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주의*

본 포스트는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있는 그대로 탐구함으로써,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하고, 역사에 대한 비판적 사고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인의 일반적인 역사상식과 상이한 내용과 표현이 나오는 것에 대해 양해 부탁드립니다.

화승총(火縄銃)(영어로는 Matchlock gun / Arquebus) 은, 초기 화기 (화포) 의 하나로서, 흑색화약을 사용하여, 전장식 (총구 앞에서 탄알과 화약을 집어넣는 방식) 의 활강총신(총신안에 나선형으로 파인 홈이 없는 매끈한 형태) 을 가진 머스킷총 중에서, 매치록식 (화승식) 으로 분류되는 점화 방식의 총기를 가리킨다. 보통, 일본에서는 소형의 화승총을 '철포(鉄砲)' (일본어 발음은 '텟뽀'), 대형의 화승총을 '오오즈츠(大筒)'이라고 칭한다.

매치록식은, 얇은 철판스프링 (바네) 장치에 불을 지핀 화승(火縄)(불심지) 를 끼워두고, 발사시에 방아쇠를 당겨서 장치를 작동시키면, 불심지가 발사약에 닿아 점화하는 구조이다.

화승총은, 15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발명되었고, 특히 독일에서 많이 발전되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11년 오스트리아 판본 「Codex Vindobona 3069」 인데, 여기서 Z자형의 서펜타인록(Serpentinelock)식의 화승총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서펜타인 쇠 장식을 그린 1430년대의 그림이 남아있다.

현대 일본에서는 화승총이 '총포도검류 소지 등 단속법(銃砲刀剣類所持等取締法)' 의 규제대상이 되어 있어, 이를 골동품으로 소유하려고 해도 법적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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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에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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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네가시마 화승총 (아이치 박람회 포르투갈관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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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히메지성 천수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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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화승총의 위력

3. 일본의 화승총 역사

3.1 철포와 전국시대

3.2 에도시대 이후

4. 일본에서의 운용방법

4.1 발사방법

4.2 발사속도

4.3 병사의 배치

5. 역사

5.1 화승총 등장에 의한 진형(陣形)의 변천

5.2 장애물을 이용한 화승총의 운용

5.3 화승총의 명칭

5.4 중국에서의 화승총

6. 일본에서의 분류

6.1 탄환의 중량, 총신의 길이에 따른 분류

6.2 제작 지역 · 유파(流派)에 따른 분류

7. 역사로서의 화승총

7.1 화승총 사격경기

7.1.1 국제경기

7.1.2 일본의 독자적인 경기

8. 소지(所持)와 분류

9. 관용구

10. 일본에서의 화승총 관련인물 일람

10.1 대장장이 (철포 대장장이[鉄砲鍛冶], 철포 장인[銃匠], 건스미스[Gunsmith]

10.2 포술가

10.3 철포대

11. 관련 도서

화승총 이전의 총기는, 불씨 (불심지 등) 를 손으로 꽉 누르는 터치홀식 (송나라의 「돌화창(突火槍)」, 명나라의 「수총(手銃)」, 몽골제국 및 몽골에 지배당했던 러시아와 중동의 「마드파(Madfa)」 등) 이었기 때문에, 다루기가 어렵고 명중률이 낮았다. 이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독일에서 불심지를 S자형 쇠 장식 (서펜타인[Serpentine]) 에 끼워서 조작하는 서펜타인록(Serpentinelock)식을 고안하였고, 여기에 개머리판 등의 구조적인 개선도 이루어져 화승총이 탄생하게 되었다.

최초의 화승총은 터치홀식의 총신에 단순한 S자형 쇠 장식만 갖다붙인 원시적인 총기였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시어록(Sear lock)식과 스냅핑(Snapping)식이 발명되었는데, 유럽에서는 시어록식이 주류가 되었고, 일본에는 스냅핑식이 전래되어 이후 독자적인 개량이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화승총의 분해도 (1475년) 는 시어록식이다.

화승총의 호칭인 '하쿼버스' (독일어), '아쿼버스' (영어), '아르카부스'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는, 처음에는 터치홀식 총기에 반동을 흡수하는 후크(Hook)를 붙인 것을 가리켰으나, 후에 '화승총'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하게 되었고, 또 1499년에 처음으로 나타난 '머스킷(Musket)'이라고 하는 호칭은, 그 당시에 중량이 무거운 헤비한 화승총을 가리켰으나, 후에 모든 총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1543년 (텐분[天文] 12년) 타네가시마에 철포(鉄砲)가 전래되었기 때문에, 화승총을 '타네가시마총(種子島銃)' 또는 그냥 '타네가시마(種子島)'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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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매치록식은 화승총의 명중률과 사정거리를 크게 늘리는 등 총의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씨 · 불심지를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하는 점, 야전(夜戦)에서 적에게 아군의 위치를 알려주게 되는 점, 구조상 시간이 걸리는 전장식(前装式)밖에 이용할 수 없는 점, 비가 오면 다루기가 어려워지는 점 등,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이 단점들을 보완하였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화승총의 명중률과 조작성이 약화되었다. 회전하는 강륜 (휠) 에 황철강(黄鉄鉱) 조각을 마찰시켜서 불을 붙이는 방식 (강륜식 휠록식) 이나, 부싯돌을 철 조각에 부딪치게 하여 붙을 붙이는 방식 (플린트록식) 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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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박물관에 있는 화승총과, 현대의 라이플을 비교해보면, 그립 (손잡이) 부근의 형태가 크게 다르다. 이 때문에 화승총은, 현대의 이른바 라이플총처럼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이고, 겨드랑이를 붙여서 발사하는 형태는 불가능하였고, 화살을 시위에 매기는 것과 같이 팔꿈치를 밖으로 뻗고 사격하는 스타일로 사용되어왔다 (다만 유럽의 화승총은, 크로스보우의 영향을 받아 화승총의 대부분이 견착[肩着]스톡형이었고, 단상형[短床型]의 화상총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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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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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신궁(明治神宮) 예제봉납(例祭奉納) '모리시게류 포술(森重流砲術)' (2012년 11월 2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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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츠루베우치(釣瓶打) (교대로 계속해서 사격을 이어나가는 것) 의 연무(演武)

화승총은, (1) 흑색화약을 사용하여, (2) 라이플링 (강선) 이 없는 활강총신에서, (3) 납으로 만든 총알을 발사한다는 점 때문에, 일반적으로 현대의 소총에 비해 위력과 성능이 모두 떨어진다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위 조건에 대해서 화승총이 현대의 소총보다 불리한 것은, 장거리 사격을 할 때의 탄도특성과 명중률, 그리고 대물(対物)위력이다. 그러나 활강총신(滑腔銃身)에서, 그것도 탄환의 납 부분을 단단한 금속으로 씌우지 않고 (이른바 소프트포인트탄) 총을 발사하는 경우에는, 다른 건 몰라도 대인(対人)위력은 확실하게 증가한다.

게다가 현대의 소총이나 산탄총에 비교하면 화승총 탄환의 구경(口径)이 크기 때문에, 탄환 자체가 꽤 무겁다. 화승총 탄환의 발사시점 속도는 480m/s 정도로, 권총보다는 빠르다. 화승총은 소총에 비해 탄환의 직진안정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근거리에서의 파괴력은 현대 산탄총의 슬러그탄에 필적할 정도로, 강력하고 위험하다.

위에 기재한 것과 같이 화승총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이 퍼져나간 한가지 원인은, 에도막부 말기에 시조식(施条式)(총신 내부에 나선의 홈을 새긴 것) 서구식총으로 무장한 서구식 군대 (막부가 편성했던 불식전습대[仏式伝習隊] · 막부보병대나, 후에 신정부군의 주력이 된 웅번들의 각 부대) 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이전에, 화승총을 주력화기로 사용했던 세력 ('제2차 쵸슈정벌 전쟁' 시기의 막부군이나 '우츠노미야 전쟁' 시기의 신정부군) 들이 맥없이 전쟁에서 패퇴하여 빠르게 병제(兵制)의 서구화가 추진된 것을 민중들이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그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실전에서 갑옷이 사용될 기회가 없어진 평화로운 에도시대에, 갑옷을 만드는 장인들이 자신이 만드는 갑옷의 우수함을 어필하기 위해, 「시험용 갑옷」 (타메시도오[試し胴])라고 칭하면서, 스스로 화승총으로 갑옷을 쏘는 갑옷성능 실증실험을 각지에서 수행하였는데, 이때 대중들에게 「화승총의 총탄을 맞아도 관통되지 않은 갑옷」 이란 인식이 생기고, 이 갑옷들이 각지에서 현재까지 문화재로서 남아있어온 사정 등이, 화승총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남게된 한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 일반적인 화약량 ・ 탄두중량의 화승총으로, 전국시대 당시의 일반적인 아시가루용 갑옷을 사격했던 보고서에 의하면, 두꺼운 강철판을 사용한 갑옷의 정면 몸통 부분이라도, 화승총에 직격으로 맞으면 매우 간단하게 관통되어버리고, 단단한 몸통 부분의 강철판에 부딪쳐 분리된 납탄이, 갑옷의 몸통 내에서 산산조각나면서 갑옷 등쪽의 강철판도 뚫어버린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보고서는 「설령 완전무장한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화승총이 정면으로 갑옷의 몸통에 명중하면, 피격당한 병사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화승총은 장전할 때에 탄환의 중량이나 화약량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시험용 갑옷」 (試し胴, 타메시도오) 의 실증실험을 할때에, 갑옷의 성능을 과장하고자 일부러 탄약의 위력을 줄였다고 생각된다. 또, 갑옷을 나무의 나뭇가지 등에 매달아놓은 상태로 사격을 실시했기때문에, 탄환이 갑옷에 명중하지 않고 빗겨맞거나 튕겨나갈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된다.

역사군상 편집부 및 일본전장총사격연맹 회장인 오노노 세이지(小野尾正治) 등이 2005년경에 실시한 실험에서는, 탄환구경 9mm에 화약량 3그램을 기준으로 한 화승총을 거리 50m를 두고 발사하였는데, 그 탄환이 두께 48mm 히노키 합판을 약 36mm 가량 파고 들어가서 뒷면에 균열을 일으켰다. 또 그 후속실험에서는 두께 1mm의 철판을 관통하였다. 그 뒤 철판 2장을 겹쳐서 2mm로 만든 철판 표적에 대한 실험에서는, 철판을 관통하지는 못했지만, 내부의 철판이 안으로 움푹 들어가서, 탄환이 아시가루의 갑주에 명중했을 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거리 30m에서는 모든 표적을 관통하였다 (출처 - 역사군상[歴史群像] 2005, p.96-97).

또 화승총에 대한 방어구로서 자주 사용되어온 타케타바(竹束) (직경 4cm ・ 길이 1m 정도의 청죽[青竹]대나무를 31개씩 엮어서 만드는 대나무 다발로, 직경은 77cm, 중량은 14.3kg이다) 를 가지고 사격실험을 실시하였다. 거리 28.8m에서 10돈 무게의 탄환 (직경 18.4mm) 을 가지고 사격한 때에는 청죽(青竹)을 6개 관통하였고, 타케타바 그 자체를 관통하는 위력도 보여주었다. 6돈 무게의 탄환 (직경 15.5mm) 을 가지고 사격한 경우에는, 청죽 4개를 관통하는 것에 그쳤고, 타케타바 전체는 관통하지 못했지만, 간혹 타케타바의 피격된 나무부분이 불량했던 경우에는, 다발 전체를 관통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 결과가 나와있다 (출처 - 역사군상[歴史群像] 2005, p.96-97).

또한, 화승총의 유효사정거리는 200m 정도이고, 현재 명중률에 관한 실험도 이뤄지고 있다. 사람을 본따서 만든, 신장 160cm의 정지된 마네킹 표적에 대해서 사격을 실시하였는데, 30m 사격에서 5발 전부 흉부에 착탄(着弾)하였고, 50m에서도 5발 중 4발이 착탄했다고 하는 우수한 기록이 나와있다 (출처 - 역사군상[歴史群像] 2005, p.94-95).

무엇보다도, 사격하는 거리나 각도에 따라서, 총탄에 관통되지 않는 경우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나루세 요시마사(成瀬吉正)가 사용했던 남만갑옷(南蛮胴)처럼, 관통되지 않고 실전에서의 탄흔만 입은 갑옷도 현존하고 있다.

유럽에서 만든 갑주는 두께를 늘려 총탄을 막아왔으나, 두께를 늘려서 중량이 늘어났기 때문에 기동성문제로 전신 방어를 포기하고, 대체로 흉부만을 방어하는 흉갑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철포와 전국시대

기존에는 『철포기(鉄砲記)』 의 기술에 따라,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 (텐분[天文] 12년) 타네가시마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어 있던 철포가 1543년 이전에 왜구 세력에 의해 일본의 여러 지역에 반입되어, 전래될 당시에는 사냥총으로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 (우다가와 학설). 또, 유럽의 순발식(瞬発式) 화승총이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개량되고 발전한 것이, 다시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그것이 동남아시아 화승총의 표준양식으로 자리잡았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니켈 학설, 브레야 학설).

어찌되었든, 복잡한 발사기구가 없는 원시적인 화승총은 늦어도 16세기 초엽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15세기 후반 일본에서 화약이 생산되어 조선(朝鮮)과 교역을 할때에 일본이 화약을 조선에 수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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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신(尼信) 박물관이 소장한 화승총

전국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오우미(近江)의 쿠니토모(国友) · 히노(日野), 키슈(紀州)의 네고로(根来), 이즈미(和泉)의 사카이(堺) 등이 철포의 주요 생산지로서 번영하면서, 해당 지역의 많은 철포 대장간들이 처마를 잇대어 늘어서 있었다. 네고로는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행한 '키슈 정벌'의 영향으로 모모야마(桃山) 시대 이후에 쇠퇴하였으나, 쿠니토모 · 히노 · 사카이는 그 후에도 철포의 생산지로서 번영하면서,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죠카마치(城下町)(성 밑의 시가지)중에서, 철포 아시가루나 철포 대장장이가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장소는 「텟뽀마치(鉄砲町)(철포마을) 라고 불리었는데, 현대에도 그 지명이 남아있다.

일본은 전국시대 말기에 50만정 이상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어, 당시 세계 최대의 총기 보유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분로쿠 · 케이쵸의 역' (임진왜란 · 정유재란) 에서 일본군은 철포로 무장하여 명군(明軍)을 애먹였기 때문에, 후에 조사정(趙士禎)이 화승총 교범인 『신기보(神器譜)(1598년부터 1603년까지 걸쳐서 완성) 를 집필하게 된다.

또, 축성기술에서도 화승총의 전술적 성능을 살린 요코야가카리(横矢掛かり) (성벽 구조를 미로처럼 꼬아서 적이 항상 2면 이상의 성벽에 직면하게 만든 구조로, 일본의 성들에 현존하고 있는 양식이다) 등이 발달하여, 아코성(赤穂城) 등의 축성에 응용되었다.

에도시대 이후

일본의 총기가 전래된 시점부터 에도막부 말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화승총의 구조에서 진보되지 못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다.

먼저 에도시대에 들어와서, 토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가 각 국 (각 번) 에서 백성들이 철포로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이에 더해 총기이동을 제한하고, 나중에는 총기소유까지 원칙적으로 금지했다는 이유와, 쇄국정책으로 기술진보의 정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가 현재 통설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철포 대장장이들이 외국에서 발달한 플린트록식 화승총 기술을 도입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그 당시에 만들었던 시제품도 현존하고 있고, 또 그 응용기술로서 그 구조를 응용한 라이터도 제조되었다. 또 각 번에서 각 다이묘(大名)들이 , 극비리에 다양한 총기를 연구하였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그 연구의 다양성의 범위는 광범위하였다.

플린트록식이 일본에서 유행하지 못했던 것은, 일본에서는 양질의 부싯돌이 생산되지 않아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고, 또 플린트록식은 기구의 불량에 따른 불발률이 화승식(火縄式)보다도 높았기 때문이다. 평온한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플린트록식의 장점인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점이나, 밀집사격이 가능했던 점 등이 당시 일본인들에게 이해되거나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행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외에, 모든 무술과 마찬가지로 '철포술(鉄砲術)'도 일종의 경기적인 요소를 가지고 유파(流派) 형식으로 계승되었기때문에,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기구류를 개조하거나 변화시킬 필요가 별로 없었다고 하는 것이, 유행하지 못한 그 이유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플린트록식 화승총의 결점으로서는, 화승식(火縄式) 화승총에 비해 강력한 스프링이 장착되어 있어 공이치기 작동시 충격이 큰 점, 방아쇠를 당기고나서 좀 늦게 장약에 착화(着火)되는 구조였기때문에 총신이 흔들려서 화승식 화승총보다도 명중률이 떨어졌다는 점 등이 있다. 에도시대에는 당연하게도 '철포술(鉄砲術)'이 실전보다도 경기에서 더 많이 쓰였기 때문에, 이 결점은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에도시대 내내 사용된 거의 대부분의 총기는 화승식 화승총이었다.

한편 화승총은, '조수(鳥獣) 피해 대책'을 위한 실용적인 농업기구로서, 농촌에 보급되었고, 매매되었고, 소유되었다. 물론 농민봉기를 경계하는 등의 이유때문에, 농업기구로서 사용되고 있는 농민의 화승총 성능을, 그 이상 향상시키는 일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에도막부 말기에는 일본에 신식총이 도래하게 되어, 각 번에서는 퍼커션록(Percussionlock)식의 총기 등을 모방하면서, 신식총기를 시험제작하였다. 화약을 담는 기구를 3개 붙인 것이나, '페퍼박스 피스톨(Pepper box pistol)'과 같이 여러 개의 총신을 붙여, 회전시키면서 차례로 착화(着火)시키는 총기 등이 만들어졌다. 그 외에, '3연발 화승총'이나 '수평2연식단총(水平二連式短銃)' 등, 다양한 총들이 시험제작되었다.

이 총들은 실용성이 있는지 의심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신식총이 수입되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그러나, 화승총의 공이치기를 전관식(雷管式)의 해머로 변환하여, '활공식 전관총(滑空式雷管銃)'으로 개조된 새로운 형태의 총도, 그 개조의 용이함 때문에 유행하게 되어, 게벨총과 같은 2등급의 총기로서 사용되어 왔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쿠니토모(国友)를 비롯한 전통적인 화승총 장인집단들이 제작하는 총이, 서양식총과 무라타총(村田銃) 등의 신식총에게 경쟁에서 밀려, 이후 일본에서 화승총은 급속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마타기(マタギ) (일본 토호쿠 지방의 사냥꾼들) 등의 민간 수렵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중고 화승총에 대한 커다란 수요가 있어서, 일부 화승총 장인들이 다이쇼시대부터 쇼와시대 초기 무렵까지, 화승총 제조의 명맥을 가늘게 이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화승총도 쇼와시대 초기에 군이 불하한 (또는 민간 제조회사의 라이센스 생산품) 무라타총(村田銃)이 민간에 보급되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끝무렵에, 구 일본군이 본토방어사단에 무장시키기 위해, 간소한 동네공장에서도 대량생산이 가능한 「국민간이소총(国民簡易小銃)으로서의 화승총의 양산 준비를 검토하여, 실제로 개발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극소수의 시제품 사진과 함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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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大阪) 사카이(堺) 지역의 '철포 대장장이(鉄砲鍛冶)' 모습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위에서 본 화승총 구조도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옆에서 본 화승총 구조도

1. 불심지(火縄)에 불을 붙여둔다. 불을 붙여둔 여러개의 심지를 준비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불심지의 양 끝에는 불을 붙여, 그것을 2개로 접어서 점화구(火口)를 왼쪽손가락에 끼워두고 대기하는 「후타쿠치비(二口火)」 라는 방법도 있었다.

2. 총구에 발사약인 화약과 탄환을 장전한다 (후에 하야고 [早合, 화약과 탄환을 순서대로 넣어놓은 나무, 가죽, 종이로 만든 쌈지] 가 발명되자 장전의 수고가 크게 경감되었다). 화약과 탄환은 꽂을대(槊杖)('사쿠죠' 또는 '카루카'라고 발음함) 로 총신 안에 밀어넣어 다진다.

3. 화약통(火皿)(히자라) 에 점화약인 귀약(口薬)(쿠치구스리) 을 넣고, 그 다음 화양통 뚜껑(火蓋)(히부타) 을 닫고, 불이 붙은 불심지 끝을 부지깽이에 끼운다. 이 귀약의 용기는 길이 5~8cm의 수통형(水筒型)이 일반적이었고, 화약을 넣은 후, 손을 떼면 용기가 자연스럽게 허리에 매달려서, 주입구가 뚜껑에 덮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이것을 허리에 매달고 다닌 것이 당시 전형적인 총병(銃兵)의 스타일이었다.

4. 목표를 확정하고 화약통 뚜껑(火蓋)(히부타) 을 연다.

5. 자세를 갖추고 목표를 겨낭한다. 탄환을 목표에 맞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목표물의 중심을 겨냥한다. 거리는 목표물의 눈의 검은자위와 흰자위가 구분되기 시작하는 정도로 정한다.

6. 방아쇠를 당겨 발사한다.

7. 재장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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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도메류(稲富流) 포술 비전서' / 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은 불심지(火縄)가, 사전에 흑색화약을 담아두었던 화약통(火皿)(히자라) 을 때리게 된다. 불심지의 불은 화약통안의 귀약(口薬)(쿠치구스리) 이라고 하는 미세분말 형태의 흑색화약을 인화(引火)시킨다. 보통은 화약통 내부에 파인 도화홈(導火孔)(도오카아나) 에 있는 귀약이 연소를 계속하여, 약실 내부의 화약에 불이 도달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도화홈에 화약이 가득차 있는 경우에는 인화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고 나서 약실의 흑색화약에 불이 붙기까지 시간차가 발생한다. 그로 인해 지연발사가 되어버려 목표물에 탄환을 명중시킬 수 없기 때문에, 불심지의 불꽃을 통해서 쉽게 화약을 인화시킬 수 있도록, 도화홈은 비워있는 상태로 둔다.

약실 내부에는 통약(胴薬) (도오구스리) 또는 옥약(玉薬)(타마구스리) 이라고 불리는 장약 (화약) 이 미리 장전되어 있기 때문에, 불이 붙으면 한번에 연소되어 안에 장전된 탄환을 발사시키는 구조로 되어있다. 방식으로서는 '순발식 화승총(瞬発式火縄銃)'(방아쇠를 당기자마자 불심지를 끼운 쇠장치가 바로 화약에 닿아 연소하는 방식) 과 '완발식 화승총(緩発式火縄銃)'(방아쇠를 당기는 정도에 따라 불심지를 끼운 쇠장치가 연동되어 움직이는 방식으로, 방아쇠를 당기다가 놓으면 불심지를 끼운 쇠장치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구조) 이 있다.

또한, 일본의 화승총이 총을 어깨에 대고 쏘는 형태가 아니라, 줄곧 뺨에 대고 쏘는 형태였던 이유는, 전국시대 전투에 종사하는 병사가, 아시가루(足軽)부터 대장(大将)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갑옷을 장착하고 있어, 물리적으로 개머리판을 어깨에 효율성있게 밀착시킬 수 없었다고 하는 문제와, 성벽 총안(銃眼)에서 사격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는 전술상의 문제, 평화시기에는 유파(流派)에 따라 형태 · 발사방법이 경직화하여 계승된다고 하는 등의 여러가지 문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 종래부터 존재해오던 일본 궁술의 활 시위를 메기는 방법 (당긴 활시위를 뺨에 대는 일본 궁술 특유의 방식) 을 그대로 화승총에 응용한 결과, 뺨에 대고 쏘는 형태가 되었고, 그 형태가 보급되었다고 하는주장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봐도, 일본처럼 총기를 상시적으로 사용하는 병사가 중무장 갑주를 장착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고, 이런 이유들 때문에, 뺨에 대고 쏘는 형태의 일본 화승총 디자인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사속도

화승총의 첫번째 발포 후 두번째 발포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1. 총신 안의 화약 잔여물을 꽂을대로 닦는다 (수차례 사격 후 총신에 탄소찌꺼기가 달라붙어, 탄환이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꽂을대의 한쪽 끝에 물에 적신 천을 달아서 총신 안을 닦는다).

2. 화약통에 꼬챙이를 꽂아둔다 (화약이 화약통에 가득차게 되면 지연발사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꼬챙이를 꽂아두고 화약을 채운 다음에 사격직전에 꼬챙이를 제거한다).

3. 총신을 식힌다 (다만, 1분에 1발 정도의 페이스로 발포한다면 이렇게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첫번째 발포 이후 두번째 장전부터는 해야할 일이 많다고 여겨진다.

실제로는 이 작업을 1발씩 발사할 때마다 해줄 필요는 없고, 몇발에 한번씩만 해주면 된다. '세키류 포술(関流砲術)'에서는, 7발 정도 쏘면 찌꺼기때문에 탄환이 들어가기 어렵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불량탄(劣り玉)(오토리타마) 이라고 불리는, 일반탄환보다 약간 지름이 작은 탄환을 사용하면, 목표에 대한 집탄성(集弾性)은 저하되지만, 10발 이상의 연속발사가 가능하다 (에도시대의 일반적인 과녁사거리인 15칸 [약 27m] 에서는 불량탄[劣り玉]이라도 명중률은 거의 일반탄환과 다름이 없다. 다만 30칸 [약 55m] 을 넘어가면 집탄율[集弾率]의 저하가 나타난다). 또 총신 안이나 화약통의 청소는 빈번하게 할 필요는 없고, 탄환이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 등이 발생할 때 하면 된다.

흑색화약이 물에 녹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꽂을대 끝에 물에 적신 천 조각을 달고 총구에 찔러넣어서 1~2번 왕복시키면 청소가 완료된다. 쇼와시대 말기에 이뤄진 실험에서는, 숙련자가 화승총을 조작했을 경우에, 제1탄 발사로부터 18~20초가 지난 후에 제2탄 발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현대의 총에 비해 전장식(前装式)총이 연속발사에 적합하지 않다라는 것은 위에 기재한 과정 등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부에 탄환과 화약을 수납했던 에도시대의 양철통.

이 「제2탄 발사까지 시간이 걸린다」 고 하는 전장식(前装式) 최대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화승총이 널리 보급된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하야고(早合)(장전을 간편하게 하기 위한 탄약쌈지로, 탄환과 화약을 세트로 해서 종이로 싼 것) 와, 「여러 명으로 팀을 구성한다」, 「총신을 여러 개 설치한다」 는 등의 다양한 (때로는 기묘한) 대안들이 나와서 실천되었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겨울 오사카에서의 진법을 그린 병풍 (공성전을 그린 그림에서 철포부대 부분을 확대한 것)

'역사군상 편집부' 및 '일본전장총사격연맹' 회장인 오노노 세이지(小野尾正治) 등에 의해 2005년경에 수행된, 발사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에서, 미리 첫번째 탄환을 장전하고 있었던 첫번째 사격 직후부터 측정을 시작하여, 혼자서 첫번째 탄환 및 5발의 탄환, 총 6발의 탄환을 사격하는데 필요했던 시간은 100초 (1발 당 약 20초) 였으나, 「하야고(早合)」 를 사용한 경우에는, 시간이 44초까지 단축되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또 3명이 각각의 화승총을 가지고, 총 3정을 교대로 발사하는 형태의 3단사격(三段撃ち)(산단우치) 실험에서는 총 시간이 33초, 3명이 2정의 화승총을 준비하여 사수(射手)가 사격을 실시하고 있는 동안 후방에서 2명이 장전을 하는 방법으로는 총 시간이 39초라는 결과를 얻어, 팀을 짜서 사격을 하거나, 「하야고(早合)」 를 이용하면 전력(戦力)이 향상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사의 배치

화승총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 아시가루(足軽)의 주요 무기의 하나로서, 그 비중이 증가해가고 있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는 소나에(備)(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 전시에 편성된 부대로, 각종 아시가루 부대 [창, 궁, 철포] 와 기마무사부대, 군수지원부대 등으로 구성되어 독립적인 작전을 취할 수 있는 기본단위 부대를 말한다) 하나 당, 20~50명으로 구성되는 텟뽀구미(鉄砲組)(철포팀) 를 1~2팀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전투를 개시할 때나, 기세에 올라 아군을 향해 돌진해오는 적병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어 적의 진격을 멈추게 하는 때 등에 사용되었다. 병사들끼리 밀집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는데, 불똥이 사방에 튀는 와중에 화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쉽게 폭발할 위험이 있어, 상호간에 안전한 거리를 유지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일렬로 나란히 서서 사격자세를 취하는 아시가루(足軽)

· 2단사격(二段撃ち, 니단우치) : 2열횡대로 서서, 앞열이 한쪽 무릎을 꿇고, 뒷열이 똑바로 서서 사격하는 방식이다.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가 이를 고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실제로 전투방식으로 채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 3단사격(三段撃ち, 산단우치) :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오다군(織田軍)이 채용했다고 하는 유명한 전술이다. 사이카슈(雑賀衆)(중세 일본에 존재했던 철포용병 및 지방 사무라이 집단의 하나) 가 늦어도 1568년 (에이로쿠[永禄] 11년) 경까지는 이미 실전에서 사용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3단사격에 대해서도 커다란 논쟁이 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인 숭정(崇禎) 11년 (1638년) 에 간행된 필무강(畢懋康)의 『군기도설(軍器図説)』 에 수록된 「윤류방총도(輪流放銃図) ・ 윤류진총도(輪流進銃図) ・ 윤류장총도(輪流装銃図)」 에는 15명의 인물이 5인3열로 서서, 3단사격을 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6세기까지는 명나라의 군사서적에 이와 같은 기록이 나와있지 않은 것을 볼 때, '분로쿠 · 케이쵸의 역' (임진왜란 · 정유재란) 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명군이 일본의 화승총을 대량으로 노획함과 동시에 '투항한 일본인(降倭)'(항왜) 로부터 철포운용법을 배워, '양응룡의 난(楊応龍の乱)' 평정 등의 실전기회를 거쳐, '3단사격' 등의 일본식 화기사용법을 도입해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 쿠리다시(繰り出し, 계속 내보내기) : '3단사격(三段撃ち)'의 응용전술로, 앞으로 더욱 더 횡렬을 전진시키는 전술이다. 세키가하라(関ケ原) 전투에서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씨가 사용하여 중앙돌파에 성공하였다.

1인 사격수(射撃手)에게 화승총 몇정을 보유한 조수(助手) 몇 명이 붙어서, 사격수가 사격하고 있는 동안에 조수가 화승총의 장전을 하는 전술이 있는데, 이것은 사격수의 재빠른 연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전술은 철포용병집단으로서 그 이름을 알린 사이카슈(雑賀衆), 네고로슈(根来衆)(전국시대에 키이노쿠니[紀伊国] 북부의 네고로지[根来寺]를 중심으로 일대에 거주한 승병집단) 부대의 특기였다.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에서 혼간지(本願寺) 측에 붙었던 그들은, 이 화승총 전술로 오다(織田) 세력을 크게 괴롭혔다.

이 사격수 · 조수를 분업하는 사격운용법을 '카라스와타시의 법(烏渡しの法)' 또는 '우에스기류 군학(上杉流軍学)'으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사격운용법은 후세에 '키슈 토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의 쿠스리코미야쿠(薬込役)(막부의 쇼군이 직접 화승총 훈련을 할때 옆에서 화승총 장전을 대신 해주는 직책) 라고 하는, 오니와방(御庭番)(에도시대 제8대 쇼군 토쿠가와 요시무네가 설치한 직책으로, 쇼군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아 첩보활동을 수행하였다) 의 전신인 직명(職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전사(前史)

화약은 당나라 시대 (618년~907년)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당시 쓰여진 「진원묘도요로(真元妙道要路)」 에는 초석(硝石) · 유황(硫黄) · 재(炭)를 섞으면 연소와 폭발을 일으키기 쉽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이 무렵에는 이미 흑색화약이 발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250년대, 몽골제국이 이란을 침공했을 때에, 중국인 기술자가 조작하는 투석기로, 화약탄이 투척되었던 기록이 있다. 1280년에는 지중해 동부의 마르크스 그라엑스와 시리아의 핫산 앗 람마가 중국의 화기(火器), 화창(火槍)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또, 이슬람 문명권의 시리아, 맘루크 왕조에서도 화약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1288년 당시의 청동제(青銅製) 총신이 발굴되어, 몽골 지배하의 중국이 화창(火槍)에서 총(銃)으로 화약장비를 변천시켜왔던 것이 밝혀졌고, 또 지금까지 총은 서유럽에서 발명되었다고 생각되어 왔으나,위 발견을 통해서 총이 몽골제국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1326년 스웨덴에서는 병 모양(壷型)의 총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몽골제국에 지배받았던 남러시아에서, 스웨덴으로 전래된 총이 변형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또 그 해에 피렌체에서는 대포가 개발되어, 이후 유럽에서는 본격적으로 대포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1330년대까지 총뿐만 아니라 대포도 사용하고 있었다.

화승총 등장에 의한 진형(陣形)의 변천

독일 남부 각 도시에서 화승총이 발달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작은 경제력을 가진 소규모 자치도시들이 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소형의 화승총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또 초기에는 화승총의 점화에 시간이 걸리고 폭발위험성도 높아서, 야전(野戦)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화승총을 최초로 대대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헝가리의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였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페인은, 밀집방진(密集方陣)을 구성한 장창 (파이크) 병을 진격시킬때, 방진의 사방(四方)에 배치시킨 총병을, 상대방 방진(方陣)의 지근거리까지 접근시켜, 상대방의 방진과 접촉 직전이 되었을 시점에, 화승총을 발포하여 적에게 제1차 타격을 가하는 총기운용법을 사용하였다. 이 총기운용법을 '테르시오(Tercio)'라고 불렀다. 이 전술은 총검(銃剣)을 발명하기 이전에 나온 것으로, 발포를 끝낸 총병은 총검이 없어 근접전에서 유효한 전력(戦力)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후방으로 퇴각을 시켰다.

실제의 전투는 장창 (파이크) 병이 중심이었다. 사격수를 앞뒤로 교체하는 발상이 처음으로 보여진 것은, '테르시오 전법'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된, 기병의 카라콜(Caracole) 전술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유럽의 기병들이 사용했던 전술로, 적 앞에 빠른속도로 접근한 후에 말 위에서 사격을 하고 바로 반회전[半回転]을 해서 후방으로 후퇴하는 기동전술을 말한다)이었다. 이 전술은 대략 1530년대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보통 1440년대에 예니체리가 헝가리로부터 매치록식 화승총을 도입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매치록식 화승총이 예니체리의 정규무기로 사용된 것은 16세기 이후부터이다. 오스만제국에서는 야전대형(野戦隊形)에서의 집중사격법이 실용화되었다.

화승총의 재장전(再装填)에는 시간 문제와 방어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종렬(縦列)(세로줄) 로 행진하는 총병들 중 제일 앞에 있는 총병이 발포한 후에, 곧바로 종렬의 맨 뒤로 뛰어 돌아가서, 장전(装填)을 하면서 행진을 계속한다고 하는 전술이 고안되었다. 또, 마우리츠 판 나싸우(Maurits van Nassau)는 개별 병종이 각각 독자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보병 · 기병 · 포병의 3병종을 연동시켜, 기동전술을 전개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는 이것을 아이디어로만 두지 않고, 실용화를 시킨 군사전문가로서 현재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만, 이 종렬교환법(縦列交替法)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이 전술에는 '둔중함'이 숙명적으로 따라다니는데, 마우리츠가 전사(戦死)한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전후교환사격법(前後交替射撃法)'이 실용화되는 것은, 화승총의 점화방식이 부싯돌(燧石) 방식으로 이행된 이후부터인데, 점화방식이 전환될 수 있었던 데에는, 부싯돌 방식의 기능이 크게 개선되어진 점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여겨진다. 또 총검(銃剣)의 등장도 전술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여겨진다. 또 동시에 이 시대는 대포의 운용전술도 비약적으로 개선되고 있었기 때문에, '총병의 교환사격전술'만이 전쟁양상을 혁신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이 변화들은 대체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엽에 걸쳐서 발생하였다.

장애물을 이용한 화승총의 운용

초기 화승총은 '장전 문제' 이외에도 다른 약점이 존재하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장벽, 성벽, 장애물 또는 특수한 지형 등의 장소에서, 아군을 향해 기동해오는 야전군(野戦軍)을 사격하려고 하는 시도가 일찍부터 존재해왔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화승총의 일제사격(一斉射撃)을 실시하는 아시가루(足軽) 부대. 몸을 지키기위해 방패를 사용하고 있다.

서유럽의 전투에서 유명한 사례는, 1503년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중에, 스페인 군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가 실시한 전법(戦法)이었다. 이것은 급조한 해자와 그 과정에서 나온 흙을 이용하여 만든 둑에, 2천명으로 추정되는 아쿼버스 총병을 배치해서, 아군을 향해 밀어닥치는 프랑스군 기병대를 화승총 사격으로 분쇄시킨 전법이다. 이 전투는 스페인 패권 확립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전투에 이어 1522년, 제2차 이탈리아 전쟁에서도, 똑같이 스페인군의 용병대장인 콜론나가 밀라노 교외의 비코카에서, 급조한 성벽과 지형을 이용한 아쿼버스 총병의 반복사격전법(反復射撃戦法)으로, 스위스 창병부대를 분쇄하였다.

화승총의 명칭

일반적으로 '아쿼버스' 또는 그와 비슷한 사투리 발음이 잘 알려져 있다. 부싯돌 방식의 화승총에 대해서는 '스냅펀스', '뮤크렛', '플린트록' 등의 명칭들이 알려져 있어, 형식상의 분별이 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탄생된 과정에 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1. '아쿼버스'에 대해서는 하나의 설이 있는데, 이것은 초기 핸드캐넌(手砲)의 하나로서, 나무막대기 끝에 달은 금속총신(金属筒)에 갈고리 모양의 돌기를 설치해서, 발사시에 갈고리를 나무막대기에 걸어 지상에 고정시킨 후에 발사하는 구조였는데, 이것을 독일어로 '하켄부크세' (갈고리를 붙인 총신) 라고 불렀던 것이 어원으로, 이 말이 프랑스어에서 유사한 발음인 '아켄븃스'가 되었다가 후에 '아쿼버스'로 발음이 변화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2. 한편 프랑스어의 '아르크븃스' (총신 형태의 활) 를 어원으로 한다는 설도 있다.

아마 양쪽 단어가 혼재되면서, 보편화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에서의 화승총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대인 16세기경에 화승총이 전래되었는데, 남방을 경유하여 전래된 '완발식 · 순발식의 화승총' (뺨에 대고 쏘는 형태인 단상형[短床形]) 과, 서역을 경유하여 전래된 오스만 제국 계열의 '완발식의 화승총'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쏘는 형태) 의 2가지 계통의 화승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조총(鳥銃) 또는 조창(鳥槍)이라고 불렸는데, 후자인 오스만 계열의 화승총은 특히 로밀총(露密銃)이라고 불렸다. 명나라 시대에 왜구와의 전투 등을 통해서 그 유효성을 인정받아, 군의 장비로서 도입하게 되었고, 이어지는 청나라에서도 팔기(八旗) · 녹영(緑営)의 장비로서 계속해서 채용하였다.

청나라 시대에는, 대포를 보완하는 장비로서 대형 화승총을 채용하였는데, 이를 태창(抬槍)이라고 불렀다. 길이가 약 3m, 중량이 약 12~18kg 으로, 구경 · 총신 모두 보통의 화승총보다 확대되어, 사격시에는 총신을 삼각대(三脚架) 또는 사수(射手) 이외의 다른 병사들의 어깨 위에 올려서 사용하였다. 최소 병사가 2명 정도는 있어야 짊어지고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대포의 이동이 곤란한 산간지역이나 수변지역에서의 사용을 위해 개발된 것으로, 후에 청불전쟁 · 청일전쟁 시기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의 '하자마즈츠(狭間筒)' 와도 유사성이 있는 총기이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명나라의 총병 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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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팔기(八旗)의 화승총병 (19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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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창(抬槍)을 운용하는 청나라 녹영(緑営) 병사 (19세기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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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마즈츠(狭間筒)

일본에서 화승총의 분류는, '탄환 중량'과 '제작한 지역 · 유파'에 따라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화승총의 탄환은, 납으로 만들어진 원형 탄환으로, 납의 무게에 따라 탄환의 직경(直径)이 정해졌기 때문에, 탄환의 무게로 구경(口径)을 나타내는 방법이 널리 이용되었다.

중량(匁)

구경(mm)

2돈반

11.79mm

6돈

15.79mm

13돈

20.48mm

20돈

23.58mm

30돈

26.99mm

50돈

33.04mm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코즈츠(小筒)

코즈츠(小筒)

탄환의 중량이 2돈반(匁半) 정도 되는 것을 가리킨다. 위력은 작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반동이 적기 때문에, 엽총(猟銃)으로 사용되거나 동원병(動員兵)에게 지급되는 총기로 사용되었다. 또, 철포로 하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명나라 · 조선의 병사들의 방어구는, 철포에 대한 방어력이 약했는데, 코즈츠(小筒)는 명나라 · 조선의 병사들의 방어구를 뚫을만큼의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로쿠 · 케이쵸의 역' (임진왜란 · 정유재란) 에서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도설 ・ 일본무기집성[図説・日本武器集成]』, 『철포전래[鉄炮伝来]』).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나카즈츠(中筒)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토오세구소쿠(当世具足)를 몸에 착용한 사무라이의 수채색 사진 (1860년대에 펠리체 베아토가 촬영)

나카즈츠(中筒)

탄환의 중량이 6돈(匁) 정도 되는 것을 가리킨다. 코즈츠(小筒)에 비해 위력은 크나, 다루기가 어렵고 고가(高価)여서, 임시적으로 고용된 아시가루(足軽)가 아니라, 주인과 주종관계에 있던 아시가루가 주로 사용하였다. 토오세구소쿠(当世具足)(무로마치시대 후기부터 아즈치 · 모모야마시대에 걸쳐 탄생한 갑옷의 종류) 나 타케타바(竹束)(대나무 다발) 같은, 화승총에 대비한 방어장비가 보급된 결과, 코즈츠를 대신해서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되었다 (『도설 ・ 일본무기집성[図説・日本武器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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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즈츠(士筒). 쥬몬메즈츠(十匁筒)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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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즈츠(士筒)

사무라이즈츠(士筒)

탄환의 중량이 10돈(匁) 정도 되는 것을 가리킨다. 위력은 절대적이지만 매우 고가(高価)에다 총신이 길고 중량이 무거워, 발사시에는 커다란 반동이 있어서 다루기가 어렵기때문에, 충분한 훈련량과 재력(財力)을 가진 사무라이(侍)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사무라이즈츠(侍筒)를 부케호코닌(武家奉公人)(무가[武家]에 봉공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에도시대 이전에는 주군의 가문에 봉공하는 무사를 포함시켜 지칭하였고, 에도시대 이후에는 오로지 비무사출신의 하인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에게 무장시켜, 필요에 따라 이용하였다 (『도설 ・ 일본무기집성[図説・日本武器集成]』, 『잡병물어[雑兵物語, 졸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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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죠즈츠(馬上筒)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바죠즈츠(馬上筒)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바죠즈츠(馬上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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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죠즈츠(馬上筒)

바죠즈츠(馬上筒)

기병총(騎兵銃)으로서 사용되었다. 후세의 기병총과 비교하면 총신이 보다 짧기때문에, 권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럽의 흉갑기병 [퀴러시어] 이 사용한 권총과 비슷한 사이즈이다). 화승총은 후세의 총보다 중량이 무거웠기 때문에, 말 위에서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여 소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화승총은 원래 강선 (라이플링)이 없어서 명중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총신을 이렇게 짧게 한다고 해도, 명중률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보통은 두 손으로 사용한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단즈츠(短筒)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단즈츠(短筒)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단즈츠(短筒)

단즈츠(短筒)

화승총 버전 권총이다. 한 손으로 사용하기 위해 바죠즈츠(馬上筒)보다도 더 총신을 짧게 만들었다. 바죠즈츠와 마찬가지로, 기병총(騎兵銃)으로서 사용되었다. 불심지(火縄)에 항상 불을 켤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품 안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어려워, 후세의 권총처럼 호신용, 휴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곤란했다고 생각된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다이텟뽀(大鉄砲). 고쥬몬메즈츠(五十匁筒)라고도 함.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다이텟뽀(大鉄砲)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다이텟뽀(大鉄砲)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다이텟뽀(大鉄砲)

다이텟뽀(大鉄砲)

탄환 중량이 20돈(匁) 이상이 되는 화승총으로, 탄환 중량이 100돈이나 되는 것도 존재한다. 보통의 탄환 이외에도 호로쿠히야(焙烙火矢)(전국시대에 질냄비 또는 도자기 안에 화약을 넣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 적 방향으로 던지는 일종의 수류탄이자 폭탄) 등을 넣어 발사하였고, 주로 공성전 · 해전에서 구조물을 파괴하기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이텟뽀(大鉄砲)는 오오즈츠(大筒), 이시비야(石火矢)(화약의 힘으로 돌멩이나 쇳조각을 발사하는 원시적인 대포) 와 정의(定義)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기때문에, 종종 이 3가지 용어가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보통 '카카에오오즈츠(抱え大筒)'라고도 불리며, 개머리판이 존재하는 화승총 형식으로 되어있다. 차화점화식(差火点火式) · 지상설치형(地上設置型)인 보통의 오오즈츠와는 달리, 발사할 때에 사수(射手)가 뒤로 넘어질 정도로 반동이 강렬하다. 이 때문에 정확한 명중률을 기하는 경우에는, 지면에 설치해서 척탄통(擲弾筒) (수류탄 · 독가스탄 발사통) 처럼 발사하거나, 사격대에 설치해서 발사하였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가장 아래에 있는 총이 하자마즈츠(狭間筒)이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하자마즈츠(狭間筒)

하자마즈츠(狭間筒)

보통의 츠츠(筒)(총신 · 포신) 와 비교할때, 탄환의 중량에 비해 총신(銃身)이 긴 것을 가리킨다. 성(城)이나 선박의 총포구멍에 설치하여 발사하는 용도의 츠츠이다. 유효 사정거리는 200~300m에 이른다.

제작지역 · 유파(流派)에 따른 분류

주된 차이로서는, 총신의 외형 (원형 총신 · 사각형 총신), 두께, 길이, 개머리판의 모양, 기계장치, 가늠쇠 등의 차이가 있다. 아래에 기재되어 있는 것 이외에도 종류가 많다.

· 쿠니토모즈츠(国友筒)

· 사카이즈츠(堺筒)

· 히노즈츠(日野筒)

· 비젠즈츠(備前筒)

· 토사즈츠(土佐筒)

· 사츠마즈츠(薩摩筒)

· 센다이즈츠(仙台筒)

위 명칭들은 제작된 지역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 난반즈츠(南蛮筒) : 해외에서 전래된 화승총을 가리킨다. 이것을 모델로 하여 국내에서 모방, 제조된 총은 이후즈츠(異風筒)라고 불렸다.

· 이나도메즈츠(稲富筒) : 이나도메류(稲富流)의 설계에 기초해서 제작된 철포(鉄砲).

· 세키류즈츠(関流筒) : '세키류 포술(関流砲術)' 참조.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화승총으로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오카야마성 철포대(岡山城鉄砲隊)'의 한 대원.

현대 일본에서의 실증 실험

일본 각지에서 '철포대(鉄砲隊)'라고 칭하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화승총으로 사격시범 (허공에 발사) 을 보이는 단체가 다수 생겨났다. 표면적으로는 전승(伝承)되어온 포술(砲術)이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막말유신기(幕末維新期)(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유신 초기까지) 에 병제(兵制) · 무기(武器)의 서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화승총 유파(流派)의 직접적인 전승은 전부 한때 단절되었던 적이 있다. 현존하는 유파는 전래되어온 고문서 등을 해독하여, 후대에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전통식 화승총 단체의 성격은,

· 전해내려오는 기록 등에 준거(準拠)하여 순수하게 역사학적으로 재현시킨 것 (다만 1, 2가지 유파는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제례(祭礼) 등에서 계속 사용되며 가늘게 전승되어온 것도 있다).

· 지역에 전해지는 철포술 등의 유래에 근거하여 ,지역의 특색이 담긴 무술(武術)의 재현(再現)으로서 연구된 것.

· 그 이외의 것.

의 3종류로 대략 분류할 수 있다.

조총 화승총 차이 - jochong hwaseungchong chai

고몬메(五匁, 다섯돈) 화승총에 의한 모의사격. '히메지성 마츠리'에서 촬영.

위 모의사격 영상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화승총에 의한 사격경기

해외에서는 화승총 사격경기가 인기리에 개최되고 있는데, 경기 이외에도 역사를 재현하여 만든 일본의 철포대(鉄砲隊)와 마찬가지로, 무수하게 많은 'Volunteer Infantry' (의용보병대) 가 존재한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의용보병대들끼리 대규모 남군 · 북군의 모의전투가 벌어진다. 이런 경우에 안전한 'Gunmaker' (총포제조회사) 가 만든 복제품이 자주 사용된다 (일본의 '미로쿠[ミロク]' 라는 회사도 미국 등지에 옛날식 화승총의 복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동시에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전장대포(前装大砲)도 소중하게 보존 · 관리해서, 매일 공포탄 발사를 하거나 한다. 또, 야포(野砲)를 분해해서 운반하고, 마지막에 다시 야포를 조립해서 공포탄을 장전하고 먼저 발사하는 쪽이 이긴다고 하는 장애물 레이스 경기 등이 청년들의 체육훈련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화승총 사격경기

국제경기

유럽이나 북미 등에서는 화승총도 포함되는 'Muzzle Loader 사격경기' (전장총 사격경기)가 인기리에 실시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세계선수권대회와 환태평양선수권대회에 선수를 파견하고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일본라이플사격협회' 산하에 '일본전장총사격연맹'이 있어, 이 연맹이 주최하는 화승총 사격경기가 실시되고 있다. 다만 '총도법(銃刀法)'이나 '화약류단속법(火薬類取締法)' 등에 근거한 각종 규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 경기(競技)를 하는 인구는 극히 적다. 규제로 인하여 제약이 많은 환경이지만, 일본제(日本製) 화승총은 고도의 정밀도로 제조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 선수(選手)가 국제대회에서 수상하는 사례도 많고, 미국 · 유럽의 많은 선수들도 화승총 종목에서는 일본제(製) 또는 일본형(型) 화승총 복제품을 가지고 참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국제전장총연맹(国際前装銃連盟)'에 가입되어 있는 국가는 일본밖에 없다.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화승총 경기는 아래와 같다. 「타네가시마총 서서 쏘기(種子島銃立射)」 경기와 「타네가시마총 앉아 쏘기(種子島銃膝射)」 경기에서는, 국제적인 룰과 똑같이, 사정거리 50미터를 두고 「일본 공식 타네가시마 표적」 (지름 40cm의 검은색 점) 을 사용한다. 「나카즈츠(中筒)(사무라이즈츠[侍筒]라고도 한다) 경기에서는, 위와 같은 표적으로 쥬몬메타마즈츠(十匁玉筒)(10돈짜리 무게의 탄환을 사용하는 총) 를 자유로운 자세로 사격할 수 있다. 「벳테리(ベッテリー)」 는 「프리 피스톨 표적」 을 사용하는 사정거리 50미터의 경기로, 전장총(前装銃)이기만 하면 경기에 사용하는 총의 종류를 따지지 않는다 (화승총이 아니어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 경기는 '치바현 라이플 사격장(千葉県ライフル射場)'에서 한해서만 적용된다). 그 외에 위와 같은 표적으로 사정거리 25미터에서 단즈츠(短筒)를 한 손으로 쏘는 경기가 존재한다.

일본의 독자적인 경기

일본의 독자적인 경기로서, 전통방식에 근거한 「하야우치(早撃ち)(빨리 쏘기) 라는 경기가 있는데, 이 경기는 8치(寸) 길이의 네모난 나무판에 4치(寸) 길이의 검은색 원을 그린 「와테키(和的) (에도시대 규격의 표적) 을 겨냥하여, 27미터 (에도시대에는 15칸) 의 거리에서 5분동안 10발을 사격하여 명중도의 우열을 겨루는 「전통식 토너먼트」 경기이다.

화승총의 실탄발사는 지정된 사격장에서만 할 수 있다. 2005년 (헤이세이[平成] 17년) 현재, 공영사격장(公営射撃場)으로는 카나가와현(神奈川県) 이세하라시(伊勢原市)의 '현영(県営) 이세하라 사격장', 치바시(千葉市) 와카바구(若葉区)의 '치바현 종합스포츠센터 사격장',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카이난시(海南市)의 '와카야마 현영(県営) 사격장'까지 총 3군데가 존재한다 (이외에 사립 사격장에서도 실탄발사가 가능한 곳이 있다. '이바라키 현영 신카베 라이플 사격장(茨城県営真壁ライフル射撃場)'은, 법률적으로는 화승총의 사격이 허가되어있지만, 사격장 관리자가 화승총의 사용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할 수는 없다).

총도법(銃刀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통식총(古式銃)(코시키쥬) 의 소지(所持)에 대해서는, 현대식총과 달리 속인적(属人的)인 면허 · 허가가 아닌 속물적(属物的)인 등록제도가 실시되고 있고, 등록은 '도도부현(都道府県) 교육위원회'에서 관할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소관이었다). 등록은 일본도(日本刀) 등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등록을 받은 총기는 누구라도 소지 · 소유할 수 있지만, 실제로 '실탄 · 공포탄의 발포' 및 '화약의 입수 · 소지 · 소비'에 대해서는, 매번 (실탄사격을 허가받은 자는, 화약구입에 관해서는 1년간, 또 소비는 5개월 한정의) 관할 경찰서를 통한 공안위원회(公安委員会)의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전통식총(古式銃)(코시키쥬) 이란 주로 '전장식 총포(前装式銃砲)'를 말하는데, 에도시대 말기에는 사가번(佐賀藩)의 주력총이었던 스펜서총 (후에 윈체스터총의 기원이 되었다) 을 비롯해, 보불전쟁(普仏戦争)의 주력총이었던 샤스포총 (후에 무라타식[村田式] 소총 개발의 기원이 되었다) 이나 드라이제총 등의 초기 후장총(後装銃)이 상당수 도입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다만 이 후장총들은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훈련총으로서 사용되거나, 외국에 매각되었기 때문에, 현재 국내에 잔존해 있는 후장총의 숫자는 비교적 적다.

일본의 법률에서는 현재 '전통식총(古式銃)' (코시키쥬) 을, 「1867년 시점에 국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개별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국산(国産) 또는 외국제(外国製) 역사유물총기(歴史遺物銃器)의 실물(実物)」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실물을 충실하게 재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도, 복제품은 '전통식총[古式銃]으로인정받을 수 없다. 이것은 '전통식총[古式銃]'의 등록제도가, 사격에 사용하는 것을 상정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사료 및 그 미술가치의 보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짜 '전통식총(古式銃)' (코시키쥬) 이라고 하더라도, 메이지시대 이후에 신식(新式) 또는 현대의 탄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것이나, 또는 현대의 탄약 (장탄) 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SW・Mk1、Mk2 리볼버) 등은 현대총에 준하는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서 등록심사 시에 배제되고, 따라서 소유할 수 없다.

설령 외국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총기라도 하더라도,진짜 역사유물(歴史遺物)인 국산 화승총이라는 것이 입증되면, 등록하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현재 경기용(競技用) 또는 '공포탄 발사용(空包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국산 화승총으로, 그 전부가 역사유물로 입증된 것들이다.

또한, 국내에서 '전통식총(古式銃)'으로 등록이 되어있는 화승총 (즉, 화승총 경기 등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총) 은, 전술(前述)한 대로 1867년 (케이오[慶応] 3년) 이전에 제조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최근에 이러한 '전통식총' 중에는, 메이지시대 중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모작자(贋作師)'에 의해서 위법적으로 제조되었다고 판단되는 '모작(贋作)' 화승총이 존재한다는 사례가, 연구자나 수집가에 의해 수렵전문잡지 등에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모작' 화승총은 아까 말한 「에도시대 말기부터 각 번(藩)에 의해 연구되었던 수평이연식(水平二連式)이나 연발식(連発式) 화승총의 시제품」 으로 판단되는 총기류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진품이라고 입증된 총기에 비해서 조잡한 구조의 기관부(기계장치) 를 가지고 있거나, 총신접합기술의 명확한 부주의가 발견되어 '모작'이라고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또 「지금까지 사료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형식의 총이 갑자기 발견되었다」 라는 형태로, 모작 화승총이 시장에 유통된 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이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하는 전문가가 극히 적다고 하는 사정도 있기 때문에, 때로 모작 화승총이 진짜 '전통식총(古式銃)' 으로 둔갑하여 '도도부현(都道府県) 교육위원회'의 등록을 받아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모작 화승총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 당연하고, 본래의 화승총 장인이 아닌 사람이 형태만을 모방해서 만든 위작(偽作)으로서, 실제사격을 하기 위한 실용총으로서도 안전성이 극히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과거에 실제사격 경기에서 사용되었던 적이 없는 화승총이나, 일반적인 형식과는 다른 희귀한 화승총을 구입할 때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연구가의 감정을 거쳐서 진품이라고 입증된 총기를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몸의 안전을 확보하는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화약통 뚜껑을 자른다(火蓋を切る)(히부타오키루)

「화약통 뚜껑을 자른다(火蓋を切る)」 는 어떤 일을 개시한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설들이 있다.

1. 사격을 시작할때, 화약통 뚜껑(火蓋)을 열던 (「火蓋を切る」 에서 「切る」 는 '열다'라는 뜻이 있음)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2. 총을 장전하고 전투를 개시할 때, 화약통 뚜껑(火蓋)에 묶여있던 종이노끈을 자르는 동작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

대장장이 (철포 대장장이[鉄砲鍛冶], 철포장인[銃匠], 건스미스[Gunsmith]

· 나가하마(長浜) : 쿠니토모 토베에 노토(国友藤兵衛能當), 쿠니토모 탄바 다이죠 타치바나 무네토시(国友丹波大堟橘宗俊), 쿠니토모 젠베에(国友善兵衛)

· 사이카(雑賀) : 시바츠지 세이에몬(芝辻清右衛門)

· 카고시마(鹿児島) : 야이타 킨베에(八板金兵衛)

· 히노(日野) : 와다 지다유(和田治太夫), 와다 타이치로(和田太一郎)

· 니혼마츠(二本松) : 쿠니토모 죠에몬 히사요시(国友丈右エ門久義)

포술가(砲術家)

· 타츠케류(田付流) : 타츠케 카게스미(田付景澄)

· 이나도메류(稲富流) : 이나도메 스케나오(稲富祐直)

· 지유사이류(自由斎流) : 스기노보 쇼잔(杉之坊照算)

· 츠다류(津田流) : 츠다 카즈나가(津田算長)

· 게키류(外記流) : 이노우에 마사츠구(井上正継)

· 키시와다류(岸和田流) : 카로오도 치카히로(唐人親広)

· 츠게류(柘植流) : 츠게 키요히로(柘植清広)

철포대(鉄砲隊)

·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 오카 요시마사(岡吉正)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사이카 마고이치(雑賀孫一)

· 스기타니 젠쥬보(杉谷善住坊)

· 스즈키 시게오키(鈴木重意)

· 스즈키 시게히데(鈴木重秀)

· 스즈키 시게카네(鈴木重兼)

· 스즈키 시게토모(鈴木重朝)

· 타키가와 이치마스(滝川一益)

· 타네가시마 토키타카(種子島時尭)

· 타네가시마 히사토키(種子島久時)

·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 도이 키요요시(土居清良)

· 하시모토 잇빠(橋本一巴)

· 타키미 타카이에(田公高家)

· 멘도리 우네메(妻鳥采女)

·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철포대와 기마군단 (鉄砲隊と騎馬軍団)』 신세츠 · 나가시노갓센 신쇼(真説・長篠合戦 新書) y086, 요센샤(洋泉社) ISBN 4-89691-727-8

·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철포와 일본인 (鉄砲と日本人)』 치쿠마가쿠게분코(ちくま学芸文庫), 치쿠마쇼보(筑摩書房) ISBN 4-480-08576-9

· 호라 토미로(洞富雄) 『철포 · 전래와 그 영향 (鉄砲・伝来とその影響)』, 시분카쿠(思文閣) ISBN 4-7842-0657-4

· 나와 유미오(名和弓雄) 『그림으로 보는 시대고증백과1 화승총 외 (絵で見る時代考証百科1火縄銃他)』 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

· 나와 유미오(名和弓雄) 『나가시노 · 시타라가하라 합전의 진실 (長篠・設楽が原合戦の真実)』 유잔카쿠(雄山閣)출판 ISBN 4-639-01540-2

· 스가와 시게오(須川薫雄) 『일본의 화승총1 (日本の火縄銃 (1))』 코오게(光芸)출판 ISBN 4-7694-0084-5

· 스가와 시게오(須川薫雄) 『일본의 화승총2 (日本の火縄銃 (2))』 코오게(光芸)출판 ISBN 4-7694-0093-4

· 스가와 시게오(須川薫雄) 『일본의 화승총3 (日本の火縄銃 (3))』 전자판 www.日本の武器兵器.jp

· 유츠기 유키타카(湯次行孝) 『쿠니토모 철포의 역사 (国友鉄炮の歴史)』, 선라이즈(サンライズ) ISBN 4-88721-429-4

· 안자이 마코토(安斉実) 『포술가의 생활 (砲術家の生活)』, 유잔카쿠(雄山閣) ISBN 4-639-00892-9

· 안자이 마코토(安斉実) 『포술도설 (砲術図説)』, 일본라이플사격협회

· 우다가와 타케히사(宇田川武久) 『에도의 포술 (江戸の炮術)』, 토요쇼린(東洋書林) ISBN 4-88721-429-4

· 우다가와 타케히사(宇田川武久) 『철포전래 (鉄炮伝来)』 병기가 말하는 근세의 탄생(兵器が語る近世の誕生), 츄코신쇼(中公新書), 츄오코론샤(中央公論社) ISBN 4121009622

· 우다가와 타케히사(宇田川武久) 『철포와 이시비야 (鉄砲と石火矢)』 일본의 미술 제390호(日本の美術第390号) 시분도(至文堂) ISBN 4-7843-3390-8

· 우다가와 타케히사(宇田川武久) 『철포와 전국합전 (鉄砲と戦国合戦)』, 요시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ISBN 4-642-05546-0

· 우다가와 타케히사(宇田川武久) 『진짜이야기 철포전래 (真説 鉄砲伝来)』 헤이본샤(平凡社) ISBN 978-4582853469

· 타네가시마 개발센터(種子島開発センター) 『철포전래 전후 (鉄砲伝来前後)』, 유히카쿠(有斐閣) ISBN 4-641-19902-7

· 히라야마 타케후미(平山武章) 『철포전래기 (鉄砲伝来記)』, 야에가키쇼보(八重垣書房)

· 이와도 노리토(岩堂憲人) 『세계총포사 (상) (世界銃砲史(上))』, 코쿠쇼칸코카이(国書刊行会)

· 이와도 노리토(岩堂憲人) 『세계총포사 (하) (世界銃砲史(下))』, 코쿠쇼칸코카이(国書刊行会) ISBN 4-336-03765-5

· 사사키 미노루(佐々木稔) 편찬 『화승총의 전래와 기술 (火縄銃の伝来と技術)』, 요시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ISBN 4642033831

· 쇼 소오키치(所荘吉) 편찬 『나카지마류 포술관 기록 (에도과학총서) (中島流炮術管き録(江戸科学叢書))』, 츠네카즈(恒和)출판

· 쇼 소오키치(所荘吉) 『화승총 (火縄銃)』, 유잔카쿠(雄山閣) ISBN 4-639-00800-7

· 쇼 소오키치(所荘吉) 『도해 고총사전 (図解古銃事典)』, 유잔카쿠(雄山閣)출판 ISBN 4-639-00641-1

· 오쿠무라 쇼지(奥村正二) 『화승총에서 쿠로후네까지 (火縄銃から黒船まで)』, 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G63, 이와나미신쇼(岩波書店) ISBN 4-00-416063-4

· 노엘 페린 『철포를 버린 일본인 (鉄炮を捨てた日本人)』, 키노쿠니야쇼텐(紀伊国屋書店) ISBN 4-314-00432-0

· 츠노세 미츠오(津野瀬光男) 『총기화약 실용사전 (銃器火薬実用事典)』, 슈료카이샤(狩猟界社) 3575-3063 ISBN 4915091023

· 마사노 유조(正野雄三) 편찬 『히노 철포 (日野鉄砲)』, 히노쵸 역사민속자료관(日野町歴史民俗資料館) 「오우미 히노 상인관(近江日野商人館)

· '철포와 일본인 - 「철포신화」 가 숨겨온 것 (鉄砲と日本人―「鉄砲神話」が隠してきたこと)', 요센샤(洋泉社) ISBN 978-4896912760

· '역설의 일본사 <9> 전국야망편 - 철포전래와 왜구의 수수께끼 (逆説の日本史〈9〉戦国野望編―鉄砲伝来と倭寇の謎)', 쇼가쿠칸(小学館) ISBN 978-4093794206

· 사이카 마고이치(雑賀孫市) - '노부나가와 싸운 철포대장 (信長と戦った鉄砲大将)', PHP연구소 ISBN 978-4569570174

· '전국철포 · 용병대 - 천하인에게 거스른 키슈 사이카슈 (戦国鉄砲・傭兵隊―天下人に逆らった紀州雑賀衆)', 헤이본샤(平凡社) ISBN 978-4582852363

· 사야마 지로(佐山二郎) 『소총 · 권총 · 기관총 입문 (小銃 拳銃 機関銃入門)』 코진샤NF분코(光人社NF文庫), 2008년, ISBN 978-4-7698-2284-4

· '중세 독일의 일상생활 (ドイツ中世の日常生活)', 토스이쇼텐(刀水書店), ISBN 4-88708-179-0

· 온주문헌쌍서(温州文献双書), 상하이 사회과학학원 출판사(上海社会科学学院出版社), ISBN 7-80681-840-5

본 포스트의 내용은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의 '火縄銃' 항목을 번역하여 작성한 것으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CCL)'의 적용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