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선발대’(연출 이찬현)는 절친들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길지만 여행자들의 버킷 리스트로 손꼽히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낯선 여행 先체험 답사기로, 어제(26일) 그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먼저 출발에 앞서 사전미팅 자리에서 김남길은 평소 여행을 즐기는 데다가, 훨씬 전부터 본인의 버킷리스트였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얘기를 듣자마자 흔쾌히 수락했다고 합류 계기를 밝혔다. 더군다나 아빠 같은 느낌에 첫 만남부터 통하는게 있었다던 배우 이선균의 제안이었기에 단번에 ‘낚이게 됐다’며 웃음 지었다. 이어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초대한 동생들 배우 고규필과 김민식까지 합류, 여행에 앞서 준비물을 갖추기 위해 장보기에 나섰다. 보드게임과 캠핑용품 코너에서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며 지름신이 강림한 김남길. 쇼핑왕으로 불린 그의 활약(?) 덕분에 겨우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내렸을 뿐인 고규필은 짐 때문에 진땀을 흘렸고, 이에 김남길은 선풍기 바람을 쐬어주고 고규필을 위해 한국에서 싸온 맛있는 음식들을 나열하는 등 채찍 대신 당근 세례로 결국 고규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블라디보스톡 역으로 향하며 김남길의 ‘네비게이션’ 활약이 시작됐다. 모두가 헤맸던 107번 버스를 제일 먼저 찾아내고 열차 승강장도 발견, 심지어 다들 무거운 짐과 더위에 넉다운 되고 말았던 짐보관소 찾기 미션에서도 폭풍검색실력을 자랑하며 퀘스트를 완료했다. 짐을 맡긴 후 아직 남은 열차시간을 활용해 맛집탐방에 나선 김남길. 아름다운 거리 풍경에 더위도 잊은 채 한껏 텐션이 올라간 모습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댕댕미’를 발산한데 이어 김민식과 함께 ‘행동파’를 결성, 언어의 장벽을 깨부수고 생맥주를 구해와 각종 해산물이 어우러진 성공적인 러시아 첫번째 먹방을 선사했다. 한편 기차탑승을 앞둔 이들의 앞에 어둠이 내려앉았으니. 바로 티켓이 통째로 없어진 상황.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대장 이선균과 부대장 김남길의 코퀄리티 연기가 만들어낸 몰래카메라였고, 이를 시작으로 아무도 믿지 말라는 ‘몰카열차’의 여행이 서막을 알렸다. 연 평균 20만명이 이용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블라디보스톡부터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끝으로 9288km를 달려 마무리 될 이들의 12일 간의 여행이 시작을 알렸고, 그동안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김남길의 매력 어드벤처에 최고시청률은 2.6%(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 실시간 검색어에도 등극했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김남길, 동료 배려하는 모습과 밝은 이미지가 너무 돋보였다”, “김해일신부님이 김댕길로 돌아왔다! 안보면 후회하는 ‘시베리아 선발대’!”, “한시간 반 동안 김남길에 치이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음주 목요일까지 매일 다시보기하며 기다릴게요”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절친들과 함께 떠나는 낯선 여행 先체험 답사기, 먼저갈게 따라와! <시베리아 선발대> 첫 번째 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자, 모든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인 ‘시베리아 횡단열차’! 9,288km에 달하는 낯설고도 특별한 여정을 ‘선발대’가 미리 떠난다! 선발대의 맏형이자 대장, 이선균! 그의 정체는 동생들 낚는 강태공이었다?! 이선균을 필두로 탄생한 ‘시베리아 선발대’ 대원들! 언제 어디에서나 해맑은 美친 친화력, 김남길! 예능과 콘텐츠 제작에 활력을 불어넣는 예능 고참 막둥이, 이상엽! 의외의 ‘베이비’ 입맛으로 선균을 긴장케 한 고규필! 다수의 여행 경험을 살려 멤버들을 캐리하는 만능캐, 김민식까지! 그리고 선발대원들이 준비한 특별한 ′영상 제작기′! ‘선발대’가 경험한 모든 정보들을 직접 촬영해 콘텐츠로 제작하라! 횡단열차에서 알아야할 꿀팁부터 아직은 낯선 ′러시아′의 문화, 음식, 사람들에 대한 모든 것을 담는다! 배낭에 설레는 마음까지 채워 도착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첫 시작점, ′블라디보스토크′!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더위와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곳에서 멘붕에 빠진 선발대원들! 과연 11박 12일의 여정을 무사히 시작할 수 있을까? 열정 넘치는 5명의 선발대원들과 함께 떠나는 예측 불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9월 26일 목요일 밤 11시 <시베리아 선발대> 첫 방송! 마셜 플랜 ·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 제1차 중동전쟁 · 베를린 봉쇄 · 티토-스탈린 결별 · 6.25 전쟁 · 쿠바 혁명 · 헝가리 혁명 · 제2차 중동전쟁 · 1958년 레바논 위기 · 진먼 포격전 · 스푸트니크 쇼크 · 콩고 내전 · 중소결렬 · U-2 격추 사건 · 1962년 버마 군사반란 ·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 베트남 전쟁 · 캄보디아 내전 · 피그만 침공 · 쿠바 미사일 위기 · 제3차 중동전쟁 · 프라하의 봄 · 브레즈네프 독트린 · 우주 경쟁 · 중국-소련 국경분쟁 · 매카시즘 · 상호확증파괴 · 죽의 장막 ·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 데탕트 닉슨 독트린 · 동방 정책 · 닉슨-마오쩌둥 회담 · 7.4 남북 공동 성명 · 핵확산금지조약 · 전략무기제한협정 · 제4차 중동전쟁 · 앙골라 내전 · 베트남 통일 · 이란 혁명 · 중국-베트남 전쟁 후반부 흑묘백묘론 · 그레나다 침공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이란-이라크 전쟁 · 스타워즈 계획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냉전의 종식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 도이머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북방정책 · 1988 서울 올림픽 · 천안문 6.4 항쟁 · 베를린 장벽 붕괴 · 몰타 회담 · 1989년 동유럽 혁명 · 예멘 통일 · 동서독 통일 · 걸프 전쟁 · 8월 쿠데타 · 남북기본합의서 · 소련 해체 탈냉전 국제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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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핵심 관료들이 미얀마 방문을 반대한 것은 미얀마가 국력이 약한 나라인데다가 군사독재 국가의 특성상, 외교를 통해 막상 얻을 만한 실리나 국제적 위상이 부족하다는 것과 결정적으로 북한에 더 지지를 보이는 성향의 국가임을 감안할 때 우리와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반대 의견의 주요 근거였다. 3. 테러[편집]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 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다 하는 의례행사로, 쉽게 말해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정상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최재욱(43) 하동선(47) 황선필(44) 김재익(45) 민병석(54) 김용한(54) 강인희 이기욱 이기백(52) 심상우(45) 함병춘(51) 이계철(54) 서상철(48) 김동휘(51) 이범석(58) 서석준(45) 전두환(52)
4. 사망자 명단[편집]
5.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편집]여러 모로 명백히 전두환을 노린 폭탄 테러였으나 정말 우연히도 현장에 없어서 살았는데 이유는 여러가지다. 종합적으로 보면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이유가 겹쳐져 살아남았다.
6. 수습 및 후속 조치[편집]
7. 후폭풍[편집]7.1. 대한민국[편집]
7.2. 북한[편집]테러의 당사자인 북한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시 지휘는 장성택의 친형인 장성우와 허담 조선로동당 국제비서가 주도했다. 북한은 그 해 10월 8일 남-북-미 3자 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남한을 대화 상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는 평가받았으나, 이를 도모한 이유는 베일에 싸여져 있다.[24] 다만 애초부터 버릴 패였던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하게 굴었는데 2008년 사망한 강민철 상위의 가족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고 시도때도없이 암살 위협을 했다고 한다. 7.3.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편집]버마도 당연히 나라 전체가 뒤집어졌다. 주권국가인 미얀마의 영토 안에서 그것도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 산의 묘소에 자기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북한이 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니, 이는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과 동시에 미얀마를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미얀마 사람들도 많이 죽고 다쳤다. 7.4. 국제 사회[편집]이 테러로 인해 미국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고, 미얀마 외에도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여러 나라가 단교했다. 그 외에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 필리핀, 도미니카, 프랑스, 네덜란드, 서독, 오만, 아랍에미리트 등 서유럽과 중동, 동아시아, 아메리카의 10여개 국가가 북한을 향후 절대로 수교할 수 없는 나라로 선포하면서 북한의 대서방 외교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25] 일본 역시 독자적 대북 제재를 추진하였다. 8. 만약 전두환의 암살이 성공했다면?[편집]8.1. 개전 가능성[편집]앞서 나왔듯이 국가 원수와 수뇌부가 전부 사망했으니 한국은 혼란에 빠졌을테고 이러한 틈을 타 북한이 국지전 이상에 준하는 도발적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를 노리고 저지른 테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실질적으로 국지전을 넘어 제대로 된 전쟁을 벌였을지는 미지수다. 8.2. 이른 민주화 가능성[편집]이런 대규모 혼란에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군부가 또다시 정권을 장악하거나 군부의 권력이 공고화되어 오히려 민주화가 더욱 20~30년 뒤처질 가능성도 높다. 구체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의 집권 과정처럼 현직 국무총리였던 김상협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고, 전시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의 예처럼, 대통령 선거인단을 구성해 당시 헌법 규정에 의거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평시도 아닌 전시에 완전한 문민 대통령이 당선될리가 만무한만큼 군부 유력 인사, 그 중에서도 강경 군부 인사가 대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 여담[편집]1984년판 보도사진연감에 실린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희생당한 정부 수행원들의 영결식. 여의도광장에서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행했다.
함병춘의 사망은 한국법사회학의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는 평을 받았다. 함병춘은 한국 법철학과 법사상사, 법제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쳐 몇십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법학도라면, 특히 연세대학교 법학과 학생의 경우 법철학과 법제사 등의 과목을 수강할 때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확립한 체계를 배우게 된다. 법사회학 쪽에선 민법의 곽윤직 교수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의 신문에 보도된 TV방송 편성표
11. 관련 자료[편집]
12. 관련 문서[편집]
[1] 한국 측 17명, 미얀마 측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미얀마측 군경 3명이 검거작전중 순직했다[2] 범인의 경우 3명중 1명은 체포작전 중 사살당했으며, 1명은 미얀마 당국에 의해 사형당했고 나머지 1명인 강민철은 무기수로 복역 중 2008년에 옥사했다.[3] 최재욱 공보비서관과 이기백 합참의장은 구석에 있어 가까스로 생존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현장에 없었으므로 제외한다.[4]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5] 허화평, 허문도, 허삼수[6] 대표적으로 1981년 아세안 5개국 순방과 1982년 아프리카+캐나다 순방이 있다.[7]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이며 당시 심현섭은 13살이었다.[8]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이재관 공보비서관.[9] 당일 아침에 영빈관에서 대통령에게 언론 관련 보고를 하고 나서려는 찰나에 전두환 전 대통령님이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붙잡았고, 늦게 나온 그가 타야할 차는 이미 누가 타고 가버린 뒤였다고 한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묘소로 향하는 와중에 멀리서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10] 정확히는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이었다. 참고로 당시 총재는 대통령 본인.[11] 10월 13일 합동 국민장으로 전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2] 여담으로 서석준 부총리의 외동딸인 서이영씨는 12년 뒤인 1995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13] 3대 부통령을 지냈던 함태영의 막내아들이다.[14] 사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부상자들이 후송된 미얀마 제2육군병원의 의료상태가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만 상처를 씻고 가위도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를 정도로 열악한 탓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4일만에 숨지고 말았다.[15] 전 호남전기 및 전남매일신문 사장, 광주일보 명예회장.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16] 이 테러 사건으로 사망한 유일한 언론인이다. 1949년 경기도 개풍군 출신의 실향민으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나왔으며, 경향신문과 조선일보를 거쳐 1973년부터 동아일보로 이직했다. 1968년 제16회 국전 사진전 입선을 비롯해 한국국제사진살롱 등 각종 보도사진전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1970~80년대 초까지 걸작급 보도사진들을 남긴 거장이기도 하며, 대표적으로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의 참상을 다룬 <11월 11일의 일기>, 1978년 동아일보 컬러사진 1호 <하늘을 보다> 등을 남겼다. 또한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항목에 실린 '33년만에 만난 오누이의 절규' 사진을 찍은 기자가 바로 이 분이다.(상세 정보)[17] 여행 안내서에 따르면 김진수 소좌는 당시 부상이 매우 심각해 고통을 줄여주려던 인도적 차원에 맞춰 사형을 집행했다고 나온다.[18] 이는 1.21 사태를 비롯하여 60년대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잠입할 때마다 북한에서 상투적으로 내세운 핑계이다. 자신들이 보낸 간첩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들이 파쑈 도당에 반대해서 궐기한 것이라고 책임도 회피하고 동시에 남한 혁명을 지원해야 한다는 구실로 삼는 것. 베트남 전쟁 때도 비슷하게 돌아갔다.[19] <대통령 비서실장론> 함성득, 151쪽[20] 원래는 테러 사건 전날 저녁에 묘소를 방문할 예정이었다.[21] 다만, 귀국하러 공항에 가던 와중에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병원에 들러서 조의를 표하고 생존자들의 병실을 둘러보았다고 한다.[22] 아웅산묘역 테러수사 경찰관의 고백 "북한 공작원 검거는 우연", 김상훈 방콕 특파원, 연합뉴스, 2016.7.31[23] 당장 전두환 자체가 김재규를 체포한 사람이다.[24] 원 출처: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27~229.[25] 물론 오만은 나중에 이를 번복하고 1992년 북한과 수교를 맺었으며 호주는 과거 노동당 내각 시절 북한과 이미 수교한 상태라서 21세기 들어서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 이미지가 좀 유해지면서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독일도 북한과 수교했다.[26] 이 때문에 차우셰스쿠는 말년에 다시 친소, 친동구권 외교로 선회했고 1981년 폴란드 사태 때 소련의 무력개입을 주장하는 등 강경파로 선회한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자신의 정권의 보험으로 써먹으려고 한 정황도 있다.[27] 참고로 북한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및 호주와 수교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호주 측이 북한의 교화소 상황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면서 북한 인권 문제에 개입하려 했고 선전용 교도소를 보여주면서 유들유들하게 대처한 중국과 달리 북한은 내정간섭이라고 그야말로 발광을 했다.[28] 때문에 똥별들이 아군을 죄다 맨땅에 들이박는게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한국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도 국방부가 징징대는 이유는 특유의 국방부 특유의 예산 타내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애초에 세계 군사력 1위인 미국도 예산 타내려고 이라크 상대로 질 거라고 징징댄 전적도 있었다. 주한미군을 유지하려는 명분을 대외적으로 세우려는 목적도 있다.[29]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 중 한명으로 훈춘 대학살취재차 간도에 파견되었다가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상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중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하. 대한민국 최초의 종군기자이자 순직기자로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받았다.[30] 1966년 월남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11월 28일 비둘기 부대를 취재하고 사이공으로 귀환하다가 교통사고로 순직했다.사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