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육영수 폭행 - bagjeonghui yug-yeongsu poghaeng

박정희 시대

박정희의 세 여인, 김호남·이현란·육영수 (4)

[박정희 시대 : 폭력과 광기의 순간들]

박정희의 세 여인, 김호남·이현란·육영수(4)

육영수1

대통령 부인으로서 육영수는 외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이런 면에선 그녀가 전무후무하다.

그해(1974)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들은 충격과 비통에 휩싸였다. 육 여사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뭔가 간절한 의욕이 솟아났다.

그날 8.15 경축 연회장에서 만난 김종필(현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에게 육 여사한테 대세(代洗)를 줄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총리는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와서 수술 중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육 여사는 그날 저녁 7시에 운명하셨다.

그때 대세를 생각한 이유는 육 여사가 '청와대 제1야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면서 약자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김재규씨에게 전해들은 얘기지만 육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전달하면서 귀에 거슬리는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인의 아내로서 부덕(婦德)을 잃지 않았으며 사회의 그늘진 곳도 자주 찾아다녔다. 국모(國母)다운 면이 많은 훌륭한 영부인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육 여사가 그때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한결 부드러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심리적 의지처를 잃은 박 대통령의 고독감이 정치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육 여사는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면서 남편의 통치 스타일을 슬기롭게 누그러뜨렸을 분이시다.“

김수환 추기경의 글이다.

이렇듯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육영수에 대해서는 대부분 훌륭한 대통령 부인이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국모라는 표현이나,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가 막장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육영수는 본처와 세 명의 첩에게 1212녀를 얻을 정도로 충청북도 옥천의 대지주였던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의 1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다.

그녀는 한국전쟁 중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중, 그녀의 이종오빠이자 박정희의 대구사범 1년 후배이자 육군정보국 소위인 송재천의 소개로 박정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육종관이 박정희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육영수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을 하며 박정희와의 결혼을 감행한다. 당연히 결혼식에 불참한 그녀의 어버지 대신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인 김영기가 신부를 인도한다.(그녀의 결단력인가. 아님 그녀의 눈을 덮은 콩깍지의 힘인가. 뭐, 같은 얘기겠지만...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는 문제가 많았지만, 밖으로는 안 그렇다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것 같다.)

이 순간 박정희가 무슨 생각으로 육영수와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가 참으로 궁금한데 그에 관한 자료는 없다. 있는 건 다 입에 발린 소리나 하는 것들이니. 하여튼 몸으로는 김호남과  헤어지고, 마음으로는 이현란과 있으면서 육영수와 결혼을 한다

그녀의 전기에 따르면 육영수는 대통령 부인이 된 후, 어느 여기자에게 선을 보러온 박정희를 숨어서 본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예요. 얼굴보다는 뒷모습이 정직하거든요. 그 후 몇 번 만나 뵈니까 그 직감이 틀림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미덥고 소박하고 아주 정다운 분이세요.”

아마 박정희의 첫 인상에 대한 그녀의 느낌이 처음 얼마동안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이 말을 할 때도 그랬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 부인으로서 화기애애한 부부의 모습을 짐짓 보여주기 위해 옛 이야기를 꺼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들의 청와대 시절,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박정희는 수시로 육영수를 폭행했기 때문이다.

그때 육영수가 박정희의 바람기에 대해 강짜를 부려 박정희가 그렇게 대응했다는 얘기가 시중에 은밀하게 도는데 다음 사례를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가까웠던 윤필용의 말이다.

“1966(윤필용은 1967년으로 기억하는 듯) 어느 날, 육영수는 오빠인 육인수 집에 와서 방첩부대장인 윤필용에게 전화를 걸어 좀 와달라고 한다. 육영수는 그에게 우리 두 사람이 만난 것을 각하께서는 절대로 몰라야 한다면서 평소 쌓아놓았던 불만을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박정희의 몇몇 주변 인물들의 부정부패를 보면 나라가 망할 정도라고 분개를 하다, 박정희의 여자 문제를 꺼낸다.

윤 장군이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어요. 간신 조조 같은 이후락 비서실장과 깡패대장 같은 박종규 실장이 각하를 망치고 있어요. 세상에 많고 많은 게 여잔데 각하에게 왜 꼭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데려다주어서 국민들이 수군수군 거리게 만듭니까. 정말 제가 여자라고 강짜 부리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 사람들 그런 것 보면 정신 나간 사람들이에요.’라고

피스톨박종규가 이 말을 들었으면 많이 억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호실장으로서 대통령의 채홍사 역할에 넌더리가 나서 어떻게 하든 그 자리를 그만두고 중앙정보부장으로 가겠다고 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 대목에서 보듯 육영수 사후에 그 정도가 더 심해졌겠지만, 그녀의 생전에도 박정희는 다른 여자를 엄청 밝혔다.

어쨌든 육영수가 걱정했던 건 박정희의 바람기로 인한 아내의 위치보다는 대통령이 지녀야 할 체신이었던 모양. 요즘 기준으로 보면 쉽게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공인의 아내가 가져야 할 부덕(婦德)의 화신으로 불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