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대 토벌 작전 - namhandae tobeol jagjeon

1904년 이래 치열하게 전개된 전국 항일의병운동은 조선 식민지화를 서두르던 일제에게 큰 장애요소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하고서도 이를 안팎으로 공식화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의병들의 끊임없는 항일항전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름만 남은 대한제국의 친일내각을 앞세워 재정 및 화폐 정리 등을 통해 조선사회를 식민지 구조로 재편해 왔던 일제는, 1909년 말이 되면서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단행하였다. 1909년 9월에서 10월 한 달 가까이, 가장 치열했던 호남의병을 대상으로 일제가 벌인 ‘남한대토벌’은, 일제측의 집계에 따르더라도 “사망 420명, 체포 또는 자수 1,687명, 체포된 주요 의병장 26명, 그 밖에 다수 의병장 살해”라는 결과를 남긴 무자비한 살육전이었다.1) “남한대토벌에 의하여 전라남북도 양도(兩道)에 있는 폭도의 대소굴은 거의 소탕되었고, 기타 지방도 대략 정온 상태로 들어갔다.”고 일제가 평가했듯이,2) 일제는 호남의병을 토벌한 뒤 병력을 다른 지역의 의병토벌에 집중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의 객관적 조건은 그만큼 어려워졌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의병 진영의 주체적 조건도 1904년부터 근 5년에 걸친 장기항전으로 그만큼 악화되었다.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체포 또는 전사하여 의병 진영의 인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경기의병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대해산 뒤부터 ‘남한대토벌’이 단행된 시기에 귀순·체포·전사한 경기 의병 지도층은 총 101명으로, 체포 77명, 전사 13명, 귀순 9명, 기타 2명이었다. 그 가운데 여주를 포함한 경기 남동부지역은 총 24명으로, 체포 18명, 귀순 5명, 전사 1명이었다.3)

의병 진영 안의 주체적 조건의 변화와 함께 그동안 의병들을 유형·무형으로 지원했던 일반 민중의 조건도 크게 변하였다. 이것은 민중 자체에 의한 주체적 변화라기보다는 일제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다. 일제는 일찍부터 의병에 대한 지역주민의 지원을 차단할 목적으로 ‘한 마을을 완전히 불태우고 죽이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4) 면장·동장·지방위원·일진회원 그리고 곳곳에 심어 놓은 밀정을 통하여 민중을 감시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의병에 대한 민중의 공공연한 지원을 어렵게 하였다.

1909년 말이 되면서 경기의병운동의 주·객관적 조건은 전체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바뀌어갔고, 그 사정은 경기지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남한대토벌’을 전후하여 경기 남동부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층 17명(체포 10명, 자수 1명, 피살 1명, 활동 5명) 가운데, 여주에서 활동하였던 의병장 김춘수가 1909년 12월 토벌군에게 투항하거나, 1910년 1월 방인관이 부하를 이끌고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거나5) 맹달섭이 1910년 3월 체포되었듯이, 악화된 국면을 반전시키지는 못했다.6) 그런데도 이 시기 여주에서는 소규모로 편재된 의병들이 활동을 이어갔다. 아래 표는 ‘남한대토벌’을 앞뒤로 여주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를 정리한 것이다.

한때 일본군의 집중적인 토벌을 받아 거의 침체되다시피 했던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동부지역의 의병운동은 ‘남한대토벌’ 뒤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여주 경찰서장이 “여주경찰서 관내 수비대 인양 후 갑자기 5명 내지 10여 명의 소집단의 폭도(의병)가 각지에 배회하여 날로 그 수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듯이,7) 이 시기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에서 의병운동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일부가 철수하여 수색과 토벌이 소원해진 틈을 타서 다른 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또 이 지역에서 계속 항쟁해왔는데도 임진강유역 및 동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보다 상대적으로 규모와 활약 등이 두드러지지 않아 그동안 일제 관헌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하다가 이 시기에 실체가 드러난 경우이다. 즉 김춘수와 방인관은 ‘13도 연합의병’에 참여한 인물로서 서울진공이 무산된 뒤 활동상이 드러나지 않다가 일제의 ‘남한대토벌’ 뒤 병력이 중부지방으로 집중되는 과정에서 그 신원이 드러난 경우이다.8) 이때 이들이 이끈 의병 규모는 각각 6명·8명으로 소규모 부대였다.9) 박정문과 박군선은 5명 안팎의 부하를 거느리고 여주 등지에서 줄곧 활동해왔으나 임진강 유역 및 동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보다 상대적으로 규모나 활약 등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경우이다. 한봉수는 원래 충청남북도에서 활동하던 인물로서 ‘남한대토벌’ 뒤 활동 근거지를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으로 옮긴 경우다. 또 맹달섭은 1906년 5월 민종식 부대의 북문 수비대장으로 의병에 참여, 1907년 1월부터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에서 민창식 등과 합진하여 을사조약 체결 뒤부터 여주의병운동을 이끈 인물이다.10)

이처럼 5~10명 안팎의 소부대로 여주의병운동이 다시 일어나 여주 관내를 빈번하게 출몰하자, 여주경찰서에서는 1909년 11월 16일부터 군인 출신 일본순사 3명과 지리에 밝은 한국인 순사 2명으로 변장정찰대를 조직하여 대수색에 들어갔다.11) 변장정찰대는 11월 23일 오후 5시경 여주군 금사면 이포 → 24일 오전 2시 대송면 개군산면 자포 → 24일 오후 1시 금사면 상품동을 경유하여 양평군 남시면 백석동에 이르러 박군선의 부하 서순필(徐順弼), 이작실(李作實), 안석현(安石鉉), 구여실(具汝實)을 체포했으나, 도중에 의병들이 한인 순사를 목침으로 강타, 부상시키고 동료 의병 4명을 구출하여 산속으로 흩어졌다. 변장정찰대는 27일 오후 11시까지 양평군 고읍면 편전리 일대를 뒤지며 수색했으나 소득 없이 돌아왔다.12)

해가 바뀌어도 여주의병의 활동은 간간이 이어졌다. 1910년 4월 29일에는 의병 7~8명이 여주재무서에서 공매한 낙찰 겨를 수취하려고 여주군 등신면(等神面) 비포리(碑浦里)의 한 주막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을 습격, 금 53원과 엽총 1정, 인천부 가권(仁川府家卷) 1매 등을 탈취하였다.13) 1910년 5월 4일 의병 5명이 여주군 금사면 백자동(柏子洞) 민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품실(品實) 방면으로 물러났다.14) 5월 8일 오후 12시 일본인을 습격한 바 있던 의병 8명이 여주군 대송면의 한 민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거둬갔다.15) 이처럼 1910년 5월에 접어들면서 ‘한일합병’이 눈앞의 현실로 닥친 상황에서 여주의병운동은 퇴조기의 의병운동의 양상을 반영하듯이 주로 군자금을 탈취하는 운동양상을 띠며 서서히 사라져갔다.16)

특히 전라남북도는 광활한 수십리의 기름진 평야를 가까이 두고 있고, 지세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좋은 항구가 적지 않아 선박교통이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몽매하여 발전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다름 아니라 폭도가 창궐하여 지방산업의 발달을 저해하고, 政令의 보급을 방해하고 각지를 황폐화시킨 때문이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84∼85쪽).

즉 한국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남북도는 ‘몽매’한 의병들의 투쟁에 의하여 일본세력을 부식할 수 없고, 또한 해상 의병들의 활동에 의하여 쌀을 일본에 반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당시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가장 많은 수출품이 쌀이었고, 한국에 대한 민간자본의 가장 매력있는 투자대상도 곡창지대의 토지였다. 따라서 전라남북도는 일제의 경제침략의 주된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 지역에 대한 경제침략의 길을 트자는 것이 이 작전의 첫째의 목적이었다.

또한 전라남북도의 한국인은 청일·러일전쟁에서 한번도 우리 군대의 활동을 목격한 바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 진가를 모르고, 임진년(임진왜란)의 옛날을 몽상하여 일본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다. 이 기회에 단호하게 대토벌을 결행하고 파견대의 전력을 기울여 전라남도의 산야를 유린해서 賊徒를 하나도 남김없이 근절하고, 南陬·北陸·산간·도서의 한국인에 이르기까지 皇軍의 엄숙함과 용감한 武威에 경탄하고 전율케 하여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회복을 해야만 한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84∼85쪽).

임진왜란 당시 전라남도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육상에서의 의병투쟁에 의하여 일본 육군도 이 지역에는 침입을 못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본군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역사상의 명예회복을 하자는 것이 둘째의 목적이었다.

그들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그 범위는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그 외곽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남부와 경상남도 동부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 임시파견대 2개 연대와 헌병·경찰을 투입하고, 해상에는 水雷艇 4척을 배치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작전기간을 9월 1일부터 40일로 책정하여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제1기 (9월 1일∼15일)

일본군경을 경비부대와 행동부대로 나누어서 우선 경비부대로 포위망을 형성한다. 전라남도 외곽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남부의 장화도·부안·태인·갈담·남원으로부터 경상남도 동부의 화개·하동·고포를 연결하는 외곽선과, 전라남도를 둘로 나누어서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관통하는 법성포·영광·삼거리·서창·능주·보성·서동·소록도·각석도·황제도를 연결하는 선에 경비부대를 포치하여 포위망을 형성한다. 행동부대는 이 포위망 안에서 ‘攪拌的 방법’으로 주야를 가리지 않고 토벌·수색·검거를 반복한다.

제2기(9월 16일∼30일)

잔존 의병들을 전라남도 서남단의 반도부에 몰아 넣어서 포위망을 압축하여 역시 ‘교반적 방법’으로 뿌리 채 소탕한다.

제3기(10월 1일∼10일)

전라남도 서남각의 여러 섬들을 소탕한다(金正明 編,<全羅南北道 討伐實施計劃에 관한 件>, 79∼81쪽).

일본군이 말하는 새로운 전술로서의 ‘교반적 방법’이란 다음과 같다.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지역내에서 교반적인 수색을 하고 전후좌우로 왕복을 반복하여 奇兵적인 수단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엿볼 여유가 없도록 함과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정·경비선 및 소수부대로 연안 도서 등으로 도망가는 폭도에 대비하도록 하는 등 포위망을 조밀하게 하여 드디어는 그들이 진퇴양난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朝鮮駐車軍司令部 編,≪朝鮮暴徒討伐誌≫, 150쪽).

즉 일본군의 ‘교반적 방법’이란 전라남도 의병과 군중이 일체가 된 게릴라전술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전술이라 하겠다.

처음에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10월 10일까지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10월 30일까지 연장하여 마을간의 왕복을 차단하고 한 마을을 2회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10여 회에 걸쳐 수색을 반복했다. 9월 1일부터 2개월간에 걸친 토벌작전으로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그 외곽 일대는 살육·방화·약탈·폭행 등으로 생지옥이 되었다. 전라남도 출신 유생 黃玹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왜인들이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함에 있어서, 위로는 珍山·錦山·金堤·萬頃으로부터, 동으로는 晉州·河東으로부터, 남으로는 木浦로부터, 사방 둘레를 그물치듯이 해놓고 순사를 파견하여 마을을 수색하였다. 집집마다 빗질하듯이 뒤지면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살육하기 때문에 행인들이 스스로 없어지고 이웃 마을끼리도 통행이 불가능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숨을 곳이 없기 때문에 강한 자는 앞으로 돌진해서 싸우다가 죽고, 약한 자는 기어 달아나다가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서 강진·해남에 이르니 달아날 곳이 없어 죽은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黃玹,≪梅泉野錄≫권 6, 융희 3년).

2개월에 걸치는 작전기간 중에 앞에서 언급한 200명 이상의 의병부대를 거느리는 의병장 중에서 전해산을 제외한 심남일·안규홍·임창모·강무경을 비롯한 103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들이 자수·체포·피살되었다. 전해산도 은신중 12월에 체포되었다.

‘남한대토벌’의 결과 한국합방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전라남도의 의병활동은 1909년 말까지 사실상 마무리되고 일제의 경제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측도 그 성과를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금번의 토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농업경영자 및 상인 등이 연이어 내륙에 진입하여 아주 일찍 사업에 착수하는 자도 볼 수 있다. 이제야 비로소 착실한 일본인의 식산흥업이 결실을 거두고 일본인의 대한사업의 발흥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개발유도하는 데도 커다란 효과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臨時韓國派遣隊의 南韓討伐實施報告의 件>, 92쪽).

일본군을 뒤따라 일본인 지주와 상인들이 곡창지대를 노려서 쇄도하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또한 토벌작전의 경제적 효과에 대하여 일본군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 度支部의 의뢰에 의해 행동부대로 하여금 보조화폐를 산포케 한 것은 장차 이 화폐의 유통을 원활히 하고 화폐제도를 정리하는 데 도움되는 바가 크다고 하여 당국자의 감사를 받은 바이다.

당시 한국 정부의 재정고문으로 있던 메가다(目賀田種太郞)는 일본자본을 무제한으로 한국에 침투시키기 위한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하여 구화폐를 회수하고 신화폐를 보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구화폐로서의 白銅貨와 葉錢의 유통지역이 각각 다르게 되어 있었다.

엽전 유통지역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및 함경남북도이다. 특히 일본 민간자본이 노리고 있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에서는 완강히 신화폐를 거부하고 의연히 엽전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이 지역에 대한 경제침략의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작전’과 병행하여 엽전을 회수하고 일본화폐와 무제한 교환할 수 있는 신화폐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여간 ‘남한대토벌작전’이 종료된 후에 소부대에 의한 의병들의 게릴라전은 지속되었으나 일제가 한국을 합방하는 데 지장이 될만한 저항투쟁은 기본적으로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1910년에 접어 들면서 이미 유명무실화된 한국의 주권을 송두리째 박탈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