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죽음 사마의 - jegallyang jug-eum samaui

장합의 죽음으로 살펴본 제갈량과 사마의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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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합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며 사마의가 왜 장합의 의견을 반대하고 추격을 명했는지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사마의의 스타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마의는 기회를 잡으면 거침없이 몰아쳐서 상대를 제압하며, 기회가 없을때는 끝까지 버티며 기회를 노리는 스타일이며,* 이에 반해 제갈량의 스타일은 근본을 중시하면서도 변수를 통제하여 변화를 제압하는 것이다. 

* 사실 사마의의 스타일은 조조와 매우 흡사하다. 이 둘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231년 북벌을 살펴보면 5월 10일에 사마의군을 대파한 제갈량이 6월에는 군량이 소진되어 급작스레 철수한다(이엄 사건). 승세를 타던 촉한군이 급하게 퇴각하자 사마의는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거라 여겼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의 스타일로 생각해봤을때 상대에게 빈틈이 있다고 판단하여 장합의 의견을 반대하고 추격을 명한 것이다(화양국지에는 이 당시 위군도 군량이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장합의 진언은 정석적인 대응이다. 한 달 전에 전면전에서 패한 상대이므로 추격이라 해도 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마의가 장합의 죽음을 방조했다는건 상상일 따름이고, 단지 둘의 스타일 차이일 뿐이다.

  "병법에서는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빠져나갈 곳을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 장합전 주 <위략>

  장합은 위와 같은 의견을 근거로 추격을 반대했지만 결국 사마의의 생각대로 출전했고, 촉한군을 추격한 장합은 교전 중에 복병에게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예견하지 못한 변수(이엄의 태만에 의한 퇴군)에도 복병을 배치하여, 자신의 빈틈을 없애고 상대의 기회마저 차단한 공명의 훌륭한 대처와 전과라 할 수 있다.

** <한표전>을 인용한 <태평어람>에는 공명이 손빈을 흉내내어 장합을 쏘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장합도 복병을 예상한 적이 없으니 사마의의 판단이 틀렸고 장합이 맞다고도 할 수 없다. 판단이 들어맞은 인물은 이 둘이 아니라 공명 뿐이다.

袁希之漢表傳曰, 丞相亮出軍圍祁連山, 始以木牛運糧. 魏司馬宣王張郃救祁連山. 夏六月, 亮糧盡, 軍還, 至於靑封木門, 郃追之. 亮駐軍, 削樹皮題曰, 張郃死此樹下. 豫令兵夾道以數千强弩備之. 郃果自見, 千弩俱發, 射郃而死.

  원희지(袁希之)의 한표전(漢表傳)에 말하기를,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출군하여 기련산(祁連山)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목우(木牛)로 군량(軍糧)을 운반하였다. 위나라 사마선왕(司馬宣王)과 장합(張郃)이 기련산(祁連山)을 구하러 나왔다. 여름 6월,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니 군대를 물려 청봉(靑封) 목문(木門)에 이르렀는데 장합이 추격하여 왔다. 제갈량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무껍질을 깎아내고는 크게 글을 써서 말하기를 “장합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 하였다. 미리 병사들에게 군령(軍令)을 내려 좁은 길에 수천의 강노(强弩)를 준비케 하였다. 장합이 과연 모습을 드러내자 천개의 노(弩)를 동시에 발사하여 장합을 쏘니 죽었다.

- 태평어람 권 291 -

  앞에서 제갈량은 변수를 통제하고 변화를 제압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는데, 공명과 맞상대하는 상대는 항상 그의 빈틈을 찾아내 변수를 만들어 기회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진창을 떨어뜨리지 못했을 때조차), 이러한 통제 능력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는 마지막 북벌에서도 증명되었다. 이때 제갈량은 위군의 견벽거수에 앞서가기 위해 '둔전 + 거점제압 - 위의 영향력 제어'로 나섰는데,*** 그러면서도 상대에게 어떠한 빈틈을 보이지 않아 사마의는 철저하게 수비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적군(촉한)이 자신의 영토에 들어와서, 주민들과 어울려 잘 지내며 둔전하는 것은 위군의 입장에서는 굴욕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 물론 여기서는 기회가 없을때 끝까지 버티며 기회를 노리는 사마의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다만 사마의는 제갈량의 천수가 다한 이후에야 기회를 잡았다.

*** 최선책이 통하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하여 차선책을 사용해도 수싸움에서 반드시 이기는 것이 공명의 계획이다. 북원 공략은 성공하지 못했지만(회전을 노린다 해도 불리한 상황에서 굳이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병력을 거두었다) 차선책인 둔전과 거점제압으로도 견벽거수를 상대로 계속 수싸움에서 앞서나갔다.


  위 명제 조예는 사마의를 '위험에 처하면 변화하는 방법을 만들어낸다' 고 평가했다. 이와 같이 기회가 없으면 그 빈틈을 찾아내거나 빈틈을 만들어내 기회를 얻는 사마의의 스타일은, 변화를 제압하는 제갈량의 스타일과 상극이 아닌가 한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 이겼다는 거짓

[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 (55) 북벌 2

  • 입력 : 2022.09.30 17:23:30
  • 최종수정 : 2022.10.07 14:07:34

제갈량 죽음 사마의 - jegallyang jug-eum samaui

제갈량은 왜 마속을 성급하게 기용했을까. 제갈량이 마량, 마속 형제를 좋아하고 의지한 이유는 그들이 동향인 형주 출신이어서가 아니다. 두 형제는 북벌의 의의와 제갈량의 초조함을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촉의 유일한 예비 자원인 이민족 통치에도 필요했다.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서는 관중 땅 근처에 기거하는 강족의 지원이 절대적이라고 판단했다. 장기적으로 강족을 촉나라 편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강족을 다스릴 유능한 총독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가 마속이라고 생각했고, 미래를 위해서는 하루빨리 통치의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속의 성급한 기용보다 더 심각한 실수는 따로 있었다. 제갈량은 1차 북벌 때 결정적인 2가지 우를 범했다.

첫째는 위나라와 장합의 신속한 대응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으로 선봉장 마속과 부선봉장 왕평의 지휘권 문제를 명확히 하지 못했다.

왕평은 촉 출신으로 글자도 알지 못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존재하던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글은 몰랐지만 군인으로서는 유능했다. 젊은 시절부터 수도에 파견 가서 군관으로 근무했을 정도로 군대 경험이 풍부했다. 마속의 실전 능력 부재를 걱정한 제갈량은 야전형 장군인 왕평을 마속의 곁에 붙여줬다.

하지만 유사시에 발생할 지휘권 문제를 사전에 조율해놓지 않았다. 평시에는 마속이 전권을 행사하더라도, 급박한 상황이 되면 왕평이 군 전체를 지휘하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제갈량은 이 과정을 생략했다.

기산 전투에서 마속은 허무하게 패하고 말았다. 물도 물이지만 부하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같이 고립됐던 왕평의 부대는 굳건하게 위치를 사수했다. 위군이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왕평은 부대를 보전한 채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마속은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돌아왔다.

장합은 즉시 강족 지역을 돌아다니며 ‘민심 확보’에 나섰다. 촉에 동조했던 강족 반란 지도자들은 무참하게 숙청됐다. 최초의 북벌, 최고의 기회가 허무하게 날아갔다. 강족은 더 이상 촉나라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후로 강족은 다시는 이때처럼 촉에 호응해주지 않았다.

제갈량은 스스로 직위를 낮춰 사죄했다. 마속은 억울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데 동의했다. 제갈량이 애지중지 키워오던 젊은 인재는 북벌의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졌다. 마속이 패배해서 잃은 병사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속이 날려버린 기회가 너무나 컸다.

▶읍참마속 후 얻은 새로운 인재 ‘강유’

제갈량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인재를 잃었지만 대신 새로운 인재를 얻었다. 강유다.

강유는 천수군 출신이다. 한족인지 강족인지는 애매하다. 다만 그의 집안은 강족 지역에서 자란 토착 집안이었다. 강유의 부친은 위나라에 충성하던 인물로 강족에 살해당했다. 유공자 자녀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위나라는 강유에게 천수군의 군관 자리를 하사했다. 그러나 촉군이 침공하고 강족이 봉기하자, 강유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나온 천수군 태수는 강유와 다른 관리들을 버리고 도주했다. 주인을 잃은 강유는 천수군으로 돌아왔다. 반란을 일으킨 천수군 토호들은 위나라 앞잡이라고 생각했던 강유를 받아주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진 강유는 촉군에 투항했다.

제갈량은 강유의 재능을 알아봤다. 마속과 비교하면 문치의 재능은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마속에게는 없는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강유는 진정으로 대담하고 재기발랄한 지휘관이자 전술가였다.

지휘관이나 경영자 중에는 의외로 보수적이고 모험을 싫어하는 스타일이 많다. 이들은 언제나 검증된 길로만 다니려고 한다. 이들에 비해 강유는 대담하고 창의적이었으며, 발랄하고 모험적인 전투의 가치를 알았다. 이민족인 강족을 다스릴 능력도 어찌 보면 마속보다도 훌륭했다. 그가 강족의 땅에서 성장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제갈량은 강유가 투항하자마자 중호부대라는 정예부대를 맡겨 대규모 부대를 운영하는 경험을 쌓게 했다. 마속을 성급하게 등용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1차 북벌에는 실패했지만 제갈량은 1년이 지나지 않아 관직을 회복했다. 북벌의 추진력도 상실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이 이전보다는 더욱 어려워졌다. 위나라는 위나라대로 방어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사천, 한중 분지의 산곡에서 촉의 북벌, 위의 침공이 번갈아 이뤄졌다.

전쟁의 양상도 뻔하게 흘러갔다. 촉은 관중으로 들어오려고 길목을 바꿔가며 공략했지만, 위나라가 관중 분지 입구에 설치한 군현, 진창·장성·오장원 같은 지역을 좀체 돌파하지 못했다. 입구까지 간신히 왔다가 돌아가는 형국이었다. 촉의 약점은 사천 분지의 험한 산길과 군량 수송의 어려움이었다. 관중 입구에 도달해도 10일, 3주 이상 전투가 힘들었다. 위군이 대비하고 있는 요새를 돌파할 수가 없었다.

위나라는 인재와 자원이 많았다. 관중의 입구를 틀어막을 정도의 수비 병력과 인재는 널렸다. 명장 장합이 건재했고, 소설에서는 조금 평가절하됐지만, 곽회 같은 장수는 거의 평생을 이 지역에서 복무하며 수많은 공을 세웠다. 반면에 촉은 군량이고 병력이고 한쪽을 집중 공격할 정도의 역량밖에 없었다. 그러니 양동, 기만 등 별별 전략을 다 써도 통하지가 않았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촉군이 관중 입구 기산이나 오장원으로 도달할 때쯤이면 위군은 준비가 돼 있었다. 곽회는 촉군의 여러 번의 기만 작전을 능숙하게 간파해냈다.

사실 위나라는 위나라대로 고충이 있었다. 방어전이라고 해서 수비만 할 수는 없다. 강족은 언제 다시 봉기할지 모른다. 관중을 넘어 촉나라로 침공해 들어가면 전장의 우위가 단박에 바뀌었다. 가끔씩 촉군이 철수할 때 추격해 들어가보기도 했는데, 번번이 촉군의 매복과 역습에 걸렸다.

위연, 왕평 등 촉의 맹장들은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장합이 촉나라 땅으로 추격해 들어왔을 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를 못한 장합이 전사했다. 위의 명장 중 명장이던 장합이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삼국시대에 위나라 최고위급 장수로 전선에서 전사한 사람이 하후연과 장합인데, 두 장수 모두 촉과의 전쟁에서 생명을 잃었다. 또 다른 명장 곽회도 침공전에서 패배했고, 사마의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여러 번 크고 작은 패전이 있었다.

관중으로 돌입해 들어오려는 촉과 이를 저지하고 촉의 공격 능력을 분쇄하려는 위의 공방전은 이렇게 일진일퇴의 싸움으로 지쳐갔다. 이 긴박감 넘치는 공방전을 견디지 못하고 제갈량이 쓰러졌다. 234년 마지막 북벌 중, 진창형(현재의 바오지시)을 공략하던 때였다. 이렇게 해서 제갈량의 북벌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소설에서는 이미 죽은 제갈량이 추격해 오는 사마의를 사전에 안배한 계략으로 격퇴해서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격퇴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전해주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갈량 죽음 사마의 - jegallyang jug-eum samaui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8호 (2022.10.05~2022.10.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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