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살인사건 가해자 근황 - konkeuliteu sal-insageon gahaeja geunhwang

준코의 위장에선 지네와 바퀴벌레, 소변, 그리고 기도와 식도까지 차올라 기도를 막아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정액 등이 발견됐다. 정액은 도대체 몇 명의 것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많았으며, 인간이 아닌 동물의 정액도 검출되었다. 성기에는 비타민 음료 병 2개가 꽂혀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위장, 그러니까 뱃속과 성기와 항문에서 발견된 게 맞다. 준코의 몸 아래쪽에 있는 장기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대장에 큰 화상을 입었고, 그 외의 기관들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준 짱, 어서오세요.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팠죠? 괴로웠죠? 아무것도 모르고 생활했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언제나 온화하고 밝았던 준 짱. 문화제 때 모두와 만든 핫피(일본전통축제의상)는 정말 잘 어울렸었죠.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저희는 준 짱의 죽음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없어진 평화로운 날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인이 된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또 괴로운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준 짱을 생각하며 힘내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졸업장을 들고 와주셨다고 하네요. 이로써 3학년 8반 47명은 전원 졸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준 짱… 이제 고통도 괴로움도 없어요. 편히 잠드세요. 잘 가, 준 짱. 야시오고교 3학년 8반 일동.


그리고 4월 초에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에선 준코가 돌아오리라 믿고 보관해 두고 있었던 졸업장을 그녀가 살던 집으로 보내줬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관련인들의 진술도 통탄스럽다. "준코가 감금 도중 가장 많이 한 말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가해자들의 대답은 마치 짜고 친 것처럼 똑같았다. 바로 "나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였다고.

사건의 전모, 자신의 딸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하게 죽어갔는지를 알게 된 준코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오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이후에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웬만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준코의 신상정보를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자, 결국 언론사에 직접 찾아가서 "딸의 신상정보를 유출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3.6. 가해자 부모의 반응

자식이 저지른 범죄를 알게 된 A의 부모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자산을 정리해 5천만 엔[43]을 준코의 부모에게 건넸지만 거절했다고 한다.[44]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A의 부모도 B의 부모처럼 이혼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해자들의 가족과 관련된 몇몇 영상의 처음 장면에서 수많은 짐가방들을 잔뜩 든 상태로 기자들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이 A의 어머니 미야노 시즈인데[45] A의 부모도 구제불능인 아들의 행동을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A의 아버지의 혼외정사와 동거 이외에도 자식의 범죄 행각이 이혼사유일 것이 사실상 확정이다.

B의 생모 오구라 에츠코는 그 자식에 그 부모란 면모를 대놓고 드러냈다. 자식이 전과자가 된 것에 분노해 "이게 다 준코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준코의 묘를 부숴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B의 부모는 이 사건 이전부터 B의 아버지의 혼외정사로 인해 별거 중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혼한다. B의 아버지는 사과가 아니라 "노코멘트하겠다"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B의 생모는 준코가 죽고 [age(1989-01-04)]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롱이라도 하듯 버젓이 사건 발생지 인근에 음식점을 차리는 등의 행태를 일삼으며 준코를 모욕하고 있다고 한다.

준코가 감금된 장소를 제공한 C의 부모는 "여학생이 2층에 있는 걸 내내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그나마 제일 회유하고 노력했지만 아들이 두려워[46] 어쩌지 못했고 이미 돌려보냈다고 의심치 않았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사건이 밝혀지고 증거 확보를 위해 경찰관들이 들이닥쳤을 때 방의 바닥과 커튼, 베란다 벽 등이 모두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가 깨끗하게 청소해서 집안엔 어떠한 증거도 안 남은 상태였다. 진짜로 몰랐을까?

D의 누나는 "후루타 준코가 그 집에 감금되어 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구출했을 것이다. 나는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3.7. 세간의 만행

일부 황색언론은 준코의 얼굴이나 교복, 수영복, 핫팬츠 차림의 사진 등을 그대로 노출하며 행실이 불량한 아이였다느니, 불량배 패거리의 일원이었다느니 하는 등의 불분명한 사실들을 기사로 내놓는 추가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준코의 주변인들과 동급생의 증언에 따르면 준코는 최상위권의 성적에 결석도 1년에 두세 번 정도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아주 성실히 하는 등, 불량학생과는 거리가 먼 모범생이었다. 교우 관계도 원만했고 밝고 명랑하며 누구에게나 웃으며 인사하는 상냥한 성격에다 미인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준코가 아이돌을 동경했다고 하며 고등학교 졸업 후엔 곧바로 근처의 가전 판매점에 취직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케이크 만들기가 취미였던 준코는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함께 케이크 만드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졸업여행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준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선 왜 준코가 출근을 안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기자들은 자극성만을 노리며 본인들의 이득 앞에 사람 목숨이 어쨌든 신경조차 쓰지 않은 보도에 환장한 나머지 근거도 없는 비난이 준코와 그 가족들에게 쏟아졌고[47] 분노한 아버지는 딸의 실명 보도에 대한 문제점을 강하게 제기했으며, 이후 준코의 가족은 아무 죄 없이 시선을 피하며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그녀의 억울함을 알겠습니까?》란 책에선 "준코는 언론에게 다시 한 번 살해당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덧붙여 준코는 범행을 당하기 전 미성년자 성폭행범에게 교제를 전제로 한 스토킹을 집요하게 당하고 있었으며,[48] 이 남자가 가해자 일행에게 정보를 주고 준코를 협박했고, 가해자들은 계획적 범행인 것이 탄로날 수 있음이 두려워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범행에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일 경우, 형량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에 대한 근거로 범인들이 평소 강간에 쓰던 차[49]를 쓰지 않아 준코를 협박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는 점, 또한 준코의 집 근처가 인적이 드문 창고 앞이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한 점 등이 언급됐다.

3.8. 사건의 충격

4년 뒤에 일어난 이치카와 4인가족 살인사건의 범인 세키 테루히코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징역형을 받은 것을 근거로 "나의 범행은 별 거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이치카와 사건은 많은 사람이 살해됐고 범행 당시 범법자가 성인이어서 얄짤없이 사형됐다.

추가로 이 사건이 진행되는 사이에 도쿄, 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도 잇달아 발생했다.[50] 쇼와 시대에 극단적인 살인 사건이 총 2번 발생한 셈이며, 이 때문에 무고한 유소녀 4명, 여고생 1명, 총 5명이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차이는 이 사건의 범인이 미성년자 소년들이었다면, 옆동네는 20대 남성 청년이 감행했다. 더군다나 이 범인들이나 미야자키나 재판 후에도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 다만 차이는 미야자키는 사건 이후 2008년에 사형당한 반면 이 범인들은 당시 청소년이다보니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사건 직후 심해지는 일본의 소년 범죄에 관한 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 유럽 등의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

사실 형사의 말실수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범인들이 자백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진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51] 범인들의 주변인은 모두 준코를 목격하거나 정보를 들었음에도 방관했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이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알렸어도 준코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의 한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무시해선 안 된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뒤 증거도 없이 묻힐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 있게 대처했으면 피해자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논픽션 라이터 후지이 세이지가 주범들과 공범, 그리고 목격자들을 만나 탐문한 걸 바탕으로 엮은 책 《소년의 거리》(개정판: 17세의 살인자)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 대부분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학생을 납치한 것은 알았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소년들의 보복이 두려웠다", "집에 돌려보냈다는 말이 미심쩍었지만 범인과는 친구였기에 믿었다"라고 말한다. 주범들의 명령에 따라 준코를 강간하고 폭행한 소년들 중 일부도 자신의 죄가 밝혀질 게 두려워 신고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두려워 친구를 범행에 끌어들인 소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후지이 세이지는 "준코를 살해한 것은 주범들이지만 직접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그들 한 명 한 명의 무관심과 약한 마음 역시 확실하게 준코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했다"고 결론 내렸다.

사람에 따라 '미성년자가 이런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만으로 충격적일 수 있다.[52]

4. 환경적 요인

1990년경 촬영된 아다치구의 방치된 아파트 단지.[53]
현재 사건이 벌어진 동네는 재개발 되어 백화점 및 신도시가 들어선 주택가가 됐지만 사건 당시엔 좁고 어두운 골목에 막장 치안으로 유명했다. 70~90년대 도쿄도 아다치구는 깡패 소굴이었던 과거의 일본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최근에도 죽은 고양이나 비둘기가 가끔 발견된다고 한다.

해만 지면 온갖 별의별 불량 청소년들이 어슬렁거리며 싸움질을 하거나, 오토바이로 밤새 엄청난 소음공해를 일으키면서 거리 기물을 파손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주민들은 무서워서 이들을 못 본 척하며 다녔고,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귀를 막고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다 주민들은 불량 청소년들 앞에선 절을 해야 했고, 최소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다치구 공무원들도 눈치를 봐야 했으니. 그러니까 준코가 납치당하면서 비명을 질렀어도 주민들에겐 그냥 매일 들리는 소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54]

당연히 주민들은 "순찰 경관 좀 늘려달라", "분서를 설치해달라"는 민원을 아야세 경찰서에 넣었지만,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묵살당했다. 이런 동네에서 살아가려면 불량 청소년 패거리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는 이 사건을 주변인들이 방관한 데에 큰 이유를 제공했다. 이 동네는 현재까지도 도쿄에서 가장 소득이 낮고 치안도 안 좋은, 여자가 혼자 살기 가장 위험한 동네로 유명하다.[55] 뭐 아다치구가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청년 야쿠자 조직으로 유명하니 말 다했다.

결국 경찰의 방만한 대응은 참혹한 살인사건을 불러왔고 이 사건 이후 인원 부족을 이유로 민원을 무시한 아야세 경찰서는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력과 예산으로 순찰 경관을 늘리고 보안 등을 추가로 설치했다.

첨언하자면, 현재 이 동네에서 이 사건을 주민들 앞에서 언급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미 [age(1989-01-05)]년 전 일이고 어지간한 당시 주민들은 사건 이후부터 재개발 등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주민들이 자리를 채웠기에 당시 일은 자신과 상관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타지 사람들이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

한편 준코가 살았던 미사토시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준코가 살던 집과 다녔던 고등학교도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이 지역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게 예의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니.

5. 범인들의 인적 사항

4명의 히가시아야세 중학교 졸업 앨범속 15세경의 모습.
위 사진에선 미나토 신지의 이름이 노부하루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56][57]
이들은 일반적인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질이었다.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하여 극동회(極東会 교쿠도카이)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極青会)를 결성해 폭력단의 행사에도 수시로 들락날락했고, 미성년자, 청년, 노인, 외국인 등 상대를 가리지않고 돈을 뺏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퍽치기라던가 주택가의 전봇대나 배관 파이프를 타고 올라 베란다를 통해 침입하여 부녀자를 겁탈, 능욕하고 돈을 강탈해가는 등 경찰조차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온갖 강력 범죄를 수없이 일으키고 다녀, 주민들은 해가 지면 밖에 돌아다니는 걸 극도로 자제할 만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A는 유도 등으로 온몸이 어마어마하게 단련되어 있었고, 소년 시절 카츠시카구와 하치오지 시내 일대의 불량배들의 씨를 말리고 다녔다고 한다.[58] 이런 괴물에게 준코가 붙잡혔던 것이다.

굳이 인터넷으로 검색할 필요 없이 잊을 만하면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본인이라면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으며, 가해자들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이들은 현재 중년 남성이다.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장수 국가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이제서야 인생의 반환점을 맞이한 셈. 현재 이 사건을 다룬 매체들을 보면, 피해자 준코의 얼굴은 그대로 나오는데 가해자들의 얼굴은 눈이 가려져서 나온다. 그래서 "범인들의 얼굴도 공평하게 그대로 나와야 한다"다는 항의가 지속해서 나오고 있다.

5.1. 소년 A

  • 본명: 미야노 히로시(宮野裕史) → 요코야마 히로시(横山裕史)
  • 출생: 1970년 4월 30일 (현재 [age(1970-04-30)]세), 카츠시카구

이 사건의 가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으로 평가받는 범인이다.[59]

현재 요코야마(横山)로 성을 바꾸었다. 출소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는 형식을 사용.[60]

기자가 그를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얼마나 악랄한 지 알 수 있다.

기자: 왜 그녀를 납치했는가?
히로시: 충동적으로 그랬다.
기자: 그녀가 불쌍하진 않았나?
히로시: 불쌍했다.
기자: 그럼 왜 그녀를 폭행했는가?
히로시: 스트레스 풀이.


신체적 특징은 왼손잡이면서 재판 당시 뇌검사에서 전두엽측 지주막하낭종이 발견됐다.[61]

가해자들 중 최연장자[62]이자 두목격. 범인 소년들의 보스 정도 된다. 할아버지는 군인, 야쿠자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고모부 또한 야쿠자 간부였다. 아버지 미야노 히로후미(1942년생, 현재 [age(1942-01-01)]세)는 금융업계 사장이었으며, 어머니 미야노 시즈(宮野シーズ, 1942년생, 현재 [age(1942-01-01)]세)는 피아노 연주 강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겐 7살 터울의 여동생(1977년생, 현재 [age(1977-01-01)]세) 한 명이 있다고 한다. 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아버지가 다른 여자의 집에 거주하면서 간통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삐뚤어져 문제 행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모를 마구잡이로 구타했고 온몸에 타박상을 입힌다거나 갈비뼈를 골절시켜 중태에 빠트리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펀치 파마[63]를 했고, 히가시 아야세 중학교의 체육 특기생으로 유도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고 목검과 쌍절곤 같은 무기를 소지했으며 인근 학교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가출해서 거리에 주차된 트럭에 무단으로 올라가 자다가 신고를 받고 귀가 조치되는 일도 잦았다.
이밖에도 할아버지와 고모부 빽으로 초등학교 시절 이미 카츠시카구와 인근 하치오지시 일대의 30여 개 초등학교의 또래들과 교직원들 사이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한다. 무력에 가치를 크게 두는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무렵부터 키가 작은 대신 몸집을 키워 싸울 때 날아가지 않도록 밥을 많이 먹어 체급을 키우고 멸치를 씹어먹으며 뼈를 강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팔굽혀펴기와 복근 운동 등의 근력운동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백 개씩 해 왔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카츠시카구의 지도를 빌려 펼쳐보며 구 내에 있는 모든 학교들을 일일이 찾아다녀 그 학교의 학생들과 맞붙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갓 입학할 시점엔 160cm 정도로 유도부에 들어가기에는 왜소했지만 몸이 단단하고 다부졌기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선배의 추천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유도부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지역대회에서 체급 내 5위에 드는 정도였지만 실력이 나날이 발전해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과 준우승을 휩쓸 정도였다. 너무 강한 탓에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쿄 내의 온갖 유도대회를 석권했고 중학교 동창들은 "소년 시절부터 몸을 쓰는 일뿐만 아니라 이름을 날리는 쪽으론 이골이 날 정도로 강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카츠시카구의 남자들 가운데 무력 최강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중학교 시절엔 고등학생 불량배들과 싸움을 하고 다녔을 뿐더러 학교장 추천으로 사립명문 토카이대학 부속 사립 타카나와다이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강했다고 하며 고교 1학년 때 도쿄 전체에서 2~3학년을 모두 제치고 우승했지만[64], 상위 체급의 유도부 선배들에게 미야노 히로시의 부모가 고소할 정도로 심한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65]
그래서 분풀이의 대상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와선 부모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집이나 거리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행인이나 불량배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폭행해 금품을 갈취하고 여자를 강간하고 다니는 미치광이가 됐다고 한다. 18세가 되던 해에 이 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무리를 지어 강간하고 다녔던 여성만 기억상으로 90명이 넘었다고 진술했으며[66], 심지어 준코를 감금했던 기간에도 다른 여성들을 몇 명씩이나 납치하거나 강간하고 다녔다. 다만 공갈협박을 했기 때문인지 신고한 여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수위가 너무나 심해서 심지어 경찰마저 골머리를 썩히면서도 손을 놓고 있었다.

고1에 중퇴한 이후 폭주족의 우두머리를 맡기 전엔 집안에서 미치광이처럼 집기를 모조리 때려 부수고 다른 학교의 복도에 오토바이를 타고 쳐들어가 학생들과 교사를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고 주먹 등으로 구타하는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력적인 문제아였다. 교사 6명이 몰려와도 떼어놓지 못해 경찰까지 출동을 해서야 겨우 떼어놓았다고 하는데 정말 경악스러운 건 경찰의 한심한 대응이었다. 소년원에 보내져야 할 이런 짓을 하고도 소년원 송치 및 보호관찰 정도로 끝났다. 물론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도 있었지만.

게다가 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폭주족을 탈퇴한 동료를 찾아가 12시간 가량 집단 폭행해서 불구로 만들어 놓는다든가 지나가던 남성 2명을 다리 밑으로 집어던져 살인미수로 체포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렇다 할 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폭주족의 우두머리로 몸을 담던 시절의 후배 및 동료들에 따르면, 자신에게 한 번 표적이 된 대상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집요하게 집주소와 동선을 파악시켜 야밤에 폭행해 반죽음 상태를 만들거나 납치, 강간을 하곤 했다고. 그랬기에 누구나 "미야노의 적이 된다면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으며, 피해자들 가운데 강간 피해자만 최소 9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집안에 대해 비아냥거려도 뼈도 못 추렸다. 그야말로 좁게는 그 일대, 넓게는 일본 열도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들면 안 되는 위험 인물이었던 모양. 그래서인지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 녀석이라면 사람을 죽여서 훼손하는 것쯤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란 반응이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중학교 때부터 D의 친누나와 연인으로서 동거하며 성인이 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18개월 정도 타일 제조 공장에서 일하다가 자동차 학교의 합숙장에서 친해진 폭력 써클의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돼 그들의 소개로 긴자에서 생화를 팔았다. 하지만 적성에 안 맞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시너를 불게 되며 더더욱 엄청난 폭력배로 변한다.
고교 중퇴 이후 자신을 동경하는 불량배들을 모아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폭력 조직 극동회[67]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를 결성한다.[68] 강간, 상해, 약취, 강도 등의 강력범죄에 이외에도 부하들을 시켜 일본인뿐만 아니라 서양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금품을 약탈하거나 생화를 말도 안 되는 고가에 강매하는 짓 따위도 꾸준히 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2006년 가석방됐고[69], 그 이후 7년에 걸쳐 사이타마현 카와구치시의 용역 업체 미야우치 해체 공업소(宮内解体工業所)에서 일했다. 거주지는 카와구치시 하스누마 298번지 사카에하이츠 201호(埼玉県川口市蓮沼298 栄ハイツ201). 2013년 보이스피싱 사기 혐의[70]로 체포됐지만 묵비권으로 일관한 탓에 1월 31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같은 형무소 수감자의 증언에선 아버지뻘인 자신에게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왔고 항상 밝고 평안했다고 하며 보통 강력범죄를 저지른 수감자의 경우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는 그런 것 없이 복역 기간 동안 잘 지냈다고 한다.[71] 또한 출소 후 이름을 바꾼 뒤에도 킥복싱 체육관을 다니거나 친한 후배와 유흥을 즐기는 등 잔인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반성이나 죄책감 없이 일상생활을 했으며[72] 사기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외제차를 타고 고가의 시계를 차며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예전엔 강간, 폭행, 상해, 강도가 주특기였다면, 이제는 사기를 쳐서 무위도식하며 상당히 호의호식하고 희희낙락하면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됐으나 파멸했다.[73][74] 최소한의 후회나 죄책감도 없음은 확실해 보인다.

5.2. 소년 B

  • 본명: 오구라 유즈루(小倉 譲) → 카미사쿠 조(神作 譲)
  • 출생: 1971년 5월 11일 (현재 [age(1971-05-11)]세)

카미사쿠 조(神作 譲)로 개명.[75] 1남 1녀 중 둘째. 소년들 패거리의 부두목[76][77].

아버지는 1946년생 오구라 아키라[78], 어머니는 1945년생 오구라 에츠코이다. 190cm이 넘는[79] 키에 흉측한 외모, 들끓는 듯한 굉음의 목소리가 특징. 가해자 일행들 중에서도 가장 체격이 컸다. 그 외 신체적 특징은 왼손의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하키 선수로 활동했지만 부상으로 은퇴했다. 중학교 시절 지인은 그가 폭주족 선배인 고등학생 2명과 싸움이 붙었다고 하는데, "얻어맞으면서도 싸움을 멈출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호전적이고 집요했으며 폭력적이어서 어디를 가나 싸움을 일으키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지인 및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에 손가락으로 튀어나온 못을 박아넣거나 차량 앞유리를 주먹으로 단 한 번에 파손시킬 정도로 강골이었다고 한다.[80][81] 이러한 남다른 강체질 덕분에 그는 자신과 싸운 상대들이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하고 몸이 단련된 상대들이라도 주먹이나 발길질 한번에 기절하거나 뼈가 부서졌다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은 이 사건 당시에도 피해자를 1달 가량 하루 18시간 이상 겁탈할 정도로 체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82]

이 무렵에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학생을 쫓아가 덮친다든가, 치마와 속옷을 벗기는 등의 성추행을 해서 보호관찰 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왔다가 어머니가 "걸레 같은 계집"이라고 발언한 것을 시작으로 가정폭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나 격렬한 폭력에 어머니가 가정 재판소에 몇 번이고 상담했을 정도라고 한다.[83] 다만 B의 어머니도 동정할 필요는 없는 게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아들이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에 분노하면서 "내 아들의 인생이 저 여자 때문에 망했다!"라고 준코의 묘를 부숴 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준코의 어머니와도 불구대천의 원수였는데 그녀는 어릴 때 준코의 어머니에게 많은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공판 당시에는 "그래도 놀아줬으면 된 거 아니야?"라고 유족 앞에서 낄낄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출소한 뒤 이름을 개명하고 중국인 여성과 결혼 후, 일본에선 살아가기 힘들 거라는[84] 생각에 중국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이혼하면서 실패했다.[85] 성인이 되어서도 한낮에도 "캬", "우우우"하는 괴성을 지르고 어머니에겐 "맞기 싫으면 내 앞에 있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던 2004년 5월 또 다시 아다치구에서 자신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이유[86]로, 이소노 타카토시라는 사람을 어머니의 스낵바에 감금해 납치, 폭행했다가 체포되어 이미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형은 만기됐기에 어떠한 가중 처벌 없이 징역 4년이 선고됐다. 감금 이후 몇 시간에 걸친 폭행을 가한 뒤 피해자를 그냥 풀어줬다고 한다. 그저 피곤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꺼지라는 듯이 돌려보낸 것.

피해자 이소노가 가해자는 딱 봐도 190cm 이상은 되어 보이는 신장에 체격이 거대했으며 첫눈에 그런 부류의 인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의 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고 새벽에 다짜고짜 들어와서 냉장고를 뒤지고 술을 꺼내 그 자리에서 동료들과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다거나 여자 이야기나 온갖 음담패설을 내내 늘어놓으며 과거 이력을 자랑하고 "지갑이 사라졌다"면서 새벽에 찾아와 집안을 뒤집어엎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재판 당시 피해 남성은 그를 마주치는 게 두려워 재판 참석을 거부하는 탓에 칸막이를 두고 재판을 진행했다. 이 때도 그는 "이 정도는 감금치상이라고 하기도 뭐합니다만"하며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고 한다. 피해자는 감금되어 있는 동안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용서를 빌어야 했고, 살아있는 게 아닐 만큼 지독하게 오싹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뺨에 손바닥만한 멍이 시커멓게 들었고 턱뼈와 앞니가 부서져 피가 철철 쏟아지는 동안에도 계속 맞았다고 한다.

사건 당시 그는 금고 앞에 서서 야쿠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금속 배트와 칼로 피해자를 위협하면서 "사람을 1명 죽이는 놈과 10명 죽이는 놈은 다를 게 없다. 나는 사람을 마음대로 구워삶는 여유를 배웠다. 검찰은 나의 노리개니 무슨 짓을 벌려도 풀려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게 해 줄까. 야쿠자를 우습게 알면 어떻게 되는가를 똑똑히 알려준다."라고 협박했고, 평소 이 사건에 대해 "그 때 후배들을 끌어들인 것도 나고, 내가 진짜 주범이다. 여자를 삭발시키고 떼거지로 패며 강간하면서 비디오를 찍고 했다.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턱관절을 탈구시키고 팔을 분지르면 까무러쳤다. 그 땐 너무나 즐거웠다. 하루는 돌아왔는데 몸에 불을 질러도 미동도 없길래, 코에 담배 연기를 피우고 숨을 쉬지 않는 걸 알았다."라고 말하면서 웃음 섞어가며 자랑했다고 한다.

정말 그가 주범이면 정작 진범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거나 다름없다.[87][88] 사실 재판 당시에도 A는 "나는 준코의 온몸에서 고름과 진물이 쏟아져 나와 더러워진 이후에는 C의 집에 잘 오지 않았고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납치하거나 강간했다.[89][90] 그러나 B와 C 등은 이 시기에도 준코를 지독하게 괴롭혔다."라고 밝히긴 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는 A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에 따른 것뿐, 우리도 피해자다."라는 망언을 지껄였고 심지어 이게 받아들여진 건지 지나치게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애초에 가해자들 중 자기 죄질에 상응하는 형량을 받은 놈은 없지만 말이다.

보스 미야노 히로시가 없을 때는 오구라 유즈루가 두목이었다고 한다. 4년형을 받았었으니까 만기를 채워도 출소했을 텐데 근황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 두 번이나 감옥에 다녀왔으니 또 가기 싫으면 웬만해선 밖에 나오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겠지만 나갔거나 일을 하더라도 다른 가해자들처럼 죽을 때까지 평생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의 현재 사진으로 알려진 창문을 닦고 있는 사진은 본인이 아니며 단지 개명 전의 이름인 '오구라 유즈루'의 동명이인이다. 앞서 말했듯 진범은 카미사쿠 조로 개명 했으며 지금 나돌고 있는 사진을 보면 왼손에 손가락이 정상적으로 5개기 때문에 그의 사진이 마치 범인인 것처럼 쓰이고 있어서 동명이인인 당사자는 곤혹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5.3. 소년 C

  • 본명: 미나토 신지(湊 伸治)
  • 출생: 1972년 12월 16일 (현재 [age(1972-12-16)]세)

범인들 중 최연소다. 그의 큰아버지는 야쿠자 고위 간부였고 부모는 일본 공산당 소속의 진료소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적기)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는 등 열성적인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당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일본 공산당 및 아카하타는 부모의 배경 등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미나토 신지의 부모를 제명한 뒤 "이 사건과 공산당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란 문장을 기관지에 실었다. 왜냐하면 정치 공세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91]

중학생 때 농구 선수였지만 고교 진학과 동시에 중퇴. 준코를 감금했던 게 미나토 신지의 자택 2층 방이었다. 해당 방에서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일당들 중 준코의 지인이었으며 전부터 끊임없이 준코를 향해 "내가 가질 것이다"라고 얘기해 왔다고 한다. 또한 초기에는 함께 게임을 하거나 타인이 보면 친해 보인다고 할 정도로 아주 나쁜 취급은 안 했던 것으로 보이며,[92] 준코 또한 B에게 "미나토 군은?"이라고 물었다가 폭행당하기도 했다.

본인도 폭행에 가담했으면서 준코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불쌍하다고 여겼지만 점점 그 모습이 재밌어서 더 심한 학대를 했다는 점에서 그도 위의 2명만큼은 아니지만 심각한 가학성변태로 보인다. 감금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는 형인 미나토 코우지[93]는 동생과 감금 등의 혐의로 위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됐지만 직접적인 가담이 없었다는 이유로 어떠한 불이익 없이 구속 되지도 않고 소년보호 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났고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준코가 붙잡혀 있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구출하지 않았던 부모 역시 무죄 판결이란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다.

2006년 루마니아인 여성과 결혼해 오사카로 이사했다고 한다. 일설에선 결혼한 상대가 리히텐슈타인 국적이라고 한다. 1995~1996년경 아야세의 태국 요리점에서 무에타이 파이터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프로 선수로 뛰었으며[94] 하루 10시간 넘게 훈련하는 등 프로 무에타이 파이터로서도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95] 그의 본성이나 행적이 숨겨지는 것도 아니라 등장할 때부터 야유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2001~2002년경 은퇴.

2007년엔 간병인 자격을 취득했고 네야가와의 한 파칭코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게 확인됐다. 그 후로는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8년 8월 19일, 사이타마현에서 주차 문제로 같은 날 32세의 한 남성을 삼단봉으로 내리치고 또 다른 1명을 흉기로 수 차례 찔러 살인미수로 긴급 체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9년 3월 5일 사이타마현 지방재판소에서 이루어진 재판에 따르면 미나토 신지는 살이 붙은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고 "패거나 찌르긴 했어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항변했다. 처음에는 '칼로 찔렀다는 건 인정하나 삼단봉으로 내리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며 매우 불손한 태도로 재판에 임했고 이윽고는 '칼로 찌른 적도 없다'는 편지를 사전에 재판관에게 보내는 등 범행을 완전 부정. 해당 사건은 야후 재팬 키워드 실시간 1위를 하며 다시 그의 이름을 세간에 오르내리게 했다.

사건을 목격한 주민들은 결코 주차 문제 같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미나토 신지는 전부터 사람을 기분 나쁘게 노려보면서 고함을 지른다든가 아침이나 새벽 3시에 아래층의 천장 전등이 흔들릴 정도로 쿵쿵 뛰어 잠을 깨웠고, 올라가 보면 문을 열어주지 않고 대답도 없어 다시 내려가면 또 다시 괴성을 지르면서 쿵쿵 뛴다든가 이런 짓을 끝도 없이 반복해, 문 앞에서 만나 따지려고 했지만 "들려?"라고 말하며 지나간다든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널드 트럼프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걸어온다든가, 차 안의 짐을 빼고 있는 사람에게 차 문을 쾅 닫아버리는 등 이웃들을 온갖 방식을 동원해 집요하게 괴롭혀왔다고 한다. 피해자는 격렬하게 덤벼대는 미나토의 목을 감아 제압하려고 했지만 이때 미나토가 소지하고 있던 칼을 꺼내 난도질한 것. 주민들이 몰려들자 달아났으나 곧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해당 사건의 공판을 보러 간 사람은 그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고 한다. #

5.4. 소년 D

  • 본명: 와타나베 야스시(渡邊恭史)
  • 출생: 1971년 12월 18일 (현재 [age(1971-12-18)]세)

중학교 1학년 때 집단괴롭힘을 당했지만 친누나가 A와 교제를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A와 친해지면서 집단괴롭힘이 거짓말처럼 멈췄다고 한다.[96] 어린 시절부터 잭나이프나 쌍절곤을 소지하고 다니거나 수업 중에 돌멩이를 던져 창문을 부순다든가, 남의 오토바이를 절도하는 등의 문제 행동이 보였다고 한다. 다른 가해자들과 달리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는 등 그나마 나은 모습을 보였다. 실제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는 적극 동참했지만 그 외에 폭행을 당하는 동안엔 C의 형의 방에서 게임을 했다고 한다. 히키코모리로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진 한편 용접공, 공조 장치 설치 등의 일을 전전하고 있다는 제보도 있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하는 걸로 보인다. 요코하마 카나자와구에서 친누나의 집에 얹혀사는 듯. 정황상 D의 누나는 A의 범행으로 인해 A와 파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D는 비교적 폭행 가담이 적었는데 강간할 때를 제외하면 준코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고 한다. 하지만 준코를 도와주지는 못했고 이유는 A, B, C에 비해 D의 힘이 많이 약해서 도와줬다가 보복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97] 형무소 내에서 이 사건에 가담한 일이 알려져 심한 폭행을 당해 눈과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가해자들 중 그나마 반성하는 모습[98]을 보여 4명 중 그나마 낫다는 취급을 받는다.[99]

A와 연인 관계였던 D의 친누나는 남동생을 대신해 유가족들을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준코의 묘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유가족들의 거절로 무산됐다고 한다. B의 어머니가 준코의 무덤을 부순 적이 있어서 준코의 가족들은 무덤을 비공개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악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서 2018년 8월 24일 살인미수를 저질러 또 체포됐다.[100]

5.5. 소년 E

  • 본명: 나카무라 테츠오(中村 哲夫) → 이와이 테츠오(岩井 哲夫)
  • 출생: 1971년 (현재 [age(1971-12-31)] ~ [age(1971-01-01)]세)

A의 협박 때문에 강간에 가담한 공범. 가담에 거부하다가 주범들에게 폭행당했다. 중년이 된 현재는 고향의 술집에서 당시 사건을 우스갯소리처럼 떠들고 다닌다고 한다.

5.6. 소년 F

  • 본명: 이하라 코이치(伊原 孝一) → 카키히가시 코이치(垣東 孝一)
  • 출생: 1972년 (현재 [age(1972-12-31)]~[age(1972-01-01)]세)

E와 함께 C의 방으로 불려와 강간에 가담.[101] 사건 이후 소년원에 송치됐다. 출소 이후 성인이 돼서 결혼해 딸 둘을 낳아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에 거주했으나 잦은 문제와 범죄 행각을 일으켜서 쫓겨나 현재는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또는 도쿄도 히노시로 이사간 것으로 밝혀졌다.

5.7. 기타 공범들

확실하게 확인된 공범으로는 남성 17명, 여성 1명이 있다. 위의 6인 이외에 타케우치 쿠니, 아이다 코이치, 츠즈키 히로시, 카도 아키라, 하기와라 카츠히코, 무라카미 아키히로, 나무 류스케, 이시카와 아카네[102] 등 대부분 극청회 소속이었다. 이들은 살인과 학대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만 참여하는 줄 알고 불려왔다가 엮이게 됐다. 공범 중 망보기 역할이었던 소년의 인터뷰에 따르면 '탈출시킬 기회도 있었고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103]라고 한다. 이들은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폭행하고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A 일행은 '사람을 샌드백처럼 장소 가리지 않고 어떻게 저 정도로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구타하고, 상대가 울면서 용서를 빌거나 기절해도 폭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준코가 "나 이제 어떻게 돼요?"라고 묻자, 공범 소년은 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명령 받아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주범들은 부하들이 약간이라도 명령을 듣고 머뭇거리거나 준코를 적극적으로 폭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신발을 집어던지거나 2층에서 베란다 밖으로 집어 던지거나 준코가 보는 앞에서 집단폭행을 가하는 등,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위협했다고. 때문에 도저히 대항은커녕 신고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준코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게 되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6. 판결

이 사건의 심각성이나 기타 죄책을 감안해도 일본 사법부의 판단은 엔자이와 직접적으로 유사하진 않더라도 일종의 병폐고 소년범이라고 해도 과도한 선처를 한 점을 보아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다.

설사 사형이나 이에 준한 극형이 나올 성질의 범행이 아니더라도 법원의 양형 이유 등을 살펴보면 일단 도쿄 지방검찰청은 소년 A부터 D까지 총 4인을 "상호 공모에 의한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 외설 목적의 유괴, 약취, 감금, 강간, 사체유기 등의 각 죄로 피고인들이 가정 형편에 있어서 불우하게 성장했음을 감안해도 일본 소년범죄 사상 보기 드문 중대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매우 잔악하고 무자비하게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점을 참작해야 한다"면서 피고인 A를 주범으로 공소 사건의 발단을 만든 배후라며 무기징역을, 피고인 B를 "피고인 A의 최측근으로서, 피고인 A의 버금가는 지위로 하여금 공소 사건을 주동해, 종국에는 공소 사실에 기재된 범행을 자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며 징역 13년을, 피고인 C와 D는 준코에 대한 범행에는 가담했지만 피고인 A와 B의 주동 하에서 소극적으로 응한 점을 참작해 각 부정기형으로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의 형을 법원에 구형했다.[104]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위 사건 공소 사실의 범죄로 인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이르렀다는 검찰의 주장은 인정되고, 그 범죄의 심각성 또한 반인륜적이여서 형사 책임은 무겁지만 아직까지 미성숙한 미성년자들에 의한 집단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극단적인 사태에 놓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해 불행한 측면에 빠졌음을 감안해야 하고, 수감 생활 도중 반성문을 제출한 것을 보아 교정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소년 A의 형은 무기징역이 낮춰져 법원 선고가 가중 감경돼 징역 17년이 나왔다.[105] 심지어 돈을 받고 범인들을 변호해 주겠다고 자청하는 변호사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106]

2심 도쿄고등법원에 이르러 "피고인들이 반성하고 이후의 소년범으로서 교정 등의 갱생 필요성을 감안해도 유족이 엄벌주의로 처벌하기를 탄원하고 있고 해당 사건의 죄책이 사회적 통념에 비춰보아 매우 흉악하고 중하다"면서 1심에서의 양형이 가중돼, 소년 A 징역 20년, 소년 B 장기 10년 단기 5년, 소년 C 장기 9년 단기 5년, 소년 D 장기 7년 단기 5년이 확정됐지만 유일하게 상고해 1심으로 확정됐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론 이들 이외에도 가담한 100여 명의 가해자가 더 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대부분 약식절차로 처분돼 가볍게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동생의 범행을 방관, 방치했다고 볼 수 있는 C의 형도 피고인 4인의 공범으로 살인 및 사체유기와 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소년보호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 이들은 일본에서 소년법이 없었다면 사형이 나왔을 자들이다.[107]

당시 기록엔 법정에서도 그들은 "준코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는다는 생각조차 할 여지가 없었다."고 적혀져 있었다. A는 "준코는 단지 운이 없어서 바보 같이 잡혔던 것뿐이다."라고 말하고, 반성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가면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억울한 사람을 이렇게 끌어들이고 부끄럽지도 않냐"고 하고는 욕설까지 퍼부었다. 게다가 그는 눈물을 흘리긴 했으나 그것은 피해자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닌 "병신 같이 잡혀버린 내 자신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한다.

분노한 준코의 부모는 피고인 측의 면회 신청 및 성묘를 금지했고 그 비통한 심정을 재판소에 토로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재판 증언 당시 "피고인에 대한 원 판결의 과형은 너무 가볍다"고 했다. 그나마 형량을 제일 많이 받은 A도 준코의 부모 입장에선 죽일 놈인데 나머지도 미성년자라 해도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다만 소년법의 적용뿐만 아니라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본 사법부의 관행에 비춰봤을 때, 판사들이 사형 판결까지 나올 성질이 아니라 판단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다수를 살해하거나 유괴살인 혹은 살인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의 추가적인 살인은 사형 선고가 원칙이지만 그 외의 살인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사형 선고를 회피하거나 주범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본 사법부의 관행이었기에 20년 이상 선고가 불가능한 소년법의 적용과 더불어 A에게만 엄한 판결이 나온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도 별 차이는 없어서 간혹 나오는 사형 집행 기사를 보면 사형수 대부분이 사람을 두 명 이상 죽이거나 살인 재범,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범죄자다.

현재 A를 포함한 가해자 4명은 출소했지만 대부분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있으며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다고도 한다. 게다가 [age(1989-01-05)]년이 지나 현재까지도 인간 말종급 강력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로 재수감 되기도 했다.

7. 관련 매체


  • 1989년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초반에 소년 A의 어머니가 기자의 질문에 당황하며 도망치는 모습이 보인다. 당시 소년 A의 부모는 47세였다고 한다.

  • 1995년의 비디오 다큐멘터리(부제: 망가진 17세들 ~壊れたセブンティーンたち~): 1, 2, 3, 4, 5, 6, 7
    이 다큐멘터리는 이 사건을 준코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아래의 영화보다 더 일찍 나왔고, 시대도 1989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더 사실감이 있다. 재연 영상도 있으므로 일본어를 잘 모르더라도 보면 사건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현재는 저작권 침해 신고를 받아 볼 수가 없다. 유튜브에서 중간에 중요한 부분만 잘라 놓은 영상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일본어로 구글에 검색하면 볼 수는 있다.
  • 일본 료나 소설 끝나지 않는 여름방학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108]
  • 나카무라 히로무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2003년 출판된 논픽션 《17세, 악의 이력서》를 바탕으로 2004년에 제작된 영화. 제작사에 수많은 협박 전화 등이 와서 개봉이 미뤄졌으며, 당사는 '희망이 없는 청소년들의 미래를 그린 의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범인 소년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자세한 건 영화 참조.
  • 진 현대엽기전
    영화보다도 더한 막장. 하지만 작가가 서문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묻히고 있는 데다, 이런 일을 세상에 알려서 다시는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해 본 작품을 그렸다"고 쓰여 있다.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 작가의 고어 묘사나 성적 묘사가 절제되어 있고, 다큐나 현장 추적 같은 느낌의 상황 설명을 위한 나레이션이 많으며, 초점이 가해자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동을 담담하게 묘사해 독자 입장에선 비교적으로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게 하도록 한 시도로 보이나, 사건 내용의 변형[109]이나 생략도 많고, 여체가 중점적으로 묘사되는 등 일반적 성년 만화나 료나물로 대변되는 특정 기호를 위한 오락적 요소도 여전히 상당히 많이 남아 있어, 다큐멘터리 만화라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작가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이런 잔인한 사건을 다룰 수 없으니 나라도 작품을 통해 세간에 알려서 이런 일이 다시는 없게 해야겠다'는 의도였다고 주장하나,[110] 작가가 작가라서 그런지 "이런 끔찍한 사건까지 만화로 그려서 팔아먹으려고 하냐, 미친 놈." 정도의 의견도 있다. 또한 앞서 언급되었듯이 작가의 말에 비하면 세간의 눈은 아직도 준코를 주시하고 있기도 하다. 의도는 좋았다일지 모르나 그 의도대로의 결과를 낳진 못한 작품.
  •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 천사의 나이프
  • 미야베 미유키의 크로스 파이어
    초반에서 주인공에게 학살당하는 고교생 그룹의 살인 사건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 IWGP 시리즈 2권 <소년 계수기> 中 '물 속의 눈동자' 편
    치하야 여고생 감금 사건이란,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건이 등장한다. 성폭행 후 성기에 불을 붙여서 화상을 입히거나 하는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
  • 소년탐정 김전일 시즌 2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켄모치 경부의 살인의 중심 소재인 3년 전의 사건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여기 나온 가해자들도 실제 사건의 가해자들 못지 않은 말종 흉악범들이다. 다만 이 만화가 청소년들도 보는 만화이다 보니, 해당 작품 내에서의 3년 전 사건의 수위는 실제 사건과 비교하면 많이 순화된 편이다. 물론 그 피해자인 토가미 마리나도 몹쓸 악행들을 당하다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 the GazettE의 노래 '체온(体温)'
  • 일본 영화 지옥
    지옥 탐방을 다룬 이시이 데루오 감독의 1999년작 고어 영화. 이 영화에서 이 사건의 범인들은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교주이자 테러리스트 아사하라 쇼코와 함께 지옥에서 최고의 벌을 받으면서 말 그대로 집행관들에게 장기자랑에 인(人)수 분해를 당한다. 이 사건에 대한 감독의 격렬한 분노가 드러나는 장면.
  • 17세.(17歳。)
    후지이 세이지가 글을 쓰고 카마타 요지가 그림을 그린 합작. 부제는 '여고생 감금 살인 사건'.
    모티브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지만, 후지이 세이지가 여러 청소년 범죄에 대해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재해석됐다. 청소년 범죄는 어째서 일어나는가, 왜 아무도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는가, 법과 사회의 문제점, 어떻게 하면 같은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등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 여기선 주인공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도 그대로 방관한 마을 사람들이 나온다. 어찌 보면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과 비슷한 상황. 방관한 이유도 '농담인 줄 알았다.' 등의 변명 비슷하다.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주인공에게 경고하기 위해 주인공을 찾아다닌 의대생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유튜브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을 검색하면 수많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온다. 디바제시카도 토요미스테리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룬 적이 있고, 위에 나오는 비디오 다큐멘터리 영화 후기까지 올라와 있다.

8. 유사 사례

유사 사례로는 미국의 실비아 리킨스 살인 사건, 대만의 바이샤오옌 사건, 홍콩의 헬로키티 살인사건, 대한민국에선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과 성남 지적장애 소녀 살해 암매장 사건, 용인 10대 엽기 살인사건,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이 있고 일본에는 도치기현 린치 살인사건[111], 나고야 아베크 살인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1] 피해자의 사망일은 쇼와 64년이지만 사건이 발각된 건 헤이세이 원년이다.[12월] 납치 당시에는 C가 15세, D가 16세지만 범행 중에 생일이 지났다.[12월] [4] 나가야마 기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1명이 살해당하면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5] 실제로 소년 A는 극동회란 야쿠자 조직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의 우두머리였다.[6] 키타아야세역에서 가까운 WINGS란 러브호텔. 현재도 예전 그대로 영업 중.[7] 다큐멘터리에선 A가 준코의 머리에 껌을 붙이는데, 실제론 껌을 씹고 있지는 않았다.[8] 사실 이때 당시 준코는 6세연상의 카와무라라는 이름의 23세 남성과 연애중이었다. 이 남성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응하기도 했는데 준코의 친구와 자신의 친구가 연애중이었고 이들 커플과 동행하여 1987년 여고생들의 여름방학에 함께 별장으로 여행을 가면서 알게되어 연애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굳이 극청회패거리에게 밝힐 이유도 없거니와 남친까지 납치나 해코지를 당할수도 있다보니 거짓말로 둘러댄것으로 추측된다.[9] 범행 가담을 거부하다 주범 소년들에게 폭행을 당함.[10] 작열통은 인간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심한 고통이다. 실제 불고문을 당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미군이 "구타도, 물고문도, 칼로 혀를 찌르는 고문도 다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불은 어머니의 머리를 달리는 버스 바퀴 밑으로 집어넣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을 만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라고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이런 성인 남성도 견딜 수 없는 불고문을 어린 여학생인 준코가, 그것도 생식기에 수없이 당했다는 것이다.[11] 아다치구 아야세에 위치한 아야세 7쵸메 언덕 공원(東京都足立区綾瀬7-15-15)의 북쪽에 맨션이 하나 있고, 그 오른편에 풀이 무성하고 차량 몇 대와 자판기가 위치한 공터가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C의 자택이 있었던 곳이다.[12] 미야노와 오구라를 지칭.[13] 실제로 코우지는 자신과 신지가 소학교 시절 아버지에게 1주일에 1번은 체벌을 당하거나, 학대당하는 등 그 때 당시는 지독하게 무서웠다고 했다.[14] C와는 동갑이지만 빠른년생이라 형이다. 11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평소 가해자 소년들의 폭력에 잡혀 살고 있었다.[15] C의 형은 최대한 귀가시키자는 쪽으로 얘기했지만 결국 준코는 못 풀려났다.[16] 다큐멘터리에서도 초반엔 준코와 가해자들이 게임하며 함께 웃는 장면이 나온다.[17] 집 밖으로 탈출하면 되지만, "도망치면 야쿠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란 A의 협박이 떠올라 전화기로 향한 모양. 실제로 A는 "이때 준코가 짐을 싸놓고 옷도 교복으로 갈아입었다"고 말했다.[18] 소년 B의 행위는 가장 가혹했다. 자기가 밖으로 나가기 전 준코에게 매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한 뒤, 소년들이 외출 후 돌아와서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무자비한 폭행으로 응수, 나체로 매달아 놓고 복부를 구타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리고 도망가거나 강간할 때 일체 저항할 수 없도록 턱과 팔, 무릎을 탈구시키고 관절을 부러뜨리고 가위로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B의 이 만행은 C의 집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되어 남아있었다.[19] 한마디로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20] 불 붙인 담배로 음핵을 지지는 방식이였다고 진술했다.[21] 츄오-소부선 각역정차 히가시나카노역 열차 추돌사고. 사망자는 기관사+승객 1명.[22] 아무래도 고문을 위한 것이니 비정상적으로 많은 양을 흡입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23] 1985년 크리스마스 라이브 영상을 보면서 분석한 결과, 준코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약 18~20번을 구타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구간마다 "예- 이!"가 4~5번 반복되기 때문에, 준코는 반복되는 고통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물론 최고 볼륨으로 올려놓고 폭행을 했으니 비정상적인 소음에 고통받던 이웃 주민들은 덤. 하지만 아무도 그 집을 신고하지 않았다.[24] 이 정도로 독한 술을 희석시키지 않고 들이키면, 식도와 위장이 화상을 입는다. 보통 소독용 알코올이 70~80%를 왔다갔다 한다.[25] 말 그대로 소독용 알코올을 희석 없이 그냥 생으로 들이부은 거다![26] 熱湯コマーシャル. 당시 SUPER JOCKEY라는 방송에서 열탕에 들어간 시간만큼 홍보할 시간을 주는 코너를 말한다.[27] 하술되어 있듯이, 준코는 납치된 날에도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함께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28] 영양실조가 심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로 호스나 링거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 죽부터 먹으면서 건강을 되찾아간다. 영양실조가 심한 상태에서 빵이나 우유를 먹게 되면 몸에서 거부 반응으로 토사곽란을 일으키며, 심하면 즉사하게 된다. 홀로코스트 당시 해방된 유대인들이 극도로 굶주리고 허약해진 상태에서 음식을 함부로 먹었다가 사망한 사례도 있다.[29] 테니스공보다 더 작은 크기 수준이었다고 하니, 이러한 고문과 폭행이 얼마나 그녀에게 큰 고통을 주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따름이다.[30] 현재 가치의 한화 환산시 약 96만 원.[31] 사진으로 추정하건대, 고토구 와카스 2-3-2(東京都江東区若洲2丁目3−2) 주소지 주변으로 보인다. 현재는 창고가 세워져 있는 도로가 됐다.[32] 사람이나 시체 등을 콘크리트 안에 넣어 굳히는 행위.[33] 도쿄만에 버리기 위해 소년들이 살던 아다치구에서 멀리 떨어진, 도쿄만 한가운데 있는 매립지인 고토구 와카스까지 왔으면서도 구태여 코앞의 바다를 두고 공터에 유기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바다에 유기하면 시신이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 알고있는 매립지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34] TBS테레비에서 방영했던 야쿠자 드라마. 일본판 야인시대라 생각하면 된다.[35] 이전에 B와 C 등 부하들이 여성을 납치 및 강간치상을 저질러 소년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A는 이들이 진상을 불었다고 착각했다.[36] 그렇게 되면 후루타 준코 실종사건이 됐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37] 아무리 막나가는 불량 청소년이라도 이렇게까지 잔악무도한 짓을 하는 녀석은 드물기에 형사가 의심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38] 대부분의 시신 유기 사건의 경우 몇 년이 지나서 백골로 발견돼 신원 확인에 며칠씩 걸리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준코의 시신은 그나마 일찍 발견돼서 바로 다음날 신원이 확인됐다.[39] 준코의 부모는 딸의 시체라도 찾게 해줘 고맙다며 A의 담당 형사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40] 200여개 정도가 그녀의 가슴에 박혀있었다고 한다.[41] 다큐에서도 마지막에는 준코가 소년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42] 오열하는 여학생들 앞에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가 보이는데, 일본의 신토식 장례에서 망자의 명복을 비는 사람이다. 그리고 준코의 친구가 추도사를 읽을 때 집 안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추도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고, 그 옆에서 망연자실한 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다.[43] 단순 환율로 따지면 한화로 5억에 맞먹으며, 1989년엔 엄청난 액수였다. 당시 일본의 버블경제 등을 고려하면 최소 수십억 정도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A의 아버지 미야노 히로후미가 금융업을 해 재산이 대단했다고 한다. 다만 시기가 버블경제 시절이어서 이 정도는 쉽게 버는 사람들도 많긴 했다.[44] 돈을 받으면 자칫 법적으로 '합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합의금 성격이라, 정말로 법적인 처벌을 원한다면 안 받아야 한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해자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가 가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참작되어 처벌을 피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45] 후술하겠지만 아들이 2006년 석방 때까지는 그자리에서 이불판매업을 하며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했어도 도쿄에서 그대로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46] 상술했듯, C는 자신의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되자 어머니를 4시간 동안 구타한 패륜아다.[47] 당시 준코의 아버지는 범행 내용이 너무 끔찍해 아내에게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칼럼 등을 보내며 의견을 물었다. 결국 사건의 내용을 준코의 어머니가 전부 알게 됐고, 누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자살할 것 같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48] 준코는 남자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학생들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납치된 후에 처음부터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49] 소년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지나가는 여성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강간하거나 절도하는 등의 범죄를 90건 넘게 저질러왔다고 한다.[50] 정황상 날짜별로 따지면 유아납치 살해사건 쪽이 먼저 발생한 사건이다.[51] 다만 공구리 문서에 나와있듯이 콘크리트로 시체를 매장해도 악취가 나서 시신 자체는 언젠가 발견될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면 너무 늦게 발견돼서 신원 확인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술했듯 발견 당시 시신도 모습만으론 신원을 몰라서 겨우 남아있던 지문 몇 개로 알아낼 정도였으니.[52] 하지만 오히려 미성년자들이기 때문에 더 흉악해질 수 있다. 미성년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가치관 형성이 아직 덜 형성된 시기인 만큼 어떻게 살고 어떤 환경을 겪느냐에 따라 정말 양극단으로 치닫을 수도 있는 부류다. 촉법소년이랍시고 만행을 일삼는 청소년들이 많아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53]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많은 낡은 아파트들이 재개발 지역으로 정해져 주민들을 다른 데로 이주시키는 건 그 당시 일본에서 흔했다.[54] 당시 일본의 가옥은 내진설계를 위해 법적으로 목조 가옥을 지어야 해서 방음이 안 됐다. C의 집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수십 채의 주택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주택가였다.[55] 아다치구에서 2019년에 500여 점에 달하는 인간과 동물의 백골이 민가에서 발견됐고 90년대 최악의 소년 범죄라 불리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거주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56] 신지는 음독, 노부하루는 훈독이다.[57] 거기다 와타나베 야스시의 얼굴은 아예 미나토 신지의 사진을 잘못 올려놨다. 와타나베 야스시의 진짜 얼굴은 아래 항목에 링크된 다큐멘터리에 나온다.[58] 그는 이때에 대해 "난폭함과 무력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심각한 불량배였고, 이들보다 더 심각한 범행들을 끝도 없이 저지르고 다녔다.[59] 문제의 살인사건 외에도 그가 저지른 범죄들까지 살펴보면 강간치상, 폭행, 살인미수, 강도강간 등 그에게 끔찍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은 약 100명은 넘을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아다치구의 악마라 평해도 손색이 없다.[60] 일본은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성씨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해당 집안의 명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61] 뇌를 둘러싼 지주막이라는 한 겹의 막이 여러 이유로 인해 두 개로 나뉘어지고 그렇게 생긴 공간에 물혹이 차 낭종이 발생하는 것.[62] 재판 당시 "1년만 늦게 저질렀어도 너는 사형이었다"란 말에 "그랬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하려면 미성년 시절 말고는 기회가 없다", "준코는 운이 나빠서 붙잡힌 것 뿐이다. 하필이면 나 같은 놈의 먹이가 됐으니"란 망언을 했다.[63] 8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일본 불량배들이 즐겨 하던 머리 모양이다.[64] 도쿄 전체를 통틀어서 동체급에선 최강이었다는 의미.[65] 85kg의 바벨을 1분 동안 머리 위로 40회 들어 올리도록 하거나, 살충제 스프레이 캔에 라이터를 대고 화염방사기처럼 흩뿌리는 등, 도를 넘는 것이었다고 한다.[66] 그와 그 패거리는 미인들만 타겟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마 준코가 희생양이 된 이유는 그녀가 히로시의 집안을 비꼰 것도 있지만 그녀가 미인이었던 점도 한몫 했을 가능성도 있다.[67] 신주쿠 카부키초를 근거지로 하는 야쿠자 조직. 현재 약 450명의 구성원이 존재한다.[68] 일하던 꽃가게가 극동회 간부의 가게다. 후일 이 가게의 주인인 43세 극동회 조직원은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유는 히로시 패거리가 밤까지 가게에서 일했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69] 어머니 미야노 시즈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하고 있음에도 2006년까지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주변에서 그대로 살다가 아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올 것이 무서웠는지 주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이사를 갔다. 이후 신흥 사이비 종교에 열광하고 있다고 한다.[70] 파칭코 필승법으로 사기를 쳤다고 한다.[71] 반면 일당들 중 가장 힘이 약한 와타나베 야스시는 형무소에서 폭행을 당해 장애가 생겼다.[72] 출소 후 그와 친해진 사람들 모두 히로시가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이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며 그가 살인사건의 주범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명이 떠보자 창백해지며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73] 물론 사기로 먹고 산다는 것 자체가 지금 삶이 심각하다는 뜻이고 끝은 파멸이니 호의호식이니 할 리는 없다[74] 경찰에선 그의 사회복귀를 위해 수감 전 거주지에서 떨어진 곳에 집이나 일자리를 알아봐줬다고 한다. 물론 주민들의 반대는 덤[75] 그 또한 입양되는 형식으로 성을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그를 입양한 카미사쿠는 청소년 범죄자들이 반성하고 사회 적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의도는 좋았으나 이 극도로 변태적인 사이코패스에겐 소용이 없는 일이다.[76] 부두목이긴 했지만 사실상 가장 피해자를 악독하게 괴롭힌 인물이었다. 이유는 그가 준코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준코가 탈출을 시도했기 때문에 광분한 히로시에게 혼이 났었다. 이후부터 그는 히로시보다 더 악랄하게 그녀를 구타하고 고문했다.[77] 그러나 출소한 뒤 일으킨 감금치상 사건의 피해자에게 한 발언을 보면 후배들을 끌어들인 건 히로시가 아닌 본인이라고 했었다고 한다. 허세일 수 있지만 허세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78] 지방 검찰 고위 간부[79] 192~3cm였다고 한다. 이는 일본인의 기준에선 단연코 장신이며 한국에서도 흔치 않은 키이다. 또한 그는 4명의 소년 중 키가 가장 컸다고 한다.[80] 다만 인간의 손뼈는 매우 섬세하고 약해 평생 복싱으로 주먹을 단련해온 마이크 타이슨도 맨손으로 사람을 패다가 주먹이 골절될 정도. 고속 주행 중 노후 트럭에서 떨어지는 판스프링도 뚫지 못할 정도로 튼튼한 앞유리를 맨손으로 파손시킨다는 것은 과장일 확률이 높다.[81] 차량의 앞유리는 아치형인데다 옆유리와 두께, 강도 측면에서 비교가 안 되게 두껍고 단단해서 망치로도 깨기 어렵고 중량급의 격투기 선수들조차 맨주먹으로는 깰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배우 조정석 역시 운동을 잘 하고 탄탄한 몸매를 가졌음에도 영화 뺑반 촬영 당시 차량 앞유리를 골프채로 손쉽게 깨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20대 가량 가격해야 균열이 생기면서 파손됐다고 한다. 반면 차량 옆유리는 건장한 성인 남자라면 손쉽게 파손이 가능하다.[82] 상술된대로 그는 중학생 때 고등학생 폭주족 둘과 시비가 붙어 싸웠지만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데 절대 싸움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는데도 히로시를 잘 따랐다는 건 히로시가 그만큼 잔인하고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걸 입증하는 셈.[83] 당시 일본의 불량 청소년 중에는 잔악한 가정폭력을 일삼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84] 하지만 이미 1999년부터 2001~2002년까지 컴퓨터 관련 업체에 채용된 적이 있다. 2004년 재범 당시 이곳 직원들에 따르면 출소 이후에도 깡패처럼 산 모양이고 실제 야쿠자 사무실에도 드나들었다고 한다.[85] 당시 그 중국인 여성의 부모가 그의 실체를 알고 결혼을 결사반대했는데 중국 공항까지 흉기를 들고 쫓아가서 그녀의 부모를 위협하는 난동을 일으켜 중국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이들의 범죄가 해외까지도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나 처벌은 취해지지 않은 모양.[86] 사실은 자신의 애인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87] 아버지가 검찰 고위 간부인 점을 생각하면 그 빽을 이용해서 중형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88] 하지만 그가 주범이라면 '어떻게 미야노가 주범격으로 기소됐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생긴다.[89] 사건이 진행 중이던 12월경 히로시가 "납치한 지 1달은 된 거 같은데, 온몸이 피투성이에 피고름 때문에 썩은 냄새가 나서 먹을 수도 없게 됐으니 그만 돌려보내자"고 말했다. 하지만 "신고할 수 있으니 위험하다"고 말한 B 때문에 준코는 집에 갈 수 없게 됐다.[90] 피해자가 납치되기 17일전 11월 8일에 19세 여성을 히로시 패거리와 함께 납치했는데 이때 그가 "소년원에서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오아라이에 가자", "오오아라이의 파도가 높고 거칠다"고 말하며 으름장을 놔 도망 의지를 상실케 한 뒤 패거리들이 매우 난폭하고 거칠게 집단 강간을 했고 금품을 빼앗은 뒤 나체가 된 여성을 버려두고 도망쳤었다고 한다. 이때 피해 여성이 영구장애를 입었다는 말도 있다. 여러모로 그들이 얼마나 악질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준코가 죽고 난 뒤에 히로시가 3월 29일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조사받던 사건이 이 사건이다.[91] 사실 일개 공산당원의 자식이 벌인 비정치적 범죄의 책임을 공산당과 연관시키는건 무리수에 가깝다. 이미 타 가해자의 부모는 다른 정당의 정치인이기도 했고.[92] 초반에 C와 준코가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 C의 아버지는 준코가 C의 여자친구인 줄 알았다고 한다.[93] C의 형이 준코를 도와주기 위해 준코가 있는 방을 찾아갈 때마다 준코는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겁에 질린 채 그냥 가버렸다.[94] 사건 당시에도 그의 방에는 각종 권투 훈련 기구와 아령, 덤벨 등이 있었다고 하며 이것들은 준코를 고문하는데 쓰이기도 했다.[95] 국내에는 전적이 변변치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본 기사를 뒤져보면 45전 9패였다고 한다.[96] 당시 아다치구는 야쿠자, 청소년 야쿠자, 폭주족 등이 잡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야쿠자 출신 정치인인 조부와 야쿠자 고위 간부 고모부를 빽으로 두고 있는 히로시의 영향력은 고작 10대였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약혼녀가 그의 누나였으니 섣불리 그를 건드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97] 그러나 힘이 강했다면 준코를 동정하는 여지는 있어도 가담한 폭행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98] 준코가 가혹행위를 당하고 난 뒤 자신에게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나고 질문했던 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99] 하지만 그도 살인 미수를 저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역시 그 놈은 그 놈이다'라고 대차게 까였다.[100] A, B, C는 출소 후 저지른 범죄의 처벌 유무라도 공개됐지만 D는 주범들 중에서도 근황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 살인미수 사건으로 받은 처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 C와 비슷한 처벌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101] 이후 코이치가 집에 귀가해 형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그의 형이 경찰에 신고해 2명의 경관이 C의 집에 방문했으나, A 패거리의 거짓말에 그냥 돌아갔고 사건이 밝혀진 후 해당 경찰들은…[102] 위에 나온 여성 1명이다.[103] 소년들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기 일쑤였는데 그 틈을 타서 몰래 준코를 밖으로 내보내고 망을 보는 것.[104]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에 검찰은 위 소년 4인을 소년부에 송치했다가 소년부 판사의 역송치 결정으로 일반 형사재판을 진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105] 소년 B: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 / 소년 C: 징역 장기 6년, 단기 4년 / 소년 D: 징역 장기 4년, 단기 3년. 사실 징역 17년도 당시 일본에선 소년 범죄 역사상 최대 형량이 구형된 것이었다.[106] A는 구치소에 있는 동안 어떤 책을 읽곤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 깨달았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07] 다만 "이런 극단적인 일화 때문에 소년법을 폐지하는 건 무리"란 게 일단은 일반적인 주장이다.[108] 피해자가 가혹행위를 당한 기간도 대략 40일 정도고, 가해자가 4명이라는 점, 그리고 온갖 극악무도한 육체적, 정신적, 성적 가혹행위가 자행된 것까지 굉장히 유사하다.[109] 일단 준코가 소년들에게 엄청 많이 저항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납치 첫날부터 만화에서 나오는 대로 저렇게 심한 폭력을 가하진 않았다. 특히 준코가 신고할 당시, 소년 A에게 들키기 직전에 경찰서에선 이미 전화를 받은 뒤였다.[110] 완전히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개소리인 것이, 당연히 모방범죄를 막으려면 사건을 알리지 않는 것이 답이다. 이 사건을 널리 알려서 모방범죄를 어떤 원리로 막는다는 말인가? 오히려 모방범죄를 만들 뿐이다. 이 사건에도 그랬지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를 서슴지 않아 피해자들에게까지 상당한 2차 피해를 입히며, 또라이들의 정신세계에 어마어마할 정도로 폭발적이고 변태적이고 저질적인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111] 이 사건의 경우엔 똑같이 가해자가 4명이고, 피해자가 1명이지만 고의적인 살인이라는 점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로 하여 이 사건의 주범격인 하기와라 카츠히코(19)와 우메자와 아키히로(19)는 무기징역을, 무라카미 히로키(19)에겐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비교적 혐의점이 작은 소년(16)은 소년원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