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감독 - 2002 woldeukeob gamdog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진출과 선수들의 병역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4강을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60) 러시아 축구 대표팀 감독이 여전한 '한국 사랑'을 과시했다.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 '헬스'지 최신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축구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여러 대회를 통해서 신인들의 눈높이를 끌어 올려주고 노장들에게 그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알려 준 게 감독으로서 즐거웠고 보람된 일이었다"며 "당연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6번의 네덜란드 정규리그 우승,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과 함께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연속 4강 진출을 이루고 호주 축구대표팀까지 이끄는 등 3개국 월드컵 사령탑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한국'을 꼽은 것.

그는 이어 "선수들의 병역문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께 건의해서 해결된 것이다. 그 당시 감동은 평생 잊지 못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가장 잊고 싶은 순간'에 대해 히딩크 감독은 "1998년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 도요타컵 우승 당시 구단주가 자신의 아들을 팀에 넣어달라는 부탁을 했다"며 "단호히 거절했지만 이후 특별한 이유없이 팀과 재계약에 실패했다. 그 때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히딩크 감독은 또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이라는 질문에는 "장애인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했을 것이다"며 "올해 60세가 됐지만 아직까지 젊은 선수들과 경기장에서 호흡을 함께 하는 데 문제가 없고 정신력은 물론 에너지도 넘친다. 언제까지 축구 감독을 할 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히딩크 감독은 또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감독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여러 채널을 통해 나와 접촉했다"며 "잉글랜드 축구 정서는 감독을 그냥 두지 않는다. 매일 언론 인터뷰에 시달려야 하고 팬들의 극성 등 개인 생활에 많은 침해를 받을 것을 우려해 잠재력이 큰 러시아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국내 지도자들이 외국인 감독에 대해 반감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에 "크게 염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 문호 개방이 늦은 나라들이 초기에 보이는 반응"이라며 "선수들과 훈련을 통해 땀방울을 흘리고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 금방 익숙해 질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축구의 묘미이고 공통언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한편 한국의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설립한 히딩크 재단의 상황에 대해 히딩크 감독은 "많은 단체들의 관심과 모금으로 잘 진행되고 있다"며 "축구장과 건물이 12월에 완공되면 한국의 장애우들에게 희망의 선물이 될 것이다. 앞으로도 히딩크 재단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나라 통신원 (헤이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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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거스 히딩크(76)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옛 제자를 모아 유망주 팀과 대결한다.

대한축구협회(KFA)는 “6월5일 오후 3시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에서 ‘2002 레전드 올스타전’을 연다. 이 경기에서 히딩크 감독이 레전드 팀의 사령탑으로 나서 대한축구협회 14살 이하 선수들과 8대8 경기를 펼친다”고 25일 밝혔다.

히딩크 감독의 레전드 팀에는 박지성 전북 현대 어드바이저, 이영표 강원FC 대표이사,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이천수 등이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정해성 전 호치민시티 감독이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코치로 히딩크 감독을 보좌한다.

레전드 팀의 상대는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인 ‘골든 에이지’ 과정에 있는 14살 이하(U-14) 선수들이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2002 레전드 팀이 체력이 안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한축구협회는 2002 월드컵 20주년을 맞아 6월1~6일을 ‘2022 KFA 페스티벌’ 주간으로 정했고, 이 기간 다채로운 행사를 연다.

히딩크 감독은 28일 입국한 뒤 내달 7일까지 열흘간 머물며 여러 행사에 참가한다. 6월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한·일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선수들, 대회 조직위 관계자 등과 오찬 모임을 하고, 3일에는 대한축구협회 콘퍼런스에 참가해 한국 지도자들에게 선수 지도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네덜란드 국가대표 골키퍼 출신으로 아약스 사장을 맡은 에드빈 판 데르사르도 연사로 나선다.

김창금 선임기자

홈 > 월드컵 개최 > 한국 대표팀 > 히딩크 감독의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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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회를 향한 한국 축구의 출발은 밝지 못했다. 한국은 앞서 참가한 네 차례의 본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1승도 올리지 못한 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어 시드니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하고 아시안컵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면서 아시아 축구의 맹주를 자처하던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에 반해 공동 개최국 일본은 프로 축구 J리그 활성화를 바탕으로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일본 언론이 “한국 축구는 고양이로 전락했다.” 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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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홍보처, 김대중 대통령 2002 월드컵
관계자청와대초청오찬(2001), CET0088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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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에서는 수렁에 빠진 한국 축구를 건져낼 묘안을 찾기 위하여 폭넓게 여론을 수렴한 끝에 외국인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채용하기로 하고 영입에 나섰다. 대한축구협회는 한 달 남짓 걸친 교섭 끝에 2000년 12월 18일, 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와 국가 대표팀 감독 계약을 체결했다. 히딩크는 네덜란드 국가 대표 선수와 명문 프로팀 아인트호벤의 코치를 거쳐 감독으로 승격하자, 그 해부터 3년 연속 네덜란드 프로축구를 제패했다.

3년째 되는 해에는 유럽 챔피언십마저 거머쥐었다. 이어 히딩크는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 감독으로 영입되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조국을 준결승에 올려놓았다. 감독 계약에 앞서 히딩크는 정몽준 축구협회장에게 선수 선발과 훈련 및 작전에 대한 전권을 요구했고 정회장은 이를 수락하여 계약서에 명기했다. 지금까지 어떤 대표팀 감독도 누려본 적이 없는 획기적인 권한이었다.

히딩크는 11월 중순 감독직 제의를 받은 직후부터 한국 대표팀 경기 녹화 테이프 30여개를 입수하여 선수 개개인의 능력과 팀의 작전 변화를 분석해왔으며, 전권 요구 배경에는 이 팀을 이끌고 2002 FIFA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실제 히딩크는 이 전권을 제대로 발휘하여 먼저 역대 대표팀 중 유일하게 학연이나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대표 선수를 선발했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담당 코치 외에 피지컬 트레이너, 체력 담당 트레이너, 재활 트레이너, 물리치료사, 마사지사, 비디오 · 기술 분석관, 언론 담당관 등 보좌진을 구성하여 체계적으로 임무를 분담시켰다. 특히 비디오 분석은 선수 개개인의 기량 향상뿐만 아니라 감독의 전술 변화에도 이용되어 단기간에 경기력을 극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히딩크는 감독직을 맡자 일본으로 날아가 한일 대표팀 경기를 지켜보며 선수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기록했다. 2001년 초 울산에서 첫 전지훈련을 마친 뒤 가진 기자 회견에서는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 다만 체력과 전술이 부족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히딩크는 이후 여론의 온갖 지적에도 흔들리지 않고 선수들의 체력 훈련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진단은 정확했고, 대응은 적절했다. 히딩크가 요구한 ‘절대적인 체력’은 한국이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스페인 같은 세계 정상급 대표팀과 싸우면서 90분 동안 지칠줄 모르고, 이들을 밀어붙여 세기적인 기적을 이룩해내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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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월드컵축구대회조직 위원회,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공식보고서(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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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히딩크가 주력한 부분은 기본기였다. 계속되는 전지훈련에서 그는 기초적인 패스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와 함께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극대화하는 훈련도 차츰 강도를 높여갔다. 불만이 나올 법도 했지만 이미 감독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한 선수들은 충실하게 지시를 이행했다. 히딩크가 요구하는 패스는 공을 정확하게 보내는 기술뿐만 아니라 상황을 판단하는 안목까지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딩크는 항상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했고 선수들도 곧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체력과 기본기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히딩크는 2~3개의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 양성에 나섰다. 왼쪽 공격수가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 센터링을 날리는가 하면, 수비수가 앞으로 치고 나와 중거리 슛을 날릴 때는 어느새 미드필더가 수비에 가담했다. 전술의 폭이 그만큼 넓어지고 있었다.

멀티플레이 훈련은 선수간의 메커니즘에도 영향을 끼쳐 한 포지션을 놓고 다른 포지션의 선수와도 경쟁 관계로 변하면서 팀 안에 한층 치열한 경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월드컵 무대에 최종 선발된 23명의 대표 선수들은 하나같이 멀티포지션을 소화한 결과 실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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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팀 코칭 스태프_1
성명분야
박항서 수석 코치
정해성 수석 코치
김현태 골키퍼 코치
핌 베어벡 피지컬 트레이너
레이몬드 베르하이엔 체력 담당 트레이너
김현철 재활 트레이너
최주영 재활 트레이너
한국대표팀 코칭 스태프_2
성명분야
아노 필립 물리치료사
빌코 물리치료사
강훈 마사지사
차창일 마사지사
아프신 고트비 비디오 분석관
얀 룰프스 기술 분석관
허진 언론 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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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한국 대표팀 선수 명단
등번호성명위치출생년도키(Cm)국제경기 출전(회)월드컵 본선
경기 참가(회)
1 이운재 GK 1973 182 32 1
2 현영민 DF 1979 179 8  
3 최성용 MF 1975 173 61 3
4 최진철 DF 1971 187 18  
5 김남일 MF 1977 180 23  
6 유상철 MF 1971 184 95 3
7 김태영 DF 1970 180 75 3
8 최태욱 FW 1981 173 19  
9 설기현 FW 1979 184 33  
10 이영표 MF 1977 176 51  
11 최용수 FW 1973 184 59 3
12 김병지 GK 1970 184 60 3
13 이을용 MF 1975 176 21  
14 이천수 FW 1981 172 24  
15 이민성 DF 1973 183 55 3
16 차두리 FW 1980 183 15  
17 윤정환 MF 1973 173 38  
18 황선홍 FW 1968 183 97 6
19 안정환 MF 1976 177 21  
20 홍명보 DF 1969 181 127 9
21 박지성 MF 1981 175 33  
22 송종국 MF 1979 175 30  
23 최은성 GK 1971 184 1  

수비 훈련에서는 지금까지 한국 선수들에게 고착되어 있던 맨투맨 시스템이나 스위퍼 시스템을 일축하고, 지역 협력 방어와 일자형 수비 개념을 도입했다. 한 수비수가 상대팀 공격수를 일 대 일로 마크하거나 한 지역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몇 명의 수비수가 힘을 합쳐 적의 공격 루트를 차단하고 공격수를 집중 마크하는 고도의 수비 전략이었다. 여기에는 이미 멀티플레이어로 변화한 미드필더나 때로는 공격수까지 합류했다. 이러한 수비 패턴은 체력 소모를 감소시켜 어떠한 작전이든 즉각 수행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 수 있게 했다. 한국과 가진 1라운드 첫 경기에서 유럽의 강호 폴란드가 이렇다 할 공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은 바로 한국의 변형된 수비 시스템 때문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최종 엔트리가 확정될 때까지, 히딩크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경기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다니며 선수 발굴에 심혈을 기울였다. 명성이나 경력은 참고 사항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추천에도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보여주는 선수 자신의 기량이 유일한 잣대였다. 무려 63명의 선수들을 불러다 테스트하면서 수시로 대표 선수를 바꾸었다. 언론이나 축구인 들로부터 압력과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히딩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 지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목표 지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월드컵 본선 무대였다. 히딩크가 자신의 판단대로 뽑은 선수들에게 바란 것은 오직 한가지, 감독의 전술에 따라 90분 동안 쉬지 않고 경기를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그는 황선홍 · 홍명보 · 유상철 같은 고참 선수뿐만 아니라 송종국 · 김남일 · 이영표 · 박지성 · 차두리 같은, 과거 기준으로 보기에는 아직 어리다 싶은 선수들도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이들은 히딩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실전은 가장 효과적이고 종합적인 훈련이다. 히딩크는 미완의 대표팀을 이끌고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대회를 시작으로 두바이 4개국 대회, 이집트 4개국 대회, 2001컨페더레이션컵 대회, 그리고 체코 · 나이지리아 · 세네갈 · 미국과 벌인 평가전, 200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골드컵 대회, 터키 · 스코틀랜드 · 잉글랜드 · 프랑스와 벌인 평가전을 합쳐 모두 32차례의 경기를 치르면서 선수들의 기량과 팀워크를 향상시키고 나서 비로소 최종 엔트리를 확정했다. 톱니바퀴와 같은 그의 계획표는 선수단 컨디션의 정점을 2002년 6월 4일 대 폴란드 경기에 맞췄고, 그의 계획표는 적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