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인터뷰 - lu-i 16se inteobyu

프랑스 역사상 왕좌에 오른 군주들 중 가장 부드러운 왕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폭군이었던 양 단죄되어야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 국민공회는 불만에 가득찬 민중의 분노를 일부러 이 불행한 군주에게 돌리며 그(루이 16세)를 처형할 것 같은데, 바로 그를 왕좌에 끌어내리고 공화국 헌정 체제 도입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이다.


당시 재불미국대사 거버너 모리스의 일기 중


결국 1792년 4월, 혁명군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와 왕비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입법의회와 시민들은 궁전을 점거한 다음 국왕 부부를 감금하고 왕정을 정지시켰고, 나중에는 루이 16세를 폐위하고 왕정을 종식시키면서 프랑스에선 9월 21일에 혁명정부의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리고 11월에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나면서 '시민 루이 카페(Louis Capet)'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3년 1월 21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참고로 카페(Capet)는 부르봉 왕조의 본가인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별명이자 그의 부계 후손의 본성이다.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명을 성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본래의 성을 부를 일이 없었다. 따라서 루이 16세의 경우 굳이 따지자면 '루이 드 프랑스'가 이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즉, 루이 16세를 '루이 카페'로 지칭한 것 그 자체로 루이 16세가 더이상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루이 16세는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가 폭망한 군주까진 아니었기에,[31] 여론이 악화된 가운데서도 투표에선 총 투표수 700여 표 중 반대가 300표를 넘었을 정도로 루이를 죽이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허나 이를 이용해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형식적인 사형 선고 이후의 집행유예를 지지했고, 아예 국왕 폐하를 재판하는 것 자체가 무엄해서 투표할 수도 없다는 식으로 기권표를 던진 사람들도 상당수였다는 식으로 팩트를 곡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하게 따져보면 국민 공회에서 루이 16세에 대한 투표는 총 721명 중 즉시 처형 361표, 사형 판결에는 찬성하되 집행유예[32] 23표, 처형 반대-종신 금고형 319표, 기권 18표였다.[33] 과격파 생쥐스트가 주장한 즉시처형[34]이 361표로 정확하게 과반수가 뜨면서 루이 16세는 처형되고 만다. 즉시 처형 361표 중에서 단 1표만 집행유예나 종신금고형으로 바뀌었으면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 좌우파 구분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35], 동서양 어디든 시민이 왕의 목 자르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부담스런 판단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물건너 영국에서 찰스 1세를 처형하자 당시 프랑스는 왕 모가지 치는 과격한 놈들이라고 디스했던 과거가 있었고, 그 영국마저도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독재정치를 시행하자 그가 죽고 난 이후 다시 왕정을 복고하였다. 그리고 크롬웰은 부관참시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외국으로 망명하고 찰스 1세를 처형하는데 앞장선 정치인들이 처형되었다. 그러다 보니 온건한 사람들은 왕을 죽이는 대신에 살려서 입헌군주제로 가자고 했고, 급진적인 사람들은 시민과 대의, 루소 사상 같은 것들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왕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바로 이 점에서 왕을 죽이자고 하는, 한 체제의 완전한 단절에 준하는 결정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이 대체로 좌파, 그래도 어떻게 왕을 죽이냐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로 온건파, 우파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36] 좀 더 정확히는 당시 의회에서 처형 주장하던 자코뱅 파의 의석 위치가 왼쪽이었고, 온건책 주장하던 지롱드 파 자리가 오른쪽이었다고 한다.

사실 혁명파는 루이 16세를 죽이지 않는 한 프랑스의 왕정은 언제든지 복고될 수 있다고 봤기에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루이 16세를 처형시켜야 국민국가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는 판국이었는데[37], 이러다보니 혁명세력들 중에서도 급진파의 한명이었던 생쥐스트는 "왕이 받은 혐의 중 무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혁명이 유죄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왕에게 죄가 없다면, 혁명이 죄가 된다." 라고 할 정도였다.[38] 심지어 자코뱅 강경파들은 재판도 필요없이 그냥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롱드 당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마지못한 정치적 재판을 거행했다.

물론 상기했듯 루이 16세는 프랑스 특히 혁명파 입장에선 아예 죄가 없는 건 아니라, 루이 16세가 기소된 가장 핵심적인 죄목은 '오스트리아와의 내통' 혐의였고, 이는 루이 16세 자신이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탈출하려다 붙잡혔으니 사실관계 자체는 명확하다고 봐야 한다. 반대로, 루이 16세와 왕당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정당한 왕권을 혁명파(반란세력)에게 빼앗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혼인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려던 시도였으니 범죄라고 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생쥐스트의 발언은 구체제-왕권신수설의 논리와 신체제-국민국가의 논리가 충돌하는 지점을 짚어낸 것이다. 생쥐스트나 마라도 인정한 것처럼 루이 16세 자신은 꽤 도덕적 품성을 갖춘 인물이었고, 자의로 범죄를 저지른 인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구체제-왕권신수설의 논리에 따라 정당하게 행동했지만, 이 행동은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던 국민국가의 논리에 따라 보면 '반역행위'라는 것. 말하자면, '어떤 논리에 따라 보면 왕의 행동은 분명 무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논리에 따르면 (설령 왕을 존중하며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왕의 권력과 권위를 침해한 혁명세력의 행동은 유죄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인 것. 이 부분은 루이 16세 스스로 혁명세력 내에서 왕에게 우호적인 세력의 정당성을 파괴한 것으로, 정치적 패착에 가깝다.

결국 재판정에 선 루이 16세는 겸손한 태도로 자신에게 선고된 50여 가지 혐의에 대해 항변했으며, 최대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 16세는 '국민의 피에 미친 폭군'이란 죄목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39]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은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조용히 항변했다. 이 모습을 본 자코뱅파 내의 과격파 리더인 장폴 마라조차도 "저 사람이 유죄만 아니었다면[40] 정말로 존경스러운 사람이다."라는 평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루이 16세의 변호인들은 열심히 변호했음에도 애초부터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나아가려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기에 국민공회는 즉각 표결에 들어가 처형이 가결되고[41] 사형이 선고되면서 루이 16세의 사형이 집행된다. 여담으로 그를 변호했던 변호사,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증언을 한 증인들도 이후 반혁명파로 몰려 단두대로 끌려갔다는 설이 있다.

위의 재판이 끝난 다음 날, 루이 16세는 감옥을 나서면서 자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더라도 복수는 절대 생각지도 말거라!"


처형되는 날 루이 16세는 아침 일찍 일어났고 식사를 한 다음 성직자를 만나 고해성사를 하며 가족들과 마지막 만남을 가진 다음 이별을 한다. 단두대 앞에서, 그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수갑도 차지 않고 코트도 벗지 않으려고 했으나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받아들였다. 다만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왕만이 타는 금장 마차를 타고 단두대로 실려갔다. 유언은 "짐의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42]였다. 혁명 정부는 그가 죽기 싫어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등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선전했다고 하나, 루이 16세를 처형한 장본인인 샤를 앙리 상송은 '루이 카페'는 스스로 코트를 벗고 묶으라고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입시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의연하고 지엄한 태도로 죽었다고 했다. 물론 상송이 루이 16세를 좋아한 것도 있긴 했는데, "루이 16세만큼이나 가톨릭 신앙의 원칙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43] 혁명 초기 파리의 시민들이 왕궁으로 난입했을 때나(1792년 8월 10일 봉기), 죽기 직전 등에서 나름대로 위엄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꿀 순 없었다.

이런 모습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소설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루이 16세를 "품위있게 죽는 법만 알았다"고 평했다. <상송가회고록>이나 <왕의 목을 친 남자>란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상송은 처형 직전까지 그를 살리려 했고 그가 사형된 이후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추모하는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44] 처형 당시 루이 16세의 나이는 아직 한창 나이인 38세였다.

루이 16세 인터뷰 - lu-i 16se inteobyu

루이 16세 인터뷰 - lu-i 16se inteobyu

루이 18세 때 석곽묘로 조성된 무덤(왼쪽)과 기념물(오른쪽)

처형 직후 마들렌 성당에 잠시 매장되었던 루이 16세의 유해는 동생 루이 18세에 의해 1815년 1월 18일에 발굴되어 사흘 뒤인 1월 21일 프랑스의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아내와 함께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8일 루이 17세의 심장이 부모의 곁에 안장되어 사후 200년이 넘게 흐른 뒤에야 일가가 영면에 들었다.

3.3.1. 참형으로 인한 여파[편집]

유럽의 군주들이 감히 우리에게 맞서겠단 말인가? 그들의 발 밑에 군주의 모가지를 대신 던져주겠다!


조르주 당통


귀족이나 다른 왕족의 반란, 또는 외세의 침략도 아닌 자국 민중들이 봉기로 몰아낸 것도 모자라 왕의 목을 자른 이 전무후무한 사건은 다른 유럽 지역의 군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후 많은 유럽의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적대하거나 경계, 우려하는 태도로 나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인데, 그녀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푸가초프의 반란을 겪은 경험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으며, 주변국의 군주들에게 "프랑스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루이 16세를 다시 옹립하자"는 국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만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동서양 할 것 없이 군주가 반란으로 폐위되고 시해당한 예는 무수히 많았으나[45] 루이 16세의 처형이 주변 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이유는, 지배층도 아닌 하찮은 평민들이 그들 스스로 재판관인양 법을 집행해서 군주를 무슨 형사사건의 죄인 취급하고 재판하여 처형했으며, 이후에 새 군주를 옹립하거나 신 왕조를 개창한 게 아니라 아예 군주제를 폐지하고 군주가 다스리지 않는 공화국을 유럽 대륙에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군주가 반란으로 축출된 이전 사례들에서도 주동자는 권세가 매우 높은 귀족이나 다른 왕족이었으며, 폐위된 군주가 형사법을 적용받은 예도 없었다. 왕정 시절 로마의 타르퀴니우스 왕, 제정 시절 폐위된 수많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46], 중국사의 걸왕, 주왕, 후소제, 헌제, 원제, 수양제, 영국의 존 왕, 한국사의 봉상왕, 진지왕, 궁예, 의종, 우왕, 창왕, 공양왕, 연산군, 광해군 등도 어디까지나 귀족 또는 군부, 사대부 계층의 반란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폐위되었고 백성들이 직접 나서서 폐위된 군주를 죽인 예는 없었다. 비록 폐위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엄연한 군주였기 때문에 백성이 직접 죽이는 건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47] 게다가 다른 군주를 즉위시키거나 아예 역성혁명을 일으켜 본인 스스로 찬탈 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고 군주가 되어 군주제를 유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로마 같은 경우에는 비록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수립했어도 타르퀴니우스 왕을 민중들이 직접 죽이지는 않고 추방 정도에 그쳤으며, 사례는 다르지만 현대의 네팔도 2008년에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전 국왕이었던 갸넨드라와 그의 일가족들을 죽이지 않고 왕족 지위를 박탈하여 폐위시키는 선에서 처분했다.[48][49] 예외가 있다면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처형한 경우인데 청교도 혁명을 주도했던 크롬웰과 그의 지지/추종 세력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내 혁명 세력들처럼 평등주의자도 아니었고 그가 왕정 폐지 이후에 만들려던 공화정 체제는 시민이 직접 이끄는 나라가 아닌 크롬웰 가문이 통치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신정 독재국가였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은 이전과는 달리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개창한 게 아니라 아예 왕정 자체를 없애버렸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고대 아테네나 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예는 있어도 까마득한 고대인 데다가 프랑스 혁명과는 그 성질이 꽤나 달랐다. 게다가 영국은 청교도 혁명으로 혁명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잠깐 왕정이 폐지되었지만 올리버 크롬웰 사망 후 크롬웰파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비크롬웰파 세력들에 의해 참형당한 찰스 1세 전 국왕의 장남인 찰스 2세 전 왕태자[50]를 새 국왕으로 옹립시키면서 다시 왕정이 복고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벌어진 미국의 독립도 그것 자체가 세계사에 남을 만한 대사건이긴 했지만, 애초에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심지어 영국에 적대적인 나라 입장에선 영국의 주요 식민지 중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거라 쌤통이라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51]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미국 독립과는 달리 왕의 직접통치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왕이 직접 다스리는 군주국인 유럽의 프랑스 본토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는 당연히 프랑스 왕정의 폐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 독립을 원했을 뿐, 영국 본토로 쳐들어가 조지 3세를 죽이겠다는 수고는 할 생각도 할 능력도 없었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자신들의 군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사형시킨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게도 군주가 없는 새로운 나라를 유럽 한복판에 건국했다. 미국 독립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당시 유럽의 절대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군주가 하극상으로 폐위된 예는 고대부터 무수히 많았지만 군주가 없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출현은 주변 군주들 입장에서는 군주의 처형보다 더 큰 위협으로 비쳐졌으며 자신들도 그 꼴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의 처형은 필연적으로 유럽 군주들의 대불(대프랑스)동맹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4. 기타[편집]

몹시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해서 수감되었을 때는 교도관의 가정사정까지 신경을 써주거나 프랑스 국내에서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살짝 백치미가 있는 건지, 새벽 기도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전통 가톨릭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산물[52]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루이 16세에게 동정적이다.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인기가 있었으며 식탐이 많은 대식가였다. 갑갑한 궁중과 국정에서의 심한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해소한 듯. 사실 식탐 자체는 루이 14세를 보면 알겠지만 부르봉 왕가의 전통이었다. 오죽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적 특징이 주걱턱이라면 부르봉 왕가는 과한 식탐으로 인해 살찐 둥근 턱이 유전 같은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자신이 사형당하는 날 아침에 최후의 만찬으로 커틀렛 6인분과 큰 치킨과 많은 달걀, 베이컨, 프랑스산 와인과 스페인산 와인을 실컷 먹었다고 전해진다. 풍족하게 잘 먹고 활동한 탓인지 키도 193cm나 되는 장신에 위풍당당한 덩치를 자랑했다.

루이 16세 일가가 프랑스를 탈출하려다가 혁명군에게 잡힌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족발이다. 루이 16세의 탈출 마차가 생트메누(Saint-Menehould)[53]이라는 작은 도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시장기를 느꼈다. 루이 16세는 그 도시의 특산품이 돼지족발찜(Pieds de porc à la Sainte-Menehould)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차를 멈추게 한 후에 돼지족발 요리를 먹고 가자고 고집했다. 왕이 명령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돼지족발찜의 조리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었다. 먼저 돼지를 잡아서 족발을 채취한 후에 끓이고, 끓여서 삶은 족발을 또 건져내서 살짝 구운 후 또 저며서 빵과 같이 내어야 하기 때문에, 조리시간이 최소한 4시간은 되었다. 물론 국왕 일행이 생트메누 도착 후 바렌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실제 조리에 걸린 시간인 4시간까지는 아니었으며, 식당에서 한창 만들고 있거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요리를 주문하였다든지 하여 약 1시간 안팎으로 지체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시간 정도 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기어이 돼지족발찜으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길을 떠났다. 요약해 이야기한다면 루이 16세는 족발을 먹고 탈출길에 오르느라 탈출이 늦어져 욕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렌 사건 항목을 보면 알겟지만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므로, 단순히 맛있는 요리"만"이 원인은 아니다. 게다가 해당 족발 이야기의 출처는 소설가 뿐만 아니라 미식가, 향락가이기도 했던 알렉상드르 뒤마가 저술한 프랑스 요리 대사전이란 미식서적인데 뒤마의 성향이나 좀 많이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고려하면 뒤마가 저 생트메누란 지역 사람들과 합작으로 꾸며낸 야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를 종합하면 혁명도 있기 한참 전인 과거에 평소 루이 16세가 이곳을 시찰하던 중 족발찜을 수라로 맛보고 좋은 평을 한 적은 있었으나, 뒤마가 그런 왕실 일화를 듣고 착안하여 아예 족발찜으로 식사를 한 시점을 바렌 사건의 시점으로 각색해서 스토리텔링을 기획하여 홍보를 한 것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왕도 먹다 죽어도 모를만큼 맛있는 우리 고장 족발!"은 시대를 초월해서 누가 생각해도 훌륭한 광고 스토리니깐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루이 16세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왕의 피를 닦아 호리병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한 부호가 소장하고 있던 그 호리병을 발견했는데, 손수건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호리병 속에 들어있는 말라 굳어진 피를 분석한 결과, 실제 루이 16세의 것이 맞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규명됐다. 루이 16세의 조상 앙리 4세의 머리에서 추출한 유전자와 대조했다고. 관련 기사 다만 기자가 영어로 된 원본 기사를 그대로 번역했는지 앙리 4세를 헨리 4세라고 썼다.

귀족들이 하도 세금을 안 내자 도박으로 세금을 거뒀다고 하는데, 그 도박은 스페이드의 여왕에 나오는 파로(Faro)다.

당시로서는 물론, 현대 프랑스인들까지 포함해서도 보기 드문 영어 능력자였다.[54] 에드워드 기번의 책인 로마제국 쇠망사의 원서를 직접 번역했다고 한다. 영어는 물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등의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훗날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처형당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도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인간적인 면모와 인품은 굉장히 좋았지만 군주로서는 낙제점에 가까웠다는 점, 아내와 자식들까지 혁명에 휘말려 그 끝이 좋지 못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또 왕비가 독일어권 왕족이었고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실패했다는 점도 같다.

5. 평가[편집]

루이 16세는 구시대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해 희생된 군주였지만, 국가의 군주로서 국가의 쇠퇴를 막지 못한 것은 변명이 불가능한 실책이다. 전제군주제에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여 국가와 왕가를 존속시키는 것이 국왕의 의무이며, 통치자란 그걸 위해 앉혀놓는 자리고 못 해낸다면 왕조와 함께 멸망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만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성격'이나 '오랜 기간 교분을 가지면 알 수 있는 의외의 지성'은 한 개인에게는 덕목이 될 수 있으나, 왕을 위한 덕목은 아니다.[55] 루이 16세에게 직접적인 죄가 있다면 '왕으로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던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군주제적 가치관"에서 혁명파는 왕권을 제약하는 역적이고, 루이 16세가 외국(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서라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정당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루이 16세의 처가집이다. 유럽에서 군주끼리 서로 힘을 빌려주는 일은 흔했다. 처가집의 힘을 빌려서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군주제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공화주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죄였다.

사실 이 시기 유럽의 군주들은 자국의 평민보다는 다른 나라의 군주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서로서로 결혼으로 맺어지거나, 형제 자매끼리 왕위를 나누면서 상당히 가까운 친척 지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친척이다보니 서로 연락도 자주 하고 지내는 사이니까 당연히 더 친밀할 수밖에 없고, 신분과 입장이 완전히 다른 평민과는 달리 '같은 군주'라는 점에서 입장과 신분이 동일하기 떄문에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물론 때때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전쟁조차도 '친척들 간의 재산 다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공화제적 가치관"에서 이 시도는 시민과 그 대표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죽이려 하는 사악한 적대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루이 16세가 명분을 부여해서 끌고 온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리에 입성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역적으로서 살육당할 것이 분명했다. 정치적 가치관과 권력 투쟁을 논하기 전에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사형판결이 굉장히 신속하게 결정된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프랑스 백성들은 아직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의 영향으로 루이 16세를 "우리들의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루이 16세가 선대 국왕인 루이 15세만큼 개막장도 아니었고,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해 앙숙인 대영제국에도 한 방 먹인 터였으며, 가난한 인민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으며, 아내가 영국 다음으로 앙숙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지만 어쨌든 그리 폭군도 아니고 성격은 착한 왕이니까 자코뱅부터 말단 시민까지 그래도 살려두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강경한 혁명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왕을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시작하는 것은 무리수이니 그냥 헌법만 받아들이게 하고 계속 왕 시켜주자는 입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그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학살을 시도하려다가 걸린 셈이니 학살 목표로 지정되었던 시민들과 대표의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고, 생쥐스트는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라 주장했다. 말하자면 '어떤 논리(군주제, 왕권신수설의 논리)에 따르면 왕이 무죄일수도 있지만 그 논리에 따르면 혁명은 반역이다. 반면 혁명이 정당하다면 같은 논리에 따라 왕은 유죄다' 라는 논리이며, 생쥐스트는 왕이 오스트리아군의 힘을 빌리려 시도한 것 때문에 왕의 정당성과 혁명의 정당성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유부단한 성격인 루이 16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의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사실 의문스럽지만, 당시 시민들은 "왕의 배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루이 16세에게는 파리 시민들보다는 차라리 처남[56]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더 친근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런고로 억울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큰 문제는 루이 16세의 실제 행동 자체도 구시대의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심화시키는 짓만 했다는 거다. 예를 들어 국가 수익은 별로인데 쓸데없이 전쟁에 끼어든 걸 그대로 따라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57] 이걸 끼어들면서 그렇잖아도 적자였던 재정을 더 말아먹었고, 그 망한 재정을 개혁하려고 재무총감인 튀르고나 네케르와 같은 인물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지만 기득권의 저항에 번번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똑같이 선대에서 있는대로 말아먹은 숭정제가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실책이 있긴 했어도 망해가던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눈물나게 노력했고 실제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과세 문제에서 몇가지 시도는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를 보인 것은 전혀 없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해야 할 점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건전한 재정, 즉 <수입의 규모에 맞추어 적절한 수준에서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중세 후반~근세 유럽의 귀족,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미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런 규모있는 재정관리와 지출은 시민, 부르주아 계급의 덕목이었고 국왕이나 대귀족에게는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스스로의 권위를 입증하고 과시해 보일 것이 요구되었던 것.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더욱 그러했던 것이,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근세 유럽의 왕권은 실제로는 그리 공고한 것이 아니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과시적인 소비나 대외군사활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권위를 과시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재정 규모로 감당하기 힘든 과시적인 소비를 계속할 경우 필연적으로 국가(및 왕실)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만 이 문제는 과시적 소비를 통해 강화된 왕권으로 해결하는 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해결책이었다.

일단 돈이 필요하면 금융업자에게 돈을 빌리든, 징세청부업자에게 징세권을 팔아치워서 일단 땡겨오든 돈을 마련해서 일단 쓰고, 이렇게 진 빚이 위험한 수준까지 쌓이면 돈 갚으라는 금융업자에게 "안 갚을 건데 니가 어쩔? 왕 배 한번 째볼텨?" 하든지, 교회 재산을 탈탈 털고[58] "교황님한테 일러서 저 왕 파문시켜달라고 해보든지 ㅋㅋㅋ"[59] 하든지 만만한 귀족을 족쳐서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땜빵하여 해결해왔던 것이다.

이 점에서, 종종 '겉보기에만 화려했을 뿐, 실상은 프랑스(왕실)의 내실을 좀먹고 있었다' 는 나쁜 평가까지 받는 루이 14와 루이 15세의 과시적인 사치 역시 정치적으로 의미없는 행위는 아니었다. 루이 14세나 15세가 돈 계산도 할 수 없는 바보라 국고를 탕진해가며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대외 전쟁에 골몰했던 것이 아니라, 호화로운 건축과 과시적인 대외원정을 반복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그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던 것이다. 루이 14세의 경우 이 수법으로 귀족들의 세력까지 제대로 찍어눌렀고, 루이 15세의 경우는 14세보다 정국 통제력이 좀 약한 편이라 귀족들의 세력 확장을 막지는 못했지만 왕권 강화의 끈 자체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 16세의 차례는 말하자면 선대 2대에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난을 처리할 턴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 짓거리를 무한정 반복할 수는 없다. 프랑스라는 국가자체의 역량이 그 루틴을 한 턴 더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변화하는 시대가 그 루틴을 한 번 더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당시 프랑스의 체제가 어떤 한계에 봉착했던 것은 사실이고, 루이 16세에게 주어진 미션이 단순히 '선대 왕들이 하던 거 한 번 더 해라'보다는 훨씬 어려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요점은 루이 16세가 그것을 맨몸으로 해야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무런 선례 없이 해야했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주어진 왕권과 체제는 한계도 명백하지만 충분히 강력하고 활용성 있는 도구였다.

결국 루이 16세의 경우 선대로부터 재정난+빚이라는 막대한 똥더미를 물려받은 처지였기는 하지만, 강화된 왕권이라는 형태로 그 똥을 치울 넉가래도 함께 물려받았던 셈이다. 문제는 루이 16세의 성격이 똥 치우는 일에 영 걸맞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됐다. 세력이 강해진 대귀족들이 왕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곤 하지만, 2대 백 년간 양성된 왕권(특히 군사력)이 어디 간 것도 아니니 정말 작정하고 찍어누른 채 세금을 물리거나 재산을 몰수한다면 정말 군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다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도 나온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는 성직자들의 조롱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서 서유럽의 절대군주들은 돈이 모자라면 교회에 세금을 부여하는 수준을 넘어 교회 재산까지 잘만 몰수했다.[60] 따라서 루이 16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던 <국민국가 개념의 형성>은, 그가 조금만 더 결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유용한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교회의 범국가적 영향력이 강력했던 중세 초중기였다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다가 교황과 사이가 틀어지고, 그래서 교황이 쏜 파문빔 한방 맞을 경우 설령 국왕이라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국민국가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근세 절대왕정기의 프랑스 국왕이라면 설령 파문을 당하더라도 데미지 컨트롤이 훨씬 용이했다. 당장 또한 탈기독교(특히 탈가톨릭)적 경향이 강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그 영향력을 이용했다면 교회나 대귀족과 척지게 되더라도 정국 장악력을 유지하기가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말하자면, 교회 과세에 대해 교황에게 압박당할 경우 "교황이 뭔데 프랑스 국내 문제에 참견해서 프랑스 왕을 협박하냐!" 하는 국내 여론을 이끌어내어 교황의 압박을 버티기 쉬웠을 것이다.). 헨리 8세의 성공회 창설만 보더라도 권력을 장악한 국왕이 충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국의 교회를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헨리 8세에게 영국 국교회 창설을 뒷받침해줄 종교개혁 세력이 있었다면 루이 16세에게도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갈리아교회주의가 있었다.

물론 이 쪽으로 따지면 프랑스의 경우 영국이나 북유럽보다 가톨릭의 교세가 크고 영향력도 강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애초에 영국처럼 멀리 외국의 경우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루이 16세의 내조부인 루이 13세[61] 시절 프랑스가 중세 내내 '가톨릭교회의 장녀' 운운하던 시절은 하루아침에 갔다버렸던양 지극히 세속적인 지정학적 논리에 따라 30년 전쟁 당시 범개신교편에 서며, 신학적으로도 왕실이 장 보댕 같은 교권위 왕권 우위론을 설파한 정치학자, 얀센주의 같은 '이단'시비까지 있는 신학적 트렌드를 밀어준 전례까지 있다. 이 전시대인 16~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왕실 권력의 독점적인 성장에 여전히 생생히 반발하는 귀족, 성직 권력들도 힘을 합쳐 위그노 반란, 프롱드의 난 같은 정치적인 도전할 힘이라도 있었지만 18세기 프랑스는 그런거 이미 다 때려잡은지 오래였다. 가톨릭교회 역시 종교개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오히려 프랑스, 스페인 같은 강력한 세속 왕실 권력에 더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시대적 상황까지 고려하면 교회 전체 입장에선 핵심 가톨릭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를 잃는 것까지는 도저히 감수할 수 없었고,[62] 따라서 루이 16세가 교회 과세 정책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면 끝까지 저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대귀족과 교회의 반항을 제압하지 못하여(=세금을 물리지 못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시민+지식인 세력[63]이 주축이 된 혁명으로 인해 몰락했다. 연 세입의 60%가 이자 갚는데 들어갔다는 것 역시 당시 프랑스 국왕이 빛 못갚겠다고 디폴트를 선언해 버리면 변제를 강요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루이 16세 특유의 선량하고 온화, 또는 우유부단한 성격상 저런 강경책을 쓰지 못했기에 확실한 돈줄을 내버려두고 과세 문제 정도나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재정상황을 확실히 개선할만큼 강력한 개선책은 대상 집단의 반발때문에 쓰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분명 선대로부터 크나큰 난관을 물려받은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안타깝다기보다는 하려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의 성격이나 적성에는 영 걸맞지 않은 입장을 요구받았고, 이 때문에 몰락했다는 점에선 안타까운 인물인 셈이다.

그래도 인간적인 면만 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루이는 왕위 계승순위에서 멀었으나 왕태자였던 아버지와 맏형인 왕태손이 결핵으로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인 루이 15세보다 일찍 죽자 왕태자가 된 것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64] 할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아내와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이쪽도 군주제의 엄연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군주제를 증오하던 시민들에게 처형되었지만 국왕의 지위는 시대상 그에게 너무나 과분하였다. 차라리 평범한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학식이 깊고 기술자에다가 검소하고 소박한 귀족으로서 존경받았을 것이다.

6. 21의 저주?[편집]

루이 16세는 사실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도시전설이기는 하나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21의 저주가 유명하며, 특히 21의 저주는 2015년 8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링크 해외에서도 기막힌 우연으로 다루고 있는 모양인데 이를 다룬 서적도 있다.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이야기의 경우,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이긴 하지만 21의 저주는 정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루이 16세의 불운과 일치한다.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 21시 전에 잠들거나 21일에는 외출을 삼갔으며, 심지어 먹는 반찬의 숫자도 21개가 되지 않게 했다. 루이 16세가 이렇게 21의 강박증을 가지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루이 16세는 어린 시절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2세가 되던 해에는 결핵으로 죽을 뻔했다. 그러자 손자를 걱정한 루이 15세는 점성가를 불러 점을 쳤다. 점성가는

"루이 16세는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숫자 21을 조심해야 한다."

고 예언을 했다. 왕이 되려면 아버지와 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나 생각했지만, 이후 루이 16세의 아버지와 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루이 16세는 점술사 말대로 왕이 됐다.

점술사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루이 16세는 숫자 "21"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혔고, 왕이 된 후에도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루이 16세에게는 계속해서 21의 저주가 따라붙었다. 루이 16세가 대관식을 하기로 결정된 때는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21세에 대관식을 했지만, 루이 16세는 매우 불안해했다. 대관식이 끝나고 왕립학교에서 열린 축하식에도 어쩔 수 없이 참석했는데, 그날 따라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거센 빗줄기가 몰아치자, 학생회장이 축사를 낭독하는 도중에 그냥 왕궁으로 되돌아와버리고 만다. 불길한 숫자 21을 크게 의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루이 16세는 학생대표가 낭독하는 축사를 외면한 채, 축하식이 끝나기도 전에 왕궁으로 돌아와버린 거다.

왕위 대관식은 그 나라에서 가장 중대한 행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축사낭독 도중에 새로 부임한 왕이 그냥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축하식에 참석했던 수많은 대신들과 귀족들, 그리고 축사를 낭독했던 학생대표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옹졸하고 졸렬한 왕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느끼게 했다. 참고로 이때 왕립학교의 학생회장이, 나중에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지피고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로베스피에르였다. 결과적으로 예언은 틀리지 않은 셈.

또 특이하게도 왕족들이 루이 16세에게

"저희들이 큰 빚을 졌는데 갚을 능력이 없으니, 정부에서 그 돈을 대신 갚아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요구해왔다. 근데 그 왕족의 숫자가 "21명"이었다. 이에 또다시 공포심에 사로잡힌 루이 16세는, 왕족 21명의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렸다. 이로 인해 국민들이 점점 불만이 쌓였고,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왕궁이 전부 무력화되고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루이 16세는, 가족들을 데리고 몰래 베르사유 궁전을 빠져나가 프랑스 국경 부근 바렌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혁명군에 체포되고 만다(바렌 사건). 그런데 루이 16세가 혁명군에게 체포된 날이 하필이면 1791년 6월 "21일"이었다. 또한 혁명세력인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는데 그 날이 바로 1792년 9월 "21일"이었다.

결국 1792년 9월 "21일", 루이 16세는 국민들에게 공개 재판을 받게 되며, 1793년 1월 "21일" 사형을 당한다. 루이 16세를 사형당하게 한 단두대가 만들어진 날도 1790년 1월 "21일"이었다. 그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가 단두대 사용을 허가해 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16세는 자신이 허가했던 단두대에서 자신이 참수형된다.

7. 가족관계[편집]

루이 16세 인터뷰 - lu-i 16se inteobyu

마리테레즈 샤를로트

루이 16세 인터뷰 - lu-i 16se inteobyu

도팽(왕태자) 루이 조제프

루이 16세 인터뷰 - lu-i 16se inteobyu

도팽(왕태자) 루이 샤를, 일명 루이 17세

  • 할아버지 : 루이 15세(1710년 2월 15일 ~ 1774년 5월 10일)

  • 할머니 : 마리 레슈친스카

  • 아버지 : 도팽 루이 페르디낭(1729년 9월 4일 ~ 1765년 12월 20일)

  • 어머니 : 마리아 요제파(1731년 11월 4일 ~ 1767년 3월 13일)

    • 아내 : 마리 앙투아네트(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

      • 장녀 : 마리테레즈 샤를로트(1778년 12월 19일 ~ 1851년 10월 19일)

      • 장남 : 루이 조제프(1781년 10월 22일 ~ 1789년 6월 4일)[65]

      • 차남 : 루이 샤를(1785년 3월 27일 ~ 1795년 6월 8일)

      • 차녀 :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1786년 7월 9일 ~ 1787년 6월 19일)

  • 누나 : 마리 제피린(1750년 8월 26일 ~ 1755년 9월 1일)

  • 형 : 루이 조제프(1751년 9월 13일 ~ 1761년 3월 22일)

  • 형 : 루이 자비에(1753년 9월 8일 ~ 1754년 2월 22일)

  • 남동생 : 프로방스 백작 루이 스타니슬라스(1755년 11월 17일 ~ 1824년 9월 16일)

  • 남동생 : 아르투아 백작 샤를 필리프(1757년 10월 9일 ~ 1836년 11월 6일)

  • 여동생 : 마리 아델라이드 클로틸드 자비에르(1759년 9월 23일 ~ 1802년 3월 7일)

  • 여동생 :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1764년 5월 3일 ~ 1794년 5월 10일) - 혁명 시기에 루이 16세와 함께 프랑스에 남았다가 처형되었다.

8. 대중매체에서[편집]

  • 《베르사유의 장미》에 등장했다. 온후하고 소박하면서도 선량한 인품의 소유자로 나온다. 하지만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보다 강력한 개혁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당대 사회의 상태와 어려운 민중들의 처우 개선 등에 대해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당대 지배계층이 지니는 명확한 한계 역시 뚜렷이 드러내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런 점에서 실제 역사에서의 루이 16세처럼, 개인적으론 착해도 난세의 지도자감엔 알맞지 않은 사람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아내인 마리와의 사이는 그냥저냥 원만하지만, 여기서 마리가 사랑한 것은 페르젠이기 때문에 비중은 적은 편. 마리와의 첫대면에서도 수줍음에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 해서 결혼과 남편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던 마리는 내심 실망했다. 마리를 사랑했으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내에 비해 자신은 볼품없다고 여겨 표현하지 못했고, 마리와 페르젠의 사이를 알고는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했다.[66] 원작에서는 처형 전 자신들을 구하러온 페르젠에게 최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며 사양하고 그가 마지막까지 보여준 우정에 감사를 표한다. 이후 가족들과 작별하고 처형당하는 마지막 모습이 그려지며 마리는 불타는 사랑은 아니었으나 루이와의 사이에 분명히 부부의 애정은 존재했다며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린다.
    원판 성우는 야스하라 요시토. 가장 먼저 나온 비디오판은 박상일, KBS판은 홍승섭, EBS판은 홍범기.

  • 1989년 작 영화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배우 장 프랑수아 발머가 루이 16세 역을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실제 역사처럼 혁명의 광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둘리다 처형당하고 마는 루이 16세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루이 16세의 처형 장면. 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루이 16세의 처형을 집행하는 상송 역을 맡은 배우가 크리스토퍼 리이다. 처형대로 올라가면서 단두대의 칼날을 바라보는데 그 칼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제안으로 개조된 것이다.

  • 판타지 소설 《불멸의 기사》의 루이 16세
    현실의 루이 16세가 모티브… 아니, 그냥 루이 16세 본인이다.(일단 브리타니라는 가상의 국가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브리타니가 사실상 프랑스다) 이 쪽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지만 절망했다! 바꿀 수 없는 현 실정에 절망했다! 를 외치고는 방구석에서 당시 총사대장이었던 아르카르나제(얀 지스카드)와 함께 주석으로 만든 병정 인형을 이용한 미니어쳐 게임이나 하고 있는 히키코모리였다.
    이후 혁명이 터지고,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지만 아르카르나제가 스스로 핏값을 지불. 데스틴 몽트뢸에 의해 나폴레옹으로 탈바꿈한다. 이후 포병 운용+아르카르나제에게 전수받은 보병사격전술[67](일명 '대천사의 무지개')에 의해 승승장구. 이후 사브리나를 손에 넣으려 하나 실패한다. 이후 행적은 실제의 역사와 거의 같다. 나폴레옹 참고.

  •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의 루이 16세
    스테레오 타입의 루이 16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형 당일에 푹 자고 일어났고, 죽음을 앞두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두대에 목을 거치하자 긴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목이 잘리면 담겨지는 바구니를 보고 "저 더러운 바구니에 목이 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에 목이 떨어진다.

  • 만화 《이노센트》의 루이 16세
    어린시절 때와 청년기 때로 등장. 망나니 가문의 당주인 샤를 상송과 친구관계이면서 동성애 연인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관계로 묘사가 된다.

  • <존 애덤스>(HBO 사극)
    애덤스가 특사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잠깐 등장했다. 애덤스에게 말을 건넸는데 프랑스어를 모르는 애덤스가 못 알아듣고 멀뚱히 있자, 영어로 "Don't speak french(프랑스어를 모르나)?"라고 물어본다. 영어에 능통했다는 설정을 반영한 듯. 가만 보면 살짝 촐싹대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파견한 대사가 조지 워싱턴을 만나러 미국에 왔을 때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인형을 목 자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 처형당했음을 암시한다.

  • 게임 문명 6
    플레이어의 점수 기준으로 4번째로 못한 점수일때 루이 16세의 수준이라고 해준다. 참고로 그 위가 G. 하딩이다.

  • 악역 영애로 전생했을 텐데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
    주인공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인 만큼 당연히 등장한다.

  • 게임 타임 프린세스
    마리 왕비 편에서도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의 성격이 의외로 잘 고증되어 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행보가 바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루이 16세의 자물쇠 수집 취미도 여기서 잘 고증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헛소문이 퍼져 마리가 소문만 듣고 오해한 외전 에피소드도 있다(...).

  • 현대 일본인이 루이 16세로 빙의해서 프랑스를 부강하게 만드는 대체역사 소설

9. 관련 문서[편집]

  • 프랑스 제1공화국

    • 루이 16세 - 로베스피에르 - 나폴레옹


[1]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군 측에서 루이 16세를 거추장스러운 존칭 다 빼고 저렇게 불렀다. 카페 왕조의 그 카페가 맞다.[2] 역대 프랑스 군주들 중 최장신이다.[3] 본명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장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의 딸이다. 큰며느리인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6촌간이다.[4] 왕태손이었던 큰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1751 ~ 1761)와 작은 형은 유년기에 사망했다.[5] 루이 16세 이후의 프랑스 군주들은 감옥에서 요절한 아들 루이 17세, 그나마 천수를 다한 동생 루이 18세, 쫓겨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 샤를 10세나 루이필리프 등 격변기 속에 다양한 운명을 맞았지만 적어도 단두대에 오르지는 않았다.[6] 고자라거나,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역대 부르봉 왕조의 왕들 가운데 아이를 갖지 못하면 이런 소문이 자주 돌았는데,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자 이와 같은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그의 왕비 안 도트리슈가 루이 14세를 낳고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안 도트리슈가 리슐리외 추기경과 외도해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7] 성교육이 안 돼서 성관계를 할 줄 몰랐다는 말이 인터넷에 간혹 돌기도 하는데 후사 생산이 의무였던 당시 왕족들은 성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았다. 특히나 손이 귀한 프랑스 왕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밤 동침에 실패한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모후에게 보고하기도 했다.[8] 출산은 네 차례 이뤄졌으나 임신은 다섯 번 했다. 첫 딸을 낳고 한 두 번째 임신은 마차 문을 닫는 과정에서 문에 배를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 됐다고 한다.[9] 실제로 여전히 기계식 시계 형식을 따르는 고가의 무브먼트 손목시계들은 무진장 비싸고 엄청난 기술력이 들어간다.[10]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11] 단두대를 개발하자고 법안을 제출한 기요탱 의학박사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는 낭설이 있었고(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도 이 설이 잘못 인용되어 있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낭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제안한 단두대에 자신이 죽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기요탱 박사는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다. (애초에 기요탱 박사는 사형제 폐지론자로, 그래도 사형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면 당시 기준으로 그나마 죄수들이 덜 고통스럽게 죽게 하자고 단두대를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말의 주인공은 사실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참고로 아무리 사형수라도 좀 곱게 죽여주자 혹은 명예롭게 죽게 해주자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다. 현대에도 사형 집행을 하는 국가 중 인권이 아무리 시궁창인 국가라 해도 적어도 사형수만큼은 일반적으론 수면제나 마취제 투여 등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을 권리는 준다.[12]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딸에게 “왕비가 왕을 존경하지 않으면 백성이 왕을 존경할 수 있겠니? 왕에게 그런 태도 보이지 마라.”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3] 조부인 루이 15세가 저명한 의사들을 불러 진찰한 결과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고, 훗날 방문한 처남 요제프 2세도 어머니에게 '매제가 고자는 아닌듯 함'이라는 보고를 한 적도 있었다. 아마 자신이 겪은 신체적 결함과 그 스트레스로 인한 저항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자신과 같은 불행이 자식대에 반복될 것을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14] 이라지만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자신의 작위 중 하나를 가명으로 사용해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15]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사례지만 옆나라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딱 이랬다. 최전성기는 끝났어도 여전히 강대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을 순식간에 열강들의 장기말 신세로 전락시킨 차원이 다른 규모의 암군이었지만 누구나 딱 봐도 금치산자급 장애인이란 게 티가 났기 때문에 동시대나 후대에나 딱히 왕을 탓하진 않았다.[16] 왜냐면 재정적자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왕실의 사치에 있었기 때문이다.[17] 튀르고는 중상주의자인 콜베르보다 더 진보된 경제관을 갖춘 인물로서 최소한 재정 부문에서는 콜베르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중상주의 이후 근대적인 경제학자들은 한결같이 중상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더 나은 대안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튀르고를 포기한 것은 루이 16세가 스스로 목을 친 격이었다.[18] 하지만 그때 당시 성직자(당시엔 이들도 귀족)들은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라는 말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대부분 목이 달아나면서 본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를 목숨으로 치렀다.[19] 법복 귀족이라고 부른다. 구 봉건 귀족은 대검 귀족.[20] 심지어 영국의 귀족들은 프랑스와 달리 세금을 이미 내고 있었기에 프랑스와 달리 대중의 분노를 크게 사지 않았다.[21] 물론, 프랑스 왕들이 전부 이러지는 않았다. 저질 금화를 발행한 선왕들과는 달리 양질의 금화를 발행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한 샤를 5세 같은 경우도 있다.[22] 위에서 나온 귀족의 면세특권 해제의 건이 그렇다.[23]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으로 증가하여 유럽에서 가장 많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24] 게다가 루이 15세는 못말리는 호색한이라서 귀족들에게도 평판이 나빴다.[25] 사실 이건 부르주아 집안 자제분들이 돈으로 계급을 산 경우가 많았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이 불편해져서 1781년 부터는 4대 이상 귀족인 집안의 아들이거나 생 루이 훈장(루이 14세가 만든 무공 훈장) 수여자의 아들만 장교로 임용될 수 있게 법이 만들어진다.[26]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혁명 이후 귀족들이 아닌 부르주아들 편을 들었다.[27] 루이 16세가 언급한 것이 Revolt인데, 이건 한국어로 제대로 된 의미 전달을 하자면 대충 상위 권력에 대한 저항 혹은 반란 등으로 해석된다. Riot은 닥치고 때려부수는 걸 의미하는 것이고, Revolt는 아래에서 뭔가 요구를 하면서 저항하는 것에 가깝다. 가장 그럴 듯한 번역은 "폭동인가?"란 물음에 "혁명입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28] 사실 이때 당시 혁명군 또한 왕보다 프랑스 귀족 세력에 대한 불만이 더 극심한 상황이었다. 즉, 혁명군을 뒤에서 선동한 주동자들인 부르주아(평민 자본가, 지식인 계층) 계급이 귀족 계급을 권력층에서 몰아내려는 성격이 강했던 것.[29] 3권분립 원칙으로 국왕은 행정부의 수장으로 격하되었고 뭘 하든지 간에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할 수 있었다.[30] 이곳 군사령관인 부이예 후작 프랑수아 클로드 아무르(François Claude Amour, marquis de Bouillé) 장군이 왕당파였기 때문에 여기서 군대를 모아 왕권을 되찾을 속셈이었다.[31] 루이 16세가 150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한 덕에 프랑스 일부에선 루이 16세를 자유를 회복해주신 임금님이라고 칭송하는 세력도 있었다. 왕에 대한 비난은 익히 알다시피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을 현혹하는 외국년이라며 거의 모두 뒤집어썼고, 그마저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상은 괜찮은 일도 제법 한 왕비였기에 상당 부분은 억울한 점도 있었다.[32] 당시 프랑스 형법상 사형 집행유예가 선고된 이후 10년이 지나면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만 60세가 되는 해 부활절에 가석방하도록 했다.[33]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에선 반대 334표, 찬성 387표라고 나왔었다.[34] 그 로베스피에르나 당통조차 처음에는 사형에는 찬성하지만 집행유예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생쥐스트가 "군림하는 것 자체가 유죄다. 루이 16세를 처형하지 않으면 혁명이 유죄가 될 것"이라고 연설한 게 분위기를 즉시 처형으로 바꿔버렸다.[35] 사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이면엔 자꾸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는 왕실과 왕당파의 씨를 말리려는 공화파의 속셈도 있었다.[36] 물론 오늘날엔 좌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가 있고 우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들이 있기 때문에 강경, 온건 이런 식으로 좌우를 나누는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애초에 이 좌우파란 것 자체가 영국 의회에서 비롯된 것이다.[37] 쉽게 말해서 신분제가 다시 탄생하고 자기들은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현대인들이라면 이걸 두고 보겠는가? 그나마 입헌군주제 정도라도 받아들였으면 모를까, 루이 16세는 그것도 거부하고 혁명파 입장에선 오스트리아와 내통한(왕당파 입장에선 혁명 반란군을 쓸어내려 원조를 요청한) 상황이었다.[38] 일설에 의하면 생쥐스트를 루이 18세가 매수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낮은 것이 진짜 매수당했으면 무조건 죽이라고 하면서 최소한의 정당성도 없는 폭군으로 몰아붙이지, 혁명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어떻게 보면 루이 16세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39] 혁명파 입장에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인 혁명세력을 진압하려고 했으니 어찌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단지 루이 16세의 평소 행실이나 성품을 볼 때 자신의 행동이 자국민에 대한 학살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행한 일은 아닐 것이라 애써 짐작하는 것뿐이다.[40] 이미 탈출하다가 현행범으로 잡힌 터라 무죄 가능성은 희박했다.[41] 혁명 과격파와 합세하여 루이 16세 이후의 왕위를 노린 일부 군주정 지지자들의 반란표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왕의 먼 동생도 사형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고 순간 공회장 안에서는 신음소리가 울렸다고 한다.[42] 혹은 "내가 처형되어 프랑스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설도 있고 "프랑스 인들이여, 짐은 무고하게 죽는다."라는 설도 있다.[43] 사실 당시 사형을 깔끔하게 끝내주는 단두대는 사형자뿐만 아니라 사형 집행인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사형 집행인들은 현대에도 육체적 스트레스 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한 3D 직종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 진영 인사들을 처형하면서 자리를 지킨 사형 집행인도 적지 않았다. 당연한 게 말 그대로 사형 집행인들은 선고 나오면 그냥 하라는 대로 처형 집행만 할 뿐이고, 가뜩이나 안 하려고 기피하는 사형 집행인인데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죽여봐야 좋을 게 없다.[44] 그땐 혁명정부에 충성을 선언한 이른바 선서사제들만이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는데, 이들은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 루이 16세의 추모미사를 집전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선언을 거부하고 은둔생활 중인 신부들, 이른바 비선서사제들을 직접 찾아갔다.[45] 프랑스 혁명에 매우 강하게 반발했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차르가 된 케이스다.[46] 다만 여기서 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는 직접 폐위당한건 아니지만 쿠데타나 정변으로 인해 살해 당한 것에 가깝다.[47] 루이 16세만 해도 처형 여부를 정하는 투표에 “감히 평민 따위가 어디 왕의 목숨을 이런 투표 따위에 올려 논할 수 있나”라며 기권표를 던지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48] 그러나 갸넨드라는 왕정이 폐지되고, 왕위에서 폐위되어 물러난 이후에도 왕정복고와 구 왕실 재산 반환 등을 주장하는 등 현 네팔 정부에게 반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네팔 내부에서도 각종 비판과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오죽하면 네팔의 일부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왕정 폐지 이후에 왕족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구 왕가에 대한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던 이탈리아나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같은 남유럽, 동유럽 국가들처럼 갸넨드라와 그 직계 일가족들도 국외로 추방시키고,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어야 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49] 하지만 이탈리아와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도 현재는 왕정 폐지 이후 국외로 추방당했던 구 왕실 일가들이 현재는 귀국 허가를 받고 원래 모국으로 되돌아왔다.[50] 찰스 2세는 사실 위에 형이 있던 차남이었으나, 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의 위치에 있었다.[51] 당장 프랑스만 해도 이때 미국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해줬다.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어 왕정이 무너졌다는게 웃픈 포인트지만. (사실 사상적으로도 프랑스 혁명이 미국 독립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엔 이 재정을 메꾸기 위한 일환으로 루이지애나 땅도 미국에 헐값에 넘기게 된다.[52]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속화였다.[53] 생 므느울이라고 읽기도 한다.[54] 정작 비슷한 시기의 사람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다른 여러 외국어에 능했음에도 오직 영어만 몰라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귀양 생활 중에 틀린 영어 문법으로 정신승리하기도 했다.[55] 조선의 태종도 이복동생 2명을 죽이고 동복형을 귀양보냈지만, 아들 세종 대왕과 함께 조선 초기의 명군으로 남았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루이 16세와 완전히 정반대인 군주가 한명 있다. 바로 정통성으로는 최고였던 자신의 조카를 억울하게 폐위시키고 처형하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를 찬탈한 패륜아이자 치적의 비판점도 상당하지만, 어쨌든 군주로서의 면모는 경국대전이라는 명백한 업적이 존재하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휘어잡았던 세조이다.[56]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57] 영국 엿먹이는거 자체가 목적이 될순 없겠냐 반문할수 있겠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리 받아들였지만 정치학적으로 보면 라이벌이 개쪽당하는건 기분은 좋겠지만 라이벌의 손해가 우리편의 실익, 득점으로 이어져야지 그게 아니면 그냥 기분만 좋을 뿐이다. 프랑스, 특히 부르봉 왕정 프랑스 입장에서 미국 독립전쟁 개입은 바로 이렇게 기분만 좋아지고 막상 프랑스의 실익으로 연결된건 하나도 없는, 냉철하게 말하면 헛투자였다. 마치 현대 냉전시기 자꾸 특유의 세계문화에 대한 무식함과 독선적인 접근법으로 인해 미국이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수없이 삽질을 해도 막상 이게 반대편 소련의 실질적인 이득으론 이어지지 못한체 결국 미국의 승리로 종식된것처럼 말이다.[58] 헌금이나 기부금 등으로 재산이 계속 유입되는 데 비해 성직자들이 결혼하여 자손을 만들지는 못하므로, 상속 등으로 유출되지는 않는 특성상 가톨릭교회에는 필연적으로 재산이 축적된다.[59] 여전히 근대적 중앙집권 권력 자체가 없었던 중세 같으면 실제로 이러면 "오냐 ㅅㅂ것아 성하한테 꼰질러서 니 파문먹이고 니 가신 휘하 봉건 귀족들 전부 다 너와 손절하라고 방송 보낼 테니 대기타고 있던지 알아서 빤스만 입고 대가리 박아라!"라는 대답이 나왔겠지만, 애초에 이렇게 국왕도 대가리 박고 똥꼬쑈하게 만들 수 있는 봉건귀족, 교회 같은 다른 권력집단을 박살내며 성장한게 17-18세기 유럽의 소위 '절대왕정'이란 체제고, 이 과정의 중심엔 다른 나라 군주도 아니고 바로 루이 16세의 전임자들인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같은 프랑스의 왕들이 있었다. 원랜 유럽 기준에서도 가장 중앙집권화된 왕실 권력이 일찍 출현했고 그 위세도 강력했던 프랑스에서 대혁명과 국왕을 죄인으로서 국가의 이름 아래 모가지 자르고 최초의 근대적 국민주권을 법적으로 공표한 공화국이 출현했다는 우연아닌 우연은 이런 장기적인 역사적 배경을 살펴봐야한다.[60] 성전 기사단이 악마 숭배집단으로 몰려 해산된 것도 기사단의 돈을 당시 국왕인 필리프 4세가 노렸기 때문이다.[61] 루이 16세의 현조부인 루이 14세의 아버지다. 루이 14세는 증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로 오래 산 걸로 유명하고 루이 15세도 당시 기준으론 상당히 장수해서 그런지, 루이 14세와 루이 16세 사이의 왕은 루이 15세 단 한명 뿐인데 항렬은 5세대를 넘어간다.[62] 18세기 후반에는 심지어 이전까진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이베리아 세력들 전담 특기였던 유럽 외 세계선교마저도 슬슬 하나둘씩 프랑스발 선교회, 선교사들이 꿰차기 시작하던 시점이다[63] 유럽의 많은 절대왕정기 군주들은 시민+지식인 세력을 양성하여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억제했다.[64] 따지고 보면 루이 15세 역시 왕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즉위했고, 리더쉽 부족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는 점에서 16세와 비슷한 케이스이기는 하다. 이 점에서 보면 상기된 내용에서는 <루이 16세의 치세는 이전 2대동안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문제를 처리할 턴> 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상은 루이 15세 시기가 재정문제를 처리할 최적의 턴이었다고 볼 여지도 크다. 루이 14세 시기에 강화된 왕권으로 15세 시기에 재정문제를 처리해 버렸으면 16세의 치세는 훨씬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5세 역시 재정문제를 처리하기에는 영 걸맞지 않은 성격이었고, 이 때문에 자기 턴에 부여받은 필수 미션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 상태에서 턴 종료를 눌러버린 것이다. 결국 이 필수 달성과제는 루이 16세의 턴으로 그대로 넘어왔고, 따라서 루이 16세는 15세 당시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14세 시대에 이미 파탄에 이른 재정이 15세 시대에 더 망가졌으며, 14세 시대에 확 찍어눌러두었던 귀족들의 세력은 15세 시기에 어느 정도 다시 확대되었다.)에서 이 필수미션을 수행하지 못하여 게임 오버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65]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루이 16세의 형 루이 조제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고 그 역시도 혁명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66] 그래도 그에 대해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 대인배. 게다가 은인에 대한 고마움도 확실히 표현하는 사려깊은 성품을 지녔는데, 작중 페르젠 백작이 국왕 일가의 탈출을 도왔을 적에도 페르젠의 안위를 걱정해 중도에 헤어질 것을 권하기까지 할 정도다.[67] 보병을 2열로 배치시킨 후, 전의 1열이 사격하고 재장전하는 시간적 공백 사이에 후의 1열이 사격. 이것을 반복하면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연사가 가능해진다. 사실 활이나 석궁 등에서 활용되었던 전술이며, 정확한 제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