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상 왕좌에 오른 군주들 중 가장 부드러운 왕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폭군이었던 양 단죄되어야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 국민공회는 불만에 가득찬 민중의 분노를 일부러 이 불행한 군주에게 돌리며 그(루이 16세)를 처형할 것 같은데, 바로 그를 왕좌에 끌어내리고 공화국 헌정 체제 도입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이다. 당시 재불미국대사 거버너 모리스의 일기 중
루이 18세 때 석곽묘로 조성된 무덤(왼쪽)과 기념물(오른쪽) 처형 직후 마들렌 성당에 잠시 매장되었던 루이 16세의 유해는 동생 루이 18세에 의해 1815년 1월 18일에 발굴되어 사흘 뒤인 1월 21일 프랑스의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아내와 함께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8일 루이 17세의 심장이 부모의 곁에 안장되어 사후 200년이 넘게 흐른 뒤에야 일가가 영면에 들었다. 3.3.1. 참형으로 인한 여파[편집]
4. 기타[편집]몹시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해서 수감되었을 때는 교도관의 가정사정까지 신경을 써주거나 프랑스 국내에서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살짝 백치미가 있는 건지, 새벽 기도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전통 가톨릭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산물[52]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루이 16세에게 동정적이다. 5. 평가[편집]루이 16세는 구시대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해 희생된 군주였지만, 국가의 군주로서 국가의 쇠퇴를 막지 못한 것은 변명이 불가능한 실책이다. 전제군주제에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여 국가와 왕가를 존속시키는 것이 국왕의 의무이며, 통치자란 그걸 위해 앉혀놓는 자리고 못 해낸다면 왕조와 함께 멸망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만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6. 21의 저주?[편집]루이 16세는 사실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도시전설이기는 하나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21의 저주가 유명하며, 특히 21의 저주는 2015년 8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링크 해외에서도 기막힌 우연으로 다루고 있는 모양인데 이를 다룬 서적도 있다.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이야기의 경우,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이긴 하지만 21의 저주는 정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루이 16세의 불운과 일치한다.
고 예언을 했다. 왕이 되려면 아버지와 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나 생각했지만, 이후 루이 16세의 아버지와 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루이 16세는 점술사 말대로 왕이 됐다.
라고 요구해왔다. 근데 그 왕족의 숫자가 "21명"이었다. 이에 또다시 공포심에 사로잡힌 루이 16세는, 왕족 21명의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렸다. 이로 인해 국민들이 점점 불만이 쌓였고,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7. 가족관계[편집]
8. 대중매체에서[편집]
9. 관련 문서[편집]
[1]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군 측에서 루이 16세를 거추장스러운 존칭 다 빼고 저렇게 불렀다. 카페 왕조의 그 카페가 맞다.[2] 역대 프랑스 군주들 중 최장신이다.[3] 본명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장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의 딸이다. 큰며느리인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6촌간이다.[4] 왕태손이었던 큰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1751 ~ 1761)와 작은 형은 유년기에 사망했다.[5] 루이 16세 이후의 프랑스 군주들은 감옥에서 요절한 아들 루이 17세, 그나마 천수를 다한 동생 루이 18세, 쫓겨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 샤를 10세나 루이필리프 등 격변기 속에 다양한 운명을 맞았지만 적어도 단두대에 오르지는 않았다.[6] 고자라거나,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역대 부르봉 왕조의 왕들 가운데 아이를 갖지 못하면 이런 소문이 자주 돌았는데,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자 이와 같은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그의 왕비 안 도트리슈가 루이 14세를 낳고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안 도트리슈가 리슐리외 추기경과 외도해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7] 성교육이 안 돼서 성관계를 할 줄 몰랐다는 말이 인터넷에 간혹 돌기도 하는데 후사 생산이 의무였던 당시 왕족들은 성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았다. 특히나 손이 귀한 프랑스 왕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밤 동침에 실패한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모후에게 보고하기도 했다.[8] 출산은 네 차례 이뤄졌으나 임신은 다섯 번 했다. 첫 딸을 낳고 한 두 번째 임신은 마차 문을 닫는 과정에서 문에 배를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 됐다고 한다.[9] 실제로 여전히 기계식 시계 형식을 따르는 고가의 무브먼트 손목시계들은 무진장 비싸고 엄청난 기술력이 들어간다.[10]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11] 단두대를 개발하자고 법안을 제출한 기요탱 의학박사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는 낭설이 있었고(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도 이 설이 잘못 인용되어 있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낭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제안한 단두대에 자신이 죽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기요탱 박사는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다. (애초에 기요탱 박사는 사형제 폐지론자로, 그래도 사형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면 당시 기준으로 그나마 죄수들이 덜 고통스럽게 죽게 하자고 단두대를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말의 주인공은 사실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참고로 아무리 사형수라도 좀 곱게 죽여주자 혹은 명예롭게 죽게 해주자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다. 현대에도 사형 집행을 하는 국가 중 인권이 아무리 시궁창인 국가라 해도 적어도 사형수만큼은 일반적으론 수면제나 마취제 투여 등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을 권리는 준다.[12]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딸에게 “왕비가 왕을 존경하지 않으면 백성이 왕을 존경할 수 있겠니? 왕에게 그런 태도 보이지 마라.”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3] 조부인 루이 15세가 저명한 의사들을 불러 진찰한 결과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고, 훗날 방문한 처남 요제프 2세도 어머니에게 '매제가 고자는 아닌듯 함'이라는 보고를 한 적도 있었다. 아마 자신이 겪은 신체적 결함과 그 스트레스로 인한 저항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자신과 같은 불행이 자식대에 반복될 것을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14] 이라지만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자신의 작위 중 하나를 가명으로 사용해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15]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사례지만 옆나라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딱 이랬다. 최전성기는 끝났어도 여전히 강대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을 순식간에 열강들의 장기말 신세로 전락시킨 차원이 다른 규모의 암군이었지만 누구나 딱 봐도 금치산자급 장애인이란 게 티가 났기 때문에 동시대나 후대에나 딱히 왕을 탓하진 않았다.[16] 왜냐면 재정적자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왕실의 사치에 있었기 때문이다.[17] 튀르고는 중상주의자인 콜베르보다 더 진보된 경제관을 갖춘 인물로서 최소한 재정 부문에서는 콜베르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중상주의 이후 근대적인 경제학자들은 한결같이 중상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더 나은 대안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튀르고를 포기한 것은 루이 16세가 스스로 목을 친 격이었다.[18] 하지만 그때 당시 성직자(당시엔 이들도 귀족)들은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라는 말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대부분 목이 달아나면서 본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를 목숨으로 치렀다.[19] 법복 귀족이라고 부른다. 구 봉건 귀족은 대검 귀족.[20] 심지어 영국의 귀족들은 프랑스와 달리 세금을 이미 내고 있었기에 프랑스와 달리 대중의 분노를 크게 사지 않았다.[21] 물론, 프랑스 왕들이 전부 이러지는 않았다. 저질 금화를 발행한 선왕들과는 달리 양질의 금화를 발행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한 샤를 5세 같은 경우도 있다.[22] 위에서 나온 귀족의 면세특권 해제의 건이 그렇다.[23]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으로 증가하여 유럽에서 가장 많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24] 게다가 루이 15세는 못말리는 호색한이라서 귀족들에게도 평판이 나빴다.[25] 사실 이건 부르주아 집안 자제분들이 돈으로 계급을 산 경우가 많았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이 불편해져서 1781년 부터는 4대 이상 귀족인 집안의 아들이거나 생 루이 훈장(루이 14세가 만든 무공 훈장) 수여자의 아들만 장교로 임용될 수 있게 법이 만들어진다.[26]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혁명 이후 귀족들이 아닌 부르주아들 편을 들었다.[27] 루이 16세가 언급한 것이 Revolt인데, 이건 한국어로 제대로 된 의미 전달을 하자면 대충 상위 권력에 대한 저항 혹은 반란 등으로 해석된다. Riot은 닥치고 때려부수는 걸 의미하는 것이고, Revolt는 아래에서 뭔가 요구를 하면서 저항하는 것에 가깝다. 가장 그럴 듯한 번역은 "폭동인가?"란 물음에 "혁명입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28] 사실 이때 당시 혁명군 또한 왕보다 프랑스 귀족 세력에 대한 불만이 더 극심한 상황이었다. 즉, 혁명군을 뒤에서 선동한 주동자들인 부르주아(평민 자본가, 지식인 계층) 계급이 귀족 계급을 권력층에서 몰아내려는 성격이 강했던 것.[29] 3권분립 원칙으로 국왕은 행정부의 수장으로 격하되었고 뭘 하든지 간에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할 수 있었다.[30] 이곳 군사령관인 부이예 후작 프랑수아 클로드 아무르(François Claude Amour, marquis de Bouillé) 장군이 왕당파였기 때문에 여기서 군대를 모아 왕권을 되찾을 속셈이었다.[31] 루이 16세가 150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한 덕에 프랑스 일부에선 루이 16세를 자유를 회복해주신 임금님이라고 칭송하는 세력도 있었다. 왕에 대한 비난은 익히 알다시피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을 현혹하는 외국년이라며 거의 모두 뒤집어썼고, 그마저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상은 괜찮은 일도 제법 한 왕비였기에 상당 부분은 억울한 점도 있었다.[32] 당시 프랑스 형법상 사형 집행유예가 선고된 이후 10년이 지나면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만 60세가 되는 해 부활절에 가석방하도록 했다.[33]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에선 반대 334표, 찬성 387표라고 나왔었다.[34] 그 로베스피에르나 당통조차 처음에는 사형에는 찬성하지만 집행유예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생쥐스트가 "군림하는 것 자체가 유죄다. 루이 16세를 처형하지 않으면 혁명이 유죄가 될 것"이라고 연설한 게 분위기를 즉시 처형으로 바꿔버렸다.[35] 사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이면엔 자꾸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는 왕실과 왕당파의 씨를 말리려는 공화파의 속셈도 있었다.[36] 물론 오늘날엔 좌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가 있고 우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들이 있기 때문에 강경, 온건 이런 식으로 좌우를 나누는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애초에 이 좌우파란 것 자체가 영국 의회에서 비롯된 것이다.[37] 쉽게 말해서 신분제가 다시 탄생하고 자기들은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현대인들이라면 이걸 두고 보겠는가? 그나마 입헌군주제 정도라도 받아들였으면 모를까, 루이 16세는 그것도 거부하고 혁명파 입장에선 오스트리아와 내통한(왕당파 입장에선 혁명 반란군을 쓸어내려 원조를 요청한) 상황이었다.[38] 일설에 의하면 생쥐스트를 루이 18세가 매수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낮은 것이 진짜 매수당했으면 무조건 죽이라고 하면서 최소한의 정당성도 없는 폭군으로 몰아붙이지, 혁명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어떻게 보면 루이 16세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39] 혁명파 입장에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인 혁명세력을 진압하려고 했으니 어찌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단지 루이 16세의 평소 행실이나 성품을 볼 때 자신의 행동이 자국민에 대한 학살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행한 일은 아닐 것이라 애써 짐작하는 것뿐이다.[40] 이미 탈출하다가 현행범으로 잡힌 터라 무죄 가능성은 희박했다.[41] 혁명 과격파와 합세하여 루이 16세 이후의 왕위를 노린 일부 군주정 지지자들의 반란표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왕의 먼 동생도 사형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고 순간 공회장 안에서는 신음소리가 울렸다고 한다.[42] 혹은 "내가 처형되어 프랑스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설도 있고 "프랑스 인들이여, 짐은 무고하게 죽는다."라는 설도 있다.[43] 사실 당시 사형을 깔끔하게 끝내주는 단두대는 사형자뿐만 아니라 사형 집행인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사형 집행인들은 현대에도 육체적 스트레스 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한 3D 직종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 진영 인사들을 처형하면서 자리를 지킨 사형 집행인도 적지 않았다. 당연한 게 말 그대로 사형 집행인들은 선고 나오면 그냥 하라는 대로 처형 집행만 할 뿐이고, 가뜩이나 안 하려고 기피하는 사형 집행인인데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죽여봐야 좋을 게 없다.[44] 그땐 혁명정부에 충성을 선언한 이른바 선서사제들만이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는데, 이들은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 루이 16세의 추모미사를 집전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선언을 거부하고 은둔생활 중인 신부들, 이른바 비선서사제들을 직접 찾아갔다.[45] 프랑스 혁명에 매우 강하게 반발했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차르가 된 케이스다.[46] 다만 여기서 칼리굴라와 도미티아누스,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는 직접 폐위당한건 아니지만 쿠데타나 정변으로 인해 살해 당한 것에 가깝다.[47] 루이 16세만 해도 처형 여부를 정하는 투표에 “감히 평민 따위가 어디 왕의 목숨을 이런 투표 따위에 올려 논할 수 있나”라며 기권표를 던지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48] 그러나 갸넨드라는 왕정이 폐지되고, 왕위에서 폐위되어 물러난 이후에도 왕정복고와 구 왕실 재산 반환 등을 주장하는 등 현 네팔 정부에게 반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네팔 내부에서도 각종 비판과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오죽하면 네팔의 일부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왕정 폐지 이후에 왕족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구 왕가에 대한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던 이탈리아나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같은 남유럽, 동유럽 국가들처럼 갸넨드라와 그 직계 일가족들도 국외로 추방시키고,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어야 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49] 하지만 이탈리아와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도 현재는 왕정 폐지 이후 국외로 추방당했던 구 왕실 일가들이 현재는 귀국 허가를 받고 원래 모국으로 되돌아왔다.[50] 찰스 2세는 사실 위에 형이 있던 차남이었으나, 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의 위치에 있었다.[51] 당장 프랑스만 해도 이때 미국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해줬다.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어 왕정이 무너졌다는게 웃픈 포인트지만. (사실 사상적으로도 프랑스 혁명이 미국 독립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엔 이 재정을 메꾸기 위한 일환으로 루이지애나 땅도 미국에 헐값에 넘기게 된다.[52]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속화였다.[53] 생 므느울이라고 읽기도 한다.[54] 정작 비슷한 시기의 사람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다른 여러 외국어에 능했음에도 오직 영어만 몰라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귀양 생활 중에 틀린 영어 문법으로 정신승리하기도 했다.[55] 조선의 태종도 이복동생 2명을 죽이고 동복형을 귀양보냈지만, 아들 세종 대왕과 함께 조선 초기의 명군으로 남았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루이 16세와 완전히 정반대인 군주가 한명 있다. 바로 정통성으로는 최고였던 자신의 조카를 억울하게 폐위시키고 처형하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를 찬탈한 패륜아이자 치적의 비판점도 상당하지만, 어쨌든 군주로서의 면모는 경국대전이라는 명백한 업적이 존재하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휘어잡았던 세조이다.[56]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57] 영국 엿먹이는거 자체가 목적이 될순 없겠냐 반문할수 있겠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리 받아들였지만 정치학적으로 보면 라이벌이 개쪽당하는건 기분은 좋겠지만 라이벌의 손해가 우리편의 실익, 득점으로 이어져야지 그게 아니면 그냥 기분만 좋을 뿐이다. 프랑스, 특히 부르봉 왕정 프랑스 입장에서 미국 독립전쟁 개입은 바로 이렇게 기분만 좋아지고 막상 프랑스의 실익으로 연결된건 하나도 없는, 냉철하게 말하면 헛투자였다. 마치 현대 냉전시기 자꾸 특유의 세계문화에 대한 무식함과 독선적인 접근법으로 인해 미국이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수없이 삽질을 해도 막상 이게 반대편 소련의 실질적인 이득으론 이어지지 못한체 결국 미국의 승리로 종식된것처럼 말이다.[58] 헌금이나 기부금 등으로 재산이 계속 유입되는 데 비해 성직자들이 결혼하여 자손을 만들지는 못하므로, 상속 등으로 유출되지는 않는 특성상 가톨릭교회에는 필연적으로 재산이 축적된다.[59] 여전히 근대적 중앙집권 권력 자체가 없었던 중세 같으면 실제로 이러면 "오냐 ㅅㅂ것아 성하한테 꼰질러서 니 파문먹이고 니 가신 휘하 봉건 귀족들 전부 다 너와 손절하라고 방송 보낼 테니 대기타고 있던지 알아서 빤스만 입고 대가리 박아라!"라는 대답이 나왔겠지만, 애초에 이렇게 국왕도 대가리 박고 똥꼬쑈하게 만들 수 있는 봉건귀족, 교회 같은 다른 권력집단을 박살내며 성장한게 17-18세기 유럽의 소위 '절대왕정'이란 체제고, 이 과정의 중심엔 다른 나라 군주도 아니고 바로 루이 16세의 전임자들인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같은 프랑스의 왕들이 있었다. 원랜 유럽 기준에서도 가장 중앙집권화된 왕실 권력이 일찍 출현했고 그 위세도 강력했던 프랑스에서 대혁명과 국왕을 죄인으로서 국가의 이름 아래 모가지 자르고 최초의 근대적 국민주권을 법적으로 공표한 공화국이 출현했다는 우연아닌 우연은 이런 장기적인 역사적 배경을 살펴봐야한다.[60] 성전 기사단이 악마 숭배집단으로 몰려 해산된 것도 기사단의 돈을 당시 국왕인 필리프 4세가 노렸기 때문이다.[61] 루이 16세의 현조부인 루이 14세의 아버지다. 루이 14세는 증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로 오래 산 걸로 유명하고 루이 15세도 당시 기준으론 상당히 장수해서 그런지, 루이 14세와 루이 16세 사이의 왕은 루이 15세 단 한명 뿐인데 항렬은 5세대를 넘어간다.[62] 18세기 후반에는 심지어 이전까진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이베리아 세력들 전담 특기였던 유럽 외 세계선교마저도 슬슬 하나둘씩 프랑스발 선교회, 선교사들이 꿰차기 시작하던 시점이다[63] 유럽의 많은 절대왕정기 군주들은 시민+지식인 세력을 양성하여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억제했다.[64] 따지고 보면 루이 15세 역시 왕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즉위했고, 리더쉽 부족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는 점에서 16세와 비슷한 케이스이기는 하다. 이 점에서 보면 상기된 내용에서는 <루이 16세의 치세는 이전 2대동안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문제를 처리할 턴> 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상은 루이 15세 시기가 재정문제를 처리할 최적의 턴이었다고 볼 여지도 크다. 루이 14세 시기에 강화된 왕권으로 15세 시기에 재정문제를 처리해 버렸으면 16세의 치세는 훨씬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5세 역시 재정문제를 처리하기에는 영 걸맞지 않은 성격이었고, 이 때문에 자기 턴에 부여받은 필수 미션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 상태에서 턴 종료를 눌러버린 것이다. 결국 이 필수 달성과제는 루이 16세의 턴으로 그대로 넘어왔고, 따라서 루이 16세는 15세 당시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14세 시대에 이미 파탄에 이른 재정이 15세 시대에 더 망가졌으며, 14세 시대에 확 찍어눌러두었던 귀족들의 세력은 15세 시기에 어느 정도 다시 확대되었다.)에서 이 필수미션을 수행하지 못하여 게임 오버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65]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루이 16세의 형 루이 조제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고 그 역시도 혁명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66] 그래도 그에 대해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 대인배. 게다가 은인에 대한 고마움도 확실히 표현하는 사려깊은 성품을 지녔는데, 작중 페르젠 백작이 국왕 일가의 탈출을 도왔을 적에도 페르젠의 안위를 걱정해 중도에 헤어질 것을 권하기까지 할 정도다.[67] 보병을 2열로 배치시킨 후, 전의 1열이 사격하고 재장전하는 시간적 공백 사이에 후의 1열이 사격. 이것을 반복하면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연사가 가능해진다. 사실 활이나 석궁 등에서 활용되었던 전술이며, 정확한 제식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