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하늘 은하수 악보 - puleunhaneul eunhasu agbo

윤극영 작사 작곡..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반달'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쪽배에...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부르는 동요 '반달'의 시작부분입니다.

이 동요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윤극영 선생께서 작사, 작곡하신 동요라니 자세히 찾아 리포스팅 합니다.

푸른하늘 은하수 악보 - puleunhaneul eunhasu agbo

  • 반달   윤극영 작사, 작곡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선 반짝반짝 비치이는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의 ‘반달’ 90주년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한국 동요(童謠)의 선구자인 윤극영(1903∼1988)의 대표작 ‘반달’ 제2절 가사다. 발표 당시의

    ‘푸른 하늘 은하 물’이 나중에 ‘푸른 하늘 은하수’로 바뀐 제1절 가사가 더 서정적이긴 해도,

    그 의미로는 2절이 가슴에 더 큰 울림을 준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망망대해에 비유되는 세상을 쪽배처럼 떠다니는 삶이 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희망의

    불빛인 등대’를 노래하기 때문이리라.

    ‘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고요’ 하고 시작하는 ‘설날’ 등과 함께 윤극영이 작사·작곡한 한국 최초의

    창작 동요 ‘반달’은 소파(小波)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를 통해 1924년 발표됐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이 처한 현실의 슬픔을 읊은 것으로도 해석하지만, 그는 1962년 잡지 ‘사상계’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시집간 맏누이 부고(訃告)를 접하고 처연한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윤극영을 ‘반달 할아버지’로 불리게 하며 남녀노소와 시대를 뛰어넘어 애송돼온 ‘반달’은 1979년

    중국의 음악 교과서에까지 ‘하얀 쪽배’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반달’은 윤극영이 ‘고드름’ ‘꾀꼬리’ ‘꼬부랑 할머니’ ‘흐르는 시내’ ‘소금쟁이’ ‘귀뚜라미’ ‘가을 서곡’ 

    10곡을 담아 1926년 한국 최초로 펴낸 동요집 제목이기도 하다.

    지금은 제목이 ‘따오기’로 바뀐 동요 ‘당옥이’(한정동 작사, 윤극영 작곡)도 담겼다.

    이밖에도 그는 윤석중의 동시에 곡을 붙인 ‘기찻길 옆 오막살이’ ‘나란히 나란히’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국민 동요’를 남겼다.

    윤극영이 1977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의 한옥을 서울시가 ‘미래유산 보전사업

    대상 제1호’로 지정.복원해 ‘반달’ 발표 90주년을 맞아 지난 27일부터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그의 체취가 밴 다양한 유품도 전시중이다. 빼어난 동요는 나이와 상관없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입버릇처럼 “모두 동심으로 살면 사회가 밝아진다”고 말했던 윤극영의 발자취와 동요를 통해 한때나마

    티없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 공간이 참으로 반갑다.

    /// 김종호 

    윤극영의 반달 노래를 회상하면서

    이제 내 내이 만 65세에 접어들고 목회의 사역을 마치게 되다 보니 지나온 세월의 무상함이 자꾸만 떠올라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견딜 수가 없다.

    오늘 예언의 신 100페이지를 읽고 난 뒤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니 반달의 노래를 지은 윤극영 선생에

    대하여 생각이 난다.

    이 반달의 노래는 내 나이 정도가 된 사람들에게는 마음 속 깊이 새겨진 노래이다.

    모를 자가 없다. 어떠한 노래이길래 우리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을까?

    나는 얼만 전에 외부 인사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들은 바가 있다.

    목사님 이 나라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민족혼과 나라 사랑에 대한 정신을 불어넣는 창작의 일을 계속 하여

    달라는 주문이었다.

    남의 요청에서가 아니라 내가 늘 하고 싶은 일이니까 나의 생애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사의 족적을 파헤쳐

    후대에 사람들의 마음에 영롱히 새겨질 수많은 교훈들을 정리하여 나갈 참이다.

    오늘은 추석날이고 하여 동심으로 돌아가 나의 글을 보는 몇 분과 함께 반달의 노래와 윤극영 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데까지 살펴보기를 바란다.

    윤 씨의 출생은 1903.09.06이고 사망 일시는 1988.11.15로 되어 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출생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간단한 프로필로는 세칭 ‘반달 할아버지’라 되어 있다. 경성보통고등학교를 거쳐 경성법학

    전문대학교를 중퇴, 도쿄음악대학,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으며, 성악가 사와자키 사다유키와

    후나바시 에이키치에게 사사를 받았다.

    1923년 ‘색동회’ 창립 동인이며, 1924년 동요단체 ‘다알리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문화운동과 동요 창작

    작곡 운동을 전개했다 간도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87년 어린이 심성의 계발 순화를 위해 동화, 동요, 그림, 연극 등의 활동을 추진한 동심문화원을 설립했다.

    1924년 반달, 설날, 까치까치 설날, 할미꽃, 고기잡기, 꾀꼬리 등의 창작 동요를 발표하면서 본격적 작품활동을

    하였고 고드름, 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의 보급에 힘썼다.

    점층 수법 그의 작품 반달은 국권 상실의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운명과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미래지향적 희망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했고,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요작곡집으로 1926년 다알리아회에서 『반달』, 1963년 세광출판사에서 『윤극영 111곡집』 등을

    간행했다.

    윤극영 씨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으로는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1917),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

    학교 전신)를 졸업하였다(1920).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경성법전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고, 일본의 ‘도쿄음악학교’로 유학을 가서

    작곡과 성악을 공부하였다. 도쿄 유학 시절에 홍난파, 방정환 등을 만나 교우하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소파 방정환을 만나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일본 노래만 불러 장래가 어둡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고 민족 어린이들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였다.

    1923년 5월 1일 방정환을 중심으로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작은이’보다 어린이가 좋다고 판단)라는

    용어를 정식 사용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다.

    (색동회 발기인 : 방정환, 윤극영, 진장섭, 조재호, 손진태, 정병기, 정순철)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에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당시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확산되자 귀국하였다.


    부친의 도움으로 자택에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음악공부방을 만들어 음악 공부를 계속하면서 어린이들을

    모아 음악을 가르쳤다.

    이들을 모아 ‘다알리아회(합창단)'를 조직하여(1924. 8) 음악을 확산시켰다.

    1924년 어린이들이 설날에 일본 음악을 듣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설날>을 작사 작곡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라 할 수 있는 <반달>을 작사 작곡하여(1924. 9) 확산시킨 결과 큰 호응을 받아 빠른

    속도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한국 노래를 탄압하던 일본인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윤석중이 지은 <고드름>에 곡을 붙였다.

    다알리아회에서 <파랑새를 찾아서>라는 아동 창가극을 공연하여(1925. 3) 크게 성공하여 여러 곳에서 초청하여

    공연을 하였다.

    에 의한 동요창작과 작곡으로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기여했다.

    1925년 간도로 넘어가 동흥중학에서 교사 활동을 처음 시작하였다(1926).

    거기에서도 작곡 활동은 계속하여 윤석중이 지은 동시 <우산 셋이 나란히>에 곡을 붙였다.

    <고기잡이>는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광명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활동을 오래하였다.

    1935년에 서울로 돌아와 잠시 있다가, 1936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다.

    우연히 신문에서 <반달> 노래가 일본 방송국에서 애창되고 있음을 알고 도쿄중앙방송국을 찾아가 처음으로

    저작료를 받아 생활하였다. 레코드사의 도움으로 무랑루주에서 가수 겸 제작자 역할을 하여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다시 만주 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평소 희망하던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하얼빌 예술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어 일본인의 강요로 오족협화회에 들어가 탄압을 받다가, 일본 패전

    후 다시 공산당의 탄압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귀국하였다(1946). 1947년에 노래동무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졸업가>를 작곡하였다. 동시와 동요를 계속 창작하고 희곡 등에도 관심을 가져 문학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제1회 소파상 수상(1956),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되었다(1963). <색동회>를 부활시켜(1969) 제4대 회장을

    역임하였고(1973~74),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였다(1976). 이상과 꿈속에서 정치적 혼란기에 유랑과

    방랑의 생활을 많이 하였으면서도, 조국을 잃은 어린이들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동요 동시를 창작하여

    어린이 문화 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윤극영 씨에 대하여 년대별 그의 활동에 대한 구분으로는 교동보통학교(校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

    學校)·도요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등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1923년 색동회 창립동인이었으며,

    조선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노래뿐인 시대에 동요창작을 시도하였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4년 서울로 돌아와 동요단체 ‘다리아회’를 조직하였다. 어린이문화운동과 동요창작·작곡

    운동을 전개하였고, 1926년 1월 피아니스트 오인경과 만주 용정(龍井)에 가서 동흥중학교·광명중학교·광명

    고등여학교 음악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10년간 〈제비 남매〉·〈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외나무다리〉·〈담 모퉁이〉 등을 작곡하였다.

    1936년 가을 서울로 돌아와 음악활동을 하였으며, 그해 일본으로 가서 1937년 극장가수로 취직하며 예술단

    창립을 연구하였다. 1940년 서울·간도를 거쳐 중국 하얼빈예술단을 창립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1년 용정에서 역마차업을 하다가 간도성협화회(間島省協和會) 회장(1941∼1945.8.)으로 활동하면서

    친일로 기울어져 괴뢰만주국에 적극 협력하기도 하였다. 하얼빈에서 예술활동을 하다가 1946년 용정에서

    경비대에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보석되어, 1947년 톈진(天津)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남한으로

    탈출하였다.

    윤 씨는 1924년 〈반달〉을 비롯하여 〈설날〉·〈까치까치 설날〉·〈할미꽃〉·〈고기잡이〉·〈꾀꼬리〉·

    〈옥토끼노래〉 등의 창작동요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면서 〈고드름〉·〈따오기〉 등의 동요에

    곡을 붙여 동요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점층수법에 의한 동요창작과 작곡을 통하여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대 초 북경(北京)에서 조선족 김정평과 그의 아버지 김철남이〈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하여 30년간 애송되다가 1979년 〈하얀쪽배〉(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전국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

    되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하였고, 1963년 서울교육대학 제정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되었으며, 1970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1987년 어린이의 심성계발과 순화를 목적으로 동화·동요·그림·연극 등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인

    동심문화원(童心文化院)을 설립, 운영하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시작되는 그의 대표적인 동요 〈반달〉은 맏누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쪽배’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토끼’는 우리나라를, ‘샛별’과 ‘등대’는 희망을 빗대어 상징한 미래지향

    적인 민족동요로 해석되었으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당시 그의 친일활동을 감안한 결과 창작동기가 애국애족

    정신에 있다기보다는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이상의 기록들을 대하면서 윤극영 씨가 어떠한 생활을 살아왔는지를 보게 한다. 친일이란 단어와

    괴뢰만주를 도왔다는 말도 언급되어 있다. 나라 잃은 조국을 위하여 평생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분이 엉뚱하게 취급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후세의 사람들이 인물들을 마구 난도질를

    하여 악평을 한 인상을 갖게 한다. 친일이나 괴뢰정부 동조라는 표현들은 문학하는 이들이 비교적 강인함이

    없는 육체를 지닌 고로 몇 번 죽음에 대한 공갈과 협박과 회유에는 감당할 자신들이 없이 저들의 술책에 잠시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윤 씨의 삶 자체가 비단 방석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린

    것이 아니다. 형도 받으면서 고초를 겪은 분이셨다.

    그가 지은 반달 노래가 우리 마음에 어떠한 정서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들 마음에 나라를 잃은 외로움을 민족적 경지에서 읊은 것으로 마음에 다가온다. 나의 생애 끝날 때까지

    앞으로도 이 노래를 얼마나 더 많이 부를지 모르겠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압박과 신음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환의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래들로는 울밑에 선 봉선화, 성불사의 밤, 고향생각, 옛 동산에

    올라, 사공의 노래와 함께 반달 노래는 민족과 독립군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으며, 동요들을 통한 민족

    감정과 민족정신과 정서를 배양 고취하였던 고로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동요 금지령을 내려 우리의 음악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반달 노래의 가사는 울적할 때에 늘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이다. 윤극영 씨가 작곡한 어린이의

    동심 속에 오래 동안 각인된 노래 두 곡의 가사를 적으니 각자 음미하여 보기를 바란다.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반달'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1절과 달리 2절은 당시 암울했던 우리민족 사람들에게 채근을 하는 듯 하다.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선 반짝반짝 비치이는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小白船(원곡 = 반달)   

    하얀 쪽배
      
    作詞:尹克榮    作曲:尹克榮    번역:迎春

    蓝蓝的天空银河里
       

    푸르디 푸른 하늘 은하 속에는

    有只小白船
     

    오로지 하얀 쪽배가 있구나

    배에는 한 그루의 계수 꽃나무가 있고

    白兔在游玩
     

    흰 토끼가 뛰놀고 있구나

    桨儿桨儿看不见
     

    노가 노가 보이니 않고

    船上也没帆
     

    배에는 돛이 없는데도

    飘呀飘呀飘向云天

    구름 낀 하늘로 흘러가고 흘러가네

    ~~~~~~~~~~~~~~~~~~~~~~~~~~~~~~~~~~~


    渡过那条银河水
     

    저 한 줄기의 은하수를 건너가

    走向云彩国 
     

    아름다운 구름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구나

    走过那个云彩国
     

    저 아름다운 구름나라를 거쳐서

    再向哪儿去?
     

    다시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인가?

    在那遥远的地方
     

    저 먼 곳에서

    闪着金光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晨星是灯塔
     

    새벽별이 등대로구나

    照呀照得亮

    비추고 비추어서 길을 밝혀라

     ~~~~~~~~~~~~~~~~~~~~~~~~~~~~~~~~~~~~~~~~~

    중국에서 부르는 우리동요 반달, 小白船
     

     

    중국에서 불리우는 한국의 동요!
    그 곡은 다름아닌 샤오바이촨(小白船)으로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반달'이다.

     아래에 소개한 영상에서 제목은 원곡과 달라도 누구나 들어보면 곧 바로 알 수 있다.

    푸른하늘 은하수 악보 - puleunhaneul eunhasu agbo

    반달은 윤극영 선생(1893-1988)이 이 곡을 [동아일보]에 발표한 것이 1924년으로

     윤극영의 맏 누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하늘을 보며 지었다고 한다(1923년 9월9일).

    노래의 가사 중 '쪽배'는 우리민족의 운명을, '토끼'는 우리나라를, '샛별'과 '등대'는 희망을 빗대어

    상징한 미래지향적인 민족동요로 해석되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애창곡으로 남북이 함께 부르는 몇 안되는 곡중 한 곡이다. 
     

    푸른하늘 은하수 악보 - puleunhaneul eunhasu agbo

                                        윤극영, 그의 동요집 "반달"

    그런데 이 곡은 1950년 초 북경에 사는 조선족 김철남이 그의 아들 김정평과 같이

    중국어로 번역, 편곡해서 레코드로 취입해 보급해서 30년간 애송되다가  

    1979년 하얀쪽배 - 小白船 샤오바이촨 이란 제목으로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다 한다. 
     
    중국의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관계로 

    이 곡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동요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며,

    소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한 동요 디스크에 우리나라의 아리랑같은 [모리화]와 함께 감초처럼 끼는 스테디셀러 곡이다.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가 가진 본원적인 서정이 중국인의 심성에 깊은 공감을 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