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지난 20일 오후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했다. 이튿날 새벽부터는 이내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하늘도 이랬다고 한다. 일명 '우순경 사건'으로 불리는, 1982년 4월 26일 의령군 궁류면 총기난동 사건 당일도 이렇게 봄비가 왔다.

궁류지서에 근무하던 당시 27세의 우범곤 순경은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과 수류탄을 닥치는 대로 난사해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사망자 56명, 부상자 35명. 요즘으로 치면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의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2007년·사망 32명)이나 노르웨이 극우테러주의자 브레이비크의 지난해 77명 살해 사건과 비견될 만하다. 4월 26일은 우 순경 사건이 일어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다.

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우순경 사건 직후 발행된 <경향신문> 1982년 4월 27일자 1면. 가운데 범인 우범곤 순경(작은 사각형 안)의 얼굴이 보인다.

취재진은 우 순경의 '광기'가 가장 극에 달했던 현장으로 향했다. 토곡리 궁류지서 앞에서 살인을 시작해 근방 2km 일대를 휘저은 우 순경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평촌리 한 곳에서만 모두 28명을 죽였다.

현장 근처에 살고 있는 정계현(74) 씨가 "문씨네 상갓집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을 죽인 뒤 여기서 우 순경이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했다"며 과거 가옥이 있던 위치를 가리킨다. 다 쓰러져가는 대문과 돌담만 달랑 남은 '공터'의 한 구석이었다. 그 바로 옆 하얀 집은 12명이 몰살당한 상갓집이 있던 자리였다.

정계현 씨는 "마침 남편이 다리가 아파, 우리는 상갓집 갔다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들도 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며 "총 소리가 들렸지만 별 일 아니라 생각했다"며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정 씨의 증언이 이어지던 중, 갑자기 사방에서 호통과 원망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그만 하고 이제 가소!" 정 씨의 다른 가족은 그날 사건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은 듯했다. 물론 취재진의 관심도 반갑지 않았다. 기자는 "죄송합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연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우 순경은 평촌리로 향하기 직전 800여 m 떨어진 운계리 궁류시장에서 18명을 사살했다.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50대 주부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듬해(1983년) 여기로 시집을 왔는데, 마을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좋은 일도 아닌데 누가 그날 일을 흔쾌히 이야기하고 싶겠느냐"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우 순경 사건은 한 미치광이가 '세상과 사람들에 불만을 품고 홧김에 저지른',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것인 듯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비석이나 위령탑을 세우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건으로 외할아버지를 잃은 성준후(45) 씨는 "우 순경이 청와대(서울시경)에서 근무하다 이곳으로 좌천돼 불만이 많았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당시 주요 언론은 우 순경을 주벽이 심하고 난폭한 '성격파탄자'로 묘사했다. 궁류지서 발령 역시 이와 관련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미리 상황을 알려준 방위병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김송포(70) 씨는 "그날 애인과 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그게 우 순경을 화나게 했다"고 말했다. 함께 있던 한 노인은 언론보도를 떠올리며 "파리 한 마리 때문에"라는 말도 했다.

우 순경의 애인이었던 전말순(당시 25세·사망) 씨는 죽기 전 "낮잠을 자던 중 (우 순경) 몸에 붙은 파리를 잡아주기 위해 내가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자 벌떡 일어나며 화를 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우 순경과 말다툼을 했고, 결국 술까지 먹고 폭행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당시 사건을 '이해'하는 건 누가 봐도 무리가 많다. 음주 습관이나 성격, 인사 불만 따위가 56명 살해의 동기라면 우리 사회는 날마다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론이 여기에 더해 주목한 건, 경찰 임용·인사시스템과 처우 문제, 무기 관리체계, 그리고 현대 산업사회의 인명경시 풍조 등이었다. 한 철학자는 <경향신문> 82년 4월 28일 자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기술이 지배하는 산업사회에서는 비인간화와 인간소외에 의해서 인간이 심리적 정신적인 갈등과 질환에 걸리기 쉽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조화로운 인간적 사회운영이 정신적 건강의 필수조건임을 분명히 알고 그러한 사회 실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왠지 익숙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유사한 사건이 터지면 으레 나오는 소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앞서 조승희 사건을 비롯해,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2004년·사망 21명), 경기도 연천 GP 총기난사 사건(2005년·8명) 등 매번 '인간소외'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30년 전, 아니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공론화되었음에도 현재도 전혀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더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 걸까.

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평촌리에 사는 정계현 할머니가 우 순경이 폭사한 현장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하얀 집이 12명이 몰살당한 상갓집이 있던 자리다. /박일호 기자

평촌리 한 집에서 폭사한 우범곤 순경의 시신은 원래 이 지역에 묻으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근처 칠곡면의 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우 순경 장례는 부산에 살던 동생과 궁류지서 경찰 몇 명만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쓸쓸히 치러졌다는 후문이다.

한데 운계리 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우 순경의 시신은 얼마 안가 칠곡면 주민들의 반발로 다시 파헤쳐졌고 모처에서 화장된 뒤 뿌려졌다고 한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린 것으로 보아 이미 자신의 최종 운명을 직감했던 우 순경은 죽어서도 그 처지가 결코 순탄치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 과연 그에겐 '죄책감'이라는 게 떠올랐을까? 우 순경 사건과 같은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고 내일도 또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시대를 함께 '살아내고' 있다.

이번 추모공원과 위령입 건립은 오태완 의령군수가 지난해 12월 중순 김부겸 국무총리로부터 우순경 사건 추모공원 건립비 10억원 지원을 약속 받으면서 급물살을 탔다. 김총리가 약속한 10억원은 금명간 행정안전부에서 특별교부세 형태로 지원된다. 군은 특별교부세 10억원이 지원되면 군비 3억원과 도비 2억원을 요청해 총 15억원으로 추모공원 조성과 위령비 건립을 추진한다.

군은 정부 예산이 확보되면 유족 대표와 마을 주민 대표, 군청 관계자 등 20여명으로 추모공원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한다.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 참사가 발생한 토곡, 압곡, 운계, 평촌 등 4개 마을 중 한 곳을 정해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공원 내에 위령비를 내년 연말까지 준공할 계획이다. 추진위원회는 위령비 디자인을 전국 단위로 공모한다.

추모공원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숨진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의 마음을 치유하는 한편 아픈 역사를 모두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

우순경 사건은 1982년 4월 26일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순경 우범곤이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과 수류탄을 난사해 주민 62명이 숨지고 33명이 다친 사건이다. 우 순경은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되며 단시간 최다 살인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지만, 발생 일주일 후 사실상 언론보도에서 사라졌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보도 통제가 되면서 제대로 된 추모행사 한번 열리지 못했다.

1982년 4월 경남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순경 우범곤이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과 수류탄을 난사했다. 26일 밤 9시 40분 시작된 범행은 이튿날 새벽 5시 35분까지, 우범곤이 자폭할 때까지 8시간 동안 이어졌다. 주민 62명이 숨졌다.

동영상영역 시작

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동영상 시작

동영상영역 끝

동영상설명 동영상 고정 취소

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용의자 진압 포기하고, 현장에 숨어 있던 경찰들

사건 사흘 뒤 합동조사반은 최재윤 의령경찰서장 등 경찰관 3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는 경찰서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4급지’에 속했다.


당시 최 서장은 근무지를 이탈해 부산에 있었다. 최 서장은 우범곤의 첫 범행이 시작되고 3시간여가 지난 다음 날 새벽 1시 20분 의령군 궁류면에 도착했고, 곧바로 범행 현장으로 가 용의자를 진압하지 않았다. 범행이 끝날 때까지 약 4시간 동안 궁류지서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주민들을 대피시킬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허창순 궁류지서장 등 2명도 근무지를 이탈했다. 한 건설업체가 제공한 부곡온천을 관광하다 당일 밤 10시쯤 현장에 도착했다. 조사반은 이들 역시 현장에서 용의자 우범곤의 추적을 포기하고, 달아난 사실을 확인했다.

■“총기 난사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죽음”

유가족들은 이 참사를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라고 주장해 왔다. 용의자 우범곤이 경찰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8시간의 참극이 벌어지는 동안 경찰들은 범행 현장에 은신했고, 위험에 빠진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구호하지 않았다.

허술한 국가 공권력은 자질 검증도 없이 경찰을 채용했고, 만취한 순경은 아무런 제지 없이 무기고를 드나들며 자신이 보호해야 할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눴다.

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하루아침에 부모와 형제, 자식을 잃은 사람들. 마을은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다.


■수만 번을 자책해도 돌이킬 수 없는 아들의 죽음

87살 전병태 씨는 사건 당시 진주 경상대학교에 다니던 19살 아들 전달배 씨를 잃었다. 육촌 누나 결혼식이 있으니 심부름을 도우라며 아들을 타지에서 고향으로 불러 들였다. 그날 총소리에 놀란 아들은 가족들의 안위를 살피러 공부방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의령 총기 난사 사건 - uilyeong chong-gi nansa sageon
1982년 의령군 궁류면 우범곤 총기난사 참사 당시 19살 아들을 잃은 87살 전병태 씨


꽃다운 청춘, 황망한 아들의 죽음을 위로할 비석 하나 세우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공포 정치를 안했습니까. 전두환 때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느 누가 공권력에 의해서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위령비 소리를 끄집어 낼 겁니까. 쥐도새도 모르게 안기부에 끌려가고서 죽을랑가. 보안사, 안기부, 군청 내무과, 경찰서 정보과가 쫙 누비고 있는데 입 밖에 내지도 못했어요. ”

■가슴 떨리는 군수와의 만남은 허무하게 끝나고....

전병태 씨가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건 2017년부터였다. ‘촛불 혁명’을 거쳐 새 정권이 탄생하는 걸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구나 실감했다. 이듬해 전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령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그해 7월에는 KBS <속보이는 TV 인사이드>에서 우범곤 총기 난사사건이 재조명되었다. 전 씨는 의령군청 부속실에 전화했다. “오늘 KBS에서 우범곤 사건을 다룬다고 하니, 군수님과 사모님까지 꼭 시청하시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고대했던 2018년 당시 이선두 의령군수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군수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을 차 올라가면서 고마 가슴이 덜덜덜 떨려. 얼굴에 홍조가 생기고 이러는기라. 그런데 내가 말이지. 군수님. 그 방송을 봤습니까? 하니까 안 봤다 카는기라. 내 가슴이 어떻겠습니까? 툭 떨어지지. 군수님. 우리가 위령비를 (화려하게) 잘 세워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2억이 뭐 크다 하면 크지만 그냥 양지 바른 곳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거니 여론을 들어보겠습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40주기가 다 되어가는데 “여건이 성숙되면”?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의령군은 물론 경상남도에도 등기로 수차례 민원을 넣었다. 혹시나 몰라 3천여 명으로부터 동의서까지 받아 두었다. 하지만 번번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경상남도 (2018. 10)
“위령비 건립이 유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고, 지역 내에서도 공감대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면 재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령군 (2018. 10)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여건이 성숙되면 적극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상남도 (2019. 3)
“민감한 사항으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의견 수렴, 갈등 요인 해결 등 여건이 성숙되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령군 (2019. 3)
“슬픈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정서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성숙돼지 않은 채로 건립이 추진될 경우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편지를 쓰고 전화도 했다. ‘힘 있는’ 인사를 다 찾아다녔다. 모 지역구 국회의원을 만나서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전화 한 통만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두가 안타깝고 공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뜻 힘을 보태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40년 만에 건립되는 위령비 “아픈 역사를 되돌아 보는 공간”

참사 40주기를 맞는 올해 4월, 경남 의령군은 위령비와 추모공원을 건립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위령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지 4년 만이다. 2021년 11월 국민청원이 잇따르면서 그 해 연말 정부가 국비 지원을 약속했다. 전체 사업비 15억 원 규모 추모공원은 내년 완공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