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행 구 - yeon haeng gu

14. 시의 구조와 행ㆍ연 만들기

1. 시의 구조와 행ㆍ연

시는 어떤 시든 간에 구조(형태)를 가진다. 그렇다고 구조가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조는 예외지만 형태에만 너무 의존하면 시가 되는 다른 조건들이 죽는다. 즉 구조가 먼저 있어서 시가 되는 경우란 정형시인 시조 외엔 없다. 시가 되는 여러 가지 조건이 모여서 마지막에 구조가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언어, 소재, 주제 등이 먼저 있은 후에 서서히 형태가 이루어져 가면서 한 편의 시작품이 탄생한다. 소월은 시의 주제와 관련하여 리듬을 중시한 시인이며, 따라서 리듬에 근거하여 시의 행과 연을 구분하고 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가늘 길」 전문

75조의 음수율인데, 1연에서는 3453행으로 구분하고 제 2연에서는 4353행으로 구분하고 제 3연에서는 제 1행이 435이고, 다음은 445로 제 2행과 제 3행을 구분하고 있다. 일종의 정형시이긴 한데, 75조의 음수를 적절히 행 구분해서 미묘한 분위기를 빚고 자유시의 호흡을 잘 소화하고 있다. 소월이 자기대로의 형태를 주제에 알맞게 만들어간 것이지 형태(구조)가 먼저 있어 거기에 맞춰서 된 시가 아니다.

캄캄한공기를마시면폐에해롭다. 폐벽에그을음이앉는다. 밤새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 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고실어들어오기도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폐에도아침이 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습관이도로와았다. 다만내치사한책이여러장찢겼 다. 초췌한결론위에아침햇살이자세히적힌다. 영원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이상, 「아침」 전문

이상의 시를 어렵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리듬을 의식적으로 죽이고 대신에 언어의 새로운 의미전환이나 이미지의 당돌한 연결에 중점을 두고 시를 쓰고 있기 때문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상은 리듬을 죽임으로써 언어의 다른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오히려 그러한 곳에서 더 시를 느꼈기 때문에 소위 줄글로 된 행 구분 없는 산문시를 쓰게 되었다. 산문시라는 형태는 그에게 있어 불가피의 것이었다고 해야 한다.

미국발 세계 경제 불황으로 한국 경제도 본격 침체기로 접어든 가운데 실질 가장이…

세계 경제 위기 전부터 일찌감치 실직한 나는 계속 방콕으로 TV만 보다가 그것도 지겨워 참으로 오랜 만에 아침 일찍 공원으로 운동하러 나갔다. 새벽 공기가 몸에 좋지 않다는 터무니없는 의학지식을 비웃으며 새벽공기를 폐 속 깊이까지 들여 마시고는 운동을 시작했 다. 그런데 으악, 저 멀리서 웬 일군의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줌마 괴 물들이었다. 큰 선캡을 얼굴 깊숙이 눌러 쓰고 이상한 마스크에 복면까지 착용하며 운동하 는 아줌마 괴물들.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안쓰럽기까지 한 가면놀이.

어릴 적 가면놀이를 한 적이 있다.

가면을 쓰고 남의 집 창문 깨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남의 집 빨래 더럽히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여학생 치마 들추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약한 아이 때리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 놀래키고 도망가기.

가면놀이가 너무 재밌어 저녁까지 가면을 쓰고 있다가 퇴근하시며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를 놀래키려 하다가 되려 죽도록 맞았다.

그때는 몰랐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나를 때리셨는지. 가면은 쓰기 위해 있기도 하지만 벗기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면은 써야하는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쓰지 말아야 하 는, 즉 벗는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아줌마들은 어떤 가면놀이를 하고 있는 걸까. 누구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른 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놀이인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가면을 벗어야 하는 놀이 이거늘. 언제쯤 이 가면을 벗을 수 있을까. 세상의 빛이 두려워 쓰고 있는 저 아줌마들의 가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 있 는 걸까.

언제쯤 이 가면을 벗을 수 있을지 그 옛날 아버지의 야단과 회초리가 그립다. 날이 완전 밝았는데도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오염된 공기가 이제야 복통으로 나에게 신호를 보 낸다. 그런데 훌쩍 커버린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 방정민, 「가면놀이」 전문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의미)에 따라 시의 구조가 달라진다. 소월시이나 목월시 같은 서정성의 내용이라면 산문시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다분히 현실비판ㆍ자아성찰적, 또는 정체성과 관련된 자의식의 문제를 다루고 싶을 땐 산문시가 적당하다. 시 안에서도 과거는 행을 구분하였고, 현재는 행의 구분을 없앴다. 이렇게 하여 좀 더 그 의미(시의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장미가 곱다고

꺾어 보니까

꽃포기마다

가시입 되다.

사랑이 좋다고

따라가 보니까

그 사랑 속엔ㄴ

눈물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은

모든 사람은

가시의 장미를 꺾지 못해서

그 눈물 사랑을 얻지 못해서

설다고 설다고 부르는구려.

-노자영, 「장미」 전문

자유시에 있어서의 행은 정형시에서의 리듬과 함께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유시에서는 이미지의 전환과도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위 시 제 1장미가 곱다고에서 끊고 꺾어보니까로 행을 따로 내고 있다. 호흡(일종의 리듬)의 속도가 급해지고 의미가 부러져 의미의 구분을 세밀하게 보이고 싶은 심정이 짐작된다. 다음 꽃포기마다에서 끊고 가시입 되다로 행을 따로 내고 있다. 이쯤에서 앞의 두 행에서와 같은 것들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까지 리듬과 의미를 기계적으로 세밀히 쪼개어 놓으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기교가 너무 기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의미의 음영과 함축이 전연 보이지 않는 언어들이 동원돼 있고, 문장도 형식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행 구분의 기계적인 부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시 전체를 어색하게 하고 있다. 자유시는 언어의 저항(자유에는 저항이 있기 마련인데, 시에서는 언어가 그 저항물이다)을 시인이 어떤 개성으로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의 저항을 통해서 시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형태는 또한 그(시인)가 언어의 저항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기교와 방법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이루어진다.

2. 시의 행과 연

형태상으로 보자면 시의 구조는 행(line)과 연(stanza)으로 되어 있다. 행은 단어ㆍ구ㆍ절 또는 그것들의 연합으로 구성되고, 연은 하나의 행 또는 행의 연합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는 한 편의 시는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한 연은 한 행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한 행은 한 단어로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A) 능금이

떨어지는

당신의

지평

아리는

기류

타고

수수 이랑

까마귀떼

날며

울어라

물매미

돌 듯

두 개의

태양

-박용래, 「액자 없는 그림」 전문

B) 그 길에 아지랑이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 「울타리 밖」 전문

위 두 편은 한 사람의 작품이다. A)는 각각의 행이 한 단어로 구성된 보기이며 B)는 한 단어(천연히)가 한 행인 동시에 한 연을 이루고 있는 보기이다. 이와 같이 시의 행과 연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김춘수는 리듬의 단락, 의미의 단락, 이미지의 단락으로 나눈다. 즉 리듬을 중시할 경우와 의미를 중시할 겨우, 그리고 이미지를 중시할 경우에 따라 행과 연의 구분이 달라지는 것이다. 앞의 A)는 리듬을 중시한 경우다. 만약 의미를 중시했다면 의미를 단락대로 행을 구분하여,

능금이 떨어지는 당신의 지평

아리는 기류 타고

수수 이랑 까마귀떼 날며

울어라

물매미 울 듯 두 개의 태양

과 유사한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되었을 때는, 작가가 원래 선택하고 강조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단어와 그 이미지, 그리고 시 전편에 걸친 경쾌한 리듬이 죽게 된다. 그러니까 작가가 처음부터 의미의 단락을 중시했다면 문체나 어휘 선택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B)천연히가 한 연으로 되어 있다. 그만큼 이 말 하나로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 속의 천연히는 앞과 뒤에 있는 각 연과 맞먹는 이미지의 중량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의 마을은 결국 천연히라는 한 마디 말의 이미지(이 이미지를 구체화해주는 것이 앞뒤의 연이다)로 부각되어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이미지는 한 행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을 만큼 효과적이다.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로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다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가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없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전문

위의 시처럼 의미의 단락에 의해 행을 구분했을 때는 운율감이 다소 떨어지는 수밖에 없지만 하나의 행마다 의미들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어 어느 한 구석 거북하거나 거슬리지 않는다. 이렇게 의미의 단락을 하나의 행으로 놓는 경우 시적 의미들이 쉽고 자연스럽게 살아날 수 있지만, 리듬감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시의 ()행 만들기

시의 행은 의미와 리듬, 이미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했는데, 첫 행은 독자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유도하는 길인 동시에 다음에 이어지는 행들과 연들을 끌어올리며 시 전체의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도록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특정한 시간이나 계절로서 첫 행을 시작할 수 있다.

늦은 밤

별밭을 찾아간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밤을

남몰래 울어 본다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것이

더욱 무의미로울 때

나의 고독은 더 한층 심연이다

별들만이 아는 비밀

세상에 태어나 서 있을 때처럼

무의미로운 것은 더욱 없다

오늘도

별밭을 찾아

고독을 피흘리는

고독을 나누어본다

-박봉우, 「별밭을 찾아」 전문

시간으로 시작되는 위 시의 첫 행은 새벽에서 아침, 오후, 저녁, , 또는 구체적인 몇 시, 혹은 몇 분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시간성들은 그때만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지만, 이것들이 우리에게 낯익고 익숙한 것이기에 별다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성을 첫 행으로 삼는 경우에는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고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는

봄나무의 잎처럼

내 마음도 돋아날 수 있다면…

저 나무의 잎들은

무슨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까,

한 세상 살아가는데

마음이 굳이 무어 필요하냐고

푸른 미소 웃어보인다.

푸른 생명 화사한 삶, 그러나

춥고 외로운 긴 겨울을 버티느라

안이 텅 비어진 나무는

그 속을 결여로 채웠다,

결여를 품고 있다.

사람이 제일 귀하다지만

사람도 짊이다

사람이 아픔이다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이 결핍의 관계들

너와 나

마음 속으로

결여 하나씩 안고

우리의 관계 느슨해지자

저 푸른 나무처럼

- 방정민, 「봄나무의 잎처럼 내 마음도 돋아날 수 있다면」 전문

하루의 특정한 때도 좋고, 아니면 계절을 이용해 첫 행을 만들면 무난하다. 시를 쓸 당시의 계절이나 그날의 때를 언급하며 운을 땐 다음 그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인생의 의미를 밝혀나가면 대체로 큰 무리 없다. 고요한 어느 이른 봄날 창밖의 나무를 보면서 쓴 시인데, 대부분의 나무가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듣고 인간관계에 대해 성찰하며 쓴 시다.

둘째, 특정한 공간을 시의 첫 행으로 놓는다. 계절 못지않게 공간 제시는 시의 첫 행을 이루는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정 공간이 제대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다음 행들이 그것을 구체적 의미로 형상화할 수 있도록 떠받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똑같은 공간을 한 시인이 너무 빈번하게 사용하면 상투적이기 쉽다.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아직도 파김치 올라온다

비닐봉지에 산 파김치 냄새

텃밭에서 자라 우북하였지만

소금 몇 줌에 기죽은 파들이

고춧가루를 벌겋게 뒤집어쓰고

가끔 국물을 흘린다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대처에 사는 자식들을 못 잊어

젖국에 절여진 뻣뻣한 파들이

파김치 되어 오늘도 올라온다

우리들 어머니 함께,

-강형철, 「사랑을 위한 각서 8」 전문

호남선 터미널은 만인이 이용하는 대중공간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이면서도 일반적인 성격이 짙다. 따라서 장소에 대한 체험을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공유할 수 있기에 친숙하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오래전 무심코 지나쳐버렸을 기억에 없는 곳,

그 막막한 곳에 나는 지금 서 있다

개찰구도 없고 승무원도 없는

그러나 언제나 오늘 떠나야 할 사람이

멀어진 마음으로 언제나 내일을 기다리는 간이역

이 간이역에서는 흐르는 것이 없다

은하를 가슴에 품고 완행기차에 오르면

기억을 쫒는 기차는 잔잔히 내 가슴 속에서 울고

돌이켜보니 얼마나 많은 별들 사이를 방황했던가!

어둠과 공간 사이에서 시간과 존재 사이에서.

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밖으로 흐르는 것이 없거늘

무슨 욕심으로 오늘을 떠나고 내일을 기다릴 것이며

어떤 슬픈 상징으로 생과 생을 연결하겠는가

안으로 흐르는 간이역에서 잠시 마음을 떠나보낸다

-방정민, 「간이역」 전문

간이역이라는 공간에서 삶과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본 시다. 시간이 멈춘 듯하고 공간이 변하지 않는 듯한 곳, 간이역에서 나는 어디로 가려고 이 간이역에 있는가하는 생각을 하며 인생의 의미와 내(시인) 삶을 되돌아 본 시다. 공간은 시의 이미지나 주제를 형성하는데 적절한 도구라 할 수 있다.

셋째, 시간과 공간, 또는 계절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서 시의 첫 행을 만들 수도 있다.시간과 공간, 그리고 계절과 공간이 어울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쉽게 흡수된다.

새벽 노을 속

까마귀떼 잠 깨어 날아오른다

깃들인 자리 대숲

댓잎에 내린 된서리에

부리를 닦고

사나운 꿈자리

날갯짓으로 훨훨

털어내며 날아오른다

눈녹이물 다시 논밭에서

서릿발로 일어선

텅 빈 들판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칼날 바람 타고 잇따라

솟구쳐오른다

어느새 수백 수천의 까마귀

결빙의 하늘에서 만나

원무를 춘다

거친 숨결 하늘 뿜어

드디어 능선 위로 불끈

해가 솟는다.

-최두석, 「샘터에서」 전문

첫 행이 된 새벽 노을 속새벽이라는 시간과 노을 속이라는 공간이 어울려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왜냐하면 노을이라는 대상은 대부분 저녁의 모습과 어울리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새벽이라는 시간과 서로 맞닿아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자연물인 대상이나 기후현상 등이 시의 첫 행으로 오는 경우도 흔하다.자연대상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중심 소재이며, 이 중심소재가 시의 첫 행에도 자주 나타난다. 기후현상 역시 거기에 따른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힘이 있으므로 시의 첫 행에 자주 제시된다.

봄 풀 꽃, 저 햇빛의 작은 지문들

5월 늦은 오후, 깨끗하게 늙어가는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민들레들 길섶에서

달구어져 있다, 햇살이 지그시

민들레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노오란 이 빛의 방울들

작은 소리를 터뜨리며 번져나간다

세상에 같은 지문은 없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직도 문 밖에 계시다

언덕길 오르다 돌아다보니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눈길로 나를

떠밀고 계셨다

내 몸에 몇 개의 지문이 찍힌다

-이문재, 「지문」 전문

위의 시는 첫 행으로 등장한 풀, , 햇빛을 비롯하며 나무, , 하늘, , , , , 바위, 바람, 동물 등은 단골손님처럼 다른 여러 시들 속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이러한 소재들을 시의 첫 행으로 삼는 것은 독자들 역시 이 자연대상물에 친밀감이 강하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정서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조로움이나 상투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위의 시처럼 신선하고 참신한 모습으로 이 자연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덧든 봄날 아침 새 한 마리 지저귄다

창 밖에서 언제나 지저겼던 새

나는 이제야 새 소리를 듣는다

새가 지저귀는 동안

아버지는 시간의 윤회 속으로 떠났고

어머니는 시간과 공간의 주술적 경계에서 서성이고

그녀는 흐르는 노을만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만날 수 없는 공간을 형성하고

아쉬움과 그리움만을 그 속에 켜켜이 쌓는다

왜 하지 못했던가, 그때

왜 듣지 못하는가, 지금

온전히 만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알면서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한 채

언제나 떠나보내야만 하는 잔인한 삶

새 한 마리 지저귄다

그 새소리가 들리는 지금

나는 변화하는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모두를 떠나보내고

나마저 떠날 준비하며

지는 노을을 한없이 바라본다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간직해야 하는가

지저귀던 새 한 마리

날갯짓하며 훨훨 날아간다

- 방정민, 「새 한 마리 지저귄다」 전문

자연물인 와 계절적 배경인 과 시간적 배경인 아침’, ‘저녁놀이 어우러져 한 편의 시가 탄생한 경우다. 추운 겨울에는 창문을 닫고 사느라 잘 들리지 않았던 새소리가 봄에 들렸다.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보면서 지나온 생을 되돌아보았다. 주위에 있는 새소리지만 듣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의 소리도 듣지는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 삶을 후회하는건 아닌지 반성하며 쓴 시다. 이렇듯 대자연이 주는 멜로디를 감상하면, 자연대상은 그냥 스쳐지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과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스승이다. 시는 그 가운데 나오는 법이다.

다섯째, 참신한 이미지 제시로도 첫 행을 만들 수가 있다.이러한 경우는 단연 시인의 개성적인 시각이 돋보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하면서 시선을 집중시키게 만든다. 일종의 충격효과가 시의 첫 행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철둑 가장길 끌고 오는 여우비,

저물 무렵

잠깐 놀러 나온 구름이 길을 묶는다

만곡 끝 닿는 곳가지 갖은 파랑 펼쳐놓고

바다 한쪽을 후둘겨 소낙빌 털어내는

여우비, 한 풍경에도 이렇게 확실한

두 세계의 경계가 있다

, 지금 물든 풍경의 틈새에 끼어

한켠으론 젖고, 한켠으론 메마르고

땅거미 속 아득하게 지워져가는

저 철길 보고 있다

길 사라져 헤맬 일로 고단해지면

우는 화상아, 그대나 나난 둑 아래 감탕밭

스쳐간 비 자리 엎어진

물 웅덩이로 주저앉아

갈 곳 없는 노을 텅 비게 담아내며

명지 바람에도 주름 접힐 파문으로 남았다

바다 건널 일도 힘에 부쳐

겨우겨우 모래펄을 쓸고 있는 여우비,

어느새 몸 무거워진 가을머리 저 여우비

-김명인, 「여우비」 전문

위의 시는 첫 행에서 비가 오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사실적인 진술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이미지는 시인의 주관적인 상상력에 의해 형상화된 것이기 때문에 첫 행이 주는 신선함과 새로움들이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충전시켜준다. 이외에도 비유로 첫 행을 시작하거나, 시의 가장 핵심적 내용으로 시작하거나, 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제시를 통해 시의 첫 행을 시작할 수도 있다.

4. 시의 연 만들기

연은 이탈리아어로 원래 방을 의미한다. 방이란 제각기 독립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면서 서로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고 한 채의 집을 이룬다. 시에 있어서도 연은 집에 있어서의 방과 같은 구실을 한다. 시의 구조에서 행이 하나의 작은 단락이라면, 연은 이 작은 단락이 모여서 만든 큰 단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연은 시의 구절이며 가락, 의미, 이미지 등 내용의 통일성을 가지는 시의 단위이기도 하다. 연도 행처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시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리듬에 따른 연의 큰 단락이다. 리듬의 큰 단락이 하나의 연을 이루는 경우이다. 행을 이루는 리듬의 작은 단락이 운율을 형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리듬의 큰 단락에 의한 연의 형성 역시 시의 운율, 음악적인 부분에 중심이 되어 있다. 따라서 각 연들은 운율을 살리는데 기여한다.(주로 김억 시나 김소월 시 경우, 전통적인 서정시의 경우)

둘째, 의미에 따른 연의 단락이다. 시적 내용이나 의미가 각각 한 단위가 되어서 혹은 강조가 되어서 한 연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연은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고 있는 의미의 큰 덩어리혹은 의미의 큰 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백석의 시 「여승」의 경우, 이야기구조와 그 중심 내용에 따라 연을 구분하고 있다. 1연은 여승의 현재모습을, 다음 연은 여승이 되기까지의 그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 연을 나누고 있다.)

셋째,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기에 이미지의 큰 단락에 의해 형성된 연은 그만큼 감각적인 특성과 모습으로 우리의 주의력을 끌어 모은다(주로 이미지즘 시에서는 이미지의 종류에 따라 연을 나눈다. 즉 시각적 이미지를 한 연으로, 후각적 이미지를 한 연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를 한 연으로… 등등으로 나누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