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자동차 - hangug choecho jadongcha

시장에서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은 이미검증된 방법을 따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시도에는 반드시 ‘모험’이라는 요소가 반대급부로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의 이목을 끌고 그로 인해 흥행에 성공한다면, 그 위험은흥행과 진보로 돌아온다. 

극동의 불모지에서 불과 반세기를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 중 하나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자동차시장에서도 진취적인 기업 정신과 끊임 없는 노력으로 ‘최초’라는타이틀을 따낸 자동차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동차들이 등장함에 따라, 국내 자동차 시장은 더욱 다양화되고 성숙해지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누구도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움으로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을 따낸차들을 다뤄 본다.

국내 최초의 양산차 - 국제차량제작 시-발(1959)

‘국제차량제작(國際車輛製作)’이라는자동차 제작 회사가 내놓은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상 첫 차, ‘시-발’. 국제차량제작의 시발(始發)은 ‘첫 출발’, 혹은 ‘어떠한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첫 출발을 기록한 자동차에게 그 어떤 것 보다도 어울리는 이름이다.

한국 최초 자동차 - hangug choecho jadongcha

국제차량제작은 본래 광복 후 미군으로부터 불하(拂下)받은 군용 차량의 정비와 폐차 처리 등을 업으로 삼았던 ‘국제공업사’를 모체로 하는 기업이었다. 다라서 기본 구조는 폐차된 지프를 기반으로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자르고 펴서 만들어졌으며, 엔진은원본 지프의 부품을 주물로 복제해다 만들었다. 기술적으로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영운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하지만 한국전쟁의 화마가 지나 간 이후, 황폐해졌던 국내 환경에서 시-발의 존재 가치는 상당히 컸다.

국내 최초의 SUV – 쌍용자동차 코란도(1969)

쌍용 코란도는1969년, 신진자동차가 생산한 미국의 민수용 지프(CivilianJeep, CJ)인 ‘신진 지프’를 그 조상으로한다. 이 차는 카이저(Kaiser) 사의 CJ-5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카이저 사의 부품을 공급받아 조립생산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신진자동차의 인천 부평공장에서 먼저 생산되었다가 1970년도부터부산 주례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코란도라는 이름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거화 시절이었던 1982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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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란도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인은 할 수 있다"를 영역한 "KORean cAN DO"에서 가져왔다. ‘코란도’는신진지프자동차 이후로 거화, 동아, 그리고 쌍용으로 주인이세 차례나 바뀌면서도 존속되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를 상징하는 모델의 이름으로도 쓰였고, 온갖 악재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 선 오늘날에는 쌍용자동차의 SUV 브랜드로사용되고 있다. 이 덕분에 ‘코란도’는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가장 장수하고 있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의 독자개발 양산차 – 현대자동차 포니(1975)

포니의 등장 이전까지,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주로 외국 자동차 기업의 라이센스 생산에 의존해야 하는 체제였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현대적인 자동차를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원천 기술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4년, 토리노모터쇼에 등장한 한 대의 자동차는 오늘날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이 될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계의 초석을다졌다.

물론 현대 포니는 순수하게 100% 국내에서 독자개발한 모델이라고 보기에는 여러가지로 어폐가 있다. 기본구조부터 일본 미쓰비시의 것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엔진과 변속기 등의 핵심 부품들 또한 미쓰비시의것을 사용했다. 외관 디자인은 이탈디자인에 외주를 맡긴 결과물이었다.현대자동차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홀로 개발한 최초의 차는 다음 편에서 소개할 액센트(Accent)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포니가 갖는 의미가 큰 것은, 국내 자동차 제조사 스스로 ‘자립’ 내지는 ‘독자생존’의 길을 선언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포니는 대한민국에서자동차의 대중화에 혁혁하게 기여했으며,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되기 시작한 자동차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의 승합차 – 현대자동차 HD1000미니버스(1977)

대한민국에서 승합자동차 내지는 1박스형의 밴(유개화물차)을모두 일컫는 말이 있다. 바로 ‘봉고차’다. ‘봉고차’라는 말은 ‘찦차’와 같이, 고유명사에서비롯되어 보통명사로 쓰이는 말의 예시 중 하나다. 봉고차는 1980년대초 기아자동차(이하 기아차, 당시 기아산업)에서 만들어진 봉고(Bongo)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기아 봉고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승합차라고 할 수는 있으나, 최초의 승합차는 아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승합차는 현대자동차가 1977년에 내놓은 HD1000 미니버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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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량은 포드 트랜짓(Tranjit)의 하부설계를 기반으로 현대자동차에서 거의 독자개발한 수준으로 만들어진 모델로, 미니버스 외에 밴 모델과 트럭모델이 모두 존재했다. 이들 중 트럭모델은 ‘포터’의 1세대모델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의 HD1000은 생산을개시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단종을 맞게 되었다. 이는전두환 정권의 악명 높은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 인해 현대자동차는 승용차 라인업은 보존한 대신, 5톤 미만소형 상용차 분야를 접어야 했고, HD1000 미니버스도 역사 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기아자동차의 봉고가 꿰어 차게 되었다.

국내 최초의 디젤 승용차 – 새한자동차 로얄 디젤(1980)

신진자동차의 후신인 지엠코리아는 오펠에서 가져 온대형 승용차 레코드(Rekord), 그리고 그 후속이라 할 수 있는 레코드 로얄(Rekord Royale)을 통해 세단 시장에서 그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레코드로얄은 1980년에 접어들며 판매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지엠코리아의후신인 새한자동차는 레코드 로얄의 새로운 바리에이션을 내놓았다. 바로‘로얄 디젤’이다. 레코드 로얄에 독일 오펠에서공수한 64마력의 2.0리터 디젤 엔진을 얹은 차종으로,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 상 최초의 디젤승용차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디젤 버전 레코드는 독일오펠에서도 자국 시장에 판매 중인 사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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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엔진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승용차에 사용하기에적당한 엔진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승용형 디젤 엔진이랍시고 개발은 했지만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구식 디젤 엔진들의 심한 소음과 진동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또한 디젤 엔진의 특성 상, 엔진의 체적이 지나치게 컸다. 이 때문에 로얄 디젤은 통상의 레코드로얄과는 다른, 중앙부가 툭 튀어 나온 형상의 전용 보닛을 사용했다.로얄 디젤은 대한민국에서 판매된 최초의 디젤 승용차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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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자동차의 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1903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자동차를 들여온 것은 1903년이다. 조선 제26대 임금이었던 고종황제가 즉위 40주년을 맞아 미국 공사 알렌을 통하여 미국산 자동차 한대를 들여왔다고 한다. 이 차가 우리나라에서 들여온 첫 자동차인데 이를 두고 말이 많다. 지금까지 정확한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다 보니 ‘포드’인지 ‘캐딜락’인지 확실치 않은 것인데, ‘포드’쪽에 무게가 실려있다.

1910년대
1911년에 들여온 자동차도 황실용이었다. 이 자동차는 영국의 다임러에서 만든 리무진 1대와 미국 GM에서 만든 캐딜락 리무진 1대였는데 다임러는 고종황제용이었고 캐딜락은 순종황제용이었다. 이 자동차 역시 인천을 통해 들어왔는데 이 내용이 인천부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서울 백성이 거리에서 자동차를 처음 본 것은 1908년으로, 이 해에 들어온 빨간색의 프랑스 공사 자가용이었다. 그러나 한일 합방으로 프랑스 공사가 철수 당하게 되자 르노에서 만든 이차를 황실에 팔았고, 이 차를 처음에는 순종황제가 탔다고 한다.
국내에서 최초로 자동차 운송사업을 시작한 것은 1912년의 일로 버스 사업이었다. 이는 1911년 12월 29일자로 일본인 에가와가 경남 경무부로부터 경남 마산-진주간, 진주-삼천포간에 승합자동차 영업 허가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졌다.
1913년 서울 낙산 부자 이봉래씨와 일본 청년 곤도 그리고 장사꾼 오리이 3인이 합자해 20만원으로 첫 자동차회사를 세우고 '포드T형' 승용차 2대를 도입해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의 택시의 시초이며. 이때가 우리나라 운송사업의 출발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자 1914년 영친왕 이강공이 미국제 오버랜드를 들여 왔을 때, 1915년 윤권이라는 사람이 이 차를 운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사가 되었다.
원래 전직 마차부였던 윤권은 1914년에 이태리 공사관에 근무 하던중 공관 자동차로 운전을 배워서 의친왕 이강공의 오버랜드를 몰게 되었다. 당시 그는 금테두른 검정 정장 운전복을 입고 고등관 행세를 하며 왕족 운전기사로 출세해서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사진참조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4전시실<5층>) 

 1900~1950 자동차 시대의 개막[ Ford - 디럭스세단, 1933 ]


자동차가 한국에 처음 상륙한 것은 1903년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식 때 미국 공사에게 부탁해 포드 자동차를 들여와 바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으나 이듬해 러,일 전쟁중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동차는 이후 황실용 2대와 총독부 1대가 도입되어 1911년에는 우리나라 보유대수는 3대가 되었다.
이후 부유층의 자가용과 운수사업용으로 들여오기 시작하고 판매와 서비스 회사까지 생겨나 1945년에는 7,386대로 보유대수가 늘어나면서 광복을 맞았다.
 

1950~1960 자동차 공업의 태동[ 국제차량공업사 최무성 삼형제- 시발, 1955 ]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 군용차를 재생하는 공장으로 1954년 하동환공업사와  신진공업사가 생겨났고, 1955년 국제차량공업사를 운영하던 최무성 삼형제가 전형적인 수공업형태로 지프형 승용차 '시발'을 만들어 1955년 8월 광복 10주년 기념으로 열린 산업박람회에 출품, 대통령상을 받으며 등장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시작을 알렸다.

1960~1970 자동차 공업육성의 기틀 마련[ 신진자동사 - 퍼블리카, 1967 ]
1960년대 들어 5.16 군사정부의 강력한 경제정책에 힘입어 1962년 4월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이 발표되고 자동차보험법이 제정되면서 국내 최초로 대규모 자동차 조립공장인 새나라자동차(년 생산능력 6,000대)가 설립되어 같은해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 승용차의 SKD 방식으로 수입하여 조립하여 생산한 최초의 국산승용차가 탄생하였다.
다시 1965년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한 신진공업사는 1966년 상호를 신진자동차로 바꾸고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국산화율 20% 수준의 '코로나'와 '퍼블리카'를 생산하였다.
제 2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7년 중화학공업정책이 본격화 되면서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되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현대자동차는 1968년 포드와 기술제휴로 '코티나', 이듬해에는 '포드 20M' 생산에 들어갔고, 1965년 설립된 아시아자동차도 피아트와 기술제휴로 1970년 초부터 '피아트 124'를 생산하였고, 1962년 기아산업은 3륜트럭 'K-360', 'T-1500'을 시작으로 1969년 4륜트럭 '타이탄'을 생산하여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은 4원화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1970~1980 국산 모델 개발[ 현대자동차 - 포니, 1975 ]
1972년 도요타자동차가 중국 진출을 위해 신진자동차에서 철수하고 대신 GM과 합작으로 GM코리아가 세워졌고, 현대는 포드와 자본 협력에 실패하고 독자적인 자체모델 개발과 종합자동차공장 건설에 착수하는 가운데 기아도 마쯔다의 '브리샤'를 1974년부터 국산화 생산을 개시하였다.
한편 고유모델 개발에 나선 현대자동차는 1975년 최초 국산 고유모델 '포니'를개발하여 대량생산과 처녀수출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GM코리아는 1972년 '시보레'와 '레코드'를 양산하였고, 1976년 한국측 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하여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을 바꾸고 다시 1978년 산업은행의 보유지분을 대우그룹에 넘김으로써 오늘의 대우자동차가 출발하였다

1980~1990 양산체제와 수출기반 확립[ 기아자동차 - 프라이드, 1984 ]
1980년 제2차 석유파동 후유증으로 자동차공업은 한때 위기를 맞았으나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로 승용차 생산은 현대와 대우가, 중소형 트럭은 기아가 독점 생산하게 됨에 따라 각사의 경영이 정상화 되었다.
1986년 합리화조치가 해제되자 마자 기아는 '프라이드'로 현대는 '포니'에이은 '엑셀'과 '프레스토'로 대우는 '르망'을 앞세워 수출전략기지인 미국을 비롯하여 전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1990~2000 국제경쟁체제와 구조조정[ 대우자동차 - Matiz, 1999 ]
세계시장에 본격적인 대량 수출이후 기술의 자립화와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이루어졌고, 1996년에는 280만대 생산체제로 세계 5위의 생산대국으로 한국이 부상하였다.
그에 효자역할을 한 것이 대우자동차의 '마티즈'로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1997년 IMF쇼크로 내수시장이 붕괴되었고 자동차업계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나 바야흐로 자동차 업계는 1999년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그리고 아직 향방을 잡지 못한 대우자동차의 양사체제에 삼성자동차, 쌍용자동차가 해외에 매각되어 가세하는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다

 2000년대 환경친화적인 자동차[ 대우 전기자동차 - DEV5 ]
2000년대 자동차의 기능은 소비자의 요구와 자연 및 인간생활의 요구에 맞추어 고유 기능인 수송기능은 물론 정보통신기능과 여가 오락기능이 보다 커지고 또한 함께 제공될 것이다.
또한 많은 첨단장치 개발로 보다 안전하고 쾌적할 것이며 저공해차나 대체에너지가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한국 완성차 업계에서도 전기자동차 및 하이브리드, 연료전지 자동차의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향후 수년안에 이에 대한 자동차의 양산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