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지역 문화역사단체, 학술세미나 열어 건의 제477주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 즈음해 임진왜란 승전의 바탕이 된 전라좌수영 겸 3도수군통제영 본영의 복원과 국가 사적지 지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여수 지역사회에서 나왔다. '전라좌수영 겸 최초 3도수군통제영 국가문화재 지정 추진위원회(위원장 고효주)에 따르면 여수시종고회와 여수시문화원, 여수진남거북선축제보존회는 지난달 28일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국가문화재 사적(史蹟) 지정' 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고효주 위원장을 좌장으로 노기욱 교수(호남의병연구소 소장)의 발표와 정현창 박사(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의 발표가 이어졌다. 또 박정명 (사)여수진남거북선축제보존회 이사장, 조미선 한국국학진흥원 사료조사원 등이 참여해 토론 등이 진행됐다. 이들 단체는 전라좌수영겸 3도수군통제영인 전남 여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 및 1593년 8월 최초의 3도수군통제사로 제수돼 부임한 곳이라고 밝히며, 3도 수군을 지휘한 최고 사령부인 본영으로써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국난 극복의 본거지라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했다. 아울러 417년간 조선의 바다를 지켜온 국방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약무호남 시무국가의 발원지이기 때문에 사적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고지도고효주 전라좌수영 겸 최초 3도수군통제영 국가문화재 지정 추진위원장은 이번 세미나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란을 승전으로 이끈 역사적 현장인 전라좌수영 겸 3도 수군통제영 본영의 동헌 등 유적지를 사적으로 지정해 국비 지원을 통해 체계적 복원 및 호국 문화재로 보존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호국 문화재로 보존 관리함으로써 여수가 호국의 성지임을 널리 알려 국난극복 역사의 교육장으로 삼고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라좌수영 겸 3도수군통제영은 국보 진남관 인근에 존재했던 동헌 등 관아 건물 복원사업 등이 주를 이룬다. 2015년 5월 3도수군통제영 동헌일원 복원사업 기본계획 용역발주를 시작으로 1, 2차 편입 토지매입 및 건축물 11동이 철거됐다. 이후 2019년 3월 1~3단계 발굴조사가 완료됐다. 발굴 결과 통제영은 최소 3차례 이상 화재 후 재건을 반복한 것으로 추정됐다. 난중일기,고문헌,고지도 등 기록들과 건물 위치 등 일치했다. 또 1815년에 제작된 '호좌수영지 영성도'에 그려진 동헌 등 배치도 및 1900년대 사진 등과도 일치한 점이 밝혔다. 학술세미나 주제발표 및 토론회 모습.(위원회 제공)저작권자 © 광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전남대학교 임란 이전 전라좌수영에는 승군이 존재했었다. 이 승군들은 國役과 守直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유사시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승군들은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승군의 지휘체계는 전라좌수사→승장→승군으로 이어졌고, 인원은 최대 3백여 명 정도였다. 임란이 발발하던 해 전라좌수영에는 의승수군이 편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6백여 명 이상이었다. 이 의승수군은 기존 승군과 결합된 형태로 그것을 계승한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되었다. 의승수군의 지휘체계는 전라좌수사→별도장→지대승장→의승수군으로 이어졌다. 이 의승수군은 이순신의 지휘 하에서 요해처의 파수 임무와 해전에 참가하였다. 대표적
의승수군은 삼혜, 의능, 자운, 옥형, 혜희 등이었다. 자운과 옥형은 임란 이후 수륙재와 이순신의 尊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옥형과 의능을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는데 그들의 행적을 보면 재론의 여지가 있다. 당시 의승수군의 활약은 관군보다 월등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의승수군의 주둔지는 여수 흥국사였다. 흥국사가 이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요해지였던 것 등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되었다. 흥국사는 임란 이후에도 의승수군의 주진사 역할을 하다가 1894년 경에 그것이 중단되었는데, 이러한 측면을 보면 그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 There were Buddhist monk troops at the Jeolla Jwa naval base before Imjinwaeran. They performed their duties in national engineering projects and building constructions
and fought in battles in emergency. Those days, Buddhist monk troops were not institutionalized. The command system of Buddhist monk troops was Jeolla Jwasusa→Buddhist monk admirals→Buddhist monk sailors. Their size was approximately 300 in maximum. The Uiseung naval forces were organized at the Jeolla Jwa naval base in the year when Imjinwaeran broke out. Their size was over 600 soldiers. Being combined with the old Buddhist monk troops, the Uiseung naval forces had a strong nature of
inheriting them. The command system of Uiseung naval forces was Jeolla Jwasusa→Byeoldojang→Jidaeseungjang→Uiseung naval sailors. The Uiseung naval forces guarded a strategic point and fought in naval battles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Yi Sun-shin. Representative members of the Uiseung naval forces were Samhye, Uineung, Jawoon, Okhyeong, and Hyehee. Jawoon and Okhyeong would hold Suryukje and Jonje for Admiral Yi Sun-shin after the war ended. Some argue that Okhyeong and Uineung were the same
person, but a look at their whereabouts raises a need to review again. Those days, the Uiseung naval forces performed much superior to the government forces. The Uiseung naval forces had a post at the Heungguk Buddhist Temple in Yeosu. The temple served as their post because it was a strategic point. It continued to serve as Jujinsa for the Uiseung naval forces after the war ended until 1894 when its service as Jujinsa was over. In these aspects, the temple holds significant historical values. 키워드열기/닫기 버튼, , , , Buddhist naval force, Uiseungsugun(義僧水軍), Jeolla Jwa naval base, Jujinsa(駐鎭寺), Heungguk Buddhist Temple 피인용 횟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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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제목조선시대 수군진조사 Ⅱ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편발행년도2014 등록일2015-11-10조회수2030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술총서 제33집 개소 20주년 기념 간행물 다운로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