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패러다임 전환 - gwahagjeog paeleodaim jeonhwan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혁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설명했다.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사용하곤 한다. '아이폰 출시로 인해 휴대폰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라던지 '인터넷 강의의 시작으로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처럼 말이다.

 패러다임이라는 언어를 처음 정의한 것은 미국의 과학자 겸 철학자 토마스 쿤이다. 패러다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과학 법칙들은 기원전 300년 경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의되었으며 약 2000년 가량 유지되었다. 대표적으로 17세기에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의해 역학 혁명이 이루어지게 되고 19세기에 라부아지에가 4원소설과 플로지스톤 설을 완전히 부정하며 의해 화학 혁명을 이루었다..

 지금 흔히 알고 있는 뉴턴역학이나 화학 법칙들은 여러 가지 과학적 실험 방법에 의해 합리적이고 보다 정확하게 도출된 이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지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법칙들을 바라보면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이 물, 불, 흙, 공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4원소설을 주장했으며, 물질은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지금 과학에서 4원소설은 틀렸다는 것이 확인되었고(원자, 분자, 쿼크 등) 힘이 작용하지 않아도 물질은 운동할 수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등속도 운동).

 쿤은 어떻게 이 터무니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법칙들이 약 20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를 해결하고자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것이다.

 패러다임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관습, 가치관, 견해, 사고 등을 의미하며, 기원전 300년경부터 2000년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패러다임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쿤이 주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렇다. 먼저 어떤 패러다임이 그 시대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모든 자연현상은 그 패러다임을 통해 설명된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변칙 사례'라고 부른다.

 변칙 사례가 나오면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패러다임을 지키거나 예외로 두고 일단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수많은 변칙 사례가 쌓이게 된다.

 이때 어떤 사람이 변칙 사례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렇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칙 사례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서서히 시대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지동설이 천동설로 변한 것도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지동설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변칙 사례들을 천동설로 간단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이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세기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내세우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였다.

 하지만 100년 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은 다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켰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는 중력이 당기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휘어있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나온 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 이해하는데 생소하지만 지금 역학의 시대는 아인슈타인의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과학기술이 진보할 수는 있지만 자연의 섭리 및 진리에 다가갔다고 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자연현상을 모두 과학적 실험 방법을 통해 파악하려 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주장하지만 사실 아무도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에 다가간 것인지 멀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마치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다.

이곳은 2017년 이전에 올려진 아멘넷 오피니언 칼럼 글입니다. 이름으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황상하 | 김동욱 | 최송연 | 허경조 | 이수일 | 송흥용 | 김정국

패러다임의 변환(Paradigm shi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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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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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세무엘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이 1962년에“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이 책의 영향력은 그 책이 출간 되자 곧 그 주제를 논의하기 위한 여러 개의 학회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과학의 변화 또는 과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을 논의하고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용어입니다. 과학은 점진적이거나 지식의 축적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정상과학1 → 위기 → 과학혁명 → 정상과학2>의 과정을 거처 혁명적으로 발전하며, 과학혁명 과정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방식에 따라 형성된 과학이 새로운 정상과학이며, 기존의 정상과학을 대치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쿤은 과학 혁명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이론이 바뀌면, 동일한 자연 현상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보인다고 하여 과학 발전의 불연속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쿤은 이론과 이론 사이의 단절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단절은 정상과학1과 정상과학2를 양립불가능할 뿐 아니라 공약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하여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과학의 발전을 종교적 개종에 비유하며, 과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쿤은 과학이 혁명의 진행 방식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자연과학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자연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서양 학문의 전형이라고 평가 받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학문들은 자연과학적인 성격을 가지고자 했으며, 이것은 학문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쿤은 과학역사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근대 이후 과학의 발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즉 과학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의 발전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쿤은 이 논의를 위해서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이 개념은 단순히 과학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다양한 분야의 논의를 설명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쿤의 논의는 인간 이성의 산물인 자연과학이 결코 자연에 대한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쿤의『과학 혁명의 구조』이후, 과학의 논의에서 진리는 더 이상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되지 않고, 과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논의해야 했을 정도입니다. 진리는 모든 분야의 과학적 논의에서 끊임없이 추구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쿤의 논의에서 보여 준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더 이상 진리를 논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결과 쿤의 논의는 상대주의로 해석되었고, 더 나아가 모든 분야에서 진리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과학사를 통해 보여주는 정상 과학과 패러다임의 관계의 대표적인 예가 광학에서 제시되었습니다. 물리 광학의 경우, 18세기까지는 입자설이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파동 이론이 모든 교과서에 빛에 관한 이론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20세기 초에는 빛을 입자와 파동의 두 가지를 수용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패러다임에 따른 정상 과학의 변화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쿤이 제시한 중요한 개념은 ‘패러다임 변환’(paradigm shift)과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입니다.

    패러다임은 패턴, 예시, 표본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 παράδειγμα를 영어화하여 만들어낸 신조어입니다. 토머스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은 한 시대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이나 방법, 문제의식 등의 체계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천동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다른 모든 천문 현상은 천동설의 테두리에서 설명되었습니다. 토마스 쿤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이론 체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과학혁명의 단적인 예로 제시하였습니다. 쿤에 의하면 이러한 과학 이론의 변화는 어느 한 이론이 그르고 다른 한 이론은 옳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 전체가 갖는 신념과 가치체계가 변화한 것이며, 문제 해결 방법이 달라진 것이라고 파악하였습니다.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현대의 표준 모형 역시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고대 희랍에서 파라데이그마는 법률 용어인 판례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또 예술 영역에서는 모델이라는, 즉 예술가의 작업을 위해서 설정되는 표현 대상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 토론에서 유용한 예증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용어는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쓰였던 표현인 셈입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누구누구는 타(他)의 모범이 된다.”, “무엇이 누구를(무엇을) 위한 좋은 본보기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때의 모범이나 본보기가 요즘 흔히 쓰이는 패러다임이기도 합니다.

    이 용어가 학술적 의미로 쓰였던 흔적은 플라톤의 이데아론(또는 형상 이론)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idea)는 현실 세계에 있는 다른 사물들을 위한 파라데이그마입니다. 현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이데아를 본떴거나, 이데아를 본보기 삼아 이루어진 그런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패러다임입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데아는 완전할 수 있으나, 이를 본뜬 것들은 당연히 불완전합니다. 본뜬 것이 이데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뜬 것의 불완전성은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데아 때문이 아니라, 그 불완전성은 본뜬 것이 현실 세계에 있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적 한계 때문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일반 명사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매스터만(Margaret Masterman)은 이 용어를 크게‘형이상학적 패러다임’, ‘사회학적 패러다임’, ‘구조물 패러다임’으로 구분하였지만,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의 예만도 무려 20가지가 넘는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이 용어를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역사적 논의에서 찾아질 수 있는 여러 가지의 패러다임들을 포괄하는 패러다임이 아닌, 어느 특정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쿤은 패러다임을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져 쓰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쿤의 패러다임에 따른 변화란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바로 세계관, 가치관, 어떤 관점에 해당하는 용어로 이해되었습니다. 어느 분야의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도 그렇듯이,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관점, 세계관, 인생관을 갖고 살아갑니다.

    쿤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일종의 개종 경험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상 과학의 옛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은 옛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풀어 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자연스러운 변화는 불가능하고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혁명은 정상 과학이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 안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때 나타나게 되는데, 그 방법은 대안을 모색하는 것과 기존의 패러다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죽어야 산다.’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혁명이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일 것입니다. 토마스 쿤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의미심장합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과학의 발전이 불가능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라야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교회 개혁도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 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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