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방한 중에 이래저래 하여 막내며느리인 제 각시가 제수를 준비하고 막내아들인 제가 제문을 쓰고 할아버지 제사를 모셨습니다. 그러다 족보 공부를 하여 고조부 증조부가 제 할아버지 6살 11살 때 일제에 독살 참살을 당하신 걸 발견하고 고조부가 남기신 토지중 문중이 착복하고 남은 토지도 찾아 형들이 문중 일에 열심인 후손이 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후손 없는 족보에 양자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구한말 일제시기에 양자 입적된 족보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애국지사 안중근은 동학군을 토벌했던 분이고…. 알면 알수록 한국인이 가지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오매불망 사랑이 혹시 그 어떤 자들의 이득을 위한 농간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 혹시 친일파 중에도 이런 삐딱선의 사고가 친일파로 오해받고 있는 자는 없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요즘 반일 분위기에 제대로 짱돌 하나 던지신
이순실 선생의 담벼락 글을 보며 잠시 우리를 돌아보면 어떨까 합니다. 아래는 제가 갈무리해온 이순실 선생의 글입니다. (갈무리해온 이
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한 김덕령 장군에게는 왜적과의 싸움 외에도 유명한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픽댓] KBS 사극 '추노'의 한 장면 [사진 KBS] 이렇게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일을 추노(推奴)라고 했습니다. KBS 드라마 ‘추노’를 통해서도 잘 알려졌죠. 실제로 조선에선 노비가 도망치고, 이를 잡아들이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심지어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삼국~고려시대 노비는 인구의 10% 이내 노비는 남성인 노(奴)와 여성인 비(婢)를 합친 단어입니다. 일본 도오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 중창(中倉)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촌락에 대한 기록문서 [중앙포토] 입역노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주인의 명령에 따라 노동력을 바치는 노비인 반면에 납공노비는 1년에 정해진 액수의 현물을 바치는 노비였습니다. 그래서 납공노비는 주인집이 아니라 따로 주거지를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에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서두에 조선시대엔 인구의 약 40%가 노비였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양천교혼으로 노비를 늘린 퇴계 이황 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가장 큰 요인은 양천교혼(良賤交婚)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조선이 들어서면서 엄격했던 양천교혼의 금기가 차츰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비를 가진 양반 입장에선 노비와 노비를 결혼시키는 것보다는 노비와 양인을 결혼시키는 것이 노비를 늘리기가 쉬웠기 때문에 이를 적극 권장했던 것이죠. 양천교혼은 노비와 노비가 결혼할 때보다 더 많은 노비를 획득할 수 있다. 양반들이 노비들의 양천교혼을 유도한 것은 성리학의 대학자로 알려진 퇴계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퇴계 이황 [중앙포토] 이황 역시 300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린 지방 지주였습니다. 그는 생전에 학문 못지 않게 재산 증식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대부 중 한 명이었죠. 노비를 줄이려는 왕과 늘리려는 사대부 그런데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노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일부 왕들은 노비 숫자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감독 허진호)에서 세종대왕(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이 과학기기를 궁리하는 장면과 촬영 현장 모습이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하지만 노비가 줄자 양반
관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죠. 이들은 종부법의 실시 때문에 ‘여성 노비들이 마음대로 양인 남성에게 시집을 가며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구실을 내세워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이후 1485년,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조선의 노비 수는 다시 급증하게 됩니다. 즉, 병역과 세금을 담당할 양인의 숫자는 다시 감소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1669년 현종 때 이를 수정하자는 목소리가 일어납니다.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남성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양인으로 하자는 것이죠. 즉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입니다. 이 제도는 당시 치열했던 붕당 정치에 따라 운명이 왔다갔다 합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 [연합뉴스] 당시 이 법안을 찬성했던 것은 서인ㆍ노론이고, 반대했던 것은 남인입니다. 그래서 각 정파의 부침에 따라 종모법이 시행됐다가 폐지됐다가 하는 것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다가 영조 때인 1731년 종모법이 확정됐고, 이는 이후 불변의 법령으로 굳어졌습니다. 이후 순조 1년인 1801년엔 공노비가 해방됐고, 1886년엔 노비세습제가, 1894년엔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 노비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노비제의 유산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었습니다. 조선에서 유난히 노비 숫자가 증가하고, 또 양반 관료들이 이를 결사적으로 막았던 것은 고려말부터 증가했던 대규모 농장을 유지하는데 노비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퇴계 이황의 경우만 해도 자녀들에게 약 36만평 가량의 농토를 남긴 지방 지주였습니다. 지난주 소개한 미국 흑인 노예제는 면화나 담배 같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도입하면서 시작됐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조선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려 후기 원나라를 통해 모내기 등 선진농법이 도입되면서 농작물 생산력이 높아졌고, 권력충은 대토지 소유와 노비 확보에 많은 열을 올리게 됐습니다. 영화 '노예 12년' [엔터테인먼트 원] 조선의 노비제가 유독 비판받는 이유는? 사실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한 나라입니다.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도 노비가 있긴 했습니다만 중국의 경우엔 송나라 때 법으로 철폐됐고, 일본도 전국시대를 거치며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이후에도 노비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채무 관계라든지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적인 영역에 속했고, 국가 차원에서 노비제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송나라 휘종 시기 궁중생활과 미식문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문회도(文會圖)’의 일부. 왕과 귀족들의 연회 장면. [사진제공=교양인] 그래서 몽골 간섭기엔 고려 정계의 실력자였던 활리길사(闊里吉思, 고르기스)라는 몽골 관리가 노비제 철폐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세계 제국을 다스리던 몽골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려의 노비제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막아선 것은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이것은 조상 대대로의 풍속입니다. 천한 무리가 양인이 되도록 허락한다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됩니다. 쿠빌라이칸은 고려의 풍속을 존중해주기로 했으니 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해 결국 무산됐습니다. 한편 조선의 노비가 노예냐, 아니면 노예와 다른 존재였냐를 두고도 학계에선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이 문제는 서양 학자들과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 시각이 다릅니다. 제임스 팔레 미 워싱턴대 교수는 “인구의 30%가 노예라는 점에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Slavery Society)”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 학자들은 노비가 양인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일정량의 현물만 바치면 되는 납공노비가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흑인노예나 혹은 중국과 일본에 있었던 노예보다는 자유로운 존재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렇더라도 양반 관료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강화 유지된 노비제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 이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성군으로 평가하는 세종이나 정조도 넘기 어려운 난제이기도 했습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