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만난세계 민중가요 - dasimannansegye minjung-g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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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30일,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 사건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농성 중 1600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진압이 이루어질 때 소녀시대의 다시만난세계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시위 현장에서 민중가요도 아니고, 대중가요를 단체로 부른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2017년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도 쓰였다. 대구 퀴어문화축제의 퍼레이드와 서울 퀴어문화축제의 두 트럭이 행진 마지막에 틀었는데, 마치 성소수자들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듯한 가사라 최고의 인기곡이라고 한다. 2018년에도 서울퀴어문화축제와 대구퀴어문화축제 공연에서 쓰였다. 제 20회, 20주년을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때에도 쓰였다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 시위에서도 이 노래가 쓰이고 있다. 가사가 태국어로 번역되어 퍼지고 있으며, 시위대는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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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가사 자체가, 두려움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성장담에 가까워서인지 몰라도 시위에 단골로 소환되는 중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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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 / 2016.11.14.

지난 주말 간 집회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들었다. 페미니스트로서 집회에 참여한 이들 몇몇이 둘러 앉아 노래를 불렀다. 생경한 광경이다. 집회에서 대중가요를 접하기 시작한지 이미 몇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생경한 광경이다. 〈처음처럼〉이나 〈바위처럼〉에 맞춘 귀여운 율동들을 처음 본 선배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십 년 전에 한 선배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선배는 소위 칼마임 혹은 전투문선으로 불리는, 결기를 드러냈는 절도 있는 무용이 줄어가는 것을 개탄했다. 대중가요와 크게 다를 바 없어보이는, 두리뭉술한 가사의 밝은 노래에 맞춘 귀여운 율동들을 그는 탐탁지 않아 했다. 나로서는 딱히 공감이 가지 않았다.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로써 공동의 문화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귀여운’ 춤들이 시류를 탄 한 때의 유행인 것만큼이나, ‘절도 있는’ 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놓고서 〈다시 만난 세계〉를 낯설어 한다는 것은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집회에서 대중 가요를 들었을 때 이상했던 것은, 저 노래가 이 투쟁의 노래로 선택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저 ‘바깥 세상’에서 유행하고 있을 뿐인 노래였다. 그 노래를 축으로 한 공동의 기억도 없었고, 그 노래의 가사와 우리 지향 사이에 겹치는 바도 없었다. 그런 노래가 집회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내게는 낯설었다. 〈다시 만난 세계〉가 낯선 것 역시, 내게 그 노래에 관한 아무런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점거 투쟁에서 그 노래를 함께 불렀던 이들에게는 있을 그런 기억이 말이다. 이화여자대학교 투쟁에 스스로를 이입하며 그 사태를 지켜본 이들에게는 있을, 그런 기억이 말이다.
‘민중가요’라는 이름은 어쩌면 그 이름으로 분류되는 노래들의 실상과는 맞지 않는다. 수 년째, 혹은 수십 년째 지적되어 오듯 남성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삼은 노래들이 너무 많고, 그것이 아니라면 함께 부를 수 있기보다는 가수가 부르기에 적합한 노래들이 너무 많다. 투쟁의 지향을 담은 가사로만 따지자면 민중가요라는 이름이 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그 노래들 대부분은 민중이 만드는 것도, 민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시 만난 세계〉가 오히려 더 민중가요라는 이름에 알맞다. 적어도 삶의 특정 시기에 그 노래를 들으며 공동의 문화를 향유했던 한 세대에게 있어, 그 노래는 자신들의 노래다. 앞서 썼던 글들의 논조를 따르자면 그 노래는 그저 상품일 뿐이므로, 한 사람을 소비자에 제한되는 가짜 주인공으로 만들 뿐이므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역시 이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선택이라는, 전유라는 한 집단의 행위이다. 기존의 민중가요를 배우는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한 노래를 ‘선택’했다. 이로써 그 노래는 투쟁가요로 전유되었다. 작가가 만드는 사람이기보다는 선택하는 사람이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민중가수’가 만들고 부른 노래가 저절로 ‘민중가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선택한 노래가 ‘민중가요’가 되는 현상이, 이제서야 일어난 것일 뿐이다. 어떤 고명하신 선생님이 아니라, 어떤 절창의 가수가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모인 익명의 존재들이 함께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를 테면 ‘민중가요로서의 〈다시 만난 세계〉’에는 어떤 집단적 저자성이 결합된다.
이 집단적 저자성이야 말로, 옛 시대의 민요가 그러하듯, 한 노래를 한 집단의 노래로 만들어주는 진정한 요소일 것이다. 〈다시 만난 세계〉를 민중가요로서 부르는 행위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하나의 재창작이다. 대상에 새로운 지위와 새로운 의미,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마르셸 뒤샹에게서 단순한 변기가 미술계를 비판하는 의미를 안게 되었듯,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에게서 〈다시 만난 세계〉는 단합을, 저항을, 창조를 상징하는 의미를 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만난 세계〉가 선택된 것은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고많은 대중가요 중에서 그나마 집단의 지향에 맞는 가사를 갖고 있었던 것이 이 곡일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모호성은 오히려 재창조의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모호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근년에 리메이크된 이 곡을 아는 사람들은 그 이전 세대에서부터 있어 왔다. 어쩌면 이로써 〈다시 만난 세계〉는 세대를 넘나들 가능성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만난 세계〉가 한 세대의 노래로 그치는 것이 아까운 명곡이라서가 아니라, 이 선택이라는 제 2의 창작 행위를 집단적으로 경험해 볼 기회가 한 세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까운 심정에서, 이 점은 작은 희망이다.
나는 박준의, 연영석의, 지민주의 노래들을 좋아한다. 〈다시 만난 세계〉가 집회에서 불리는 것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낯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끊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박준이, 연영석이, 지민주가 아니라, 누구나가 자신이 좋아하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노래를 들고 나와 이것을 우리의 노래로 삼자고 말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만난 세계〉가 말이다.

글 내비게이션

[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다시만난세계 민중가요 - dasimannansegye minjung-gayo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세계.”

지난 3월 24일 여의도대로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이 장면은 2016년 7월 30일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 당시, 1600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고작 300명 학생들을 진압하려던 장면을 연상시켰다. 시위 현장에서 민중가요도 아니고, 대중가요를 단체로 부른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후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정치권에서 외면 받던 2030여성들이 얼마나 마음의 불꽃을 품고 있었는지는 노랫소리만 들어도 명료했다.

20대 대선에서 젠더갈등은 당락을 결정지을 만큼 주요한 쟁점이었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몰아 받은 건 2030 여성이 아닌 ‘이대남’이었다. 안티페미니즘은 이퀄리즘으로 둔갑했고, 여성의 억압적 지위를 타파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책은 역차별로 여겨졌다. 심지어 당선인의 주요 공략 중 하나가 ‘여가부 폐지’였으니 여성이 이번 대선에서 얼마나 무관심의 대상이었는지는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2030 여성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건 6년 전 이대에서 촉발된 불꽃덕분이기도 했지만, 2018년 1년 내내 불법촬영에 저항하며 6차례나 시위를 이어간 내공 덕분이기도 했다. 마지막 ‘불편한 용기’ 시위에는 25만 명 이상이 결집했을 정도로 시위는 거대한 규모였고, 그런 규모의 시위를 잡음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치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2030 여성은 SNS를 매개체로 어떻게 결집하고, 어떻게 조직하여, 어떻게 일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경험을 얻었다. ‘불편한 용기’ 시위는 신생여성 정치세력화의 산실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역대 최소 표차인 0.7%로 당락이 결정된 다음 날부터 민주당에는 입당 러시가 쏟아졌다. 그리고 일주일간 새로 입당한 13만 중, 여성은 과반인 8만 명이 훌쩍 넘었다. 지난 3월 31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후 2030 여성들의 민주당 입당 의미와 과제’ 토론회는 이런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리고 이 토론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한 2030세대 여성들은 “우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니다”며, “2030 여성을 관람객이 아닌 경기장에 내려온 플레이어로 인정하라”고 선언했다.

현재 개혁의 딸들, 일명 ‘개딸’이라 일컬어지는 2030 여성들은 언론과 검찰개혁인 ‘언검개혁’을 요구하는 중이다. 이들은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진 민주당이 앞장서서 개혁과제를 서둘러 진행해주길 바라고 있다. 개딸들이 기성세력과 다른 점은 이를 독려하기 위해 투쟁이나 비판대신에 “민주당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위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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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로는 ‘검찰 정상화’라는 표현이 있다. ‘밭갈이 시위’를 주체하고 있는 김학현 대표는 “과거 586이 주도했던 과거 집회에서는 투쟁, 개혁 등을 핵심 단어로 썼지만, 2030들이 되도록 긍정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초반에 집회를 진행하면서 나온 “검찰이나 민주당이나 다 갈아엎자”는 주장을 듣고, 개딸들은 “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자”고 표현했다. 결국 주최 측은 뜻에 공감하며 ‘개혁’과 ‘정상화’를 같이 구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개딸들은 문자독려나 1000원 릴레이 후원, 파란 장미를 전달하는 등 의원 개개인에게 접촉하여 좀 더 개혁의 뜻을 강력하게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권리당원의 3%가 동의하면 의안을 제출할 수 있다는 당규를 찾아내어 각종 SNS에 알리고, 의원총회를 열기 위해 온라인 서명 플랫폼을 공유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김학현 대표는 “나도 이런 당규가 있는지도 몰랐다”며 따뜻한 관심으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줘서 감사하다고 말을 전했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기업인들은 사람을 존중하게 하시며, 언론인들은 진실을 말하게 해 주시고, 법조인들은 양심을 지키게 하소서.”

위는 개딸들이 매일 저녁 온라인에서 게시하는 ‘기도스’의 일부다. 기도와 디도스가 합쳐진 주문의 일부만 읽어봐도 2030 여성이 얼마나 한국사회의 개혁을 간절히 염원하는지 알 수 있다. 오현철 전북대 교수는 2030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평가하며, “개딸은 노 전 대통령의 거듭된 낙선을 보고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점에서 ‘노사모’와 유사하지만, 정치인 개인에 대한 지지를 넘어 민주당 안에서 자신들의 정치세력화를 조직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개딸들이 있기에 두달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도 격동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20대 대선은 끝났지만 희미한 빛을 쫓아가는 개딸들의 정치여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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