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멘트] 작년 7월 30일 한 생방송 음악프로그램에서 무명밴드의 멤버들이 공연 도중 하반신을 노출해 물의를 빚은 바 있었습니다. 이번주 스타뉴스 기획에서는 사건 후 1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근황과 홍대 인디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들여다볼텐데요, 첫 시간으로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리포트] 작년 7월 30일, MBC ' 생방송 음악캠프'에 초대된 인디밴드 럭스의 무대에서 동료 그룹 카우치 멤버들이 옷을 벗고 하반신을 노출한 사건이 일어나 일대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생방송 도중 일어난 이 사건은 여과 없이 전파를 탔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며 일개 무명가수의 철없는 해프닝이 아닌 사전 모의설, 음모설 까지 여러 가지 의혹을 불러왔는데요. 결국 무대의 주체였던 럭스는 무혐의로 풀려나고 카우치 멤버들은 집행유예로 3개월간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그 후 1년... 럭스와 카우치의 활동무대인 홍대 클럽 스컹크 헬을 찾아봤는데요. 이날 럭스의 리더 원종희 씨가 운영하고 있는 스컹크 헬에는 에어콘 마련 기금공연이라고 하여 서로 친분이 있는 많은 그룹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카우치의 공연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요, 카우치는 구속되었던 3개월을 빼고는 새 앨범도 내고 계속 조용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건 이후 언론을 기피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 음악 활동만은 그만 둘 수 없었다는 카우치, 언론은 이들에 대한 오해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카우치 사건으로 명명된 이 해프닝의 주인공이 둘 다 카우치는 아니라고 럭스의 리더 원종희 씨는 말합니다. [인터뷰:럭스] 그러니까 서로 다른 밴드의 멤버가 한 명씩 출연하게 된 것인데요. 카우치의 다른 멤버는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 언론에서 '카우치'라는 밴드이름을 쓰는 바람에 사건 속의 '카우치 멤버'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파이키 브래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파이키 브래치' 멤버들은 지금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가 있어요. 전부는 아니고... 스파이키 브랫츠'는 활동 안하고 있고 '카우치'는 앨범도 내고 꾸준히 활동하고..." 또한 배후에 누가 있다거나 다른 큰 사건을 감추려는 계획적인 해프닝이라는 오해도 많이 샀는데요.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돈 받고 무슨 사건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냐 아니면 뭐 비리가 있지 않냐... 아니면 음모론 이런 거 이야기하는데 전부 아니였고요..." 이처럼 카우치 사건으로 홍대 클럽들은 생각지도 못한 타격을 받을 뻔 했는데요. 당시 이명박 전 시장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라는 특명을 내려 홍대클럽과 밴드들이 바짝 긴장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인터뷰:김작가] "가장 큰 오해는 결국 그거였던거죠. 홍대 애들은 맨날 저러고 노는구나... 전혀 그렇지 않고요. 너무 오해가 마녀사냥식으로 몰렸던 측면이 있었죠." 후에 홍대 인디밴드의 맏형 격인 오브라더스가 이명박시장을 초대하면서 인디 음악인에 대한 오해는 일단락났는데요. 사회적 물의로 일파만파 번져나갔던 해프닝 일 년 후, 언론의 오해로 상처를 안은 여러 뮤지션들은 조심스럽게 음악적인 꿈을 다시금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촛불 혁명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진보-좌파 진영에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대선 기간 동안, 연대했던 이들 간에 동성혼 합법화, 사드 배치, 대북 정책 등의 정치적 의견 차이로 생긴 ‘균열’을 수습하는 것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온 이들은 새 시대의 방향성을 두고 연대했던 이들과 필연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잘못된 것을 말하기는 쉬워도 올바른 것을 말하기는 어렵고(1), 모든 비판에는 대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SKUNK HELL’ 간판을 따라 건물 지하로 내려가자 백단 향이 났다. 발소리가 잘 나지 않는 나무 계단을 모두 내려가니 피부가 떨릴 정도로 강한 드럼 소리가 들렸다. 스컹크헬은 원종희 씨가 2015년에 연 펑크 클럽 겸 바다. 이전에 홍대에서 운영하던 스컹크헬을 다시 열게 된 계기를 묻자, ‘펑크 클럽을 할 때 가장 오빠의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던 전 아내의 말에 끌리듯 열었다고 답했다. 직접 운영하는 타투 스튜디오 ‘배드핸즈 타투샵(2)’이 있는 건물 지하였고, 우리나라 최고의 인디 펑크 밴드라는 명성을 하룻밤에 뺏긴 2005년 ‘MBC 음악캠프’ 사건(3)으로부터 딱 10년이 지난해였다. 원종희 씨는 올해 3월, 전 아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들을 가사로 옮긴 ‘격동’을 발표했다. 가사에는 맹목적으로 고수해온 자신의 사상을 돌아보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연대의 중요성을 담았다. Another Conception : 신념을 깨다 원종희 씨가 맨 처음 펑크 음악을 시작한 건 중학생 때였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서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같은 한국인들에게 무시 받았던 그는 펑크 밴드를 했던 사촌 형의 공연을 보고 펑크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에서 기존의 틀을 부수고 나가려는 힘이 느껴졌고, 말할 수 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발언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중학교에 진학해 친구들과 밴드 ‘럭스’를 만들어 홍대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소찬휘 씨의 매니저가 밴드를 만들자며 데뷔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기획사의 개입으로 원치 않는 음악을 하는 게 싫어 거절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멤버들이 학업을 위해 밴드를 떠났지만, 원종희 씨는 펑크 음악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 시절 쓴 가사가 럭스 1집 타이틀 곡 ‘지금부터 끝까지’다.(4) “카레를 좋아한다고 카레만 먹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무엇보다 다른 음식도 먹었을 때 카레의 참맛을 느낄 수 있잖아요. 다른 음식과 비교하면서 그 맛을 더 잘 느끼는 거죠.” 그는 펑크가 ‘자유를 외치는 음악’이라면,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원종희 씨는 우연히 이십 대 초반에 “‘펑크 교복’을 입지 않으면 펑크 클럽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사람들이랑 어울리지도 못하고 공연도 간신히 보고 오잖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히칸 머리에 징을 박은 가죽 재킷, 본디지 바지를 ‘펑크 교복’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펑크 교복’을 안 입으면 펑크 클럽에서 배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습잖아요, 우리가 비난하던 사람들이랑 닮아가는 거니까요.” 원종희 씨는 일부 펑크 밴드와 마니아들이 펑크 문화에 갇혔다고 느꼈다. 틀에 맞춰진 펑크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도 모순적이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알고 싶어졌다. 특히 펑크 음악계가 자주 비판했던 ‘주류 음악계’가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결국, 음악 및 방송 관계자들이 많이 졸업했다는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영상학과에 08학번으로 입학했고, 리처드 도킨스 등 음악 외 분야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가치관을 돌아봤다. 왜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했냐는 지인들의 질문에는 장난처럼 “‘음악캠프 PD’가 되려면 나와야 하는 곳이라서”라고 답했다. 원종희 씨는 럭스의 음악이 ‘진화’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갖고 있는 틀을 깨고 생각을 열어가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화’다. Walk Along : 다름을 존중하는 연대 1999년, 럭스는 음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음반을 3,000원에 팔아 상도를 다 어기자’며 함께 펑크 음악을 하던 동료들과 ‘3000 펑크(5)’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원종희 씨는 소매점에서 판매하는 배추 가격 5,000원 중에서, 한 해
동안 배추를 키운 농민은 30원만 받는 건 불합리하다며 음반 산업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럭스가 추구해 온 ‘진화’는 사상이나 권력에 얽매지 않고 자기 생각을 끝없이 열어가며 서로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결국 사상적으로 아나키즘(6)을 추구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정치적인 해석은 편을 가르고, 사상적 해석은 모호하고 복잡해 왜곡될 가능성이 커요. 무엇보다 윤리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래서 진화를 이루는 건 정치보다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니체는 학문에서 인간의 이상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학문이 진리만을 추구해 ‘제멋대로이고, 초라하고, 불필요한 생존자의 모습(7)’인 동물로서의 인간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종희 씨는 ‘사회에도 진화가 있다면 강자든 약자든, 여자든 남자든 둘 다 아니든, 피부색이 어떻든, 모두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 ‘당연함’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진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정치인데 수단인 정치가 목표인 진화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사람은 쉽게 안 바뀌더라고요. 아직도 같은 음악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해서 의견을 잘 전달하지 못하기도 했고요. 대신에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우리 모두 한 번씩 했어요.” 원종희 씨의 의도는 그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고, 기대했던 설득도 실패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보았고, 누구도 서로를 속단하거나 각자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끝까지, ‘격동’ : 선입견도 강요도 없이 12년 전, 원종희 씨는 대중음악 평론가 ‘김 작가’와 인터뷰를 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한 1년에서 3년 정도 펑크로 살다 보면 세상에 대해 관대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선입견도 없어지고. 워낙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웃음). 펑크를 좋아하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기 자동차 긁어놨다고 ‘어떤 개새끼야!’ 이러는 게 아니라 ‘젊은 애들 객기에 이랬구만.’ 하면서 웃음으로 넘기고 끝낼 수도 있는 거고. 20~30년 지나면 할아버지들이 닭머리(모히칸 머리) 보면서 “야, 우리가 젊었을 때는 최소한 20센티는 되어야 닭머리였다.” 이럴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살만해지지 않을까 싶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이 유효하냐고 묻자, 원종희 씨는 “완전히 유효하죠.”라고 답했다. “차를 긁히면 당연히 화가 나겠죠. 하지만 자기가 남의 차를 긁어본 사람들은 ‘이렇게 카르마로 되돌아오는구나.’ 하면서 넘어갈 거예요.”, “자유로워지려는 과정에서 남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어요. 그래 봤던 사람이기에, 누군가 저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그들을 단정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그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는 어렵지만, 주위에 그런 식으로 함께 해 온 친구들을 보면 자신이 했던 말은 지금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 시야를 좁히며 갇히지 않았을까. 혹은 서로의 단점을 보며 각자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권력에 맞선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속단하며 각자의 생각을 강요하기 시작했을까. 글·주동일 사진·신영빈 (1) 니체는 ‘이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코미디언처럼 금욕주의적 이상을 비웃고 마음껏 조소하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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