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바울은 앞서 35절부터 49절까지 부활의 날에 입을 부활체의 존재와 상태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한 후,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일어날 일과 성취될 죄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언급하면서, 부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논의를 이어나갑니다. [우리도 변화되리라(50-53)]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0절에서 말하는 혈과 육은 현재 우리 몸입니다. 이는 우리가 현재 흙으로 지음 받았듯이 부활 때가 되면 그에 걸맞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49절 진술에 대한 부연 설명이며, 현재 우리 몸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언젠가 홀연히 다 변화될 것인데, 그때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른 몸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51절의 나팔은, 마태복음 24장 31절과 요한계시록 10장
7절에도 나오듯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알리는 확정적 신호를 뜻합니다. 이때가 되면 누구든 변화된 새로운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54-57)] [(55-56)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5절과 56절에 “쏘는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켄트론”은 쉽게 말하면 독침입니다. 전갈의 독침 같은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망은 “죄”라는 무기로 우리를 둘러싸 위협하고 넘어뜨립니다. 이 죄가 사라지면 죽음은 더이상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우리는 죄에서 이미 놓임받았으므로, 사망은 무기를 잃어버린 것이고, 더이상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를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지 않음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구원의 은덕들이 육체를 가진 우리 현실 앞에 모두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주신 복 안에서 확신하며 자랑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 주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습니다. 죄를 멸하셨고, 저주를 참으셨으며,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고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창시자(히12:2, 새번역)로서 우리 모두를 이 복의 참여자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58)]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는 일입니다. 오늘이 끝이 아니고, 이 삶이 끝이 아니라면 우리는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이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소망을 갖게 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신다면, 기꺼이 내어드릴 믿음이 생깁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 [묵상을 위한 질문] 고린도전서 15장 40절 ~ 41절 (고린도전서 15:40~41 / 고전 15:40~41)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의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도다” 예전에, 기도원 집회나 부흥집회 때마다 부흥강사로부터 이런 예화를 흔히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의 충성과 헌신 정도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금 면류관을 쓰고, 어떤 사람은 개털 모자를 쓰고, 어떤 이는 천국 맨션에 살고, 어떤 이는 초가집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그렇게 말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부흥강사들이 그 증거로 드는 말씀이 고전 15:40 ~ 41절 말씀이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이 말씀을 들어 구원에도 차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차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몸과 부활의 몸의 영광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듣고 죽음에서 부활을 할 것인데,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5~29)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과 또한 그에게 속한 자들의 몸의 부활과 그 부활의 영광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구원의 차등성이나 상급의 차등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우리 육신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요일 3:2)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요... 예수님은 구원에는 결코 차등성이 없음을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일꾼을 구하려고 아침 일찍 길에 나간 포도원 주인 같으니, 그는 아침 일찍 길에 나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여 일꾼들을 들여보내고, 9시에 나가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들여보내고, 또 12시와 오후 3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 들여보내고, 오후 5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 들여보내고, 날이 저물어 일이 끝나니 포도원 주인은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아침 6시부터 와서 종일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주신 구원에는 결코 차등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도록 충성하다 순교한 사도바울이나, 평생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인강도 짓하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직전 회개하고 구원받은 한편 강도나 구원에는 차등이 없다는 말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천국에서 금 면류관을 쓰고, 그 살인강도는 개털 모자를 쓰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계 20:6/ 22:5)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요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것인데, 우리가 천국에 가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상급을 받으려는 것은 아직 자신이 십자가에 죽지 않은 증거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사는 길은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롬 6:5, 8)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임을 확인하고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으로써 되는 것이 결코 아닌데, 우리는 늘 무언가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강도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신의 어떤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꼭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 선교를 하고 많은 헌금을 드리고 구제하고 또 예배에 힘쓰고 애쓰는 것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서 더 큰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큰 구원을 주시고 당신의 자녀를 삼아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백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