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있는 경험 시쓰기 - gachiissneun gyeongheom sisseugi

질문

엄.... 가치있는 경험으로 시를 쓰라 그러는데 가치있는 경험조차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데 아무 경험이나 좋으니까 반어 역설 풍자 중에 하나 골라서 간단한 시 써주세요! 급해요!

답변1개

1번째 답변

가치있는 경험 시쓰기 - gachiissneun gyeongheom sisseugi

땅 위의 동물들이 달리기 대회를 열었노라

위풍당당 기세등등 크고빠른 동물이 널렸구나

하지만 간덩이는 전부가 콩알만하니,

토끼는 영양을 보고 포기하고,

영양은 사자를 보고 포기하고,

사자는 치타를 보고 포기했는데,

정작 치타는 감기에 걸려 그 또한 포기하고 말았네

모두가 겁을먹고 포기하였거늘

다만 거북만이 포기않고 출전했네

결국 거북 만이 홀로 금의환양 했다더라

도전해보지도 않았는데 상대를 보고 포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동물의 세계에 빗대어 풍자한 시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상황인데, 연설대회때 다들 자신보다 잘하는사람이 출전할 줄 알고 다 출전을 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저 혼자 반대표 출전해서 상탔습니다ㅋㅋㅋㅋㅋㅋ

채택 꼭! 부탁드립니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로 감사할 때 참고해주세요.

2020.05.03.

1.

2005년 봄, 저는 광동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시집을 두 권씩 사고, 시 해설책을 한 권씩 샀지요. 시집에서 자기 삶의 경험과 연관지을 수 있는 시를 한편 뽑아서 그 시와 이을 수 있는 자기 인생을 썼습니다.

2.

이주일 동안 저는 도서관에 있는 시집 가운데 200권을 뽑아서 학생들 앞에 두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마음에 드는 시집을 세 권씩 골라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두 주 동안 학생들은 그때그때마다 시집을 서너 권씩 집어들고 가서 읽고 얘기했고, 저는 학생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그 시는 어때?' 하고 묻고 이야기나누었습니다.

3.

가끔 표정이 좋은 않은 학생들, 그러니까 시가 도무지 몸에 와닿지 않는 학생들은 제가 다가가서 손잡고 시집이 쌓여 있는 데로 와서, 웬만하면 공감할 수 있는 시를 펼쳐서 '이 시를 읽어봐'라며 건네주었습니다. 임길택 선생이 쓴 <탄광마을 아이들>에서 '완행버스'나, 박노해 시인이 쓴 <노동의 새벽>에서 '이불을 꿰메면서'와 같은 시였지요.

4.

작은글씨로 에이포 한쪽에 시를 적고, 남은 자리에 그 시와 연관된 자기 경험을 쓰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이 써낸 글을 보면서, 저는 가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떤 글을 보고는 웃었고, 어떤 글을 보고는 가슴이 갑갑했습니다. 다들 제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사는 생명체들이었습니다. 종종 눈물겹습니다. 재밌고, 고단한 우리네 사는 모습이 학생들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5.

학생들은 시집에 있는 시 가운데 흉내내볼 만한 시를 골라서, 그 틀을 따고 알맹이는 자기것을 넣어 모방시를 써보고, 창작시를 써보았습니다. 학생들이 쓴 시는 모아서 나중에 올려놓겠습니다. 광복절 연휴라 세상이 다 쉬니, 저도 쉴 수 있어서, 이 활동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6.

그제는 경북중등국어교육연구회 연수가 대구효성카돌릭대에서 있어서 거기에 가서 강의를 하는데, 제 이야기가 끝나고 어느 분이 다가와서 물어보셨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어떻게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느냐구요. 입시문제집은 풀지 않느냐고 궁금해하셨습니다.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서 이상을 쫓는다면, 혼자는 멋질 수 있지만, 여럿이 함께 세상을 바꾸어가지 못합니다. 그 물음은 그래서 소중했습니다.

입시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하는 수업을 여러 활동으로 하고, 그 다음에 그 내용과 관련되어 입시에서 출제된 문제를 함께 작은모임에서 대화하면서 푼다고 했습니다. 시집을 읽고, 시에 대해 글을 쓰고, 시를 짓고 난 다음에, 따로 한두 주 시간을 내어, 수능에서 예전에 나온 문제를 함께 풀어봅니다. 문제풀이 수업은 현장에서 소모적으로 될 때가 많은데, 작은모임 토론 방법을 쓰면, 기력이 떨어져 잠에 빠지거나 무기력해하는 학생이 거의 없게 됩니다.  이 방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자세히 적겠습니다.

7.

학생들에게 권하면 괜찮게 호응을 얻을 시집 목록을 고민해서 만들어두고, 그 목록을 손에 들고 이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에 있는 시집 200권에서 자유롭게 자기 마음에 들어오는 시집을 찾으라 했더니, 제 예상을 뛰어넘어 학생들이 시집을 집어들어서 놀랐습니다. 공광규가 쓴 <소주병>이나 김선우 시집은 제 학생들이 소화하기에 어렵거나 제 학생들 정서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반마다 그 시집을 고른 학생이 두셋씩 꼭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그 시집이 진짜 와닿느냐?'고 의심적게 물어보았는데, 그 학생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그 시집이 아주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은 저에게 깊고 날카롭게 생각하도록 했답니다.

8.

배창환 선생님이 대구에 계십니다. 이 분이 쓴 책 <이 좋은 시 공부>(나라말)에 이 활동은 많이 기대어 있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시 수업에 견주면, 저는 주변에 피어난 잡풀일 뿐입니다. 국어교사모임 출판부인 '나라말'에서 펴낸 <국어시간에 시 읽기 1>을 엮은 분이시기도 하지요. 이 시선집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학생들이 시를 공부할 때 아주 쓸 만한 시 모음 책입니다.

9.

학생들이 산 책은 모두 세 권입니다. 개인시집 한 권, 시선집 한 권, 해설책 한 권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권한 시섭집은 이렇습니다. 개인시집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롭게 사고, 시선집은 다섯 사람이 짝을 지어 작은모임을 이룬 뒤에, 그 모임에서 같은 책을 사도록 했습니다. 같은 책을 다섯 사람이 들고, 함께 의논해가며,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수업 때 설명할 때는, 작은모임에 가서 대화하는 식으로 되는 거지요. 전체 설명보다 작은모임에 가서 얘기하기를 더 많이 했습니다. 전체 설명은 아무래도 일방적이게 되어 집중이 덜 되는데, 작은모임에 다가가서 설명하면 다섯사람과 제가 마주하기에 집중도가 아주 높아집니다. 말을 많이 하고 전달되는 내용이 적게 되는 것보다, 말을 적게 하고 깊게 전해지는 쪽이 시 수업에서는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도종환 엮음,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나무생각

김용택 엮음, <시가 내게로 왔다 1-2>, 마음산책

배창환 엮음, <국어시간에 시 읽기 1>, 나라말

이명주 엮음, <국어시간에 시 읽기 2>. 나라말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 <문학시간에 시 읽기 1-3>, 나라말

포항국어교사모임, <시 맥락 읽기>, 나라말

전국국어교사모임 매체연구분과, <삶의 시 삶의 노래>, 나라말

김근태 외,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6>, 문학사상

10.

제가 학생들에게 권한 시 해설책은 이렇습니다. 시 해설책은 학생들이 혼자 공부할 때 쓸 공부책입니다. 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 잘 알지 못할 때, 혼자 참고해서 깨닫는 일에 쓰는 책입니다. 자기 기량에 맞는 책을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대로 골랐습니다. 시 해설책이 열다섯 권쯤 되는데, 그 가운데서 이 네 권을 뽑았습니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좋은 책이지만, 시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로 나와 있고 시 한편 한편에 대해 파고드는 내용이 약해서 넣지 않았습니다. 책 순서가 앞에 있을수록 쉽고 편안하고, 뒤에 놓인 책일수록 딱딱하고 어렵습니다.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푸른나무

 : 한편한편에 대한 꼼꼼한 해설은 없지만, 시가 어떤 느낌인지를 알려주는 편안한 책

김용찬, <시로 읽는 세상>, 이슈투데이 

 : 쉬운 설명, 편안한 책, 무난하게 읽을 만하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1-2>, 작가정신

 : 꼼꼼한 해설이 돋보인 책. 그러나 꼼꼼한 덕분에 약간 졸리기도 

권정우, <우리 시를 읽는 즐거움>, 북갤럽

 : 참고서 설명 같은 책. 곧바로 입시에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는 책  

 - 구름배 송승훈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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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序詩 (서시)>, 이성복

이번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날 나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오후가 다가오고 있는 오전에 일어났다. 전 날의 피곤했던 일들로 인해서 더 늦게 일어날 것만 같았던 나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다른 날과 달랐던건 무엇을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고, 밥맛도 나지 않고, 그냥 편한대로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고 싶은 뿐이었다.

식사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가고 있었는데 내 배는 조용했다. 밥이 먹기 싫었다. 그래도 이대로 있으면 내가 더 한심스러워 질 거 같아서 밥을 차렸다. 계란 후라이에도 파, 양파, 마늘 등을 넣어 일부로 맛있게 반찬을 만들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배는 안 부른데 더 먹기가 싫었다. 내가 왜 이러지? 억지로 억지로 밥을 겨우 다 먹었다.

그때는 한참 ‘개인 미니홈피’라고 “싸이”를 하는 애들이 많이 있었다. 친구 싸이에 들어가 이 사진 저 사진을 보고, 여러 글을 보며 아름다운 글귀나 사진이 있으면 저장도하고. 오랜만에 친구 여러 명의 싸이에 가봤다. 예전과 똑같은 것들도, 더 잘 가꾸어 놓은 것도, 아에 변화가 없어 실망한 것도, 없어져 버린 것들도 있었다. 이렇게 친구들은 조금씩이라도 바뀌고 있는데, 나는 에전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아서 약간의 소외감을 느꼈다.

저녁 늦게 운동가기 위해 집 앞을 나섰다. 도장은 우리집에서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방학동안 나는 버스비도 아낄 겸, 운동도 할 겸 그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 결과 지금의 튼튼한 다리가 태어났다. 이렇게 흔히 거닐던 거리가 그날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노래를 들어도 대충 들어서 잘 못 듣던 노래가사들도 다 들렸다.  땅은 마치 돌덩이처럼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그래도 ‘이래야 겨울이지.’하며 길을 걸으니 그나마 괜찮아졌다. 날씨는 다른 날보다 더 춥게 느껴졌지만 걷다보니 떨림이 멈췄다. 겨울저녁은 해가 금방 져서 어둡기가 마치 겨울바다처럼 스산하고 칡흙같이 어둡지만 그날은 유독이 밝았다. 그래, 그날은 대보름날이었다. 달 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 같았다. 어제까지는 멀리 저 앞을 바라보면 뭔지 모를 뿌한 것이 있었는데, 그 날은 이 곳, 저 곳 사방이 너무 선명했다. 깨끗했다.

드디어 그녀의 집 앞까지 왔다. (그 곳은 우리집과 도장의 거의 중간 부분에 위치해 있다.) 시간은 9시가 조금 부족했다.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이며 어제까지의 내 발자국을 찾았다. 눈이 오고, 그 눈이 녹고. 그로 인해 내 발자국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발자국 몇 개를 찾아 지난 시간을 추억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손전화를 열었다. 그녀의 번호를 누르고 준비도 제대로 못한 체 수화기를 귀로 옮겼다. 역시 피아노 소리만이 들렸다. 잠깐 음이 멈출 때도 있었지만 얼마 전처럼 놀라진 않았다. 피아노 소리가 완전히 멈췄어도 정적만이 흘렀다. 무심히 들리는 한소리 “여보세요..”내가 했던 말이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쉬움이 날 집어삼킬 듯이 커져만 갔다.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괜히 오늘 세상을 변화시킨 달도 보고, 끝 모르게 흘러만 가는 개울을 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 곳에 그렇게 서있으면 언젠간 그녀가 나의 연락을, 나의 부름을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한발 한발 내 딛는 발걸음이 너무나 무겁지만 일부로 씩씩하게 걸으려고 애를 썼다. 팔엔 힘이 들어가고, 몸은 바닥의 땅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갑자기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 나는 정처 없습니다’ 이 부분이 그때의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대목이다. 때문에 이 시를 읽을 때 다시 한번 나는 그 때의 부질없던 기다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운동이 끝나고 보니 내 손전화엔 그녀의 흔적이 있었다. 나의 부름이 그녀에게 살짝이나마 닿은 것이다. 나의 부름이, 그녀의 흔적이 내용 없는 이야기에 그칠 뿐이겠지만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방학 내내 살펴봐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이 연락을 나는 달이 나를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하길 ‘역시 보름달은 특별해.’

집에 와서 나는 옥상에 올라가 달을 보며 말을 걸었다. 그 달에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여기서 ‘미루나무’는 나에게 달과 같아 보인다. 내가 한 말들은 저 높이 있는 달에게 가기 위해서 정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달에게 가서 테두리를 만들었다. 그 흰 테두리가 나의 소망이다.

가끔가다 나는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별을 보곤한다. 달과 별은 나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 달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로 하여금 떠올리게 해주고, 별은 지친 내 몸과 마음에 힘을 준다. 누군가가 나에게 ‘지금 나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 라고 물어보면 나는 당당하게 말하겠다. ‘보름달이 떠있는 날 옥상에 올라가 누워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이라고.

한연수 (광동고등학교 3학년 3반 han_)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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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하남면

농협창고 옆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는

여기저기 풀만 쑥쑥 자라고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몇백 년 살다 죽을 거라고

농촌에서 이 고생 저 고생 다 하고 살 거냐

푸념 늘어놓던 사람들

하나 둘 도시로 도시로 떠난 지 오래

길 건너 나락논 곁에

높다랗게 지은 예배당 꼭대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커다란 글자가 지나가는 바람에

먼지만 뒤집어쓰고

가끔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풀벌레들 우는 소리만이

어린이 놀이터에 맴돌다가

삐걱거리는 그네를 타기도 하고

녹슨 철봉에 매달리기도 하고

<풍 경> 서정홍

‘밀양 하남면 농협창고’라는 이 구체적인 장소는 ‘농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냥 ‘농촌’이라는 짧은 한 단어보다 ‘밀양 하남면 농협창고’라는 구체적 표현을 통해 독자들이 더 현실적이고 더 섬세하게 시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밀양의 한 어린이 놀이터에는 어린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기는커녕 무성한 풀들만이 해바라기처럼 쑥쑥 자라고 있다. 그만큼 아이들이 없다는 뜻이다. 급격하게 줄어드는 농촌 아이들의 수는 이미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농촌에서는 활기찬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뛰노는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서정홍 시인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신나게 뛰어다는 모습을 ‘놀이터’라는 장소에 비유해서 정적에 휩싸인 놀이터의 모습을 글로 표현해 현재 농촌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농촌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는 원인은 아이들의 아버지나 어머니, 즉 젊은 농촌 사람들이 점점 농촌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백년 살다 죽을 거라고 농촌에서 이 고생 저 고생 다 하고 살 거냐’라는 표현은 지금의 농촌에서 이런 죽을 고생하지 않고 도시로 나가 훨씬 잘 살아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거라는 농촌 젊은이들의 바람과 농촌에 대한 절망과 싫증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농촌 젊은이들은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도시로 도시로 끝없이 개미행렬처럼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농촌에는 힘없고 활기 없는 노인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고 농촌은 활기와 희망을 잃어간 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길 건너 나락논 곁에 서 있는 커다란 예배당도 더 이상 사람들이 오가지 않아 흙먼지만 뒤집어쓰며 애타게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목청껏 “주 예수를 믿으라”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크게 글을 써서 제일 잘 보이는 꼭대기에 걸어놔도 한 번 고개 들고 쳐다봐주는 사람이 없다. 이 역시 인적 없는 농촌의 썰렁함과 황폐함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정말 지나치기만 할 뿐 한 번이라도 차 문 열고 농촌에 내린 적이 없다. 낮에는 쌩쌩 달리며 커다랗게 소리치는 자동차 굉음과 밤에는 여치, 귀뚜라미와 같은 풀벌레들이 서로 자기 짝 찾는다고 목청껏 울어댄다. 그리고 이런 소리들만이 인적 없는 놀이터를 빙빙 돌아다니며 그네 타기도 하고 녹슨 철봉에 매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난 여기서 자동차의 굉음과 풀벌레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점점 죽어가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소리치는 아우성 같다. 사람들이 소리를 내지 않으니 자신들이라도 소리를 내어 죽어가는 농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작은 응원의 몸부림이라고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이 시에서는 점점 피폐해지고 황폐해져가는 농촌의 현실을 보고 서정홍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잘 드러나 있다. 나 역시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라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런 점을 이해하고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이 시는 한 구절 한 구절 내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요즈음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의 어깨와 허리가 점점 더 구부정해지고 있다. 점점 무거워져만 가는 농촌 생활과 그에 따른 빚 때문에 허리를 못 펴시고 사신다. 조금이라도 농촌 생활이 좋아져서 할아버지 할머니들 허리가 펴고 어깨가 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농촌에서도 사람들의 활기차고 신나는 삶의 소리가 마을 가득히 구석구석 울리는  그런 날이 와서 나 또한 큰 소리로 웃어보고 싶다

유은미 (광동고 3학년 1반 1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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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약수를 주전자에 넣고

출렁출렁 산길을 내려왔다

까치가 눈앞에서 날아오르고

여지껏 내 생의 헛된 욕망의 소식들과

솔방울처럼 말라버린 기다림들이 푸르르

깃을 치며 떠올랐다 내 발걸음은 약수를 길어

산길을 내려오는 것만도 벅찬 호흡인데

산 위의 물은 어떤 절망의 터널을 뚫고 내려와

이렇듯 온전한 약수로 샘솟았는가

주전자의 벌린 입처럼 해찰하며

냇물의 나른함으로 흘러내려온 내 삶의 버릇이

아깝게 자꾸 약수를 쏟게 했다

삶이라는 것도,

마음대로 출렁대며 내려오다보면

약수처럼 슬금슬금 쏟아져버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난 차 한 잔과 국물 한 사발이 더 필요했으므로

다시 오던 산길을 거슬러올라갔다

까치 떼가 지금까지 걸어온 내 발길의 기억처럼

날아오르고, 난 다시 거슬러올라갈 수 없는

내 삶의 산길을 생각했다

<약수를 길어오며-철화네 집, 벽제에서>, 유 하

벌써 5개월이 지났다. 할머니가 내 곁은 떠난지도. 시간은 정말 르다는 걸 새삼 느낀다. 매년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느끼곤 했지만 할머니와 헤어진 후부터 하루하루가, 한 달 한 달이 정말 빠르다.

작년 10월, 할머니는 암으로 86년의 고단하셨던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4년 전 임파선 암에 걸리신 것이 발견되었을 때 항생제 치료를 해야 한다는 병원의 지시에 따라 항생제 치료를 하셨다. 하지만 항생제 치료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머리카락이 빠지고 식사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셨다. 할머니 자신께서도 치료를 견디기 힘드시고 그걸 보는 가족들도 힘들어하자 할머니께서는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냐고 하시면서 항생제 치료를 포기하셨다.

초등학생 때 외삼촌이나 친척분들이 우리집에 오실 때마다 날 보면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지연이 니가 할머니 생각을 제일 많이 할 거라고. 그 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와 매일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셔도 난 별로 슬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나는 철이 없게도 할머니와 떨어져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기 때문에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고 늦게까지 친구네 집에서 놀 수 없었다. 단지 그런 이유로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가족만 따로 나가서 살았으면 하고 생각하곤 했다. 중3때 할머니께서는 큰외삼촌 댁에 가시고 우리 가족만 장현으로 이사올 때도 10년 넘게 살아온 할머니와 떨어지는 것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두 달 동안은 많이 울고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사소한 일상 하나까지도 할머니께 신경쓰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리집에 오셨던 날 저녁 늦게까지 숙제를 하는 날 보시고 이제 그만 자라고 하셨을 때 퉁명스럽게 마저 해야 한다고 말했던 때가 생각난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그동안 할머니께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하나 후회가 되고 가슴에 남으면서 내가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께서 편찮으신지 오래됬고 병원에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달이나 입원해 계셨는데, 가까운 곳에 살고 할머니 병원 앞을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매일 몇 번씩 지나치면서도 할머니 뵙는 걸 미루고 잊어버려서 결국 돌아가시던 날 겨우 두 번째로 병원을 찾았던 내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할머니께서는 매일 나를 기다리셨을 텐데. 다들 멀리 떨어져 살고 큰외삼촌이나 엄마는 일이 끝난 저녁에만 찾아뵐 수 있었으니 낮에는 혼자 계시면서 날 기다리셨을 텐데.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갔던 날 보시고 우리 지연이 밖에 없다고 하시던 할머니.

하루하루 생활이 바쁨에 하나 둘 기대다보니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거슬러올라가려 해도 다시 거슬러올라갈 수 없고 다시 주워담으려 해도 주워담을 수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할머니께 해 드리고 싶었던 것을 다시는 해 드릴 수 없다. 차 한잔과 국물 한 사발을 위해 다시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는 걸  다시 거슬러올라갈 수 없다는 걸 안 뒤에 깨달은 바보같은 나.

할머니 산소에 한 달 전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 할머니와 약속했다.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말자고.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후회하는 일을 겪지 않을 순 없겠지만 지금처럼 후회하는 일은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다시 거슬러올라가도록 하지 말자고. 제일 괴로운 건 나 자신일테니까.

조지연 (3학년4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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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나태주

내가 외로운 사람이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어떤 다짐도 어떤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고등학교엘 입학했다. 생각해보면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닌 2년 전이지만 그 때와 지금의 나를 비교 하면 왜 이렇게 달라 보이는 건지 새삼스럽다. 고등학교 1학년. 그냥 무작정 열심히 생활해보자.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던 무렵 그 때 난 1학년 6반 반장이었다. 몇 주 적응 하고 나니 전교생 반장들이 모여 선후배들과 함께 학교 문제를 가지고 회의하고 고민하는 전교회의에 참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땐 회의의 주제를 가지고 생각해 보기는커녕 그냥 참가하는데 만족했다. 아직 학교에선 제일 어린 1학년이고 발표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회의에 몸만 참여했지 내 머릿속엔 다른 생각들만 가득했다.

난 그때 회의에 집중 하지 않았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회의 장소는 2학년 선배들이 자율학습을 하는 공간이었다. 난 회의의 주제가 무엇인지 관심도 없었고 지루했기 때문에 책상 앞에 있는 물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율학습 공간이니 있어봤지 책과 필기도구뿐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물건은 “수학의 정석” 이라는 문제집이었다. 말로만 듣던 “수학의 정석” 호기심으로 책을 만지작거려보았다. 그리고 그 물건의 주인은 xxx 라는 선배였다.

  그 선배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것도 없었고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나는 호기심으로 그 책을 점점 펼쳐 보고 있었다. 꼭 보겠다는 생각으로 열어본 건 아니었지만 나는 점점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책에 쓴 것은 책 주인인 선배가 문제집 맨 앞에 쓴 일기였다. 남의 일기를 몰래 보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글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글을 보고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내용은 이러 했다. 나는 왜 사는가? 내가 이 문제집을 가지고 어떻게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그리고 세상엔 나보다 힘들고 더 슬픈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 가슴이 뜨거워지고 함께 가슴이 아프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가 진심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내용이었다.

난 정말 그 선배의 글에 너무나 감동했다.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 줄 수 있고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그 선배의 다짐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그런 멋있음을 부러워하고 감동 했던 이유는 나는 한 번도 그런 다짐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많이 이기적인 편이다. 남을 위해 내가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기는커녕 내 것, 그리고 내주위에 있는 사람만을 챙기는데 바쁜 삶을 살아온 나다. 그 글을 보고 너무나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내 가슴은 점점 뛰고 있었다.

선집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기도”라는 시가  그때의 내 경험을 잔잔히 회상하게 만든다. 한편으론 소름 돋을 정도로 내 마음에 들어가 보고 이시를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6연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만 하자는 생각만 했던 내 자신에게 답을 주기위해 시인이 내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그 때 아무것도 모르고 공부만 하려고 덤벼든 나에게 이 시를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까지 남는다.

그 후로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나도 모르게  그 선배처럼 새 문제집을 사면 문제집 앞장에 그런 다짐의 말들을 쓰곤 한다.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진심으로 아파 할 줄 알며 진심으로 눈감고 기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한다. 언제한번 그렇게 쓴 내 “수학의 정석”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아직까지 그 문제집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생각을 한다. 이제는 그 문제집 앞장에 쓴 내 다짐을 보고 그 사람도 그런 마음가짐을 갖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광동고등학교 3학년 2반 서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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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허기진 오뉴월 뙤약볕 아래

호미를 쥐고 밭고랑을 기던 당신 품에서

말라붙은 젖을 빨며 / 당신 몸으로 갈 고기 한 점 쌀밥 한 술

연하고 기름진 것을 받아먹으며

거미처럼 제 어미 몸을 파먹으며 자랐습니다

풀나물죽 쑤어 먹고 어지럼 속에 커도

못 배워 한 많은 노동자로 몸부림쳐도 도둑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 안하고 놀고 먹지도 /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나로 하여 이 세상에서 단 하나 / 슬픔을 준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오직 하나 소원이라면

가진 것 적어도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이었지요

저는 열심히 일했고 떳떳하게 요구했고

양심대로 우리들의 새날을 위해 싸웠습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우리에겐 풍파가 몰아쳤고

당신은 더 불안하고 체념 속에 주저않자

다시 나를 붙들고 애원하며 원망합니다

어머니 / 환갑이 넘어서도 파출부살이를 하는

당신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

가난했기에 못 배웠기에

수모와 천대와 노동에 시퍼런 한 맺혔기에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은 / 마땅한 우리 모두 비원입니다

오! 어머니 /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염원을 오순도순 평온한 가정에의 바램을

잔혹하게 짓밟고 선 저들은 / 간교하게도 당신의 비원 속에

굴종과 이기주의와 안일의 독사로 도사리며

간악한 적의 가장 집요하고 공고한 혓바닥으로

우리의 가장 약한 인륜을 파고들어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어머님의 간절한 소원을 위하여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비원을 위하여

짓눌리고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불효자가 되어 / 저 참혹한 싸움터로 울며울며

당신 곁을 떠나갑니다

어머님의 피눈물과 원한을 품고서

기필코 사랑과 효성으로 돌려드리고야 말

우리들의 소중한 평화를 쟁취하고자 /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펄럭이며 빛나는 얼굴로 돌아와

큰절 올리는 그날까지 / 어머님, 우리는 천하의 불효자입니다

당신 속에 도사린 적의 혓바닥을

냉혹하게 적대적으로 끊어 버리는 /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옵는

천하의 몹쓸 불효자 되어 / 피눈물을 뿌리며 싸움터로 나아갑니다

어머니 / 어머니                             (어머니), 박노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하우스 농사를 지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남의 집 밭일을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랑 결혼한 처음부터 일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고 덕분에 어머니는 힘든 일들을 혼자 도맡아 하셔야했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임신해 배가 불러왔을 때도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서 풀을 메셨다고 한다. 장남에게 시집와서 딸만 셋을 낳고 아들하나 못 낳아서 하루하루 눈치를 보면서 사셨던 어머니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밭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시댁 식구들의 눈으로 볼 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매일 밭에서 보내셨던 어머니는 내가 세상에 나오려고 했을 때도 밭에서 일을 하시다가 진통을 느꼈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힘들게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나의 어머니는 또 딸이라는 말에 내가 너무 미워서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내가 우리 집에 복덩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아버지도 마음을 잡고 일을 하셨고 내가 2살 때부터인가 조금씩 모아놓은 돈으로 하우스를 얻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나는 한참 아장아장 걸어 다닐 나이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계시면 옆구리로 파고들어 젖을 먹고 나가곤 했다고 지금도 웃으시면서 말씀하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늦둥이에 막내였기 때문에 아버지 눈에는 내가 많이 귀여웠나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은 좋았지만 아버지께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는 날이면 나는 밤마다 잠도 못자고 아버지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렇게 술을 먹고 들어오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항상 눈물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술만 먹고 들어오면 온 집안 식구들을 괴롭히셨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싸움을 피해갈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쯤에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그이후로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끊으셨고 농사일에만 전념하셨고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시면서 행복해하셨다. 그때부터 우리가족은 정말 가정다운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행복초자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는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나마 어머니 얼굴에 남아있던 소박한 웃음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한참 힘들었던 시기에 나는 어머니에게 힘은 되어주지 못할망정 어머니의 속을 많이 태웠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매일 친구들과 밤거리를  헤매며 사고도 많이 치고 다녔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수시로 학교에 불려오셨다. 그렇게 학교에 불려 오셔서 선생님들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마치 살인을 저지른 죄인처럼 죄송하다고 빌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돌아오면 안방에 나를 불러 앉혀놓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시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어머니 얼굴에 주름살을 하나씩 둘씩 만들어 드렸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주름살이 나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쭈글쭈글한 어머니 얼굴에서 주름살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나는 선생님들 앞에서 자식 때문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빌었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지금도 고3이라는 이유로 어머니께 매일 짜증내고 싸우고 하지만 앞으로는 어머니의 웃음을 자주 발견했으면 한다.

이윤 (광동고등학교 30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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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복 싶으시다고...

외할머니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것만 같던...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번에 야자를 하지 않고 집에 간 적이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선생님께 허락을 맡고 집에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방바닥에 널브러져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집에 들어오셨는데 친구분과 함께였다. 가끔 집에 오시던 내가 아는 아주머니도 함께였다. 그분들과 함께 오는 엄마는 어쩐지 이상해 보였다. 전에는 안 먹던 술 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인사를 하며 의아한 눈으로 엄마를 보자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예쁜 딸 두고 어딜 가. 내가 어떻게 가..” 순간 그 말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지만 아주머니들이 엄마에게 왜 그런 말 하냐고 엄마에게 눈치를 주고, 오늘따라 이상한 엄마를 보자 갑자기 이상한 상상이 갔다. 엄마가 무슨 이상한 병이 생긴 건 아닐까? 저 말의 뜻은 뭐지? 아주머니들의 태도가 이상하다, 등등 온갖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교차했다. 내방에서 나는 안 좋은 상상을 하며 눈물을 흘리며 숨죽여 울었다. 울면서 엄마가 전화를 할 때마다 귀를 곤두세웠다. 전화를 하시면서 엄마는 건강이야기를 하셨다. “엄마가 알면 걱정할텐데..”“괜찮아”등 이모에게 하는 말을 듣고는 나는 병이 엄마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엄마에게 울면서 말했다. 엄마 어디 아프냐고, 엄마 아프면 병원 가라고, 숨기지 말라고, 엄마는 나보러 왜 우냐고, 병 아니라고, 그런 말 할 수도 있다며 나보러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엄마의 말이 딸 걱정하지 않게 하는 거짓말 같아 학교에 와서도 울었었다. 지금은 병 같은 게 아닌걸 알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다. 지금도 걱정이 된다. 엄마가 어디 아프진 않을까, 아빠도 건강하셔야 할텐데..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정말 엄마 아빠의 소중함을 알게됐다. 그렇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나는 엄마 아빠에게 지금껏 효도도 못한 게 정말 서러웠었다. 엄마에게 무슨 병이 있다는 나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나는 그동안 부모님께 부족한 점이 생각나고 속만 썩혔던 아이란 걸 알았으니까 말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도 조금은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시인과 나의 상황은 다르지만 어머니를 통한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엄마도 똑같이 슬퍼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듯이 나도 엄마가 병들고 약해지는 보통사람인걸 알았다. 병이란 게 남은 걸리고 우리가족은 안걸리는게 아니란 걸 알게됐다.

 이제 엄마 그리고 아빠께 엄청난 효도는 아니지만 저번보다는 말씀 더 잘 듣고 심부름도 더 잘하는 애가 되어야겠단 생각이 든다. 어린애 같긴 하지만.

 어쨌든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정말 감동적인 시다.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상황을 겪어서 엄마 아빠의 소중함을 알지 말고 이 시를 본받아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음 좋겠다!

서현영 광동고 3학년 4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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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100

         김영승

 연탄 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 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 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 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작년 겨울이었다. 유난히도 춥던 1월의 주말 저녁. 하는 일도 없이 하루종일 뒹굴뒹굴 굴러다니던 나는 한 참 전부터 엄마가 장보러 마트에 함께 가자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귀찮은 걸 제일 싫어하는 내가 황금같은 주말저녁에 밖에 나가자는 말을 반갑게 들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기어이 같이 가자고 하시는 바람에 마지못해 따라 나서긴 했지만 이만큼이나 나온 입을 어찌하진 못했다.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본 뒤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 다 왔을 때였다. 여전히 안 나올 걸 나왔다며 뾰루퉁 해 있던 나를 나름대로 달래주기 위한 묘책을 내셨던가보다.

엄마는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호떡가게로 나를 잡아 끄셨다. 사실 내가 호떡을 좋아하긴 하지만 먹을 걸로 금방 풀리면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아 안 먹겠다고 툴툴 거렸다. 그런데 작게 말한다는 것이 그 호떡장수 아저씨께 들렸었나보다. 멋적게 웃으시면서 뭐 때문에 심통이 났냐고 하시는 거였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붙임성 좋으신 엄마가 그 호떡가게로 나를 잡아  끄시면서 따끈따끈한 호떡으로 3000원어치를 싸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서 먹고 가자고 하셨다.

아무 말 없이 호떡 하나를 종이에 집어서 물고 있는데 그때서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아저씨 옆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추운 겨울에 소매를 걷어 부치고 있는 두 명의 내 또래 여자아이들이었다. 둘이 똑같이 생긴 걸로 보아 쌍둥이 인가 보다 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유명한 호떡집이라면 모를까 정식 가게도 아닌 포장마차에 아르바이트생이 두 명씩이나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라 뭘까 하고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엄마가 마침 아저씨께 두 아가씨들은 따님들이냐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흐뭇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다. 왜 나는 그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했던 것일까? 아저씨는 인상이 너무도 좋으신 분이셨다. 그 인상좋은 웃음으로 내 쌍둥이 딸들이라면서 고등학교 2학년 이라고 하셨다. 하나는 진건고에 다니고 하나는 청학고에 다닌다고. 나는 순간 충격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면 나랑 동갑이란 소리! 한 참 감수성 예민하고 남의 눈 의식할 나이에 아빠가 하시는 호떡가게에서 앞치마까지 두르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전히 내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와 아저씨가 말씀을 나누시는 동안에도 그 두 쌍둥이 딸들은 한 시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돈도 거슬러 주고 호떡 뒤집개로 야무지게 호떡도 뒤집으며 열심히 맡은 임무를 다 하고 있었다. 해맑게 웃으며 손님들에게 “또 오세요~”하는 인사까지 잊지않고서. 정말 입을 벌리고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우리 엄마는 입이 닳도록 그 아이들에게 칭찬을 하셨다. 어린 나이에 효도한다고, 저렇게 착한 딸을 둘씩이나 두셔서 좋으시겠다고. 갑자기 쥐구멍이라도 봤으면 하는 내 심정을 더 부추기는 말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걸 간신히 가렸다. 사실 누구에게나 아버지란 사람은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일 것이다.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나름대로 투정을 하고 소심해진다. 그 시기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 두 아이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 곳에 나와 있던 걸까. 속마음까진 알 수 없지만 그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찾을 수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한테 이런 표현을 쓰긴 민망하지만 정말 존경한다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아저씨의 표정에서 그리고 두 딸들의 표정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었다. 엄마가 가끔씩 길거리를 지나가다 이런 가게를 보면 나에게 물으실 때가 있었다. 엄마가 우리 동네에서 붕어빵 장사를 한다면 니가 나와서 도와 줄 수 있겠냐고. 나는 그때마다 쪽팔리게 어떻게 그러냐고 버럭 화를 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따끈한 호떡 한봉지를 들고 집으로 오던 그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시를 보는 순간 문득 그 때의 화끈거림이 떠올랐다.    

조은영 (경기 광동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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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 원인 규명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 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잠그고는

홀짝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 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지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 못 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 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 가짓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 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 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확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또 열받는다

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을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학교에서 열심히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친구들은 공부하느라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며 서로 웃고 떠들었다. 나도 같이 어울려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 말이 끝나자 마자 한 친구의 장난스런 말투에 나는 바로 기분이 상했다. 그 친구는 장난삼아 한 말이었는데 나는 시비조 같은 그 말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마침 그때가 내가 내릴 때라서 나는 버스에서 내리며 그 친구에게 “나는 너가 싫어~!!”하고 바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속으로 후련하기도 했지만 그 많은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후회가 됐다.

다음날 아침, 한 친구가 나에게 오더니 어제 왜 그랬냐며 물어 보길래 시치미 뚝 떼며 “왜?” 하고 물어보니 그 친구 무척 당황해 했다면서 말해 주었다. 그 친구는 장난이었는데 내가 너무 흥분해서 주위 친구들도 적지 않게 놀랬었나보다.

또 한가지 일은 바로 어제 일이다. 재량 휴일이지만 고3은 학교를 가야했기 때문에 친구와 도시락을 싸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던 도중 우리 반 어떤 남학생이 내 도시락 가방을 가져가더니 무슨 반찬을 싸왔는지 훑어보는 것이었다.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장난 식으로 한 행동이었을텐데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반 친구들이 조용히 공부를 하고있는데 도시락을 가져오라면서 소리쳤다. 그 친구는 날 쳐다보며 웃었는데 그거에 또 화가 나서 “너는 장난이랑 장난이 아닌 거랑 구분 좀 해라!!” 하면서 더 크게 소리쳤다. 내 행동에 그 친구도 놀랬지만 주변 친구들도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 친구는 내 옆에 와서 장난이었다며 말을 걸었지만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집에 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낸 것을 후회하였다.

이상하게 고등학생이 된 후론 짜증내고 화내는 일이 많아졌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친구들이 성격이 많이 변했다고 말할 정도로 날로 심해지고 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너무 잘 웃고 다녀서 방실이란 별명도 불려봤고 착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조금한 일에 신경질을 내고 짜증도 많이 내며 화를 내는 일이 늘고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많아졌다. 다시 돌아보면 화낼 일도 아닌데 순간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폭발해 버려서 곤혹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인지 나는 소심 쟁이 A형인데 친구들은 거의 나를 다혈질 B형으로 생각한다. 혈액형을 많이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 B형이 많아서인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B형 성격과 매우 비슷하다. 점점 갈수록 내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다혈질로 변하며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기 때문에 ‘아 정말 내가 B형의 피가 흐르고 있나?’하고 착각 할 정도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중학생이었을 때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모두 사랑하라’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만큼 친구들도 많았고 웃는 일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왜 지금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버럭 화부터 내는지 후회 할 때가 많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화낼 일도 아닌데 상대방 기분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행동을 하는지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고 나 자신이 너무 밉다.

내 맘에 들지 않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다고 해서 짜증내거나 소리 치기보다는 나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나 되돌아보고, 화를 내기보다는 미소로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모두 사랑하라’ 라는 말을 잊지 말고 실천으로 옮겨서 미워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겠다.

김요나 (3학년 1반 )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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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나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철 없던 시절. 물론 지금도 철이 덜 들었지만 지금보다 더 철 없던 시절엔 가족보다 친구가 마음속 깊이 남을 평생동반자, 나의 전부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리석고 멍청하고 억울한 생각이지만 그 때는 그랬다. 하지만 이내 여러 친구를 겪으면서 그 생각에 큰 상처를 받아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고, 요즘 난 가족의 소중함을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까지 한꺼번에 느끼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들어 가족에게 너무 고마워서, 너무 미안해서 눈물흘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고맙고 미안한 사람은 엄마다. 태어나서 17번 엄마의 생신을 맞이했는데 엄마에게 생신 선물을 해드린 경우라고는 기억나는 게 정말 말하기 부끄럽지만 몇 천 원짜리 핸드폰 집을 선물해드린 것 밖에 없다. 친구들 생일이 되면 정성도 중요하지만 의리다 뭐다 해서 ‘기본이 만원은 넘어야지’하는 생각으로 많게는 몇 만 원씩 쓰기도 하는데 엄마에게는 겨우 몇 천 원짜리 선물을 그것도 한 번 해드린 기억이다. 선물을 제대로 못해드렸다는 게 이렇게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가슴 아픈 건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은 내가 너무 밉고 엄마의 마음에는 상처를 드렸기 때문이다. 엄마 속을 썩일 때면 입버릇처럼 내가 정말 싫다고 밉다고 하시는 엄마지만 이내 몇 시간을 못가 또 나를 챙겨주신다. 이 세상에 엄마 말고 그런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아마 난 학창시절 내내 엄마께 제대로 된 선물 한 번 못해드린 것이 평생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있을 것 같다.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고 사는 와중에 작문 수업 시간 시집 읽니는 또 내 마음을 울렸다. 부모님과 함께 읽는 시집을 읽는데 거기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가 유난히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저 ‘엄마는 늘 그래왔으니까 당연히 저렇게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으로 지낸 내 모습, 내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여전히 감정이 북받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운 적은 종종 있었지만 시를 읽고 그래본 건 이 떄가 처음이다. 너무 미안해서, 너무 가슴 아파서.

앞으로 엄마와 함께 있을 시간이, 과학이 발달해서 더 길 수도, 환경이 나날이 오염되서 더 짧아질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내가 받은 엄마의 사랑을 다 보답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려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엄마가 안 계신 이 세상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서 요즘 난 종종 어머니께  ‘엄마 죽으면 나도 따라죽을거야’ 라고 못난 소리를 하곤 한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마음을 몸으로, 행동으로 엄마에게 많이 보여드려야갰다.

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따금씩 느끼는 거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엄마도 여린 마음을 갖고 있는 딸이고 여자’라는 생각이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 때마다 이유는 달라도 그렇게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목이 메인다. 아마 모든 자식들이 그렇겠지. 하지만 가슴 아픈 것도 그 때 뿐이지 정작 난 엄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다. 오히려 상처만 주고 가슴 아프게만 했다. 이런 나도 커서 엄마가 되겠지. 그 때가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겠지. 나도 ‘엄마 보고 싶다’하고 중얼거리 게 되겠지.

난 또 눈물이 난다. 엄마에게 너무 고마워서 그리고 죄송해서. 이제 엄마는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마음이 헤이해 질 때마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며 그때그때 상기시켜 엄마에 대한 이 마음 변치 말아야겠따.

박혜원(광동고등학교 3학년 1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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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최근 뉴스나 신문을 보면 무관심으로 인해 생기는 무서운 일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옆집에 도둑이 들었다든지 홀로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든지 이웃집 사람이 아퍼서 쓰러져 있다든지 이렇게 삭막한 뉴스 보도는 이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렇게 나만 생각 하며 남들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삶 속에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며 우리는 이웃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닐까?

얼마 전 우리 옆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왔다. 어떤 사람들일까 너무 궁금해서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설레 이는 마음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가 모두 끝나도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옆집 사람들은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허탈함을 느꼈다. 엄마께서는 다행히 먼저 다가가셨다. 고구마 한개가 생겨도 애호박 한개가 생겨도 이웃집 먼저 생각하시고 주섬주섬 싸가지고 놀러 가시곤 하셨다. 그러나 바쁘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우리는 더이상 마음을 열지 못했다. 안타까웠고 속상했다. 예전 같으면 온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면서 이웃집 개똥이네 강아지 새끼가 몇 마리인지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었는데... 너무도 각박해진 지금 나는 큰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문뜩 생각해보았다. 나도 남에게 외로움을 주었을 때가 있었는지 말이다. 청량리 길가 차가운 바닥에 앉아 나물을 파시는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나는 단 한번도 그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할머니의 눈에 욕심 많고 이기적인 내 모습이 비추어보일까 언제나 겁이 났었다. 나는 항상 그 할머니를 뒤로한 채 등을 돌리고 쌀쌀맞게 걸어가곤 했다. 그때 아마도 내가 할머니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해드렸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더불어 사는 마음을 잊고서 살았던 것 같다. 이제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웃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웃사랑은 형식적인 특별한 배려가 아닌 사소하지만 관심어린 배려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이웃에 혼자사시는 할머니가 아프시다면 손수 끓인 죽 한 사발 들고 찾아가서 먹여드릴 수도 있고 비록 나물은 못 사드리지만 추우신데 고생하신다며 따뜻한 차 한 잔 드릴 수도 있고 이웃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머뭇거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도와준다면 그 일을 계기로 서로에게 두터운 친근감을 느껴 볼 수 있고

항상 만나는 얼굴이라면 남인 양 모르는 체 지나가지 말고 내가 먼저 용기내서 웃는 얼굴로 다가가서 인사를 해보는 것이다. 안녕!

안녕하세요! 이 짧고 간단한 말에 사랑과 행복과 기쁨이 함께 전해 질수 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해 나간다면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이웃이 될 수 있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내일 다시 한번 이웃집 초인종을 눌러 볼까한다. 애호박과 고구마와 어제 할머니댁에서 가져온 감자도 함께

(위경희 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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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 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새벽 두 시>, 김지하

그냥 읽기에도 어렵고 낯설기만 한 시를 내 생활 속에서 보려니 막막했다. 이 책 저 책 둘춰보며 만난 여러 시들은 모두 조금씩은 공감이 갔지만, 그 공감이 글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 아, 내가 너무 평범한 삶을 살았구나’ 하면서 스스로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느낄 때 쯤 이 시를 만났다. 참 반가웠던 시. 평범한 내 삶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시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시, 바로 ‘새벽 두 시’ 이다.

지난 겨울방학 때였다. 방학 보충이 끝나고 2월달 부터는 갈 곳도 없고 집에만 있었던 나는 어쩌다보니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늦게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던 그때. 고3을 앞둔 겨울방학이라 그런지, 친구들은 공부할 시간이 많아져서 좋겠다며 나를 부러워했다. 자기들은 잠만 많아져서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일찍 잔다며 투정을 하면서. 하지만 그건 나의 생활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보통 새벽 4시에 잠을 자서 오후 12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러니 실상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시간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남들이 자고 있을 시간에 깨어있고, 깨어있을 시간에 자고 있는 것 뿐.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잠을 잤고, 오후에 느기적 느기적 깨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 몽롱하고 게으른 하루를 보냈게 되었으니 하나도 부러워할게 없는 것이었다. 깨어있어도 깨어있는 것 같지않은, 눈은 말똥말똥한데 정신은 몽롱한, 그게 바로 나의 새벽이었다.

12시가 되어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들면 그때부터 나는 새벽 생활을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어둠을 밝혀줄 작은 스탠드를 켜고, 책상 앞에 나 있는 창문을 조금 열고, 라디오를 켰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약간은 춥기도 했지만, 담요를 덮으면 시원한 바람정도로 느낄 수 있어서 괜찮았다. 라디오는 항상 주파수 95.9를 맞춰놓고 그것만 들었는데, 워낙 기계를 다룰 줄 모르는 터라 감히 다른 주파수로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파수가 어떻든 라디오를 듣는다는 자체가 좋았으니 상관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방학때 나는 거의 라디오와 같이 살았다. 요즘과 같이 영상매체가 발달한 시대에 웬 라디오냐고, 요즘에도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있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오히려 요즘엔 텔레비전보다는 라디오가 좋다. 텔레비전은 오래 보면 눈이 아프고 어지럽지만, 라디오는 아무리 들어도 눈이 아프거나 귀가 아프지는 않으니까. 라디오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들의 이야기는 때론 나를 울리기도 하고, 웃게 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참 기분좋은 일이다. 그렇게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서 라디오를 듣는게 나는 꽤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왠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새벽까지 잠을 못이루는게 좋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건 처음 일주일 동안만 이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그동안 미뤄왔던 서랍정리도 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하고, 또 일기장을 만들어 오랜만에 나의 생각을 끄적이며 일기도 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주일을 넘어섰을 때, 조금씩 지겨워졌다. 더 이상 정리할 것도 없었고, 라디오에서는 매일 듣는 대중가요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 세 곳을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후회도 하고, 기쁜도 발견하고, 걱정도 했다. 일단 내 앞에 놓인 입시. 무슨 과를 갈까 많은 고민을 했다.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건 얼마 없다는 현실에 약간의 좌절도 했다. 그래도 아직 젊으니까 괜찮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보름을 넘어섰을 때,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까만 어둠속에서, 혼자만 신나서는 떠들어 대는 라디오와 함께 있는 내 모습이 외로웠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잠든 그 고요한 시간에 혼자 깨어 움직인다는 것이 외로웠다. 그리고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일상에 똑같이 적혀가는 일기장이 외로웠다. ‘새벽 4시에 잤다, 12시에 일어났다,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잠깐 휴식을 취하는 의미로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다가 친구와 전화를 해서 수다를 떨었다, 저녁을 먹었다, 인터넷을 조금 했다, 그리고 새벽이 왔다.’ 뻔한 일상에 새로운 일은 거의 없었고, 새로운 이야기나 새로운 생각도 없었다. 모두들 잠이 든 새벽시간이었기 때문에 나의 외로움을 위로받을 곳도 없었다.

김지하 시인의 시처럼 새벽 두 시는 정말 어중간한 시간이다. 안그래도 너무 적막하고 고요한 시간이라, 나까지 책을 읽음으로써 그 고요에 물들고 싶지는 않았다. 또 공상도 하루 이틀이지 보름이 넘게 하다보니 나중엔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내 주위 공기가 너무 썰렁하고, 무엇을 먹기엔 너무 귀찮고, 무엇을 중얼거리자니 정신나간사람 같고, 가만히 있자니 뭔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고. 새벽 두 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 제발 빨리 개학해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적어도 개학하면 낮동안 깨어있을 테고,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면 몸이 고단해져서 일찍 잘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내 생각대로 개학을 하고 나서 나는 잠을 일찍 잘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마음만은 활기차져서 행복하다. 다시 그때처럼 생활하라면 못할 것 같다. 새벽에 혼자만 깨어있는 건 참 외롭고 힘든 일인 것 같다.

홍지애 (광동고 3학년 1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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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윈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분을 달리면

객잣밥 먹다가 석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대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촉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 모항으로 가는 길>, 안도현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날이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인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고3. 사실 열한시까지 야간자율학습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진 않다. 힘든 건 과연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수 있을까하는 걱정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힘들다. 가뜩이나 이번에 위가 안 좋아서 병원에 다녔는데 스트레스 받아서 건강이 악화될까봐 걱정이다. 지금 3학년 올라와서 모의고사를 두 번 봤는데 두 번 모두 점수가 형편없이 나와서 너무 속상하고 불안한 마음이 커지고 있다. 이럴 때 너무 힘들고 아무 생각 없이 어리혼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오늘은 정말 봄이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내 몸은 교실에 갇혀있었지만 마음은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그래서 공부도 안되고 마음만 괜히 싱숭생숭해져서 울적하기까지 했다. 점심을 먹으로 바깥에 나와 보니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옷을 입고 즐겁게 놀고 있었다. 나도 작년까지만 해도 공휴일에는 편하게 쉬며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곤 했었는데 그 때가 너무 그립다. 그때는 그 순간이 얼마나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힘들다 하면서도 공부하는 이유는 공부하도 해야지 내 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만족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그 꿈은 작은 희망이면서 큰 희망이다. 작은 희망은 그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지만 이룰 수 있다는 조그만 희망이 있다는 것이고 큰 희망은 아직 나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사실 많이 두렵기는 하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것도 그렇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지만 어떤 시현이 와도 굴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다보면 그래도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응 ‘불가능은 없다’ 이다. 모든 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최선을 다하면 불가능은 가능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지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기이다.

모든 사람이 항상 곧은 길만 갈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론 울퉁불퉁한 길도 가봐야지 더 재미있고 거기에서 주는 행복의 소중함을 더 크게 느낄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두 갈래의 길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길이 내가 정말 원하고 이루려고 하는 것인지 나는 알고있다. 그 길을 가기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할 게 무엇인지도 알고있다. 지루한 생활이지만 기쁨의 그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할 것이다.

황명란 (광동고등학교 3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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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경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

이 시는 나에게 딱 한가지의 안 좋은 추억을 안겨주었다.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추억중의 하나의 경험을 꺼내어 보려 한다.

고등학교 1학년 새파랗게 젊었을 때, 항상 어김없이 찾아오던 수행평가라는 골치 아픈 영어 숙제가 있었다. 영어 수행평가의 내용은 선생님께 영어로 편지를 써서 메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수많은 과목 중에 영어를 제일 싫어했으므로 영어에 흥미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기초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숙제를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 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에서 영어문장을 만들어주는 영어번역기를 사용하는 것이 나를 구원해 주는 신이자 구세주였다. 번역해주는 홈페이지도 한 친구로 인해 알게 되었는데 그 때는 아무 의심도 생각도 찔림도 없이 번역기가 해 주는 것이 다 맞는 말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영어 번역기를 사용하고 내가 아는 쉬운 단어들로 구성하는 문장을 만들어서 선생님께 메일로 보냈다. 솔직히 그 때는 걸리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숙제를 끝마쳐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숙제를 끝내니 정말 속이 후련했다. 마치 다가 올 어두운 미래를 눈치채지 못한 채.

그러나 이 세상엔 비밀은 없었다. 1학기 중간고사 마지막 날 영어 선생님인 조영은 선생님은 전 학년을 돌아다니며 영어 번역기를 사용한 것 같은 아이들을 한곳으로 불러모아 진실을 말하도록 요구했다. 어떻게 한 명 한 명씩 번역기 사용하는 애들을 구별했는지 정말 신기했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걸린 것도 서러웠는데 더욱 슬픈 것은 시험 끝나는 마지막 날 황금 같은 시간에 친구들은 ‘살인의 추억’이라는 대작 영화를 보러 갔고, 나는 죄 값을 치르는 하루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기가 숙제를 했는데 수상하다고 여겨져서 불려온 아이들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인정되면 집으로 갔고 나머지 아이들은 법당에서 시 세 편을 외우게 되었다. 처음 법당으로 갔을 때는 나말고도 진짜 많은 아이들이 우루루 모여있었다. 그 시들 중에 다른 시들은 생각이 안 났고, 시 세 편중에 있었던 한 편의 시가 바로 지금 쓰는 시 ‘서시’ 였다.

이 시를 외우면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라는 이 시의 구절이 내 마음속에 정곡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지난 날 내가 선생님을 속이고 했던 수행평가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결국에는 시를 다 외우고 나서 각자 자기가 영어로 번역기 필요 없이 글을 써서 선생님한테 다시 제출했다. 이렇게 혼자 써서 할 수 있는 걸 왜 남이 만드는 것에 의존했는지 내 자신이 후회가 되었다.

다른 시는 이 상황에 맞는지 잘 몰라서 그런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이 시만은 나에게 교훈을 주는 시로 평생 남을 것 같다. 거짓말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 후로는 번역기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았고, 숙제도 내가 스스로 하고 착한 학생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황연화 (3학년1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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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견딘 씨앗이

한줌 햇볕을 빌려서 눈을 떴다

아주 작고 시시한 시작

병아리가 밟고 지나도 뭉개질 것 같은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도대체 훗날을 기다려

꽃이나 열매를 볼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꽃이 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시작

< 새 싹 >, 공광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린 생명들이 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짓말도 못 하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도 없으며 그저 시기, 질투, 욕심 같은 단어는 찾아 볼 수도 없는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한 생명인 것 같다. 마치 어린 천사가 이 험악한 세상에 태어난 것과 같은 것처럼 말이다.

어렸을 때 나의 부모님은 일자리 때문에 교회 옆에 있는 조그만 한 집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어느 가족들과 같이 몇 안 되는 짐들을 풀고 집 이곳 저곳을 둘러 보셨다. 우리 집 마당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서 있었고 그 옆으로는 조그만 한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나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의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호박씨앗을 가져 오셨다. 아버지께서는 마당 뒤편에 호박씨를 같이 심자고 하셔서 나는 우선 물을 떠왔고 아버지께서는 모종삽으로 땅을 푼 뒤 그곳에 씨앗을 심고 흙을 부은 뒤 내가 떠온 물로 뿌려 씨앗심기를 끝냈다. 그 이후 나는 싹이 자라기만을 기다리며 몇 일이 지났다. 씨앗을 심은 뒤 나는 그 날도 마찬가지로 씨앗이 자랐는지 보기 위해 마당 뒤편으로 가 보았는데 정말로 귀엽게 생긴 새싹하나가 자라나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너무나도 기쁘고 그 날밤은 새싹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다음날 또 다음날 나는 매일매일 새싹을 키우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면서 정말로 열심히 새싹을 키우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면서 정말로 열심히 새싹을 키웠다. 그렇게 새싹은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하나가 일어나고 말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나는 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서 이뿐 병아리들을 팔고 계시는 한 아저씨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그 병아리 앞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하고 있다가 한 마리 사서 키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그 당시 거금이었던 500원을 투자해 병아리 모이와 병아리 한 마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나는 새싹 키우는 것은 까마득히 잊은 뒤 병아리 키우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거실을 그 짧은 다리로 뛰어 다니는 것을 보니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밥도 매일같이 주고 학교 같다와서도 같이 놀아주면서 그렇게 몇 일이 흘렀다. 사건이 일어나는 당일 병아리는 그날따라 별로 기운도 없어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병아리가 매일 거실에서만 갇혀서 그런가보다 하고는 병아리를 마당으로 대리고 나갔다. 병아리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이곳저곳을 뛰어 다니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그렇게 병아리가 노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어머니의 부름에 잠시 집안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사건은 그 잠깐 동안에 일어났다. 어머니의 부름을 다 마치고 다시 밖에 나온 나는 병아리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 마당 이곳저곳을 찾아 다녔다. 몇 초도 지나지 안은 뒤 마당 뒤편에서 “삐약삐약”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가 나는 그곳으로 간 나는 정말 놀라운 모습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병아리가 그동안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키우고 있던 새싹을 그 조그만 부리고 마구 쪼아 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새싹 앞에 서서 한참을 운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와 씨앗에서 싹이 나면서 까지 행복했던 기억들이 스쳐가며 다시는 볼 수 없는 새싹이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 후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지금도 뛰어 놀고 있던 병아리를 대리고 집안으로 들어와 병아리를 둔 뒤 그 날의 사건을 막을 내렸다. 그 날밤 나는 “새싹이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좀더 잘해 줬으면 내가 좀더 잘 보살펴 주었으면 하는 생각들을 하며 눈물을 흘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새싹은 이처럼 너무나도 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새싹들이 없다면 다른 동물들도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너무나도 작고 소중한 생명일 것이다.

                       광동고등학교 30124 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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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요즘 들어 팔이 많이 아프셔서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으시는 엄마. 예전부터 안 좋았던 팔이었는데 너무 많이 사용하셔서 그런 것 같다. 항상 손이 저리시다면서 주먹을 꽉 쥐시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 같아 기분이 안 좋다.

항상 우리 가족을 위해 한평생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사신 엄마. 그런 엄마에게 나는 여태껏 제대로 도움 한 번 드리지 못하고 언제나 불평만 하며 지내왔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엄마와 용돈 문제로 언성을 높였다. 7월이 되어서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엄마는 돈이 없다고 다음에 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달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용돈 주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던 사건을 기억한 난 오늘 급하게 쓸 일이 있으니까 빨리 용돈을 달라고 재촉했다. 이런 나의 재촉에 엄마는 갑자기 화를 내셨고 갑작스런 엄마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 더욱 짜증이 난 나는 됐다고 소리치고는 그대로 집을 나와 학교로 갔다. 1교시 영어 시험이 끝나고 2교시 자율학습 시간이 되어 아침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돈을 주지 않은 엄마에 대해 화가 나긴 했지만 그렇게 심한 행동을 한 건 후회가 됐다. 엄마도 오죽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요즘 점점 어려워져가는 경제 때문에 많이 힘드시고 더구나 외할머니 기일 문제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지신 엄마한테 정말 내가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외갓집이 너무 멀어서 1년에 한두 번 찾아가기도 힘들지만 외할머니 기일만큼은 꼭 지키셨던 엄마.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생겨서 참석하시지 못하게 됐다. 외갓집 삼촌에게 자신이 못 가게 되었음을 알리던 엄마의 슬픈 표정이 일주일이 지난 아직도 생각난다. 어렸을 때부터 막둥이로 제일 이쁨을 받았던 엄마. 특히 외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모두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란 엄마였지만 25살이 되던 해 우리 아빠에게 시집을 와서 한 번도 와 본적 없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게 되셨다고 한다. 아는 이웃 하나없는 이곳에 와서 눈물과 고통으로 몇 년의 세월을 보내신 엄마가 이제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정착하게 되셨을 즈음 노환으로 갑자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 때의 엄마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아프셨을 것이다. 그렇게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하고 외할머니를 떠나보낸 엄마에게 유일하게 자신의 고향으로 그리고 외할머니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이 기일 날뿐이었는데 올해는 그것마저 갈 수 없게 되셨으니 상심이 얼마나 크셨을까. 그런데도 오직 자신 생각만 하며 엄마에게 커다란 상처를 드린 나에게 정말 화가 난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자식으로서 정말 큰 힘이 되어 드릴 것이다.

 오늘도 엄마는 나를 위해서, 누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지탱해주시는 엄마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분이다. 이런 엄마에게 이제부터는 항상 열심히 살아가는 늠름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를 위해 하셨던 모든 일들에 대한 작은 보상을 해 드리고 싶다.

    전준형(광동고 3학년 1반 33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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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 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 피천득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학생들이라면 학교에서 다른 반보다 종례가 일찍 끝나서 조용한 복도에서 친구들을 기다렸을테고 초등학생자녀를 둔 학부모는 시에 나타난 것처럼 유리창으로 자녀의 모습을 보고서는 운동장 느티나무 밑에서 기다렸을지 모른다. 이 시에서처럼 학부모의 입장에서 나는 기다릴 수 없지만 더욱 간절하게 기다려 봤다.

내가 고2때였다. 어머니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마을부녀회장을 맡고 계실 때였는데 마을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셔야 했다. 그래서 여행을 가실 때가 많았다. 혼자 가실 때가 많으셨는데 그때는 부부동반으로 해서 멀리 남쪽까지 갔다 오신다고 하셨다. 걱정 없이 부모님이 안 계셔서 밤새도록 놀 수 있겠구나 하고 편히 생각했다. 토요일, 일요일 연장으로 놀러 갔다 오신다고 하셨다. 토요일 저녁에 가셔서 일요일 초저녁에 오시기로 하셨고 말이다.

토요일이 되셔서 부모님은 여행을 가셨고 나와 동생은 밤새도록 놀았다. 밤새도록 놀면서 부모님 없이 살면은 굉장히 편할 것 같다 라고 생각했다. 철없는 생각이었다. 그냥 단순히 밤새도록 놀 수 있어서 내뱉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철이 없었다. 그때는 밥도 많이 하시고 여행을 가셔서 밥걱정도 없어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일요일에도 별다른 생각없이 아침부터 놀았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언제 오시려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약간은 불안한 마음도 생겼고 말이다. 혹시 오시다가 사고라도 나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다가 전화를 받았을 때는 얼마나 안심했는지 말이다. 전화가 왔던 시간이 꽤 오래됐고 처음 온 전화라서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전화가 한번 오고 나서 다시 오지를 않자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또 전화가 안 올까. 이따가 전화 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사고라도 나신 거 아냐? 그래도 7시쯤에 오신다니깐 괜찮겠지.’ 7시에 오신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위안을 삼으면서 7시까지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은 어린애같은 면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7시가 되어도 오시지 않자 진짜 안절부절못했다. 차가 막혀서 늦게 오시겠지 하면서 스스로를 안심시키는데 약간은 무섭기도 했다. 계속 머릿속에서는 사고생각만 나고 불길한 상상도 생각이 나서 더욱 불안했다. 12시까지 기다렸는데도 결국 부모님은 안 오셨다. 결국은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잘려는 순간에 벨이 울렸다. 그리고 부모님이 오셨다. 그때의 기분이란 정말 마음이 편해지고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간절히 기다려 본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마음 졸이면서 기다려 본적도 처음이었다. 그때 이후로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다. 길지 않은 기다림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은 가족이 정말 소중하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었다. 솔직히 우리들 옆에는 부모님이 항상 계시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짧은 기다림에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면 기다림이라는 경험은 살아가는데 항상 필요할 것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 후로부터는 약간은 불길한 상상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불길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 이유가 가족이 소중하다는 걸 절실히 느껴서인 것 같다.

몇 달 전에는 이런 적도 있었다. 어머니께서 아침에 어디 나가신다는 말을 해주고 나가셨는데 그만 까먹어서 하루종일 기다렸었다. 분명 나가시긴 나가셨는데 저녁이 되셔도 안 들어 오셔서 얼마나 놀랬는 줄 모른다. 이런 경우를 보면은 그때보다 더욱 심해진 것 같아서 약간은 민망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이러다 공처가되는건 아닌가 생각도 해보고 말이다.

내가 피천득의 그리움이란 시를 보면서 강하게 느낀 것은 며칠 전에 작은 외삼촌이 돌아가셔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외삼촌이라서 가족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서일까. 돌아가신 외삼촌이 아시면 많이 서운해하실 것 같다. 좋으신 분이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모님도 저렇게 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든다. 다른 사람들도 누군가를 기다림으로서 소중함을 깨달았으면 한다.

원종수 (3학년1반27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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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자리 펴 놓은 곳만

따뜻하게 불 지펴

그 속에 발 묻고서

책을 봅니다

책을 읽다 눈 시려

고개를 들면

바람소리

방 밖에 가득합니다

<겨울밤>, 임길택

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주리골에 살았다. 친구들은 금곡리는 알면서 가까이에 붙어 있는 주리골은 말하면 잘 알지 못했다. 이름에서 말해 주듯이 주리골은 말그대로 골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아서 (아니, 사실은 버스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까지 걸어다니곤 했다.

이 시를 보면 한 방에서 아빠, 오빠, 엄마, 나 이렇게 쪼르륵 누워 잤던게 생각이 난다. 가구 공장을 했던 우리 집은 방과 공장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쪽문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던 기억도 난다. 어릴 때는 겨울이 되면 추워서 밖으로 세수하러 나가는게 싫어, 주방 씽크대에서 세수를 하곤 했다. 그게 불편했는지 나는 엄마에게 자주 “엄마, 우린 아파트로 언제 이사가?” 하고 물었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때는 어려서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단순히 부러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주리골에 살던 게 다 추억이 되었다. 오토바이에 깔린 일부터 아랫집 치와와한테 발뒷꿈치 물린 일 등 생각하면 웃음나는 일들이 많다. 다치기도 많이 다쳐서 몸 구석 구석에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있다. 특히 왼팔의 흉터는 심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때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었었다. 4살 때 쯤 엄마는 아침을 준비하시고 계셨고 나와 오빠는 방안에서 아마 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빠와 달리 난 그 때부터 먹을 걸 밝혔는지 엄마가 끓인 김치찌개를 보고 달려들었나 보다. 그 김치찌개는 그대로 내 왼팔을 덮쳤다. 그 즉시 병원에 가긴 했지만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해서 그런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흉터가 크게 남아 있다. 흉터를 볼 때마다 부모님은 그때 치료를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하고 말씀 하신다. 그 때는 교문리에도 그리 큰 병원이 없었을뿐더러 치료비도 넉넉하지 못해서 제대로 치료를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내 팔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름에도 짧은 반팔을 입고 다닌다. 예전에는 팔에다 손수건을 대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오히려 더 팔에 시선을 끌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면서 자랐다. 우리는 이모네와 같이 주리골에 살았는데 나와 동갑이지만 한 학년 어린 여동생과 네 살 어린 남동생, 이렇게 우리 넷은 함께 자랐다. 여동생을 내가 많이 괴롭혔던 기억도 나고 남동생과는 싸운 기억이 제일 많다. 그래도 동네 아이들과 싸움이 나면 제일 든든한 후원자 이기도 했다. 이런 추억들이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장일을 하시느라 바쁘셨던 부모님은 우리와 놀아줄 시간이 많지 않으셨다. 그래서 오빠와 나는 손을 붙잡고 동네 여기저기 오빠친구들 집에 놀러 다니기도 했었다. 가끔 엄마, 아빠와 어릴 적 얘기를 하곤 하는데 부모님은 아마 그게 제일 맘에 걸려 하시는 것 같았다. 어릴 때는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오빠와 내가 커 갈수록 돈 들어가는 곳이 많으니까 부모님은 밤늦게 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셔야 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시니까 당연히 우리와 놀아줄 시간도 밤에 동화책을 읽어 주면서 잠을 자는 것도 부모님에겐 쉬운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힘들어도 마다 하지 않고 일 하셔서 지금 내가 이렇게 편히 학교를 아닐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주리골에 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은 대학교도 생겼다고 하는데 어릴 때 내가 기억하는 주리골은 아마 지금은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슬퍼지기도 한다. 나중에 찾아 가볼 일이 생기면 그런 마음이 더 들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을 주리골에서 보낸 건 그땐 몰랐지만 지금 나에겐 그게 제일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아름  (광동고등학교3학년2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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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극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정지용

아마도 이 시를 모의고사나,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처음 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책이나, 읽어두면 좋다는 책들은 여러번 사서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따로 시집을 사 본 기억이 없었기에 낯익은 이 시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이 시를 가지고 문제를 풀 당시에는 시간에 쫓기어 평안한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이었다는 것을 몰랐겠지만, 좀 전에 읽어보고 지금 읽어보아도 이렇게 다가오는 시는 그동안에 몇편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 고장에서만 쭉 살아왔지만 내 기억 속에는 이글에 나오는 배경처럼 자동차보다 소 달구지가 더 많고, 알람시계보다 닭울음소리에 아침을 시작하는 그런 기억들은 없었다. 지금 4차선으로 개통되어있는 고속도로가 나 어렸을 적에는 2차선 도로였고, 언제부턴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아파트 단지들이 모두 들과 산이었다는 기억정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아늑했던 옛 기억들의 모습들이 한편의 영화처럼 떠오른다.

기억과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어린 내 모습을 떠올리면, 외로웠지만 그 때문에 더 따뜻했던 생활 이었다. 동네에서 우리집을 포함한 몇 안되는 집들은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친구는 단지 내 동생 뿐이었다. 도로건너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갈색 흙으로 덮인 땅이 아닌 길을 절대로 다가가서는 안될 곳으로 인식되어서 혼자서는 그 길을 절대로 건널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쪽 친구들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지과 도로가 불과 10미터 정도로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부모님의 최대 걱정거리가 차사고이기도했다.

놀 수 있는 공간이 제한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훌륭한 놀이터가 있었다. 집 바로 뒤에있는 들이었다. 미끄럼틀을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집에서 1시간정도는 꼬박 걸어야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기도 힘들고 또, 가도록 허락해주실 부모님도 아니었기에 언제나 그 들판은 나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봄에는 엄마따라서 쑥캐러 다니고, 여름에는 잠자리를 잡거나, 왕숙천에서 다슬기를 잡으러 다녔다. 가을에는 간식거리로 튀겨먹을 메뚜기를 잡으러 논에 들어갔다가, 진흙 범벅이 되어 오기도 하고, 겨울에는 동생과 눈싸움하거나, 눈사람 만드는 일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참, 여름에 별구경 하는 것도 빠질수 없는 재미가 있었다. 밤마다, 집 바로 앞에 돗자리 하나 펴놓고, 러닝셔츠하나 입고서 선선한 바람맞고 누워있는 기분은 내가 알고있는 단어 중에서 표현할수 있는 말이 없을 정도이다. 셀수 없이 많은 별들을 구경하면서 유일하게 알고있는 국자모양별자리 북두칠성을 찾기도 하고, 별과 별을 이어가면서 세상에 있는 모양이라는 모양은 모두 만들어 낼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지만, 지금은 단지 추억으로밖에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예전에 별구경했던 그곳에서 조차 이제는 별을 구경하기 힘들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더욱 어두어진 하늘의 반을 아파트가 가리고 있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만한 모습들을 찾아보기가 너무도 힘들다.

1~2년에 한번 들어볼 수 있었던 뻐꾸기 소리가 영원한 추억으로 남지 않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또 어느 산자락에 또 다시 아파트가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글을 쓰는 나 조차도 아파트에 이사온지 벌써 2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면목이 생기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추억을 사랑하는 나로서 더 이상의 기억거리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어보는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20살도 되지 않은 놈이 무슨 추억이 그렇게 많아서 추억타령 하냐고.

물론, 지금 생활이 힘들고 괴로워서 그때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중에 몇 십억, 몇 백억을 번 부자가 되더라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 시절로 갈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고......

윤영진(광동고 3-2 29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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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나를 깨워 사립문 밖으로 내몰았다

“남주야 해가 중천에 뜨겄다 일어나 깔 비러 가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학교에 늦을까봐 아침밥 뜨는둥 마는둥 책보 메고 집을 나서면

내 뒤통수에 대고 냅다 고함을 쳤다.

<중략>

그는 죽었다 화병으로

내가 자본과 권력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그는 손을 더듬거리고 나를 찾았다 한다

<아버지>, 김남주

 난 특별히 아버지와 함께 있던 추억이라든가 경험이라든가, 그런 것을 적진 않는다. 아버지에 대해서 적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 이 두 분의 사이에서 태어나서 살아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 현제 부모님중 한분이 안계신다거나, 두 분중에 어느 분이 더 좋다거나, 부모님을 사랑한다든가 갖가지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중에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헤어진 지금, 아버지란 부분은 나에게 있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분은 참 좋은 분이셨나 보다. 가끔 앨범속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내 사진에는 항상 아버지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그 사진 속에는 마냥 행복한 내 모습이 있었고 그 옆에는 말했듯이 내 아버지가 계셨다. 하지만, 지금 기억나는 것이라고 해봤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아버지친구분과 어디를 갔다.’ 이 정도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있었던 일들이 이렇게 잊혀져 가는데도 나는 일상생활을 지내면서 문득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된다. 머릿속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되씹어 보는 정도? 그러고선 금세 잊는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나에게 ‘너희 아빠처럼 살면 안 된다’ ‘ 남자라면 책임감이 있어야지 너희 아빠 같아서 안돼.’ 라는 말을 하신다. 아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지금의 아버지를 만들게 된 큰 동기인 것 같다. 지금 우리가 힘들게 살게 된 것이 다 아버지때문이라는 것을 누누이 들어왔던 나로서는 아버지가 미워질 수밖에 없었다. 엎친데 엎친다고, 우리 가게에 힘으로 해결 하는 사람들이 와서 빚을 갚으라며 온갖 행패를 부리고 가는 모습도 봐온 나에게는 좋았던 아버지가 나쁜 아버지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경제적 가치로 생각 하는 것도 안 좋지만 미워지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지금 우리들 옆에 안 계셔서 미웠던 아버지가, 우리 가족 모두를 이렇게 몰아넣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떠 넘겨버린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서 분노도 했다. 단 하나뿐인 아버지의 모습 하나하나가 미워지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모순이랄까. 미워하면서도 아버지를 그리는 것이 내 마음이다. 며칠 전, 작문 수업시간 때 선생님께서 다른 학생이 쓴 글을 읽어주셨는데, 그 내용도 아버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힘들게 사시는 아버지를 보며 슬펐던 내용을 쓴 것을 읽어주신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히ㅢ미하게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지나갔고, 고개를 저어도 잊혀지지 않았다. 거기에 갑작스레 내 자신이 저런 슬픈 추억 하나 가지고 있지 않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슬펐다. 지금 내 곁에 없는 아버지와 머리 속, 마음 속 안에서도 없는 아버지를 찾아보면서 혼자 그리워하기도 했다.

아버지를 만난지도 한 일년은 된 것 같다. 몇 달 전에는 아버지께서 연락을 해 만나자고도 하시고 어머니께서도 아버지를 만나는데 같이 만나지 않겠냐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 때는 마냥 아버지가 미웠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아버지에 관한 이런저런 많은 말들과 모습 같은 것들을 접하다 보니 아버지라는 분을 돈이란 것하고 교환을 한 내모습이 정말 한심스러웠다. 그래도 우리 가족 모두 아버지를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나를 믿어주신 아버지에 대해 최소한 맏이인 나만이라도 믿어줬어야 했다.

비록 모두가 아버지를 욕할 지라도 지금 오직 세상에 한 분밖에 안계시고, 나를 위해 애써주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혼자 내 마음속에서 안고 싶다.

정의건 (경기 광동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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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숲>, 정희성

2005년 예수가 태어나고 벌써 73만1825일이 지나가고 있다. 우경이 시작되고, 곡식을 팔기 시작하고, 증기기관이 생기고, 공장에선 재화를 찍어낸다. 컴퓨터가 발명되고 동시다발적인 대화가 오고간다. 세상은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지닌 것 같다. 무엇을 보고 세상이 발전한다고 말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술을 보면 세상은 발전할 대로 발전했다.

세상이 발전한 만큼 인간은 인간 대 인간의 대화가 줄어들었다. 불과 몇 해 전 우리나라의 두레나 품앗이 같은 아름다운 공동체도 사라져버렸다. 세상은 말 그대로 삭막해져다. 숨을 쉬고 살아가기에도 힘이 들어버린 것이다. 많은 것들이 이를 재촉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 이 기계의 발전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하지만 그때는 컴퓨터로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메신저로 친구와 얘기하는 것은 생각도 못해보고 단지 컴퓨터라는 자체에 신기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인테넷의 너무 삭막하고도 넓은 공간에 빠져 지낸다. 이제 이것이 조금의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하릴 없이 어디 어디를 헤매다가 하루를 마감하기 일쑤이다. 편리함이 좋긴 하지만 때로는 이것 때문에 점점 더 인간적인 면들이 줄어든다는 것이 상당히 신경 쓰이기 시작하였다.

편지를 써 본적이 그렇게 많지 않다. 정말 어렸을 때 방송국이나 멀리 사는 친척들에게 보내려고 엽서나 혹은 편지를 쓰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내 손으로 우표를 붙여본 기억도 없다. 게다가 편지를 씀에 있어 들어가는 정성이라는 것은 이제 찾아 볼 수가 없다.

기억하는지, 답장이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초조함을.....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E-MAIL하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오랫동안 전화통화 한번 하지 않았던 친구도 메일 한통으로 해결 할 수 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도 매치메일이나 기타 펜팔을 통하여 메일을 보내면 되니까. 하지만 정작 그 속에 들어가는 작은 정성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이 들어왔나를 확인한다. 지금은 메일도 그것마저도 힘들어하고 귀찮아한다, 그냥 실시간으로 하고 싶은 말을 주고받는다. 편하긴 하지만 역시나 정성 그리고 이해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덜하다.

심심하기도 해서 다음에 채팅방을 만들어 놓고 '나 심심하다 얘기 나눌 친구 만들고 싶어~' ^^; 같은 문구를 띄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오랜 시간 뒤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대화를 하면서 좀 어리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 초등학생 정도의 모습을 보는듯한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확인을 해볼 방법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이 참으로 쉽게 이루어진다.

지나가던 사람을 붙들고 이야기할 용기가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과 과연 1시간가량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종로에서 볼 수 있는 '도를 아십니까?'의 무리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쉬는 날이면 집밖으로 발을 내놓지 않는다. 당장 옆에 있는 친구를 찾기보다 컴퓨터 속 전 세계 사람들에게 내 고민을 털어 놓으려고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잃어간다.

인터넷이 가져다주는 익명성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당해 진다. 보이지 않은 자리에서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도 있고 명확한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나 인간적이지가 않다. 사람 같지가 않다. 모두가 채팅에서는 '그랬어염, 저랬어염' 같은 인터넷 식 말들이 나오고 그림문자가 오간다. 저런 말투도 요즘 세대 아이들이 보면 또 웃을 소리다.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하고 세대간의 인간간의 거리는 더 빨리 벌어진다.

이 채팅을 하던 초등학생인 것 같은 그 아이는 대화도중 내가 이해 못하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더니 나중에 내가 너무 답답하고 늙어빠진 소리를 하는 것에 지겨워졌는지 대화하다가 못 알아들을 이상한 말을 해버리고는 바로 방을 나가 버리게 되었는데, 그때의 황당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세대는 N세대라는 말을 듣고 자라왔었다. 하지만 이런 N세대도 이제는 퇴물이 되어버리는 그런 빠른 시대의 변화에 우리는 접어들게 되었다. 이런 비난을 혼자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넓은 인터넷을 배회하는 한 마리 하이에나가 된다. 참으로 모순된 나의 모습이고 모순된 우리의 현실이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최고의 드라이버고 자신만큼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전혀 모범적이지 않는 우리 교통현실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나또한 그중의 한명이 되어버렸다

최진욱 (광동고등학교 3학년 2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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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왜놈 목재소에서 일하다가

젊은 나이에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신 아버지와

어린 자식놈들 배 곯리지 않기 위해

공사장마다 쫓아다니시던 어머니

남의 집 짓느라 팔 다리 어깨 허리...

어디 한 군데 성한 곳 없으시던 어머니

버거운 삶에 지쳐 흐르는 눈물 마셔가며

아들 셋 딸 셋 혼자 힘으로 다 키우셨다

우리 어머니,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고통의 주인공처럼 사시다 끝내 숨을 거두셨다

긴 나날 남의 집만 짓고 살다가

따뜻한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고

다시 못 몰 길 떠나셨다

병명은 골병이란다

<어머니>,서정홍

내가 중학교 3학년 가을 때쯤이었다. 내가 감히 엄마한테 최초로 반항 아닌 반항을 했던 일이다. 학원에 다녔었다. 그것도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매일 졸라서 겨우 다니는 학원이었다. 사실 내가 공부하려고 마음 먹어서 학원에 간 건 아니고, 친구들이 많이 학원에 다니길래 나도 가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학원 다니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나름대로 재밌게 지냈다. 어느 날이었다. 학원에 갔는데 너무 지겹고 짜증나서 학원에서 나와 친구들이랑 밖에서 뭐 사먹으면서 놀면서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왠일. 학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엄마가 아는 눈치였다. 엄마는 날 보더니 “너 내가 그럴줄 알았어. 내일부터 당장 학원 그만 다녀” 라고 말하시는 게 아닌가.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나는 더 화를 내면서 말했다. “왜? 계속 다닐거야!” 그랬더니 엄마는 오늘 학원 안왔다고 선생님한테 전화왔었다고 말씀하셨다. 난 순간 덜컹하면서 가슴이 내려앉았다. 엄마한테 일러바친 선생님을 원망하면서 말했다. “오늘 너무 가기 싫어서 그런거야.” 뭐가 그렇게 당당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사실 우리 엄마는 정말 엄한 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거의 맨날 맞기 일쑤였고, 친구집에 놀러가는 것도 허락 맡지 않으면 절대 안되고, 혹시나 친구집에서 자는 것은 절대 금지였다. 엄마 말씀 어기고 친구집에서 자고 그 다음날 집에 와서 30센티미터 자로 눈물 쏙 빠지도록 맞았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엄마는 화가 많이 나신 말투로 “너 학원 가지마 내일부터. 엄마가 말해둘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났다. 그럼 이제부턴 다른 친구들은 학원가는데, 나만 집에 있어야 되는 거야? 엄마한테 앞으론 절대 안 빠진다고. 선생님한테 말하지 말라고 반성하는 말투로 얘기했다. 한번 결정내린건 절대 바꾸지 않는 엄마. “됐어 방에 들어가서 청소나 해” 라고 말하셨다. 난 갑자기 화가 났다. 엄마는 그 때 일 하시느라 바쁘셔서 나한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하셨다. 소홀하다고 느낀 적도 많았다. 집에 가면 반겨주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낀 적도 많았고, 일찍 일 나가셔야 돼서 아침밥 챙겨주는 사람도 없어서 아침 거르기 일쑤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엄마한테 많이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엄마한테 난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는 내가 뭐하는지 신경쓰지도 않으면서 괜히 이럴때만 신경쓰는 척한다고. 학원다니는 거에 돈쓰는 거 그렇게 아까웠냐고. 정말 거의 말도 아닌 막말을 해버렸다. 그리고서도 화가 안 풀렸는지 가방 메고 할머니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할머니 집에 가서 한 몇시간 있었을 때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는 울고 계셨다. 그리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해 주는 게 없어서 우리한테 항상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난 내 생각만 했는데 내가 잘못해놓고서 내 멋대로 이기적이게 엄마한테 상처주는 말해버렸는데. 엄마는 우리 때문에 매일 힘들고 피곤에 찌든 하루를 살면서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셨다.

난 그때 생각했다. 엄마는 나의 전부라고. 이제부터 절대 엄마 마음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 남이 엄마를 아프게 하면 내가 막아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는 못할망정 내가 엄마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 라고. 그 때 철부지 같이 엄마한테 반항하던 나를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우습기까지 하다.

이 시 중에 ‘어디 한군데 성한 곳 없으시던 어머니 버거운 삶에 지쳐 흐르는 눈물 마셔가며 ..’라는 부분을 읽으니까 엄마가 우리 때문에 속상한 날이나, 힘든 하루에 지치고 괴로운 날에, 정말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고 속으로 울음을 삼킬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퍼지고 엄마한테 죄송하다.

요즘 엄마의 얼굴을 본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예전의 그 깨끗하고 탱탱하던 피부는 어디가고, 정말 어울리지 않는 눈주름에 이마에 주름살까지.. 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요즘엔 엄마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진다. 내가 견디질 못하겠다. 그리고 손은 정말 나보다, 지현이보다 더 예쁘고 고왔는데 지금 보면 손은 퉁퉁 부어있고 꺼칠꺼칠하다. 정말 예전의 예뻤던 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 엄마도 늙는구나 나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너무 기분이 우울하고 속상해진다.

이 시에 나오는 것처럼 엄마가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고통의 주인공처럼 산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엄마는 우리를 낳고 나서부터 자기 자신의 삶은 버리고, 지금까지 오직 우리 쌍둥이만을 위해 살아오셨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런 엄마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일단 크게 보자면, 원하는 대학가서 취업해서 돈 잘 벌고. 이런 것들이겠지만 지금 당장 내가 엄마한테 힘이 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 엄마 말씀 잘 듣는 건 기본이고, 엄마가 집에 와서 해야하는 자질구레한 집안 일들 내가 나서서 미리 해놓고.. 등등 너무 많다.

가끔 엄마는 이런 말을 하신다. “엄마 너무 힘든데, 아파서 죽으면 어떡할래? 그러면 좋겠어?”라고 거의 막말(?)을 하시기도 한다. 그렇지만 곧 “근데 내가 아프면 우리 애들은 어떡해”하면서 약 꼬박 꼬박 챙겨드시고 건강해야되니까 운동 할 거라고 말하는 엄마다. 그런데 난 어제도 반찬투정하면서 엄마를 속상하게 했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오늘도 어제도 후회만 가득하다사랑은 가까이에 있을 땐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난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나이를 좀 먹어서인지 엄마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정말 엄마한테 힘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김지향 (광동고등학교 3학년 3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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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기형도

내가 아주 어렸을 적은 아니지만, 2학년 때 읽었었던  ‘마음 알기, 자기 알기’라는 책의 일부분처럼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그 나이 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을 그 당시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충격이었다는 이야기다- 하나밖에 없는 방에 같이 있었어야 할 엄마와 여동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현재의 우리집안 재정상황을 ‘중’으로 본다면 그때의 우리집안 재정상황은 ‘하’였기 때문에 현관문이라고 해봤자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이었다. 바깥에서 잠가놓으면, 안에선 절대 열 수 없는 그 문이 굳게 잠겨, 문을 때려부수지 않는 한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기형도 시인의 시처럼 엄마가 바깥에 나가 행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어딘 가로 잠시 외출을 하셨을 뿐이었는데, 엄마가 옆에 없는 상황을 처음 맞닥뜨리게 된 어린 나는 내가 평소에 엄마 말도 잘 안 듣고 장난감 사달라고 떼를 써대서 내가 귀찮은 나머지 어린 동생만 데리고 어디론가 엄마가 훌쩍 도망가버렸을 거란 어리석은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주 눈물이 흘러나와서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문을 붙잡고 엉엉 울며, 울면서 부른다고 올 리가 없는 엄마를 한없이 불렀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좀 이른 나이었을지 몰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동안 엄마에게 잘못했었던 일들이 마구 머리를 스치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났었다. 몇 분 정도를 -그때는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었지만- 거의 탈진상태에 이를 정도까지 울어 힘이 빠질 때쯤 내 울음소리를 듣고 올라오신 아랫집 아주머니께서 문밖에서 자초지종을 들으신 후 동생과 함께 시장에서 장을 보시던 엄마를 불러와 주셔서 모든 일은 무사히 진정이 되었지만, 늘 옆에 있어 그 소중함을 몰랐던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된 이 사건(?)은 아직까지 내 기억에 남아서 가끔 심신이 불편할 때면 비슷한 내용의 꿈으로 나타나 날 괴롭히기도 한다.

사실 내가 겪었던 몇 가지 사건들 중엔 교통사고와 같이 생명에 위협을 줄 뻔한 일들도 더러 있지만 그런 사건들보다도 엄마와 관련된 이 사건이 유독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사람에게 있어 엄마라는 존재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같은 부모님인데도 불구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다는 이유로 타지에 떠나있을 때나, 현재 내 곁에 없을 때 더 애틋해지는 사람이 아버지보단 엄마이기 때문에 시들 중에서도 아버지를 다룬 시보단 이번에 내가 선택한 시처럼 엄마에 대해 다룬 시가 많고 많은 사람들이 또 그 시에 더 따스함과 정감을 느끼며 나 역시 엄마를 잃어버릴 뻔했다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지금까지 시달리는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워낙에 수업시간에 봐둔 시가 없어 어떤 시를 정할지 막막해하며 마구 책장을 넘기던 내 시선을 한번에 잡아버린 이 시는 보면 볼수록 어렸을 때의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엄마에 대한 여러 가지 따뜻한 추억들도 기억하게 해준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를 밤새워 간호해주시고, 불황이 계속되어 아빠께서 잠시 집에서 쉬고 계셔야 할 때 가족들을 위해 바깥에 나가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시던 모습들이 이 시 한편을 읽음으로 해서 너무나 감사하게 다가온다.

곧 다가오는 어버이날, 이 시를 읽고 생겨난 따뜻한 마음으로 엄마께 쑥스러워 하지 않고 큰절한번 올리고 싶다. 물론 아빠께도 말이다.

신미영 (광동고 3학년 3반 7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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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 날짜가 다가오면

백리길 천리길도 쉬입없이 몰아치는

강행군이 시작된다

어차피 하지 말라 해도

올라간 방세를 메꾸려면

아파서 밀린 곗돈을 때우려면

주 78시간이건, 84시간은 먹어치워야 한다

전생에 일 못하고 잠 못 잔 귀신이 씌었나

꼬집어도 찔러도 혀를 깨물어도

고된 피로의 바다 졸음의 물결에

꼴까닥 꼴까닥

눈앞에는 프레스의 허연 칼날이 쓰을컹 툭탁

미싱 때려밟는 순정이는

눈감고도 죽죽 누비는 자동기계가 되어

망치질하는 어린 시다

깨어진 손을 감싸 울면서도

눈이 감긴다

작업장 스피커에선

마이클 잭슨의 괴성,

조용필의 흐느낌이 지침없이 흘러 나오고

주임 과장이 악을 써대도

졸음은 밑도 끝도 없이 휘감아들어

차라리 차라리 우린

자동기계가 되었으면,

잠 안 자는 짐승이 되기를 원하며

피 흐르는 손가락을 묶는다

아침에도 대낮에도 밤중에도

단 한순간 맑은 날이 없이

미치게 미치게 졸려,

꿈결 속에 노동하면 아직 성하게

용케도 붙어 있는 내 두 손이 고맙구나

시커먼 무짠지처럼

피로와 졸음에 절여진 스물일곱 청춘,

그래도 아침이면 코피 쏟으며 일어나

졸음보다 더 굵다란

저임금의 포승줄에 끌려

햇살도 찬란한 번영의 새아침을

졸며 절며

지옥 같은 전쟁터

저주스러운 기계 앞에

꿇어앉는다

<졸음>, 박노해

난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잠’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잠이 많아서 언제나 졸기 일쑤였고 매일 아침마다 잠에게 붙들려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나는 저혈압인데,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든 것인가 생각한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친구들이 참 신기하다. 난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엄마가 깨우고 또 깨워서 일어난다. 원래 아침 일찍 깰 수는 있는데, 일어날 수는 없다. 항상 원래 일어나려고 하던 시간에서 5분, 3분, 1분,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 일어난다. 그렇게 일어나서도 ‘학교 가서 자야지’하는 생각으로 버티면서 밥을 먹고 씻는다. 초등학교 때에는 너무 졸려서 제대로 깨질 못해 아침마다 한 시간씩 걸려서 아침밥을 먹곤 했다.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도 일찍 일어나는 친구들이 참 부럽다. 나는 학교에 안가는 날에는 항상 12시 이후에 일어난다. 12시쯤에만 일어나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보통으로 일어나면 2시쯤이고 조금 늦게 일어나면 4시까지도 자고 피곤해서 많이 늦게 일어나면 7시까지도 자버린다. 예전에는 매일 엄마가 깨우시면서 혼내셨는데, 이제는 엄마도 두 손 두 발 다 드셨다. 오후 늦게 일어나고 나면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우울해 지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나 잠에게 지고 만다.

학교에서도 잠은 여전히 나를 놓지 않는다. 졸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잠을 막을 수는 없지만, 막상 안 졸아도 하루 전체가 피곤해져 버린다. 그래서 내 건강한 하루를 위해서도 조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조는데, 엎드려서 자기는 선생님께 죄송해서 그냥 앉은 채로 목만 숙이고 잔다. 몇 년을 그렇게 졸다 보니 버릇이 됐지만, 그렇게 졸고 일어나면 목이 굉장히 아프다. 얼마 전에 병원에 갔었는데, 디스크 위험이 있어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고3이라서 예전처럼 마음 놓고 졸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게 참 괴롭다. 언제나 졸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졸고 마는 내가 참 밉고 한심하다. 특히 세계사 시간에는 안간힘을 쓴다. 자율을 할 때도 안 자고 공부하고 싶은데, 그게 조금 어렵다. 작년까지도 잠 때문에 자율을 망쳤는데, 고3인 지금까지도 그게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에 잠을 많이 자면서도 왜 항상 졸린 지에 대해서 분석해본 적이 있다. 그 결과 나온 결론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언제나 꿈을 꾼다. 누구나 매일 꿈을 꾸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 꿈을 기억하는 것이다. 가끔은 그 꿈이 재밌어서 오늘은 무슨 꿈을 꿀지 기대하면서 자기도 하지만, 그 꿈 때문에 잠을 자도 개운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숙면을 취해보려고 여러 번 노력해보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한의원에서도 매일 꿈을 꾸는 것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만족할 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잠이다. 매일 매일 졸음의 고통이 나를 괴롭게 한다.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을 보았을 때 ‘팟’하고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를 읽으면서 조금 공감이 되었다. 졸음을 참고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 하는 나와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 이 시에서 자동기계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무척 졸릴 때는 그냥 공부자동기계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위에서 조금만 공감이 된다고 한 이유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졸음의 고통은 참 편한 고통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졸음이라는 것이 원래 무척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책상에 앉아 선생님이 해주시는 수업을 들으면서 조는 것과 고된 노동 속에서 처절하게 조는 것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시에서 ‘눈앞에는 프레스의 허연 칼날이 쓰을컹 툭탁’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섬뜩했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나는 너무 편해서 조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시를 읽고 나서부터는 아무리 졸아도 손가락이 잘릴 일이 없는 내 졸음이 전보다 조금 덜 고통스럽다. 그리고 요즘은 조금씩 잠을 극복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여전히 애를 쓰고 또 애를 써도 졸음은 오지만, 그 졸음의 고통을 이겨보려고 한다. 아무리 참기 힘들어도 참는다고 죽지는 않는 것이 졸음이다. 스스로 꿀밤도 먹이고 뺨도 두드려가면서 참다보니 전보다는 조금 덜 조는 것도 같다. 그리고 숙면을 할 수 있도록 자기 전에 스트레칭도 하고 머리맡에 라벤더 허브도 놓고 잔다. 빨리 숙면을 취하고 싶다.

잠아, 우리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선아 (광동고등학교 2학년 4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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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행복>, 유치환

어떤 시를 고를지 참 많이 고민하였다. 내가 고른 시집인 ‘노동의 새벽’은 나의 경험과 관련지을 만한 시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이 시이다. 이 시를 처음 본 것은 내가 중학교 때였다. 그 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조금 사회를 보는 관점이 비뚤어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에게 반항하고 집에서는 부모님께 대들던 시절이었다. 그저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웃고 떠드는 것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학교 시절에 친구가 이시를 보여 주었다. 무언가 감동적이라는 친구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때의 나는 사랑 같은 것은 믿지도 않았고 누구를 사랑해 본적도 없었다. 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주위의 친구들이 어느 누구랑 사귀고 깨지고 하는 모습을 보아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언제나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귈 때까지만 하여도 사랑한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던 그 친구들의 모습들이 헤어지게 되면 욕을 하고 만나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바뀌어서 저게 과연 사랑하는 모습일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였다. 그중 헤어지고 난후 며칠동안 울고불고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친구를 사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아 정말 사랑이란 것은 안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는지 나는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고 좋아하게 된다고 하여도 어느 정도 선을 그어버렸다. 아무리 친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한다고 하여도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의 나는 이기적이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사랑만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을 주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한 것이다 .나는 사랑을 못 한 것이 아니고 안 한 것이다. 친구들의 모습에서 사랑을 하고 난 뒤의 이별과 아픔의 모습 때문에 사랑하기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고 선을 그어 더 이상 나에게 다가 오지 못하게 하였다. 사랑에 대해서는 나는 굉장히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의 단점부터 보이게 되고 그저 그 사람이 먼저 나에게 다가와 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 때의 나는 상처 받기를 두려워하였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어도 마음 한편으로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란 필요 없는 감정이라고 느꼈다. 옆에 있는 가족들도 너무 가까이 있어 당연하게 느껴져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의 나의 생각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기를 두려워했던 예전의 그 모습들이 나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랑이 있기에 이별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는 안다. 예전 나의 친구들의 모습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 것 같다.

그 때의 친구들에게 사귀는 것은 하나의 호기심이었고 관심이었다. 아니었던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며칠 만나보고 헤어지는 것은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아직도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와 18년동안 사겨 본 적도 없다. 사길 기회가 와도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기 때문에 그냥 친구로만 남는 일이 많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내가 가진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요새는 사랑한다고 사귀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부럽다. 서로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면서 서로를 위해주고 걱정해주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부럽다. 저 미소가 언제까지나 두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예전 증학교 시절 이시를 보았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때의 나는 사랑을 받을 줄만 알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조금은 성숙해 지고 사랑에 대해서 알아 갈 때 이 시는 나에게 많은 느낌을 주었다. 나도 사랑받기만 하는 것보다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이 굉장히 행복하다. 그때의 난 가족도 친구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지금은 내 주위의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사랑하려고 한다. 내가 정말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 있었지만 이제는 사랑 주는 것에도 나는 익숙해져 갈 것이다. 나에게 아직 시간은 많이 있으니 나는 천천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 가면서 살아갈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 것만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은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졌으면 한다.

이혜수 (광동고등학교 3학년 3반 14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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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그는 늘 최전선에 있었다

후주 무제 쳐들어올 때는 비사들에 있었고

신라와 맞설 때는 죽령으로 달려갔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받는 부마였지만

궁궐 편안한 의자 곁에 있지 않았다

그는 늘 최전선에 있다가

최전선에서 죽었다

권력의 핵심 가까이에서 권력을 나누는 일과

권력을 차지하는 일로 머리를 싸매지 않았다

높은 곳 쳐다보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안락하고 기름진 곳으로 눈 돌리지 않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한 산기슭을 선택했다

그때 궁궐 한가운데 있던 이들

단 한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천 년 넘도록 우리가 온달을 기억하는 건

평강공주의 고집과 눈물 때문 아니다

가장 안온한 자리를 버리고

참으로 바보같이 가장 험한 곳

가장 낮은 곳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가 목숨 던져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도종환 『슬픔의 뿌리』중

1987년 7월 마지막날 나는 처음 세상을 봤다.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엄마옆에도 있지 않았다. 나를 따뜻이 안아주지 못했던 아빠는 우리가족 생계를 위해 해외어선을 타고있었다. 온달이 늘 위험한 최전선에 있었듯이 그는 우리가족을 위해 바다새들과 출렁이는 파란물 밖에 보이지 않는, 낭만있는 바다가 언제 무서운 괴물로 변할지 모르는 그런 곳에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유난히 나는 아빠와 성격이 정반대다. 아빠가 나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먼저 가지고 있었다. ‘아빠가 나를 이해못하는 것은 아빠가 나와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많이 못해서 일꺼야.’ 나는 알게 모르게 아빠 탓을 먼저 하고있었다. 점점 나와 아빠사이는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저녁 늦게까지 컴퓨터를 하고 있다가도 아빠가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 자는척하고 아빠와 인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말투도 변했다. 아빠가 무엇을 물어보면 틱틱 거리기만 할뿐이었다.

아빠와 말 한마디 나누는 게 바늘에 실꿰기 보다 힘들어지고 있을 때 엄마가 그런모습이 안타깝고 괘씸해보였는지 나를 다그쳤다. 나를 혼내는 엄마도 이해하지 못했다. 끝까지 나는 나에게 좀더 잘해주지 못한 아빠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텔레비전에서 ‘행복한 세상’이라는 방송을 하고있었다. 채널을 돌릴려고 했는데 왠지 묘한 느낌이 들어 처음에는 그냥 보자 라는 식으로 쳐다보다 갑자기 마음이 미어지더니 내 눈에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가난해서 아버지를 원망하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깨닫는 그런 내용이었다.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우리아빠는 어떤지. 늘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아빠는 내 행동에 화가나지 않았는지. 아니 짜증이라도 나지 않았는지. 하루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짜증도 나고 힘도 들텐데 힘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되어주지 않는 딸이 밉지 않았는지. 이 생각을 하니까 내가 믿었던 내 생각이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팠다. 내 심장을 주먹으로 친 것 같이.

집을 나와 우리가게로 갔다. 엄마와 아빠는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손님으로 가득 차여있었다. 땀을 물수건으로 닦아 가며 일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니까 서러웠다.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손님이 나가면 ‘안녕히가십시오’ 크게 인사하는 아버지. 손님보다 아버지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 할 수 있는데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남겨 둘 수 있는 자존심까지 버리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주저앉아서 울고싶었다. 아니 뛰어 들어가서 잘못했다고 말하고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오기도 힘든데 내 무거운 마음과 눈물까지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엉엉 울었다. 머리 속에선 영화 필름이 스치듯 아빠에 대한 일들이, 내가 무관심하게 스쳤던 일이 생각났다. 새벽에 어깨가 축쳐져서 들어오는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본 순간 축쳐졌던 어깨가 곧게 펴며 힘들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과 아파도 아프다는 한마디하지 않는 아버지 그래도 아픈 거 티 다 나는데 병원가라고 해도 병원가지 않겠다 하고 가게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참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온달은 왕의 신임을 받는 부마였지만 궁궐 편안한 의자 곁에 있지 않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한 산기슭을 선택했다. 아버지 역시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편안하게 살지 않으려고 했다. 힘든 삶을 선택했다. 온달이 안락하고 기름진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것처럼 아버지는 편안한 가정과 여과생활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 선택한 곳. 자신은 하인과 같고 손님은 왕으로 모셔야 하는,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그런 곳에서 힘든 내색하지 않고 일을 했다.

내가 천 년 넘도록 아버지를 기억하려는 것은 이제서야 아버지의 위대함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못난 나를, 자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나를 이해해주고, 지켜봐주고,조그마한 미동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만큼도 변하지 않은 채 나를 기다려주시는 마음. 내가 아버지를 오랜 시간이 걸려서라도 내 힘으로 아버지의 위대함을 그렇게 라도 깨닫게 해주어서다. 온달을 천년 넘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주지현 (3학년3반17번 farewell-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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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 날짜가 다가오면

백리길 천리길도 쉬임없이 몰아치는

강행군이 시작된다

어차피 하지 말라 해도

올라간 방세를 메꾸려면

아파서 밀린 곗돈을 때우려면

주 78시간이건, 84시간은 먹어치워야 한다

전생에 일 못하고 잠 못잔 귀신이 씌었나

꼬집어도 찔러도 혀를 꺠물어도

고된 피로의 바다 졸음의 물결에

꼴까닥 꼴까닥

눈앞에는 프레스의 허연 칼날이 쓰을컹 툭탁

미싱 때려밟는 순정이는

눈감고도 죽죽 누비는 자동기계가 되어

망치질하는 어린 시다

깨어진 손을 감싸 울면서도 눈이 감긴다

작업장 스피커에선

마이클 잭슨의 괴성,

조용필의 흐느낌이 지침없이 흘러 나오고

주임 과장이 악을 써대도

졸음은 밑도끝도없이 휘감아들어

차라리 차라리 우린

자동기계가 되었으면,

잠 안 자는 짐승이 되기를 원하며

피흐르는 손가락을 묶는다

아침에도 대낮에도 밤중에도

단 한순간 맑은 날이 없이

미치게 미치게 졸려,

꿈결 속에 노동하며 아직 성하게

용케도 붙어 있는 내 두 손이 고맙구나

시커먼 무우짠지처럼

시커먼 졸음에 절여진 스물일곱 청춘,

그래도 아침이면 코피 쏟으며 일어나

졸음보다 더 굵다란

저임금의 포승줄에 끌려

햇살도 찬란한 번영의 새아침을

졸며 절며

지옥같은 전쟁터

저주스러운 기계 앞에

꿇어앉는다

<졸음>, 박노해

어린 시절 우리 집 지하실에는 작은 공장이 하나 있었다. 서로 다른 종류의 미싱기가 두 대, 그리도 다림질을 할 수 있는 판이 하나 그리고 낮과 밤을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유리 없는 창이 하나인 그곳에서 나의 어머니는 항상 라디오를 동료 삼아, 마스크를 친구삼아 미싱을 밟고 계셨다.

난 어릴 때부터 그 미싱이 싫었다. 윗층까지 올라오는 소리도 싫었지만 더 싫었던 건 가끔 볼 수 있는 어머니의 손 때문이었다. 1초에도 수십 번씩 내리 꽂히는 바늘 아래로 청을 포개서 빙빙 돌려가며 넣는다. 잠시 딴 생각이라도 하면 ‘아차’하는 순간에 손가락에 바늘비가 내려버린다.

저녁준비를 해야 한다며 이까짓꺼 며칠 지나면 괜찮아 진다고 대일밴드로 대충 감아 놓는다. 정작 음식 준비할 때는 손가락이 아파서 네 손가락만 움직이면서 말이다. 손톱이 깨지고 피가 흘러넘치는데도 괜찮다고만 하신다. 다치는게 싫어서 골무라도 끼고 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면 미싱 바늘이 상한다고 절대로 끼지 않으셨다.

지금이야 많이 마시지 않으시지만 몇 년 전, 그러니까 일을 그만 둘 때까지 어머니는 커피를 입에 달고 사셨다. 그 덕에 나도 그렇고 누나들도 그렇고 커피는 참 일찍 배웠다. 벌써 마신지 십 년도 훨씬 넘은 것 같다. 그 때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커피는 몸에 나쁘니까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커피가 없으면 견디질 못해 하셨다. 그 땐 커피가 단지 성탕이 많이 들어가서 맛있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공장 일에 집안일까지 한 몸으로 1인 2역을 해야 하는 어머니로서는 쏟아지는 잠을 조금이라도 쫓아내기 위해서 매일같이 그렇게 마셨나 보다.

‘졸음’이라는 이 시 뿐만 아니라 박노해 씨가 쓴 거의 모든 시를 내가 좋아하는 이류는 시가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아름답기로는 법정스님이의 선문이나 류시화 씨의 글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의 시를 좋아하는 건, 그 속에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평화시장 그 먼지 구덩이에서 주 78시간을 저주스러운 기계 앞에 앉아 피흐르는 손가락을 묶는 공순이 공돌이가 바로 나의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점점 커가면서, 몸뿐만 아니라 머리와 마음도 함께 커가면서 살기위해 힘겹게 작업장을 버티던 꼬마들이 지금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새삼 알아간다.

강인구 (광동고 3학년 3반 20번 wintera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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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연 (광동고등학교 3학년 3반 )

안도현

나는 새 옷을 입는 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이 한 살 더 먹은 뒤에는 아주 잘 맞을 테니

몸집보다 늘 큼직한 것을 입어야 한다고

모처럼 옷을 사오신 어머니를 원망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 지금의 나는 뭐냐,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고

소맷자락이 너무 길어서

한두 번씩 접어 입어야 하는

새 옷에다 내 몸을 맞추지 않을 수 없는

우리집의 가난이 남들에게 들통나는 것 같아서 싫었다

밀가루포대를 뒤집어쓴 것 같네,

등뒤에서 계집애들이 쫑알대고 있을 것도 같았다

내 어린 욕망보다 일 년쯤 앞서서

나를 데리고 다니던 새 옷이 미워서

마구 나뒹굴었다, 잔디밭 위에 습진 땅바닥에

먼지 이는 운동장에 천방지축 뒹굴어도

그래도 여전히 나를 꼭꼭 가두는 말끔한 옷을 이번에는

억지로 구겨넣었다, 책상 서랍 속으로

방구석으로 가방 속으로 열등감 속으로 어느 날은

더럽혀지지도 않은 것을 빨랫감 속으로 내팽개치곤했다

나를 세상 속으로 팽개치며

달려와보니 어느 덧 서른세 살,

그놈의 옷 때문에

오늘 아침에도 아내한테 큰소리 치며 화냈다

와이셔츠를 다려놓지 않았는데 양복을 어떻게 입으며

약속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대체 어쩔 참이냐고,

나도 올 데까지 왔나보다

만나는 상대와 장소에 따라 옷을 골라 입는다는 것은

중산층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므로

옷이 재산과 지위를 보장하는 보호색이라면

그럼 지금의 나는 중산층이냐,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몇 번이나 도리질하는 동안

아내가 다려준 옷을 입으며 나는

초록색 잎사귀 위에 앉아 바르르 떨고 있는 청개구리거나

흙탕물 속에서 먹이 찾아 두리번거리는 늪개구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의․식․주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는 옷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살면서 옷을 입지 않고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은 거의 없을 정도로 드물다. 그만큼 옷은 내 일부이고 나의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옷에 대한 자신의 경험도 또한 많을 것이다.

시에서처럼 어렸을 때는 아직 다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해에 키가 클 것을 생각해서 옷을 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사는 옷은 내 체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 옷을 입기 위해선 밥을 잘먹어서 내가 그 옷에 체격을 맞추는 수밖에 없다. 교복을 맞출 때가 가장 그러한데, 나도 역시 그랬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교복을 입기 위해 교복을 맞추러 간다. 그러면 엄마는 3년 동안 입을 계획을 하고선 내 체격보다 훨씬 큰 크기의 옷을 맞춘다. 그때는 처음이고 잘 모를 때라서 엄마가 잘 어울린다고 하고 교복집 아줌마가 잘 어울린다고 하면 나는 그게 진짜인 줄 알고 학교를 잘 입고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중1때 맞춰 입는 교복을 중3 졸업을 할 때까지 입었으니 엄마의 계획은 성공하였다. 지금 학교를 다니면서 보면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과 옷이 균형이 맞지 않아 우스운데 나도 저럴 때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리워 지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 이제는 옷을 살 때 내 체격에 맞추어 산다. 그래서 옷을 살 때 디자인과 색을 가장 많이 고려한다. 옷이라는 것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한다는 면도 있지만 남들에게 자신을 알린다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옷 입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옷이 날개다’ 라는 말처럼 옷은 그 사람의 모습을 한번에 바꿀 수 있다. 또 옷은 자신의 이미지와 성격을 잘 반영해주기 때문에 옷을 어떻게 입는지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교복을 입히는 것 같다. 사복을 입게 되면 학생과 학생간에 빈부차이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된다. 소풍을 가거나 수학여행을 갈 때 가끔 학교에서 사복을 입고 오라고 하면 학생들 전부가 다 자신의 개성에 맞추어서 옷을 입고 온다. 그 날 하루를 보면 사복을 입는 것이 그 학생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고 모두가 획일화된 교복을 입는 것보다 자유로운 사복을 입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일년, 아니 평생이라고 생각하면 상황은 조금 심각하다. 매일매일 똑같은 옷을 입을 수 없으니 가끔씩 옷을 사야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부모님의 경제력에 따라서 학생들간의 옷 입는 형태를 확실하게 구분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 때문에 학교에서는 사복이 아닌 교복으로 학생들 사이의 빈부차이를 없애려고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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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러진 않았을까

동구 밖

가슴살 다 열어 놓은

고목나무 한 그루

그 한가운데

저렇게 큰 구멍을

뚫어 놓고서

모른 척 돌아선 뒤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아예, 베어 버리진 않았을까

<어머니 3>, 김시천

어렸을 적부터 나는 많이 혼나면서 자랐다. 그렇다고 어렸을 때 말썽을 많이 부려서 그런 건 아니다. 엄마가 워낙 엄격하신 편이어서 조금이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어김없이 매로 맞아야 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너무 엄격해서 싫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제일 친한 친구네 집에서도 하루라도 잘 수 있는 날이 없었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도 딱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우리 엄마가 무섭다고들 했다. 나는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리 왜 이렇게 무서울까 하고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참 어렸던 것 같다.

나는 성격이 지금도 그렇지만 조금 내성적인 편이다. 친한 사람들과는 허물없이 지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낯을 가린다. 엄마는 이런 내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 학급임원이나 스카우트 활동을 하도록 권유해주셨고 항상 도와주셨다. 그래서 대체로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다. 원래 많이 조용한 편이었는데 엄마의 노력으로 많이 좋아진 것이다. 엄마는 이렇게 날 위해 많은 것을 해오셨다. 물론 지금 와서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요즘엔 엄마와 정말 친구 같이 지낸다. 옛날과는 많이 달라진 엄마다. 그게 좋은줄만 알았는데, 엄마는 많이 지쳐가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신경 쓰고 싶지만 그러기엔 힘에 부치고 우리는 너무 커버렸고...

우연히 엄마 방에서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엄마가 일기도 썼었나? 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며 서럽고’

이 부분을 읽고 나는 내가 엄마에게 많이 무관심했었구나.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장 속엔 지금까지 내가 19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엄마의 다른 모습들이 보였다. 힘들어하는 엄마, 눈물 흘리는 엄마, 좌절하는 엄마..

모든게 다 삶에 너무 힘겨워 보이는 글들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랑 살았던 우리 엄마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엄마에게 어떻게 해왔던 거지.

지금까지 엄마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난데, 나는 대체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매일 힘들게만 하고 속썩이는 딸밖엔 안됐겠지. 많은 죄책감이 든다.

그리고 일기장에선 세심한 엄마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기록하는 식이었는데

‘지현 성적 떨어짐. 많이 신경 써야겠다’

‘지현 야단쳤음. 핸드폰 압수. 당분간 안 줄 예정’

‘지현이 때문에 오늘은 많이 속상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고 야단 너무 많이 안쳐야겠다’

이런 것들이었다. 하나씩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내 눈앞에 엄마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 정말로 나도 한가운데 큰 구멍을 뚫어 놓고서 모른 척 한게 아닐까. 내가 엄마의 삶을 너무 많이 차지해 버리고선 나만 편하자고 무관심하게 산 것 같다. 이제 벌써 많이 늙어버린 엄마께 내가 많이 신경 써야겠다. 없을 때 울고불고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정말 잘해드려야겠다.

김지현 (경기 광동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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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컷으나 /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 안녕.

<사랑>, 김용택

「사랑」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랐다. 누가 내 맘속에 들어왔다 나갔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놀랐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아니 똑같은 생각을 가지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처음 이 시를 읽고나서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거의 한 시간동안 반복해서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맘에 와 닿았고 지난 2년동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드라마 속이나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하는 행동을 보면서 다른 나라 이야기 같고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기념일 때마다 밤낮을 새워하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하면서 꾸미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숭떠는 걸 보면서 나는 안 그러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내가 변했다. 한 친구를 좋아하고 나서부터 말이다.

화장과 거리가 멀었고 별로 꾸미고 싶지도 않았고 꾸밀 생각도 없었고, 털털한 성격이라서 내숭도 모르고‘나는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는데 이런 나를 한번에 바꿔놓은 친구가 있었다. 처음엔 그냥 좋은 친구로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한번에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만큼 어떻게 하면 그 친구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을 잊게 만들만큼 그 친구를 많이 좋아했다. 한마디로 사랑에 빠졌다. 시도때도 없이 생각나고, 걱정되고, 그 친구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웃게 되고, 드라마, 영화, 책 속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나를 보는거 같았다.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면서 그 친구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허물없이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라도 알면 마음이 덜 아팠을텐데, 이유도 알 수 없으니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가서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슬픈 영화를 봐도 잘 울지 않던 나였는데 밤에 혼자 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 친구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에서는 수백번 수천번 그 친구를, 함께했던 추억을 지웠는데 마음속에서는 지우지 못해서 너무 많이 힘들었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무의식 중에 그 친구와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 때를 그리워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누군가를 잊는다는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겉으론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냈지만 속으론 많이 울면서 가슴앓이를 했다. 그렇게 거의 1년을 보냈다.

그런데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맞는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기뻐하고 슬퍼했던 일들을 겪고 나니깐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주위사람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처음에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게 된 건 나처럼 아픈 사람이 있을까? 나만큼 힘든 사람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컷었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주위에는 나보다 더 힘들고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오히려 이런 일에 마음 아파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더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나와 비슷한 경험이 없는 친구는 같은 이야기를 해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친구와 다르게 겉으로만 듣는척을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위로를 하거나 같이 기뻐하기는 하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면서, 위로할 수 있게되었다.

처음 사랑을 겪고난 나는‘참된 아픔으로 / 세상이 더 넓어져 /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 소중하게 다가오며 /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라는 구절이 마음속에 와닿으면 정말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다.

지금은 내가 그 친구에게 마음을 닫아버려서 말 한마디 없이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 친구로도 지내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 볼 수 있게 해준 지난 일들을 고맙게 생각한다.

민지선(광동고등학교 3학년 4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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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고운 것 보면

그대 생각납니다

이게 사랑이라면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지금 나는 빈 들판

노란 산국 곁을 지나며

당신 생각합니다

빈 들판을 가득 채운 당신

이게 진정 사랑이라면

당신은 내 사랑입니다

백날 천날이 아니래도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내 사랑은>, 김용택

고등학교 1학년! 새 학교, 새 학년, 새로운 담임선생님.

이 단어들로 나는 하루하루가 벅찼었다. 이젠 정말 내가 컸다는 느낌. 더 이상 철부지 중학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학원에 다녔다. 새로운 의지가 있어서였는지 몸은 힘들고 피곤했지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좋아 학원 문으로 들어갔다.

그 날도 역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학원으로 갔다. 갔는데 모든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와 내 친구 둘뿐이었다. 나는 왠지 모를 좋은 기분으로 친구의 엠피쓰리를 가지고 노래를 들으며 나만의 노래로 만들어서 부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그 시각이 나에게는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신호였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강의 시간을 기다리다 강의가 시작할 때 쯤, 나는 수업준비를 하기위해 노래를 끄고 자리에 앉았다. 그 때, 밖에서 들리는 소곤 소곤거리는 목소리들. “재 좀 말려봐.”, “노래 진짜 못한다.”, “야, 멈췄다.” 선배들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선배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창피해서 그만 자리에서 더 이상 크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의는 시작되었고, 강의시간 내내 나는 창피함으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마지막 강의 시간, 선배들 강의실에서 피자 한판이 왔다. 선배들이 선배들의 몫을 내가 있는 강의실에 나눠 준 것이다. 나는 앞 시간의 일을 잊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피자 한 조각 맛있게 먹고, 학원을 나왔다. 목이 말랐다. 음료수 없이 피자를 먹어서였나보다. 편의점으로 달려가 친구와 함께 유리병에 든 음료수를 사서 학원 버스에 올라탔다.

허겁지겁 마셨다. 그리고 비닐봉지가 걸려 있는 문에 병 두개를 넣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 소리가 무엇인데 웃겼는지, 앞에 탄 선배 두 명마저도 웃게 만들었다. 그 유리병 두 개가 나에게 첫 만남을 가져다 줬다. 그 때, 눈을 마주친 한 선배. 그 순간 이후, 그 선배로 인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많은 것이 변했었다.

하루는 선배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들고 버스 앞에서 기다리다 선배에게 음료수를 준 적이 있다. 얼마나 떨리고, 긴장되고, 망설여지던지. 두 눈 딱 감고 음료수를 전해줬다. 전해 준 다음에도 선배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창문으로 비춰진 모습으로 선배를 봤다. 창문으로 반사 되서 비춰진 선배의 모습. 음료수를 맛있게 먹어주는 그 모습이 얼마나 나에게는 감동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선배가 내릴 때 미소와 함께 “맛있게 잘 먹었어. 고마워” 이 말 한마디가 내 눈물을 보이게 했다. 나는 이 날 이후로 이 음료수를 계속 먹었다. 새로운 맛이 나오면 그 맛까지 모두 다 먹었었다. 지금은 너무 먹어서 질려버렸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음료수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음료수 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이 음료수가 내 마음을 전한 음료수였고,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추억의 소품 중 하나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음료수를 볼 때면 그 선배가 생각이 난다. 그 선배가 보여줬던 미소와 말 한마디. 나에게 있어 “아름답고 고운 것” 그 이상의 물건이다.

체육 시간, 나는 습관이 된 것이 하나있다. 지금도 고치지 못한 습관. 고치고 싶은데도 안 고쳐지는 습관. 고쳐지지 않아서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체육 시간이면 나는 항상 선배의 교실을 쳐다봤다. 선배의 교실을 보며 선배는 뭐하고 있을지 생각하는게 하나의 일이었다. 그러다 선배가 창문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면 으레 나는 몸짓이 커졌다. 선배가 나를 볼 수 있도록. 머리로 ‘안 그래야지’ 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려고 하면, 벌써 마음이 먼저 내 몸을 크게 크게 움직이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목소리까지 크게 만들었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었다. 운동장을 하나 가득 울리는 내 목소리. 확성기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일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 때 나는 꽤나 진지했던 걸로 기억난다.

이 습관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선배의 3학년 교실을 지금도 쳐다본다. 이제 졸업해서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본다. 그리고 그 교실을 지나갈 때의 이상한 느낌. 지금도 모르는 느낌이다.

그 교실은 내가 선배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 교실은 내가 항상 바라보면서 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왠지 그 교실에는 아직도 그 선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약간은 미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장 그 교실을 보면 선배를 생각 할 거면서.

이렇듯,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있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물건이지만 나에게는 어느 무엇보다 비싸고 의미 있는 그런 물건이 있다. 나에게 소중한 장소가 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나에게는 이름 모를 힘으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런 장소가 있다.

반소라 (광동고등학교 3학년 4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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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경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 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 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내가 고1때였다. 그때가 한창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 전기가 많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중3때까지 그저 약간의 전류만이 찌릿  찌릿하게 움직이다, 그것이 점점 커져 고1때 폭파 직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어린 나로서는 그런 모습들이 정말 끔찍하고 내 작은 몸뚱이로 어찌할 수 없어 심장이 멈춰버릴 정도로 가슴이 매어졌던 때이다.

그때는 가끔가다가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시는 아버지가 미웠고,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일찍 들어오시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미웠었다. 다른 가정과는 다르게 우리집은, 속은 부식되어있지만 겉은 잘 포장되어있는 예쁜 선물과도 같았다.

지금과는 달리 유도리도 없고 직설적이며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우는걸 잘 했던 나는 언제나 이런 아버지께 대들었다. 그러면서 점점 아버지가 싫어졌고 아버지를 미워했고 그리고 심하게는, 가출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매일 이렇게 살아야 하나 좀더 행복하게 살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에 부모님께서 다투시는 걸 내가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없던 나는 언제나 부모님들의, 몇 달 간격의 행사를 그저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언제나 부모님의 행사는 꼭 내가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당일 날에 이루어져 내 성적이 엉터리라 말하고 싶지만, 어찌 되었든 이런 나의 어린 시절이 있어서인지 지금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더욱 활발하게 생활하려 노력하고 집에서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험악해 지면 내가 모든 것을 포옹하려는 듯 웃어넘기며 유연하게 다른 이야기로 빠지고는 한다. 에구,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나이와는 다르게 어릴 때 애늙은이처럼 산 것 같아 불쌍하다. 가끔 분위기가 험악해졌을 때 내가 웃어넘기고 애교를 부리면 아버지는 우리 딸은 너무 어른스러워서 아빠가 미안하다고 하며 이야기하실 때가 있다.

어째서 그 당시에 내가 너무 어려서 답답하고 힘없는 자의 서러움은 느낄 수 있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우릴 많이 사랑하셨는데, 언제나 부모님의 다툼이 있을 때마다 우는 나와 동생을 꼭 끌어안아 주시고 어머니를 안아주셨는데 왜 그 것을 몰랐던 것일까? 아버지가 이렇게 바뀌어 주셨음 좋겠다고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말할 때도 아무런 말없이 들어주시던 아버지였는데, 그런 아버지였는데, 왜 난 그걸 모르고 아버지를 미워했을까?

어릴 때는 내가, 싸우시는 부모님을 보며 아버지께 대들어도 별로 마음이 아프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흰머리가 보여 마음이 아프다. 내 친구들과는 달리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나이기에 지금부터라도 잘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부모님이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나중에 내가 부모가 되어 내 아들, 딸들이 나 만큼 자라면 그때는 우리 부모님이 나와 함께 있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을 수도 있는데 이 짧고도 긴 시간을 부모님께 불효를 행한다는 것이 요즘은 용납이 안 된다. 그냥 부모님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 예전과는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 가끔 놀라기도 한다. 그냥 요즘은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살려 노력하고 부모님께 튼튼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진다.  

신혜영 (광동고등학교 3학년 4반 8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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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선배는 술에 취하면,

야, 내가 전방에서 밥풀때기 두 개 붙이고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적에 말이야, 우리 소대에 애새끼를 둘이나 둔 나이 든 사병이 하나 있었거든 전라도 해남이 고향인 놈이었는디 좆도,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이 어쩌자고 지 식구들을 강원도까지 끌고 와서 부대 바로 앞에 셋방을 얻어 살게 했어야 짬밥 먹으면서 저도 얼마나 식구들이 보고 싶었겄냐, 내 참, 물어보나마나지 아닌게아니라 사내자식이 눈물은 많아가지고 외출 나갔다가 사나흘쯤 지나면 새끼들이 보고 싶다고 내 앞에서 소대장님, 소대장님, 하면서 찔찔 짜는 게 하루이틀 아녔지 내가 어쩌겄냐, 이 눈치 저 눈치 바가면서 바깥출입 할 수 있도록 자주 편의를 바줬다는 거 아냐 쓰발, 지놈이야 한번 나갔다가 지 각지 배를 몇 번이나 타고 오는지 모르지만 나는 뭐냐, 그때가 스물여덟 새파란 나이 아녔냐, 나는 어쨌겠냐고 말이야, 여하튼 그놈이 하루는 지네 집에 한번만 다녀가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녘때가 다 되어서 그놈하고 같이 그놈 식구들 사는 단칸방엘 갔는데 야, 말도 마라 말이 집이지 시멘트 벽돌 몇장 쌓고 슬레트 몇장 얹어놓은 그 시답잖은 집에 컴컴한 굴 같은 방에 그놈 식구들이 오소리같이 살더라니깐, 백 촉도 아니고 육십 촉도 아니고 전기세 아낀다고 삼십촉 알전구 달랑 하나 켜놓은 방구석에 들어섰더니 웬걸 근사하게밥상이 차려져 있더라 집에서 닭 두 마리를 키우는디 날 위해서 그중 한 마리 모가지를 콱 비틀었다는거야 야, 그 새끼 궁상떨던 것 머릿속에서 다 사그라지고 그때는 감동이 혀끝으로 쓰윽 밀려오는데, 앉자마자 소주 몇잔 주고받았는지 목구멍에서 똥구멍까지 단번에 찌리릿 기분이 끝내주더구먼, 그런디 그놈하고 머리통 굵은 그놈 새끼 둘하고 그놈 각시하고 다섯이서 닭 한 마릴 앞에 놓았으니 숟가락이 냄비 바닥 긁는 소리 나는 건 시간 문제지 안 그랬겠냐, 애새끼들은 고기, 고기 더 달라고 자꾸 보채는디 그놈 각시가 건더기 하나를 내 앞에다 터억 떠맡기듯 집어주는 거야 그게 뭐였는지 알아, 썰지도 않은 닭똥집이었다는 거 아냐, 사양해도 안 통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억지로 그걸 입에 우겨넣었지 뭐냐 야, 그런데 그 닭똥집 환장하겠더라, 칼로 갈라서 모래를 털어내야 한다는 걸 몰랐나봐, 씹을수록 좁쌀인지 모래인지 버석거리고 입안에 닭똥 냄새가 고이는디 나 정말 미치겠더라 그렇다고 대접받는 처지에 뱉을 수도 없고 먹자니 속이 메슥거리고 나 원 참, 그래도 어쩌겠냐 그걸 우물우물 씹다가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겉으로는 겁나게 느긋한 표정을 지으면서, 꿀꺽 삼켜버렸지 뭐냐, 나 그날 대접 한번 징그럽게 받았지야, 그게 70년대 중반이었다야,

하면서 오래된 소대장 시절 이야기를 몇차례나 늘어놓곤 한다.

<대접>, 안도현

친구들과 음식점에서 김밥을 먹게 되면 나는 으레 ‘김밥에 당근은 빼주세요’라고 주문한다. 가끔 잊어먹을 때면 친구들이 김밥 속에서 당근을 골라 내줄 정도로 나는 당근을 싫어한다. 어쩌다 볶음밥에서 뜻하지 않게 당근을 씹을 때면 내얼굴은 금새 똥씹은 표정으로 변한다. 푹 익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당근도 싫어하는 내게 생 당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18년 인생에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으니, 그건 바로 당근주스를 먹은 날이 있었다. 아직도 그 때의 일은 잊지 못한다. 그 일 때문에 내가 이토록 이 시에 공감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얼마 전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 일동에 가보았다. 어릴 적 뛰놀던 곳과 초등학교를 둘러보고 어린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네 집에 가보았다. 친구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보고 싶은것은 친구 어머님이었다. 친구 어머님은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나를 봐왔다. 나를 마치 친딸처럼 생각해주신 어머님을 뵌지도 꽤 된 것 같았다.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는 볼 수 없었지만 친구 어머님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친구 어머님께서는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며 손수 녹즙기에 당근을 갈아 당근주스를 만들어주셨다. 요즘  녹즙기는 성능이 어찌나 좋은지 당근주스 한 컵을 만드는데 1분도 안 걸렸다. 말릴 새도 없이 당근을 갈아 오신 어머님은 내 앞에 당근주스를 내려 놓으셨다. 어머님께서 손수 갈아주신 당근주스를 차마 못 먹겠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컵을 손에 꼭 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서 먹으라는 어머님의 재촉에 드디어 당근주스를 들어올렸다. 당근주스가 담긴 컵이 내 턱으로 올라왔을 때부터 이미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머금은 한 모금의 당근주스에서 느껴지는 당근 냄새에 나는 당황했다. 당황한 나는 그만 숨을 쉬어버렸고 그때부터 느껴지는 생 당근의 맛과 냄새가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오묘한 맛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누가 들으면 당근주스 한 잔에 뭐 그리 호들갑이냐고 하겠지만 나에게 당근은 바퀴벌레보다 무섭고 지네보다 더 싫은 존재이다.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했다면 나는 그 순간 그 이상의 고민을 해야 했다. “뱉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한참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당근주스를 삼켰다. 눈은 웃고 있지만 뱃속에서 요동치는 내 장들의 절규를 어머님은 들으셨을까? 낮에 먹었던 칼국수를 확인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참았다.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리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등에는 벌써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한잔의 당근주스를 비우자 어머님께서는 한잔 더 주랴고 물으셨다. 나는 사색이 되어 괜찮다며 거절했다. 만약 당근주스를 한잔 더 먹었다면 정말로 낮에 먹었던 칼국수를 다시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래가 버석거리고 닭똥 냄새가 고이는 닭똥집을 먹은 시인도 아마 그때 내 기분이었겠지?

내가 그날 어머님의 당근주스 대접을 거절하고, 시 속 주인공이 닭똥집을 거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바꿔서 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손님께 대접 했을 때 손님이 거절하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해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다시 당근주스 대접을 받아도 마셔야 할 것 같다. 정성스러운 대접에는 반드시 정성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상대방을 취향을 고려한 대접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경화(광동고등학교 3학년4반 kung-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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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값

석유값이 오른다

담뱃값이 오른다

무엇무엇 값이 얼마씩 오른다

라디오고 신문이고 떠들어대도

아무렇지 않은데

버스값, 기차값 오른다 하면

겁이 덜컥 나요.

백원짜리 한두 개 내고서

갈 수 있었던 마을 이미 사라지고

이젠 천 원짜리로도

찾아갈 수 있는 마을 몇 되지 않은데

버스값, 기차값 또 오른다 하면

갈 곳 많진 않아도

겁부터 덜컥 나요.

<똥 누고 가는 새>, 임길택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차비가 아마 180원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초등학생 차비는 300원이다. 몇 년 동안 초등학생 차비는 그리 많이 오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 그리고 어른들의 차비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많이 올랐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당시 중․고생 차비는 350~400원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자그마치 650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0원이어서 돈 천 원만 있으면 친구네 집에 갔다가 집에 올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친구네 집에 가겠다고 하면 어림없는 소리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친구네 집에 놀러갈 수는 있지만 집에 돌아올 수가 없다. 한번은 버스 값이 오른지도 모르고 버스를 탔다. 나는 학교까지 걸어가기엔 멀어서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어느 날 아무 것도 모르고 버스를 탄 나는 자신있게 500원을 내고 320원을 거슬러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오는 거스름돈은 단돈 300원이었다. 예전부터 10원짜리 동전도 많이 모으면 큰돈이 된다는 말을 엄마가 귀에 박히도록 얘기해주신 터라 지금 생각하면 고작 20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돈을 받기 위해 용기를 냈다 “20원 덜 주셨는데요”라고. 그때 당시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다행히도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는 친절하게 웃으시면서 버스값이 올라서 니가 받아야 할 돈은 300원이라고 하셨다. 하룻밤 사이에 버스값이 올라서 날 이렇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버스값처럼 자주 오르지는 않지만 뭔가 오른다고 하면 빠짐없이 오르는 것이 담뱃값이다. 우리 아빠는 담배를 많이 피시는 편이다. 담뱃값이 오를 때마다 엄마는 이왕 이렇게 된 것 건강도 생각할 겸 좀 끊으라고 해도 아빠는 몇 일 뒤면 다시 손가락 사이에 담배 한가치를 끼고 계신다. 아빠는 금연하려고 노력하신다고 하는데 내가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담배 때문에 아빠랑 싸운 적도 많다. 엄마와 나, 동생은 다 담배연기를 싫어하는데 아빠는 우리 가족이 다 있는 자리에서도 전혀 거리낌없이 담배를 피우신다. 옆에 있는 우리는 정말 괴로운데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담배를 피우시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아빠께 담배 좀 나가서 피우시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일 갔다와서 힘들어 죽겠는데 담배 피러 밖에까지 가야겠냐고 하는 것이다. 그때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난 또다시 말대꾸를 했다. 밖에 나가서 피기 싫으면 피지 말라는 식으로 대들 듯이 말씀드렸다.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 아빠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셨다. 나에 대한 서운함과 동시에 화가 나신 것이다. 나는 아빠가 힘드셔서 그런건데 이해도 못해드린 것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나와 우리 가족은 아빠의 건강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우리 사회는 물가 인상이다 뭐다 해서 담뱃값, 기름값, 버스값 등 비싸질 수 있는 모든 것이 비싸지고 있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친구집과 우리집을 왕복할 수 있는 일이 벌써 1년 전일이다. 계속 이렇게 인상되다가는 버스값이 비행기값 만큼 비싸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금이 내려가는 것이 좋은 일인지 좋지 않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르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일이 아닌가싶다.

이상은 (광동고등학교 3학년 4반 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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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출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토요일 오후.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시간이 우리가게가 제일 바쁠시간이다. 요즘은 손님이 없어서 한가할때가 더 많지만 항상 조금씩의 설거지거리가 남아있곤 한다. 엄마는 요즘 몸이 좋지않아서 매일 끙끙거리신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난 인사만 하고 방으로 들어와 버린다. 그때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드렸다. 설거지 좀 도와달라는 엄마의 말에 난 짜증부터 낸다. 학교에서 가만히 앉아서 수업만 듣고 온게 뭐가 피곤하다고 난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부리며 투털 거렸다. 그리고는 싫어!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이상하게 그러지말아야지 하면서도 엄마가 뭔가를 시키면 짜증부터 내게된다. 요즘은 또 3학년이라고 늦게 들어오고 피곤해하는 날보면서 엄마의 피곤함을 숨기고 나를 안쓰러워하신다. 그리고 항상 날 걱정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신다. 그래서 항상 엄마에게 감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때에는 그 고마움마저 들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가 나에게 힘을 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사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고하면 병원에 안간다고 또 짜증을 낸다. 옛날에는 아프다고 아프다고 하면서 병원에는 가지 않는 엄마가 참 답답했다. 근데 조금씩 커가면서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너무 아프면서도 병원이 한푼이 아까워서, 또 혹시 심해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되면 나와 동생의 생활이 걱정되서 병원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엄마를 보면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다.

설거지는 엄마의 일이니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빨래도 방청소도 당연히 엄마가 해야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서는 엄마가 조금만 도와달라고하면 내가 그걸 왜 해야되냐고 짜증부터 내게된다. 또 엄마가 아들,딸 걱정해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정말 한심한 생각을 하고있는 날 보면 화가 날때도 있다.

난 엄마를 생각하면 항상 눈물부터 나온다. 엄마가 우리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작은 심부름 하나만 시켜도 짜증부터 나온다. 안그래야지 안그래야지 다짐 하면서도 막상 그 때는 그 다짐을 깨끗이 잊어버린다.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부모님께 잘해드리라고, 아니면 나중에 정말 후회할 것이라고. 솔직히 아직 그 말 뜻을 잘 모르겠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시간동안 항상 내 옆에서 조용히 나에게 힘을주고 기쁠 때 제일 많이 기뻐해줄실꺼고 슬픈 때 가장 많이 슬퍼해주실꺼고 아플 때 가장 많이 걱정해주실 우리 엄마.

나는 정말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모든 집안일은 당연히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청소며 밥이며 빨래며 내가 공부를 하는것처럼 엄마에게는 당연히 해야하는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마다 끙끙대며 아파하는 엄마를 보면서 아니란걸 알았다. 힘들고 고단한 생활을 마땅히 풀 곳이 없어서 밤에 우리 몰래 숨죽여 눈물 흘리는 엄마를 보면서 알았다.  엄마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 힘들고 슬프고 외로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임다혜 (경기광동고 3학년 4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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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음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이번 인생보다 더욱 우둔해지리라

가능한 한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석양을 더 많이 구경하리라

산에도 더욱 자주가고 강물에서 수영도 자주 하리라

아이스크림은 많이 먹되 콩 요리는 덜 먹으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더 많이 겪을 것이나

공상적인 고통은 가능한 한 피하리라

보라 너는 시간시간을

의미있고 분별있게 살아가는 사람의 일원이 되리라

아, 나는 많은 순간들을 맞았으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러한 순간들을 많이 가지리라

사실은 그러한 순간외에는 다른 의미 없는

시간을 갖지 않도록 애쓰리라

오랜 세월을 앞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대신

순간만을 맞으며 살아가리라

나는 지금까지 체온계와 보온물병, 레인코트, 우산이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는 그런 무리 중에 하나였다

이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보다

장비를 간편하게

갖추고 여행 길에 나서리라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초봄부터 신발을 벗어버리고

늦가을 까지 맨발로 지내리라

춤추는 장소에도 자주 나가리라

회전목마도 자주 타리라

테이지 꽃도 많이 꺾으리라

                            <나인 스테어>

친구들은 하나둘씩 작문 숙제를 위해 시를 보고 있었다. 나 역시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 6>을 천천히 보았다.

130P정도 보았을 때 나는 손으로 눈을 만지고 또 비벼대며 책만 보면 잠이 오는 내 습관을 어찌할 수 없었다.

좀더 보고 내가 원하는 시가 나오지 않으면 숙제를 미루겠다는 심정으로 쪽수를 넘기다가 유신종씨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시에 대해 써 넣은 글을 보았다.

난 일단 시는 보지 않고 그가 쓴 글을 눈으로 쭉 내려보았다. 그런데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맘에 들었다. 이글을 읽고 난 후 난 시까지 정독을 하였다. ‘아! 정말 와 닿는다’ 라는 느낌을 받은 시는 중학교 정지훈씨의 시 뒤로 처음인 듯 했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란 시는 화자 자신이 이번 생애에 아쉬운 것이 많아 그것을 시로 엮은 듯하다.

겨우 19년 아니 진짜 나이로 18년 동안 살아온 나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뭐, 젊은놈이 아쉬운게 있다고 저런 시에 감명까지 받아?”라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 소풍갈 때 관광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도 불만 없고, 학교생활도 특별한 것 없고 가정에서도 밥먹고 게임하고 공부하고 얘기하고 잘 까부는 아들, 그냥 난 광동고등학생일 뿐이다. 하지만 난 내 나름대로 겨우 1년 남은 학교생활에서 아쉬운 면이 있다. 

난 초등학생 때부터 반장한번 되어보는 것이 소망 중 하나였다. 초등학교 6학년때 회장인가 부회장인가 딱 한번 해본 기억이 있지만 난 우리반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더 원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하라고 시키면 “아, 그 귀찮은 짓을 왜 나한테 시켜대” 라는 말을 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가장 반장하고 싶었던 때는 중2때였다. 반장이라는 녀석이 공부는 잘해도 매일 같이 애들만 부려먹고 너무 자기행동만 하고 다녀서 ‘내가 했으면 저거보단 잘하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중학교 시절에 들어가니 할 것도 많았고 볼 것도 많았다. 매일 중간고사 끝나면 어느덧 들리워지는 성적예기, 그리고 잘하는 18명이 받던 학업우수 상장들..  난 그 우수상장 받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래도 중1때는 곧잘 받았지만 중2때부터 놀기 시작해서 지금은 개근상만 받아도 감지덕지이다. 이런 나에게 임명장은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그런 상장이었기에 한번은 받아보고 싶어서 반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장이 되는 것 보다 난 여행을 많이 못 가본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솔직히 못 가본 것이 아니라 안간 것일지도 모른다.

제주도 같은 곳도 친구들끼리는 가고 싶어하지만 가족들과 가려고 하면 왠지 꺼림직한 느낌을 받아왔다. 가장 어디 가보고 싶어하는 나이인 순간에 지금은 그냥 집에 눌러 앉아 컴퓨터나 두드리고 있으면 그저 좋다고 하니.. 솔직히 그런 내 성격이 내 외모 까지 많이 바꿔둔 것 같다.

내 외모는 많이들 알다시피 뚱뚱한 체질이다. 우리 집안이 조금은 뚱뚱하지만 그래도 우리아버지는 뚱뚱한 분이 아니어서 초등학교 때는 다행이 아버지 닮았나 했다. 하지만 중1때부터 커야한다고 마구마구 입으로 넣었던 음식들이 이제는 빼야한다고 나가라고 해도 무시하고 눌러붙어버린 살로 변해버렸다. 정말 어찌보면 난 다른 것보다 살 찐 내 모습 자체가 후회스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침 거울을 마주하고서 씻겨진 내 몸을 볼 때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올때가 있고 그럴때마다 살을 빼야한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그런 다짐은 어느 때부터인가 허무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고3이라 그런지 지금은 살빼지 말자는 생각을 가질 때가 허다하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 어쩌면 정말 좋을지도 모른다. 더 영리 할 수도 있고, 더 잘 생길지도 모르고, 돈도 더 많은 부모 만날 수 있고. 하지만 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때 가서도 무어도 고치고 싶다, 무어는 후회 스럽다 이런말 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욕심이 끝이 없으니까.

난 그래서 그냥 이제 남은 삶이라도 열심히만 할 생각이다.  그냥 내가 볼 때 정말 멋진 삶이었다라고 생각이 들게 살 것이다.

유재혁 (경기 광동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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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이름을 대고 나이와 직업을 대고

꽝 내리치는 주먹

떨어지는 국화꽃잎 아래서

그때 거기서 나는 웃었다

컵의 물이 근엄한 近影에 튀었다

쓰레기통에서 자기 그림자를

파먹는 미친개 같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黙示의 물 우에 꽃잎 몇 개가

혓바닥처럼 떠 있었다.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3>, 황지우

그때는 내가 중학교 3학년 생활을 하고 있을 때다. 정확히 그 때의 언제인지 짚어낼 수는 없지만 새로운 학년에 적응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시점이었던 것 같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주걱으로 때리는 강병률 선생님, 인기 좋았던 김수연 선생님. 고학년답게 대부분의 선생님들을 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지겨운 수업에 그만 졸아버리고 말았고, 그것은 쉬는 시간 내내 이어졌다. 곧 국어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때 강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깨워서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부스스한 얼굴로 앞에 걸어 나왔다.

“거기 엎드려 뻗쳐.”

그가 특유의 경망스러운-내 주관적인 시선에-어조로 내게 명령하고 나는 곧바로 엎드렸다.

그 상태로 약 10여 분간 있자 나는 그만 심통이 나버렸다. 땀이 줄줄… 말이 10분이었지 나는 그 시간동안 온갖 검고 저주스러운 말들을 한가득 떠올리고 있었다.

“일어서.”

10여분 전과 같이 한결같은 어조로 그가 말했다. 나는 땀에 불쾌한 기분을 느꼈고 결코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그것이 문제였다. 그는 곧바로 내게 뭐라 호통을 치며 다시 엎드리라고 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뭐가 안되겠던지 학생과로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며 교실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그의 화난 모습에 겁에 질려 순순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내가 학생과로 가게되면 벌어질 참극이 상상되자 마음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체념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안경 벗어.”

안경을 벗자 곧바로 그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나는 움찔거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나를 위협했다. 하지만 애초에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었던지 주먹이 왼쪽 뺨을 후갈겼다. 파란 불이 번쩍 하고 뇌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애들 싸움’이 아닌 처음 제대로 맞아보는 주먹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서럽고 화가 나서 그만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거기서 그는 어떠한 성적 쾌감을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더욱 더 나를 괴롭히고 싶었나보다. 나는 엎드린 채로 허벅지에 매질을 당했고 강압적인 태도로 물어보는 그의 질문에 대초원의 톰슨 가젤처럼 순순히 대답해야했다. 곧 그의 가학(加虐) 성애의 절정이 찾아왔다. 그는 내 앞뒤에 앉았던 친구들을 불러서는 수업이 시작하도록 왜 나를 깨우지 않았느냐고 내 앞에서 다그치고는 매질을 가했다.  아, 더럽다. 더럽고 추하다.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피학대 음란증 환자가 아니었기에 그 모습들이 너무 괴롭고 미칠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나서 나는 그가 싫어졌다. 그의 수업시간에 웃을 수 없게 되었고 그가 내쉬는 이산화탄소가 내 폐부에 닿는게 너무나 소름끼쳤다. 그 정도였다.

후에 반성을 했는지 뭔지, 넌지시 내 부모님 의향을 물어보는 모습에 나는 그만 웃음이 나버렸다.

*                        *                        *

졸업장을 따내 정상적인 사회진출의 길을 밟아야 하는 학생들, 그리고 학생을 훌륭하게 성장시켜내야 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 그는 진정 교사가 아니었다.

폭력 교사들은 말한다. 그들 자신도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학생들이 화를 돋구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교사는 성숙해야한다. 당신들은 사람이어선 안된다. 적어도 ‘인격을 가르치는’ 동안에는 사람이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황금 같은 학창시절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스스로 깨우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                        *                        *

일단 이번 글 쓰기는 분량에 자유가 있어서 쓰는 내내 즐거웠다. 주제가 폭행을 당한 중학시절이었지만 지금에야 “아, 그랬었지.” 하는 느낌일 뿐 강 선생님에게 노여움 같은 것은 많이 희석된 것이 느껴진다. 그저 ‘그 날 아침 부부싸움을 했거나  교장선생님께 혼났던 일이 있었거나 신호위반으로 딱지를 뗀 일이 있었겠지‘ 하며 이해해 줘야지 착한 학생이 아닐까?

장동민 ( 광동고등학교 3학년 4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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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아빠의 손을 잡고

경기도 광릉 시각장애인 식물원에 가서

손으로 나무들을 만져본다

이건 소나무야, 이건 도토리나무고

이건 진달래야

아빠가 어린 딸에게 자꾸 말을 걸자

소나무가 빙긋이 소녀를 보고 웃다가

소녀의 손바닥에

어린 솔방울 같은 눈동자를 하나 쥐여준다

시각장애인 식물원에는

꽃들이 모두 인간의 눈동자다

나뭇잎마다 인간의 푸른 눈동자가 달려있다

시각장애인들이 흰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식물원으로 들어서면

나무들이 저마다 작은 미소를 지으며

시각장애인들의 손바닥에 하나씩

눈동자를 나눠준다

보라 

봄길을 걸어가는 시각장애인들은 모두

손바닥에 눈이 있다

고비사막의 어느 사원에 그려진 부처님들처럼

손바닥의 눈으로 별을 바라보고

손바닥의 눈으로 한강철교 위로 떠오른

초승달을 바라본다

중계동 산동네에 사는 독거노인 한분도

맑은 손바닥의 눈으로

이웃들이 찾아와 켜준

생일 케이크의 작은 촛불을 바라보고

수줍게 웃는다

<시각장애인 식물원>, 정호승

중학교 3학년 때 사진을 찍으러 갔던 게 마지막이었나? 아니면 부모님과 식목일이라고 함께 놀러갔던게 마지막이었나? 광릉수목원을 마지막으로 가본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광릉수목원은 초등학교 때 소풍으로 거의 매년 갔었다. 갔을 때마다 식물원 견학은 빠지지 않는 소풍의 일정 중 하나였다. 소풍이 아니더라도 부모님과 함께 였을때도 식물원은 꼭 구경했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광릉수목원 식물원에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점자로 만들어진 설명문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뭔지도 모르고 그저 신기하게 생겨서 만져보고 놀았다. 그런데 그것이 시각장애인들이 손으로 만져보고 읽을 수 있게 해 논 것이라 는걸 알고 난 후부터는 조심스러워지고, 또 직접 눈을 감고 더듬더듬 천천히 만져보기도 했다. 읽어보려고 노력은 해봤지만 점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점이 찍힌 대로 따라서 만져만 보고 말았다.

식물원에 시각장애인분들이 오셨던 게 기억이 난다. 자원봉사자분들의 도움을 받으시면서 식물원 이곳저곳을 둘러보셨다. 나는 유심히 그 분들을 바라보았다. 시각장애인분들은 점자 설명문을 손으로 만지시면서 읽으시기도 하고 두 손을 더듬거리시면서 잎사귀들도 조심스럽게 만지기도 하셨다. 또 향기도 맡으시고 식물원 안에 있는 꽃들과 나무들을 만져보는 모습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이 보이는 사람보다 식물들을 더 잘 보고 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향기를 맡아 보지고 않고, 만져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분들은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눈보다 더 섬세한 부분까지 찾아 낼 수 있는 손으로, 식물들을 만져보고 느끼신다. 

이 시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모두 손바닥에 눈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정말 공감가는 구절이다. 손바닥에 있는 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눈보다 훨씬 좋은 눈이다.

하늘이 파랗다는 것, 봄에 피는 개나리가 노랗다는 것, 진달래가 예쁜 분홍색 이라는 것..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눈으로는 그 색을 볼 수 없지만 시에서처럼 손바닥의 눈으로 별을 바라보듯이 손바닥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볼 수 있다.

시각장애인분들은 식물원에 오셔서 아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가신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도 손바닥의 눈으로 다 보셨을 테고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향기들도 다 느끼셨을 것이다.

언제인지 기억이 안나지만.. 아마 짐작하건데 시각장애인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였을 거다.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집안을 돌아다녀 본 적이 있다. 평소엔 쉽게 다녔던 길인데 눈을 감으니 왜 그렇게 여기저기 부딪히고 힘이 들던지....

오늘 난 정호승의 ‘시각장애인 식물원’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그 당시에 아주 기억에 남았던 지금은 잠시 잊혀졌던 시각장애인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김소임 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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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설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에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및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꾹새 울음소리 가득한 살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치자꽃 설화>, 박규리

‘두근두근’  설레는 이맘. 내가 여자란걸 새삼 일깨워준 작은 떨림. 여자지만 여자처럼 보이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내가 사랑이란 닭살 돋는 것에 빠져버렸다. 행복하기만 했던 그 사랑이 나를 울릴 줄은 몰랐다.

요동치는 심장.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 했던 마음이 제어가 되지를 않고 제멋대로 커져갔다. 멀리서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그 애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했던 내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모르는 자신감에 떠밀려 무작정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첫마디 “안녕 날씨 참 좋지?” 입이 방정이지. 그날 날씨는 비가 아주 주룩주룩 내리고 잠깐 개어있던 뿌~연 상태였다. 옆에 있던 내 친구들과 그 애의 친구들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괜히 민망해서 허탈한 웃음만 내뱉고 있는데 그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어? 어..날씨 참 좋다. 시원해서 좋지?” 오오~ 마음씨까지 착하여라! 내 눈에 렌즈대신 콩깍지가 껴져버렸다. 민망했던 상황은 잠시뿐 그새 말이 통해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만나서 장난을 치며 놀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은 동네라 집에도 같이 갔다.  하루하루 행복함이 더 해지면서 그 애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같이 찍은 사진은 보물1호가되었고, 추억들은 차곡차곡 일기장속에 담겨졌다. 친구로 남기에는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기에 점차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일요일! 집에서 대자로 누워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그 애가 쉬는 날인데 둘이서 놀러 가잔다! 이게 왠일 이래! 들뜬 마음에 일어나서 정말 빠르게 준비를 했다. “그래! 오늘 고백하는거야!” 나 자신에게 격려를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애와 만나서 롯데월드에 갔다. 여름이라 그런지 땀이 나서 짜증이 났지만 행복한 기분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어린애처럼 방방뛰며 놀이기구를 타며 행복을 만끽했다. 둘 다 지쳐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 음식점에 들어가고 있는데 큰 화분이 내 쪽으로 넘어져 흙이 내 신발에 쏟아졌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는데 그 흙들이 내 눈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애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이리로 오란다. ‘누구지? 친군가?’ 이 생각을 한지 2분정도가 흘렀다. 나는 젓가락으로 탑을 쌓으며 놀고있었다. 마지막 젓가락을 올려놓는 순간 누군가의 인기척에 놀라 그만 탑을 건드려 버렸다. 아까웠지만 밥이 나온 것 같아 즐거운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내 눈앞에는 밥이 아니라 처음 보는 남자에가 서있었다. 딱 보니 그 애의 친구 같았다. 그 애의 소개로 서로 인사를 하고, 밥을 먹으며 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냥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밥을 다 먹고 호수에 가서 바람을 맞으며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애의 친구가 옆에 왔다. 오더니 다짜고짜 지 번호를 저장시켜주더니 사귀잔다. 순간 어이가 없어서 “뭐? 너 장난하냐? 죽을래?” 하곤 일어났다. 그 애가 있는 곳으로 갔다. 고백을 하고 싶었다. 나는 그 애 옆에 앉아서 그 애 친구가 한말을 다 말했다. 어이없어하며 웃을 줄 알았던 그 애는 나한테 저놈 좋은 놈이라며 ,나 좋아한지 오래됐다며 잘해보라며 나를 떠밀었다. 이대로 밀려나면 다시는 고백 따위 생각도 못할 것 같아서 나는 다시 그 애 옆에 앉았다. 다짜고짜 나 너 좋아해라고 하면 장난으로 생각할 것 같아서 타이밍을 노리며 말을 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그 애는 “어쭈? 눈치빠른데?”라고 하며 한번 피식 웃었다. 순간 설레는 이 마음... 너도 나를? 기대하며 그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던 내가 너무나도 한심스러워 졌다. 그 애는 내 친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고백했는데 어제부터 사귄다고, 오늘 놀러온 것은 나와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친구와 사귄다고 그 답례로 나를 지 친구와 이어주기 위한 것이었단다. 서글픔에 그 애에게 물었다.“그럼 나는 몬데?”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당근 넌 내 친구지! 내 남자친구!” 이 한마디에 그 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행복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너무나도 슬펐지만, 눈물이 흘러내리려고 했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내색을 하면 그 애와 사이도, 내 친구와의 사이도 서먹해 질 것 같아 나도 장난식으로 넘겼다. “짜식 그럼 그렇지! 역시 넌 내 진정한 친구다!” 하늘이 나를 위로라도 하듯 비를 쏟아주었다. 나는 비에 눈물을 가리며 서글프게 울었다. 비 소리에 내 눈물과, 마음을 모두 쏟아내었다. 친구와의 아름다운 사랑에 방해꾼이 되기 싫어 나는 내 마음을 모두 빗물에 흘려보냈다. 슬픈 사랑아 안녕~   

30115 전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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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를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동해바다-후포에서>, 신경림

내 나이 열아홉.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중에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가족 또는 친구들일 것이다. 가족은 한 핏줄이라고 한다면 그럼 친구라는 존재는 뭘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 년, 수 십년동안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다. 무언가 시작 하려고 하면 서두르게 되는 경우가 많고, 뭔가 일이 잘 안되거나 복잡한건은 금방 싫증이 난다. 계산과 생각이 필요로 하는 수학이 싫어서 문과 오게 된 계기도 그렇다. 그 급한 성격 때문인지 친구들에게도 사소한 걸 가지고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다. 그 친구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이다. 각자 집에서 놀기도 하고 함께 자전거 타고 이리저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딱 한번 싸운 적이 있었다. 싸운 다음에 정든다는 말이 맞는지 그로 인해 더 가까워 졌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방과 후 학교에서 야구를 하게 됐는데 그 친구가 수비를 잘못하는 바람에 우리 팀이 지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너 때문에 졌어, 어떡해” 이 말을 그 친구에게 해버리게 된 것이다, 그 친구도 열심히 했는데 내가 그 상황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나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친구들이 말려서 싸움은 마무리 됐지만 한동안 그 친구와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학교생활을 했었다. 그러던 중 먼저 그 친구가 나에게 사과를 하게 됐고 우리들의 관계는 예전보다 더 친해졌다, 하지만 사과를 받고 나니 미안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화를 낸 내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친한 친구도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하게 돼서 지금까지 연락 한번 하지도 못하는 그런 사이가 돼버렸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멀어지나 보다.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내다가 몇 년 못 보게 되면 기억이 사라지게 되는. 그 친구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미한하다고 사과하고 싶기도 하다,

지금은 인창고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와도 아주 재미있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시절 서로가 통하는 다섯 명에 남자가 있었다. 학교에서도 같이 도시락 먹고 숙제할 때도 같이 하는 그런 집단 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인터넷을 하던 중 어느 게임을 발견했다. 하다가 나에게 맞는 것 같아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줘서 우리 다섯 명은 같이 게임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인창고 친구와 나만 빼고는 그 게임은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며 얼마 하지 않고 그만 뒀지만 인창고 친구와 나는 경쟁을 하듯이 게임을 하게 됐다. 그 친구가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갖게 되면 질투가 생기기도 하고 자랑하는 걸 보면 미워지기도 했다. 게임 아이템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소중한 게임 아이템이 생기게 됐고, 인창고 친구는 그것을 갖고 싶어 했다. 그 친구는 나한테 간절히 요청했지만 나는 욕심을 부렸고, 인창고 친구는 화를 내며 “그래 너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면서” 그 게임을 포기 했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면 벌을 받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게임은 망하게 되면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게 사라지게 됐다. 인창고 친구도 그 게임이 망하자 아쉬워했지만 그것보다 우리의 우정을 되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게임을 하는 동안은 친구건 뭐건 남 보다 더 좋을려고 하는 이기주의 태토가 생긴 것 같았다. 그 친구와는 가끔씩 버디에서 만나 이야기 한다. 그 때 우리가 왜 그랬었는지. 게임은 게임일 뿐인데. 그래서 미안하다고 가끔씩 말한다. 중학교 졸업식 날 그 친구는 나에게 작은 선문을 주면서 “고등학교 가면 만나기 힘드니까 연락 자주해“ 그러면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이 두 가지 경우 말고도 나에게는 친구들과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때 달리기 시합 중 친구를 이기기 위해 반칙을 썼던 것이나, 친구들 약점 말하는 등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조금만 더 친구들을 생각하고 잘 대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쉽기도 하고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이제 학교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 이지만 친구들에게 잘해주고 사소한 것에 대해 시비 걸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이수환 <30131 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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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 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는 세상에 많은 아버지들처럼 사랑이라는 말에 상당히 무뚝뚝하신 분이다. 겉으로 드러나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기보다는 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하듯이 속으로 사랑을 하는 분이다. 지금은 그래도 철이 들어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왜 우리 아빠는 다른 아빠들처럼 그렇게 다정하지 못할까' 원망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다른 아버지들이 아들, 딸을 위해서 아침, 저녁마다 자가용으로 태워 준다는 이야기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고, 적어도 비 오는 날은 약간 기대해 보지만 '역시 기대한 내가 바보지'라며 혼자 실망하면서 집에 온 게 한 두번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가끔씩 부자가 나와서 서로 사랑한다며 부둥켜안고,다정히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도 나는 혼자 욕을 하면서 다른 방송을 틀었다. 괜히 방송이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자위하며 마음 한 켠에는 우리 아버지도 저렇게 다정한 분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고1때, 나는 포기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랑이라는 말을 아예 잊어버려서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는 거라며 아무렇게나 아버지를 원망했다. 가족보다는 일과 신앙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라고 단정지어 생각하니 내 마음이 후련했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작년 11월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탁상 위에 있는 지갑하나를 열어보게 되었다. 내 지갑인지 알고 돈이 얼마나 남았나 확인해 보려고 하는데 열어보니 아버지의 낡은 지갑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지갑 속에는 내 증명사진이 대 여섯장 있는 게 아닌가. 최근에 찍은 것부터 초등학생 때 찍은 것까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진들이 아버지의 지갑 속에 숨쉬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확인하는 웃음이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대해주셨지만, 다른 아버지들처럼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구나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듬직한 아들녀석이라며 다른 분들한테 사진을 보여주실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시는 분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 아버지는 사랑을 모른다고 혼자 섣불리 생각한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이 시를 처음 만났던 작년 여름방학 보충수업 때 나는 선생님께서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이 어디냐고 물어보시길래 우스개 소리로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라는 구절을 가리켰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단지 이 시는 보충수업을 위해 배우는 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그 날 이후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가슴이 여미어오는 것을 느낀다. 지금은 이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나의 지난 얘기들 같아 어느 것 하나 인상깊지 않은 구절이 없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무뚝뚝하다. 그래서 아직까지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못 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등을 밀어달라고 오시기 전에 아버지의 등을 먼저 말없이 밀어드리는 아들이 되어야겠다.                            

정수양 (경기 광동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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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빠다

달려와 안기던 딸아이가

아유 냄새

이쁜얼굴 찡그리며 고갤 돌린다              

솔아 니 유아원에도 보내고

컴퓨터도 사줄라꼬

회사에서 일한 아빠 향기잖아

까끄런 내 입맟춤에 찡그리며 웃는다

솔아 훗날 너는 알게되리라

온몸에 배안 아 아빠의 냄새를

이 기름 냄새의 설움과 아픔을

이 기름 행기의 깨끗한 가치를

<아빠의 향기> 박노해

나는 아빠가 아침에 일을 하러 나가실 때 인사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아빠는 매일 내가 자고 있을 시간인 새벽 일찍 나가시기 때문이다. 저녁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거의 잠을 자고 있을 때 들어오신다. 그래도 요즘은 낫다. 나도 학교 수업을 따라가느라 늦게 들어오고 아빠는 나보다 조금 더 늦게 들어오신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아빠는 “어이~” 하신다. 한번의 안부인사로 아빠와 나는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그래서 일까 난 아빠의 냄새를 맡아본 적도 기억도 없다. 아빠에게 그다지 그렇게 가까이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번이라도 맡아보았다면, 분명 아빠에게는 쇠 냄새나 기름 냄새가 낫었을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열심히 쉬지 않고 일을 하셨는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직업이 얼마나 힘든 것 인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직 한번도 맡아보지 않았다는 것, 그 무관심 때문에 나는 너무나 나쁜 딸이 되었다. 갑자기 아빠의 향기를 맡아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 그저 아빠의 향기를 맡는 것뿐인데 왜 용기가 있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걸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아빠는 매일매일 쉬는 날이 일주일에 한번을 있을까 말까하게 바쁘게 일을 나가신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아빠는 항상 피곤하신가 보다 아니 정말 피곤하실 것이다. 매일 운전하느라 모든 몸이 다 쑤시고 피곤하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아빠 어깨 한번 주물러 드린 적이 없다. 나는 아직까지도 아빠가 어렵게 느껴진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역시 나는 또 못된 딸이 된다.

아빠를 어렵게 느끼는 내 자신이 싫다. 그러면서도 원하는 것이 많은 나다. 항상 갖고 싶은 것을 아빠에게 말을 한다 한참 고민에 빠져 생각한 다음에 말이다. 아빠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면서 무섭기도 하기 때문이다. 꼭 한소리 듣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빠는 나중에 꼭 사주신다. 그 한소리 뒤에는 꼭 따라오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막 쓰고 졸라대던 것이 모두 아빠가 힘들게 일한 것이였다. 그리고 씻고서 나온 아빠의 발을 보면 정말 고생을 너무 많이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뒤꿈치가 다 갈라져서 매일 약을 바르시는 그런데 나는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운전만 하셔서 그런가 보다. 그 약 바르는 모습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아빠에 대한 직업을 한번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아빠를 한번더 생각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그러면서 겉모습 보다는 그 뒤에 숨겨진 아빠의 커다란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고, 이런 것들을 보면서 아빠는 우리를 부족하게 키우지 않기 위한 사랑,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노력들을 꼭 하나하나씩 알아가야 한다. 난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김은하 (경기 광동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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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반 한 덩이도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 만-

한반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나는 외동딸이다. 그리하여 남들보다 엄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중학생 때는 엄마가 집에 없으면 공부가 안될 정도였으니 말하지 않아도 어는 정도인지 대충 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를 보고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했다. “마마걸”이라고. 지금 생각해도 그땐 왜 그렇게 엄마에 대한 집착이 강했는지 모른다. 어딜 나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집착이 그립다.

올해 내 나이 열아홉. 유년시절 ‘도대체 언제 어른이 되는 거야!‘ 하며 달력에 하루하루 X표를 쳤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년이면 이제 나도 성인이 된다(윽~소름끼쳐).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끼친다.

요즘 고3그런지 모든 신경들이 날카롭게 곤두선 느낌이 든다. 나의 주위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엄마는 새삼스레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고3이라는데 그것을 느낀다’고 말하신다. 엄마 역시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많이 걱정되시는 모양이다.

매일같이 엄마에게 짜증만 내고, 나도 이러는 내가 너무 한심스럽고 싫다.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오는 나이면서도 엄마 앞에서는 한없이 싸가지 없는 딸로 돌변하고 만다. 나도 내가 정말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 엄마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언제부터 였을까? 제법 머리가 커진 나는 언제부턴가 엄마와의 싸움에서 대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늘 있는 말다툼이었는데 엄마가 너무 격한 나머지 나에게 손을 대셨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맞아도 쌌다. 엄마가 버르장머리없는 딸을 때리고 혼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는 나의 머리로 날아오는 엄마의 힘없는 작은 손을 잡고 뿌리쳤다. “왜 때려!”하고 마구 달려들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은...말로 표현할 수조차 또 다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이 글로 그때의 끔찍함이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엄마에게 너무 죄송스럽고 만일 타임머신이 있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때로 돌아가 정말, 아무런 저항 없이 죽도록 맞고 싶다. 엄마의 그 작고 힘없는 손에..

고등학생 이후로 엄마께서는 나에게 가미 손을 못 대신다. 고등학생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아님, 그때 내가 엄마의 손을 뿌리친 이유 때문일까, 이것도 딸이라고... 내 자신이 이 세상 누구보다 못나고 병신같다.

이 시 한 구절 한 구절 모두가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하는 엄마, 나의 학원비라도 벌어 볼까 하는 마음에 아파트 지하실 먼지 구덩이 사이에 앉아 미싱을 하시는 엄마. 찬반 한 덩이도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우는 엄마, 가족들 없는 쓸쓸한 방한 구석에서 그저 텔레비전만 켠 채 상도 피지 않고 찬밥에 고추 하나만 두고 먹는 엄마.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는 엄마, 맛있는 반찬이면 아빠와 내 앞에 두고 “음, 김치가 맛있다”하시며 김치와 밥만 드시는 엄마.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은 엄마, 미싱으로 인해 갈라진 손과 사고로 아픈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

할아버지 돌아가 신날, 엄마의 모습의 눈물을 그때 처음 보았다. 정말이다. 엄마는 항상 내 앞에서만은 건강하고 씩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렇게 우는 걸보고 얼마나 몰랐는지 모른다. 그때 내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지금 현재로써 엄마 없는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오늘 안 좋은 일들이 많아서 인지 새벽 1시인 이 시간에 괜실히 눈물이 흘러나온다.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싶다. 너무 우울하다. 나만의 치료약 엄마.

(박운화 3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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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농사

지난해 순열이네

고추농사 지어서 돈 벌었다는 소문

앞집 뒷집 담을 넘고 개울을 지나

발도 날개도 없는 것이 쭉쭉 퍼져

올해는 온 마을 사람들

고추농사만 지었다

올해, 온 마을 사람들

고추농사만 지어놓고

고춧값 뚝 떨어져 모두 망했다

두세 번 속으면서도

혹시나 올해는

돈벌이 될 줄 알고 심었다가

고춧값 뚝 떨어져 쫄딱 망했다

고추농사만 망했으랴

자식농사 이웃농사 쫄딱 망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서정홍

우리 아빠께서는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버스가 잘 다니지 않는 그곳에서 매일 아침 자전거로 통학을 하셔야만 했다. 또,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논, 밭에 나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을 거들곤 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아빠의 농촌일기를 매일같이 들어 왔다. 아빠는 이러한 농촌생활이 지겹지도 않은지 매일 6시 모 방송국에서 하는 ‘6시내고향’과 매주 수요일에 하는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그리고, 장수드라마 전원일기까지. (지금까지 하는지는 알 수 없음.) 농촌에 관함 프로그램이다 하시면 좋고 나쁨을 떠나 모두 좋아하신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하는 옆에서 아빠와 같이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봐왔다. 아마, 내 또래의 아이들이 이러한 프로그램을 본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시간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들이 즐비하며 아빠와 잦은 싸움도 하였지만 나는 결국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빠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 세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들을 보면 어르신들 프로그램 치고 매우 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농촌사람들의 일상생활들이 다루어지는데 정말인지, 농민들의 소박함과 순수함, 그리고 그들만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마음 따뜻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농촌의 익숙한 나에게 띈 이 한편의 시는 나의 가슴에 쏙- 와 닿았다.

보통사람들은 농촌을 떠올릴 때, 상막한 도시와는 다른 느림과 고요가 존재하고, 맑고 푸른 하늘과 온통 초록빛으로 덮여져 있는 아름답고도 고요한 시골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농촌이라고 해서 항상 아름답고 고요함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이 한해 농사를 망해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농민들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조금이나마 더 배웠다는 도시사람들이 이(농촌민)들의 등을 쳐 먹는 경우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 농민들의 심정을 잘 반영한 마음 아픈 시라고 생각한다. 정말, 남 일 같지가 않다. 모두가 불황인 이때, 누가 무엇으로 성공했는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주목을 끌 만한 관심사일 것이다. 위의 시는 정말인지, 농민들의 삶을 잘 그려 놓은 것 같다. 고추농사. 여기서 고추농사는 일종의 희망일 것이다. 누구나 희망을 원한다. 그리고 모두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망이라는 것을 갖는다. 그러한 것이 이 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이러한 소문들은 왜이리 빨리도 퍼지는지. 그것은 온 동네 전역에 퍼진다. 소문이 퍼져 그 말을 듣고, 모두들 농사 잘 됐으면 좋으련만 알 수 없는 변덕으로 인해 그 해 고추농사는 망하고 만다. 이렇게 매해 소문에 속으면서도 농촌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번에는 되겠지.'하는 마음에 그 해도 또 다음해에도 고추농사를 한다.

늘어가는 것 빚이오, 줄어드는 건 하도 울어 말라버린 농민들의 눈물이니 어느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겠느냐 말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읽다보면 맨 마지막 연, 두 번째 행에 '자식농사 이웃농사 쫄딱 망했다'라는 부분이 있다. 이웃농사는 소문이 전역으로 퍼져 다같이 고추농사 지어 망했다 쳐도 왜 자식농사 망했다고 하는 것일까?

축 산업 하는 사람들에게 자식들 어떻게 키웠나 물으면 다 소, 돼지, 팔아 키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속의 농민들은 고추농사로 자식들 먹고싶어 하는 거 사 먹이고, 갖고 싶어하는 것 사주고, 좋은 옷 해 입혀 학교 보낼 생각이었는데 고추농사 망했으니, 무엇으로 자식을 키우겠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자식농사까지 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삭막한 도시에서 살지 않은 탓인지, 이런 농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이 농민들은 매해 얼마나 큰 좌절을 느끼며 살았을까. 이런 농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대한민국 모든 농민들에게 '아자아자'...

   박운화(3학년 2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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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이장댁 똥개 멍구가

도시에서 손님들 놀러 온다고

버드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몽둥이로 맞고 오늘 죽었다.

‘죽기 싫다, 죽기 싫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멍구 울음소리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우리 집까지 쫓아왔다

우리 집 진돗개 복실이는

마음이 아픈지

하루 내내 밥도 먹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 몰랐다.

서정홍 <멍구 울음소리>

시를 읽자마자 기억하긴 싫지만 떠오른 기억 하나 때문에 괴로웠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천에서 이곳 남양주시로 이사를 왔는데, 부천과 남양주시의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더구나 내가 이사를 온 곳은 검단리라고 광릉내 에서도 들어가고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조그맣고 조용한 마을.

우리가족은 비록 빌라에서 살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부천에서는 지을 수 없던 큰 개장을 만들고 독일 사냥개 한 마리를 키웠었다. 아빠와 언니 그리고 내가 동물을 많이 좋아해서 엄마는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했다.

그런데 얼마 뒤 내가 눈물을 머금고 우리 개를 충남 서산에서 과수원을 하고 계신 고모 댁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 집은 마을 회관과 냇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여름이 아니면 거의 그 냇가의 물은 말라 있었고 여름이 되어야만 어린 아이들이 물장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깊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는 아마도 깨끗한 물이 흐르는 여름이다.

동생들과 같이 웃옷 하나 바지하나 입고 냇가로 가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데 어디선가 비명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와 동생들은 다시 그 소리를 들으려고 주위를 기울였다. 그리고 곧 소리가 나는 곳을 보고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집으로 뛰어 들어와야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3~4명의 아저씨들이었던 것 같다. 마을 회관 앞 큰 나무에 개를 거꾸로 묶어 두고 각목을 들고 내리 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불로 태우는 아저씨까지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놀란 나는 동생들과 뛰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엄마한테 울면서 아저씨들이 개를 때린다고 말했다.

근데 엄마는 별로 신경을 안쓰셨다. 계속 말하다가 오히려 내가 시끄러우니 나가서 놀라고 엄마는 화를 내셨다. 그래서 난 조금 후 다시 나가봤다. 그런데 이번엔 역한 냄새가 났다.

나중에 언니에게 안 사실이지만 그건 개를 잡아먹기 위해 때리고 불로 태우고 끓이는 거라고…….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귀여운 개를 잡아먹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그래서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결국 눈물을 머금고 우리 개를 시골로 보내야만 했다.

그 뒤로도 나는 개를 잡는 모습을 몇 차례 볼 수 있었는데 그 때마다 개들이 “보람아 살려줘” 이러는 거 같아서 나는 귀를 꽉 틀어막고 집으로 뛰어갔다.

어린마음에 내가 그 불쌍한 개를 구하지 못했다 라는 마음에 자책감이 들기도 했었다.

내가 오남리로 이사 온 후에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 다시 봐도 나는 내가 그 불쌍한 개를 못 구한다는 사실에 자책감이 들 것 같다. 불쌍한 멍멍이들.

이 시를 나는 보신문화에 찌든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싶다. 그 사람들은 이 시를 읽게 된다면 무엇을 느낄까?

어린 아이들에게 가장 친한 친구를 빼앗아 가는 일. 하나의 생명을 나를 위해서 처참히 없애는 일. 지금은 ‘내 몸에만 좋다면…….’ 이라는 이기주의로 인해서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야생동물이며 정든 동물까지도 먹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고도 보신문화라는 이름으로 용서되는 이 현실이 한참 삐뚤어 진 것이겠지? 나는 지금, 이 시를 읽어주겠다 라는 말을 조금은 후회하기도 한다. 무섭기 때문에. 오히려 읽어주고도 그 사람들이 아무런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그 현실이 더  슬플 것 같다

(이보람 30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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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이제 나도 고등학생이라고 약간은 들뜨고 약간은 불안해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학교 연극 동아리가 공연을 한다고 해서 우리학년 전부가 구경을 갔다. 수업을 안 한다는 즐거움에 온 몸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기쁜 마음으로 공연장을 향하던 나는 지금부터 이야기 할 그 분과 마주치게 되었다. 약간 당황스럽게 말이다. 같이 간 친구들이 많아서 길거리를 우리가 차지했는데, 그 당시 나는 오른쪽 끝에 있었다. 친구들과 웃으면서 걷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누가 봐도 어려워 보이는 할머니, 그냥 지나칠려는 그 순간에 할머니는 얼굴이 닿을 듯한 거리로 다가오시더니 나에게 100원만 달라고 하셨다. 순간 당황스럽고, 약간은 무섭기도 했던 나는 도망쳤다. 나중에는 왜 나를 끝에 세웠냐고 아무 잘못도 없는 친구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리고  난 뒤 그 할머니의 흉내를 내었다. 100원만 달라고 하는 말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철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눈물을 한 줄 흘리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 할머니의 슬픔이 그 당시에 나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할머니의 슬픔이 조금이나 느껴졌다. 못 먹으신 할머니는 그 때 친구들과 행복하게 걸어갔던, 나를 보고 도와달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할머니의 간절한 목소리를 무시해 버렸다. 환경이 힘들고 슬퍼서, 눈물까지 흘리신  그 할머니를 나는 모른 척 했다. 그리고 나는 도망까지 쳤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길거리를 오래 방황하신 듯 옷은 때가 절었고, 얼굴은 검게 탄 얼굴이었으며, 피부는 주름살이 많았다. 이 시를 읽으면서 불현듯 그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것도 방금 본 것처럼 자세히 말이다. 왜 내가 이렇게 그 할머니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동안 나는 어렵게 사는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 많이 접했다. 나만 알고 나만을 위해 살았던 내가 이제 조금이나마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변한 나였기에 지난 일이지만 그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던 게 아닐까? 그 할머니와 나와의 만남은 책에서의 경험이 현실이 된 경우니까 말이다.

너무나도 어렸고, 생각이 짧았던 17살의 나. 그 당시에 내가 뛰어가던 뒷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나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의 나라면, 만약에 그 할머니를 한번 더 보게 된다면, 가게로 달려가서 빵과 우유를 사 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때는 죄송했다고, 어린 아이가 철이 없어서 한 행동이었다고 용서를 빌고 싶다. 그리고 손을 잡으면서 “힘내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날씨가 아직도 쌀쌀한데, 지금도 거리를 배회하시는지 궁금하다.

한지현 (광동고등학교 3학년 3반 1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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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밥 먹고

  우리 아빠는 논에 갑니다.

  저녁에 집에 오면

  흙 묻은 얼굴

  흙 묻은 손과 발을 씻지요.

  나는 밥 먹을 때

  우리 아빠를 생각합니다.

  <우리아빠>, 김용택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우리 아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우리 아빠지만 지금까지 아빠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얼마나 느꼈을까.

아빠께서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고 나와 나의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열심히 공장에서 일을 하신다. 나를 위해서 힘들게 일하시는 아빠인데 나는 그런 아빠를 보면서도 항상 철없는 생각만 많이 했다. 고1때만 해도 나는 아빠가 공장에서 일하시는게 쉽게만 보였다. 그래서 간혹 나쁜 생각도 많이 했다. 학교가기 싫을 때가 있으면 내가 아빠대신 공장일을 하고 아빠가 내대신 학교를 갔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철이 없기만 한 생각이다. 아빠가 하시는 일이 쉽다고만 생각한 내가 너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런데 아빠를 보면 내가 부끄러운 생각들만 많이 했던 것이 생각난다.

작년 여름이었다. 정말 그 날을 엄청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 날 나와 내동생은 집에 있기 너무 따분하고 더운 나머지 버스를 타고 아빠 공장에 직접 찾아갔었다. 동생과 함께 공장안으로 발을 내딛었을때 나는 얼굴이 엄청 후끈 달아올랐고 무슨 찜질방에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너무 뜨겁고 숨이 막혀서 공장안에서 5분있는  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공장안에서 아빠께서는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끊임없이 기계를 돌리고 계셨다. 정말 그때 아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공장을 내발로 직접 찾아가기 전까지 나는 아빠께서 그렇게 일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힘든 일이였는지 말이다. 세상에 모든일이 다 힘들겠지만 나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그런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기계안에서 일하시는 아빠의 모습은 너무나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것을 보고 난 후 나는 전에 느끼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아빠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의 손을 자세히 본 적이 없던 나였다. 아마 아빠의 손에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연히 아빠의 손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보던 아빠의 손이 아니었다. 손은 온통 뜨거운 기계 때문에 생긴 작은 화상들이 군데군데 있었고, 일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손이 퉁퉁 부어있었다. 나는 그런 아빠의 손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도 모르게 아빠의 손을 잡고 말았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더욱 울컥하게 만들었던 건 아빠가 나의 손이 닿자마자 고통을 호소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아빠의 손에 내가 직접 약을 발라 드렸다. 그런데 손이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어있고 찢어져서 약을 발라 드릴 때 정말 조심스러웠다.

나를 위해 자신의 희생도 감수 하시는 우리 아빠이다. 지금 아빠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하면 아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빠의 모습은 기름 때 묻은 얼굴과 기계 때문에 손에 생긴 화상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서있던 탓인지 퉁퉁 부어오른 다리와 발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항상 우리에게 웃음을 지어주시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를 생각할때면 “정말 공부 열심히 하자”그래서 지치고 힘든 아빠에게 힘이 되어주자 라는 생각이 마구 든다.

나도 아빠가 힘들게 만드신 후라이팬 손잡이를 볼때면 아빠 생각이 나도 모르게 많이 난다. 누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빠가 만드신 후라이팬 손잡이로 내가 이렇게 잘먹을 수 있었고 잘 지낼 수 있었다. 요번 방학 때 나도 한번 아빠가 하는 일을 해보겠다가 공장에 갔다가 고생만 하고 온 기억이 난다. 무척이나 힘든일인 것을 알고 난 뒤였기에 나는 한번 체험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일도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날 일도 아닌 일을 한거나 다름이 없었는데 온갖 팔과 다리가 아팠고 온몸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너무 일을 안하다가 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때 확실히 느낀 것이 있다면 내가 지금 제일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힘든일을 아빠가 하시는데 나는 왜 그렇게 쉬운 공부를 하지 않았었는지...... 그래서 요즘 아빠를 볼 때 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너무 죄송스럽다. 그러면서 요즘 더욱더 아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피곤하신 몸을 이끌고 집에 오셔서 나에게 공부하기 힘들지 않냐면서 나의 어깨를 주물러 주시는 우리 아빠, 아빠를 표현하자면 정말 끝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런 아빠를 생각하면서 정말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께서 나를 위해 묻힌 온갖 기름때들을 말끔히 씻겨 드릴 것이다.

오미리 (광동고등학교 3학년 2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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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에 떠나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머릴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 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파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담배 연기처럼>, 신동엽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많지만,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많기를 바란다. 위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많지만, 그보다 나를 더 위해주는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의 욕심이자,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인간관계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 일컫지 않는다.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친구들에게 부담을 준적도 있었다. 내가 사랑받고 싶어 하니까 나부터가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대하며 행동하게 되니까 친구들이 느끼기에는 “한나가 왜 저럴까? 내가 무슨 잘못했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 달 쯤 된 일이다. 나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친할수록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와 친한 친구에게 엄청 조심스럽게 대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에게 맞추려다 보니 괜히 나의 자유를 빼앗긴 기분도 들고 내 마음은 하루 종일 편치가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요즘 니가 나를 대하는게 왠지 부자연스러워 보여. 왜 그래? 내가 뭐 잘 못했어? 뭐 섭섭한 것이라도 있어?” 그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오히려 내가 섭섭하고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했다. 내가 그 친구에게 배려를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 아이를 부담스럽게 하고 조금의 불신을 가지게 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한심해 졌다.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과도하게 예의를 지키고 행동하려다보니 역효과가 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펐다. 오히려 친구에게 내가 그 친구를 잘 믿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이 친구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런 저런 말을 해 주면서 앞으로 그러지 말라며, 친할수록 예의를 지켜야 되지만 그건 아니라고 나에게 충고를 해 주어서 지금은 그 전보다 더 친하게 지낸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그 친구를 비롯하여 내가 신뢰하고 있는 친구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더 두터운 믿음이 생겨 난 듯하다.

친구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서 한 일로 인해 나는 나 자신에게 자유를 잃은 듯한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고, 친구의 자그마한 행동을 다 나와 연관하여 생각하다 보니까 공부에 집중도 잘 안되고, 기분이 우울하고 그로 인해 친구에 대한 외로움을 키워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난 주고 싶은 사랑이 많다. 그 못지않게 받고 싶은 사랑도 많다. 하지만 나의 욕심으로 인하여 친구들을 잃고 싶은 생각은 추어도 없다.

『담배 연기처럼』을 읽으면서,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과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이 부분이 그래서 나의 가슴에 와 닿았나 보다.

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으로 인해 두 번 다시는 친구를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엄한나, 광동고등학교 30109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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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굳은 살 뿐인

찔레가시가 박히지도

못하는 장작개비 손

깨알같은 펜글씨도

달랑치 논배미마다

내력을 적어두신 손

다 낡은 천 원짜리 돈들을

책갈피에 곱게 곱게 펴 넣어

벽장에 넣어 두신 손

자식하나 키워내길

참외팔고 누에치며

늙도록 논두렁 풀을

깍아 내시던 손

밭두렁, 논고랑마다 땀을 쏟아

등골이 다 패여도 모르던

오직 한 맘이시던 돌 같은

지금도 진토 됐을 손

이병석, (아버지의 손)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가족여행을 가보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18년 동안 단 한번도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업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에게는 가족들보다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와 첫 트러블이 생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18번째 생일을 맞았던 날 나는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 왜냐하면 가족들과 첫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아침 잠깐 공장에 다녀오신다고 나가셨던 아버지는 오후가 되어서도 들어오시지 않으셨다. 매번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아버지와 확실히 했던 약속이었기 때문에 기대한 것 보다 실망감이 배로 컸다. 그날 늦은 저녁, 아버지는 그제 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한손에는 케잌과 또 다른 손에는 꽃을 들고 계셨다. 아버지께 처음으로 받아보는 생일선물이었지만 실망감에 비해 기쁨은 반도 차지 못했다. 아버지는 미안하다며 계속 나의 맘을 풀어주시려 하셨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속상했고 결국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터뜨려 버리고 말았다.

“아빠, 나는 아빠가 정말 싫어요, 정말 밉다고!” 아버지께 처음으로 심한 말을 내뱉었다. 한쪽 맘이 무언가에 찔리듯 너무 아팠다. 아버지는 미안한 맘 때문인지 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셨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었다. 울다 울다 지쳐서 잠시 맘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나의 맘이 이렇게 찢어질 듯이 아픈데 아버지의 맘을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 서야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바로 아버지께 사과를 드리기 위해 안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고단하셨는지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데 뒤돌아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내 눈에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과 상처가 가득한 손이 보였다. 아버지는 언제 이렇게 늙으신 것일까? 눈가와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그보다 더 마음이 아팠던 건 다 망가진 손이었다. 손가락 두개는 잘라져 없어지고, 손바닥은 이리저리 갈라져 검은색 기름때가 끼어 지저분했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 울었다. 그러다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는지 아버지께서 깨셨다. 그리고선 내 우는 모습을 보고 더 미안해지셨는지,

“정이야, 아빠가 미안하다. 오늘 아빠도 정이 생각해서 빨리 들어오려고 애를 썼다만, 갑자기 기계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딸 생일하나도 챙겨주지 못하는 아빠가 참 부끄럽다. 미안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이런 못난 딸이 세상에 또 있을까, 철이 들만큼 들을 나이인데도 아버지 마음 하나를 헤아리지 못하다니.. 나에 대해서 굉장히 실망감이 들었다.

며칠 전에 나는 아버지와 마음속에 있던 속마음을 들춰낼 수 있는 자리를 가졌다. 요즘에 내가 아버지께 많이 토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빠께서 매일매일 술을 드시고 들어오셨고, 담배피는 양도 더 느셨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그러실 때마다,

“저리가, 술 냄새나..담배냄새 숨막혀! 나가서 피워!”라고 툭툭 쏘아댔다. 하지만 이것은 내 진짜 속마음이 아니었다. 입안에서는

“아빠..아빠 건강도 생각해야지,, 담배랑 술 조금만 줄이세요..”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입 밖으로는 짜증스런 말만 나왔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도

“아빠도 정이한테나 니 오빠한테나 미안한 것이 많아. 너도 알다시피 아빠 하는 일이 번번이 실패하다 보니까 아빠가 너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만큼 해줄 수가 없잖니.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아빠는 너보고 힘을 얻는데, 너는 자꾸 툴툴대고,,신경질만 내니까 아빠는 요즘 살맛이 안나, 아빠도 정이 맘 다 알았고 노력할테니까 너도 아빠를 조금만 더 이해해줘.” 라고 말씀하셨다.

그날이후로 아빠와 나는 서로를 보며 웃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야 정말 애교 많은 아빠 딸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이란 질문이 있다면 서슴없이 그 답에 ‘아버지’라는 답안을 작성 할 것이다. 언제나 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매일 밤늦게 까지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많이 미웠지만 가족들을 위해 휴일이며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어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과,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우리 아빠 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 정 (광동고등학교 3학년 3반 1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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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약수를 주전자에 넣고

출렁출렁 산길을 내려왔다

까치가 눈앞에서 날아오르고

여지껏 내 생의 헛된 욕망의 소식들과

솔방울처럼 말라버린 기다림들이 푸르르

깃을 치며 떠올랐다 내 발걸음은 약수를 길어

산길을 내려오는 것만도 벅찬 호흡인데

산 위의 물은 어떤 절망의 터널을 뚫고 내려와

이렇듯 온전한 약수로 샘솟았는가

주전자의 벌린 입처럼 해찰하며

냇물의 나른함으로 흘러내려온 내 삶의 버릇이

아깝게 자꾸 약수를 쏟게 했다

삶이라는 것도,

마음대로 출렁대며 내려오다보면

약수처럼 슬금슬금 쏟아져버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난 차 한 잔과 국물 한 사발이 더 필요했으므로

다시 오던 산길을 거슬러올라갔다

까치 떼가 지금까지 걸어온 내 발길의 기억처럼

날아오르고, 난 다시 거슬러올라갈 수 없는

내 삶의 산길을 생각했다

<약수를 길어오며-철화네 집, 벽제에서>, 유 하

벌써 5개월이 지났다. 할머니가 내 곁은 떠난지도. 시간은 정말 르다는 걸 새삼 느낀다. 매년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느끼곤 했지만 할머니와 헤어진 후부터 하루하루가, 한 달 한 달이 정말 빠르다.

작년 10월, 할머니는 암으로 86년의 고단하셨던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4년 전 임파선 암에 걸리신 것이 발견되었을 때 항생제 치료를 해야 한다는 병원의 지시에 따라 항생제 치료를 하셨다. 하지만 항생제 치료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머리카락이 빠지고 식사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셨다. 할머니 자신께서도 치료를 견디기 힘드시고 그걸 보는 가족들도 힘들어하자 할머니께서는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냐고 하시면서 항생제 치료를 포기하셨다.

초등학생 때 외삼촌이나 친척분들이 우리집에 오실 때마다 날 보면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지연이 니가 할머니 생각을 제일 많이 할 거라고. 그 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와 매일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셔도 난 별로 슬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나는 철이 없게도 할머니와 떨어져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기 때문에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고 늦게까지 친구네 집에서 놀 수 없었다. 단지 그런 이유로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가족만 따로 나가서 살았으면 하고 생각하곤 했다. 중3때 할머니께서는 큰외삼촌 댁에 가시고 우리 가족만 장현으로 이사올 때도 10년 넘게 살아온 할머니와 떨어지는 것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두 달 동안은 많이 울고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사소한 일상 하나까지도 할머니께 신경쓰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리집에 오셨던 날 저녁 늦게까지 숙제를 하는 날 보시고 이제 그만 자라고 하셨을 때 퉁명스럽게 마저 해야 한다고 말했던 때가 생각난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그동안 할머니께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하나 후회가 되고 가슴에 남으면서 내가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께서 편찮으신지 오래됬고 병원에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달이나 입원해 계셨는데, 가까운 곳에 살고 할머니 병원 앞을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매일 몇 번씩 지나치면서도 할머니 뵙는 걸 미루고 잊어버려서 결국 돌아가시던 날 겨우 두 번째로 병원을 찾았던 내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할머니께서는 매일 나를 기다리셨을 텐데. 다들 멀리 떨어져 살고 큰외삼촌이나 엄마는 일이 끝난 저녁에만 찾아뵐 수 있었으니 낮에는 혼자 계시면서 날 기다리셨을 텐데.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갔던 날 보시고 우리 지연이 밖에 없다고 하시던 할머니.

하루하루 생활이 바쁨에 하나 둘 기대다보니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거슬러올라가려 해도 다시 거슬러올라갈 수 없고 다시 주워담으려 해도 주워담을 수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할머니께 해 드리고 싶었던 것을 다시는 해 드릴 수 없다. 차 한잔과 국물 한 사발을 위해 다시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는 걸  다시 거슬러올라갈 수 없다는 걸 안 뒤에 깨달은 바보같은 나.

할머니 산소에 한 달 전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 할머니와 약속했다.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말자고.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후회하는 일을 겪지 않을 순 없겠지만 지금처럼 후회하는 일은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다시 거슬러올라가도록 하지 말자고. 제일 괴로운 건 나 자신일테니까.

조지연 (3학년4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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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꺽어 들고는

내 딸년 같은 꽃잎마다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안도현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오랜만에 책장 위에 올려져 있던 사진앨범을 꺼내들어 어릴 적 내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면  이를 훤히 드러내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입에 달고 한 손에는 도너츠를 든 내가 봐도 귀여운 내 모습에 취해 들어간다. 그렇게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어느새 뿔난 송아지 마냥 사고만 치고 다니던 초등학교 때 사진이 눈에 들어오고 그 때 일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아버지가 군인이셔서 어릴 적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고, 거의 읍, 면 지역을 떠나본 적 없이 살았다. 그리고 관사라고 불리는 군인 주택에 살았는데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주택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주택 생활을 하다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군인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썩 크지도 않은 평수였지만 엄마는 노래를 부르셨고, 오빠랑 나는 각방을 얻어 신나게 춤을 추었다.

  아파트로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파트 통로에 들어선 순간 좋지 않은 냄새와 함께 완벽하게 하얗고 지나치게 깔끔해져 있는 복도 벽면에 시선이 꽂혔다. 아침만 해도 구정물을 뿌려놓은 듯 때가 더덕더덕 껴있던 벽면이 순간 깨끗하게 변하자 못된 충동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하지만 냉정을 되찾고 벽면을 외면한 채 집을 향해 손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공부를 매우 싫어하고, 친구들과 짝지어 놀기를 즐기던 어릴 적에 나는 대부분의 날들을 고무줄놀이 혹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로 하루를 보냈다. 그날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 운동장에 나가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같은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살며, 같은 반이지만 얼굴만 마주치면 다투게 되는 주희와 뜻하지 않게 같은 편을 하게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져 같이 손을 붙잡고 집에 오게 되었다. 같은 통로 1층에 살았던 주희와(나는 3층이었다)나는 나란히 통로에 들어가게 됐고 역시나 적응 안 되는 페인트냄새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괴롭혀왔다. 급속도로 매우 친해진 주희와 나는 헤어지는 게 아쉬워 통로 안에서 잡다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문득 전에 느꼈던 못된 충동을 또 한번 느끼면서 고민을 해야 했고, 주희는 자기한테 말해보라고 나를 설득했다. 결국 못된 충동은 오히려 주희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런 주희를 보면서 나도 자극을 받아 오늘 미술 준비물로 학교에 들고 간 크레파스를 가방에서 재빨리 꺼내들어 때 묻은 내손을 얻어놓기 미안할 정도로 뽀얀해진 벽면에 미친 듯이 말도 안 되는 그림들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희와 내 창작의 세계는 1층부터 5층까지 단 몇 분 만에 도배 되었고, 미래에 다가올 일들을 예감하지 못한 주희와 나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쿵쿵 뛰어다녔다. 쿵닥거리는 주희와 내 발소리가 컸는지 한 아주머니께서 문을 열고 나오셨다. 순간 주희와 나는 놀라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주머니도 크게 놀라셨는지 벽면을 둘러보셨다.

  엄마와 주희의 어머니께서는 같은 통로 아주머니들께 죄송하다고 사과드려야했고,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했다. 주희와 나는 눈물을 한껏 솟아내고 나서야 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어렿을 적이라 금방 잊어버렸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어머니께 제일 죄송하다. 늦게 후회하는 것이 제일 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항상 늦게 후회한다. 정말 못난이다.

전아랑 (광동고3학년4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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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쉬는

공기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너를 부르마>, 정희성

1993년 2월 어느날이었다. 나는 군인이 되어 신병교육대에 속해 있었다. 저녁이었다. 하루의 고된 훈련을 끝내고 동료들은 막사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전투화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딱딱한 가죽신발이 발을 파고들지 않도록 야삽을 들어 전투화 뒷발목을 두드리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때 저녁 햇살이 따뜻하게 우리 몸을 비췄다. 붉고 노란 햇빛이 몸에 닿으니, 쌀쌀한 바람이 살을 헤치고 파고드는 겨울이라, 그 볕이 참 따뜻했다. 옆에서는 지금 이름을 잊은 중앙대 약대 다니다 온 둥근 안경 쓴 친구가 함께 이 얘기 저 얘기를 나와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그리고 ‘내가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이라는 구절이 떠올라서, 계속 내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이상스레 그 말들을 입에서 계속 중얼거렸다. 같이 신발을 털던 약대 친구에게 내가 기억해낸 시의 한 부분을 말해주고 같이 기억을 재생하려 했다. 이 시는 대학 때 널리 알려진 노래라서 노래를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친구도 마침 이 시를 노래로 알고 있어서 둘이 힘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와 친구, 두 사람은 이 시를 다 기억해내지 못하고 부분부분만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대학생활이 힘겨워서 군대로 도망간 사람이었다.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갈수록 그때마다 어깨에 더해지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용기가 모자랐다. 학생운동을 한두 해 한 학생이 흔히 겪는, 이성과 감성이 훨씬 앞서가는 반면에 몸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순에 걸려 허우적거렸다. 새로운 모임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책임지지 않고 군대로 갔다. 그것은 우리 집안과 타협한 일이기도 했다. 내 이익을 희생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 내가 단호하지 못하고 흔들릴 때 언제나 집안 어른들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곤 했다. 나는 내가 선태한 대학생활이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 쉬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간 군대에서 나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사격훈련과 같이 몸을 많이 땅에 뒹굴게 하는 훈련을 받거나 땅에 엎드려 기어가다 잠시 그 자세로 쉴 때, 그 겨울땅에 돋아나 있는 작은 풀잎 하나도 나를 탓하는 것 같았다. 그 체험은 정말 묘했는데, 힘들게 몸을 혹사하는 훈련을 겪고 잠시 휴식시간을 가질 때, 이상하게 내가 이때까지 저지른 나쁜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는 것이었다. 쏟아지듯이 지난날 내가 이때까지 살아오며 한 작거나 큰 잘못들이 기억에서 솟아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참 형편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고개를 떨구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그리워졌다.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입으로 마음으로 소리냈을 때, 내 가슴에서 그리운 느낌이 생기면 그게 사랑이구나 하는 이 시의 첫구절이 크게 와닿았다. 함께 신병교육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짐짝이나 짐승 같이 이리저리 치였고, 그 속에서 나도 하찮은 물건처럼 이리저리 떠밀렸다. 그렇게 내가 별볼일없어졌을 때 나는 나랑 기억을 같이한 사람들이 몹시 소중해졌다. 그들에게 밤에 편지지를 볼펜으로 꾹꾹 눌러가며 편지를 쓰고 또 썼다.

그 사람들이 나를 잊을까 두려웠다. 이런 불안은 나뿐만 아니라 함께 풀색 군복을 입은 이들 모두가 함께 느끼는 안타까움이었다. 그것은 거의 정서불안에 가까운 집단의식이었다. 그러기에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이라는 구절이 내 가슴에 와서 박혔을 터이다. 보통 때는 늘 주변에 있어서 ‘공기’처럼 그네들이 얼마나 소중한 줄 모르다가, 내가 안 좋은 상황에 놓이고 떨어져 있으니까 그네들을 애타게 그리워했다. 후회는 어쩔수없었고, 내가 나에게 던지는 자기 모멸은 힘겨웠다.

첫 휴가를 나오자 나는 시내서점에 가서, 이 시가 담긴 시집을 바로 샀는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서서 단숨에 다 외웠다. 그 시집은 정희성 시인이 펴낸 <저문 강에 삽을 씻고>였다.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학교와 같은 재단이라 교류가 있던 명성여고 문예반 문집에 그 시집에 실린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실려 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몇 번이나 그 시를 읽어도 제대로 느낌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함께 난다. 하루동안 일하고 해 저무는 시간에 강에 나가 일하는 도구인 삽을 씻는 사람의 모습을 가슴으로 느낄 만큼 내 삶과 정신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시가 누군가에게 와닿는 일은 그 시를 받아들일 만큼 그 사람의 삶과 정신이 될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또는 좋은 세상살이와 인생의 스승이 가까이에 있어, 내가 혼자 가닿지 못하는 세상의 정서에 나를 이끌어주거나 할 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 시절 나는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과 외로움이 오늘을 사는 나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을까. 그 어려운 기억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나는 군대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그 고통을 통과하며, 여러 갈래 길로 다르게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이는 그 고통으로 더 따뜻하고 속깊은 이가 되었고, 어떤 이들은 악에 대한 예민한 감성을 잃어버린 이가 되었다.

송승훈 (경기 광동고 교사  http://blog.naver.com/wintertree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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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잘 공감한다고 제가 생각한 시집들입니다.

고은, <고은>, 문학사상

이시영, <바람 속으로>, 창비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지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창비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곽재구, <받들어꽃>, 미래사

이성복, <남해금산>, 문지

고은, <만인보>, 창비

김용택, <섬진강>, 창비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래사

정지용, <향수>, 미래사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창비

이용악, <낡은 집>, 미래사

김정환, <지울 수 없는 노래>, 창비

정일근,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비

유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지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

김남주,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창비

신경림, <농무>, 창비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비

한하운, <보리피리>, 미래사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 창비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문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 느린걸음

양정자, <아이들의 풀잎노래>, 창비

김규중, <딸아이의 추억>, 내일을여는책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비

김시천, <마침내 그리운 하늘에 별이 될 때까지>, 문학동네

곽재구, <서울 세노야>, 문지

도종환, <슬픔의 뿌리>, 창비

서정홍, <58년 개띠>, 보리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창비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미래사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박용주, <바람 찬 날의 꽃이여 꽃이여>, 장백

이시영, <은빛 호각>, 창비

김용택, <강 같은 세월>, 창비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열림원

김남주, <사상의 거처>, 창비

서정홍, <아내에게 미안하다>, 실천문학사

임길택,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사

최두석, <성에꽃>, 문지

도종환, <다시 피는 꽃>, 현대문학

양정자, <아내일기>, 화남

김지하, <마지막 살의 그리움>, 미래사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창비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정호승, <서울의 예수>, 민음사

곽재구, <사평역에서>, 창비

문경규 외 ,<퇴출시대>, 삶이보이는창

김사인, <밤에 쓰는 편지>, 문학동네

브레히트, <살아 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문지

고정희, <지리산의 봄>, 문지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비

윤재철, <세상에 새로 온 꽃>, 창비

김영현, <겨울 바다>, 천년의시작

박노해, <겨울이 꽃핀다>, 해냄

정세기,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 실천문학사

맹문재, <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사

임길택, <산골 아이>, 보리

서정홍, <우리 집 밥상>, 창비

김해자, <무화과는 없다>, 실천문학사

윤재철, <세상에 새로 온 꽃>, 창비

배창환,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창작과비평사

안도현,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학과지성사

이기형, <산하단심>, 삶이보이는창

공광규, <소주병>, 실천문학사

신경림, <신경림 시전집 1-2>, 창비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임길택, <똥 누고 가는 새>, 실천문학사

이원규, <옛 애인의 집>, 솔

양정자, <내가 읽은 삶>, 실천문학사

김병연 지음, 이응수 정리, <김삿갓 풍자시 전집>, 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