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팔이 소녀 백린 - seongnyangpal-i sonyeo baeglin

알고 보면 잔혹한 동화들이 꽤 많습니다. 잘 알려진 안데르센의 동화 중, 성냥팔이 소녀 역시 잔혹동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동 교육의 의무도 없고, 노동자를 날짐승처럼 생각하던 당시의 배경이 있습니다.

 

이 글은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소설 내용과 실화에 대한 논란, 그리고 이 소설이 왜 사회비판적인 소설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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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동화 성냥팔이 소녀 내용 - 안데르센 동화와 19세기 백린

 

성냥팔이 소녀의 내용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잔혹동화) 내용 / ⓒ ActiveChristianity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에 태어난 덴마크의 유명 동화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의 동화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성냥팔이 소녀》입니다. 이 동화는 1845년에 발표된 단편소설입니다. 그러나 동화의 뒷면에는 충격적인 시대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동학대 아버지 때문에 강제로 성냥을 팔러 나온 소녀가 있었습니다. 12월 31일 밤, 소녀는 너무 추워서 아무도 사주지 않는 성냥을 켜서 온기를 느끼려고 합니다. 그때 근사한 환상들이 보이고 잠깐의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별똥별이 떨어지고, 세상을 이미 떠난 할머니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소녀를 안고 천국으로 향합니다. 다음 날 새해 아침, 소녀는 미소를 띈 채로 발견되고, 사람들은 얼어 죽은 소녀를 보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잔혹동화 내용​

 

19세기 백린 성냥과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 / ⓒ ActiveChristianity

이 단편 소설에는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소설이 쓰일 당시는 산업혁명 때였고, 무조건 돈이 최고라는 보수 자본주의자들은 아동 노동자들을 싼값에 성냥공장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문제는 당시 성냥이 백린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린'이란 뜻은 "하얀색 인"이란 의미입니다. 독성을 가지고 있고 공기 중에서 자연발화 되는 특징이 있어서 무기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자연발화 연기는 '오산화 이인'이라는 맹독이기에 사람이 마시면 턱이 녹아내리고 몸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산업혁명 당시의 성냥 공장들은 어린 소녀들을 노동자로 이용하다가, 병이 들면 성냥 한 보따리를 안겨주고 그냥 내쫓았습니다. 퇴직금 따위도 없이 그걸로 먹고 살아가야 할 처지에 놓은 소녀들이 생기면서, 성냥팔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잔혹동화 내용은 이런 사회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실화다?

 

잔혹동화 성냥팔이 소녀 소설 - 안데르센 동화​ / ⓒ ActiveChristianity

앞서 말한 잔혹동화 배경 때문에 사람들은 실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데르센이 동화를 지을 1845년에는 백린에 대한 확실한 유해성 보고서가 만들어지기 전이고, 성냥공장 소녀들의 문제점을 기사로 다룬 것도 많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실화를 소설로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발간 연도와 문제 시점의 차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근거 없는 소리로 자본주의 비판을 하고 있다고 현실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작은 허점을 트집삼아 전체 사실을 무효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복지보다는 자유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많은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더라도, 노동자가 병에 들고 죽어가도 그것이 사회 이슈가 되려면 엄청난 장애물을 거쳐야만 합니다. 자본가의 방해와 언론의 유착 등에 의해 수 년이 지나야만 사회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상에서 혹독한 노동 조건은 사실이었고, 안데르센은 기사가 나지 않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고찰

 

성냥팔이 소녀 줄거리와 잔혹동화 - 19세기 백린​ / ⓒ ActiveChristianity

알려지기로는, 안데르센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당시 10대 여공들은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백린 인산 괴사"에 항의하면 고용주는 해고로 징벌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사실은 사실"인 배경을 가진 동화인 것입니다.

 

잔혹동화 성냥팔이 소녀에는 성냥을 하나 켤 때마다 근사한 난로와 요리, 트리 등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소녀가 얼어 죽어가면서 뇌가 느끼는 환각 증세였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할머니를 더 보려고 모든 성냥을 동시에 불붙이고 맙니다. 당연히 엄청난 백린이 뿜어져 나왔을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회 분야로 한정할 때, 진보 패러다임은 복지가 핵심이고, 보수 패러다임은 자본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어떤 공부하기 싫은 학생은 학교란 것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도 합니다. 아동 교육의 의무가 없고 자본 제일주의인 당시처럼 된다면, 10살이 되기도 전부터 공장에서 이런 학대를 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적어도 무엇이 다행인지 정도는 생각하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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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는 당대 백린 공장의 잔인한 현실을 담은 동화라는 이야기도 있다. 백린 공장에서는 임금이 싼 어린 소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소녀들은 몇 년간 일하다가 백린 중독 현상으로 턱뼈가 녹아서 얼굴이 무너지고, 공장에서 쫓겨나곤 했다고 한다. 공장에서는 그렇게 소녀 노동자들을 쫓아낼 때 퇴직금은 커녕 성냥만 한 자루 들려 내보냈는데, 소녀들이 그렇게 얻은 성냥을 팔며 겨우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을 위한 동화이면서, 당대 현실이 반영된 안타까운 이야기는 지금도 서글프게 다가온다.


추운 계절이 다가오니 우리 사회의 외로움에 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성냥팔이 소녀는 사람들에게 '성냥 사세요'라고 호소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저 소녀를 무시하고 지나갈 뿐이다. 소녀에게는 가정도 없지만, 이웃도 없고, 공동체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자신을 보살피는 이 하나 없이, 모두 '남'일 뿐인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도 점점 이웃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내가 어릴 적에만 떠올려 보더라도, 온 동네 사람들이 이웃 아저씨이자 아주머니였다. 학교가 일찍 끝나면 문방구나 경비실에서 놀며 부모님을 기다리기도 했고, 같은 동의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당연히 친구 부모님들이 밥도 먹여주곤 했다. 요즘에는 옆집 사람과 인사하는 일도 드물고, 동네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두루 알고 지내지도 않는다. 서로 간섭과 참견이 없어진 개인주의 문화의 이점도 있지만, 그만큼 외로움이 심화 된 면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우리에게 이웃이란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사세요."라고 간절히 말했으나 무심코 지나친 길거리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 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의 '코로나 시대'는 우리를 더 극적으로 서로로부터 분리시켰다. 함께 만나는 일이 어색한 일이 되었다. 타인이란 당연히 눈빛과 숨과 비말을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라 경계하며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각자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의 스마트폰 세계로 함몰되고, 현실에서 서로를 만나는 경험은 더 드물어졌다. 서로가 서로로부터 유리되면서, 우리들은 더 외로워졌다. 스마트폰의 세계도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스마트폰 SNS 속 화려한 타인들의 이미지는 우리를 초라하게 느끼게 만들고,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켰다. 타인들은 점점 가까이 하고 싶기보다는, 가까이 있으면 시기질투나 느끼게 만들어 멀리해야 하는 존재 같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더 자주, 더 수시로 온라인을 통해 연결되었지만, 진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내 곁의 이웃은 잃어갔다.


이런 시대에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면, 어떻게 다시 '이웃'을 되찾을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이웃은 과거의 이웃과는 또 달라야 할 것이다. 가까운 이웃들이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며, 편견으로 낙인 찍고, 참견과 간섭으로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문화는 걷어낸 새로운 이웃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요즘처럼 개인주의가 심화된 것은 그런 집단주의 속 이웃에 대한 피로감도 영향을 미쳤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이웃이란,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지지해주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를테면 '경청의 이웃'이면 어떨까 싶다. 훈계의 이웃, 강요의 이웃, 뒷담화의 이웃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환대하는 이웃 말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을 기꺼이 사주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어느 신사 같은 이웃의 시대로 갈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도 덜 외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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