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전통 문화 - mong-gol jeontong munhwa

몽골 유목문화의 이해

  * 몽골 문화의 특징은 정주하지 않고 가축과 함께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생활하는 

   「유목」이라고 하는 한 단어로 함축된다.

     최근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전 인구의 4분의 1 (약 60만 명) 정도로

    감소했다.

     몽골의 유목민이 기르는 가축은 소, 말, 양, 염소, 낙타 등인데 이를 통상 5畜이라고 부른다.


1. 몽골인의 거주 지역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동서로 흥안령 산맥에서 알타이 산맥, 남북으로 바이칼 호에서 만리장성

 사이의 땅을 자기들의 거주지로 인식해 왔다.

이 지역을 포함하여 현재 몽골인들의 거주지는 4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먼저 칭기즈칸의 고향이자 몽골족의 중심지인 몽골국이 있다.

몽골국은 우리가 흔히 외몽골이라 부르는 나라로 몽골인 거주지 중 유일한 독립국이다.

  * 몽골  국기

     Mongolia 국기는 세로로 세 부분으로 동등하게 빨강, 파랑, 빨강으로 되어있다.

     바깥의 두 빨간 부분은 진보와 밝은 미래를 의미한다.

     중앙의 파란 부분은 영원한 하늘을 상징한다.

     황금색의 문장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민족적 문장으로 soyombo(소욤보, )라고 일컫는다.

     문장에서 요새와 성벽을 의미하는 2개의 직사각형 안의 문양은 태극이 아니고 물고기 2마리이다.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방심을 금하라는 의미라 한다. ​

  * 몽고(蒙古)라는 이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려 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본래 1924년 11월 26일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정부는 국호를 '몽골 인민공화국(Mongolian

      Poeple's Republic)'으로 정하였으나, 1922년 1월 개방 정책의 상징으로 국호를 몽골 공화국으로

     고쳤다.    

     보통 우리가 '몽골'하면 대개 외몽골(外夢古, 몽골 공화국)을 말하는 것이며, 내몽골(內蒙古)이라고

     부르는 내몽골 자치주는 중국 국경 안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분단국가다.

     그러나 분단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민족적 친근감이나 통일에의 의지는 거의 없는 편이어서

     한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http://www.mongolcenter.org/new/?main=nation&sub=summary)

1) 몽골국 남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인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가 있는데 통상 내몽골이라

   불리는 곳이다.

2) 그리고 몽골국 북쪽의 바이칼 호 주변에도 몽골인들이 사는 부랴트공화국이 있으며,

3) 카스피 해로 흘러드는 볼가 강 중하류에도 몽골족이 세운 칼미크공화국이 있다.

4) 이 밖에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와 중국의 윈난성, 스촨성, 구이주성, 칭하이성,

     신장성 등지에도 몽골족이 거주하고 있다.

     * 몽골과 중국의 몽골족 자치 구역(↑)

5) 국토 총면적 1,564,115km2, 2010년 현재 총인구 2,754,685, 수도 울란바토르(Ulan-Bator).
6) 전체 면적 1,183,000km2, 2010년 현재 총인구 24,706,321명(이중 한인 한족 79%, 몽골족 17%),
     성도(省都) 후흐호트(呼和浩特), 공용어 중국어/몽골어.
7) 전체 면적 351,300km2, 2010년 현재 총인구 972,021명(이중 부랴트인 308%, 러시아인 61.1%),
8) 전체 면적 76,100km2, 2010년 현재 공화국 전체 인구 289,481명(이중 칼미크인 162,740명
      57.4%, 러시아인 85,712명 30.2%), 수도: 엘리스타(Elista), 공용어 러시아어/칼미크어.

  * 지세로는 한국과 달리 '동저서고'로, 실크로드 서역인 서쪽에는 천산산맥이 있고, 동쪽으로는 광활한

     몽골고원이 펼쳐져 있다.

     * 붉은색 부분은 몽골족 거주지, 바깥 굵은 선은 몽골제국 시대의 판도(13-14세기)

    ​* 몽골제국 시대의 판도(↓)

     The Empire by 1206

     The Empire by 1218

     The Empire c. 1246

     The Mongol Empires c. 1280

2. 몽골의 자연환경
 몽골 고원은 북에서 남으로 갈수록 건조하고 자연환경도 다르다.

고원 북부에는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이 이어진다.

그 반대편 남쪽에는 황량한 고비 지대가, 그리고 그 중간에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대초원이 펼쳐져

있다.

초원은 얼핏 보면 황량하고 삭막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몽골 초원은 포근하기 그지없다.

몽골의 풀은 우리나라의 산과 들, 빈터에서 자라는 잡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실처럼 가늘고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풀이다.

향내 나는 풀 사이로 이름 모를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다.


 고비도 흔히 생각하듯 황막한 불모지가 아니다.

그런 사막은 고비의 중심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물이 있는 곳에는 풀이 있고 풀이 있는 곳에 짐승이 살며

    짐승이 사는 곳에 사람이 존재한다.

 대부분은 모래와 자갈, 덤불과 관목, 짧은 풀이 자라는 사막성 초원, 즉 반(半) 사막이다.

몽골국(외몽골)을 예로 들면 사막 고비의 비율은 전국토의 약 15%, 사막성 초원 비율은 대략 27%

정도다. 이것만 보아도 고비가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원이나 고비와 한 짝을 이루는 것이 몽골의 하늘이다.

몽골은 세계적으로도 맑은 날이 많고 일조량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

연평균 250일 이상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꽤나 밝은 땅이다.

그래서 그런지 몽골 하늘은 유난히 푸르다.

그 아래에 떠 있는 구름도 유별나게 하얗다.

푸른 하늘과 연녹색 풀밭은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하늘은 새하얀 구름을 걸쳐 입고, 초원은 들꽃 장식을 달고 있으며, 고비 곳곳에는 원색의 모래 언덕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초원 저 멀리에서 한 무리 양 떼가 풀을 뜯고, 건너편 냇가의 흰 게르(유목민의 천막)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느낌이다.

이것이 몽골 자연환경의 전형이다.

적어도 유목 목축이 행해지는 몽골국에서는 변함없이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

밤이면 초원 대신 하늘이 축복을 내린다. 푸른 하늘은 이내 별천지로 변하고, 그 사이로 은하수가

강물이 되어 흐른다.

* 해체와 조립이 쉬운 모전(펠트) 천막집인 게르

그래도 조립·해체하는데 각각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3. 몽골인의 전통 생업 유목
 유라시아 초원 지대의 거주민들은 주어진 자연조건(춥고 건조한 기후와 광활한 초원)에 적응하여

유목(Nomadism)이라는 생계 방식으로 삶을 유지해 왔다.

유목은 계절의 변화와 물과 풀의 형편에 따라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목축의 한 형태다.

고전적인 의미로는 인구의 대다수가 목축에 참여하고 가축과 그 부산물을 활용하여 의식주를 해결

하는 생계 방식을 말한다. 유목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통적으로 유목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설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수렵에서 목축(즉 유목)으로 발전하고, 다시 농경으로 발전했다는 이른바 '삼단계 설'이다.

다른 하나는 정착 농경민에 의하여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자연환경의 변화 등

여러 요인에 의하여 유목이 발생했다는 설이다.
먼저 ‘삼단계 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목축 일반의 기원 문제를 탐구 대상으로 했지만, 그중 특히

유목의 기원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유목의 출현이 초식동물의 사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즉 수렵민들이 초식동물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순화시키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유목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유목은 목축의 최고(最古)의 형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정착 목축과 농경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설은 이미 고대 로마인들에 의해서도 주창되었다.

이를테면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인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 기원전 116-27)

에 의하면, 수렵민이 유목민이 되었다가 이들이 정착하여 농민이 되었다는 주장을 폈다.

그 후 이러한 견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20세기까지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꽤

많았다.
예컨대 일본의 저명한 생태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이마니시킨지(今西錦司)는 1940년대 전반 내몽골에서

수행한 현지조사에 기초하여 수렵에서 유목이 시작되었다는 설을 제출했다.
즉 그에 의하면 수렵민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야생의 초식동물을 따라다니는 과정에서 동물과 인간의

공생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동물을 통제 하에 두는 유목 목축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도 유목은 목축의 최고 형태가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의 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인간의

능동적인 노력이 아니라 동물에의 수동적인 적응 과정에서 가축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토대로 집락(集落)에서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민에 의해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지고, 이어 여기에서 유목이 분화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목사회 연구자의 대가인 하자노프 역시 이동생활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수렵민에 의한 야생동물의

가축화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표명한 바가 있는데, 아무튼 현재는 농경→정착 목축→유목 목축이 순차적으로

행해졌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유목이 처음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시차를 두고 여러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지역이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 어디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가운데 흑해(黑海) 북방, 즉 남러시아 초원(우크라이나)이라는 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 시기 또한 대략 기원전 1,000년경(농경과 목축의 분리)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유목이 언제 북아시아에 전해지고 그 지역 거주민의 생업으로 고정되었는가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분분하다.

 다만 기원전 3세기 말 오늘날 몽골 고원에 최초로 국가를 세운 흉노(匈奴) 시대부터는 이 지역 거주민들이

유목으로 생계를 꾸려간 것만은 확실하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흉노전에는 “흉노는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고 성곽과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사계절 이동하며 지내는 유목민의 생활을 말하는데, 그 후 2000년 동안 유목은 북아시아 지역 거주민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목은 현재도 몽골국 국민의 주요 생업의 하나로서 경제 활동 인구의 절반 정도인 약 40여만 유목민이

대략 4,000여만 마리의 가축을 키우며 살고 있다.5)
조금 전 언급했듯이 유목은 이동 목축이다.

그래서 유목민은 적어도 1년에 네 차례 이상 주거지를 옮긴다.

물론 이동 횟수는 이보다 많아지거나 줄어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계절에 따라 거처를 옮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소ㆍ말ㆍ양ㆍ염소ㆍ낙타 등 가축을 이끌고 처자식을 데리고 생활 도구를 챙기고 천막을 해체하여

이사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을 유목민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유목민은 조상 대대로 사용해 온 목초지를 생활의 근거지로 하여 그 안에서 계절에 따라 정기적이고 규칙적으로

옮겨 다닌다.

따라서 한 유목민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비롯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일생을 통하여 자신이 '거주할 곳'이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이 경우 ‘거주할 곳’은 고정된 가옥이 아니고 천막을 칠 숙영지(宿營地)를 가리킨다.
유목민이 자주 거처를 옮기는 것은 방랑벽이나 기질이 그래서가 아니다.

아무리 유목민이라 해도 거주지 자체를 옮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사기』에 쓰인 대로 좋은 풀과 물을 찾아 옮겨 다닌다.

주지하듯이 북방 초원은 비가 적게 내려 물이 부족하고, 땅이 척박하여 목초지 상태도 생각보다 좋지 않다.

실제로 유라시아 초원 중 가장 좋다는 몽골 초원의 경우도 풀이 무성한 초원은 드물고 대부분 흙이 드러나

있을 정도로 황량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한 유목민 집단이 한 곳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척박한 초원이 아예 망가져 버릴 수 있다.

초원은 한 번 파괴되면 그것을 복구하는데 오랜 세월과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이는 곧 삶의 터전의 상실을 의미하는데, 유목민들은 사계절 이동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래서 예로부터 유목민들은 한 곳에 필요 이상 오래 머무는 것을 바림직하지 않게 여겼다.

생계의 원천인 초원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의 설명이 유목민들이 삶의 거처를 옮겨 다니는 근본 이유이다.

이 점은 지금도 유목 목축이 행해지는 몽골국 초원과 반(半)정착 목축을 하는 내몽골 초원의 파괴 정도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내몽골에서는 한 곳에 머물면서 극히 좁은 반경 내에서 옮겨 다니는 사실상 정착

목축이 행해지고 있다.

그 결과는 초원 파괴와 사막화로 이어졌다.

중국 정부는 더 이상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특정 지역 거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생태 이민(生態移民)’까지 실시하고 있지만,

망가진 초원을 복구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이동은 혹한(酷寒)과 혹서(酷暑)가 교차하는 초원의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가축을 원활히

관리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남북 방향으로의 이동이 주가 되겠지만, 하나의 산을 중심으로 할 경우 겨울에는 북서풍을

막아주는 계곡으로 들어가고, 여름에는 물이 가까운 개활지로 나오는 것도 이동의 원칙이다.


 유목은 이론적으로 보면 그 자체가 완결된 경제 단위, 즉 자급자적이다.

그래서 순수한 유목민은 그들의 기본 자산인 가축과 그 부산물로 의식주를 해결한다고 할 수 있다.

가축의 고기, 피, 젖과 각종 유제품을 식량으로 하고, 가축의 모피로 옷을 해 입고, 나무와 가죽과 펠트(모전)로

이동식 주거인 천막(Ger 또는 Yurt)을 만든다.

그러나 자급자족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이고 말 그대로 순수한 유목민은 극히 드물다.

유목민이라 해도 1년 내내 고기와 유제품에 의존해 살기는 어렵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야채나 곡물을 섭취할

필요가 있다.

야생으로 자라는 야채나 차(茶)를 채취하여 이를 식용으로 활용하는 것도 그 한 방편일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농경에 부적합한 자연조건(초원)으로 인하여 곡물을 생산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주변의 정주민과의 교역을 통해 이를 보충했다.

가정생활에 필요한 일용품이나 무기류, 사치품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동 생활은 아무래도 수공업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각종 수공업 제품 역시

외부로부터 구입해서 썼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유목 경제의 취약성에 있었다.

매년 반복되는 여름 가뭄과 들불은 목초지를 망가뜨려 유목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겨울이면 매서운 추위와

폭설로 인해 한꺼번에 수십만 또는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떼죽음을 한다.

이런 이유로 유목민들은 항상 주기적인 자연재해와 항상 목초지 부족에 시달렸으며, 이는 언제나 생계의 원천인

가축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또 일정 범위를 넘는 부(가축과 재산)의 증식은 유목의 핵심인 이동을 방해하여 유목민의 생산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유목은 부의 무한정한 증식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생업이고, 유목민은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고 할 수 있다.

5) 최근 몽골의 5종 가축 통계


              2007             2008             2009             2010             2011
염소  18,347,800   19,969,400   19,651,500    13,528,500   15,934,600
양     16,990,100    18,362,300    19,274,700   14,050,800   15,668,500
소      2,425,800     2,503,400    2,599,300   2,123,700     2,339,700
말      2,239,500     2,186,500     2,221,300    1,860,600     2,112,900
낙타     260,600          266,400      277,100      265,300        280,100
총계 40,263,800 43,288,500   44,023,900  31,828,900   36,300.000

  * 2010년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 조드였다. 

     몽골어 사전의 조드(зуд) → 천재지변, 눈(날씨)에 의한 천재(재해, 재난, 참사).

     몽골인들은 조드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드에 관한 갖가지 격언들이 있다.

     → "부자는 한 번의 눈보라로, 영웅은 단 한발의 화살로..." 

 유목민 사이에서 벌어졌던 끊임없는 투쟁과 대립도 물자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유목민들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물자를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곡물과 수공업 제품을 비롯한 물자 조달 문제는 지금까지 유목민들의 정주 지역으로의 진출(침략과 약탈)의 가장

큰 요인으로 얘기되어 왔다.

그리고 유목민들의 침략과 약탈을 생계의 일부, 즉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설명해 왔다.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이러한 논의 역시 두 지역의 관계를 올바로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목이 농경에 비해 생산성이 낮고, 따라서 유목민들은 외부로부터 물자를 구입해서 삶을 유지해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상 존재했던 유목민과 정주민의 관계를 편견 없이 고찰하면 약탈이나 전쟁보다는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바꾸는 교역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자주 약탈을 행하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뿐 약탈 자체가 일상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유목민 하면 중원(中原)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물자를 약탈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그 결과 문명의 파괴자나 야만인이라는 말은 유목민에게 붙여진 상투적인 별명이 되었는데 그 원인은 이른바 사료

(史料)라는 기록 때문이다.

역사상 유목민은 대개 자신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목민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중국이나 주변 지역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목민에게 공격당한 사건은 극도의 피해 의식이 담겨 있고, 반대의 경우는 유목민에 대한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하다.

역사학은 기록의 학문이고, 그래서 기록을 남긴 쪽이 역사에서 승리하기 마련이다.
유목민과 유목 문화에 대한 편견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승리일 뿐 역사의 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유목민 자신이 정리한 역사 자료는 이와 정반대의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는 오히려 유목민과 정주민의 관계는 우리들이 통상 이해하고 있듯이 긴장과 대립보다는 평화 공존

(교역)이 더 정상적인 형태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두 세력을 때로는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의 사서(史書)에 나타나 있는 유목민에 대한 편견은 농경과 유목이라는 생업상의 이질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물론 유목민에 의해 자행된 약탈과 공격이 그러한 편견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생업의 차이에 따른 편견은 정주민뿐 아니라 유목민에게서도 나타난다.

13세기 몽골 군대의 대량 인명 살상 역시 상대방(정주민)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땅에서 자라는 풀을 뜯어먹는 가축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유목민)의 눈에 비친 농경민, 즉 가축과 똑같이 땅에서

생산된 음식을 먹고, 땅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어떤 모습이었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따라서 유목민과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평가할 때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올바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4. 유목의 교훈
  20세기에 들어와 사형선고를 받은 유목과 유목민들의 삶은 풍요의 세계에 사는 현대인들의 미래에 거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유목민의 생계인 유목. 이것은 현대인의 '오래된 미래다.'
유목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에 인위를 가하지 않는 것이다.

대자연의 선물인 목초지에 가축을 풀어놓으면 가축은 그 풀을 뜯어먹고 자라고 사람은 그 가축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풀을 잘 자라게 하기 위하여 비료를 줄 필요도 없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축에게 따로 사료를 주지도 않는다.

농업이 어떤 식으로든 자연에 인위(人爲)를 가하는 생업이라면, 유목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유목은 인류가 개발한 생계 방식 중 가장 환경친화적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유목은 낡은 생산양식이라는 이유로 폐기되고 처분되어야 할 운명을 맞이했다.

과학적 합리주의를 내세워 목초지를 개간하고, 그곳에 유목민을 강제로 정착시켰다.

무력을 동원하여 시행된 정착화 작업은 종종 유혈을 동반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유목과 유목민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사막화로 인한 환경 파괴다.

초원이 초원인 이유는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동 목축인 유목이 행해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착 목축을 하고 초원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되면, 초원이나 농경지 주변이 사막이나 황무지로

변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현재까지 유목을 행하는 외몽골 초원에 비하여 사실상 정착 목축을 하는 내몽골 초원의 사막화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지는 황사도 이른바 개발의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고 물자를 생산하는 유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오래된 미래'다.
유목의 또 다른 특징은 초원을 이용하되 누구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유목민의 사고에 따르면 땅은 본디 하늘에 속한 것이다.

인간은 하늘의 선물인 땅을 일시적으로 빌려 쓰는 존재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땅에 주인이 나타나고, 그래서 땅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공동으로 관리하고 소유해야 할 땅, 이것이 개인의 재산이 되면서 빚어진 비극은 인류사의 비극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유목과 유목민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교훈은 간단치 않다.


 유목민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목은 이동 목축이다. 아니 이동을 하기 때문에 유목이다.

이동하지 않으면 유목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

방랑벽 때문이 아니고 물과 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좋은 물과 풀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목축, 이것이 유목의 본질이다.

그래서 이동은 몸이 가벼워야 한다. 가축도 적절해야 하고, 세간도 나무 많으면 안 된다.

일정한 기준을 넘어가면 이동이 문제가 되고, 결국 유목의 존립 기반이 무너진다.
따라서 유목민들은 그것이 가축이든 물건이든 부를 무한정 증식시킬 수 없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초원의 들불, 겨울의 한파와 폭설, 가축의 질병으로 매년 수많은 가축이 집단

폐사된다.

그 숫자가 다를 뿐 1000년 전이나 100년 전에도 그랬고, 금년에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역대 유목민들은 역설적이게도 항구적인 가축 부족에 시달렸다.

이것이 지난 수천 년 동안 북방 초원에서 살아온 유목민의 숙명이다.

생업의 특성상 가축을 무한정하게 늘릴 수 없고, 그래봤자 목초지가 부족해지면 그 생산 기반이 무너질 수 있고,

그것마저 자연재해와 질병에 노출되어 있는 삶, 그런 삶을 사는 유목민은 진정 고달프고 애처로운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은 이상하게 공평하다.

힘들고 고달프고 가련하기까지 한 유목민의 삶은 우리 인류에게 미래의 길을 알려 주고 있으니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유목민의 정의에 따르면 고전적인 의미의 유목민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원래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유목의 가장 큰 특징을 간소함과 질박함에서 찾는다.

유목 세계에서는 생각까지 투명하고 소박하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흔적(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대자연 속에서 하늘이 준 운명대로 진솔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유목민 고유의 삶의 철학이다.
무한정한 부의 증식이 제한되는 것처럼 구성원의 절대빈곤 역시 제한되는 것이 유목 사회의 특징이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축을 소유하지 못한 유목민은 유목을 중지할 수밖에 없으니, 만약 그렇게 되면 강고한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유목 사회 자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실제로 역사 속의 유목 사회를 보면 구성원 간의 연대가 무엇보다 중시되었다.

낮은 생산성, 열악한 기후와 자연조건 때문에 씨족 혹은 부족 단위로 단결하지 않으면 생존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목 사회에서는 언제나 호혜 평등과 상부상조가 최선의 미덕으로 지적되었다.

생존 조건이 극부(極富)와 극빈(極貧)을 저지하고, 더불어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역사 속의 유목민들을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살았다.

물질 만능주의, 생산 지상주의, 각종 지위 쟁탈에 찌든 우리들이 한 번쯤 되새겨 볼만하지 않은가?

 *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 노자 <도덕경> 제25장

 *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를 먹는 대형 독수리, 타스나 들개들에게 먹게 하는 조수장(鳥獸葬).

 * 노자가 장례절차를 물어보는 제자에게 "나장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화들짝 놀란 제자들이 만류하자 "매장하여 땅벌레에게 먹히는 것과, 들판에 버려져 조수의 먹이가 되는 것이

무슨 차이인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5. 몽골 유목 문화
 몽골인들도 우리처럼 음력설을 샌다.

이를 몽골어로 ‘차강 사르’라 한다.

차강 사르. '하얀 달'이라는 뜻이다.

몽골인들에게 흰색은 깨끗함과 순결의 상징이다.

성스러움과 길상과 풍요의 빛깔도 흰 것으로 나타낸다.

좋은 것은 다 같다 붙여놓은 샘인데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몽골인들의 전통 생업은 유목 목축이고, 유제품은 그들의 주요 양식이다.
하얀 달 차강 사르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곧 유제품이 풍부한 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차강 사르도 원래 가축의 젖이 많이 나는 9월에 지냈다.

지금처럼 정월 초하루로 고정된 것은 13세기부터다.

중국을 지배한 몽골인들이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몽골의 세배는 좀 특이하다.

반듯이 전통 옷(델)을 입고 세배를 주고받는다.

나이 든 분들은 모자와 전통 신발(고탈)까지 갖춰 입는다. 이를테면 정장을 한다는 얘기다.

세배는 자식이 먼저 팔을 펴서 부모의 팔꿈치를 가볍게 붙들면, 부모가 팔을 펴서 그 위에 올리고 상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하는 식으로 한다.

전체적으로 차강 사르는 우리의 설 분위기와 흡사하다.

자식이 부모를 찾고, 선물을 주고받고, 한 해의 건강을 축원하는 것도 비슷하다.


  몽골인이 지내는 최대의 여름 축제는 '나담(Naadam: 놀이, 경기, 축제를 뜻함)'이다.

 13세기 칭기즈칸 시대도 확인되는 나담은  유목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몽골의 대표적인 축제다.

 나담에서는 활 쏘기, 말 달리기, 씨름 등 남자들의 3종 경기가 벌어진다. 

 몽골국의 경우 현재는 1921년 사회주의 혁명 기념일인 7월 11~13일까지 국가적 제전으로 진행된다.
남자의 3종 경기는 몽골인의 전통 생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렵과 목축을 기반으로 하는 몽골 유목민인의 삶에서 기마와 궁술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자 삶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북방 유목민들은 대대로 기마와 궁술을 익히고 연마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으며,

종교의례나 경축일 등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평소에 익힌 기예를 선보이는 시합을 했다.

기마와 궁술은 이처럼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연마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놀이문화로 정착되었다.
또한 몽골의 거친 대지와 혹독한 자연환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련이었다.

여기서는 강인한 정신력과 힘이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나기 위한 사냥과 전쟁에서도 무엇보다도 강인한 체력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씨름판을 벌여 평소에 닦은 실력을 겨루고 시험했다.

이런 점에서 씨름도 삶에 필요한 힘을 기르고 기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이 놀이문화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나담은 몽골인의 삶과 역사가 여과 없이 투영된 놀이문화다.

그런 이유로 나담 경기의 각 종목과 거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행위 속에는 몽골인의 신앙 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나담은 몽골 유목민이 이룩한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종합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나담이 현재까지 몽골의 가장 큰 축제로 계승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몽골인은 어디에 있든 나담을 기억하고 여름이 오면 어떤 식으로든 나담을 즐긴다.

몽골족의 영원한 고향 몽골국은 물론, 내몽골과 바이칼 호 주변의 부랴트공화국 등 몽골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담이 열린다.

중국 '내몽고자치구'의 몽골족 역시 7월에서 8월 사이에 독자적인 나담을 개최한다.

외국에 있는 사람들도 나담을 지내기 위하여 귀국하고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나담에 맞추어 고향을 찾기도

한다.

심지어 남의 나라 땅에서도 나담을 즐긴다.

돈벌이를 위하여 한국에서 일하는 몽골국 몽골 사람들도 사회단체의 주선으로 해마다 약식 나담을 즐긴다.


 몽골인의 의식주 생활은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고 있다.

도시민들은 우리처럼 주로 아파트에서 살고 유목민들은 천막에서 이동생활을 한다.

 몽골인들은 주로 밀가루 음식과 고기나 유제품을 먹고. 야채나 과일, 특히 물고기 등은 거의 먹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적게 먹는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몽골국 몽골인들에 대한 것이고, 부랴트공화국이나 칼미크공화국, 그리고 중국내 몽골인들은

러시아와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물고기도 잘 먹는 편이다.

여름철의 계절 음료로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아이락)가 유명하다.

마유주는 몽골을 대표하는 유제품이자 몽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로, 그들은 이를 하늘이 선사한 음료로

인식하고 있다.


6. 몽골 유목민의 종교
 현재 몽골국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속칭 '라마교'라 불리는 티베트 불교이다.

인구의 90% 정도는 불교도이거나 친(親) 불교적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티베트 불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중국이나 러시아연방 내 몽골족들도 큰 차이가 없다.

불교는 물론 외래 종교이고 상당히 후대에 몽골 땅에 전해졌다.

몽골인들이 의식적으로 불교를 신봉하기 시작한 시기는 13세기 후기부터다.

중원의 황제가 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사캬파)를 받아들여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그 스스로 불교에 귀의하는 등 불교를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불교의 전파는 일부 지배층에 한정되고 대중 사이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대다수 몽골인들은 여전히 샤머니즘을 비롯한 몽골의 전통신앙을 숭배했으며, 심지어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옹호한 궁정에서조차 샤먼이 활동했다.
불교가 몽골 땅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시기는 16세기 말기부터다.

그 당시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은 새로운 시주처(施主處)를 구하기 위하여 몽골에 눈을 돌리고, 이에 호응하여

몽골 귀족들이 불교를 적극 비호함으로써 몽골인들이 불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 후 불교는 몽골인 거주지 전역으로 확산되고, 불과 1~2세기 만에 몽골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단기간에 몽골인들이 불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제3대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베트 불교 교단 지도자들과

초창기 포교사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몽골 귀족들의 열성적인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불교 교단과 몽골 지배층들은 기존 신앙체계를 억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불교에 통합시키기 위한

양면작전을 구사했다.

전통신앙에 대한 탄압은 주로 샤머니즘에 집중되었고, 개종 초기의 불교사는 두 종교 간의 투쟁과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다가 불교의 우위가 확보되는 18세기를 전후하여 두 세력 사이에 통합과 화해가 이루어졌다.

불교도들은 포교를 위하여 샤머니즘을 적극 통합하려고 했고, 샤머니즘 신봉자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불교의

경전이나 용구, 복식을 차용하여 자신을 위장했다.

이와 동시에 불교 측은 몽골의 민간신앙을 라마교 교리체계로 통합하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몽골 민속과 무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神)들이 불교의 만신전(萬神殿)에 통합되고, 개별 민간신앙은

대부분 불교식으로 정비되었다.

따라서 16세기 말 이후 전체 몽골족 거주지의 종교 지도를 보면, 티베트 불교가 중심을 차지한 가운데 불교화된

샤머니즘이 그것과 나란히 혹은 그 뒤를 쫓아가고, 불교식으로 재조정된 민간신앙이 기층을 형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 척박한 환경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몽골인들은 인본을 중시하는 유가사상보다는 자연을 으뜸으로

      하는 도가사상이 바로 그들의 정서였다.

  20세기 초기에서 중엽에 거쳐 몽골인 거주지 전역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몽골의 종교와 전통신앙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샤머니즘을 비롯한 전통신앙은 불법화되고 불교 역시 직간접적인 압박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례로 외몽골에서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1921년 이후 갖가지 방법으로 불교를 억압하다가, 1937년을 전후하여

인적 청산이 개시됨과 동시에 모든 사원이 폐쇄되는 등 극심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몽골 인민공화국 시대(1924~1992)에 샤머니즘은 원칙적으로 불법적인 사상이었고, 민간 의례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든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종교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 상태는 몽골 각 지역의 정치 상황이 변화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변화의 파고는 중국령 내몽골에서 밀려왔다.

 1970년대 말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은 몽골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한 관용으로

이어졌다.

몽골국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89년 이후 몽골국에서는 정치적 민주화 운동과 함께 전통문화 복원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민족주의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회주의 시절에 억압받았던 전통종교와 신앙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불교는 이 시기 몽골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아 종교로서 굳건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동안 표면상 자취를 감춰버린 무당들도 1990년 이후 활동을 재개하고 있으며, 1930년대 폐지되었던 몽골의

대표적인 민간 의례인 '오보제'도 매년 다시 열리고 있다.

몽골의 불상

7. 몽골의 문화유산
 몽골인 거주지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70(30)여만 년 전(?)이다.

몽골에는 이들 선사인과 그들의 후손들이 남긴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과장하면 몽골은 국토 전체가 문화유산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다.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흉노(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라 불리는 집단이다.

그 뒤 선비(기원 2~4세기), 유연(4~6세기), 돌궐(6~8세기), 위구르(8~9세기), 거란(10~12세기) 등 어디서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몽골 땅에 나라를 세우고 지배자로 군림했다.

이 사람들은 물론 몽골족은 아니다. 몽골족은 원래 대흥안령산맥 북방의 흑룡강 상류 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9~10세기 이후 지금의 몽골 초원으로 이주하고 13세기 초기부터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몽골 초원에는 선사시대에서 몽골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인간 집단이 남긴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다.

암각화도 그중 하나다.

현재 내외몽골을 비롯한 몽골인 거주지 전 지역에서 예술성이 높은 암각화가 남아 있다.

기원전 10세기 전후 또는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대형 적석총도 몽골의 대표적 선사 유적이다.

적석총 주변에는 대개 사슴 문양이 그려진 사각 돌기둥, 즉 녹석(鹿石)이 단독 또는 복수(10~20개)로 서있다.
역사 시대 유적으로는 무덤과 분묘 주변의 구조물을 들 수 있다.

무덤은 그 구조나, 크기, 형태를 통하여 해당 시기 사회 구조를 추측할 수 있고, 무덤 주변의 구조물을 통하여

그 시대의 의복, 무기, 일용품 등을 재현할 수 있다.

돌궐 시대 비문과 그 앞의 석렬(石列)은 무덤의 부속물이다.

원래는 주변에 담장이 둘러쳐 있고 무덤의 주인인 훈촐로(석인상)가 서 있다.

다만 이번에 전시된 훈촐로는 다른 구조물이 없는 경우다.

8. 한-몽 문화교류
  1990년 3월 26일 한국과 몽골국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인적 물적인

교류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중국 및 러시아와 한국과 국교 수입 이후 부랴트나 내몽골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그동안 몽골국에 집중되었던 몽골 관광이 내몽골 쪽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그러나 한-몽 교류하면 뭐니 뭐니 해도 몽골국과의 교류다.
국교 수입 이후 단기간에 양국 사이의 교류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데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그동안 이념적인 문제로 갈 수 없었던 지역이 개방되면서 일종의 교류 확대라는 측면에서 전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몽골인들이 우리와 뿌리가 같다는 막연한 생각(몽골로이드, 즉 황인종에 대한 오해)과 고려와 몽골의

특수한 관계(지배와 종속 관계)에서 비롯된 정서적인 이유도 두 나라 사이의 교류를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갑작스러운 교류 확대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작용도 수반했다.

부작용은 특히 학술분야에서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뿌리 찾기의 일환으로서 몽골에

접근하게 되면서 몽골과 몽골 문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먼저 언어 문제를 보면 일부 학자들은 이른바 '알타이어족설'에 근거하여 한국어와 몽골어의 유사성을 밝혀보려고

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이 입론(立論)의 근거로 삼고 있는 이 학설(알타이어족설)은 그 타당성을 여부를 놓고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하나의 완결된 이론으로 정착되지 못한 상황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러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물론 13~14세기 고려와 몽골(원나라) 관계를 통하여 많은 몽골어 어휘가 우리 국어 속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들어온 몽골어는 문자 그대로 차용어일 뿐 언어의 계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한-몽 문화교류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주제는 우리의 서낭당과 몽골의 ‘오보’(ovoo)의 관련성 문제다.

몽골 각지에는 우리의 서낭당과 유사한 오보라는 돌무더기 신앙 대상물이 산재한다.

오보

 오보는 지금까지도 몽골인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몽골을 대표하는 신앙 대상물인데

학자들은 이 오보와 오보신앙이 처음 원시인이나 고대인들의 경계표지, 자연숭배, 샤머니즘, 고대국가의

제사 등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보의 형태는 돌무더기 + 버드나무 가지 + 옥색 천(종이 조각)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림지대에서는 돌 대신 나무를 쌓고, 또한 돌이 귀한 지역에서는 흙이나 모래를 쌓기도 한다.

오보는 주로 산의 정상이나 고개, 호수가, 도로변에 위치하고 현재의 주요 기능은 여행자의 안전을 비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주요 오보에서는 6, 7, 8월경에 오보제를 지내는데 특정 오보제는 국가의 주관하에 전국 규모로 거행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무당이 오보제를 주제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승려들의 몫이다.

사람들은 오보제를 통하여 국가나 마을의 재앙을 막고 복원을 부르고 생업인 가축의 번성을 기원한다.

몽골국의 경우 20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오보제가 매우 번성했으나 사회주의 시절에 폐지되었다가

1990년부터 다시 부활되었다.
 또한 몽골 각지에는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유사한 훈촐로(석인상)가 산재한다.

현재 남아있는 훈촐로는 대체로 두 시기 즉, 돌궐시대(6~8세기)와 몽골제국 시대(13~14세기)의 것이다.

전자는 주로 중서부 지역에 산재하고 후자는 동몽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석인상은 원래 죽은 이(귀족이나 지역 명망가)의 무덤 주변에 세우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내는 한편, 후대 사람

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건립한 기념물이다.

그동안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구체적인 논증도 없이 제주도의 돌하르방의 기원을 몽골의 훈촐로에서 찾았다.

그러나 두 기념물은 양식과 기능면에서 매우 이질적이라는 것이 전문 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첫째 몽골의 석인상이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全身像)인 데 반하여 돌하르방은 서 있는 반신상(半身像)이고,

둘째 전자가 각기 다른 얼굴과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에 반하여 후자는 얼굴이 무섭고 획일적이며.

셋째 전자가 제단의 역할을 했던 데 반하여 후자는 수호신이나 샤먼의 우상이나 관가의 출입 금지를 표시하는

기능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한-몽 문화교류의 사례로서 얘기되어온 것들은 논리적으로 불충분하거나 좀 더

확인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따라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기존의 설을 답습하는 것보다 고고학, 미술사 자료 등 구체적인 자료에

 의거한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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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평래 옮김,『몽골의 종교』(소나무, 2003년)
장장식 지음,『몽골에 가면 초원의 향기가 난다』(민속원, 2005)
이평래 옮김,『중앙유라시아의 역사』(소나무, 2005년)
신현덕 지음,『몽골』(휘슬러, 2005)
이평래 옮김,『몽골 신화의 형상』(태학사, 2007)
대구MBC HD 특별 기획 10부작 <몽골> 제작팀,『몽골』(이른 아침, 2008)
유원수 지음,『몽골의 언어와 문화』(소나무, 2009년)
강정원, 박환영, 이평래, 장준희,『세계의 말 문화 I-몽골ㆍ중앙아시아』(2009, 한국마사회/마사박물관)
김장구/이평래 옮김,『몽골의 역사』(동북아역사재단, 2009)
이옥순, 심혁주, 김선자, 이평래, 선정규, 이용범,아시아의 죽음 문화-인도에서 몽골까지』(소나무, 2010)
정수일,『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창비, 2010)
김호동,『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2010)

제38기 박물관 특설강좌, 이평래 교수(한국외국어대학교)교재를 옮겨 적고

    강의 내용과 일부 개인적인 참고사항 및 사진을 보태어 감히 함께 정리하였다.

몽골 조라크의 대표적 화가인 샤라브가 그린 <몽골의 하루>

서서 아기를 출산(出産) 하는 모습부터 조수장(鳥獸葬)까지

몽골인의 일생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그린 그림으로 매우 사실적이다.

칭기즈 칸, 본명은 테무진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중에서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

황제를 경호하는 중기병​  

중동의 한 도시를 포위한 몽골군

 

▶ 몽골 연대표

  • BC 3~1세기- 첫 번째 몽골 제국 Khunnu
  • BC 1세기~AD 320- 두 번째 몽골 제국 Syanbi
  • AD 330~402- 세 번째 몽골 제국 Nirun
  • AD 402~555- 네 번째 몽골 제국 Jujan
  • AD 555~745- 몽골 땅의 첫 번째 터키 제국
  • AD 745~840- Uigur 제국
  • AD 840 강력한 Kirgiz 유목민의 중앙아시아 출현
  • AD 10~12세기- Kidan 제국
  • AD 12세기- Khamag 몽골 부족
  • 1162, the black horse year - 칭기즈칸이 되는 태무진이 몽골 부족 왕자로서 출생
  • 1170- Borte에서 태무진이 Khongirad 의 부족 공주와 약혼
  • 1177- Borte에서 태무진 결혼
  • 1179- 태무진이 Gurvan Merghid 부족의 전쟁에서 승리, 그의 첫 아들 Zuchi 출생
  • 1183- 둘째 아들 Tsagaadai 출생
  • 1186- 셋째 아들 Ogoodei 출생
  • 1189- 태무진이 통일된 몽골의 왕위에 오르고 칭기즈칸의 칭호를 얻는다.
  • 1193- 넷째 아들 Toului 출생
  • 1206- 칭기즈칸은 더 큰 몽골의 칸이 된다.
  • 1206- Uighur가 공식적인 몽골어로 채택
  • 1206- 기수가 칼을 휘두르는 초상이 담긴 동전의 제작
  • 1215- 칭기즈칸의 중국 정복
  • 1219- 칭기즈칸의 남쪽 국가 정복
  • 1220- Kharakhorum이 대몽골 제국의 수도로 채택
  • 1224- 중동, 아라비아, 서방국가, 인도를 침입하기 시작하는 칭기즈칸
  • 1224- 가장 오래된 몽골 기록인 'Chinggis Stone'을 세우다
  • 1227 - 칭기즈칸 사망
  • 1228- Ogoodei 왕위 쟁탈
  • 1234- Ogoodei 칸이 특사 시스템인 ortoo hourse 설치
  • 1235- Tumen Amgalant 궁전 Khahakhorum의해 건립
  • 1236- Ogoodei 칸의 지시로 세계 최초 지폐 사용
  • 1240- 몽골의 비밀 역사 종료
  • 1235~1259-Kharakhorum 건축 완료
  • 1246- Guyug이 칸이 되다
  • 1251- Munkh이 칸이 되다
  • 1260- Arigh Bukh이 왕이 되다
  • 1261- Arigh Bukh와 Khubilai 사이 전쟁 시작
  • 1270- Khubilai Khaan이 지방, 지역, 몽골의 수도 Yuan에 학교 설립
  • 1274- Khubilai Khaan이 일본을 처음 공격
  • 1305- 몽골 철학자 Choiji-Odser이 그의 유명한 저서인 " Zurkhen Tolit" 집필
  • 1368- 중국에서 몽골 법규가 실패하고 Yuan제국 붕괴
  • 1369- Yuan 제국의 역사가 기록
  • 1370- Kharakhorum이 다시 수도로 지정
  • 1382, 1408, 1439- 몽골의 모스크바 공격
  • 1466- Batmunkh Dayan이 칸이 되다
  • 1577- Altan 칸과 Abtai 칸이 불교 승인
  • 1586- Erdene Zuu이 건축되고 첫 번째 불교 수도원이 되었다
  • 1616- 몽골내 러시아 첫 번째 대사관 개관
  • 1635- Zuunghar 제국
  • 1636- 내몽골의 Manchu Qing 포획
  • 1639- Tusheet Khan Aimag의 왕자 Zanabazar이 몽골의
  • 불교 Yellow Faith의 수령으로 임명
  • 1671- Galdan이 Zuungar의 왕이 되다
  • 1686- Zanabazar이 Soyombo 문서 제작
  • 1688~1697- Zuunghar 와 Khalkha 사이 전쟁
  • 1691- Khalkha 몽골이 자치권을 만주 Qing 제국에 이양
  • 1754- Zunghar이 만주 Qing에 붙잡히다
  • 1754~1911- Manchu의 식민지 시대
  • 1778- 수도 Ikh Khuree이 현재 Tuul강 제방 위치에 설립
  • 1911- 몽골 군주제가 8번째 Bogd로 선언
  • 1913- 몽골 내에 첫 번째 신문 발행
  • 1919- 중국의 몽골 침입
  • 1921- Red Russians의 도움으로 몽골 독립
  • 1924- Bogd 칸 사망, 몽골의 공화국화
  • 1937- 종교 관련 활동 금지, 수도원 부근 모든 시설물 파괴
  • 1990- 민주당 혁명, 공산주의자 정권의 실패
  • 1996- 몽골 민주당 연합 의회제 선거에서 승리
  • 2000 - 몽골 공산당의 의회제 선거 승리
  • 2004- 몽골 민주주의 연합 의회제 선거 승리
  • 2005. 5.21 대통령 선거 실시 N. Enkhbayar 대통령 선출
  • 2008. 6.29 총선 실시: 인민혁명당 76석 중 45석 확보(총선 부정 시위 발생-5명 사망. 4일간의 비상사태 선포)
  • 2009. 5.24 대통령 선거 실시. Ts. Elbegdorj 대통령 선출(민주당 51.24% 득표)
  • 2009. 10.29 S. Batbold 제26대 국무총리 취임 (S.Bayar 전 총리가 건강 악화로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