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자연사 징조 - noin jayeonsa jingjo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음을 맞게 되는 사람 한테는 

반드시 전조 증상 이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죽음에는 사고사, 자살, 병사, 급사 등등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수명이 다하여 자연사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행복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죽음을 당하게 되는 사람 한테는 3년전 쯤 부터 그 예후가

나타나기 시작 하는데 여지껏 찾아 보지도 않던 곳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많은 경우 입니다.

마치 철천지 원수같이 몸과 마음에 담을 쌓고 살던 누군가를

찾아가서 화해를 하는 경우도 있겠고, 가장 가기 싫어 하던

친적집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망하지 전 수개월 쯤 부터는 더욱 증상이 확연해 지는데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친구나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마치 멀리 떠날 사람이 아쉬워 하듯이 간혹 먼 곳을 

~멍...하니~ 응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평소에 먹지도 않던 것을 자꾸 먹는다거나 술을 마시면

서러움에 복받쳐 애절하게 울거나 자녀들에게 '나 없으면...'을

자주 반복 하거나 합니다.

이는 자신이 실제로 죽음을 예견하고 하는 행동들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채고 죽으면서 후회를 덜 남기도록

하기위한 일종에 후회 방어를 위한 행위 이기도 할 것입니다.
 

특히 자살을 하는 사람인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갑자기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자살을 감행하기전 

여러 징후들을 반드시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가슴아파 하는 것을 해소 하려는 듯 어느 곳을

찾아 가거나 아끼던 것을 주기도 하며, 자녀들 한테 지나칠 정도로

애정을 갑자기 쏟거나 합니다.

갑자기 죽는 사람 일수록 죽음을 당하기 며칠 전부터

먼곳을 응시하면서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한 없이 그져

먼곳만 바라보다가 어둡고 서글픈 표정을 짓게 되는데

자살자나 급사를 당하는 사람한테 많이 나타나는 현상 입니다.

위중한 투병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상태가 좋아 진다면 

좋은 일 보다는 나쁜 일인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후회되는

어떤 일을 하소연 하거나 가장 상처를 많이 주었던 사람을

찾게 된다면 며칠내로 이승을 하직 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이 있는데 흔히 죽음을 예견한

사람이 자신의 귀중한 재물들을 미리 내놓거나 가족에게

줄 것이란 생각들을 할 것인데 이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실제로 죽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야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은 사실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죽게 되는 사람들 한테는 전조 증상이 보이기는

하여도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위에 열거한 증상들이 반드시 맞는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징후들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평소에 관심을 깊게 가지고 살펴본다면

미리 알아 낼수도 있는 것입니다.

노인 자연사 징조 - noin jayeonsa jingjo

의료계의 밑바닥답게 노인요양원에 들어오는 환자들은 이미 병원에서 포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여기에서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환자들도 있지만 그럴때는 부리나케 큰 병원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삶을 더 연장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입원한다 한들 죽음을 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죽는 그 순간까지 온갖 치료조치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편한 순간을 겪으며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병원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p.5)

의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음을 저지하거나 늦추어야 한다고 믿지만, 그런 의사의 사명이 오히려 편안한 죽음을 방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의사는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한 환자에게도 끝까지 의사의 도움이나 의료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겨 자연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순환 속에서 죽음이라는 절차는 원래 조용하고 평온한 것이었다. 생을 마무리하는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삶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고, 떠나보내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살아있는 매순간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바로 죽음이다. 그 의미있는 순간을 의료가 깊이 관여함으로써 더할 수 없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란 원래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의료가 개입된 죽음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심지어 암에 걸린 사람마저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고통없이 평온하게 죽어간다. 나는 오래 전부터 ‘죽기에는 암이 최고다’라고 생각해왔는데, 암으로 인한 고령층의 자연사를 70건 이상 경험한 지금은 그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지금도 평균수명을 다한 노인들에게 ‘암으로 인한 사망’이 최고라고 권한다. 단, 여기에는 암검진이나 정밀검사 따위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특별한 징후가 없다가 말기암에 이르러서야 발견되는 경우는 편안한 죽음을 위한 ‘때를 놓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평균수명 100세를 향한 고령화 사회 답게 오늘날 병원의 최대 고객은 노인이다. 노인들이 이렇게 병원을 자주 찾는 데에는 ‘건강하게 늙어야 한다’는 의사들의 위협도 한몫하고 있다. 젊음과 건강에 대한 노인들의 환상과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온갖 건강식품이나 건강용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인은 어딘가 안 좋은 게 정상이다. 그것은 노화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의사를 찾거나 약을 복용한다 한들 더 좋아질 리가 없다. 옛날 노인들은 ‘몸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 오히려 건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매스컴과 의료계에서 끝없이 만들어내는 ‘건강판타지’로 거의 모든 노인이 나이 탓을 인정하지 않고, 노화를 ‘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노화가 병이라니, 이 얼마나 희소식인가? 왜냐하면 노화는 죽음으로 가는 일방통행이지만, 병이라면 회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노화마저도 의료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착각과 환상이야말로 노인으로 하여금 삶의 질을 더욱 떨어뜨리게 하는 주범이다.

인간도 생물인 이상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최첨단 의료나 재생의료 역시 생로병사 안에서만 허용된 잔재주일 뿐이다.
노년기를 보다 편안하게 보내려면 의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노화에 순응하며 병과 동행해야 한다. 나아가 노인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역할은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죽음’ 혹은 ‘죽는 방식’을 보여주는 일이다.
죽는 방식이란 곧 ‘사는 방식’과 같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며 어제와 전혀 다른 오늘은 있을 수 없다. 다시말해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중요하다. 오늘의 사는 방식, 주변과 관계를 맺는 방식, 의료를 이용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이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장면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러니 몸이 조금만 안 좋아도 당장 의사니 약이니 병원이니 하며 법석을 떠는 사람에게 자연사란 너무도 허황된 소망일 것이다. (p.6~8)

의료는 분명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살아있음’의 차원을 넘어 더 나은 삶, 더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라면 이제부터라도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 나카무라 진이치,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

>> 사람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의 뿌리를 찾아 내려가면 결국 ‘죽음’과 맞닿아있다. 죽지 않으려는 것이 살려고 하는 걸까? 그건 아닐테지. 죽음이란 암흑과 같은 두려움의 문으로 가지 않으려고 그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게 삶은 아닐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