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한자 어원 - haengbog hanja eowon

  ‘행복(幸福)’은 “1. 복된 좋은 운수 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해요. 이 한자말은 거의 둘째 뜻으로 쓰는데,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함’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만족(滿足)’은 “1. 마음에 흡족함 2.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함”을 가리킨다 하고,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라 하며, ‘흐뭇함’은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러움”이라 해요. ‘흡족(洽足)’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넉넉하여 만족함”이라고 합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온 뜻풀이를 하나하나 살피면 모두 겹말풀이에 돌림풀이입니다. ‘행복 = 만족 + 기쁨 + 흐뭇함’이라는데 ‘행복 = 흡족/충분/넉넉 + 충족/흐뭇함/흡족 + 흡족/만족’인 얼거리요, ‘흡족 = 넉넉/만족’이라 하니 끝없이 돌고 도는 말풀이가 될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채 사느라 이 한자말을 제대로 풀이할 생각마저 못한다고 할 만할 수 있어요. 즐거울 적에는 ‘즐겁다’라 하고, 기쁠 적에는 ‘기쁘다’라 하며, 흐뭇할 적에는 ‘흐뭇하다’고 하면 됩니다. 때로는 ‘좋다’나 ‘재미나다’ 같은 낱말로 손볼 수 있습니다. 2017.7.19.물.ㅅㄴㄹ

전통적인 한국인의 삶을 그 밑바탕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본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복으로 보아왔느냐 하는 복의 내포적·외연적 의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복을 누리게 된다고 믿어왔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심층적인 행동 동기나 한국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복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용을 살펴보면 ‘어떻게’를 들추어주는 시사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복을 빈다.’라고 말한다. 기복·축복·초복(招福) 등의 한자숙어도 같은 뜻이다. ‘발복(發福)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운이 틔어 복이 닥친다.’는 뜻이다.

앞에 든 말투는 사람이 기도나 축원을 함으로써 복을 불러들인다는 것이요, 뒤의 말투는 복이 스스로 때가 되어 찾아온다는 뜻이다.

전자에 있어선 복은 사람의 행위에 타동되는 목적어가 되고 있고, 후자에 있어선 복이 스스로 자동하는 주어가 되고 있다. 한쪽에는 ‘인위’에 의해서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기대가 함의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한쪽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운명’에 의해서 복은 ‘주어지는 것’이라는 해석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말에서 복에 관련된 여러 어용의 실례를 보면 복을 어떻게 누리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이해주는 위와 같은 인위론과 운명론이 다 같이 무성함을 알 수 있다. 먼저 운명론적인 어용의 실례부터 살펴본다.

복이란 사람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나타난다는 뜻의 한자숙어로는 복분(福分)주 03)·복상(福相)주 04)·복수(福數)·복운(福運)·복수(福手) 등이 있다.

복이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다복하게 혹은 박복하게 타고난다고 믿는 이러한 운명론의 또 다른 표현이 우리말의 팔자타령이다.

팔자(八字)는 사람이 출생한 연·월·일·시에 해당하는 간지(干支)의 여덟 글자로, 바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의 이 간지팔자가 그 사람의 복·화·생·사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부모가 반 팔자’, ‘팔자도망은 독 안에 들어도 못한다.’는 속담은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린다는 팔자타령이다. ‘쪽박을 쓰고 벼락을 피해’,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팔자는 못 속인다.’라는 속담은 팔자도망을 꾀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그의 불가함을 재강조하는 팔자타령이다. 고전문학작품 가운데에는 복의 운명론을 주장하는 구절들이 많이 눈에 띈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보면 “사람이 세상에 나매 수요장단과 화복길흉은 천정(天定)한 수니……” 또는 “매사가 다 천정(天定)이요 인력으로 못하니……” 등의 대목이 보인다. 이른바 화복천정설(禍福天定說)을 가르치는 말귀이다.

「인현왕후전」에도 “화와 복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또는 “예로부터 홍안박복과 성인의 궁액(窮厄)주 12)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터인즉……” 등의 대목이 눈에 띈다.

서민문학에서는 「흥부전」의 “애고 답답 설움이야, 이 노릇을 어찌할꼬, 어떤 사람 팔자 좋아……부귀공명 누리면서……” 하는 흥부의 신세타령이 화복천정설의 직설적인 표현이다.

복에 관련된 어용이나 구문(構文)에는 복의 운명론만이 아니라 인위론을 시사해주는 실례도 많이 있다. 예컨대 ‘복선화음(福善禍淫)’이라는 말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이, 궂은 사람에게는 화가 돌아간다는 말이다.

착한 사람이 된다,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인위의 영역이라고 본다면, 운명과 의지의 관계는 제로·섬의 관계가 아니라 ‘인사(人事)’가 어느 정도 ‘천명(天命)’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여기에 표백되어 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고 하는 속담도 하늘이 복을 내리는 성사에 사람의 모사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복의 표상에 있어 일반적인 특징은 복이 설혹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할 경우에도 그러한 하늘의 뜻이 맹목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다. 복을 주고 화를 주는 것이 눈이 어두운 운명의 자의(恣意), 무동기의 또는 무상(無償)의 조화(造化)가 아니라는 믿음이다.

한국적인 복 사상의 밑바탕에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복을 받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인복과(福因福果)’라는 말이 그러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에서 ‘복인’은 좋은 일, 착한 일을 가리킨다. 좋은 일이 원인이 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 복인복과이다.

아마도 이것은 복 사상에 미친 불교의 영향이라 추측된다. 이처럼 화복을 맹목적인 하늘의 무동기·무상의 소여(所與)주 13)가 아니라 인위의 행실에 대한 인과응보로 보려 했던 믿음은 복의 절대적인 운명론의 지배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윤리적·실천적 동기 부여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복이 있고 없음이 비록 팔자소관이요 천정의 운수라고는 하나, 착한 일을 되풀이해서 복인을 쌓게 되면 언젠가는 복과가 돌아와서 이른바 ‘팔자고침’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사나운 운수를 어려운 일로 대신해서 면제받는다는 이른바 ‘팔자땜’이란 말에도 표백되고 있다. 복전(福田)·팔복전(八福田)이란 개념도 복인복과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복전’은 불(佛)·법(法)·승(僧)의 삼보와 부모를 공양하고 빈자를 불쌍히 여기는 선행의 결과로 복덕이 생긴다는 뜻에서 그 복인이 되는 삼보·부모·빈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팔복전’도 역시 불가에서 나온 말로 복을 심는 팔인(八因)이 있는 밭, 곧 불전(佛田)·성인전(聖人田)·승전(僧田)·화상전(和尙田)·아자리전(阿闍梨田)·부전(父田)·모전(母田)·병전(病田)의 여덟 가지 밭을 가리키는 말이다.

복인을 복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부처를 공양하면 밭에서 먹을 것을 거두어들이듯 복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복을 밭에서 거두어들인다는 이러한 생각은 옛글에 있어 복을 곡식처럼 ‘심는다’, ‘기른다’는 표현, 또는 곡식처럼 ‘아낀다’는 표현을 낳고 있다.

「한중록」에는 “아이를 부디 잘 기르되 의복을 검소히 하는 것이 복을 아끼는 도리라.”, “검박을 숭상함은 재물을 아낌이 아니라 복을 기르는 도리오이다.”하는 말투들이 보인다. 화복은 이렇게 보면 한갓 팔자의 소관이 아니라 복을 심고 기르고 쌓고 아끼는 사람의 행실, 사람의 성품에 무관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행실, 어떠한 성품이 복과를 가져다주리라고 기대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복을 ‘어떻게’ 누리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주는 열쇠가 될 것이다. 고전문학에서 이에 관련된 구체적인 예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자고로 후복(後福)할 사람은 초년고생을 겪게 되는 법이라.”, “모친께서는 첫 복록을 일가 친척에 골고루 나누어주고 집에는 한 되의 쌀도 남겨두지 않으셨으매……”, “아름답고 극진하니 나라의 복이라.”,

“말씀을 더욱 삼가서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검박(儉朴)주 14)하는 것이 복을 아끼는 도리라.”, “이것은 왕비로서 드문 일이니 저희들 평생 조심하고 부지런함을 힘입어서 길이 복을 누릴 듯이 기특하게 여겼더라.”, “이것이 모두 당신의 본질이 지극히 착하시기 때문에 자손이 대신하여 복을 누리는 줄 알고 또한 심중에 위로 받고 기뻐하더라.”(이상 한중록).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어진 일을 하여도 복을 못 얻을까 두려워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특한 일을 하여 어찌 복이 올까 믿을 수 있겠습니까.”(계축일기). “원컨대, 세 자매는 자녀를 교훈하여 덕을 쌓고 복을 심어 후손까지 영화가 미치게 하소서.”(인현왕후전). “한림 상공은 오복이 구비한 상이요, 겸하여 유씨 대대로 적덕이 많사오니……”, “이러므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앙화(殃禍)주 15)를 받는 법이로다.”(이상 사씨남정기).

이상의 몇 가지 예를 보더라도 이미 복을 누리게 될, 또는 앞으로 복을 누리게 되리라 기대되는 사람의 성품과 행실이 정형화되어 밝혀지고 있다. 우선 ‘후복’·‘초년고생’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찰나주의·순간주의적인 향락에서 벗어나서 복과라고 하는 복인의 보상을 뒤로 미룬다는 금욕적·자기절제적 동기가 함의되어 있다.

그리고 이처럼 ‘미래’로 유예된 내지는 연기된 보상을 위해서 ‘현재’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름답고 극진함’이요, ‘삼감’이요, ‘검박’이요, ‘조심하고 부지런함’이요, ‘참함과 어진 일’이요, ‘덕을 쌓는 것’ 곧 적선(積善)·적덕(積德)이다. 이 역시 금욕적·자기절제적인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