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55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4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5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10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12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13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주일예배

이사야의 복음 - (21) 목마르신 가요?

작성일
  • mp3 다운받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 URL 복사하기

본문

말씀본문 (이사야 55:1-3)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예언의 일차적 대상으로 바벨론에서 포로된 삶을 살고 있는 동족들을 향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그들과 그들 자손의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목말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점진적으로 이사야서의 마지막 대목을 향하면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열방의 모든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만민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 은혜의 초대(1절)를 전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든 목마른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가 베풀어집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1. 목마름의 본질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목마름의 본질은 세속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마름의 본질은 성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것,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경청이 해갈의 시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목마름에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주앞에 나아와 그의 말씀을 경청하라고 초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가치를 지향하기에 인생의 목마름의 해답은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고 살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만 있다고 증거합니다.

3. 다윗과의 영원한 언약이 바로 목마름의 해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할 언약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그 언약은 왕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원하신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들에게 목마르지 아니할 행복과 은혜를 받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이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하나님의 처방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의 은혜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회심의 시간
이사야 55:1~9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저에게는 전하는 지혜를, 여러분에겐 듣고 깨닫는 지혜를 주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사순 절기의 시작은 ‘재의수요일’로부터 시작합니다. 재의수요일로부터 40일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는 부활절이 시작되는 이유는 40일이라는 시간의 상징성은 사순절 첫째 주일과 둘째 주일에 나누었던 ‘침묵의 시간, 고난의 시간’과 연결됩니다. 오늘은 ‘회심-회개(metanoia)의 시간’으로서의 사순절기를 묵상하면서, 회심이 우리 삶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메타노니아’는 ‘메타노에오(μετάνοέω)’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개심, 회개, 돌아섬, 후회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 라는 단어와 연결되는데 ‘죄’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진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마르티아’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진리를 맞서지 말고 진리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오늘 우리가 읽은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는 내용을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순우리말은 아니지만 ‘悔改(회개)’라는 단어는 뉘우칠 ‘悔(회)’와 고칠 ‘改(개)’자로 짜여있습니다. 회자의 구성은 마음 ‘忄(심)’과 매양 ‘每(매)’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로부터 자식을 많이 낳은 어미만이 아름다운 비녀를 꽂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자는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물이 많은 곳은 ‘海(해)’이고, 열매가 많이 열리는 나무는 ‘梅花(매화)‘입니다.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그리고 ’改(개)‘자는 자기 ’己(기)‘와 회초리로 친다는 의미의 칠 ’攴(복)‘자로 짜여졌는데, 여기서 ’己(기)‘는 올바르지 않고 구부러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생각, 인간의 생각‘은 구부러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 놓여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회초리나 망치로 두들겨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부러진 것을 바로 피려면 한 번 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여러 번 쳐서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뉘우쳐 고치는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해서 바로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두질이나 담금질을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마르티아(죄)‘에 거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반복해서 ’메타노니아(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어떤 분은 ‘단 한 번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오해하여 ‘단 한 번의 회개’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과 그 길을 지속해서 걸어간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는 에덴의 동쪽으로 상징되는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에덴 동쪽으로 상징되는 이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에덴 동쪽에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든지 탐욕과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이러한 유혹 앞에서 진리의 길을 떠나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에 빠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이런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빛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힘써 우리 자신을 담금질하고 무두질하듯 회초리를 들어 쳐서 구원의 길 끝에 있는 과녁을 향해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가리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삶이라고 말하며 ‘회개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이사야서 55장의 시대적인 상황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력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이사야서를 서로 보완해주는 한 권의 책으로 보지만, 1872년 독일신학자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이 이사야서를 제1이사야(1~39), 제2이사야(40~55), 제3이사야(56~66)로 구분한 이래, 신학계에서는 100년이 넘도록 이 구분법에 따라서 이사야서를 읽었습니다. 베른하르트 둠에 의하면, 이사야서 중에서 가장 먼저 문서화된 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2이사야’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제2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자신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고 왔던 제국 바빌론이 페르시아(바사)에 의해 멸망하고 제국의 주인이 바뀐 주전 538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제국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자신들은 여전히 포로지에서 살아가던 시대입니다. 538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이 “포로민들은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 선조들의 신을 섬길 수 있다.”는 일종의 종교자유 선포(고레스 칙령)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민이긴 했지만, 상당한 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고, 많은 부분 바벨론화되었기 때문에 고레스 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권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이는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제2이사야서’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55장에는 바렐론 유수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길은 제2의 출애굽 사건이며, 귀환하는 자들에게 엄청난 축복이 임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중심 테마입니다.

■ 돌아감의 의미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포로민이긴 했지만, 그간 바벨론에서 이뤄놓은 지위를 다 내려놓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망설여지고 두렵기만 합니다. 이국땅이긴 했지만, 많게는 50여 년 동안 애써 이룩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의 명령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회개’가 입술로만 하는 것이라면 그리 어려울 것이 없겠지만,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오던 삶과 온전히 결별하는 것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구부러진 삶을 바로잡기 위해 반복해서 자신을 쳐서 담금질해야 하는 과정이라면, 뜨거운 풀무질로 한껏 뜨거워진 불을 드나들며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리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두질과 담금질을 통해서만 새롭게 변화되는 길이 열리는 것처럼, 돌아감이라는 과정, 즉 회개의 과정 없이는 새로운 삶을 열어갈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초청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하나님은 “목 마른 자들아, 돈 없는 자들아 오라. 돈 없이 값없이 나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십니다. 이 초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습니다. ‘목 마르고, 돈 없는 현실’ 그것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닙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목 마르고 돈 없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열심히 수고는 하는데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 죄(하마르티아)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수고는 하지만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수고하므로 죄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면서 은을 팔아가면서 죄를 지으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열심히 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방향이 올발라야 천천히 한 걸음씩 가도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길을 걸어감으로 인해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어디로 돌아갑니까? 5절 말씀에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형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창조하신 본연의 삶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 회심의 시간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이 돌아감의 시간, 그것이 바로 ‘회심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으로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나아와 들어야 합니다. ‘나아옴과 들음’ 이것은 1절과 3절에서 거듭 강조됩니다. ‘듣는 것’이 중요한데 들으려면 ‘귀 기울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옴과 들음’은 한 짝입니다. 나오긴 했는데, 듣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긴 했는데, 세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기도 하는데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고 기도를 끝내버린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아옴과 들음’을 통해서 회심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인간은 한계성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한계성을 인정할 때 ‘절대자’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분들은 인간이 만든 우상을 찾습니다. 절대자가 아닌 자신보다도 못한 존재를 찾습니다. 자신이 만든 우상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대로 ‘은을 달아주면서’ 자신의 한계를 이겨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상을 아무리 찾고 불러도 그들은 대답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절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생각에 맞춰야 합니다. 회심이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틀려서가 아닙니다. 내 생각도 나름의 일리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6)”하신 기도를 우리는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그 잔을 꼭 예수님께서 돌리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죄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은 그냥 잡다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관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뜻도 있긴 하지만(내 뜻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춤으로 우리는 회심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 회심의 시간이 주는 유익함

이사야 55 1 9 - isaya 55 1 9

회심은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개심, 회개, 돌아섬, 후회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을 꼭 종교적인 행위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삶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회심’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회심에 신앙적인 행위가 더해지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은혜의 삶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의 시간은 유익한 시간입니다.

이 유익한 시간은 일회성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적이어야 합니다. ‘회개’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풀면서 구부러진 것을 바로 피려면 한 번 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여러 번 쳐서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반복의 과정은 운동선수들이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서 인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회개한다는 인식 없이 회개하고, 신앙적인 행동을 한다고 인식하지 않음에도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심의 시간은 우리를 이런 높은 신앙의 경지로 안내합니다.

이것이 회심의 시간이 주는 유익함입니다. 사순 절기에 ‘회심의 시간’을 꼭 가지시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넓혀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