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등록일2007.05.16최종 저작일2007.055페이지/ 한컴오피스가격 1,500원 Show 소개글중세시대의 문화와 중세교육의 시대적 특징과 사상에관한 내용입니다문화보다는 교육에 중점을 둔 레포트 자료입니다. 중세전기와 후기교육내용에 관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목차1. 중세문화1) 중세문화의 성격 2) 학문과 사상 3) 기사도와 중세문학 4) 미술-교회 건축 중심 2. 중세교육의 시대적특징과 사상 3. 중세시대의 교육 4. 대표적 교육사상 5. 교육사적의의 본문내용2. 중세교육의 시대적 특징과 사상1) 시대적 특징 ① 게르만의 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유럽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며, 로마의 광대한 지역은 로마제국의 몰락 후 3대 문화권으로 나뉜다. ② 중세의 문화는 그리스 로마문화, 기독교 문화, 게르만 문화의 3요소가 서로 어우러져 형성된 것이나, 이중 기독교가 가장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2) 중세의 교육사상 ① 현세는 내세를 위한 준비기 ② 신 중심주의- 교육내용의 변화 ③ 주정주의- 스콜라철학의 발달 ④ 원죄설- 현세: 고행/금욕 ⑤ 신본주의사상- 신에 순종하는 인간 양성 위한 교육 3. 중세시대의 교육 참고 자료<참고자료>http://people.empas.com/people/info/ro/ge/rogerbacon/ http://ks.hmall.com/pf/top/qa_detail?eid=0661U http://ks.hmall.com/pf/top/qa_detail?eid=07tcM http://ks.hmall.com/pf/top/qa_detail?eid=07aVv http://kordic.empas.com/dicsearch/view.html?i=29196000 http://blog.daum.net/peterban/7477278 http://100.naver.com/100.nhn?docid=151799 http://blog.daum.net/sheepjh/11786858 http://blog.naver.com/manse5?Redirect=Log&logNo=20034100642 <출처>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CAF&qnum=4046593 http://blog.naver.com/woodeng81?Redirect=Log&logNo=70002697013 http://blog.naver.com/ppej123?Redirect=Log&logNo=100016889173 http://blog.naver.com/inja3465?Redirect=Log&logNo=120028259343 이민족으로부터 자기 방어 능력을 갖춘 기사 등이 영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상위의 계층에 대해 쌍무적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장원이라는 자급자족적 단위를 거느리면서 유럽 내에서 분권적인 질서를 구축한다. 장원의 아래에 고대의 노예나 소농 등이 특정 지역에 묶이면서 만들어진 농노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질서 아래에서 모든 학문이 포괄되어 움직이면서, 고대의 인본주의가 쇠퇴하는 한편 신본주의 신학이 발달한다. 이것은 후에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교황권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게르만족들을 포교함으로써 결국 교황이 서유럽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힘입어 한때 교황이 직접 서유럽의 황제를 임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게 되었고 서방교회의 수장인 로마 총대주교(교황)과 동방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의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그 결과로 동서 교회 대분열이 일어나 서유럽은 교황중심의 가톨릭과 동유럽은 정교회로 분리되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도시의 등장, 서유럽의 국가들은 보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의 확립 등으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이 되는 구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어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아비뇽 유수로 교황권도 서서히 몰락하고, 마침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에 비해 인본주의가 싹튼 선진문화인 비잔틴 문화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를 꽃피움으로써 중세는 해체 국면을 맞게 된다. 과학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중세 질서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절대 교황권' 또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관념으로만 남게 되었다.
3.1. 시대적 구분[편집]유럽 중세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대체로 476년부터 1453년이나 1492년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담론이 등장하면서는 중세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중세의 성격과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략적으로 중세의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다만, 요즈음의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은 시대구분이 상당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에 의해 시대구분을 역사가의 소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중세를 정확히 어느 시점이 시작점이고 어느 시점이 끝나는 지점인지에 대한 담론은 산업시대와 같이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
3.2. 시대상[편집]3.2.1. 배경[편집]기원후 2세기 말부터 로마 제국의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후에 두 세기를 지켜온 안정과 평화는 정치적 혼란, 내전, 도시의 쇠퇴, 이로 인한 경제파탄에 자리를 내주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250년경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공격과 침입은 또다른 위험이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정치와 경제는 활력을 잃었으며 생활수준도 전반적으로 열악해졌다. 상류계급의 생활수준은 특히 현저하게 낮아졌다. 경제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노예노동의 부적절한 공급과 역병, 전쟁, 출산율 하락에 기인하는 전반적인 인구감소였다. 경제상황의 악화는 진지한 학문연구에 절대전제조건인 여가를 빼앗아버렸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부의 학문과 동부의 학문 사이에 교류가 점차 감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세기 말과 4세기에 로마제국은 행정적으로 동부와 서부로 양분되었으며, 두 지역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서부의 라틴 세계는 더이상 예전처럼 활기차게 동부의 그리스 세계와 교류 할 수 없게 되었다. 3.2.2. 농업[편집]중세 초기의 경우 로마 제국 때 이룩한 농경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6세기 경부터 서서히 농경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 기술 항목에 카루카라는 신식 쟁기가 북유럽에서 처음 발명된 것과 마구가 개량된 것이 바로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였다, 그리고 게르만족들이 실시하고 있던 개방경지제가 보편화되고 있었으며, 1000년경 중기 이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 인구가 급증했고, 상업이 부활해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져,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형성되었다.[7] 이 생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전 로마 시대보다 더 증산된 생산량이었다.[8] 그러나 중세 후반에는 흑사병의 타격에 의하여 인구가 감소했다. 3.2.3. 경제[편집]상업적인 측면에선 서로마 제국 말기의 상황보다 더 나빠졌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경우 아예 이민족들에 의해 영토가 점차 점령당하다가 결국 망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동로마 제국의 경우 어느 정도 혼란기를 넘길 찰나에 이슬람의 발호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이 파급은 서유럽에까지 미쳐 무역이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나중엔 바이킹 같은 해적들 때문에 더 막장이 되었다.[9] 3.2.4. 정치[편집]중세 유럽의 정치는 흔히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동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봉건제로 축약할 수 있다고 생각되나 사실 시대별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우선 서유럽을 기준으로 왕권 및 중앙 정부와 영주를 비롯한 지방 정부, 교회 권력, 도시 공화국, 외교로 나눠진다. 우선 서로마 제국이 서서히 붕괴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들은 무정부 상태에 진입하고 만다. 게다가 7~8세기 거쳐 이슬람 세력이 육상과 해상을 통해 유럽 대륙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이 한동안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3.2.4.1. 전기[편집]4~11세기 사이인 중세 전기의 정치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어쨋든 영토의 크기가 당연하게도 작은 소국인 것은 기본이었고, 게르만족 사회의 정치적 관념이 그대로 유지되어, 구체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왕권이 약했고, 무엇보다 게르만족의 오랜 전통이었던 분할 상속법에 따라 왕이 죽은 후 여러 왕자들에 의해 왕국이 여러 갈레로 분할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 왕국은 개국 이래로 팽창주의 정책을 펄쳐 서고트 왕국을 남프랑스 일대에서 축출하는 등 강력한 모습과는 별개로 왕권이 지방 유력자들의 협력 없이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고, 이때문에 지방분권화로 지방 유력자들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심지어 어린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해져 자연스럽게 궁재를 세습하던 가문이 작정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나마 프랑크 왕국은 상대적으로 나은 수준으로 서고트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은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귀족들에 위해 왕위가 위협을 받거나 분할 상속으로 인해 여러번 왕국이 분할되다가 다시 유혈 속에 통합되거나 랑고바르드 처럼 아예 공위 시대가 될 정도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서고트 왕국은 관료제와 로마법과 게르만법을 융합한 독저적인 법전을 만들어 완비해가는 과정에서 왕과 귀족들, 말기에 아리우스파를 누르고, 국교가 되 가톨릭과 유대인들간의 대립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넘어온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그러던 중 789년을 기점으로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노르드, 데인족들로 구성된 바이킹들이 브리튼 제도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해안과 하천 일대의 지역들을 습격해 약탈 및 해당 지역을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칠왕국의 경우 웨식스를 제외한 여섯 왕국들이 바이킹들에 의해 무력화되고 당시 강국이었던 머시아마저 동쪽은 바이킹들의 차지가 되었고, 나머지 서쪽으로 그대로 웨식스의 종속국으로 전락되고 만다. 한편 바이킹들에 의한 혼란기를 수습하지 못한 카롤루스 왕조의 왕권은 약화해져 서프랑크 왕국의 경우 봉신들에 의해 몇차례 왕위를 찬탈당하다가 987년을 끝으로 단절되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시대가 막이 내려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제후들이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를 국왕을 선출해 카페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동프랑크의 경우 그 보다 반세기 앞서 동쪽에서 밀려오는 마자르족에 침략에 시달리다가 카롤루스 왕조의 왕통이 끊어지면서 역시나 제후들에 의해 하인리히 1세를 선출하면서 오토 왕조가 개막되었다. 사족으로 중프랑크는 초대왕인 루타리우스의 봉어 이후 다시 분열되다가 결국 왕위를 승계할 후계자들도 빨리 죽게되면서 영토가 동·서 프랑크 왕국에 의해 분열되는 형식으로 해체되고 이후 이탈리아는 오랜 분열기를 가지게 된다. 더욱이 알프스 이북에 위치한 중프랑크 왕국령들은 각각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 사이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분쟁 지역이 되었고, 특히 알자스-로렌 지역은 프랑스와 독일 간의 최대 분쟁 지역이었다. 외교적으로 중세 초기인 5~11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게르만족계 국가들도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성립된 오도아케르의 왕국 또한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콘스탄티노풀로 보낸 후 동로마 제국에게 왕국으로 인정받았으며, 동로마 제국과 인접한 나라들도 동로마 황제에게 자세를 낮추는 대신 동로마 황제는 이들에게 바실레우스 칭호를 허락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3.2.4.2. 중기[편집]중기인 11세기가 되면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기독교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등 가독교화 되가고 있었고, 유럽 내의 정치 상황 또한 점차 봉건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또한 이시기는 점차 세속 정치와 교회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던 시기로 이시엔 이미 교황 자체가 세습만 하지 않을 뿐이지 세속 군주화 되가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던 시기이도 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의 경우 마케도니아 왕조가 말기에 접어드는 시기로서 콘스탄티노스 8세의 데릴사위였던 로마노스 3세가 의문사 당한 후 제위가 불안정졌고, 급기야 테오도라 여제를 끝으로 왕조가 단절된 후 두카스 왕조가 들어선 후 30년 가까이 혼란기에 빠지다가 알렉시우스 콤니누스가 제위를 찬탈한 후 혼란이 수습된다. 그 중에서 12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프랑스의 샤르트르의 주교직을 역임했던 숄즈베리의 존은 진정한 군주와 폭군을 가르는 기준을 자유의 유무에서 있다고 봤고, 자신의 저서에 '군주란 법과 인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폭군은 오로지 법이 폐기되고, 인민이 노예가 되는 것만을 바라는 존재다.'라고 피력했다.# 당시 존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 카지미에시 3세처럼 지배층의 횡포에 일반 평민들을 보호해주는 등 개념있는 군주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중기가 되면서 교회의 통치를 받던 도시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우선 1035년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였던 밀라노에서 코뭔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밀라노는 밀라노 대주교의 통치를 받던 도사였으나 이당시만 하더라도 성직자들이 독신이 아닌데다가 족벌주의까지 횡행하자 결국 1057년 파타리아 운동과 함께 교회 권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다만 이때는 그저 교회 개혁과는 연개된 저항 운동인 탓에 자유 도시나 코뭔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시기 권위의 상승이론과 하강이론이란 것이 이때 등장했다. 두 이론은 모두 로마법에 근거한 것으로 12세기 블로냐 대학의 유명한 법 이론 교수였던 아조가 주장한 것으로 권위의 상승이론은 게르만족과 연계된 것으로 권위가 밑으로 위로 올라가는 즉 권위의 근원이 정치공동체에게 있다는 사상이며, 권위의 하강이론은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즉 권위의 근원이 신에게 있다는 것으로 사실상 왕권신수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법적 이론에 맞물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권위는 인정받되 점차 제국 밖에 위치한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제국(諸國) 등의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9세기 경 국경을 맞대던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이밖에도 제각기 달라져가는 언어·문화 등을 한데 묶기에도 신성 로마 황제들은 물론이고 로마 황제로서의 전통성을 갖고 있던 동로마 황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기독교의 동서 대분열 시기를 거치며 가톨릭이 주류인 서유럽권과 정교회가 주류인 동유럽권으로 나눠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서유럽의 봉건제가 정착하게 되면서 각 국가 내의 지방별로 고유의 방언과 함께 정체성까지 확립되어가던 시기였고, 이는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등장하는 근대까지 이어졌다. 3.2.4.3. 후기[편집]중세 후기는 중세적 헤게모니들이 점차 사라져 가던 시기였다. 우선 서유럽 내에선 신성 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의 권력이 동시에 약해진 시기였으며, 동로마 제국 또한 이시기에 확실하게 쇠퇴하면서 멸망을 향하고 있었다. 3.2.5. 관직과 행정[편집]중세 유럽의 행정은 당시 건재한 동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다른 문화권, 특히 한·중·일 등의 한자 문화권과 비교하면 전문적인 관료조직과 관료들이 전무했다.정확히는 관료 조직으로서의 개념이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암흑 시대로 알려진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서로마의 관료제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3.2.6. 문화[편집]3.2.6.1. 문학[편집]상세내용 3.2.6.2. 복식[편집]디시인사이드 게임 속 중세의 옷 3.2.6.3. 건축[편집]로마네스크 양식 및 고딕 양식도 이때의 산물. 고딕 양식은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건축학에선 고트족과 상관이 없는 작명. "전통적인 건축학 입장에서 보면 꽤 파격적이다."라는 의미에서 "야만인" 고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중세 가정집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서 도시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 내에서 하프 팀버(팀버프레임)라는 목조골조 사이에 진흙이나 벽돌로 채우는 반목조 양식의 건축술이 등장해 서유럽과 중부유럽 등지에서의 가옥양식으로 크게 유행했다. 한편 알프스 이남의 경우 벽돌조의 가옥이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붕에서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데 북유럽과 중부 유럽의 경우 주로 박공 지붕이 주류였고, 남유럽은 평지붕이 주류였다. 다만 동로마 제국과 러시아 지역을 제외하곤 유럽 각지의 도시 주택은 건물 폭이 좁으면서 대신 길이가 긴 이른바 세장형(細長型) 주택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인슐라처럼 일층엔 상업이나 작업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이층 이후로 전부 생활 공간으로 오늘날의 타운하우스처럼 수직형 공간이었다. 3.2.6.4. 유희[편집]중세 유럽 귀족들의 유희 3.2.6.5. 음악[편집]자세한 내용은 중세 음악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2.7. 교육 및 학문[편집]
300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60여 개의 대학이 생겨났다. 1350년에는 독일에만 25만여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며, 15세기 중반에는 빈, 하이델부르크, 쾰른 등지의 대학에 등록한 학생 수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대학생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기본적으로 3학4과를 배웠으며 그 외에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국가가 정립되고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왕실 내외의 복잡한 법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인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것. [23] 3.2.8. 식문화[편집]식문화는 변변치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상당한 양의 요리책들이 저술되기도 했고 영주들도 놀고 먹는 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24] 요리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종류의 향신료가 유럽에 소개되었고 이후 대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향신료 열풍의 기폭제가 된다. 이때 18세기가 될때까지 유럽의 음식들은 상당히 달고 짜게 조리가 되었다.
3.2.9. 사회[편집]
사실 유럽 말고도 한국사에도 이와 유사한 전개로 후기에 상업의 발달과 함께 읍성, 읍치의 경제력이 상승하고 반대로 눙민들의 경제력은 하락했다.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당시 보부상들이 조선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을 공격했으며, 당시의 읍성에 살던 읍민들 또한 농민군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1895년에 나주 읍성이 농민군의 공격을 받을때 유림뿐만 아니라 나주의 읍민들 또한 수성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중세 때는 공휴일 개념으로 기독교의 축일(주님부활대축일, 주님성탄대축일) 때도 쉬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시행하는 것이 바로 종교(기독교)적 가치에 설립된 자선단체로 병원, 구빈원, 요양원, 고아원, 작업장 등을 운영했다. 다만 중세의 복지는 전체 빈민을 구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사회 지도층들은 빈민을 두 분류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순래자들이었고, 후자는 걸인과 고아, 과부, 독거 노인들로 구성되었고, 후자에 구휼이 집중되어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인구수가 증가했지만 반면에 부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걸인의 수가 증가했는데 이러한 걸인들이 무리지어 여러 도시로 전전하면서 구걸 행위를 하는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여러 규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부터 교회가 공동묘지 역할을 하게되었다. 일단 중세로 접어들면서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라 본당 사목구를 중심으로 도시나 마을 등이 형성된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동네 성당/교회에서 장례 예식을 치르고 바로 옆 묘지에 묻혔다. 지금도 유럽 동네들을 돌아다니다보면 마을 중심에 위치한 교회나 성당을 중심으로 공동묘지가 포진되어있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며, 묘지의 관리는 보통 교회측에서 맡았다. 다만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매장 위치가 다르다. 일반인의 경우 대개 상술한 대로 성당 옆의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왕족 및 귀족과 같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은 영묘 및 봉안당의 형식으로 성당 바닥이나 지하에 관만 안치되었으며, 대표적인 영묘 역할을 한 성당으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의 생 드니 대성당 등이 있다.
특히 중세 중기는 서유럽에 각종 법률서가 집필된 시기로 먼저 볼로냐의 수도자이자 법학자였던 그래티안에 의해 교회법의 집대성인 그래티안 교령집이 집필되었고, 13세기 작센에선 작센 내의 게르만법을 집대성한 작센 슈피겔이 집필되었으며, 이밖에도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에서도 자체적인 법률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는 서로마 붕괴 후 사라졌던 변호사와 같은 법률 계통의 직업 등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상업 및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에 관한 관례와 규칙이 생겨났고, 이를 종합한 상법과 해상법이 등장해 상인들 사이의 국제법을 정착한다. 당시 상법의 내용은 정기시장의 교역날짜, 교역절차, 시장관리, 화폐유통, 도량형 표준, 시장 법원관리, 시장 중의 은행법규, 상인조직, 계약, 치안관리, 등을 담고 있었고, 해상법은 선박관리, 화물적재, 사고보장, 해운 보험 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특허권이 특허법으로서 법에 편입된 시기도 바로 이시기로 1474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시스템의 특허 조례를 만들었다. 한편 11세기 이후의 영국에서는 현대의 법률 제도인 배심원제와 영장 기소제와 보통법과 형평법이 등장했다. 배심제도는 본래 프랑크 왕국의 것으로 본래 신명재판을 통해 판경을 내리는 방식과 달리 왕실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을 조살 할 때는 선서의 방법을 쓰지 않고 법관의 주도하로 지식인들을 모아 그들에게 진상을 설명하게 하는 방식을 고안했는데, 나중에 신분이나 조세에 관련된 개인 재판에도 사용되었는데 이때는 재판 당사자의 이웃 중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이웃조사단이란 임시 조직을 구성하게 했다. 이후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해 영국왕에 취임하면서 프랑스의 이웃조사단 제도를 이용해 영국 전역의 토지상황을 제대로 조사했고, 이후 1164년 헨리 2세가 클라랜든 칙령을 통해 법정 내에서의 배심단 제도를 확립해 순회재판 때 현지 주민 12명을 배심단으로 구성하게끔 하였다. 아울러 영장 기소제 역시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가 영국 내의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지방법원을 보존하고 지방관습법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국왕의 명의로 재판을 할 것을 요구해 원고가 법원에 기소를 할 때 반드시 국왕의 대법관에게 영장을 신청하면서 성립되었다. 보통법 또한 법관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순회재판을 하느라 각지의 재판에 참여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에 관해 잘 알게 되어, 런던으로 돌아와서 다른 지법에 파견된 법관들과 함께 사건에 대해 토론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을 소개해 전국의 법을 조금씩 통일해 나간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12~13세 양모업과 상업무역이 왕성해지면서 재산에 얽힌 갈등이 빈번해 점차 보통법의 한계가 드러나 다시 관습법으로 회귀하지만, 14세기 대법관의 양심과 정의에 기초한 형평법이 등장하고 이후 15세기에 대법관과 그 조수가 함께 정식으로 형평법원을 구성하게 된다. 프랑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필리프 2세가 즉위하기 전 상공업이 부흥하면서 사회가 다양화되가기 시작했고, 또한 오래전부터 카패 왕조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왕권 강화와 맞물려 영주 세력을 견제할 차원으로 필리프 2세가 즉위한 후 프랑스 각지에 위치한 왕령지에 각각 법관들을 파견해 북프랑스 일대에는 시민 출신인 바이이(Baillis:대관)와 남프랑스 일대에는 기사 계급으로 구성된 세네샬(Sénéchal:지사)을 파견했다.이들은 파견된 지역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이시기에 한계가 있었으나 무죄추정의 원칙이 로마법과 게르만족의 관습법 등을 통해 존재하고 있었다.
3.2.10. 의학과 위생[편집]
3.2.11. 기술[편집]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다른 문명권보다 각종 기술들을 재발견하거나 발명하기 시작했다. 본래 현대 기준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기술력들은 상당한 수준이었으나 당시 지리·환경적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이 당시 발명된 몇몇 기술들이 보편화되지 못했다. 3.2.11.1. 민간 기술[편집]
카루카는 기존의 아드보다 무거웠지만 대신 무거운 무게와 함께 땅을 갈게 만드는 철로 만든 수평 날이 추가 되었으며, 덴마크의 카루카의 경우 바퀴가 달려 있었다.때문에 북유럽의 척박한 땅을 갈기에 적합했고, 무엇보다 이랑과 고량을 낼수 있어 배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기가 통할 수 있어 한시적으로 기름진 옥토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무게로 인해 방향 전환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어 이때를 기점으로 유럽의 농토는 정사작형에서 직사각형의 농지로 바뀌게 된다. 마구의 발달(6세기에서 9세기) 편자(9세기) 와인 압축기(Winepress)(12세기) 하지만 와인 압축기는 개인이 만들어 사용하기엔 너무 비싸으며 무엇보다 당시엔 포도씨를 빼지 않고 그대로 넣는 경우가 많아 발로 으깨 것과 달리 포도씨까지 으껴버렸기에 압축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맛이 써 웬만하면 그냥 발로 으껴서 포도즙을 짜낸 것을 선호했다.
아르테시안 웰(Artesian well)(1126년) 중앙 난방을 통한 바닥 난방(bilegger))(9세기) 리브 볼트(ribe vualt)(12세기) 첨두 아치(pointed arch)(12세기) 굴뚝(12세기) 분절형 아치교(segmental arch bridge)(1345년) 크레인(crane)(11세기 중엽) 크레인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유럽에서 잠시 명맥이 끊기지만 12세기경 다시 서유럽에서 상·공업의 부흥과 함께 거대 건축물인 고딕 건축 양식이 등장하면서 대형 성당과 성 등을 건축하기 위해 다시 도입되었으며, 이밖에도 항구에서 화물의 적채와 하역을 위해 대형 크레인을 하나 정도 설치했다.그단스크의 항구 크레인 이후 1420년 피렌체에서 그동안 미완이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짓기 위해 필리포 브르넬레스키에 위해 기존의 크레인보다 더 높은 높이로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카스텔로라는 황소 한마리로 움직이는 신형 크레인이 만들어졌다. 수레(wheel barrow)(1170년대) 이중 돔(1420년대)
기계식 시계(13세기에서 14세기) 기계식 시계는 멀리 잡으면 13세기후반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는 기존의 시계들에 비해 분이란 개념이 있었지만 당시의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현대의 시계와 비교해도 오차가 심한 편이었고, 다른 시계에 비해 개인이 갖고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컸기에 주로 시계탑을 만들어 정상부에다가 설치해 공공용으로 사용했다. 기계식 시계는 개인이 사용하기에 큰 크기와 그리고 30분 가량 오차가 심했지만 그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기계적 세계관이 싹트는 것과 함께 다른 시계에 없던 분의 개념을 갖고 있는 점 때문에 상인들 사이에서 선호되었으며, 이밖에도 도시에 대한 자부심, 실용적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어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적으로 애용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510년경 독일에서 개인용 시계가 발명된 이후 단점들을 개선해갔다.
스프링(15세기) 스프링은 탄력성의 법픽을 이용한 구조체로 선사시대때부터 탄력을 이용한 무기나 물품 등이 만들어졌으며, 15세기 자물쇠의 푸품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코일 스프링이 만들어진다. 자세한 것은 판타지를 여행하는 현대인에서 참고할 것.
중기에 들어서 수차와 연결된 풀무로 통해 공기를 불어 넣는 강제과급하는 방식과 최대 300kg급까지 키운 발전된 괴철로로 연철을 샌산하여 패턴웰딩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수차와 연결된 대형 망치로 두들겨 강철화 시켰고, 이때의 철 생산량은 전기에 비해 수백kg이나 증가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인 1350년대로 들어서자 용광로와 함께 철을 용해시키는 제강법이 등장하면서 강철의 생산이 증가하게 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물레방아에 연결된 풀무와 페턴 웨딩이 사라진다. 다만 자력으로 초강법을 얻는 것은 실패해 18세기 영국이 식민통치를 하던 인도에서 초강법을 획득한 후 유럽 전역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수차와 풍차는 6세기 경 아일랜드에서 위에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가동되는 상괘식이 등장 한 것 외엔 초기에 단순히 곡식의 도성과 물을 빼내거나 붓는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나 9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축용을 위한 용도의 수차가 개발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박형 수차(Ship Mill) 공성전이 끝난 후 선박형 수차는 서유럽으로 전파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주적이었던 이슬람 제국 또한 선박형 물레방아를 사용했다. 이미지를 보면 알지만 수차를 강가 위에 띄우는 형식도 있지만 그냥 두 척 이상의 나룻배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조석 수차(Tidal Mill)(6세기) 상괘식 수차(Overshot Watermill)(6세기) 맥아 수차(Malt Mill)(6세기) 이하 수차들은 곡식을 도정하기 위한 수차들이었으나 정작 농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영주들이 물레방아의 경영자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이들을 세리로 삼아 사실상 장원 내의 농노들에게 강제적으로 물레방아를 이용하게 만들어 도정한 곡식의 일정부분을 물레방아 업자에게 줘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농노들도 물레방아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몰래 맷돌을 사용해 곡식을 도정했고, 영주는 영주들 대로 맷돌을 압수하려고 했다. 축융 수차(Fulling Mill)(1080년대) 무두질용 물레방아(Tanning Mill)(1134년) 대장간용 수차(Forge Mill)(1200년대) 연삭용 수차(Tol-Sharppening Mill)(1203) 대마용 수차(Hamp Mill)(1209년) 풀무용 수차(Bellows Mill)(13세기 중·후반) 제지용 수차(Paper Mill)(12세기) 제재소용 수차(Sawmill)(14세기) 광물 파쇄용 수차(Ore-Crushing Mill))(1317년) 용광로용 수차(Blast Furnance Mill)(1384년)) 이밖에도 수차의 활용은 다리를 세울 때도 사용되었다. 교각을 착공하기 전 우선적으로 교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하천의 높이 보다 더 긴 여러 개의 나무 말뚝을 교각의 형태에 맞게 박은 다음 그 옆으로 수차를 가설해 틀 안에 고여있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풍차(11세기)
선미 방향키(rudder))(12세기)
안경(1280년) 인쇄기(1440년대) 인장반지(sealring)(5세기) 회전 책갈피(Rotating bookmark))(13세기) 워터마크(1282년) 깃털펜(6세기) 제본 방법의 진보 7세기까지의 제본 과정 중 바인딩 방식은 고리 형태의 캅틱 바인딩으로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애용한 방법으로 이후 9세기부터 책 가장자리에 한줄의 고리 엮음 방식이 등장했고, 보드를 가공한 표지가 추가된다.
임페투스 가설은 이후 서유럽으로 소개되어 14세기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장 뷔리당에 의해 한층 체계적으로 연구되었다. 자성에 대한 최초의 논문(13세기) 아라비아 숫자(13세기)
하지만 19세기까지 단추는 금·은·보석과 같은 값비싼 재료들이나 공정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비싼 사치품에 속해 있어 평민들에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16세기경 부터 군복에 뼈로 만든 단추가 달린 상의가 나오게 되지만 전체 계층에 가리지 않고, 사용하기까지는 18세기 중엽 독일의 웨스퍼가 개발한 금속 단추 제조 기술과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의 대량 생산을 기다려야 했다. 비단(6세기) 이후 15세기경 스페인과 프랑스에도 누에나방과 제조법이 전파되어 스페인에선 발렌시아와 그라나다 지방, 프랑스에서 리옹이 비단을 생산하는 곳으로 변모했다.참고로 비단을 제조하는데 수차가 사용되었다. 물레(13세기 이후)
유리 그러다가 11세기 초 중부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포레스트 글라스(forest glass))라는 새로운 유리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유리는 제조시설이 숲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 재료가 탄 나무재와 모래/석영으로 만들어졌다. 스테인드 글라스(10세기 이전) 원형 숫돌(Grinder ston)(834년) 증류주(12세기) 자석(12세기) 유리 거울 해부도(1345년) 검역(1377년) 쥐덫(1170년) 3.2.11.2. 군사 기술[편집]중세 유럽의 군사 기술은 동시기에 평화기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동양과 달리 군사 기술이 평이하게 달랐다. 우선 로마제국의 쇠퇴기와 서로마 제국의 붕괴기를 거치면서 퇴보하였고, 동양과 비교하면 군사 편제서부터 봉건제 등으로 인해 동원력이 약해지면서 단순한 편제를 하고 있었고, 군사학적으로도 무경칠서가 존재하던 동양과 달리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전 서로마 제국의 귀족이었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저술한 군사학 논고 하나 외에 없었다.
반면 금속제 갑옷은 시대별로 세가지로 나눠진다. 중세 초기만하더라도 대체로 반팔 티셔츠 형태로 쇠사슬로 만들어지거나 가죽끈으로 엮은 여러개의 철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후자가 점차 도퇴되기 시작하고 전자가 주류가 되면서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부터 중세 후기인 14세기부터 15세기 초반꺼지 제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차 판금으로 갑옷을 만드는 이행기(Trasition Period))에 진입하면서 몸통을 제외한 전체 부위가 판금화를 거치게 된다. 다만 몸통에 입는 흉갑의 경우 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동양의 두정갑 동일한 구조의 갑옷들이 1410년 판금갑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1420년대가 되면서 판금갑의 초기형의 등장하게 되며 이 때를 기준으로 점차 판금갑이 대세가 되기 시작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남부 독일에서 각각 밀라노 양식, 고딕 양식 등이 등장하게 되며, 또한 철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일반 병졸들도 돈만 넉넉하게 있다면 판금으로 만들어진 투구와 흉갑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자세한 발전사는 서양 갑옷을 참고할 것. 사족이지만 판타지 등의 매체의 영향으로 일반 병졸들도 가죽 갑옷을 입고 다녔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통념과 달리 상당히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 갬비슨(Gambeson)(10세기) 잭체인(Jack chain)(15세기) 사슬갑옷(5세기) 러멜러 아머(5세기) 베흐체리츠와 칼란타르(13세기) 트랜지셔널 아머(12세기) 플레이트 아머(1420년대)
라운드 실드(5세기) 카이트 실드(9세기경) 히터 실드(10세기경) 파비스(13세기) 타지(13세기) 버클러(13세기)
도검류 단검의 경우 주로 한손검 다음으로 중세시기 유럽 각지의 군대에서 부무장으로 애용한 무기로 기사라도 한손검 외에도 별도로 차고 다녔다. 단검의 용도는 주로 근접전 와중에 한손검을 분실할 시에 그 대용품으로 사용되어 갑옷으로 보호하기 힘든 부위의 급소를 노리는데 사용되거나 전투 후 살 가망이 없는 자들의 목숨을 끊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부무장으로 한손검을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병사들이 둔기류 다음으로 차고 다닌 무기이기도 했다. 단검 안테니 대거와 링 대거(antennae dagge&ring dagaer)(13세기) 발럭 나이프(ballock knife)(12~13세기 사이) 배즐러드(13세기) 런들 대거(14세기) 이어드 대거(eared dagger)(14세기) 친퀘디아(cinqudea)(15세기) 망고슈(15세기로 추정) 스틸레토(15세기 말) 한손검 바이킹 소드(8세기) 아밍소드(11세기) 펄션(11세기) 메서(14세기) 곡도(9세기) 러시아의 경우 동로마 제국보다 한 세기 늦었지만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교류 등으로 통해 러시아의 나부 초원의 공국들에서부터 곡도를 받아들여 이후 점차 북쪽의 타 러시아 공국으로부터 퍼져 나갔고, 이후 13세기경의 시작된 타타르의 멍에 시기에 고착화 되었으나 여전히 바이킹 소드에서 비롯된 양날 검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양손검 바스타드 소드(15세기) 클레이모어(15세기) 에스터크(14세기) 쯔바이핸더(15세기) 플랑베르주(15세기) 이밖에도 스페인과 아일랜드, 덴마크 등에서도 제각기 양손검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중 덴마크의 양손검은 크로스 가드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 창과 폴암 폴암은 대개 농기구 내지는 공구에서 기원하는 장병기들을 통칭하며, 익숙한 농기구 및 공구에서 기원한 장병기들이 많기 때문에 농민이나 시민 출신의 병사들이 손십게 익힐 수 있던 무기였다. 하지만 폴암은 창에 비해 무겁기 때문에 점차 보병들 사이에서 방패를 버리는 병사들이 보변화되기 시작하나 폴암만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상대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창(5세기) 파이크(13세기말) 알슈피스(Ahlspiess)(15세기) 랜스 스피툼·란세어(13세기) 데인액스(9세기) 폴액스(14세기) 글레이브(13세기) 포차드(11세기) 부주(vouge)(13세기) 할버드(14세기) 빌(13세기) 웰시 혹(welsh hook)(13세기) 루체른 헤머(lucerne hammer)(15세기) 밀리터리 포그(military fork)(15세기) 낫(13세기 이후로 추정) 타격무기 둔기의 경우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중세 중기로 들어서면서 갑옷이 중무장화됨에 따라 점차 도끼와 함께 갑옷에 효과적인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세 후기에 발생한 농민반란에서 농민병들들이 기사들을 상대할 때 도끼와 함께 둔기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중장병들에게 대항했으며, 형태에 따라 여러 분류로 나눠졌다. 둔기류 메이스(12세기) 모닝스타(12세기) 플레일(12세기) 워해머(14세기) 도끼류
마갑(시기 불명) 군마 데스트리어는 네 종류의 군마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군마로 말 중에서 가장 대형 종의 수컷만을 선별해 망아지 시절부터 사육하면서 조련시켰고, 때문에 가격 또한 상당히 비싸 아래에 후술될 코서에 2배 라운시에 10배의 가격이었다. 때문에 전장에서 타고 다니는 것보다는 토너먼트에서 타고 다니는 것이 보편적이었다.당대 회화 자료를 보면 목을 뱀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코서는 데스트리어 다음으로 선호된 군마로 데스트리어에 비해 경량급 군마이며, 제대로 조련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때문에 데스트리어보다 제대로 된 군마로서 기사와 같은 중장 기병들을 태우고 적의 대열을 향해 돌격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밖에도 사냥이나 토너먼트에도 동원되었다. 라운시는 웹상에서 짐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엄연한 군마의 일종으로 승용마로도 이용되었으며, 코서보다 더 저렴해 대체로 가난한 기사들이 타고 다니기도 했으나 14세기 이후 지세가 험한 토지를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승용마로 굳어지게 된다. 펠프리는 군마이지만 주로 승용마로 이용된 말로 통상의 군마들은 전투 전까지는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기에 보통 전장으로 이동할 때는 펠프리를 타고 다녔다.매끄럽게 걷는 훈련을 받았기에 고급 승용마로 유명했다.
노포(5세기) 오나게르(4세기) 망고넬(6세기경) 트레뷰셋(12세기경)
리볼데퀸(1339년) 핸드 캐논(1320년대)
장궁(5세기) 십자궁(12세기) 투창(5세기) 프랑시스카(6세기) 투석구(5세기 중엽)
바겐부르크(14세기경)
제병연합 전술(중세 후기) 군사 계급과 편제 현재의 군사 계급과 군대 편제의 기원은 서양으로 그 시발점은 중세이다. 중세 초에 먼저 생긴 군사 계급명은 원수로 알려진 마샬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현재는 순경으로 불리는 콘스테이블 즉 무관장으로 본래는 왕의 마굿간을 관리하던 관직들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세 중기가 되면서 점차 늘어나는 전쟁으로 왕이 친정하지 않을 때 대신 왕의 군대를 지휘, 혹은 왕의 친정시 근왕군의 기병대의 지휘관을 겸하면서 군사 계급화되었다.특히 콘스테이블의 경우 무관장 외에도 기병대장으로도 불렸다. 이후 중장과 대위가 중세 중기를 전후로 생겼다. 우선 장군의 어원은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프랑스어 capitaine général에서 유래되었으며, 중장(Lieutenant General) 또한 이시기쯤에 생겼으며, 부장군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상술한 대무관장과 원수의 부관격인 계급이었으나 이마저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대위(Captain)의 경우 14세기 초 필리프 4세때 전쟁시 지방의 영주들을 동원할 때 이들에게 부여된 칭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칭호를 부여받은 영주들 중 영지의 생산력만으로 생계 등을 유지하지 못한 이들이 사설 용병대를 만들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용병대장=캡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후 용병을 중심으로 한 유사 상비군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군사 계급으로 편입되었다. 중위(Lieutenant)는 중세 후기에 등장한 군사 계급으로 용병대의 규모가 커지고, 캡틴이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면서 보좌직으로 신설된 직책에서 시작되었으나, 명칭은 중세 초인 10세기 말에 신설된 Lieutenant du roi에도 있을 정도로 유래가 깊었다. 소위의 경우 중세가 지난 후에야 생겼으나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12세기부터 기수(Ensign)가 소위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 하사관 계급에 속하는 상사를 뜻하는 서전트와 하사 또한 중세에 생긴 계급이었다. 군사 편제의 경우 배틀(battle)-베너(banner)랜스(lance)로 구성되었다. 배틀의 경우 현대의 사단과 같은 편제이지만 배속되는 배너의 규모에 따라 수백에서 수천으로 일관되지 않았으며, 내부적으로 병종에 따라 보병, 궁병, 기병 등으로 그룹이 세분화되었으며 선봉대(Van Guard), 본대(Main Body), 후위대(Rear Guard)로 나눠졌다. 베너는 콘로이(Conroi)라고 불리며 현대의 소대와 같았으며 마찬가지로 배속된 랜스의 수에 따라 차이가 났으며, 이러한 베너를 지휘한 기사를 나이트 배너렛(Knight banneret)으로 불렸다. 랜스는 밴드(band)라고 불리며 현재의 분대에 가까웠는데 한 랜스당 기사나 서전트의 지휘하에 2명에서 다섯 이상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중세 중·후기쯤 되면서 대위 칭호를 갖고 있단 영주들이 용병 사업에 뛰어들면서 새롭게 중대(company)라는 개념이 새롭게 생겼다. 병종 3.3.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편집]JTBC 차이나는 클라스 - "암흑시대는 독일과 일본에 의해 씌워진 프레임이다." 9세기 초 로마네스크 건축 (제르미니 데 프레) 12세기 고딕 건축 (샤르트르 대성당) 9세기 교회 건축과 12세기 교회 건축. 1) 정말로 모든 것이 퇴보된 암흑시대인가? 2) 퇴보되었다면, 그게 종교(기독교) 때문인가?
이렇듯 수백 년 동안 까이고 또 까이던 중세는 19세기 말에 몇몇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재평가를 시작했고, 20세기 초부터는 역사학계에도 본격적으로 재평가의 바람이 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세계 사학계에서의 대세는 중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세가 정말 좋은 시기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전까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던 시기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어디까지나 근대로 넘어간다고 하여 중세보다 확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종합하면 중세는 이전의 판단에서 암흑기로 간주했던 것보다는 나은 시대였고 근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마냥 살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지만, 문명과 문화는 그때에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3.4. 참조 자료[편집]이 문서는 반달리즘식 수정이 자주 이루어지므로 위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공신력 있는 자료들을 몇가지 소개한다. 서적의 경우 도서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5. 관련 요소[편집]
3.6.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편집]3.6.1. 기사문학[편집]자세한 내용은 기사문학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6.2. 중세 판타지?[편집]자세한 내용은 서양 판타지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중세 판타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6.3. 라이트노벨[편집]일본의 라노벨 작가인 하세쿠라 이스나의 작품인 늑대와 향신료, 늑대와 양피지,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또한 판타지에 실제 중세사와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작품의 배경이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작가 스스로 13권 후기에 40에서 50권 사이의 중세 유럽에 대한 자료를 모아 해당 작품을 썼다고 인증한 바가 있어 본 문서와 같이 대조해보며 읽어 볼 만하다. 3.6.4. 문학[편집]
3.6.5. 영화[편집]
3.6.6. 게임[편집]
3.6.7. 애니메이션[편집]
4. 유럽 밖의 중세[편집]'중세'의 비유럽사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유럽이 아닌 지역에 '중세'가 존재하였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는 애초에 시대구분론이 서양사 중심의 세계사가 형성된 탓이 크기 때문이다.
[1] 사실 '현대'라는 용어가 정착한 것은 정말 얼마되지 않았다. 1980년대 정도까지는 '최근세'라고 하여 '근대'이기는 하지만 가장 최근의 지엽적인 시기를 지칭하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지금도 '현대'를 편의상의 용어로 볼 뿐 학술 용어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고.[2] 애초에 이런 구분을 한 르네상스시기가 과거 찬란했던 문화의 부활이라는 인식이었으며, 그 과거문화가 사라진 중간 시대는 미개한 문화로 폄하하여 구분하게 되면서 찬란한 과거, 미개한 중간, 찬란한 과거의 부활로 구분한것이다. 물론 이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면밀히 따진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느정도 계몽주의자들의 목적에 따른 왜곡이 첨가되어 있는부분으로 마치 공자가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포장했으나, 실제 주나라가 공자의 묘사대로라기 보다는 그냥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활용한 편집된 이미지의 국가 같은 것처럼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고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3] 통념적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구분법 중 하나이기는 하나, 로마 제국의 몰락, 기독교의 성행, 봉건 제도의 부상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사건을 가지고 시대를 구분할 수 있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4] 앙리 피렌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앙리 피렌은 중세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중세의 시작점을 476년보다 뒤로 설정했다는 의의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부적절하다. 8세기까지도 도시, 상업, 시장경제 등에서 고대적 요소가 잔존했다고 하나 로마 말기에 이미 도시와 상업과 시장경제는 쇠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 세력의 팽창이 유럽 전체를 농업 문명 사회로 바꾸었다는 그의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5] 그러나 이것은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국교화가 더 의미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약간 퇴색된다.[6] 자크 르 고프를 비롯한 아날학파는 장기지속적인 중세를 주장했다. 이들은 이전까지 중세 사회 변혁의 계기로 취급받던 르네상스나 흑사병을 중세와 이후 시대를 구분하는 단절의 계기가 아니라 중세의 장기지속적 현상 중 하나로 보았다. 15~16세기의 대르네상스 전후로도 유럽인들은 빈번히 고대 황금시대로의 회귀를 추구했고, 흑사병은 14세기 이후 18세기 초까지 창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 사회의 중세적·봉건적 심성(망탈리테)가 기존 중세라 불리던 시간을 넘어 산업화 시기까지도 잔존해 있었다고 보며, 중세 중 특정한 시기만 골라잡아 중세라 정의해놓고 암흑기 혹은 낭만적인 시대로 치부하는 시각을 거부한다.[7]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커진 계기이기도 하다. 로마 때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중세에는 그런 거대 제국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던 것. 물론 실제로 커지기도 했지만.[8]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이 로마 시대에 어떤 취급을 받던 곳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로마 시대에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나 그리스, 이집트 등은 중세에도 멀쩡히 부유한 지역으로 살아남아 막강한 국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9] 다만 항해술에 뛰어난 바이킹은 약탈뿐만 아니라 노예 무역에도 종사했으니 무역 활동이 아예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10]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무역의 이상은 Win-Win이다. 자신과 상대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 함께 부유해지는 것. 여기서 상대도 부유해진다부분을 용납하지 못한 거다. 그리고 실제로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서로가 양보해서 각자 조금씩의 이익을 얻자는 쪽과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자는 쪽 중 단기적인 선택의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는 명확하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상대도 하고 있다는 점과 상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하니 그냥 무역을 안 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결국 내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보호무역이다.[11] 물론 이건 유럽 전역에서 다 때린 게 아니고, 화로는 러시아나 프랑스가 유명했고, 창문은 영국 등 각자 특유한 세금이 있었다. 그렇다고 평민들한테 매기는 징세과목은 결코 적다는 것은 아니다.[12] 1340년 백년 전쟁이 시작된 당시 피렌체의 상인귀족 가문들이었던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의 은행들은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에게 각각 90만 플로린과 60만 플로린을 대출해줬지만 에드워드 3세가 이자를 상환하지 못함에 따라 파산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 두가문과 사업적으로 연결고리가 있던 유럽 전역에 있던 수 백 여명의 사업가들마저 연쇄적으로 파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3] '로마' 제국의 황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만이 가졌으며, 프랑크인은 '황제'까지만 인정했다고는 하나 이후에는 이를 무시한다.[14] 이때 베네치아는 석호 한가운데 있었기에 랑고바르드의 침공에서 벗어났으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과 단절되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지도자를 선출하게 된다.[15] 자경대장으로 불리지만 사실 고대 로마 시대때 황제의 말들을 관리하던 직책에서 유래되었다.[16]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는 각각 얼마샬과 나이트 마샬이 있었다.[17] 그런데 이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까지도 만리장성 등의 유적의 석재 등을 빼와 주변 주민의 주택을 짓는 일이 흔했다. 피라미드 역시 표면의 석재를 빼가서 현재의 계단형 모습이 형성된 것이고 콜로세움도 성지로 지정되기 이전에 빼간 석재들 때문에 남은 부분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18]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시골집들을 볼 수 있었다.장 자크 상페의 풍자 만화 참고로 우리나라도 현재까지 함경도와 강원·경상도 산간 지방에 이러한 구조의 민간 가옥들이 있다.함경도 전통가옥[19] 대표적인 중세 당시의 팔라쪼로는 팔라쪼 스피니 펠로니와 팔라쪼 다반차니, 호텔은 센스 대주교 저택과 클루니 호텔로 현존하는 중세 호텔이다.[20] casino는 이탈리아어로 집을 뜻하는 "까사(Casa)"와 작다, 귀엽다를 뜻하는 "이노(Ino)"를 합쳐 만든 단어로 귀족들의 간이 놀이방을 의미했다.[21] 물론,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에 의거한 관점이었다.[22] 물론 여기에 대해서 결과적으로는 과학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23] M.H.Shank 저작 참조.[2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파티는 단순한 유흥을 떠나 권력 확인의 수단이었다.[25] 단 피자, 파스타는 이탈리아에만 국한되었고, 가룸은 아예 실전되었다.[26] 그것도 귀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내장이나 다리 같은 잡다한 부위들.[27] 이 문서에 몇번 언급되었다시피 귀족들의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은 귀족이 실용적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도 여유와 돈이 남아도는, 서민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다.[28] 왕좌의 게임 시즌 4 2화에 조프리 바라테온의 결혼식에 나온 그 비둘기가 튀어 나오는 케이크의 모티브다.[주의] 식수의 경우 2000년대 자료라서 당시 정수하는 법을 몰라서 그냥 술을 물 대신 마셨다는 내용이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30] 17:06에서 21:03까지 중세 파트[31] 8:42에서 13:12까지는 중세 파트[32]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죽은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중세에도 여성을 마녀로 몰아 죽이는 일이 없진 않았을 테지만, 근세에 벌어진 마녀사냥은 사람들이 단체로 마녀를 집중적으로 죽이는, 즉 학살에 가까운 마녀사냥이다. 일반적으로 마녀사냥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잔혹하게 치러졌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근세 한정으로 잔혹하게 치러졌다.[33] 중국의 포로 세뇌, 소련 KGB의 각종 고문 기법, 미국 CIA의 MK울트라 프로젝트 같은 예가 그것.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시기에는 요도에 볼펜 심을 쑤셔넣는 고문까지 있었다.[34] 이런 귀족 여성의 통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남자다움을 지닌 여성'이란 변호가 생겨났다. 여기서 남자다움은 현재 통용되는 의미와 좀 많이 다르다.[35] 다만 2번째의 경우 마샬이나 스튜어트처럼 한 귀족 가문이 오랫 동안 세습한 직책명에서 유래된 성씨들도 있다.[36] 위에서 언급했듯 그레고어 멘델 대수도원장이 수도원 세금징수 정책과 싸운 이유가 각종 일은 다 시키면서 세금은 지원해줄지언정 또 걷어간다는 이유에서다.[37] 참고로 말하자면 교무금 자체는 현대 가톨릭교회에도 존재하며, 신자의 의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내지 않는다고 강요하거나 닦달하지는 않고, 신자 개개인의 자율에 맡긴다. 액수도 꼭 10분의 1을 내는 것은 아니고,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 낸다.[38]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가톨릭교회가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한건 그가 지동설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부터 지동설을 온갖 궤변을 써가며 옹호해서 중립적으로 다루지 못한 데다가, 교황을 모티브로 한 듯한 캐릭터가 멍청하고 헛소리만 내뱉는 역할로 나왔기 때문이다.[39] 신약 성서에 부에 대한 경계를 가르치는 구절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를 찾은 한 부자가 있다.[40] 다만 무조건 종교집단의 주도 하에 복지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자세한 내용은이 링크에서 참고할 것.[41]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 지식인들의 영향도 받았다. [42] 개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단적으로 흑사병의 경우 물론 신이 원인이지만 병은 결국 자연적인 일이고 그 자연적인 원인을 일으키는게 신이라고 보는게 교회의 입장이었다. 즉 신성 말고 자연적인 원안도 인정했다는 것. [43] 천두라고 하는데, 고대 종교나 민간 의학에서 많이 쓰이던 방식이었다. 멀리갈것 없이 화타를 보자. 이런 방식이 쓰이기도 했다는건 중세 의학이 (초기에는) 이교나 고대 민간의학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는것을 의미한다. [44] 오물을 집 밖에서 길거리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는 로마 시대 하층민 주거지에도 존재했던 관습이다.[45] 다만 중세 후기 흑사병이 돌자 목욕탕이 흑사병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쇠퇴하긴 했지만 중세 말기쯤에 쇠퇴했지 대부분의 중세 시대땐 목욕이 일상적이였다. 그리고 이 낭설도 아예 허구는 아니였는데 지금과 달리 로마시대부터 목욕탕은 생각보다 그리 위생적이지 않았고 사람이 몰리는 장소였기에 전염병에 취약했다.[46] 영국의 리처드 2세가 "Statuto quo nul ject dung"(분뇨를 함부로 버리지 말 것)이라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중세인들도 오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 매우 비위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47] 학술자료를 캡처한 자료가 있어 부득이하게 링크했지만, 댓글의 내용은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중세의 수도 시설은 로마의 기술이 거의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중세 성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도시 인구가 더욱 증가한 16세기에야 수도와 목욕 시설이 급감하기 시작한다.[48] 흔히 악취설(miasma theory)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역병 의사의 특이한 복장도 이러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49] 다만 노예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19세기 들어서이며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중세 유럽에선 여전히 노예제가 잔존했는데, 주로 겔리선의 노잡이들이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며, 속설과 달리 같은 종파의 기독교인이라도 노예로 삼은 기록이 남아 있다. 자세한 것은 노예제 항목을 참고.[50] 비누 용액과 알칼리 용액을 섞은 것에 사로 겹쳐진 양모를 적셔 압력을 가하는 작업. 양모는 섬유의 수축이 심하기 때문에 축융 작업으로 미리 최대한 수축시켜놓아서 섬유를 치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놓아야한다.[51]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 생산 이전까지 종이는 여전히 비싼 편이었다.[52] 참고로 동시기 동북아에서 최고로 서역산 말 말고도 다음으로 치던 몽골 초원의 말들은 120cm 내외였고, 한반도산 말의 경우 이보더 더 작은 117cm 정도이다.[53] 사실 배경보다는 모티브가 많다. 판타지는 무협물처럼 실제 역사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모티브를 따온 가상세계가 클리셰고, 역사물이 아닌 판타지인데 실제 역사의 중세가 배경인 경우는 중세기반 가상의 세계보다 꽤 적은 편. 그래도 많은 판타지물이나 기사 얘기가 중세를 모델로 삼은 사실은 유명해서 중세하면 판타지를 떠올리긴 충분하다. 이 경우 서로마가 붕괴되어 개막장 난세가 펼쳐진 중세 초기보다는, 체제가 안정되고 상업이 융성하던 중세 말기에서 모티브를 주로 따온다.[54] 중세와 르네상스를 칼같이 나누고, 안 좋은 것은 전부 중세로 떠넘긴 다음 르네상스를 숭상하는 태도는 18세기의 소위 '플라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맹목적 반기독교 정서에서 처음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식이다. 중세의 전유물이라고 흔히 간주되는 마녀사냥, 혹은 이단심문 또한 그 전에는 암암리에 산발적으로 벌어지다가 르네상스의 절정기인 15세기경부터 본격화된 측면이 있다.[55] 이로 인해 <신국론>이라는 명저가 저술되었고, 원죄에 대한 신학도 발전했다.[56] 가령 중세 초 도시들의 인프라가 후퇴한 건 사실이지만, 사회의 부(富)는 오히려 촌락까지 확산되고, 가족 단위로 토지를 소유한 소농의 비율이 올라가고, 농민의 구매력이 상승하는 모습 또한 보여줬다. 또한 서로마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서방의 국제 교역망에 타격을 주었으나, 서방 경제는 교역망들이 지역화(localization)되면서 결국 활로를 찾았다. 당연히 이는 고대인과 중세인의 지능 차이가 아니라, 거대 제국의 붕괴에 자연히 뒤따르는 삶의 모습들이다. 20세기 오스트리아 역시도 제국 붕괴 후 경제 쇼크를 겼었다.[57]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이 짙게 녹아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을 서유럽 외에 곧이 곧대로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등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참고로 『상상의 공동체』라는 저서로 국내에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형이 바로 이 사람이다.[58] 총 4권의 시리즈로 되어있다.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만큼 백과사전 식으로 빽빽히 구성되어 있으며 가격이 비싼 게 아쉬운 점이다.[59]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분류법을 쓸 경우에도 서구에서는 1500년대 부터는 Ealry mordern, 즉 조기 근대라고 한다. 이 개념을 번안한 것이 근세라는 단어다.[60] 중세 끝무렵인 르네상스 이탈리아이기에 이견의 여지는 있다.[61] 십자군 전쟁기 중세[62] 꽤나 골때리는 암울한 설정의 게임으로, 흑사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의 95%가 사망해버려 한 줌 남은 생존자들이 다시 모여 안전하고 풍요로운 정착지를 건설해나가야 한다는 설정이다.[63] 이 두 가지는 엄밀하게 말하면 대립은커녕 양립했고, 지금은 통합되었다고 봐야한다. 현대의 시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경제체제적 구분에서 '공산주의는 현대'라는 부분을 뺀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통설이 된 몇 가지 예 중 하나이다.[64] 현대 역사학에서 근대의 기점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발달이다.[65] 한국사의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 참관기,전덕재[66] 당연히 어느 학설이 새로 나오고 대세가 된다고 해서 교과서가 막 바뀌고 예전과 답이 달라지면 혼란이 생기기 때문에, 교과서는 대체로 가장 늦게 바뀐다.[67] 이것의 시초는 일본의 정체성론에 대항하려는 백남운 등 사회경제학파의 담론이다. 김석형 등의 학자는 아예 외거 노비를 농노와 유사한 단계로 파악해 중세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는데, 현재에는 많이 기가 죽은 이론이기는 하나 일본의 게닌(下人, 사무라이 계층에 딸린 예속적 농민)에 대한 재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68] 국사학과의 주도적 견해. 역사교육과는 오히려 연세대와 비슷한 경향이다.[69] 애초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표현 자체가 마르크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 때문에 역사를 잘게 쪼개서 억지로 자본주의를 거쳐야 되느냐 아니면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가도 되느냐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70] 여기서 사실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시대구분론으로서 '고대', '중세'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고대국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 단어가 시대구분으로서 고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모로 대충 얼버무린 감이 있다. 중세 몇년도?위키 백과에서 중세(中世)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근세(1500-1800)가 시작되기까지의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라고 서술하고 있다.
중세시대는 몇세기?중세(中世, Medium aevum)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9세기-11세기)이 있었던 10세기부터 르네상스(14세기-16세기)와 더불어 근세(1752년-2004년)가 시작되기까지의 10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시기이나 이 개념은 동양사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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