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1 6절 - yohanbog-eum 14jang 1 6jeol

설교 본문 : 요 14:1-14

본문 내용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제1장 창조적 묵상

  ​1절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 예수님의 부재로 근심에 빠진 제자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제자들의 불안이 전제되어 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불안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계셨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해야 할 저녁 식사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리 상당히 무거웠다. 비록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면서 섬김의 제자도의 본을 보여 주시고 새계명을 주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러 나갔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알 수 없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극도의 불안 속에 빠지게 하였다. 자신들이 따르고 섬기던 분이 어딘가로 가시는데 그들이 그 길을 따라올 수 없다고 하니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 전에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고, 동거동락하면서 삶의 모든 것을 나누었는데 이제는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온 백성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조만간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것이라 예상했던 제자들로서는 배신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주어질 '자리'도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허망함도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제자들의 심경을 예수님은 한 마디로 '근심'이라고 표현하셨다. 

  한편, 제자들의 근심의 근원은 예수님의 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재는 그들이 의지할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따라가야 할, 즉 추구할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의 근심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근심이고, 세상 사람들의 근심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ㅇ니 존재하지 않는다면 근심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왜 근심 속에 빠지는가? 예수님을 바라보거나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눈만 뜨면 하루 종일 세상 사람들은 근심 속에 묻혀서 살아간다. 근심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 속에 빠져 마른 인생을 살아가는 대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근심 없이 풍성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 염려를 맡기라고 권고하고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또한 바울도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근심 대신 기도와 간구를 권면하면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믿음의 기도와 간구는 우리의 근심을 평강으로 인도하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쉬지 말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살전 5:17).

  ​2. 근심을 낳는 설익은 인식과 믿음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간파한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다독이셨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 앞에 '하나님을 믿으니 또'라는 첨언을 달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에는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제자들이 인식하고 있던 예수님은 주님,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최상의 개념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총 여덟 번 나온다(모바일 앱 'Trinity 성경' 검색 결과 반영). 세 번은 예수님께서 직접 증언하신 것이고, 나머지 다섯 번은 사람들이 증언한 것이다. 후자 가운데 세 번은 침례 요한, 나다나엘, 마르다를 통해, 한 번은 빌라도 법정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한 죄목으로 말하는 가운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 요한이 요한복음의 집필 목적을 밝히는 과정에서 사용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던 제자들 가운데 나다나엘 한 사람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뿐 이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이해를 소개하고 있지 않다. 마태복음에서 소개되고 있는 베드로의 고백(16:16)까지 포함하면 이러한 인식은 두 명으로 늘어난다. 재미있는 것은 사복음서에서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거나 그것을 고백한 사람이 나다나엘과 베드로 외에는 소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제자인 요한도 포함시킬 수 있지만, 이 사건 뒤의 부활과 또 한참 지난 시점인 저작 과정에서 이것을 언급한 것을 통해 볼 때 요한도 이러한 인식이 희박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을 고백했던 나다나엘과 베드로의 인식은 온전하고 확고한 것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에 도망갔던 제자들 가운데 이들이 제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인식은 오히여 반대편에 심화되어 서 있었던 것 같다. 만약 그것이 온전하고 확고했다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당시 '도망'이라는 오점 대신 그들의 다른 모습이 사복음서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정점은 저자 요한이 저작 목적을 밝힌 구절의 바로 앞에 소개된 도마의 고백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공관복음서에는 볼 수 없는, 요한복음서에서만 볼 수 있는 도마의 고백에는 요한만의 독특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요한이 도마의 고백 속에서 자신의 저작 의도를 최종적으로 집약해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도마의 고백을 상기하면서 다시 앞선 장면인 최후의 만찬장으로 들어가 보면, 제자들이 왜 근심에 빠졌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인식이 들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도도 매우 낮은 상태였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자리를 놓고 다투던 제자들의 모습을 고려해 볼 때 이 땅에서 세워질 정치적 이스라엘 왕국에 머무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대신 부분적인 믿음을 낳게 되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넘게 함께하면서 그분이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교훈과 이적을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매하고 믿음 없는 모습을 숱하게 보여 주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이러한 행태를 보면서 '믿음 없는 자들아'라고 여러 번 책망하기까지 하셨다. 이와 반대의 현상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나타난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견고한 믿음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 14:12)라는 말씀처럼, 하루에 오천 명, 삼천 명씩 회심시키는 등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감옥이나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고 당당하였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도망가던 그들이 아니었다.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 속에는 최후의 만찬장에서 보였던 '근심'을 찾아볼 수 없다. 부분적인 믿음은 그 반대편에 있는, 더 큰 영역인 불신과 그로 인한 근심을 낳게 한다. 그들이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지하고 믿었다면 그들의 불안도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자신에 대한 인식도를 고려하면서 '나를 믿으라'는 말씀 앞에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담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라는 정보를 던져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단어가 '또'라는 말인데, 이것은 수학에서 전항과 후항이 같음을 나타내는 '등호(=)'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는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2-3절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 근심 대신 약속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근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이 함께하시면 시편 23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 대신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속에서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과 함께 여러 가지 약속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제자들이 삶 가운데 간직해야 할 믿음의 영역이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 거처를 예비하러 가실 뿐만 아니라 거처가 예비되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이 있는 곳에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신다고 약속하고 있다(2-3절). 둘째,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12절). 셋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예수님께서 실행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13-14절). 마지막 약속은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1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2. 약속이 주는 유익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약속은 근심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근심할 이유가 없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제자들의 근심의 가장 큰 원인이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부재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떠나는 이유도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제자들의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약속은 그들을 다시 데리러 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하신다는 측면에서 제자들의 유익의 정점에 서 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이유는 아버지 집에 제자들의 거처를 예비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내용의 기저에는 멀리 내다보시는 예수님의 시각이 들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관심은 현재 일에만 국한 되지 않고 먼 미래까지 들어 있다.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길을 예수님께 맡길 수 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두 번째 약속은 절대 능력자이신 예수님의 부재로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제자들의 무능력을 무한대로 충족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 밑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무능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약속은 그들의 무능을 능력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자신의 무능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온다는 고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세 번째 약속은 두 번째 약속의 근거가 된다. 제자들의 능력은 어떻게 오는가? 믿음을 통해서 온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두 번째로 주어진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마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들 앞에 웅성거리는 장면이 펼쳐졌다.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왔을 때 제자들이 치유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변론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자신들은 왜 이런 일을 할 수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은 것을 그 원인으로 들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절). 기도하지 않을 때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기도하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도 기도를 통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빌 4:13).

  예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한대로 'Yes'가 된다. 더 나아가 약속을 지키시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이러한 약속은 우리들에게 기도를 위한 커다란 동기를 제공해 준다. 

  ​3.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

  예수님의 네 번째 약속은 본문에 들어 있지 않고 곧 바로 이어지는 16-17절 말씀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6-17절).

  보혜사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은 어디론가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근심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인 약속이다. 당시 제자들이 이것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십자가의 죽음 이후를 내다보셨던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약속이었다. 오합지졸이나 진배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 성령에 대한 약속은 예수님의 부재를 대체하고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동일하게 함께하신다는 측면에서, 제자들의 약함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 성령님께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경험은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사건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지금 당장은 제자들의 근심을 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항해 열려 있는 현재적 약속은 '함께하신다'는 약속 속에, 제자들의 근심이 머지 않아 온전하게 해소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임하셨던 보혜사 성령님을 동시대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분에 대한 경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근심을 말끔히 말려버리는 삶 가운데 느끼는 경험이다. 이러한 선 경험은 여전히 현재 속에서 우리의 삶을 그분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험하도록 만드는 동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동인을 따라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4-7절 :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1. '길'에 대한 오해

  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안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정작 본문 속에 나오는 제자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다음 구절인 5절에 나오는 도마의 대답과 질문 속에 그것이 잘 드러나 있다. 심지어 도마의 말 속에는 예수님을 항해 서운하거나 성이 나서 퉁명스럽게 하는 말투인 볼멘소리까지 느껴진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말한 '길'과 도마가 이해한 '길'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생겨났다. 도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문자적, 물리적인 길로 이해한 데 반해, 예수님은 비유적, 추상적인 의미의 길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길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길로서의 자신을 제자들이 알았고 보았다고 완료형으로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왜 생기는 것일까? 오해는 국어사전에서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라고 정의하고 있다. '행복 소통의 원리'라는 책에서는 오해가 쉽게 일어나는 이유로, '수신자의 머리와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선입견이 새로 들어오는 정보의 순수한 입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그릇된 해석이나 이해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선입견이 타자의 정보에 대해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오해는 그들의 선입견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런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데에는 그분의 위와 같은 성육신의 목적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죄로부터의 구원보다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실 분으로,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들에게 한 자리를 만들어 주실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님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이기적인 목적의 연장선에서 바라본 결과 생긴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오해는 제자들의 인간적인 우둔함에서 기인한 것도 없지는 않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뜻과 평행선을 긋고 있는 제자들의 이해로 인해 생긴 오해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왜냐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 제자들과 같은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지적은 이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이 말씀 속에는 심지어 우리의 기도 속에도 정욕으로 구하는 것들이 있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바로보고 접근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살피고 그분의 뜻대로 구해야 한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2. 내가 곧 길이요

  6절에서 예수님은 길, 진리, 생명 앞에 각각 정관사를 덧붙여 자신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길을 놓아주는 어떤 실체나, 가르침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나, 생명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본인 자신이 바로 길, 진리, 생명 자체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그것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예수님 안에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각각 추구하여 다다르게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만을 취할 때 이 세 가지 모두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것들을 자신의 본질과 동일시하면서 그것들의 본질이신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의 공유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에토스(Etos)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의뢰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와 세상 사람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고 또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노력들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향하고 있다. 책과 강연, 그리고 어떤 체험들을 통해서 접하는 것들은 그 본질이 아닌 곁가지들만 흔든 채 얄팍한 자위 가운데 머문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코 그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6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다음 장인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믿음과 의뢰의 에토스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렇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 믿음과 의뢰의 에토스라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은 그것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임을 보여준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서로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 기웃거리며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분만을 우리 자신으로, 또 우리의 전부로 소유해야 한다.

  ​8-11절 :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 여전한 오해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지만,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제자리에 맴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마에 이어 빌립이 던진 질문은 제자들의 이해가 예수님의 설명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하나님)를 보았고 또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조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을 꾸짖듯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 답답함을 토로하셨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거늘, 어찌하여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 이렇게 예수님은 그 답답함을 한 구절 안에서 세 번에 걸쳐서 토로하셨다. 최후의 만찬 후에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는데, 제자들의 답답한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애가 타셨을까. 

  이런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본문에서 본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떼를 쓴다. 제자들과 우리들 모두 이렇게 공통적으로 우매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을 주의해서 보지 않는 데 있다. 자신들의 선이해가 기반이 된 관점을 떠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분의 사역 형태, 그리고 그분의 본질에 주의해서 관계를 가졌다면 본문 속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지금도 자기 계시를 하고 계신다. 우리와 실제적으로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그분에 대해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도구(혹은 수단)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주의하지 않는다. 아니 이것을 경히 여기고 이것의 실천도 경히 여긴다. 그 결과 얻는 것은 무엇인가?  제자들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엉뚱하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떼를 쓴다.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답답해 하셨을 예수님께서는, 지금의 우리를 보면서 동일한 마음을 갖고 계시지는 않을까...

  ​2. 믿음의 근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라는 근거로, 자신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자신 안에 거한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하는 말씀이 자신 안에 계서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란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 속에 권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권세는 바로 하나님의 권세였다. 그럼에도 그것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믿음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제시하신 것이 다른 근거, 즉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다. 그분은 무슨 일들을 행하셨는가? 불치병을 치유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가 하면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다.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믿으라고 하셨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근거의 결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No'이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에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도망'이라는 사건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과 몇 시간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제자들의 이해가 섞이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3.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 되다

  한편,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분을 직접 목격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먹고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하고 믿지 못했던 제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믿음의 실체가 보고 만지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도마를 향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 되다는 것을 우리의 인식에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사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목소리와 하신 일들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목격'이 믿음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커다른 축복을 안겨다 준다. 그 목격 없이 더욱 복 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12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약속이다. 이 약속은 믿음이 가져다 주는 파괴력에 대한 것이다. 그 파괴력은 예수님과 동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넘어서기도 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이 약속을 실제 경험하였다. 우리는 이 파괴력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가? 이것을 주장하고 있는가? 만약 이러한 경험 대신 근심과 무기력이 삶을 지배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그것을 주장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13-14절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것은 예수님의 세 번째 약속이다. 이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으로, 예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행동으로 나타나 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지키시고 행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부재에 따른 제자들의 근심을 해소하고, 승천하시면서 맡기신 지상사명을 이루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항하고 있다. 예수님의 행하심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 이유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실체 안에 얽혀 있다. 

  ​제2장 헬라어 문법 연구

  1절

  1. me tarassesdo : '요동치다', '뒤흔들다', '불안하게 하다'를 뜻하는 tarasso의 3인칭 단수 현재 수동태 명령형으로 부정어 me와 더불어 '그것(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 '그것이 근심되지 않게 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수동태로 사용되어 외부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 곧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더욱이 현재 수동태 명령법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과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 대한 예언 등과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불안함과 좌절감 등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시사한다.

  ​3절

  1. hetoimaso : '준비하다', '준비를 갖추다'를 뜻하는 hetoimazo의 1인칭 단수 제1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이다. 여기에서 가정법은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내는 조건으로서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서 믿을 이들과 함께 있을 처소(topon), 즉 장소를 확실히 준비할 것임을 시사한다. 준비함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다.

  2. palin erkomai kai paralempspmai : '데리고 오다', '받아들이다'를 뜻하는 paralambano의 1인칭 단수 미래 중간태 디포넌트 직설법이다. 그러므로 미래 시제로 해석해야 하지만 앞의 erkomai가 1인칭 단수 현재 중간태나 수동태 디포넌트 직설법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의 처소를 예비하고 나면 분명히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 

  ​4절

  1. hopon (ego) hyupago : hyupago는 '떠나가다'는 의미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의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한글 개혁 성경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라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 뜻이 보다 분명해진다.

  2. oidate : '알다'를 뜻하는 eido의 2인칭 복수 제1완료 능동태 직설법이다. 이 시제는 제1완료형이지만 현재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알고 있다'로 번역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아버지께로 다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나오는 도마와 빌립의 질문을 통해서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6절

  1. ego eimi he hodos kai he aledeia kai he zoe :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 중 하나이다. 도마가 예수님이 가시는 곳도 길도 모른다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 길'에 대해서 위대한 자기 선언을 통해 설명하신다. 이 선언 속에 1인칭 주격 대명사인 ego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또한 '길', '진리', '생명'이라는 단어 앞에 모두 각각 정관사(he)를 붙여 사용함으로써 1인칭 대명사인 ego와 그 세 가지가 모두 같으며,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상황임을 나타내고 있다. 

  ​8절

  1. deikson : '보여주다', '설명하다', '증명하다'를 뜻하는 deiknuma의 2인칭 단수 부정과거 능동태 병령법으로 '당신이 보여주소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부정과거 명령법은 긴급성을 동반한 특별한 요청으로서 빌립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현현을 목도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2. kai arkei hemin :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는 뜻이다. arkei는 '충분하다', '만족하다'는 뜻으로,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것이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빌립은 자기 요청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만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떠난다고 할지라도 '근심하지 말라'는 것처럼 두려움과 근심 없이 모든 걱정을 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9절

  1. tosuto krono : 문자적으로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빌립, 즉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지상 사역 기간 전체를 가리킨다. 

  2. ho herakos eme : '나를 본 자'라는 뜻이다. heorakos는 '보다'를 뜻하는 horao의 제1완료 능동태 분사 주격 남성 단수이다. 여기에서 분사는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강조하며, 제1완료는 그 행위의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보아 왔던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 12절

  1. ho pistuon eis eme : '나를 믿는 자'를 뜻한다. 이것은 앞절에서 나온 '나를 믿으라(pistuete moi)'와 완전히 다른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나를 믿으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언, 즉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을 믿으라는 것인데 반해, '나를 믿는 자'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성도를 가르키는 표현이다.

  2. hoti ego pros ton patera poryuomai :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 13절

  1. hina doxaste ho pater en to hyuo : '이는 아버지로...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의 뜻이다. hina(...하기 위하여)로 시작하여 제자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할 때 예수님께서 실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근거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할 때 들어주시고 실행하는 것은 바로 이 hina 이후의 약속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바로 아들, 즉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3장 설교문 개요

  A. 제목 : 근심 대신 평안을

  B. 명제 : 근심은 자기 이해와 믿음에서, 평안은 예수님 이해와 믿음에서 생긴다

  C. 주제 : 근심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자

  D. 개요 : 우리의 근심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불완전한 이해와 믿음)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여 그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고해야 한다.

             또한 그분의 성품과 약속을 믿고 쉬지 말고 기도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받아 누려야 한다.

  E. 문단 : 

  ​1. 서론

      -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2. 본론

    1)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

      - 예수님의 부재가 근심을 부른다

      - 예수님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와 믿음이 근심을 부른다

    2) 근심 대신 평안을 누리는 방법

      -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고 믿어야 한다

      - 그분의 약속을 믿고 주장하며 살아야 한다

    3. 결론

      -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받아 누리자

제4장 설교문 작성

  1. 서론 :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1) 근심, 걱정, 염려가 지배하는 사회

  우리나라 속담에 '자도 걱정 먹어도 걱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근심이 너무 커서 늘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또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파총 벼슬에 감투 걱정한다. 이 말은 하찮은 파총 주제에 감투 걱정을 한다는 뜻으로, 별로 대단치 아니한 일을 맡고도 시끄럽게 자랑하고 다니며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걱정이 많아 걱정이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의 삶 속에 걱정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깊게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염려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근심과 걱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 '근심'이라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걱정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걱정이라는 것이 오히려 하면 할수록 더 쌓여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들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3~34). 또한 염려하지 말고 도리어 담대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성경 속에는 무려 55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2) 근심이 주는 폐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전사자는 삼십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쟁 중에 여러 가지 염려로 인하여 죽은 사망자의 수가 백만 명이 훨씬 넘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보다 그것을 걱정하다가 죽은 사람이 세 배 이상 많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근심, 걱정, 염려가 전쟁보다 더 무서운 생명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3) 여전히 걱정하며 살아가는 이유

  우리는 걱정과 근심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단절되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일까요?

  2. 본론(1) :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

  1) 예수님의 부재가 근심을 부른다

  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모습은 근심 속에 싸여 있습니다. 제자들은 왜 근심 가운데 빠져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씀 속에서 불안한 단어들이 평상시와 다르게 툭툭 튀어나왔기 때문에 제자들은 직감적으로 근심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 단어란 바로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가는 길을 제자들이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앞선 13장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가족 친지와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삼 년 넘게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가시고 그 길을 그들이 따를 수 없다고 하시니까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실존적으로 '그러면 우리는 뭐야?' 하는 질문이 제자들의 머릿속에 떠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닭 쫓던 개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도마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데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마의 말투 속에는 자신들을 버리고 어딘가로 가버리신다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섞인 볼멘소리가 가득 느껴집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여전히 제자들의 의문점을 해소시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여전히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빌립의 질문이 이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8절에서 빌립은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인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빌립은 그것을 보여주면 족하겠다는 말을 통해 자신들의 의구심과 그로 인한 근심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속에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평행선이 좁혀지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의 근심은 예수님의 떠나감과 그로 인한 임마누엘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생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고 따랐던 대상의 부재는 홀로 남겨진 실존에게는 '근심'을 낳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경험합니다. 아이들의 불안과 근심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그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느낄 때입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립니다. 결혼한 사람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배우자의 죽음입니다. 배우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반대편 배우자는 온 세상을 잃은 것과 같은 상실감에 빠집니다. 왜냐 하면 서로 사랑하고 믿고 의지했던 대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모든 일 가운데 근심을 안고 살아갈까요? 그들에게 온전히 믿고 의지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심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에게는 온전히 믿고 의지할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생활을 할 때 근심 대신 평안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의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상이 주어진다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우리를 근심의 자리에서 옮겨 평안하고 풍성한 삶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실존과 그분을 향한 믿음을 삶 가운데서 실천해야 합니다.

  2) 예수님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와 믿음이 근심을 부른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근심 걱정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온전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이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의구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의구심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어디론가 떠나가는 부재의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면 제자들의 예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불완전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가버린다면 그들 앞에 펼쳐질 '방치의 상태'가 머리 속에 그려졌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부재하시더라도 방치가 아닌 다른 보완, 즉 예수님이 계실 때와 동일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불안에 빠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대책 없이 훌쩍 떠나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간 서운하게 비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이렇게 대책 없이 떠나가실 분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던 것은 '세상에 있는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이것에 대한 표현이 부족해서 그들의 이해와 믿음이 불완전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근심 가운데 빠졌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랬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기대에 맞춰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보다는 정치적인 목적과 이기심이 그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 즉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완전하게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경험하기 전에는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들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 속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요한이 제시한 예수님의 진심에 대해 정확한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한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적어도 제자들이 소유했던 근심의 조건에서 자유로운 환경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근심하면서 살아갑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최적의 조건을 버리고 제자들의 태도로 회귀하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경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근심으로 몰아가고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본론(2) : 근심 대신 평안을 누리는 방법

  1)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고 믿어야 한다

  제자들의 근심의 출발점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했던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 속에 내재된 사욕으로 바라보았던 데 있습니다. 그들의 사욕이란, 자신들을 예수님께 맞추기보다 예수님을 자신들에게 맞추려 했던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우고 나아가 자신을 파멸의 길로 빠뜨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욕이 가득찬 우리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대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준 사건이 이삭을 바치러 간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는 이삭을 데리고 남부 브엘세바를 떠나 삼 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까지 갔습니다. 모리아 산은 어디에 있는 산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성전산이 바로 모리아 산입니다. 이삭을 데리고 가는 백 킬로미터가 넘는 여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참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나이 백 세가 되던 때에 얻은 단 하나밖에 없는 약속의 자손을 바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더구나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한다니 이 얼마나 기가막힌 일입니까. 유사 이래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천인공로할 반윤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결코 이해되지 않는 일이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이 미치지 않고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의 판단과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 다만 순종하기만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윤리적 판단 대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아브라함은 그의 처지에 하나님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맞추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정력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신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경 속에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유두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행 20:7-9). 드로아에 머물던 바울은 무교절 주간 첫날에 밤중까지 계속해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바울의 강론이 더 오래 지속되자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삼층에서 그것을 듣다가 그만 졸음 때문에 떨어져 죽어 버렸습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이 말씀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상고하되 이들와 같은 태도로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제자들이 처해 있던 시간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시간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 도달해야만 온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반응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믿음은 결코 시작되지도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근심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의 시작점인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반드시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약속된 평안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분의 약속을 믿고 주장하며 살아야 한다

  근심 대신 평안한 삶을 사는 두 번째 방법은, 약속을 믿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근심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들은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낮은 이해도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관심을 많이 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라지는 마당에 그것이 그들의 귀에 얼마나 주의 깊게 들렸을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의 약속은 제자들의 염려의 근거인 주님의 부재와 그에 따른 결핍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들의 거처를 예비한다는 것과 다시 오심에 대한 것입니다. 특별히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가는 데 다시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버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사생아'로서의 그들의 실존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환란 속에 있었습니다. 핍박과 환란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괴로움과 근심이 핍박과 환란이라는 상황을 지배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에게는 재림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재림에 대란 소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상황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고 권면하였습니다.

  두 번째 약속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2-1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구할 때 주어지는 약속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루심의 범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것들보다 큽니다. 더 나아가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살전 5:17). 우리가 기도하기를 쉴 때 무엇이 들어옵니까? 곧바로 죄가 들어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죄의 결과는 근심을 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도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행위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우리의 근심을 평안으로 돌리는 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기도의 결과를 간과하지 않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을 행하신다고 한 데 반해, 바울은 그것의 결과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의 구하는 것을 이루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근심을 평강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에 전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4. 결론 :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받아 누리자

  근심이 없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래서 근심 대신 평안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근심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분을 믿고 또 그 약속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6:27). 평안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 평안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에만 얻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평안을 지금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마음을 열고 지금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평안을 누리는 지금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평안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평안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평안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셔서 그것을 누리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의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의지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과 근심 대신에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초대교회 성도들의 핍박과 환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서도 그들은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랑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그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품은 산성과 같이 견고하고 엄마의 품과 같이 안락하고 따뜻합니다. 그분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