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단편 소설 - cho danpyeon soseol

초 단편 소설 - cho danpyeon soseol

오래도록 부정해왔지만 인정해야겠다. 나는 예전 같은 글의 호흡을 잃어버렸다. 글쓰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행위, 독서 쪽의 이야기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같은 대하소설에도 질리는 기색 없이 도전하던 예전의 기백이 몽땅 사라졌다. 좀 덜 재밌어도 유익한 책을 끝까지 읽어내리던 '인내'라는 장점도 사라졌다.

이런 현상을 겪는 게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더라.

스마트폰은 작은 화면의 테두리만큼으로 우리의 시야를 좁혀버렸고, 쉽게 넘길 수 있는 짤막한 글들에 우리의 호흡을 맞춰버렸다.

이동하면서, 화장실에서, 침대에 누워서까지 눈을 뗄 줄 모르게 만드는 합법적 전자 마약 같은 이 존재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만큼 편하고 손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얻은 즐거움은 유독 금방 사라졌다.

경각심을 가져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스마트폰은 한 대, 두 대, 세 대째를 거쳐 더 발전된 형태로 내 품을 떠날 줄 모르고 있다. 지금 쓰는 이 사과 전화가 고장 나면 다음 사과 전화를 구입하겠지. 툴툴거리면서도 나는 이미 똑똑한 이동전화의 노예 신세와 그로 인한 부작용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있다.

한 달에 몇 권 이상의 독서를 의무화하기와, 집중력이 짧아졌다면 짧은 글이라도 많이 읽기

. 찾아보니 가십거리로 읽고 넘기는 것 말고도 세상엔 짧게 향유하기 좋은 글들이 많았다. 지금 기고하고 있는 '아트인사이트'를 비롯하여 내가 좋아하는 재즈와 요리, 청년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온라인 잡지들, 에세이 연재 사이트... 어차피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어낼 수 없다면 인정하기로 하고, 짧고 좋은 글들을 읽으며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대부분

칼럼이나 에세이에 치중되어 있는 게 못내 아쉬웠다.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웹 소설이라는 분야도 있었지만 로맨스와 판타지, 무협 같은 장르는 영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렇게 순수문학에 목말라 할 때쯤 '초단편 시리즈' 프로젝트를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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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 플립

아직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판다 플립은 소설, 판타지, 스릴러, 시, 에세이, 시나리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볼 수 있는 웹 서비스 공간이다. 작은 스타트업 기업인 이곳은 '초단편 소설'을 최초로 기획하며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초단편 소설'이란 기존 단편 소설의 1/10 수준인 2000자 내외의 소설로, 3분 남짓만에 한 편을 읽을 수 있다. 극단적인 요즘 독자들의 인내심에 '새로운 장르의 개발'이라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사이트에서 유료로 이용하면 더 많은 작품을 열람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네이버 판다 플립 포스트에 꾸준히 업데이트되는 무료 분량으로 만족하고 있다.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가 특히 매력적이다. <고래>와 <고령화 가족>의 천명관 작가, <재와 빨강>의 편혜영 작가, 최근 국내 출판업계에서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올리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 등 굵직한 국내 소설 작가들의 이름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확실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가일수록 조회수가 높은 편인데, 탄탄한 내용으로 그 기대에 부응해서 실망한 적이 없다.

실력파 작가들의 보장된 문장을 초단편으로 읽는 감상은 매우 색다르다. 처음 읽으면 소설이 이렇게 짧다는 게 낯설고 놀라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후 특유의 잔상과 만족감까지 짧지는 않다. 겨우 3분을 투자해서 문학의 감상을 느낄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박수쳐주고 싶은 기획이다. 장편 소설을 읽을 때와 같은 시간적 부담감이 전혀 없어서, 책 한 권 읽기 버거운 사람들도 거뜬하게 읽을 수 있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 몇 개를 추천하며 마무리하겠다. 너무 짧고, 어떤 주제일지 상상하는 것도 이 시리즈의 묘미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은 곁들이지 않지만, 알려주지 않아도 금방 알아낼 수 있다.

↘↘↘

조남주 - 늙은 떡갈나무의 노래

편혜영 - 지폐 

김연수 - 보일러

(이미지 출처: 네이버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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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경기도 성남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바닥 타일 기술을 배우기 위해 대구로 독립해 나왔다. 2006년에 서울로 올라와 성수동의 주물 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2016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공포 게시판에 창작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2017년 12월, 『회색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를 동시 출간하며 데뷔했다. 『양심 고백』,... 1985년 경기도 성남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바닥 타일 기술을 배우기 위해 대구로 독립해 나왔다. 2006년에 서울로 올라와 성수동의 주물 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2016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공포 게시판에 창작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2017년 12월, 『회색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를 동시 출간하며 데뷔했다. 『양심 고백』,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나의 인간, 인류의 하나』, 『살인자의 정석』,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 『문어』, 『밸런스 게임』까지 총 10권의 ‘김동식 소설집’과 『성공한 인생』을 펴냈다. 그 외에도 『텅 빈 거품』, 『모두가 사라질 때』, 『일상 감시 구역』, 『몬스터: 한밤의 목소리』 등 다수의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창작 활동을 하면서 깨달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초단편 소설 출판하기 수업 등 다양한 작법 강연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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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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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코리아

바로가기 :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죄수들의 대화

서계수

두 여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남자, 뭐라고 했게요? 자긴 그냥 법을 지키는 거래요. 신고하는 데엔 사적 감정 따윈 없다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더라고요.”

그 말을 하곤 나디아가 한숨을 쉬었다.

“웃었다니까요.”

전형적인 법 남용이다. 안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다음은요?”

벽 너머의 상대에겐 보이지도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디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갇혔죠.”

나디아는 죄인이었다. 벌로 열 달간 매일 세 번의 식사를 제공받았고, 그릇을 깨끗이 비울 것을 강요당했다. 바깥에서 살 때의 생활에 비교하면 엄청난 호사였고, 이를 증명하듯 배는 나날이 불러갔다.

안나가 물었다.

“바깥에선 어땠어요?”

“배운 게 없어서 돈 벌기 힘들었어요. 남자를 사귀어 요리며 설거지, 빨래와 청소를 해주고 밥과 잠잘 곳을 얻었는데, 마지막으로 사귄 남자가 그 사람이었던 거예요.”

나디아가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안나가 입을 열었다.

“그 남자, 웃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디아가 대답했다.

“‘이 걸레 같은 년. 함부로 몸을 굴리더니 꼴좋다.’”

그리곤 덧붙였다.

“들은 얘기예요, 예전 남자한테.”

이번엔 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 방에 뭔가 있어요? 시간 보낼만한 거요. 책이라든가.”

“책? 책은 많아요.”

나디아가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나디아의 연령대와 맞지 않는, 알록달록하고 글씨 큰 책으로 그득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벽을 타고 물 흐르듯 넘어오고 있었다.

안나가 부탁했다.

“제목 좀 불러봐요. 무슨 책 있어요?”

나디아가 책장에서 두어 권을 꺼냈다.

“‘태어나서 행복해요.’”

“…다른 거 없어요?”

“‘엄마, 나 왜 죽였어?’”

안나는 신경질적으로 웃다 제풀에 입을 다물었다. 나디아는 웃지 않았다. 대신 책 한 권을 쓰다듬었다.

“아픈데요, 이 제목. ‘태어나서 행복해요.’”

“아파요?”

“나는 태어나서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그냥 사는 게 다 이런 거겠지, 하고 살았어요. 자라면서 더 심해졌어요. 한 달에 며칠씩 피를 흘리는 거, 아프잖아요. 근데 피가 안 나오면 엿 된 거니까 불안해했거든요. 그렇게 사는 건 별로 좋진 않잖아요?”

안나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겠죠?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디아가 제 배를 응시했다.

“개자식에게 반드시 갚아주겠다고 맹세했어요.”

“어떻게 갚아줄 거예요?”

“그건 차차 생각해야죠. 쫓아다니면서 죽고 싶을 만큼 괴롭혀줄까, 고민 중이에요.”

이번엔 나디아가 물었다.

“당신은 왜 갇혔어요?”

안나가 대꾸했다.

“수술을 해줬어요.”

“와, 당신 의사였어요? 많이 배웠겠네요.”

“그랬어요. 이젠 쓸 일이 없겠네요. 원래 의사 면허증이 취소되는 일은 참 드문데…밖에 나가면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어요, 이젠.”

“누가 신고했는지 알아요? 당신도 나가서 갚아줘요.”

“어떤 남자가 신고했는데, 난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도 몰라요. 내 환자의 남자였어요.”

“당신 환자도 갇혔겠네요.”

분명 그럴 터였지만 안나는 이제 여유가 없었다. 자기 앞날만 생각하기에도 벅찼다.

나디아가 웃었다.

“옆방에 의사가 있다니, 이건 운이 좋은데요. 밖에서 만날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안나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돼요. 당신은 내 수술이 쓸모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밖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나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밖에 나갈 수 있어요.”

안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요?”

“벽을 통과해서 나가요. 처음 나갈 때만 힘들었어요. 목걸이를 걸고, 허공을 딛었죠. 그다음은 쉽던데요.”

안나가 제 등을 대던 벽을 짚었다.

나디아가 설명했다.

“내가 갇혀 있던 건 다 옛날 일이에요. 바깥 풍경은 보기 싫어서 자꾸 이리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여긴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당신 같은 의사도 있고.”

잠시 후 안나는 할 말을 찾아냈다.

“갚아줄 수 있겠네요?”

나디아가 몸을 일으켰다. 다시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사실, 벌써 한 번 갚아줬죠.”

그리곤 닫힌 문을 지나 사라졌다.

클래식 음악이 그치고, 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못 배웠다고 했지. 그렇지만 1 더하기 1이 0이라는 것을 증명해냈어.

당신은 몸뚱이 외엔 마땅한 판돈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를 얻으려던 이들이 둘을 잃게 만들었지.

당신은 난제를 해결했고, 불리한 도박에서 이겼다.

안나는 두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나디아와 달리 안나는 수년을 더 갇혀 있어야 했다. 나디아는 틀리지 않았지만…같은 방식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챙길 생각이었다.

당신이 그렇듯 나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서계수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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