는 체하면서도 거기에 안주해 가지고 이렇게 된 것은 정황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정황의 의미를 따지고, 거기에 새로운 축구를 마련하려는 힘든 노력을, 자신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일로 뒤바꾸는 정신적 곡예 ! 거기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문학이라는 것이 이런 어려운 시대에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라는 문학 포기론으로 귀착한다. 문학이라는 것이 별것인가. 중요한 것은 살아 남는 일이다.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야말로 문학을 매명의 도구로 만들고 문학을 문학에서 소외시키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을 자신의 생존 욕망 속에만 갇혀 있는 포유 동물과 구별하게 만드는 변별적(辨別的) 장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살아 남는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그것을 제약하는 상황 그 자체의 기호가 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인간만이 가진 장치이다. 문학이 없어지는 날, 감히 말하거니와, 인간다운 삶도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문학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가장 강렬한 응답인 것이다. 내가 박경리나 이청준에게 존경심을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포유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변별적 장치로서의 문학의 쓰임새를 그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깨닫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복합적 시선의 소산이다. 그의 상당수의 소설이 취하고 있는 격자 소설적(格子小說的) 양식을 그것은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격자 소설의 기본 구조인 복합적 시선,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는 격자 소설적 시선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그의 격자 소설이 시간적으로 고정된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는 것이라면, 「당신들의 천국」은 시간적인 변모를 감수하는 한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표면적인 개요만을 따라가자면, 그곳의 나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기 위해 애를 쓰는 얘기이다. 그 얘기는 3부로 나뉘어져 서술된다. 1부는 현역 대령인 조백헌이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곳 환자들에게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 주기 위해 득량만 매몰 공사에 착수하여,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21개월 동안의 나환자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으며, 2부는 매립 공사를 둘러싼 9개월간의 조 원장의 정신적 방황을 그리고, 소설의 대단원을 이루게 될 3부는 조 원장이 섬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후의 삼월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소록도에 되돌아와 2년 후 사월달에 미감아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는 것을 그리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의 표면상의 주인공은 그러니까 조백헌이다. 조백헌과 맞서는 인상적인 인물이 2부에서 크게 제시되는 황 장로이다. 표면적인 구조만으로는 「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이라는 야심 많고 정열적인 한 인물의 무용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그 조백헌의 단순한 제시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복합적 비판에 있다. 그 비판을 가능케 하는 인물이 이상욱과 이정태이다. 1부와 2부의 기술은 조백헌에 관한 한, 이상욱의 시선에 의지해 있다. 그의 시선은 조백헌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록도에 천국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그가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과시욕을 충족시키자는 것이 아닌가. 그 이상욱의 비판적 시선은 「당신들의 천국」의 1부를 단순한 기인의 기행 기록이 아니라, 비판되어야 할 권력인의 힘의 과시 기록으로 느껴지게 한다. 2부에서도 기술은 이상욱의 시선에 의지해 있지만, 2부의 특성은 이상욱의 조백헌 비판이 나환자 비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백헌과 황장로로 대표되는 나환자에게도 비판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한 증거이다. 3부의 서술은 이정태의 시선에 의거해 있다. 신문 기자라는 직업 때문이겠지만, 그의 시선은 이상욱처럼 본질적인(급진적인) 비판적 시선이 아닌, 사태를 마무리짓고, 의심나는 점을 조백헌으로 하여금 해명시키는, 종합적인 해결적 시선이다. 조 원장이 복합적 시선의 포로라는 점에서, 「당신들의 천국」도 격자 소설의 기본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인물이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폭넓게 감싼다는 점에서, 그 소설은 조백헌 개인의 성장을 그린 교양 소설적인 측면을 또한 갖고 있다.

 조백헌은 이 청준의 서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긍정적 인물이다. 그때의 긍정적이라는 말의 뜻은 <자아와 세계(혹은 他人) 사이의 간극이 불화적(不和的)인 것이 아니라 화해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이라는 뜻이다. 조백헌은 자아와 세계가 한 치의 간극도 없이 합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의 그러한 신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해 작가는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고 있다. 소설 속에서의 그의 삶은 정확하게 그가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한 8월 하순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신념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세계와 자아 사이의 합일을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는 「당신들의 천국」의 여기저기에서 찾아 낼 수 있다. 3부의 마지막에 나오는 조 원장의 <흙과 돌멩이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이어져야 합니다>라는 경구적 진술은 그의 화해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그 긍정적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을 표현하는 데에 그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를 내놓는다. 원생들이 득량만 매몰 공사에 지쳐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의 그의 대답은 이렇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당신들에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자, 오늘 밤 내 한 사람의 피가 진실로 당신들의 피를 아끼는 길이라 믿는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서 이 총으로 나를 쏘시오.> 이 같은 그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단호한 태도이다. 그것이 그를 <만만하게>보지 못하게 하는 큰 요소이다. 그의 그 화해적 인간관은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에서 상당한 수정을 받는다. 인간은 화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과 자유를 소유하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지, 하나는 힘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지배자로서, 하나는 그 힘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로서 둘이 만날 때는 불가능하다는 수정이 그것이다. 그의 천국론은 이상욱과 황 장로에 의해 섬세한 수정을 받는 것이다. 그 수정에 있어서, 황 장로는 굴종의 의미를, 이상욱은 감시와 비판의 의미를, 각각 조백헌에게 알려 준다. 피지배자의 화해적 굴종은 지배자가 <일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지 않을 것임을>, <일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공훈이나 명예도 좇지 않을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우상도 만들지 않을 것임을> 선언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감시와 비판은 그것이 정말로 행해지고 있는가 않는가를 따지는 것이라는 것을, 조백헌은 이상욱과 황장로에게서 배운다. 그때 화해적 굴종은 사랑이 되고 감시와 비판은 자유가 된다. <자유와 사랑의 화해적 결합>을 통해, 조백헌의 개인적 신념은 사회적 신념으로 확산해 간다.

 조백헌이라는 긍정적 인물을 통해 이청준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사회 구조에 관한 근본적, 급진적 문제이다. 그 문제 제시야말로 이청준이 가장 공들이고 있는 것이고, 사실상 이청준의 정치학의 핵심 문제이기도하다. 어떻게 하면 인간 사회는 천국이 될 수 있는가? 권력의 행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점에 대해서 이 청준이 제시하고 있는 주장은 대체로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힘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천국이 다른 인간의 천국과 대립되는 개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힘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유 없는 힘의 행사나, 사랑 없는 행사는 힘의 남용이나,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힘이 아니라는 생각 위에 기초해 있다. 자유 없는 힘은 끊임없는 배반만을, 사랑 없는 힘은 강요된 의무만을 낳을 뿐이다. 자유나 사랑에 기초한 실천적 힘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천국으로 만드는 기본 여건인 것이다. 그는 동시에 자유만 있는 사회, 자유뿐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황 장로의 다음 진술은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자유라는 거 그거 말대로만 된다면 그보다도 더 좋은 것도 없지. 제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가고, 제 살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고, 제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보다 우리 같은 문둥이들에게 더 소망스런 바램이 있겠나. 하지만 원장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언제 한번 그 자유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있었나. 아웅다웅 언제나 싸움질만 되풀이 되어 왔지. 핍박과 원망과 의심의 버릇만을 길들여 왔지.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는 일이야. 자유라는 게 원래가 그런 것이었거든. 자유라는 거 누가 가만 앉아 있어도 우리 문둥이들한테 가져다 바쳐주는 건 아닐 터에, 어차피 그건 제 힘으로 빼앗아 가져야 하는 거 아니던가 이 말씀야. 빼앗아 가지려니 싸움질을 해야하고, 싸움질을 하다 보니 그 사이에 자연 의심과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마련이지.> 황 장로의 의견으로는 자유에 앞서는 사랑이 천국의 기본 여건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사랑으로 행할 때, 사회는 천국스러워진다(그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애매해질 것이다). 자유와 사랑, 아니 자유를 배태하고 있는 사랑의 정치학은 이청준의 그것이 도덕적 정결주의에 기초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베푸는 사랑은 도덕적 결단, 믿음에 기초한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천국이 다른 인간의 천국에 대립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다른 주장은 앞의 주장에서 자연히 도출되는 주장이다. 그룹과 그룹과의 대립 역시 사랑에 의해서 해소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예를 들자면, 문둥이들의 천국은 그것이 밖의 인간의 천국과 대립될 때, 이미 천국이 아니라, 문둥이들의 수용소이다. 대립되어 있을 때에는, 어느 한편을 버릴 수 있는 자유와, 다른 편을 수락하는 사랑이 다같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천국이란 형식만 있을 뿐 선택이 불가능한 천국이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천국이란, <그것의 설계나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행위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이상욱에 의해 표현되는 그 천국은 제도적 천국이 아니라. 변화가 가능한 발전적 천국이다. 이상욱이 대변하고 있는 이청준의 천국―유토피아는 헉슬리나 오웰과 마찬가지로 멋진 신세계도, 닫힌 동물농장도 아니다. 그것은 변모할 수 있는 열린 천국이다. 그 천국에서 나는 이 청준의 열린 개인주의의 흔적을 찾아낸다.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없는 천국은, 그 천국을 버릴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하지 못하는 천국은 이미 천국이 아닌 것이다.

  이청준 정치학의 기본 구조는 도덕적 정결주의에 뿌리를 박은 열린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내세운 신앙의 정치학에 또한 다름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믿음․소망․사랑을 가장 중요한 사람의 요소로 내세운 이론가인 것이다. 그의 개인주의가 사회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에 의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윤해원과 서미연이라는 두 미감아의 결혼이 「당신들의 천국」의 대단원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랑을 전제로 한 미감아들의 결혼은, 열린 개인주의가 사회화하는 제일 좋은 전범(典範)이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을 화해롭게 모으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울타리를 열어 버린다. 그 결혼식에 대한 조백헌의 다음과 같은 축사는 위의 진술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두 분은 기왕에 남다른 사랑과 용기로 이 일을 이룩하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의 방둑을 허물어뜨리지 말고 누구보다도 굳세게 그를 지키고 살찌워 나가 달라는 것입니다. 절벽을 허물어뜨리고 그 절벽 대신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다리가 놓여져야 할 곳은 많습니다. 다리의 이쪽과 저쪽이 한동네 한마을로 섞이고 화목해야 할 자리는 많습니다. 제가 두 분의 신접살림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의 중간에 마련하자고 했던 것도 사실은 그런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을 통해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다리가 놓일 수 있다. 그 관점을 더 밀고 나가면, 이상욱의 회의․불안의 자유주의는 그가 실패한 가정의 아이라는 데서 그 뿌리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힘의 생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조백헌은 1․2부와 3부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1부와 2부에서 힘의 행사자이지만, 3부에서는 힘의 행사자를 보조하는 역할 이상의 것을 맡지 못하고 있다. 1․2부에서 그는 병원장으로서의 막강한 힘을 자유롭게 행사하지만 3부에서는 일개 시민으로서, 새 병원장에서 조언을 하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당신들의 천국」에는 세 사람의 원장 보조수들이 등장한다. 1․2부의 의료부장과 보건과장, 3부의 조백헌이 그렇다. 그리고 그 셋의 성격은 극히 대조적이다. 의료부장 김정일은 피부과 전문의인데, 기능인답게 <말썽이라면 도대체 견디지를>못하는 인간형이다. 그는 무사 안일주의의 한 표본이다. 그러나 자기의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데가>있다. 그는 그러니까 자신의 기능에 갇혀 있다. 보건과장 이상욱은 문제 제기적인 인물이지만, 문제 해결에는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인물이다. 조백헌과의 관계에 있어, 그는 그에게 소록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핵심적으로 제시하나 그 문제의 해결에는 회의적이다. 문제를 제시하여 상대방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그 문제와 관련된 일에서 그는 회의적이고 미온적이다. 소록도 병원에서는 새 원장이 취임해 올 때마다 병원을 탈출하는 환자가 생긴다. 일종의 부임 선물이다. 이상욱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병원장에 대한 원생들의 상징적 배반극이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를 확인시키려는 행동이다. 그 탈출극은 조백헌이 새로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일어난다. 그때 그는 그것을 덮어두려는 의료부장의 제안에 반대하여 원장에게 부임 첫날 그것을 꼭 알리려고 한다. 그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이다. <탈출 사고는 원장이 새로 부임해 올 때마다 환자들 가운데서 잊지 않고 꼭꼭 마련해 바치는 첫 부임 선물이었다. 흐지부지 뭉개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 첫 번 부임 선물을 대하는 원장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제기한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기하려는 원장의 노력에 미온적이다. 이상욱의 입가에 자주 피어오르는 희미한 미소나, 원장의 표정이나 말에 <아예 상관 안> 하려는 태도 등은 그런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힘의 보조자로서의 조백헌은 그의 긍정적인 성격처럼 행동적이다. 그는 이상욱처럼 회의하지 않고 그가 옳다고 생각한 해결책을 원장에게 조언하고 그것의 실천에 애를 쓴다. 그러나 그 실천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언제나 원장의 <양해 밑에서> 일을 추진해야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조백헌의 정치학의 뿌리를 이룰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에 대한 자각이 생각난다. 조백헌은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거기에서 <자유와 사랑을 행사>하려고 민간인으로 소록도로 다시 온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행사자가 아니라 보조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록도에서 자생적으로, 같은 운명을 감수하고 있는 자들의 선택에 의해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유와 사랑에 의거한 힘의 행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장님께서는 결국 원장으로 다시 이 섬에 들어오지 못하셨기 때문에, 원장의 권능으로 섬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그 자유와 사랑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운명을 같이하려는 작정이 있는 다음에는 내게 그 원장의 권능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그 허심탄회한 힘의 질서 속에서 섬의 자유와 사랑이 행해져 나가야만 했었어요. 하지만 난 이미 이 섬 병원의 원장이 아니었어요."

 조백헌에 의하면 <운명은 자생적인> 것이며, 자생적 운명은 자생적인 힘의 행사를 요구하는데, 조백헌이나 새 원장은 그 자생적 운명에 끼어 있지 않은 <자생적 운명>에의 작가의 어투를 빌면, 타생적 끼어듦에 불과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허심탄회한 힘의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진술에서 나는 긍정적 인간의 운명적 실패를 느끼게 된다. 긍정적 인간은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가능한 것으로 상정한다. 그것은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하듯 시(=神話)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산문(=現實)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실패는 운명적인 것이다. 그 운명적 실패는 그러나 그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부단한 암시를 이룬다. 그 암시는 당위성의 강조를 오히려 뜻한다. 이 정태 기자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가 이루어질 때가 과연 올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조백헌의 대답이 그렇다.

 "이 섬에서 과연 그럴 때가 올 수 있을까요? "

 "그럴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섬이 끝끝내 실패만 하고 있지 않으려면 그 때는 결국 와야겠지요. 그게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도 ......"

 조백헌이 힘의 행사자를 돕는 보조자의 위치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끌어내지 못했을 그 결론은 이청준 정치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힘의 행사는 자유와 사랑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동시에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 그 진술은 이 청준이 획일적으로 밖에서 주어지는 천국을 천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에 또한 다름 아니다.

 이청준이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을 이상욱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소설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독자들에게 야릇한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중요한 중․장편소설은 대개 지식인을 그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때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회의나 불안을 통해 그가 비평하고자 하는 사회는 모순을 드러내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순 그 자체가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도 그런 그의 지식인 유형에 꼭 일치되는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이상욱이라는 병원 보건과장이다. 작가는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과 이 정태를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 인물의 과거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 주고 있는데, 이상욱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상욱의 시선에 의해 소설의 1부는 진행되는 것이므로 그의 과거를 작자는 한민이라는 소설 지망생의 습작 소설을 통해 대충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데, 그 습작 소설을 읽는 것은 물론 이상욱 자신이다. 그 과거는 그가 한민에게 암시해 준 것을, 그가 더욱 정확하게 정리한 것이므로, 이상욱에게 있어서 그 습작 소설이란 감추고 싶으면서도 드러내고 싶은 그의 과거의 명백한 노출을 의미한다. 그 자신이 조백헌의 행위를 감시하듯 그의 과거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 감시되고 있음을 그는 깨닫는 것이다. 그의 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신으로 원생이 된 환자들인데 서로 사랑하여 병원에서 금기로 되어있는 아이를 배고 그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는 전 원생의 자유와 사랑의 상징이 되어 비밀리에 자라지만,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일본 식민지 치하의 병원장에게 결사적인 충성심을 보여, 그의 사랑을 숨겨 준 원생들에게 배반감을 안겨 준다. 그 아이는 후에 몰래 육지에 보내지는데, 그 아이는 성장 과정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아이는 성장해서 다시 소록도에 돌아와 환자를 위해 봉사한다. 그 아이가 바로 이상욱이다. 이상욱 자신은 그러니까 한때 원생들에게 자유와 사랑의 상징으로 비친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유와 사랑을 배신한 배신자의 혈육이다. 그의 과거는 영광과 오욕의 덩어리인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 배반자가 식민지 시대의 한 작가를 염두에 두고 작가가 구성한 인물이 아닌가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원생들의 배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원장의 입장에서 환자를 대하지 않기 위해, 그는 부단히 원장의 힘의 행사를 감시하고, 소록도 삶의 구조적 모순을 원장에게 문제로서 제기한다. 그러한 감시 역할에 지칠 때면 그는 황 장로에게서 원생들의 어려운 삶을 확인하고, 자기 아버지의 비극적 말로를 이야기 들음으로써 그 감시를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그 감시는 어디까지나 감시에 지나지 않을 뿐, 그가 원장에게 어떤 의견을 개진하거나,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는 않는다. 협력은 곧 감시의 배반이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 중에서 흥미를 이끄는 것은 그가 언제나 자기를 노려보는 사람들의 까만 눈동자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부모들이 그를 비밀리에 키우기 위해 언제나 방 속에만 그를 가둬놨기 때문에 생겨난 심리적 외상이다. <소년의 첫 번 기억은 그가 자란 방에 관한 것이었다. 방문은 언제나 꼭꼭 걸어 잠겨져 있었다. 소년은 허구한 날 그 문이 잠긴 방에서만 숨어 지냈다. 손가락 하나 문 밖으로 내밀어 본 일이 없었다.〔……〕소년도 결국 그의 어미처럼 사람이 무서웠다.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가 집 문앞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와도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제 겁에 제가 질려 머리끝까지 이불자락을 뒤집어쓰며 숨을 죽이게 되곤 했다. 소년은 그 이불자락까지 뒤집어쓰고도 마음이 놓일 때가 없었다. 어디선가 벌써 자기를 까맣게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때가 많았다.> 문학 작품의 경우 상당수는 방 속에 있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소위 요나 콤플렉스라는 것으로 방 속에 있다는 것은 그때 어머니의 자궁 속과 같이 편안한 곳으로의 도피를 의미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행복스러운 도피이다. 그러나 이상욱의 방 경험은 안락이라든가 행복과 결부되어 있지 아니하고, 죄의식과 결부되어 있어, 인간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방해물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방 속에서까지도 그는 편안하지를 못하고,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방이 편안한 것은 그곳이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을 받지 않는 닫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청준의 방에는 항상 새까만 눈동자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소문의 벽」의 박준을 미치게 만든 전짓불과 같은 상징적 감시자이다. 그 감시자가 있는 한, 방도 편안할 수 없다. 이상욱의 회의와 불안은 바로 그 심리적 외상에 의거하고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니고 생겨난 인물인 것이다. 그 죄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 죄의식이 그의 아버지의 배반과 결부되어 힘과의 결탁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나는 다시 이청준의 도덕적 정결주의를 만나게 된다. 과거에 지은 죄는 비록 그것이 그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씻기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이상욱에게 있어서의 본질적인 죄란 무엇일까? 그것은 힘의 횡포가 빚어낸 규제를 범한 것이 아닌가. 그 규제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깨뜨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배반은 비합법적인 그의 출생을 은폐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는 왜 그의 아버지의 배반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이상욱이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 방 체험 이후에 전연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과 아마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언제나 명료하다. 그는 퇴행에 대해서 본능적인 저항감을 내보인다. 서미연의 사랑을 거절하여 가족주의에의 경사를 막고, 자신의 행동을 가능한 한 의식화하려한다. 소위 의식하는 의식의 병을 앓고 있다고나 할까! 그는 그 자신의 알리바이에만 신경을 쓰는 소시민적 감시자이다. 그 독신주의자의 자기 감시가 혹시 광태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나는 조 원장과 황 장로의 인상깊은 대결의 밤에 외친 그의 절규에서 받게 된다. 황 장로의 이상욱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상욱 과장이란 사람 모든 일을 그 자유로만 행하고 싶어했고, 또 오로지 자유로만 행할 줄은 알았어도 거기서 익혀진 몹쓸 버릇들, 일테면 덮어놓고 남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따위의 심성에 대해서까지는 미처 눈을 뜨지 못했던 게야. 남을 용서할 줄 몰랐지 ……

 이상욱의 경련적인 자기 감시, 그 어느것에도 완전히 편들지 못하는 중립주의(그것은 동양의 중용주의와 완전히 다른, 극단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키려는 중립주의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독선주의는 그 나름의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현상에 만족하여 무의식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하나의 경종을 우리는 각성자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현실 개조 의사가 감추고 있는 영웅주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여 모든 사람을 그곳으로 이끌어 가려는 힘의 행사 속에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는 힘의 횡포를 감시하는 감시자의 기능이다. 그 기능이야말로 사실은 진보적 예술이 맡고 있는 기능 중의 하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현대 예술이 보여 주어야 할 인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 청준이 이상욱을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조백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목을 「당신들의 천국」이라고 붙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당신들의 천국의 당신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때의 당신들은 소록도에 천국을 세우겠다는 의욕을 가진 원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이상욱이 소록도를 탈출하면서 쓴, 조백헌이 오년 후에 받게 된 편지 속에 교묘하게 암시되어 있다. 그 편지에 의하면 조백헌은 <인간의 천국을 지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하고 있다. 섬을 문둥이의 천국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자를 더욱 환자답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원장님의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이나 욕망이 스스로 한정당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하는>것을 뜻한다. 소록도에 진정으로 세워져야 하는 천국은 환자들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 자유와 사랑에 기초한 힘의 행사에 의한 천국이다. 그 천국은 이상욱까지를 포함한 환자들 모두의, 일인칭 복수 우리들의 천국이다. 그러나 그 자생적 운명에 의거하지 아니한, 원장의 윤리에 기초한 천국이란, 환자를 환자답게 만드는 이인칭 복수 당신들의 천국이다. 그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이 조백헌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구성이다. 이상욱이 주인공으로 되었을 때의 「당신들의 천국」의 결말을 나는 환히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서는, 「소문의 벽」에서의 박준의 운명처럼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천국에의 꿈 때문에 광태에 이르르는 한 지식인의 심리적 과정이 처절하게 그려질 것이다. 이 청준은 이미 그 얘기를 썼다. 그는 이제 다른 얘기를 써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고, 그 상황에서 훌륭하게 한 편의 소설을 써냈다. 그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황 장로가 조백헌 앞에서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는 대목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번 이 소설을 다시 읽었지만, 그 대목만은 언제나 그냥 넘기고 싶은 곳이었다. 그의 비문화적인 삶은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내가 나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런 삶을 살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행복하게 살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하게 그의 삶을 영위하는 자는 정말 드물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살게 만들어졌단 말인가? 천국에 대한 환상은 거기에서 싹트며, 거기에서 또한 천국을 그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 원장들의 시도에 대한 배반이 싹트는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뛰어난 소설이다. 이 글을 끝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은 그것뿐이다.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청준의 소설에서는 극히 희귀한,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어 있는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후일담을 술자리에서나마 듣고 싶은 것이다. ▨

▣ 참고: 당신들의 천국의 소설 구조.. 

§. 다층적 이야기 구조가 가지는 힘

이청준의『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에 조백헌 원장이 취임하면서 그가 취하는 '문둥이들을 위한 천국' 건설의 과정과 그 실패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비록 조백헌 원장이 바라는 천국은 조백헌 원장이 그 섬에 있을 때 완성되지 않지만, 그의 노력과 실패를 통해 천국 건설의 가능성이 진지하게 모색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소록도라는 특수한 지역을 설정하여 닫힌 공간에서의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하면서, 종래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열린 공간에서의 천국 건설의 청사진을 위해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세계가 행복한 낙원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지만, 있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천국'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해 과연 천국의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하는 소설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어떤 이야기를 화자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야기감으로서의 내용과 그 이야기감을 전달하는 서술자의 이야기 방식의 이중구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구조:우한용)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의 구조를 더욱 다층적으로 보여 주어, 독자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동시에 주제 의식을 점차 심화시킨다. 이 소설의 여러 서술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백헌 원장이 추구하는 '천국'에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를 보낸다. 조백헌 대령을 관찰하는 Ⅰ부의 이상욱, Ⅱ부의 황장로, Ⅲ부의 이정태의 시선과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의 시선을 통해 조백헌 원장의 행위를 다층적․복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못 비장하기조차 한 '천국 건설'에 대한 조백헌 원장의 맹목적 헌신과 집착에 대해 마지막까지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다중적 시선을 통해 독자들도 이 소설의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게 된다.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천국의 의미와 조건을 회의하게 하는 힘은 여러 층위에 걸친 서술자들의 시선 때문이다.

󰡒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모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 있는 문둥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소록도는 아픈 '동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시대, 원장으로 부임한 주정수는 당시 삶에 패배하고 모인 소록도 주민들의 삶의 의욕을 고취하고 자치회를 만드는 등 마을의 운영 체계를 정비하여 위대한 지도자로 군림한다. 섬 사람은 주정수를 신처럼 우상화하고 마을 가운데 주정수의 동상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리한 섬 일주 도로 건설과 자치회의 변질로 인하여 <우리들의 천국>은 실상 <당신들의 천국>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고, 독재자로 타락한 주정수 원장과 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자치회 위원 이순구는 원생의 칼 아래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 후 그들 앞에 지나간 원장들은 대개가 크고 작은 동상을 세우고자 했고, 그 과정은 원생들의 고통과 희생으로 나타났다. 새로 부임한 원장 조백헌도 오마도 간척사업이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명분이 거창한 만큼, 희생과 고통도 클 것이며, 그에 따른 배신과 실망도 심각할 것이다. 이상욱은 처음부터 소록도의 역사를 되새기며 불신의 시선으로 원장의 진심을 탐색하고자 애쓴다. 조백헌 대령의 천국 건설이 가진 허위성을 경계하며 독자로 하여금 최초로 '우리들의 천국 건설'의 조건을 고민하게 만든다. 즉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 것까지의 절차와 과정에서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권력자의 손에서 이루어진 천국 건설'이란 치자의 헛된 명분의 술책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그 결과는 지난 날 동상의 역사와 다를 바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글세. 믿음으로 행하지 못했다면 사랑으로 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니깐.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지 못했다면 미움과 의심으로 행하고 있었다는 도리밖에 되지 않아 .이상욱이란 사람 그 사람도 결국 모든 것을 그 자유 한 가지로 행하고 그것으로 섬을 나가고 만 사람 아닌가 말씀이야.... 글세 자유로 행함이 이 섬에선 무슨 허물이 되는 줄을 모르겠나. 이 섬에서야말로 자유라는 것보다 더욱더 귀중한 다른 무엇으로 행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게야. 자유보다도 더 귀하고 값진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사랑이거든. 이 섬에선 자유보다도 사랑으로 앞서 행했어야 한다는 말씀이야.... 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로 해서는 자유라는 것 속에 사랑이 깃들이기는 어려웠어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는 함께 행해질 수도 있다는 조짐이 보였거든. "

황장로의 시선을 통해 독자들은 이상욱이 가지고 있는 천국 건설의 조건에서 하나를 덧붙일 수 있다. 천국 건설의 조건으로 자유에 앞서는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미움과 질투로 번질 자유보다 사랑이 더욱 우선적임을, 그리하여 조백헌 대령의 행위가 자유의 시선보다도 자유를 포함한 사랑의 시선에서 더욱 넉넉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자유를 통한 이상욱의 시선이 사랑을 통한 황장로의 시선 속에 포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됨으로써 하나의 시선이 가지는 주제의식에서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절대의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이상욱이 말한 그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데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가 그 천국을 꾸미더라도 그것을 꾸미고 나서 그 천국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되지요. 그리고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섬을 찾아온 것이지요.... 하지만 실패였어요. 나는 원장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이 섬에 들어왔지요. 자유나 사랑의 행함에는 절대로 힘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나 자유의 원리가 바로 힘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을 행해지고 그것들이 이룩해져 나가는 실현성이나 실천성의 근거는 그 힘이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운명이 자생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자생적인 운명의 일부분으로서 선택되어져야 할 힘의 근거가 섬 사람들 자신의 의사에 의해 그 들 가운데서 선택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쉽지 않겠죠. 하지만 믿음의 씨앗과 싹만 있으면 그 믿음 속에서 기다릴 수는 있는 거지요.

다른 시선과는 달리 비교적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보여주는 이정태는 조백헌 원장을 취재하면서 마지막으로 '천국 건설'에서 필요한 조건을 얻어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믿음을 위해 그들은 공동 운명 의식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천적 힘을 통해 천국의 건설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당신들의 천국'이 가지는 신화를 다층적인 시선을 통해 비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들의 천국' 건설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공동 운명→자유→믿음과 사랑→실천적 힘이라는 심층적 주제 의식을 위해 다층적인 시선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시선들은 층위를 이루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서로가 얽히고 묻혀 있어 비록 도식적으로 정리하긴 했으나 그 도식은 소설의 서술 순서 이외의 다른 큰 뜻을 더한다면 주제 의식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듯하다.

▣ 소설 '당신들의 천국' 작가 이청준-실제모델 조창원씨 대담

《이청준(李淸俊·64)씨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문학과지성사)이 최근 100쇄를 넘어섰다. 1976년 첫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30여만부가 판매된 ‘당신들의…’는 나환자촌인 소록도에 부임한 현역 대령 조백헌 병원장의 고뇌와 갈등이 큰 축을 이룬다.조백헌 원장의 실제 모델은 60, 70년대 소록도병원장으로 일했던 현 영남의료재단 복지의료센터 조창원(趙昌源·77) 원장. 소설에서 원장은 순수한 의지와 선의로 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득량만 매립 공사를 추진하지만 환자들의 불신과 외부의 도전, 내면의 번뇌와 뼈저린 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것은 실제 오마도(五馬島) 간척사업에 뛰어 들었던 조창원 원장의 고민이기도 했다.》

소설의 100쇄를 맞아 소설가와 작품의 모델이 최근 서울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조창원=이렇게 단둘이 ‘당신들의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지요? 이 선생에게 늘 감사했는데 그 마음을 이제껏 표현한 적이 없네요.

이청준=제 소설 때문에 피해 본 것부터 말씀하셔야지요. (웃음)

조 원장은 ‘당신들의 천국’으로 인해 간척사업 등 소록도 문제가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게되면서 병원에서 쫓겨나 강원 정선에서 규폐증 환자들을 돌보게 된다. 이후 대전을 거쳐 현재 밀양에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조=오랜만에 이 선생을 만나니 1961년 9월초 소록도병원장으로 처음 부임해 가던 길이 생각나네요. 그 때 환자와 같은 배를 타지 않으려는 직원들에게서 ‘거만’을 봤습니다. 아, 소록도는 ‘죽은 섬’이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이=아예 배가 따로 있었잖아요. 환자들은 노 젓는 배를 써야 했지요.

조=그랬지요. 이들에게 인권과 자유를 찾아주면 새 삶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집과 사회, 국가에서 버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마도 간척사업을 구상한 것이지요.

이=원장님이 주도하신 간척사업은 환자들에게 고향을, ‘새 땅’을 만들어주자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지인들과 마찰을 빚고, 정치적인 문제가 얽히면서 나중에 사단이 생기고 말았지요.

조=소록도를 ‘죽음의 섬’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이 선생이었어요. 진실하게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다면 10만 나환자를 살리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1974년 제가 소록도를 찾았을 때, 원장님께서 저를 무섭게 시험하셨지요? 원장님께서 소설을 쓰려면 환자들과 한두 달은 같이 지내야 된다고 하셨는데, 결국 깎고 깎아서 이틀만에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하루종일 원장님과 정종을 몇 병이나 마셨던지요.

조=처음 봤을 때 이 선생 인상이 참 차분했어요. 내 이야기를 잘 경청해줬지요. 이 선생이 그랬지요. ‘소설이니 사실과 허실이 있을 거다. 그러나 그 차이는 독자가 받아들여야 할 몫이다’. 소설은 100년, 1000년 갈지 모르니 사실 겁이 나더라고요.

이=원장님께서 당시 정치적으로 몰려 있던 상황이어서 ‘소설에서 안 좋게 그려지면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겠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보름 후에 구속이 되셨어요. ‘신동아’에 소설을 연재하는 중에 사모님과 따님의 전화도 받았습니다. 재판 등 현실적인 문제가 소설과 걸려 있어서 참 어렵게 썼던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소설 속 모델을 만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 삶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으면 모르지만, 피해를 드렸다는 생각에….

조=허허. 나는 소설 덕분에 소록도와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두터운 매듭을 이어 왔어요.

이=모델이 있는 소설은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그러나 소록도와 원장님이 아직 살아 있고,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원장님께서 소설의 2부를 삶으로 쓰고 계신 겁니다. 2부가 1부에 활력을 주는 것이지요. 소설 출간 이후 27년이 지났지만 독자들이 꾸준히 찾아 주는 것은 원장님 때문입니다.

조이영 기자.  동아일보 : 2003. 03. 03.

▣ 모의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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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부분 줄거리>

 1960년대를 배경으로 소록도의 나환자촌에 전직 군의관 출신인 조백헌 대령이 병원장으로 부임해 온다. 그러나 부임 첫날부터 원생의 탈출 사고가 일어나면서 조 원장은 섬에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이후 조원장은 불신과 패배감에 젖어 있는 섬을 바꿔 놓기 위해 군인 특유의 저돌성과 끈기로 난관을 돌파하지만, 소록도 환자들은 냉담하다. 이제껏 역대 원장들이 자신들의 명예와 과시욕을 위해 원생들을 혹사시키며 배반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건과장 이상욱은 조 원장이 그의 ㉠ 동상(銅像)을 건립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경계한다. 결국 조 원장에게 감화된 원생들은 자연과 인간의 싸움인 간척 사업에 동참한다. 그러나 간척 사업이 난관에 봉착하자 당국은 간척장을 인수하면서 조 원장을 다른 병원으로 전임 발령을 낸다. 조 원장의 전임 발령을 취소하라는 청원 서명 운동을 벌이는 소록도 원생들. 하지만 이상욱은 원장을 찾아와 서명 운동을 중단시킬 것과 사업의 완성 여부에 상관없이 섬을 떠날 것을 충고한다. 조 원장은 간척 사업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소록도를 떠난다. 그리고 5년 후, 민간인의 신분으로 섬에 돌아와 정착한 조 원장은 음성 병력자와 건강인의 결혼식을 취재하러 온 이정태 기자에게 예전에 이상욱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준다.

이 섬에 삶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자로서의 남다른 처지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생존 조건들을 두 겹으로 동시에 살아 나가고 있는 셈이며, <환자>로서의 특수한 처지를 지나치게 강요당할 때, 이들은 오히려 그 환자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인간을 향한 지각과 모험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환자로서 두려운 섬을 쫓겨 나가는 추방의 길이 아니라, 섬의 지배자들이 저들에게 버릇 들여 온 공포를 박차고 자신의 선택과 용기에 의지한 희망찬 인간에의 모험을 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고 보면 그 동기야 어느 쪽에 있었든, 그리고 그 무모한 기도들이 성공을 거두었든 실패했든, 이 섬 사람들의 탈출극은 이를테면 섬에 못박힌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보려는 치열하고도 눈물겨운 몸부림의 표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지배자가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강요해 온 그 뜻없는 천국에의 통쾌한 배반이었습니다. 체념과 복종 속에서 무기력하게 <주님의 날>만을 기다려야 하는 그 종신의 천국에서 한 번만이라도 자기 운명의 짐을 스스로 짊어져 보려는 갸륵한 모험이었습니다.

 탈출은 생명을 받고 살아 있는 자의 마지막 자기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섬이 아직도 슬픈 유령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섬일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탈출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이 섬은 아직도 숨을 쉬는 인간들의 그것으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탈출은 이 섬에 관한 한 그처럼 지고한 미덕이었습니다.

 한데 원장님이 오신 후로, 이제 마침내 탈출극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고 그 탈출 사고가 자취를 감추어버린 후로 이 섬은 어떻게 되어 갔습니까.

 원장님께선 물론 이 섬엔 뛰어넘어야 할 철조망조차 없는, 진짜 낙토가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오셨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이 섬이 부질없는 탈출극의 악몽에서 깨어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해 일하고 있는 모범적인 요양소로 변해가는 증거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고 싶으시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탈출자가 생겨나지 않은 이유가 정말로 뛰어넘을 철조망이 없기 때문이며, 탈출자가 자치를 감추게 되어 버린 뒤로 섬은 정말로 소망스런 낙토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그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원장님의 신념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섬에선 아직도 철조망이 완전히 걷히질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장님 이전이 모든 분들이 그랬듯이 원장님께서도 이 섬을 오신 후로 변함없는 주문을 한 가지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이 섬 원생들 모두들 보다 더 환자다운 환자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장님께서는 원장님 이전의 누구보다도 원장님 자신의 소망을 완벽하게 이룩해 내셨습니다.

 원생들은 참으로 환자다운 환자가 되어 갔습니다. 아무도 함부로 섬을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원장님께선 다른 분들처럼 덮어놓고 협박만 하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으로 원생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섬을 꾸미게 하고 그 곳에 남아 사는 데 불만이 없을 만큼 각별한 긍지를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환자다운 긍지를 심어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조망을 둘러쳐 놓고 덮어놓고 겁만 먹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생들 스스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을 높여 가게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원생들은 참으로 환자다운 환자가 되어 갈수록, 그리고 그들의 천국이 자랑스러워지면 자랑스러워질수록 아무도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 울타리보다는 더 높고 안전한 울타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원장님께서 이 섬 위에 세우고 계신 천국이란 어떤 것입니까. 환자다운 환자들에게만 천국일 수 있는 천국, 환자로서의 불행을 스스로 수락하는 체념 위에서라야 비로소 천국일 수 있는 천국, 오직 그런 뜻의 천국일 뿐이었습니다.

 원장님의 천국이 섬사람들에게도 천국일 수 있는 것은 원장님의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이나 욕망이 스스로 한정당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뿐이었습니다.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일이 짐승에게 씌워진 굴레처럼 다스림이 편해질 때 다스림을 받는 것도 편해지는 이치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하루빨리 섬사람들은 탈출을 잊고 원장님의 천국에 익숙해져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원장님, 그러나 이제 탈출이 끊어진 섬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이 섬은 이제 생명의 증거를 잃어버린 죽음의 섬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원장님께서 섬 위에 이룩하시고자 하신 천국이 가까워 오면 올수록 이 섬은 그 원장님의 단 하나의 명분에 일사불란하게 묶여 버린 얼굴 있는 유령 집단의 섬이 되었을 뿐입니다. 하여 점점 더 다스리기가 쉬운, 그러나 개개인의 삶을 찾을 수 없는 생기 없는 유령들의 섬이 되어 갈 뿐입니다. 그리고 아마 원하기만 하신다면 원장님께서는 끝끝내 이 섬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원장님께서 지금까지 늘 그래 오셨듯이, 앞으로도 원장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섬사람들을 설득하고 조정해 나가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닐 터이기 때문입니다.

(나) 전 결국 이 몇 년 동안 원장님과 원생들의 관계에서 한 선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사이의 어떤 대등한 상호 지배 질서, 만인 공유의 화창한 지배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지배자가 어떤 불변의 절대 상황 속에 갇힌 다수의 인간 집단을 얼마나 손쉽게, 그리고 어느 단계까지 저항 없는 조작을 행해 갈 수 있는가 하는 슬픈 지배술의 시범을 보아 왔던 셈입니다. 그 지배자가 최초에는 아무리 성실한 인간성과 선의의 명분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갇혀진 인간의 무리가 아무리 그들의 지배자를 바로 경계한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다 함께 그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에 대한 깊은 각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다스리는 자는 결국 그의 무리를 일방적으로 조작해 나가게 마련이며,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 또한 다스리는 자의 뜻을 재빨리 수락하고 그것에 봉사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울타리가 둘러처져 있는 한 원장님께서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조작이 가능하십니다. 그리고 원장님께선 결국 이 섬 위에 ㉡ 원장님의 천국을 완성해 놓으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아마도 그것은 이 섬 원생들이 즐겨 누리게 될 천국이기에 앞서 그것을 이루어 내실 원장님 한 분의 획기적이고 생기 없는 천국이 될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원생들은 자기 천국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받들고 복종하는 그 천국의 종으로서 괴로운 봉사만을 강요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장님 - 그러므로 전 이제 원장님께 이 긴 글을 드리게 된 마지막 동기를 말씀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원장님, 원장님께선 굳이 이 섬 위에 일사불란한 그 원장님의 천국을 완성해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천국을 완성해 내시고서야 섬을 떠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중략) 원장님의 천국은 이룩되어질 수도 없는 것이며, 이룩되어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원장님으로 인해 원생들의 그 오마도 농장을 이룩해 나간다 해도 그 역시 출소록의 길이 아니라 또 하나의 더욱더 완벽하고 안심스런 저들의 ㉢ 울타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떳떳하게 섬을 나가 주십시오. 원장님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이미 원장님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원장님께선 ㉣ 저들의 천국을 원하신다면, 이 섬의 진정한 주인이어야 할 저들에게도 그들 스스로 자기들을 시험해 볼 기회를 주십시오.

 이 섬은 원장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원장님만이 이 섬을 위하고 원장님에게서만이 진실로 그 천국이 가능하며 원장님만이 오직 선이라는 그 오만스런 독선이야말로 오히려 이 섬을 사람의 천국이 아닌 추악한 문둥이들의 수용소로 만들어 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원장님은 결국 이 섬이나 섬의 환자들과는 운명을 서로 섞을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다) “참으로 지독한 공박이군요.”

상욱의 글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청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이정태가 이윽고 조 원장을 건너다보며 입을 떼기 시작했다.

“전 도대체 원장님이 이렇게까지 심한 공박을 당해야 할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군요. 그 상욱이란 사람 자신도 자기의 글 속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이 섬에선 모든 일이 무엇 때문에 꼭 이런 식으로만 행해지고 이런 식으로만 이해되어 와야 했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입니다.”

 조백헌 원장은 이제 이정태를 기다리면서 혼자서 마신 술로 얼굴이 벌겋게 익어 올라 있었다. 그 조 원장이 이번에는 이정태에게도 비로소 술 한 잔 가득 채워 건네면서 의미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중략) 그 허심탄회하고 끈질긴 미소 속에 조원장은 그러나 실패를 거듭한 사람답게 필사적인 자제력이 담긴 목소리로 자신의 각오를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야 물론 기다려야지요. 운명을 합하는 일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렵다하더라도 난 그것으로 일단 섬사람들의 ㉤믿음의 씨앗만은 구할 수가 있었으니까요. 이제 다시 섬을 떠남으로써 모처럼 움터오른 그 믿음의 싹을 짓밟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어요. 믿음의 씨앗과 싹만 있으면 그 믿음 속에서 기다릴 수는 있는 거지요. 그것이 처음에는 아무리 작고 더디고 약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서 그 공동 운명의 튼튼한 가교로 이어질 때를 기다리면서...... 그것으로 우리가 이 섬 위에서 비로소 무엇을 이룩해 낼 수 있을 때가...... 아무리 오랜 세월을 기다리게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야요. 믿음은 이 섬에 관한 한 모든 것의 시작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닙니까.”

 “아, 그야 물론 무작정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지요. 그 믿음의 싹만 있으면 이 섬에선 지금부터라도 뭔가 할 일이 있지요. 믿음 속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 없는 일이라도 우린 거기서부터 하나하나 힘을 모아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지요. 그게 바로 믿음을 넓혀 나가는 일일뿐더러 이 섬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그 눈에 뜨이지 않는 작은 일이란 이를테면 우선 한 건강인 여자와 병력자 사내의 결합 같은 거라고 할까요.”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말씀입니까?”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합은 무엇보다도 한 건강인과 원생 사이의 첫 번 결합이라는 점에서 이 섬이 있어 온 후로 그 건강인과 원생들 사이를 이어 주는 가장 분명한 신뢰감의 확인이며, 그것의 첫 출발이 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난 이번에 이 일에 발을 벗고 나섰던 겁니다. 섬에선 뭔가 다시 시작을 해야 하고 지금서부터라도 그것은 가능할 수가 있는 일이며,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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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글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소록도라는 특수한 상황에 빗대어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② (나)는 호흡이 긴 문장을 구사하여 작품에 관념적 성격을 더해 준다.

③ (다)는 대화의 방식을 활용하여 인물의 인식과 태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④ 조 원장은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태도와 성격이 발전하는 입체적 인물이다.

⑤ 편지글 형식의 액자 소설로서 서술 시점을 바꿔 대상을 보는 태도에 변화를 분다.

⇒ ⑤ (나)는 외화와 내화를 갖춘 액자식 구성이 아니라, 이상욱이 조원장에게 보낸 편지글을 삽입할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편지글의 발신인인 이상욱이 서술하고 있는 것이지 시점을 이동한 것은 아니다. <당신들의 천국>은 전체적으로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2. 위 글의 등장 인물들이 대화를 나눈다고 할 때,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이상욱 : 원장님은 나병 환자도 아니고, 외부에서 파견된 관리자이므로 언젠가는 이 섬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 원장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② 조 원장 : 천국을 명분 삼아 자신의 동상을 만드는 지배자에 대한 자네의 집요한 감시 덕분에 나도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깨달은 것이 많다네.

③ 이정태 : 하지만 원장님의 선의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이상욱 과장의 태도는 문제가 있네요;. 원장님은 초지일관 자신이 생각하는 천국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으셨으니까요.

④ 조 원장 :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제 나는 이 섬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되었다네. 특히 건강인과 원생의 결혼은 분명한 신뢰감의 확인이기에 그 일에 앞장섰던 것이지.

⑤ 이상욱 :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상에 대한 유혹을 지니고 있기에 저는 원장님을 감시했던 것입니다. 참된 천국은 지배자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진정한 주인이 되어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요.

⇒ ③ 이정태는 조 원장의 인식과 태도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

3. <보기>는 ‘조 원장’의 실제 인물인 ‘조창원 원장’에게 보낸 작가의 편지글의 일부이다. 이를 참조하여 위 글의 주제를 파악할 때, 가장 적절한 것은?

<보기>

(원장님께선 책 끝에 간절히 소망하신 바와는 반대로, 세상은 갈수록 정치 만능의 힘 겨루기 판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의 삶은 아직도 실천적 자유 실현 과정으로서 음지의 봉사보다 지배적 힘을 향한 선택을 일삼는 경향입니다. 게다가 오늘의 어려움이 그 개발 독재 체제기의 상당한 경제적 성취를 떠올리고 그에 대한 관용과 아량을 낳게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작금의 우리 현상은 그 시절에 대한 경계는커녕 새로운 향수와 긍정적 평가의 복고 분위기가 일고 있는 한편, 실제로도 새로운 힘의 질서를 구축해가는 현실 아닙니까.

 허기야 역사는 늘 되풀이되는 것이라니까요. 하지만 되풀이되는 역사는 바람직스럽지 못했던 쪽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반성과 경계의 쪽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그 60년대 제복 정치 시대의 전횡 또한 계속적인 반성과 경계가 필요하고, 그 알레고리로서의 섬의 현실과 원장님의 소설적 역할, ‘당신들의 천국’ 또한 여전히 끝나지 않은 현실의 화두가 되어야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가 그 화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원장님께선 늘 우람한 거인으로 우리 앞에 오래도록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1998년 11월 25일  이청준 삼가

※ 알레고리(allegory) : 어떤 한 주제를 말하기 위하여 다른 주제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가 됨. )

① 다혜 : 순교자적인 사랑과 봉사가 무엇보다 필요함을 말하려는 거야.

② 혜진 : 민중들의 단결과 투쟁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거야.

③ 소연 : 지도자들의 고결한 도덕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④ 혜림 : 반성과 경계보다는 아량과 관용이 중요한 덕목임을 역설하려는 것이지.

⑤ 청민 : 정치적 힘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공동 운명체를 이룩해야 한다는 거야.

⇒ ⑤

4. (나)에 드러난 ‘이상욱’의 말하기 방식으로 적절한 것은?

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다.

② 상대방의 의도를 확대 해석하여 침소봉대(針小棒大)하고 있다.

③ 상대방을 추켜세우다가 깍아내리는 억양법을 사용하고 있다.

④ 상대방의 정서에 기대어 자신의 생각을 완곡하게 전달하고 있다.

⑤ 상대방을 설득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직설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 ⑤ (떳떳하게 섬을 나가 주십시오. 원장님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이미 원장님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5. ㉠~㉤의 문맥적 의미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 통치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로서 권력의 상징물

② ㉡ : 통치자의 뜻에 순응하도록 인간 집단을 조작하여 길들이는 곳

③ ㉢ :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삶의 경계선

④ ㉣ : 주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

⑤ ㉤ : 공동 운명체가 됨으로써 조 원장이 얻게 된 주민들의 신뢰감

 ⇒ ③ ‘울타리’ : 나병 환자들을 외부 세계와 구획하는 경계선으로서, 섬사람들의 생각과 욕망을 제한하면서 그들이 현실에 순응하도록 길들이는 구역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