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공평의 차이 - pyeongdeung-gwa gongpyeong-ui chai

제비뽑기는 공평하지만 평등하지는 않다. 공평은 기회의 평등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평등은 결과의 평등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공정은 과정이나 절차상의 평등이라고 한다면 공정이 가장 이루기 쉽다. 어째든 과정이 투명하고 절차가 모두에게 평등하다면 공정한 것이니까.

공평은 좀 더 어렵다. 기회의 평등은 사실 웬만한 경우에는 주어지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비뽑기를 공평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제비뽑기가 선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특정한 기준을 통해 누굴 뽑을지를 선택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경쟁할 기회를 준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아니다. 공정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가진 자원과 능력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공평은 가능성의 퍼센테이지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공정은 능력있는 사람이 이기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평등은 모두에게 결과를 동일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른데 공정은 그 다른 능력의 차이를 반영해서 능력에 따라 뽑는 거고 공평은 능력 차이를 배제하고 뽑힐 가능성을 모두에게 동일하게 배분하는 거다. 평등은 능력 차이를 배제하고 결과를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하는 것이다.

공정이 능력의 차이를 긍정한다면 공평은 능력이나 가능성의 차이를 부정하고 결과의 차이를 긍정한다. 평등은 결과의 차이도 부정한다.

결과의 평등은 모든 차이를 소멸시킨다. 공평은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지만 대신 모두에게 똑같은 가능성을 준다. 공정은 능력에 따라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과정과 절차를 모두에게 동일하게 유지한다.

다섯명이 있는데 케이크는 네조각이 있다고 하자. 여기서 공정은 능력있는 사람이 케이크를 차지하도록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가장 능력없는 한사람만 케이크를 못 먹게 되는 것이 공정이다.

공평은 다섯명이 케이크를 먹을 가능성을 똑같이 나눈다. 가위바위보나 제비뽑기가 공평에 해당된다. 결과적으로 한명이 못먹긴 하지만 그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불운해서 그런 것 뿐이다.

그렇다면 평등은 무엇일까. 네조각을 1/5로 나눠서 먹는 방법도 있을테고 모두 안먹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눌 수 없는 것이라면 모두가 못 가지는 것이 평등이 되는 것이다.

예를들어 부자는 상대적인 비교적인 사회적 위치이기 때문에 나눌 수 없다. 공정은 능력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고 공평은 로또를 산 누구나 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평등은 아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공정을 기반으로 해서 돌아가고 거기에 로또같이 운에 따른 공평을 섞어 넣는다. 반면 공산주의는 평등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똑같이 부자가 되는 사회가 공산주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거기선 아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공정은 강자들의 가치다. 기득권이라기 보다는 주로 뛰어난 능력있는 강자들이 공정을 강조한다. 공평은 운에 맡기는 것이므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가치다. 평등은 약자들의 가치다. 강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로 아무도 다른 사람과 차이나지 못하도록 아무도 부자가 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적 위치는 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있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을 제비뽑기로 뽑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정과 공평까지는 사회적 위치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정이 능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공평은 운을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평등은 사회적 위치 자체를 부정한다. 그것은 나눌 수 없는 것이고 나눌 수 없는 것은 누구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게 평등인 것이다.

나는 공정이나 공평은 긍정하지만 평등은 부정한다. 여기서 평등은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사실 모든 평등은 결과의 평등으로 귀결된다. 예를들어 인간이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한다면 왜 어떤 사람은 많이 가지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지는지 설명이 안된다. 결국 평등은 (중간에 멈추지 않는 한) 결과의 평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은 공정조차 이루기 힘든 곳이다. 공평은 더욱 어렵다. 모든 차이를 소멸시키는 평등은 거의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차이는 없앨수록 계속 새롭게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즐기는 방법은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낸 차이를 즐기는 것이다.

공정은 능력의 차이를 경쟁을 통해 즐기는 것이고 공평은 운의 차이를 결과를 통해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평등은 어떤 차이도 즐기지 못하고 모든 차이를 부정한다. 그것이 내가 평등을 싫어하는 이유인 것이다.

평등과 공평의 차이 - pyeongdeung-gwa gongpyeong-ui chai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공정은 국어사전에서 ‘공평하고 올바름’으로, 평등은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으로 뜻풀이를 하고 있다. 2016년 이화여대를 다니던 최유라씨의 학사과정 특혜를 공평하고 올바르지 않다고 분노한 학생들의 문제 제기와 투쟁이 2016년 촛불의 발화점이 되면서 공정은 우리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되었다.

2022년 대통령 선거의 주요 여당 유력후보는 자신의 대선 슬로건을 ‘공정과 성장’이라고 발표했으며 대통령 선거 후보로 거론되는 윤석열은 ‘공정과 정의’을 우리시대를 관철하는 중심 키워드로 제시했다. 야당 당 대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0선으로 국민의 힘 당대표가 된 이준석도 공정의 가치를 대표하는 상징적 젇치인이다. 현재 사용되는 공정은 평등과 유사어 혹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공정과 평등은 전혀 다른 사회적 가치이다.

3년 전 도쿄에 있는 도잔소 캠프장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YMCA총회 중 젠더 공정위원회 (Gender equity committee)에 참석한 적이 있다. 거기서 왜 젠더 평등(equlity) 위원회가 아니라 젠더 공정(equity) 위원회로 사용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문제 제기한 적이 있다. 위원회에서 설왕설래 이후 UN홈페이지의 젠더 위원회에 들어가서 UN은 어떤 개념을 사용하는지 검색해 보았다. 물론 UN은 성 평등(Gender equlity) 개념을 중심으로 젠더 문제를 다루어 가고 있었다. 평등 대신에 공정을 사용하는 현장에는 미묘한 이데올로적 오염이 존재한다. 그래서 공정과 평등 개념의 정확한 이해와 적용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대기업 총수나 극빈자나 모두 한 표를 행사하는 현대의 선거제도는 평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설계된 제도이다. 얼핏 보면 공정하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사람과 막 18세가 되어 선거권을 가진 청년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모든 사람이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권리 의무 자격 등에 차별 없이 한결같이 적용하는 것이 근대사회가 발명해낸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다. 루소는 이런 다양한 시민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 한 표로 만들어진 선거 결과를 ‘일반의지’라고 불러 보편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는 견고한 사회적 연대(평등)가 자유와 박애의 기반임을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현대의 인권 개념도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중심으로 맴돌고 있다.

주식회사에는 주주가 있다. 주주총회에서는 100주를 가진 주주와 1주를 가진 주가 평등하게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100주는 1주에 비해 100배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주식회사가 주식의 양만큼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은 공정의 원리에 기반 한다. 한국의 입시제도는 공정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보완적으로 평등의 준칙이 반영되어 있다. 현 한국의 입시제도는 결과적으로 SKY라고 부르는 소위 명문대학의 절대다수를 서울 특히 강남 출신의 학생이 차지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공정의 원리로 운영되는 입시제도가 평등 사회를 위한 기반을 토대로부터 침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성할당제, 지역할당제 등의 사회적 불평등을 미시적으로 보완하려는 정책이 공정의 이름으로 난타당하고 있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를 별도의 공사를 만들어 정규직화한 것이 야당과 청년층의 항의로 엄청난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현실을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정의 이름으로 격렬하게 비판이 제기 되고 있는 이런 정책들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책 설계의 서투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근대사회의 구성원리인 평등원칙이 공정의 논리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면 정당한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은 무의식적으로 평등의 원칙을 사회화하는데 주저하고 있다. 평등 개념은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적 공간에서 분단 이후 지속적으로 억압되어온 개념이다. 그러나 경제학자 피케티의 주장처럼 최소한 경제적 영역에서도 빈부 격차가 최소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놀라운 경제 사회적 성장을 이루어온 실증적 연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국처럼 양극화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이 고착화되어 있는 사회,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부러져 버린 사회가 미래가 있을까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청년들의 불만에 깊게 공감하지만 이제 경기장의 규칙이 공정하게 집행될 것을 요구하는 열정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고르고 한결같이 만드는 열정으로 성숙해졌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공정의 가치를 통해 평등, 사회적 연대의 가치로 고양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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