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 이름 - hilosima wonpog ileum

히로시마 원폭 75주년: 미치코가 기차를 놓칠뻔 한 그날

  • 콜린 인즈
  • 자유 기고가

2020년 8월 7일

히로시마 원폭 이름 - hilosima wonpog ileum

사진 출처, Sanae Ham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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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4살이던 미치코 요시츠카 씨(오른쪽)와 친구들

1945년 8월 6일 아침, 미치코씨는 늦잠을 자고 말았다. "‘다음 기차를 타도 지각을 하진 않겠지만, 역까지 뛰어가면 늘 타던 기차를 찰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는 사건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사건 당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난 요코가와역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늘 타던 기차에 올라탔다."

이 결정이 미치코의 목숨을 구했다. 덕분에 그날 미치코가 거주하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 폭탄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만약 늘 타던 기차를 놓쳤다면, 전 아마 요코가와역과 히로시마역 사이 어디선가 죽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 14살이던 미치코 요시츠카씨는, 히로시마 중심부에 위치한 학교의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고 학생들이 전쟁 지원을 위해 차출되면서 그는 도시 동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토요 코교 공장에서 일본군을 위한 무기를 만드는 일을 했다.

그가 그날 아침 늦잠을 자게 된 것도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엄습하는 피로감 때문이었다.

공장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부족해진 식량 때문에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또 지난 며칠간 이어진 공습들 때문에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로 알려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연구 단체 이외에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진 출처, US Air 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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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아메 원폭을 투하한 에놀라 게이 전투기 조종사와 지상 근무단

'작은 사내아이'라는 애칭이 붙은 폭탄을 싣고 북마리아나 제도 티니안 섬에 위치한 미군 기지를 출발한 에놀라 게이 전투기는, 아침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길게는 몇 달간 치료를 받다 사망한 사람은 히로시마에서만 약 14만 명으로 추정된다.

미치코는 당시 일하던 공장과 히로시마 중심부 사이에 위치한 높은 히지야마 언덕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언덕 뒤편에서 솟구쳐 오르는 연기를 봤다.

혼란 속에서, 그는 친척 집이 있는 기온으로 가는 산길인 나카아마토게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 폐허가 된 도시를 떠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다친 사람들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화상을 입거나 살이 불에 타서 곪아 터진 사람들, 아니면 핵폭풍이 일으킨 압력 때문에 안구가 튀어나오거나 다른 장기들이 몸밖으로 노출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고 그는 서술했다.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잡더니 내게 ‘물 좀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그 손을 재빨리 뿌리치면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너무 무서웠고 거기서 빨리 도망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기온에 도착한 미치코는 어머니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회복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10일 동안 엄마와 나는 군인이었던 오빠를 찾아 히로시마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나중에 오빠가 폭발이 일어난 중심부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빠의 유품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미치코는 곧 병에 걸렸다. 그는 당시 나타난 증상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난 복사병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잇몸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심한 설사 증상을 보였으며, 머리가 계속 빠지고 몸 전체에는 보랏빛 반점이 나타났다."

"난 가족과 친분이 있는 집 창고에 격리되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적적으로 나는 살아났다."

히로시마 원폭, 그리고 이어진 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전쟁을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군의 해상봉쇄, 러시아의 침략, 그리고 포츠담 선언 역시 결정적인 요인들이었다.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이 전국에 방송됐다. 그가 일본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한다”고 말했을 때 많은 히로시마 시민들은 ‘더 견딜 것이 남아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에 경악했다.

그날 이후 몇 날, 몇 주, 몇 달이 이어지는 동안 히로시마는 엄청난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단 3일 만에 기차와 전차 그리고 버스가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또 두 달 만에 학생들은 반쯤 부서진 학교, 지붕도 없는 교실로 돌아왔다.

사진 출처, Sanae Ham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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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미치코

미치코 역시 무너진 인생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1948년, 18살의 나이에 결혼을 했다. 1949년 4월 첫 딸을 낳았지만, 2주 만에 죽고 말았다. 나는 내 아기의 죽음이 핵폭탄의 후유증 때문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 후 그는 건강한 두 아이를 얻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이어졌다. 그의 남편은 종종 내연녀와 함께 자취를 감췄고, 미치코에게서 돈을 가져갔다.

그가 복사병 탓이라 믿는 피로감과 남편의 바람에 지칠 데로 지쳤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들을 종종 친척들 손에 맡겼다. 그리고 아이들이 돌아올 때면, 그는 자신의 좌절감을 딸 사나에에게 풀었다.

"1964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가족 중에 나만 남은 것이다. 엄마는 전쟁미망인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었는데, 엄마가 사망하자 일본 정부가 이를 중단했다"

미치코가 마침내 남편에게 따져 물었을 때 남편은 외도를 인정하고 내연녀와 함께 떠나버렸다. 남편과 정부 모두에게서 어떠한 경제적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 미치코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그는 전통 일본 식당의 호스티스로 기모노를 입고 밤늦게까지 일했다.

시간이 흘러 딸 사나에가 두 남매를 낳고 난 뒤에야 엄마와 딸의 망가진 관계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8월 휴가철이면 미치코는 사나에의 집을 방문한다. 둘은 원자폭탄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보곤 하는데, 미치코는 공감을 할 수 없다.

사진 출처, Sanae Ham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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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코와 딸 사나에 부부

미치코의 가족들은 그가 “저렇지 않았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미치코는 1945년 경험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1995년 히로시마 원폭 50주년이 다가오자 미치코의 의사가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겨볼 것을 권유했다.

처음엔 주저했지만, 결국 미치코도 이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그 기억들이 사라지고 말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결정을 할 당시 이미 히로시마는 넓은 대로들과 호화로운 백화점로 넘쳐나는 생동감 넘치는 도시가 됐고, 과거 비극의 흔적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히로시마 중심에 있는 임대 주택에 살고 있던 미치코는 도시 동쪽 외곽의 헤사카라는 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새로 얻은 아파트는 나카야마토게, 폭탄이 떨어지던 그날 그가 지났던 그 산길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날, 그의 발목을 잡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그 기억을, 그 목소리를 절대 지워내지 못할 것이다."

사진 출처, Colin I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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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과 카오리

내가 처음 히로시마로 이사를 왔을 때, 나는 히로시마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카오리라는 이름의 여성을 만났고, 그 여성에게서 자신의 할머니, 미치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 몇 년이 흐른 뒤 부부가 된 우리는 미치코의 슬픈 이야기와 삶을 향한 의지에 감명을 받아 이를 번역했다.

내 아내는 할머니가 인생 마지막 몇 년 동안 우울증을 겪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치매 증상까지 나타나면서 요양원으로 옮겨졌고, 2012년 미치코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역사와 한 여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날의 기억을 담은 그의 글은 이제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