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개구리 뜻 - ulsan gaeguli tteus

울산의 역사와지명/웅촌 면(熊村面)

면의 위치와 자연
웅촌면은 울산광역시와 울주군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울주군 청량면과 접하고, 서쪽은 울주군 삼동면, 경남 양산시 하북면과 접한다. 남쪽은 경남 양산시 웅상읍, 울주군 온양읍과 접하며, 북쪽은 울주군 삼동면 및 청량면과 접하고 있다.
웅촌면은 남북방향으로 정족산(700m) 운암산(418m) 화장산(361m)의 능선들이 형성되어 곡저지형을 이루며, 양산시 웅상읍에서 발원한 회야강의 상류가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돌아 회야댐을 만들고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면이름의 유래
웅촌(熊村)이라는 이름은 이 면을 지켜주는 진산(鎭山)인 운암산(雲岩山)의 모양이 곰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곰을 신성시하는 원시신앙을 가졌던 예맥족(濊貊族)의 주처에는 ‘ 터‘ 즉 신향(神鄕)이라 하여 ‘웅‘자가 붙은 지명이 많이 분포한다. 따라서 웅촌은 고마족이 세운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왕읍(王邑)으로서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 ‘은 고대어에서 신성한 존재, 신인(神人)을 뜻하고, 한편 크다는 뜻을 나타낸다. 특히 회야강 지류인 곰내가 웅촌면을 흘러 내리므로 곰내와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는데, 곰내라는 이름 역시 같은 ‘ ‘ 계열어의 이름으로 본다.

면의 연혁
울주군 12개 읍·면 중의 하나이다. 웅촌면 일대는 진한의 우시산국(于尸山國)이었다. 우시산국은 ‘울뫼나라‘이며, 그 성도(城都)는 검단(檢丹)과 은현(銀峴)의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탈해왕 때 거도(居道)가 마숙(馬叔)이라는 계략을 써서 쳐들어오니 이기지 못하고 동래(東萊)의 거칠산국(居柒山國)과 함께 멸망하였다.
신라 초에는 이 곳에 우화현(于火縣)을 두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이름을 우풍현(虞風縣)이라 고쳐 동안군(東安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때 하곡(河曲), 동진(東津) 두 현 및 동안군과 함께 흥례부(興禮府)의 땅이 되어 현치(縣治)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선 중엽부터 고을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면이라 하였다가 말엽에 와서 웅촌면이라 개칭하였다.
고종 때는 웅촌면이라 하였고, 1894년(고종 31)에 웅상(熊上)·웅하(熊下)의 두 면으로 갈라 웅하면(熊下面)이라 하였다. 면의 위치가 군치(郡治)와 가깝고 북쪽에 위치하여 웅상이 된 듯하고, 신라에서 소사(小祀)의 한 산으로 받들어 온 우불산(于弗山)의 방위를 고려하여 웅하라 하였을 것이다.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웅상면을 양산군에, 대양(大陽) 일부를 삼남면에, 신리(新里)를 청량면으로 넘겨 주고, 면의 이름을 웅촌면이라 하였다. 현재 9개 법정동리, 26개 행정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검단리(檢丹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 검단리(檢丹里)라 했다가 1894년(고종 31)에는 암곡동(巖谷洞)과 검단동으로 갈라졌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검단리라 하였다. 검단과 암곡(岩谷)의 두 행정마을이 있다. 이 곳에 검단사(檢丹寺)가 있었으므로 검단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궐곡(闕谷)·궐각단·골각단이란 지명이 있어 우시산국(于尸山國), 혹은 우화국(于火國)의 궁궐(宮闕)이 있었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보다는 곰각단(熊角丹) 또는 검각단(檢角丹)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곰(熊)·검(檢)‘은 다 ‘ ‘으로 고마족(濊貊族)의 주처 또는 ‘ 터(神鄕)‘를 뜻하는 것이다. 곧 국읍(國邑)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란 말이 붙은 것이다. 양주동 선생은 ‘ ‘을 김·검·금·곰 등으로 서로 음전(音轉)한다 하여 신(神) 또는 왕(王)의 옛말로 보았다. 또 ‘단(丹)‘은 골(谷)의 고훈(古訓) ‘ ‘이며, 은 ‘실‘ 또는 ‘당(堂)‘으로도 변전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검단(檢丹)은 ‘검골‘로서 터(神鄕) 또는 왕골(王谷)을 뜻하는 말이다.
이 곳은 옛 도읍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신골(神谷)보다는 왕골(王谷)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百濟)의 왕성을 곰재(固麻城)·곰나리(熊津)라 했다가 뒤에 공주(公州)라 한 것도 다 웅(熊)이 왕(王)과 호전(互轉)되기 때문이다.
검단리 산 5번지(임) 및 산 2-1번지 일대는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취락유적으로 보고 있다.
감사골산(監司谷山)
검단리의 새검단 위에 있는 산이다. 옛날 어느 감사(監司)가 우불단(于弗檀)에서 하마(下馬)하지 않으려고 단의 뒷쪽을 돌아 이 곳까지 왔으나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하여 감사골이라 한다. 여기에 있는 산을 감사골산 또는 감사나골산이라 부른다.
검단리 3층석탑
검단 마을 앞 길가에 있는 소형석탑으로 신라시대의 탑이다. 탑을 자세히 보면 기단석(基壇石)도 없이 지상에 서 있다. 즉 옥개석(屋蓋石)이 바로 지면에 얹혀 있고, 이 옥개석 위에 탑신(塔身)이 하나 있고, 이 탑신 위의 옥개석 위에 2개의 옥개석이 중첩되어 설치되어 있다. 상층부는 1991년에 도난되어 새로 만들어 세웠다.
어떻게 보면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이나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같이 보인다. 그러나 옥개석이 지면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탑신 상부의 2개 탑신과 하부의 탑신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남아있는 부분만 조합해서 세워놓았다.
이 탑은 높이가 150cm로 소형이다. {울산읍지}에 이 탑을 범오층(凡五層)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본래는 5층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검단사(檢丹寺)터
검단리 궐각단(闕谷)에 있는 절터이다. 검단사는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큰 절로서 왼쪽에 감산암(紺山庵), 오른쪽에 문수암(文殊庵)을 세우고, 동구(洞口)에 3층석탑을 세웠다. 지금은 3층석탑만 남아있다.
고야산(古也山)
검단리 새검단 서쪽에 있는 산이다. 옛날에 고연리 고야에 사는 사람의 산이었다 한다.
내곡:안골
검단리의 자연마을이다. 당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안골‘이라고도 한다.
경선재(景先齋)
검단리의 운암산 아래 있는 송추홍(宋樞興)의 재실이다. 후손들이 세웠는데, 단산(丹山) 김상우(金相宇)의 기(記)가 있다.
당산(堂山)
검단리 용두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 서낭당이 있으므로 당산이라 한다.
매람:매암:암곡(岩谷):암실, 멸앙사(滅殃寺)터
검단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행정마을이다. 이 곳에 멸앙사터가 있다. ‘매람·매암‘이 멸앙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멸앙은 ‘재앙을 멸한다‘는 뜻이다.
멸앙사터에 태바위(胎岩)가 있다. 옛날 이 마을 동쪽 모퉁이(속칭 바위틈)에 사는 어떤 여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어느날 이 아이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괴이하게 여긴 식구들이 법석을 떨며 이 곳 저곳을 찾아보니 아이는 대들보 위에 천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이의 양쪽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식구들은 놀랍고 두려워 아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였다. 태를 낳은 산모를 돌보니 낳은 태가 박처럼 딱딱하였다.
겁에 질린 식구들이 그 태를 집 북쪽의 쌍바위 틈에 몰래 묻어 버렸다. 그러나 차차 이 소문이 나라 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큰 요물(妖物)이다‘, ‘나라의 재앙이다‘ 하고, 끝내 이 아이마저 불길하다 하여 태바위 틈에 넣어 불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 뒤 나라의 재앙을 없애 버렸다는 뜻으로 그 자리에 멸앙사라는 절을 세워 전화위복(轉禍爲福)을 비는 불공을 드렸다 한다. 오늘날 그 절은 없어지고 새빨간 핏자국만 태바위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이 절터를 멸앙고개·멸앙들·멸암들·멸앙산·멸암못·멸암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맹매깃골
검단리 갓골짝 동쪽 골짜기로 옛날에 명매기집이 있었다 한다.
부채골, 부채방우
검단리 탑골 남쪽 골짜기이다. 부처처럼 생긴 부처바위가 있으므로 부채골이라 한다.
삼거리
검단리의 갈림길이다. 고연리 고야로 가는 길과 검단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다.
새검단(檢丹):사창(社倉)
검단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검단에 딸린 자연마을이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 검단이라 하였다. 이 곳에 사창(社倉)이 있었다. 사창은 곡식 등을 보관하던 구휼기관의 하나인데 1개 면에 하나씩 있었다.
영사재(永思齋)
검단리의 운암산 아래 있는 밀양박씨의 재실이다. 효자 박시만의 묘소 옆에 후손 주홍·태원 등이 추모하여 세웠다. 손묵영의 기(記)가 있다.
옥오정(玉五亭)
검단리에 있는 김양호의 정자이다. 그가 평소에 독서한 곳인데 창강 김택영의 기(記)와 조긍섭의 시가 있다. 김양호는 고종 때 이 마을에서 태어난 유학자로 방대한 문집(文集)을 남겼다. 또 그의 조카 단산 김상우도 당대의 석학으로 칭송받았다.
외말산:운암산(雲岩山)
검단 안골의 뒷편에 있는 산이다. 검단리와 곡천리, 대복리 경계에 있는 높이 418m의 산이다. {울산읍지}에는 운암산의 모양이 곰처럼 생겨서 면 이름을 웅촌(熊村)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운암‘은 ‘운‘이 광명을 뜻하는 ‘ ‘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아 광명한 신산(神山)으로 풀이한다. 옛날 큰 해일이 일어나 물이 밀어닥쳤을 때 말 한 마리가 설 정도의 땅만 남겨두고 다 물바다가 되었으므로 ‘외말산‘이라 부른다는 속전도 있다.
용두(龍頭)
검단초등학교의 뒷편 일대 마을을 용두라 부른다. 운암산(雲岩山)의 작고 낮은 한 지맥이 뻗어 이 마을에서 그쳐 마치 용 머리같이 생긴 곳이라 하여 용두라 한다.
우시산국(于尸山國)
우시산국은 {삼국사기} 권 44, 열전 거도(居道)조에 나타나는 삼한시대의 성읍국가(城邑國家)이다. 탈해왕 때 신라의 변방을 지키던 거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때 신라는 이웃에 있는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의 존재가 몹시 위협이 되므로 이를 멸망시켜 신라에 귀속시키려 하였다. 그는 장토(張吐)의 벌판에 군사들을 내세워 말을 타고 달리며 놀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몇 년을 되풀이하니 우시산국 등은 이러한 신라의 놀이를 해마다 되풀이하는 연례행사로만 생각하여 경계를 하지 않았다. 거도는 이러한 틈을 타서 일시에 군사를 몰아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거도의 이 계략을 ‘마숙(馬叔)‘이라 하였다.
이러한 거도의 정복을 김철준(金哲俊) 교수는 동해지방에 세력을 두었던 석탈해(昔脫解)의 한기부(漢岐部) 세력에 의한 정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시산국이 울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까닭은 시(尸)를 ‘ㄹ‘ 발음으로 보면 우시산(于尸山)은 ‘울뫼‘가 되어 ‘울산‘이 되기 때문이다. 우시산국의 도성을 검단 지방으로 보기도 하나 웅상면의 연혁에서는 은현리(銀峴里)로 보고 있다. 검단과 은현은 접경한 마을이며 다 검단분지(檢丹盆地) 안에 있으므로 우시산국은 검단분지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부 이설을 가진 학자도 없지 않다. 일본인 전간공작(前間恭作)은 울진 방면으로 비정하여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한전(韓傳)에 나오는 우유국(優由國)으로 추정하였고, 또 다른 이도 이 설에 찬동하여 우시산국을 영해(寧海)지방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일인들의 주장은 울진의 고구려 때 이름을 우돌야군(于石也郡)이라 하였다가 울진이라 한 것과 영해 지방을 역시 우시군(于尸郡)이라 하였다가 유린이라 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를 따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거도(居道)가 우시산국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신라의 초기 역사는 사로연맹왕국(斯盧聯盟王國)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이는 우시산국을 사로연맹에 강제적으로 가맹시킨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운강사(雲岡祠)
검단리 암곡에 있는 사당이다. 열헌(悅軒) 이핵(李 )과 동암(東庵) 이진(李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부자를 모셨는데 묘(廟)를 경덕, 당(堂)을 운강(雲岡)이라 하였다. 시랑(侍郞) 이종필(李鍾弼)의 기(記)가 있다.
채운사(彩雲寺)
외말산(운암산)에 있는 절이다. 1955년 창건한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 말사이다.

고연리(古蓮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 와지리(臥旨里)·입동리(笠洞里)·지소리(紙所里)의 새 마을로 갈라져 있었다. 1894년(고종 31) 와지동·연답동(蓮沓洞)·관동(冠洞)·고야동(古也洞)·지소동으로 세분되었다가 1911년 지소동을 반계동(盤溪洞)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들 다섯 마을을 합하여 고연리(古蓮里)라 하였다. 고연은 고야동(古也洞)의 고(古)와 연답동(蓮沓洞)의 연(蓮)을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옛 이름 ‘고야‘는 갑(岬)과 곶(串)을 나타낸 말로서, 산이 겹겹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을 뜻하는 동명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예는 온양읍 고산리의 옛 이름 고사(古沙)에서도 볼 수 있다. 또 ‘곳 마을‘인 이 곳은 ‘곳→곶‘이 되고, ‘곶‘을 한역(漢譯)하여 삽현(揷峴)이 되고, 삽재가 되었다.
고연리에는 반계·괴천(槐川)·관동(冠洞)·와지 네 행정마을이 있다.
가매방우
고연리 향노동 밑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모양이 가마처럼 생겼다.
갓골:관동(冠洞):입동(笠洞)
고연리 연답 동북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정조 때 입동리(笠洞里), 1894년(고종 31)에 관동(冠洞)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모두 ‘갓골‘의 훈차이다. 마을 앞산이 갓(冠)과 같은 모양을 하였다 하여 이렇게 불렀다. 산지(山地) 또는 시지(柴地)를 ‘갓‘이라 하니 이 갓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도 보인다. 울산지방에는 갓(山地·柴地)에 형성된 마을을 갓골이라 부르는 곳이 적지 않다.
관음사(觀音寺)
고연리에 있는 절이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하는데 옛 절은 헐려버렸다. 현재의 관음사는 고연리 산 225번지에 있는데, 1958년 10월 대한불교 태고종 말사(末寺)로 새로 세워졌다.
괴천(槐川):고야
고연리의 행정마을이다. 이 마을에 큰 괴목(槐木:느티나무)이 있었다 하여 괴천이라 한다. 또 마을의 형상이 ‘잇기 야(也)‘자 모양이라 하여 고야라 했다는데, 옛 웅하면 25방(坊) 중의 하나인 고야동이 그것이다. 한문에서 문장의 끝을 흔히 ‘야(也)‘ 또는 ‘호(乎)‘자로 맺으므로, 풍수설에 야자형국(也字形局)은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선비를 낳을 땅이라고 한다. 그러나 ‘괴‘는 ‘고야‘에 처소격 ‘에‘가 붙어서 합성된 ‘괴‘로 볼 수 있다. 이 곳 북쪽 능선 부근에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남불암(南佛庵)터
고연리 운흥사 터 남쪽 골짜기로 이 곳에 운흥사의 말사인 남불암이 있었다.
남악재
고연리 보유암 남쪽 골짜기이다. 옛날에 남악암(南岳庵)이 있었다 한다.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안적암으로 넘어간다.
돌깃재
고연리 운흥사 터 서쪽에서 솔밭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여러 굽이가 있으므로 돌깃재라 한다.
동불암(東佛庵)
고연리 운흥사터 동쪽 골짜기이다. 운흥사에 딸린 동불암이 있었다.
갈참나무
고연리 반계에 있는 보호수이다. 둘레 3.7m, 높이 19m로서 수령을 2천년으로 잡고 있는 귀한 나무이다. 해마다 이 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맹주암
고연리 남불암 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맹주암이 있었다.
반계(盤溪):지소(紙所)
고연리 괴천 서남쪽 행정마을이다. 1894년(고종 31) 지소동(紙所洞)이라 하다가 1911년 반계(盤溪)로 고쳤다. 90세 이상의 노인이 많이 살고있는 장수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학 창시자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이 처가 마을인 이 곳에서 행상인으로 10여 년간 살았다 한다.
운흥사가 있었던 운흥동천(雲興洞天)에서 흐르는 시내가 이 마을로 흘러내리며, 이 시내에 큰 반석이 많아 마을 이름을 반계(盤溪)라 하였다. 시내를 사이에 두고 원계(原溪)와 월계(越溪)가 있다. 조선시대에 제지소(製紙所)가 있었다. 지소(紙所)는 종이를 제작하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울산도호부에는 도호부가 관리한 웅하면 지소와 좌병영이 관리한 강동면 대안(大安) 지소가 있었다. 여기의 웅하면 지소가 바로 반계의 지소이다. 대대리(大垈里)와 저리(楮里)의 닥나무를 여기에 가져와 종이를 제작했다 한다.
밭마당
고연리 연답(蓮沓)과 갓골(冠谷)로 가는 갈림길에 있는 마을이다. 울산에서 동래로 가는 옛길은 지금처럼 대대리(大垈里) 앞을 지난 것이 아니라 새검단 앞에서 갓골을 거쳐 웅상(熊上)으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 길을 오가던 길손들이 쉬던 주막이 있었다.
보유암
고연리 맹주암 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보유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부두암
고연리 사저암 서쪽에 있는 점(店)이다. 옛날에 부도가 있었던 곳이다.
북암(北庵), 북암재
고연리 불맷골 북쪽 골짜기에 있는 고개를 북암재라 한다. 운흥사에 딸린 북암이 있었다.
사저암
고연리 청주암 서쪽 골짜기로 사저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사태골(沙汰谷)
반계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어느 해에 큰 비가 와서 운흥골에서 산사태가 나서 이 골짜기로 내려왔으므로 사태골이라 한다.
삽재(揷峴)
고연리 괴천에 딸린 자연마을이다. 삽재는 ‘곶재(古尸峴)‘를 뜻하는 말이다. ‘곶‘은 내륙지방에서는 산허리 또는 산과 산 사이를 말하는데, 岬·串·花로도 한역(漢譯)한다. 삽(揷)의 훈(訓)이 ‘곶‘이므로 곶(古尸)과 호전(互轉)하여 곶재(揷峴)라 하던 것이 음독(音讀)하여 삽재(揷峴)가 된 것이다.
선자방우:선자암(扇子岩)
고연리 원적산(圓寂山) 동쪽 기슭 운흥사 터 어귀의 길 가에 있는 바위로 형상이 부채처럼 생겼다. 선자(扇子)는 부채를 말한다.
이 바위를 돌아가면 울산부사 홍상빈(洪常賓)이 ‘운흥동천(雲興洞天)‘이라고 크게 새긴 바위가 있다.
소대가리 방우
고연리 남악재 밑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소대가리처럼 생겼다.
연답(蓮畓)
고연리 반계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1894년(고종 31)과 1911년 기록에는 연답(連畓)이라 했다가 1914년 연답(蓮畓)으로 바꾸었다. 마을의 생김새가 연잎같이 생겼다 하여 연답이라 한다고 전해오나 석연치 않다. 그 소상한 유래를 알 수 없다. 갓골에 딸린 마을이다.
와지(臥旨)
고연리 갓골 서남쪽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정조 때와 1894년(고종 31) 와지(臥旨)라 하였다가 1911년 와지(臥地) 되고, 1914년 다시 와지(臥旨)로 서사(書寫)하였다. 마을이 소가 누워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와지라 부른다고 전해온다.
지명상 ‘산(山)‘을 지(支)·자(者)·자(自)·지(只)로도 썼다. 와지의 ‘지‘는 고원(高原)의 뜻을 가진 ‘티‘를 뜻하거나 산(山)의 뜻을 가진 ‘지‘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므로 와지(臥旨)는 누운 고원(高原) 또는 누운 산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운흥동천(雲興洞天)
고연리 운흥골 어귀에 있는 바위이다. 신라의 옛 절 운흥사(雲興寺)가 있었던 곳을 운흥곡이라 하며, 운흥골을 운흥동천(雲興洞天)이라 한다. 동천(洞天)은 산천이 둘러있고 경치가 뛰어난 곳을 이르는 말이다. 운흥골에는 운흥폭포 등이 있으며 계곡이 수려하다. 운흥골 어귀의 오른쪽 암벽에 울산도호부사 홍상빈(洪常賓)이 쓴 ‘운흥동천(雲興洞天)‘이라는 마애석각(磨崖石刻)이 있다.
운흥사지(雲興寺址) 부도(浮屠)
운흥사지의 부도는 모두 7기(基)이다. 1기는 반계 마을 입구에 있고, 다른 1기는 절터로 올라가는 중턱에 반몰(半沒)되어 있다. 이 부도는 현 관음사에 있는 것으로 모두 운흥사의 것이다. 본래 다른 곳에 허물어져 있던 것을 옮겨왔다 한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운흥사지 서부도(西浮屠)
위의 부도 2기는 금당(金堂) 자리가 있었던 절의 중심부(中心部)에서 가장 가까이 있다. 지대석 위에 넓은 기대석을 얹었는데, 이 기대석은 중앙부분은 한 돌로 된 석면(石面)에 2구(區)의 안상(眼像) 같은 것을 두르고, 그 가운데에 화문(花紋)을 양각(陽刻)하였다. 4면 모두 꼭 같은 양식이다.
이 기대석 위에는 방형(方形)의 석면 위에 복연화(伏蓮花)를 조각한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다시 앙연화좌대(仰蓮華座臺)를 받쳤다. 이 좌대 위에 얹은 탑신(塔身)은 일반 석종형(石鐘型)이다. 이 부도는 지금 허물어지고 있어 복원을 요한다. 이 옆에 있는 또 한 기의 부도는 지대석 위에 방형(方型)의 기대석을 얹고, 그 위에 앙연화대좌(仰蓮華臺座)를 받쳐 탑신을 얹은 간략한 석종형부도이다. 연화대(蓮華臺)를 제외한 다른 곳에는 아무런 무늬 조각도 없다.
운흥사(雲興寺)터
고연리 반계부락에서 천성산(千聖山) 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광활한 신라 고찰터가 나타난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13개 암자와 승려 1천명을 수용하는 큰 절을 지었던 자리다.
원효대사는 당시 기장의 장안사 척판암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하늘에 뜬 별을 보고 점을 치니 지금 멀리 중국 오대산 밑에 있는 큰 법당 안에 승려 천명이 모여 법회를 열고 있는데, 뒷산이 곧 무너져서 승려 천명이 몰살당하게 되어 있었다. 사정은 매우 다급하였다. 원효대사는 급히 부엌문 판자를 떼다가 ‘해동사미원효(海東沙彌元曉)‘라고 써서 오대산 아래의 법당 상공을 향해 날렸다. 판자는 순식간에 날아가 법당 상공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맴돌았다. 이 때 한 승려가 밖으로 나와 공중을 쳐다보았더니 판자가 맴돌고 있기에 모든 승려를 향해 %dq판자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맴돌고 있다%dq고 외쳤다. 승려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공중의 판자를 쳐다보는 순간 뒷산이 무너져 법당이 매몰되고 말았다. 동시에 판자도 땅에 떨어졌다. 승려들은 원효대사의 도술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을 알게 되자 모두 신라로 건너와 원효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효대사가 이 곳에 큰 가람을 창건하고 천명의 승려를 수용하여 화엄경(華嚴經)으로 교화시키니 모두가 성인(聖人)이 되었다 한다. 그 후부터 이 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불렀다. 운흥사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지만, 이 곳에는 토기편 기와조각 주초석을 비롯하여 축대 딱바위 석수조 부도 호박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 절은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득도를 위해 기도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 고려의 팔만대장경에 버금가는 대장경을 이 곳에서 만들어 우리 나라 판각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친 절이기도 하다. 그 장경은 대부분 통도사로 옮겨졌다 한다.
절터와 그 인근에는 학이 손님을 반긴다는 환학교(喚鶴橋), 이 세상의 번거로움을 씻어 낸다는 세진교(洗塵橋), 신선이 젓대를 분다는 취적대(吹笛臺), 한지를 만들기 위해 닥나무로 바위를 치던 닥돌 등의 여러 사연을 지닌 이름들이 있다. 운흥사가 폐사된 원인으로는 동학농민전쟁이 실패한 후 동학교도들이 이 곳에 은거하여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조정에서 방화를 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약 2만평에 달한다.
유봉대(留鳳臺)
원적산(圓寂山)에 있는 대(臺)이다. 옛날에 저녁이면 봉황이 와서 묵었다 한다.
저승재
운흥사지의 서남쪽에서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로 넘어가는 재이다. 험한 벼랑길이 되어있어 떨어지면 저승길로 간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정족산(鼎足山):솥발산
정족산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과 울주군 삼동면, 웅촌면 경계의 영남알프스에 해당하는 높이 700.1m의 산이다. 정족산은 우리 말의 솟발산(솥발산)을 뜻하는데, 산이 솟아오른 모양을 본따서 ‘솟‘이라는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다. 또 ‘솥‘은 산이 솟아오른 상태를 뜻하는 술·수리·소 등으로 부르고, 이것이 솥을 뜻하는 ‘정(鼎)‘으로 차자(借字)되었다. 한편 ‘발(足)‘은 광명을 뜻하는 옛말 ‘ ‘에서 비롯된 말로 보이니 곧 정족산은 ‘수리밝뫼=광명한 산봉우리‘를 뜻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이 산 꼭대기의 용바위는 가뭄이 닥쳤을 때 제단을 마련하고 산신에게 비를 빌었던 곳이므로 용바위라 부른다. 또 인근의 천성산 성불암 계곡에 있는 적멸굴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49일간 기도드렸던 곳이라 한다.
천성산(千聖山):원적산(圓寂山):원효산(元曉山):소금강
고연리와 경남 양산시 웅상읍·하북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922m이다. 천성산 또는 원효산이라고도 하며, 경치가 좋아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운흥사(雲興寺) 터에 부도 석조 마애석각 등이 있고 운흥폭포가 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청도의 운문산(雲門山)과 울산의 원적산은 잇닿은 봉우리와 겹쳐진 뫼뿌리에 골이 깊어 승가(僧家)에서는 천명의 성인이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천성산 십경(十景)이다.
낙암폭포(落岩瀑布)·고봉창송(高峰蒼松)·층만오종(層巒午鍾)·석굴노불(石窟老佛)·장포귀항(長浦歸港)·장등석범(長燈石帆)·덕계유수(德溪流水)·동해홍륜(東海紅輪)·서대망월(西臺望月)·남산낙조(南山落照)
채다리보
고연리 괴천(槐川)에 있는 보이다. 채다리(채를 받치는 Y형의 받침대)에서 물 빠지듯 보의 물이 잘 빠지므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한다.
짱바탱이:큰 법당
고연리 운흥사에 있는 버덩으로 옛날에 장을 치고 놀았던 곳이다. 이 곳에 운흥사의 큰 법당이 있었다 한다.
청주암
고연리 운흥사터 서쪽 골짜기에 청주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통싯골
고연리 운흥사터 부근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운흥사의 통시(변소)가 있었던 곳이다.
할미당(堂)
반계의 운흥골에 있는 적석총(積石塚)이다. 옛날 할미가 돌을 앞치마에 싸서 서리(西里)에 한 치마, 여기에 한 치마, 통도사에 한 치마 부은 것이라 전해 온다.

곡천리(曲泉里)
웅촌면 9개의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는 간곡리(肝谷里)라 하였다가 고종 31년(1894)에 간곡과 곡천(曲泉)으로 갈라졌다. 1911년 곡천(谷川)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곡천리(曲泉里)라 하였다. 웅촌면 소재지이다.
곡천은 ‘곰내‘라고 부르던 굽은 내 곱은 내 곱내 곰내로 변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곡천은 본래 웅천(熊川)이 변한 ‘곰내‘이며, ‘곡(曲)‘은 곰(熊)의 차자(借字)이다. 곰내를 공개(孔界-서창지방의 회야강)라 한 것과 고마나루를 공주(公州-충남)라 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웅촌 지방은 일찍 고마족(濊貊族)이 흘러와서 우시산국(于尸山國)을 건설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곳에는 ‘검·곰‘의 말이 붙게 되는데, 예맥(濊貊)의 고음이 ‘과이모‘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검단(檢丹)의 검, 간곡(肝谷)의 간도 다 ‘ ‘에서 나온 것이다.
또 웅상(熊上)의 우불산(于弗山·于火山)은 신라의 삼사(三祀) 가운데 소사(小祀)로 받들어 온 산이다. 그러므로 조선에 이르러서도 영남 4대 명산의 하나로 견관치제(遣官致祭)해 온 명산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곳은 ‘ 터(神鄕)‘라 하여 ‘곰‘이란 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며, 웅촌(熊村)·웅상(熊上)도 다 이와 관련되어 생겨난 이름이다.
간곡(肝谷):간골:중리:아실
곡천리의 자연마을이다. 간곡은 간골이라 하며 고려 때부터 나타나는 이름이다. 간곡도 역시 ‘ 골‘에서 나온 말이며, 여기의 간(肝)은 의 차자(借字)이다. 그러므로 터, 땅의 뜻을 가진 곡천(曲泉)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 ‘ ‘은 김·검·금·곰 등과 서로 전음(轉音)되는 ‘신(神)‘의 옛말로서 왕(王)과도 통하는 말이다.
속설에는 뒷산인 운암산이 곰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이 마을은 곰의 간에 해당된다 한다.
간곡역터(肝谷驛-)
곡천리 간골에 있었던 조선시대 역터이다. 황산도(黃山道)에 딸린 역으로 대마 1필, 중마 2필, 소마 8필, 역노비 1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곰내:곰내천
곡천리를 흐르는 하천이다. 곰내는 ‘곡천리‘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또 곡천리와 웅촌면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이기도 하다. 곱은 내→곱내→곰내가 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곱내·곱은 내‘로 풀이하여 곡천이 된 것으로 본다(곡천리 해설참조).
대복장(大福場):웅촌장(熊村場)
곡천리 동문 남쪽에 있는 시장이다. 원래 대복리에 있다가 이 곳으로 옮겼다. 1일과 6일에 장이 선다.
동녘골:동곡(東谷)
곡천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동녘골이라 하며 동문(東文)의 주된 마을이다.
동문(東文)
곡천리를 웅촌초등학교의 서편 도로를 분계로 하여 동편을 동문이라 한다. 동녘골(東谷)의 동(東)과 우문정(友文亭)의 문(文)을 따서 합한 것이다. 곡천리 2개 행정마을 중의 하나이다.
박만구샘
곡천리 딧비알 아래 있는 우물이다. 옛날에 박만구라는 사람이 판 샘이라 한다.
서녘골:서곡(西谷):서중(西中):서리(西里)
곡천리 간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서중은 행정마을이다. 곡천리를 웅촌초등학교 서편 도로로써 나누어 서편을 서중이라 한다. 한편으로 서녁골이라고도 한다. 간골도 서중에 속한다.
완보
곡천리 장천들 동남쪽에 있는 논을 완보라 한다. 아홉마지기 되는 논이다. 이 논에 물을 대는 보도 완보라 부른다. 온복(溫卜) 또는 온북(溫北)이란 이름과 관련있을 것으로 보이나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웅촌유적
웅촌초등학교 북쪽 능선과 남쪽 능선 사면부 등지에 삼국시대 고분토기편, 청동기시대 토기편 등이 수습되고 있다.
우문정(友文亭):문정
곡천리 웅촌양조장 근방을 우문정(友文亭)이라 한다. 오래된 팽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문사(文士)들이 벗하며 놀았다 하여 우문정(友文亭)이라 부른다.
장치이들:장천들
곡천의 앞들을 장치이들이라 부른다.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장판등만딩이
곡천리 서중 북쪽 등성이로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채운사(彩雲寺)
곡천리 59번지 외말산 아래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 말사로 1955년에 세웠다.

대대리(大垈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신라시대부터 집터였던 곳이어서 ‘터어·터에‘라 불러왔다. 조선중기 이 후 인가가 불어나자 큰 터라는 뜻으로 대대(大垈)라 하였다. 정조 때는 대여리(垈如里)였고, 1894년(고종 31) 상대(上垈)·중대(中垈)·하대(下垈)·중평(中坪) 네 개 동으로 분립해 있었다. 1911년에는 상대·중대·하대·저리(楮里) 4개 동이 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대대리(大垈里)라 하였다. 상대·중대·하대·저리 네 행정마을이 지금도 그대로 있다.
정조 때의 대여는 ‘터어‘를 쓴 것 같은데, 터어는 바로 ‘터(基)‘이다. 터어의 ‘어‘는 터(基)의 미음(尾音)을 길게 뺀 것이다. ‘여(如)‘는 이두나 차자 용례에 ‘다‘ 또는 ‘디‘에 음차됨을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그 음 ‘여‘에 음차된 것이다. 한편 ‘터에‘라고도 하는데 여기의 ‘에‘는 처소격(處所格) 조사이니 역시 ‘터(基)‘이다.
굿바우
대대리의 중대 뒤 굿바우 만디이에 있는 큰 바위이다. 옛날에 장수가 살구받기를 하다가 엎어둔 바위라 한다. 살구는 공기받기의 울산지방 방언이다. 예로부터 바위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여 소원성취를 빌어온 토속종교가 있으니 이 바위도 그 대상이 되어 굿바위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대대리 고분군(大垈里古墳群)
대대리의 저리에서 하대 중대에 걸쳐 있다. 이 가운데서 저리 뒷산의 고분군에는 토광묘제(土壙墓制) 분묘가 있으니 울산지방의 다른 고분보다는 시기적으로 앞서는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친 초기 철기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다개·이전·삼광·다운·중산의 고분군은 석곽분(石槨墳)으로 여기서 출토되는 토기도 도질(陶質)이 신라토기이다. 그러나 저리에서 출토되는 토기에는 김해토기도 포함돼 있다. 이 대대리 고분군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대·중대의 고분은 석곽묘(石槨墓) 또는 대형 석실분이 주류를 차지한다.
1972년에 발견된 유개고배(有蓋高杯:뚜껑있는 굽 높은 술잔) 1점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대리(大垈里) 요지(窯址):사기장골만딩이
울산∼부산간 국도를 따라 웅촌면사무소를 지나면 대대리(大垈里)로, 그 첫 마을이 저리이다. 마을의 동북쪽 산에 요지가 있다. 인화분청을 굽던 곳이라고 하나 믿기 어렵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분청백자 요지는 3∼4곳 밖에 없으니, 이 곳은 아마도 조선말엽의 일반 사기점이었을 것이다.
동뫼(洞山)
대대리 하대의 국도 남쪽에 접해 있는 작은 산이다. 이 동뫼는 석실고분(石室古墳)이다. 중대에도 고분으로 된 동뫼가 있었으나 대경산업 공장을 세울 때 없어졌다.
말구부리
대대리의 저리 앞에 있었던 못이다. 말이 굴러서 사람이 떨어져 죽은 못이라 한다.
마린마구
대대리 갈밭띠이 동쪽들이다. 수원이 좋지 않아서 건답이 되므로 마린마구라 한다.
물건너·배일봉(排日峰)
대대리의 상대(上垈)에 딸린 마을이다. 회야강(回夜江)을 건너 배읍봉(排揖峰) 아래에 있다. 강을 건너 있으므로 물건너라 한다. 배일봉(排揖峰) 또는 밸봉이라고도 한다. 밸봉은 배일봉의 준말이다.
배일봉의 ‘배‘는 하늘(天)의 원어 ‘한 ‘의 ‘ ‘이 음전하여 된 말이므로 광명을 뜻한다. ‘일(日)‘은 날·나라, 또는 나리(津)의 훈차이다. 일(日)의 새김 ‘날‘의 연장음이 ‘나리‘가 된다. 배일봉의 ‘배‘가 배(舟)의 뜻으로도 사용되어 배 닿은 나리(津)가 백일봉, 배 닿은 섬이 섬들(島野)이라는 설화가 있다. 또 ‘배읍봉‘은 풍수지리설에서 중이 읍(揖)하고 서 있는 모양이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복호산(伏虎山)
대대리의 외양고개 동쪽에 있는 산이다. 글자 그대로 범이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부채골
대대리 통집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한다. ‘부처‘가 ‘부채‘로 변한 것이다.
산박골:산밭골:삼학(三鶴)골:삼바골
대대리 상대 남서쪽 골짜기이다. 옛날에 삼밭(마전)이 있었다고도 하고, 학 세 마리가 날라간 곳이라고도 한다.
상대(上垈)
대대리의 행정마을이다. 대대리의 윗쪽에 있는 터라는 의미에서 상대라 하였다. 그런데 울산도호부에서 가까운 하대를 상대(上垈)라 하지 않은 것은, 웅촌면을 분할하여 도호부에 먼 쪽에 있는 곳을 웅상(熊上)이라 한 것과 같이, 명산 우불산(于弗山)에 가까이 있으므로 상대라 하였을 것이다.
섬들:도야(島野)
대대리의 상대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이 곳에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여러 곳이 못(沼)이 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큰물이 날 때는 하상의 위치가 변경되는 등 섬과 다름없는 들이었다 한다. 이러한 형태는 중대나 하대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앵미들:영미야(鶯尾野):액밑들
중대 앞에 있는 들을 앵미들이라 한다.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잠두(蠶頭)
대대리 상대의 마을 가운데 있는 구릉이다. 누에머리 같이 생겼는데, 잠두(蠶頭)가 밸봉 쪽을 갉아 먹어야 대대(大垈)에 부자가 난다고 했다. 이는 회야강에 제방이 없었을 때 큰물이 한 번씩 지면 하천의 위치가 이리저리 변경되었으므로 밸봉 쪽으로 내의 위치가 바뀌어서 경지가 더 생기기를 바라는데서 나온 말로 보인다.

장태모링이
대대리 갈밭띠이 동쪽에 있는 모롱이로 옛날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한다.
저리(楮里):제리:딱밭굼:딱밭골
대대리의 행정마을이다. 고종 때는 하대(下垈)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1911년 독립마을이 되어 저리라 하였다. 이 곳에 닥나무가 많아 닥밭골이라 부른다. 이 닥을 반계의 지소(紙所)로 가져가 종이를 제작했다 한다.
중대(中垈):천동(泉洞)
대대리의 행정마을이다. 터에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므로 중대(中垈)라 한다. 일명 새미골(泉洞)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맨 북쪽에 있는 우물은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다.
중평(中坪)
대대리 양송이 공장 근처를 말한다. 이 지역을 고종 때 중평(가운댓들)이라 하였으며, 여기에는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쿵킹이, 쿵킹이보
대대리 저리 동쪽에 있는 들을 쿵킹이라 하며, 이 곳에 쿵킹이보가 있다. ‘쿵킹이‘의 내력을 알 수 없다.
하대(下垈)
대대리의 행정마을이다. 터에의 맨 아랫쪽 마을이므로 ‘하대‘라 한다.
허가보:허갯보:허깃보
대대리 쿵킹이 서쪽에 있는 보이다. 옛날에 허씨가 만들었다 한다.

대복리(大福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대복리는 정조 때는 오복(五福)과 대양(大陽), 1894년(고종 31) 오복동(五卜洞)과 대양동으로 갈라져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고 대양동의 대(大)와 오복동(五福洞)의 복(福)을 따서 대복리(大福里)라 하였다. 마을이 ‘오복‘과 ‘대복‘으로 되어 있으니 참으로 복 많은 마을이 되었다.
원래 오복과 대복 두 행정마을로 되어 있었으나, 주변지역 개발로 인하여 마을이 크게 확장되었다. 장백, 한솔 아파트가 들어서서 대복1리에서 대복5리까지 늘어났으며, 모두 6개 행정마을이 되었다.
고자갓비알
대복리 노루목양달 동쪽에 있는 산이다. 고자와 관련된 이름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구리동
대복리 대양에 있는 등성이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이승금(李承金)의 묘가 있다.
깊은다리:산하교(山下橋)
산하교를 깊은 다리라 한다. 오복동재가 산이 깊고, 이 다리도 깊은 곳에 있으므로 깊은 다리라 불러온다.
노루목양달
대복리 큰골 북쪽 양지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노루가 많았던 곳이다.
논들각단
대복리 대양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논이었던 들판에 생긴 마을이다.
당수말
대복리 대양 북쪽에 있는 마을로 당수나무가 있었다 한다.
대복(大福):대양(大陽)
옛 대양동(大陽洞)을 대복(大福)이라 한다. 대양(大陽)과 오복(五福)의 앞 뒤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대복리의 행정마을이다. 장백, 한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대복1리∼대복5리까지 확대되었다.
이 마을은 신라 때 태양사(太陽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대양(大陽)이라 한다고 전해온다. 1914년까지 대양동(大陽洞)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이 곳의 원(院)을 대양원(大洋院)이라 한 사실로 보아 ‘다물‘과 관계된 이름으로 보인다.
‘대(大)‘는 고지명에 地·對 등과 같이 그 음을 ‘다‘라고도 한다. ‘양(洋)‘은 새김이 ‘물(水)‘이다. 양(洋)을 단지 물(水)로만 본다면 이 곳의 지세로 보아 그 이름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대양(大洋)을 다물계(多勿系) 지명이란 측면에서 고찰할 만하다. 대양(大洋)과 다물(多勿)은 그 음과 뜻이 같기 때문이다.
주몽(朱蒙)이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나라를 세우고 먼저 복속시킨 나라가 비류수(沸流水) 상류의 비류국(沸流國)이었다. 이 곳을 다물도(多勿都)라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다물(多勿)을 복구토(復舊土) 즉 ‘구토의 회복‘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한가지 살필 것은 백제계(百濟系)가 남하함에 따라 그들의 주거지에는 다물계(多勿系) 지명이 생겨나고. 이 계통의 지명이 서해안에서 남해를 지나 동부 경상도에까지 분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복구토(復舊土)‘라는 고구려 말은 귀화(歸化) 또는 정복이라는 뜻으로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대양‘은 진한(辰韓) 계통의 정복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웅촌지방은 일찌기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있었던 곳이란 사실을 참조할 일이다. 다물계(多勿系) 지명은 두동면 구미리의 대밀(大密·多密)도 있다.
대복교(大福橋):부채징이공글
대복리 양반쏘 위에 있는 다리로 1964년에 가설하였다.
대양원(大洋院)터:원터
대복리에 있는 조선조 때 원(院) 터이다. 대양리 어귀의 원터 마을에 있다. 대양원이 있었다.
돌미륵
대복리 베락방우 남쪽에 있다. 좌상으로서 높이 8m 쯤 되는데 목이 떨어져 나갔다.
돌터미
대복리의 오복(五福) 어귀에 있는 돌벼랑이며 마을 이름이다. ‘터미‘는 퇴미·트미·치미·더미 등과 같이 지형이 돌출한 곳을 말한다. 웅촌면사무소가 여기에 있었다.
새각단
대복리 오복에 딸린 마을이다. 신진학원 앞에 있는 마을로서 새로 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서리(西里):설리, 동리(東里)
대복리 논들각단 동북쪽 마을로 대양을 중심으로 하여 동리와 서리가 있다.
약천동(藥泉洞)
대복리의 자연마을이다. 마을 앞의 회야강(回夜江)에 초천약수탕이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약천(藥泉)이라 하였다.
안땡이:안태양(太陽):안대양
대복리 대양 북쪽 안에 있는 들이다.
온당골
대복리 돌터미의 서북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옹당골의 변음으로 보인다.
양반쏘:양방쏘
대복리 오복 동쪽에 있는 소이다. 소의 양쪽에 높은 바위가 솟아 있으므로 양방우쏘 양방쏘 양반쏘가 되었다.
오복(五福)
대복리에 있는 행정마을이다. 오복은 고종 31년(1894) 오복(五卜)이라 했다가 1914년 오복(五福)이라 하여 대양(大洋)과 합해서 대복리(大福里)가 되었다. 오복은 이 곳에 묘터 네 개, 집터 한 개가 있는 다섯 개의 명당복지라 하는 풍수지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중엽의 지리학자 이 중환(李重煥)에 따르면 무릇 사람이 살 터는 첫째 지리(地利)가 좋아야 하고, 둘째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고, 셋째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넷째 아름다운 산이 있어야 하고, 다섯째 좋은 물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그는 또 지리에 대해 1. 수구(水口)를 보고, 2. 들(野)의 형세를 보며, 3. 산의 모양을 보고, 4. 흙의 빛깔을 보고, 5.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를 본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오복(五卜)은 위와 같은 조건들을 다 갖춘 복지(卜地)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오복(五福)은 이 오복이 변한 것이다.
이승금묘(李承金墓):공신묘(功臣墓)
대복리 대복동에 있는 이승금의 무덤이다. 이승금은 1556년(명종 11) 현 경주시 외동읍 입실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손가락을 끊어 병세가 위독한 아버지를 구한 효자이다. 선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1592) 때 아버지를 따라 두 숙부와 함께 공암(孔岩) 및 문천(蚊川)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아버지가 전사하니 그는 원수를 갚으려고 명(明)나라 원병이 도산성(島山城:울산왜성)에 이르자 그 길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이 전투에서 패하여 경주로 철수하니 실의에 빠져 벼슬의 뜻을 버리고 선영을 찾아 시묘하면서 자적하였다. 그 뒤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되고 훈련원정을 제수받았으며, 1601년(선조 34)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조 32년(1832)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오복동 갑좌(甲坐) 언덕에 부인 경주안씨와 합장되어 있다. 묘 앞에는 상석(床石)만 남았고 유품으로 교지(敎旨) 4장을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장구딩이
대복리 부근산골 남쪽 등성이로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
장승백들
대복리 새각단 서쪽에 있는 들로 옛날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한다.
재피골
대복리 큰 골 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재피(좀피)나무가 많았다.
찬새미
대복리 운암산골에 있는 샘이다.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데 맛이 좋고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다.

석천리(石川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회야강이 마을을 감돌아 흐르므로 돌내, 또는 회천(回川)이라 부르던 곳이다. 혹은 돌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정조 때 돌내리(乭川里)라 하다가 1894년(고종 31) 석천동(石川洞)과 석계동(石溪洞)으로 갈라져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석천리(石川里)라 하였다.
돌내는 강물의 유로가 돌며 굽이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돌(石)‘은 물길이 돈다는 뜻이다. ‘석(石)‘은 돌의 이두자(吏讀字), ‘내(川)‘는 사람이 사는 터전을 뜻한다. 또 돌내(回川)의 돌(回)도 물의 흐름이 도는 것을 뜻하는 이두자(吏讀字)이다.
인류가 처음 산에서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여오다가 내(川)를 따라 내려와 농경을 시작하였으므로 내는 사람이 사는 터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내(壤)‘의 개념으로 변하였다. 그러므로 돌내의 ‘내‘는 회야강(回夜江)이란 하천(川)의 개념보다도 터전·땅(壤)의 개념으로 파악함이 좋을 듯 하다.
행정마을은 석천 하나로 되어있다.
갈모또가리
석천리 멍에자리 밑에 있는 들이다. 지형이 갈모처럼 생겼다.
계중산
석천리 딧각단 서북쪽 산이다. 마을에서 계를 모아 매입한 산이라 한다.
구이쏘
석천리 탕건방쏘 아랫쪽 소로 모양이 구이(구유)처럼 생겼다.
기차방우
석천리 아릿각단 동쪽 바위로 모양이 기차처럼 생겼다.
개구리산
석천리 샛갓 동북쪽 산으로 모양이 개구리처럼 생겼다.
꽃바띵:꽃밭딩이
석천리에 있는 산등성이다. 옛날에 참꽃(진달래꽃)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돈구디기
석천리 딧비알 북쪽 골짜기로 옛날에 돈치기 놀이를 하던 곳이다.
돌내새미:큰새미
석천리 아릿각단 동쪽에 있는 샘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샘의 물이 줄지 않았다고 한다.
동뫼
석천리 안짝의 남쪽 마을 가운데 있는 작은 산이다. 남쪽에는 작은 동뫼가 있다. 동산(洞山)의 뜻이다. 동산(집이 의지하여 있는 園林)의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뒷들, 봇들, 건치이들
안마을 앞에 있는 들을 뒷들, 아랫마을 쪽에 있는 들은 봇들, 안짝 앞에 있는 들을 건치이들이라 한다.
바랑골
석천리 아랫마을의 회야강 건너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산의 모양이 바랑같이 생겼다. 혹은 이 곳의 바람이 거세어 바람골 바랑골이라 부른다 한다.
불선골:분골
석천리 뒷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임진왜란 때 이 마을에 경주김씨가 피난하여 밤에 불을 켜고 지냈다 한다. 분토가 난다.
석계(石溪)
석천리의 옛 이름이다. 석계도 ‘돌계‘의 이두(吏讀)일 것이다. 돌계는 회야강변에 있는 아랫마을, 돌내는 안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라 짐작된다. 고종 때는 돌내와 돌계로 갈라져 있었다가 1914년에 합쳐져서 석천리가 되었다.
석계서원(石溪書院):용연사
석천리에 있는 서원터이다. 용연사라고도 한다.
아릿각단:아랫마을:안마을:딧각단
석천리 돌내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돌내 아랫쪽에 있으므로 아랫마을이라 한다. 아랫마을의 서쪽을 꽃밭띠이라 하고, 동편을 큰걸, 중간을 안짝이라 부른다. 꽃밭띠이는 진달래꽃이 많아 꽃밭등이라 한 것이 변한 것이다. ‘큰걸‘은 대천(大川)을 의미하는 듯하다(거리의 준말로도 흔히 ‘걸‘이라 한다).
안마을 동쪽능선에 도굴된 고분을 포함하여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연당걸
석천리 아릿각단 남서쪽 마을이다. 옛날에 연꽃못이 있었다.
육석정(六石亭)
석천리에 있는 정자이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우석(又石) 이후락(李厚洛)이 그의 선친 6형제의 우애를 추모하여 세웠다.
재천정(在川亭):재정:석천정
석천리에 있는 정자이다. 정조 때 지평(持平)을 지낸 죽오(竹塢) 이근오(李覲吾)가 세웠다. 이원조(李源祚)의 기(記)가 있다.
절터골
석천리 안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으나 빈대가 들끓어 폐사되었다.
중산골
석천리 바랑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 곳에 절이 있었다.
호박쑤
석천리 아릿각단 남쪽에 있는 소(沼)이다. 모양이 디딜방아의 호박(확)처럼 생겼다 한다.

은현리(銀峴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는 덕현리(德峴里)와 새암리(濊巖里)로 갈라져 있다가 1894년(고종 31) 덕현동·은하동(銀下洞)·덕곡동(德谷洞)·운암동(云巖洞)으로 세분되었다. 1911년에는 덕현·은하(隱下)·덕곡·용산(用山)이라 하였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은현리라 하였다. 은현리는 은하(銀下)의 은(銀)과 덕현의 현(峴)을 따서 합한 이름이다. 신암(新岩)·덕산(德山)·서리(西里)·은하 다섯 행정마을이 있다.
곰내:웅천(熊川)
은현리 북쪽 산티고개 밑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내이다. 여러 골짜기의 물을 합하여 검단리를 지나 남쪽에서 오는 고연리의 물을 아우르고, 동북쪽으로 꺾여 새검단을 거쳐 초천리 앞에서 회야강으로 들어간다.
이 일대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예맥족(濊貊族)이 정착하여 우시산국을 세워 영화를 누리던 곳이다. 고마족은 곰을 신격화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군신화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고마족의 정착지에는 곰을 뜻하는 지명이 등장하게 된다. 웅상읍(熊上面)의 연혁에는 울뫼나라(우시산국)의 성읍(城邑)이 은현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 ‘은 신(神)의 옛말로서 김·검·금·곰과 서로 음전(音轉)한다. 임금의 옛말에도 인용되어 왔으며, 解慕·蓋馬·乾馬·金馬·儉·檢·錦·琴·今·黑·刊·釜·公·孔·熊 등으로 차자(借字)되어 왔다. 그러므로 ‘곰내‘는 내(神川·王川)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운암산(雲岩山)·암실(岩谷)·신암(新岩)·은하(銀下)·간곡(肝谷)·검단(檢丹)은 신(神) 또는 왕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곳이 옛 우시산국의 치소(治所)였다면 ‘곰내‘는 왕읍을 흐르는 내, 즉 왕천(王川)의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논들방우
은현리 덕산 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넓고 편편하여 올라앉아 놀기에 좋은 바위이다.
당뒤못
은하에 있는 못으로 서낭당(城隍堂) 뒤에 못이 있으므로 ‘당뒤못‘이라 부른다.
덕산(德山):사곡(沙谷):사릿골
은현리의 행정마을이다. 1894년(고종 31) 이래 덕곡(德谷)이라 해 온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덕산이라 한다. ‘덕(德)‘은 크다는 뜻이니, 덕곡은 큰골, 덕산은 큰산으로 다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뒷산에서 산사태가 자주나서 이 곳을 사곡·사릿골이라고도 한다. 마을 입구 소로변에 지석묘가 있다.

덕현(德峴):덕티:큰마을
은현리의 행정마을이다. 정조 이래 일관하여 덕현이라 해 온 마을이다. 큰 마을 또는 ‘덕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티‘는 ‘치‘와 같은 말로서 고원(高原)을 듯하는 마을 이름에 붙게 된다. 지(池)·지(遲)·지(知)·지(旨)로 음차(音借)해 왔으며, 울산지방에서는 ‘현(峴)‘으로 훈차(訓借)해 왔다.
도둑골
산티고개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도둑이 많아 도둑골이라 부른다 한다.
돈구디이
은현리 맹밭골(미영밭골) 동쪽 골짜기로 옛날에 아이들이 돈치기를 하며 놀았다 한다.
돌방때 만딩이
은현리 덕현 서쪽에 있는 산으로 지형이 돌방처럼 생겼다.
들거등
은하 마을의 서쪽 산에 있다. 큰 암석이 풍화작용으로 깨어져 작은 골짜기를 덮었다. 이 암석 아래로 물이 흐르는 곳을 들건이라 한다. 여기의 ‘등‘은 등(嶝)을 뜻한다.
마두등(馬頭嶝):말대가리등
은현리 신암 동쪽 등성이로 지형이 말대가리처럼 생겼다 한다.
말당수
덕현 마을 앞에 있는 등성이로 길손들이 말을 매어두고 쉬던 정자이다.
보골(洑谷)
은현리 서리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는 물이 좋고 또 중보(中洑)가 있어 보골이라 부른다 한다. 그러나 이는 보골산(洑谷山)과 함께 ‘ 골‘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광명을 뜻하는 ‘ ‘의 속음(俗音) ‘ ·복·보‘ 등은 ‘伏·福·卜·寶·洑‘ 등으로 차자(借字)되어 도처에 이러한 지명을 남겨놓고 있다. 삼남의 보은, 두서의 복안, 강동의 보골(洑谷)·복산동 등은 다 ‘ ‘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보골산(洑谷山)
은현리 보골(洑谷)의 안쪽에 있는 높은 산이다. 천성산(千聖山)의 한 지맥이며, 검단분지 서쪽을 가리는 병풍같은 산이다.
산티고개
은현리 덕산에서 삼남면 작동으로 넘어가는 산고개이다. ‘티‘는 고원(高原)의 뜻을 가졌으며, 울산지방에서는 고개(峴)로 쓰이는 말이다.
살구정들
은하(銀下)의 앞에 있는 들로 살구나무 정자가 있었다. 살구정은 행정(杏亭)을 뜻한다.
새암(濊岩):신암(新岩):용산(用山)
신암은 덕현리의 행정마을이다. 이 마을은 이름이 빈번히 변화한 마을이다. 정조 때는 새암이라 하였고, 1894년(고종 31) 운암(云巖)이라 하였다가 1911년 다시 용산(用山)으로 고쳐 불렀으나 지금은 신암(新岩)이라 부른다.
이 신암(新岩)의 ‘신(新)‘은 그 훈(訓)이 ‘새‘로서 새(濊)와 같은 뜻을 가졌다. 그런데 운암(雲岩)이나 신암(新岩)의 암(岩)은 다 신(新) 또는 왕(王)의 옛말 ‘ ‘에서 유래된 말이다. 곧 감 암으로 변전된 것이다. 따라서 새암(濊岩)·운암(云岩)·새암(新岩)은 모두 새로이 밝고 신령스러운 마을, 즉 터이다.
서리(西里):서녁에
은현리에 있는 마을이다. 현지에서 ‘서녁에‘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덕현의 서쪽에 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덕현동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자립한 행정마을이다.
소대가리등
은현리 덕산 동북쪽 등성이이다. 지형이 소대가리처럼 생겼다.

신틀방우
은현리 신암 서북쪽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에 이 바위에서 신틀을 놓고 짚신을 삼았다 한다.
오리숲
은현리 덕현 동쪽에 있는 숲으로 옛날에 물오리가 많이 앉았다.
은하(銀下):은알
은하는 은알이라고도 하는 행정마을이다. 1894년(고종 31)에는 은하(銀下), 1911년에 은하(隱下), 1914년에 다시 은하(銀下)라 하였다. ‘은알‘의 본뜻은 그늘진 마을일 것이다. 은하와 같은 지세를 가진 마을 이름에 은(隱)자가 붙은 경우는 두동면 편리가 있는데, 그 옛 이름은 은변(隱邊)이었다.
그런데 검단분지 일대가 옛 우시산국의 고도였다는 사실과, 운암산을 비롯하여 암실·신암·검단·간곡·곰내 등이 다 신(神) 또는 왕(王)의 옛말 ‘ ‘에서 비롯되었음을 본다면 은하(銀下)의 다른 이름이었던 은하(隱下)도 검단분지가 가지고 있는 웅계지명(熊系地名)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신(神)의 고어 ‘ ‘은 ‘김·검·금·곰‘ 등과도 서로 음전(音轉)하여 왕(王)의 옛말에도 그대로 사용되어 왔다. 그 차자(借字)로는 解募·蓋馬·乾馬·錦·琴·今·黑·金·肝·公·孔·熊 등이 사용되어 왔다. 이 ‘ ·검‘은 ‘ㄱ-ㆁ-ㅇ‘형의 음전에 따라 ‘ ·엄‘ 또는 ‘암·엄‘ 등으로도 전음되었다. 옛 지명에 나타나는 엄 (庵利水)·엄 ( 難)·엄 (俺路)·암잣(阿莫城·母城) 등은 모두 이 전음한 ‘암·엄‘ 등이라 한다.
이로 보아 은알(銀下)이나 은알(隱下)의 ‘은‘은 다 신(神) 또는 왕(王)의 옛말 이나 검이 변한 ‘엄‘에서 온 말로 보인다. 그러므로 은알(銀下)은 밝은 신산(神山) 또는 왕산(王山)을 뜻하는 운암산(雲岩山)의 아래 또는 그 앞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주막걸
은현리 신암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주막이 있었다.
한림학사 무덤
은하의 서쪽에 있는 고분이다. 한림학사 무덤 또는 하늘미등이라 부른다. 봉분이 높고 큰 것으로 보아 석실분(石室墳)일 것이다.
행당·해마당:적석총(積石塚):해미담울
은하와 서리의 중간 행당골에 있다. 산허리에 넓은 돌담이나 성채같은 주성(周城)이 있고, 그 가운데 왕릉 같은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 곳에서는 옛날 마고(麻姑) 할미가 쌓았다 하여 ‘해미담울‘ 또는 ‘해당‘이라 한다. 1984년 초여름에 옛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성터를 찾다가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경상남도의 위촉을 받은 동아대학교 박물관팀이 이 해 연말에 현지를 답사하고 적석총(積石塚)으로 추정하였다. 기단부 하변의 둘레가 약 20m인 원형으로 된 3단 정도의 피라밋형 무덤이다. 높이가 약 5m에 달하고 있어 왕릉의 크기이다. 이러한 적석총은 우리 나라에 흔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며, 옛 신라·가야 지역에서도 가장 큰 적석총이라 한다. 장차 정밀한 조사를 거쳐 그 전모를 밝혀야할 것이다.

초천리(椒泉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정조 때는 초정리(椒井里)라 하였다. 1894년(고종 31) 초정동(椒井洞)과 내기동(內基洞)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초천리라 하였다.
초정 또는 초천은 회야강변에 있는 약수천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천연으로 된 석함(石函) 속에서 솟는 거품 섞인 약수는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그 맛은 신산(辛酸)하다. 마시면 체증이 내려가고 목욕하면 풍(風)을 고친다. 또 설탕을 타면 사이다의 맛이나 여름철에는 청량음료가 되었다. 해방 후 한 때 이 약수로 오복사이다를 만들어 시중에 판매한 일이 있다.
초천리 단일 행정마을로 이루어졌다.
내기(內基)
초천리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터·안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
도화사(桃花寺)터
초천리 복숭아나뭇골에 있는 절터이다. 옛날에 도화사가 있었다 한다.
복후 방구
초천리 큰 골짜기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 아래에 복후(폭포)가 있었다.
불맷골
초천리 초정 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무쇠점(풀무간)이 있었다.
쑤시밭골
초천리 복숭아나뭇골 동쪽 골짜기로 옛날에 쑤시(수수)밭이 있었다.
아랫마을
초천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내기에서 보면 아랫쪽이 된다.
약물탕:초정약수:초정(椒亭)
초천리 초정 동북쪽 냇가에 있는 약수터이다. 맛이 매우 시고 매운데, 속병과 피부병에 좋다.
장만딩이
초천리 내기에서 온양읍 내광장으로 가는 고개이다.
주치등
초천리 화딱골 동쪽 등성이로 옛날에 주치가 많았다 한다.
채봉골
초천리 큰 골짝 남쪽 골짜기로 옛날에 채봉(假葬)을 했던 곳이다.
헤어진골
초천리 안경등과 등잔골 사이 골짜기이다. 여러 갈래 길이 나누어져 사람들이 서로 헤어지는 곳이었다.
화딱골
초천리 내기 동쪽 골짜기이다. 옛날에 벼슬한 이가 있어 이 곳에 화짓대를 세웠다 한다.
통천리(通川里)
웅촌면 9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본래 조선조 때 통천리(桶川里)의 한 마을이었다. 1894년(고종 31)에 통천동과 신리동(新里洞)이라 하였다. 1911년에 이르러 통천(通川)·자천(紫川)·신리(新里)·자암(紫岩)의 4개동으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도로 합하여 통천리(通川里)라 하였다. 고종 때는 통새미(桶泉)라 하였는데, 1911년 지금의 통천(通川)으로 고쳤다. 통천은 통새미라 부른 우물에서 유래되었다. ‘새미‘는 우물의 방언이다.
개구리산
통천의 서쪽에 있는 낮은 구릉이다. 옛날에는 돌내의 모막띠이(모막등)와 연결된 산이었다.
어느 해 홍수에 개구리산이 떠내려 가서 지금의 자리에 멈춰 버리고, 모막등과 개구리산 사이로 회야강이 흐르게 되었다 한다.
광터들, 노방들:광기(廣基)
통천의 서쪽에 있는 들을 광터들, 서북에 있는 들을 노방들이라 한다. 노방은 노방산(老房山)에서 온 이름인 듯 하다.
당미기
통천리 장지못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이름의 내력은 확실하지 않다.
모산:지산(池山)
통천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장재못이 있으므로 ‘산(山)‘을 받침으로 하여 못산(池山)이라 하였다. 울산도 산(山)을 받침으로 한 고을 이름이다.
봉우재
통천리 절탯골 북쪽 산이다. 옛날에 봉홧불을 올렸다 한다.
뿔당골
통천리 절탯골 서쪽 골짜기로 옛날에 불당이 있었다.
자암서원(紫岩書院)
자암에 있는 서원이다. 순조 4년(1804)에 세웠다. 고려말의 학자 운암(雲巖) 차원부(車原 )를 모시고, 강렬(剛烈) 차운혁(車云革)을 배향(配享)하였다. 판서 조병덕(趙秉悳)의 기(記)와 지평 이근오(李覲吾)의 상량문이 있다.
자암(紫岩):자천(紫川)
자암은 통천리의 원마을이다. 자천은 통천의 서쪽마을이다. 이름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911년에 통천(桶川)을 세 마을로 갈라서 통천(通川)·자천(紫川)·자암(紫岩)이라 하였다.
장재못
못산에 있는 못을 장제(長堤)라 한다. 1786년(정조 10) {울산부여지도신편읍지}에는 장자제(莊尺堤)라 하고, 길이 690자, 넓이 209자라 하였다. 척(尺)은 ‘자‘의 음차(音借)인데, 장자(長者)는 큰 부자를 높이어 부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장척(莊尺)‘은 장자의 음차(音借)에 불과하다. 본래 큰 부자의 집자리였으나 멸시받은 중이 비를 쏟아지게 하는 조화를 부려 연못으로 변하게 했다 한다. 지금도 못바닥에서는 목재 등이 나온다 한다.
1934년판 {울산읍지}에는 이를 장제(長堤)라 하고, 그 유래도 못이 길게 생긴데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부자를 뜻하는 장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장자를 이 곳에서는 ‘장재‘라 한다.
절탯골
통천리 대밭골 북쪽 골짜기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황하수보(黃河水洑)
통천리 서쪽에 있는 보이다. 보 이름의 내력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