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 황씨 친일파 - pyeonghae hwangssi chin-ilpa

안동문화권은 민족독립운동에서 정신적 정통성 지녀 신도청 구심지 가능
길 위에서 길을 묻다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초대관장

2007년 8월 출범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지난 7년간 연구와 출판, 전시와 연수교육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해 왔다. 이 성과를 계승해 4년 전부터 도 단위 기념관으로 승격, 확장된다는 방침이 정해졌고, 지난 1월 정식으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정됐다.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가장 강렬하면서도 끈질긴 역사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아낸 한민족의 독립운동역사. 그 가운데 경상북도는 한국독립운동사의 발상지였고, 독립유공자와 자정순국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안동문화권 독립운동에서 경상북도 독립운동의 계승과 선양사업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는 김희곤 초대관장(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을 만나 그 의의와 목표를 들었다.

독립운동사에서 선열들이 보여준 소통과 통합정신 전파
나만의 이익 추구에서 무엇이 옳은가로 도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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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초대관장(현 안동대 사학과 교수) 


- 2000년 당시『안동의 독립운동사』책을 읽었다. 그 당시에 안동문화권에서의 근현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역량이 크다는 걸 느꼈다. 정말 치열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안동권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조선시대 당시의 사건이나 인물의 행적,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근대이전의 역사와 인물에 더 천착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안동문화권 어르신들의 관심이 주로 퇴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모든 문중마다 퇴계를 중심으로 계승하는 국학인 것 같다. 안동댐으로 인해 5,6백년 된 마을이 많이 수몰됐다. 그 강변마을에는 전통문화라는 것이 많았을 게다. 그 마을이 지닌 전통문화가 무엇이었을까? 밥은 굶더라도 쌀 팔아서 책을 사고 아이에게 글 읽히게 했을 것이다. 이 분들은 무엇이 정통이고 도의냐, 옳은 삶이 무엇일까 늘 따졌을 것이다. 영남 남인계열이 2백년 넘게 중앙집권세력에게서 완전히 배제된 세월이 있었다.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선 집단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것이 학맥과 혼맥이다. 지역사회 유림으로서 정권에 당장 도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저그룹으로서 집권세력에 대해 상소를 통해 견제발언하고 계속 옳은 걸 추구해 왔던 세월이었을 것이다.

일제침략기를 맞아 유림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51년간의 독립운동역사에서 전반기에는 전통보수와 계몽진보로 나뉘어 활동을 했다. 3.1운동 이후부턴 새로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졌다. 1919년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안동문화권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분들 중에는 소위 좌쪽이 많았기 때문에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해방 후 분단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남쪽은 우파만 남게 되었고, 좌파는 이야기를 못하게 됐다. 물론 좌파가 모든 정통성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식민지시대에는 독립과 해방이 최대과제이자 목표이다. 그 길로 간 분들은 색깔만 다를 뿐이었는데 분단이후 하나의 색깔만 인정받고 다른 쪽은 배척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은 시기적으로 멀어 조금만 얘기되는 선이었다. 독립운동 전반부에 있었던 이야기는 멀게 느껴졌고, 후반부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이건 안동문화권만 그런 게 아니고, 남쪽 전체의 상황이었다.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우파는 묻혔고 남로당 계열은 숙청당했고 개인숭배로 확대해 왜곡이 이루어진 것이다. 분단이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독재권력이 들어서서 역사왜곡이 진행됐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균형잡히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이 진행된 나라들 중 특히 분단된 나라가 겪은 보편적 일들 중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안동독립운동사 이야기는 첫째, 조상을 기리는 의식은 강한데 주로 퇴계선생과 그 제자들에 대한 계보와 맥을 잇는데 관심이 집중돼 왔다. 둘째, 근현대사를 얘기하는 것에 있어서는 분단이 갖고 온 권력독점이 장애가 됐고 그 장애로 인해 이 시대의 역사를 끄집어내는 데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경북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 확장을 계기로 활동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안동에서 경북으로 확장된 것과, 또한 도청이전의 정당성 등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제가 1996부터 13개월간 미국 하버드대 방문학자로 갔을 때 베트남 농촌의 변화모습을 연구해 발표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1992년부터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진행되고 있는 때이다 보니, 베트남의 사례에 상당히 관심을 갔다. 베트남도 식민지를 겪었지 않느냐. 당시 제국주의 국가는 열 개도 안 되었다. 나머지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식민지를 경험했고 다 독립운동을 펼쳤다. 안동지역의 내앞마을을 유교문화권의 식민지해방운동이라는 용어로 개념화시켜 특화시킬 수 있겠다 싶었다. 나중에 마을단위의 엄청난 관광로드맵으로 까지 가능하다고 예측됐다. 이런 과정에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위치도 내앞마을로 선정이 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역사성을 갖고 봐야 한다. 안동지역 어느 마을 하나를 넘어 안동문화권의 독립운동사에서 나타난 특징을 알게되었다. 만주로 망명한 평해황씨나 법흥동의 와룡 도곡사람들이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그런데 김관용 도지사가 ‘경북전체가 독립운동의 발상지이고, 자정순국자 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가 많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큰 틀에서 보면 안동을 경북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도청이 안동으로 오는 거 싫어하는 분위기가 높았다. 수긍하기 싫다는 게 현실이었다. 그럴 때 안동이 조선의 유학메카이듯, 이를 계승해 근대와 현대를 넘어오는 민족수난기에 민족적 정통성을 안동독립운동사에서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안동이 경북전체의 독립운동사에서 정신적인 핵이다. 정신적사적으로 정통성을 갖듯 도청 또한 안동으로 오게 하는데 명분과 설득력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에 근거한다. 경북지역의 독립운동유공자가 2060명인데, 안동이 351명이다. 구미선산이 50명 이하다. 경주도 50명이고, 영천은 35명이다. 나라가 무너졌을 때 다수의 선각자들이 민족의 양심을 지킨 곳이다. 중세시대의 정통성 뿐만 아니라 근대 민족수난기에 최고의 가치를 가진 지역이기에 안동이 경북의 수도일 수 있다는 얘기가 가능해진다. 도청이전의 정신사적 배경이 더 튼튼해지는 것이다. 나아가 경북의 독립운동유공자가 2060명인데 경남, 전남, 충남, 경기도가 9백명에서 1천명이다. 거의 두 배의 차이이다. 자정순국자 또한 총70명인데, 경북이 18명이고 이 중에서 안동이 10명이다. 이분들의 의리정신이 얼마나 강한가를 수치로 보여주는 것이다. 앞으로의 제 목표는 세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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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적으로 유교문화권 나라의 특출한 독립운동 경험을 얘기했다. 백여 년 전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활동이 이야기로 나돌기 시작했다. 바로 대중적 확산이 중요하다는 점인데, 앞으로 기념관의 사업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어떤 의의가 있을까?

“경북전체의 유적을 탐방하는 테마관광코스를 만들고 알리려고 한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독립운동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고 있고 확산되고 있다. 최근 의외로 안동시민들 입에서 독립운동 이야기를 하는 걸 많이 듣는다. 안동도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 독립운동유적해설사 과정을 이수한 분들이 벌써 250명 배출됐는데, 이들의 파급력이 굉장하다. 아이들도 해마다 교육을 받고 있다. 이분들의 스토리들이 표출되고 있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지을 때 제 목표를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조상자랑 알고 합시다. 정말 조상이 자랑스럽거든 입을 다물고 이제는 당신 차례다.’ 그래도 계속 자랑을 하면 이제는 당신은요? 그래서 당신은요? 그렇게 묻는다. 당대의 나부터 우리가 똑바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바로 내가 할 차례라고.....

어느 시대나 그 시대과제가 있다. 절대빈곤사회는 이를 극복하는 것이고, 독재사회에서는 이를 넘어서는 민주화이다. 그 길로 가는 게 시대정신이다. 뉴라이트 처럼 해선 안 된다. 일제타협한 사람이 99%라고 해도 그들이 옳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시대정신이 될 수 없다. 1%가 독립운동을 했으면 그들에게 정통성이 있다. 지금은 우리 차례이고, 이 사회의 역사적 시대적 과제가 뭔가. 그걸 해결하고 앞장서는 것이다. 역사의 평가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제가 해설사 교육 마지막 강연 때 말하는 것이 있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편 갈라 집권하려고만 하고 있고, 계속 편이 갈려 분규가 지속되고 이기주의가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편을 가르지 않아야 하고 비록 편이 갈렸으면 이를 조화시키고 소통하고 통합시키는 것이 과제라고 말한다. 그 길로 가야 한다. 나를 낮춰 봉사해야 한다. 나누어지지 말고 합쳐져야 한다. 그리고 유인식과 권오설에게서 배워야 한다. 얼마 전 청주에서 교장단 350명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아이들에게 뭘 가르칠 것인가.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편으로 나누면 교육은 소통과 통합해서 살아가는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친일적 잔재와 의식은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51년간의 안동문화권 독립운동과 항쟁의 유산을 갖고 있다. 이 속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로 현재의 삶을 풀어나갈 것인가. 교훈은 뭔가.

“과거시기 친일파 문제는 굉장히 어두운 우리들의 과거이죠. 그런 면에서 분단이후에 들어선 정권이 역사의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뼈아픈 일이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분단이 우리들에게 온전하지 않은 불구의 몸을 갖도록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외세열강의 남북점령이 어떤 정권을 만들었느냐,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우리의 피부로 바로 연결되는 이승만 정부가 장기권력독점을 했기 때문에 정상적 민주주의 발전이 가로 막혔다. 그 정권이 친일세력을 정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토양 위에 성립했으니, 우리 역사가 이지러진 역사, 불구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다만 일제강점기이자 항일투쟁기를 마치고 우리가 홀로서야 할 때, 조선총독부의 행정적 시스템이 미국 행정시스템으로 갈아 탔다. 그 과정이 1950년대에 이뤄진 일이다. 기독교가 미군정의 영향 속에서 절대적으로 확산된 것처럼 모든 사회가 미국화되었다. 일본식 예술에서 미국식 예술로 변하듯, 북한 또한 춤도 소련화되었고 아주 이질화 됐다. 그 속에서 토목 수리 건축 등 기술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조선총독부 산하 기술자들이 그대로 들어서죠. 그런데 이들에게는 정신적 친일의 죄를 잘 안 물어요. 결국 우리가 묻는 건 대부분 정신적 분야이죠. 그런데 불행히도 남쪽은 그것을 안고 그 토양 위에 서다보니 심각한 문제가 됐죠. 뒤로 오면 올수록 정리가 돼야 하는데 오히려 악화가 됐고. 심지어 군대 안에서 만군이나 일본군 출신이라야 승진하니까 광복군 출신을 숨겨야만 승진이 되고 존재할 수 있었죠. 이렇게 역사가 뒤집어진 비극이 만들어졌다. 요즘대로 표현하면 비정상화의 정상화가 이뤄진 거죠.

세월이 지나도 전혀 치유가 안됐기 때문에 이후에 그것을 정치적으로 극복하고 치유하자고 했었죠. 장기적인 독재권력 시기가 끝나고 아류인 군사정권이 이어졌고, 민주화운동에 의해 새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들 또한 오랫동안 탄탄하게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죠. 저쪽 반대편에 있는 군사정권과 장기독재정권, 보수권력독점의 바탕이 친일이다고 하며, 다시는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역사재판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위원회를 만들어 철저히 눌러야겠다. 민주 대 독재, 진보 대 보수, 독립운동 대 친일파들.... 현재의 운동이 아니라 이렇게 과거에 대한 규명을 통해 운동하지 않아도 계속 집권한다는 20년 집권드라마를 만들었죠. 국민을 두 조각내는 방식인데, 이런 방법은 이승만이 만들었던 분리위의 집권형태이었다는 게 문제죠. 역사학자들이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를 중심으로 정치인들이 친일파 재판에 나선 것이다.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규정할 것인가 했을 때, 역사학계에서는 과거 이승만 정권시절에 만들어진 반민특위에서 약 7백명 정도를 확정했었다고 의견을 냈다. 그 때 공과 과가 겹치는 사람이 20명이 되는데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쟁점이 있었다. 조동걸 교수를 포함한 우리도 그때와 똑같이 7백명의 처벌대상자를 확인하고, 역사로 규정하자고 했다. 당시 김희선 의원이 이걸 주도했는데 진보계열 신문에서는 유보된 20명을 친일로 크게 보도했었다. 그러자 조중동 언론에서는 20명을 독립운동했다고 크게 보도를 하니 국민들은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서로 편향보도를 한 것이다. 또 한차례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치행위라고 칼럼을 쓰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공이 있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만 있다고 하니, 국민들은 헷갈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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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잘 먹고 잘 살자는 걸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와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역할이 커질 것 같다.

“경상북도 전체로 교육 등 많은 사업이 확산될 것이다. 예를 들어 칠곡지역의 독립유적지를 정립시키고 그 지역 문화해설사들이 설명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시군단위에서 그 지역 독립운동유적을 설명할 수 있게끔 우리가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도청 공무원과 모든 시·군의 사람들이 안동으로 교육을 받으러 오게 된다. 기념관이 증축 완공되면 이곳을 드나들 사람이 얼마나 많아질 것인지 기대를 해도 된다. 전국적으로 그 역할도 커질 것이다.

그렇게 갈 때 정신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보수와 진보의 두 개념에는 긍정성과 부정성이 다 있다. 순기능과 역기능도 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보면, 나뉘어있다가 1910년에 나라가 망한다. 이것이 1915년에 결합된다. 바로 광복회다. 광복회는 경북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1919년에 사회주의가 들어와 노선이 두 개로 나뉜다. 그러다가 1926년 6.10만세운동이 발생하는데 이 운동을 이끈 분들이 경북사람인 권오설, 김단야 이다. 이렇듯 경북사람의 기본정신은 지킬 가치가 있는 건 지키는 것이었고, 권오설이나 유인식 선생처럼 튀어나갈 땐 나아가는 것이었다.

필요할 때 권력이 아니라 민족이 상위개념이었고, 통합의 정신이었다. 만주사회에서 좌와 우로 갈렸지만 통합의 중심에 김동삼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1929년 무산자회의에 간부로 참석한다. 이렇듯 소통과 통합의 최상위 개념을 민족으로 두었다. 지금은 최상위개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경북이 보수꼴통이 아니었다. 유교문화권이 보수꼴통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가진 가치를 지키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조화해 나가는 가치를 제대로 알려나가야 한다. 경북사람들이 그 길로 가도록 해야 되겠다. 그럼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 낼 단체나 기관은 어디인가 이다. 마인드도 부족한데 어디서 할 것인가. 바로 기념관이 도민들에게 얘기하고, 나아가 소통과 통합이 안 되는 전체 정치인에게 던질 메시지나 길은 이곳에서 나올 것이다.

정권차원에서 모든 걸 뉴라이트에게 맡겨선 안 된다. 그렇게 가다보면 정권이 바뀌면 또 뒤집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자에게 맡겨야 한다. 일본극우 교과서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비판하고 대응하자면 우리부터 소통과 통합의 정신을 가르치고 행동해야 한다. 이 역할을 기념관이 담당할 것이다. 그 정신을 이야기 할 것이다.”

- 그럼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그 구상은 어디쯤 와 있는가.

“경상북도의 기념사업으로 확장되는 시기는 2년쯤 늦어졌다. 계획대로 라면 지금쯤 은 교육이 본격화 됐어야 했다. 다음 단계는 세계화로 가야 된다고 본다. 안동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남부지역 독립운동사에서 유림의 의병운동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항일투쟁에서 보여준 모습이 우리와 비슷하다. 세계적인 모델로 집약시키고 체계화 해내야 한다. 이것이 최후의 목표다.

이런 든든한 유림의 풍토위에서 학문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유형을 내놔야겠다고 본다. 결국은 경북도민과 국민들에게 너무 나의 이익에 득이 되는가 보다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삶이 무엇인가를 통용되도록 해야 한다. 자신을 역사의 격랑에 던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고 값을 매겨줘야 한다. 그들을 올려 세워야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국민이 많아지면 우리사회가 정화되지 않을까 싶다.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을 만들어 내야 한다. 왜 예수와 석가가 길거리로 나갔는지, 왜 바보스럽도록 그 길을 갔는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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