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 nelo keullaudiuseu kaisaleu auguseutuseu geleumanikuseu

로마 2206년의 역사

제정로마 5대황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2006. 12. 10. 1:25

  네로의 두상
  네로와 어머니 아그리피나   네로.. 로마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중 한명..   그는 폭군이었다고한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황제이기도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태조다.   그의 왕조에 피하나 섞이지 않은 사람이 황제로 등극했으니.   그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곧 네로다.   역사는 네로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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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ermanicus Julius Caesar)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신상 정보
출생
기원전 15년 5월 24일
로마 제국 로마
사망
19년 10월 10일 (33세)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
배우자
대 아그리피나
자녀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이그노투스 카이사르)[1]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어머니
소 안토니아
형제
리빌라,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입양형제, 매제)


1. 개요

2. 생애

3. 게르마니쿠스 신화

4. 가족

5. 평가

6. 여담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제위 계승권자, 정치가이자 장군.

정식 이름은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ermanicus Julius Caesar)[2]

이지만 보통은 게르마니쿠스 또는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라고 부른다. 본래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며 태어날 당시 이름은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대 드루수스)와 똑같았다.[3]

그의 아버지 드루수스는 게르만족과의 싸움에서 큰 공적을 세워서 "게르마니쿠스"(게르만을 정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가지게 되었으며, 원로원에게 이 칭호를 대대로 쓸 수 있는 명예를 얻었다. 따라서 그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도 이 이름을 물려받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는 후에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의 동복(同腹)동생[4]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大) 드루수스, 네로 드루수스)이다. 그는 낙마사로 요절하기 전 로마 장군 중 최초로 라인 강을 건너 엘베 강까지 진격했으며, 게르마니아를 거의 정복하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가 급사한 이후 자신의 후계자(차기 황제)로 생각한 그의 양아들이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이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소(小) 옥타비아의 딸인 소(小) 안토니아이며, 동복 동생은 리빌라와 훗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칼리굴라가 암살된 뒤 즉위하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있다.

즉,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외종손,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다. 따라서 그는 태생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가 생각한 ‘적합한 후계자’였다. 이런 이유로 할머니의 남편이자 외할머니의 남동생 아우구스투스는 일찍이 양자로 삼았던 외손자들이 요절하자, 자신의 일가 모두의 혈육이고 외외종손인 게르마니쿠스를 일찌감치 차차기 황제로 결정내린 뒤 후계구도를 짰다. 그래서 그가 게르마니쿠스의 큰아버지 티베리우스를 공식적인 양자로 삼고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로 입양할 당시, 티베리우스에게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5]

가 있음에도 외외종손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법적인 손자로 삼고 그를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아내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로 게르마니쿠스에게는 6촌 누이인 대(大) 아그리피나이며 9명의 자녀를 얻었고 이중 6명의 자녀는 유년기를 넘어서도 생존했다. 그리고 이중 셋째 아들[6]

가이우스는 제3대 황제가 되었고, 장녀 율리아 아그리피나(소(小) 아그리피나)는 외손자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제5대 황제 네로이다.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유년기[편집]

BC 15년 5월 24일 로마에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르마니쿠스는 이들 부부의 첫째 아이였으며, 아버지 드루수스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를 승리를 이끈 뒤 갈리아 파견이 결정난 해에 태어났다. 게르마니쿠스가 태어난 이후에도 4명의 동생이 더 태어났는데, 그의 동생들은 모두 루그두눔(리옹)이 고향이다. 하지만 5남매 중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본래 이름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이는 1963년 발굴된, 아멜리아의 게르마니쿠스 청동상과 비문에서 확인된다.

BC 9년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의 승리와 공적으로 ‘게르마니쿠스’라는 존칭을 얻으면서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를 그의 일가 이름에 붙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아우구스투스와 그 가족들이 장식된 부조가 담긴 ‘평화의 제단(Ara Pacis Augustae)’ 남쪽 벽면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7]

게르마니쿠스가 2살이 될 무렵, 갈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아버지 드루수스를 따라 가족 전체가 루그두눔(리옹)의 총독 사저에서 살았다.

아버지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가 태어난 해, 법무관이던 동복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알프스 일대 부족들과 전투를 치러 공적을 세운 이래, 갈리아 총독을 지내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의 총책임자 중 한명이 되었다. 게르마니아의 라인 강 전선으로 파견된 드루수스는 로마 장군 중 최초로 북해를 항해하고 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땅을 넘어 라인 강까지 도달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게 약식 개선식과 명예를 수여받고 다음해 집정관에 뽑혔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개선 군단을 이끌고 겨울(또는 여름)을 맞이한 게르마니아 땅에서 갑작스러운 불의의 낙마 사고로 불과 2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맏아들 게르마나쿠스의 나이는 불과 6살이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의 나이는 1살이었다.

2.2. 후계자로 발탁[편집]

아버지 드루수스가 사망한 후, 가족과 로마로 돌아와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인 소 안토니아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음에도 재혼하지 않고 3남매를 키웠다.[8]

게르마니쿠스는 AD 4년 18세의 나이가 되자 황실 가족들의 입회 아래 성년식을 치렀고, 후견인인 외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재무관 자리를 선사받고 공직 경험을 위한 명예로운 길에 들어갈 기회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이후 예정대로 외외종조부의 손녀인 대 아그리피나와 AD 5년 결혼했다.[9]

게르마니쿠스가 성년식을 올리던 해, 외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큰아버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그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도 아내의 남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10]

와 함께 입양을 통해 공식적으로 율리우스 가문에 편입됐다. 따라서 이때부터 이름을 오늘날 잘 알려진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꿨고, 백부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외종조부에 의해 일찌감치 차기 제위계승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혈통이 이어지는 게르마니쿠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신 후계자로 지목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만들고, 자신의 혈육인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고 난 직후, 아우구스투스의 아들(공식 후계자)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된 백부 티베리우스를 따라 처음으로 전쟁에 참가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드루수스가 공적을 쌓았고 요절한 땅 게르마니아였다. 18살에 접어든 게르마니쿠스는 이때 제왕 교육을 시작하면서, 티베리우스의 명에 따라 2년간 총사령관을 보좌하는 참모 본부 근무를 담당했다. 이후 AD 13년부터 티베리우스 대신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선 전체를 담당해 지휘했고, 4년 간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6년 전 일어난 참극 현장을 찾아갔으며 여기에서 유품들을 회수하고 로마군 전사자들의 백골을 모아 매장했다. 동시에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에 따라 2살 아래인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모든 공직과 사제직을 비슷한 시기에 밞아나갔고, 3년마다 그와 함께 집정관 자리를 맡도록 결정내려졌으며 각종 명예와 훈장을 함께 수여받았다.[11]

본디부터 미남이었고 키가 컸는데, 말타기를 열심히 하여 약점인 하체를 단련해서 균형잡힌 신체를 가지게 됐다. 성품도 겸허하고 남을 배려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어 뭇사람에게 호감을 주었기에 일찍부터 기대와 신망을 한몸에 모았다.[12]

단순히 정해진 후계자였기에 생긴 현상은 아니었으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일부는 티베리우스 대신 그를 황제로 세우고 싶어했고 게르마니아에 주둔하던 로마의 군단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이 대안으로 생각했던 건 당대엔 아직 뚜렷한 전공도 없었던 게르마니쿠스였다.

2.3. 게르마니아 전쟁과 오리엔트 파견[편집]

서기 41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혈육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 후임 게르마니아 전선 사령관에 임명했고, 그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업적을 본받고, 아르미니우스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고자 했다. 특히, 그는 자신과 아버지로 대표되는 카이사르 일가를 지지하는 군대의 사기를 회복하고자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티베리우스가 즉위했다. 그런데 새황제 즉위 후,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군단병들이 티베리우스를 상대로 항명성 반란을 일으켰다. 항명 주동자들은 서로 교감을 통해 합동으로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요구는 모두 동일했다. 왜냐하면 항명 원인은 양쪽 모두 군단병들의 형편없는 급여, 장기복무 그리고 로마군 내에서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구타와 학대가 일상적인 기강잡기라는 명목으로 방치됐던 일이 복합적으로 터지면서 거론됐기 때문이다. 이때 젊은 게르마니쿠스는 원로원의 결의에 따라 게르마니아 지방의 레누스 일대로 파견됐는데, 이성을 잃어버린 레누스 일대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그는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복합적인 이유로 항명을 저지른 군단병들에게 통하지 않아, 게르마니쿠스가 연극을 꾸며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방식을 사용해 여론을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 역시 완벽하게 먹혀들지 않아, 게르마니쿠스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약속까지 밝혀야만 했다.

이렇게 병사들에게 충성과 인기를 다시 얻은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4년부터 게르마니아 정복 시도를 재개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이끈 서기 14년부터 16년까지의 게르마니아 전쟁은 총 세 번의 원정으로 진행됐는데, 그는 아버지 드루수스처럼 울창한 숲과 늪지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병력 이동, 물자 수송 문제를 해결코자 해군을 이용했고 원정 내내 군사적 모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아버지 생전 개선군단으로 활약했던 레누스 일대 군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게르마니아를 공격하여 큰 공적을 세웠고,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3개의 군기 가운데 2개를 되찾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서기 41년 초, 게르마니쿠스가 전선 사령관에 임명되기 전부터 아우구스투스와 논의를 통해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를 경계로 한 방어선 등을 결정한 듯 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계속되는 전쟁이 제국의 제한적인 인력을 소모시키고 인적, 물적 부담까지 있다고 판단했던 듯 하다. 이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이 문제를 언급하며 가진 비밀회담을 통해서도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전공이 확실해지자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를 경계로 한 게르마니아 방어선을 확정짓고 게르마니쿠스에게 개선식의 영예를 안긴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수도 로마에서 개선식을 올렸는데, 이 행사는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쥐고 난 이후 열린 개선식 중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제국 동방으로 파견했는데, 게르마니쿠스가 대강 마무리 지은 서방에는 그의 파트너인 소 드루수스를 파견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으로 떠나기 전, 백부이자 양부인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공동으로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오락 경기들을 주최했다. 이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주최한 대회들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임하며 민중들과 함께 했고, 그 열기와 지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소 드루수스와 함께 일반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두 사람의 인기는 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라는 점에서 크게 높아졌다. 따라서 로마 사람들은 두 사람을 신화 속의 쌍둥이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에 빗대 찬사를 보냈는데,[13]

평소 이런 행사 등에 있어 열정을 보이지 않는 티베리우스는 이런 여론에 편승해 아들과 조카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들을 주조해 배포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대한 선전을 강화했다.

게르마니쿠스는 황태자 자격으로 제국 동방의 군 지휘권을 부여받고, 아르메니아 문제와 대 파르티아 정책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때 그는 소아시아로 임지를 옮겨서 카파도키아 등을 병합했고, 아르메니아 문제를 잘 해결하면서 파르티아와의 관계 개선에도 와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새로운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피소는 자신에게 맡겨진 고문 역할을 가지고 사사건건 게르마니쿠스와 충돌했다. 이는 티베리우스의 의도와 다른 결과였다. 피소의 이런 행동들은 단순한 충돌 수준이 아니었고, 게르마니쿠스가 내린 결정과 정책들을 비판하고 뒤엎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피소와 게르마니쿠스의 대결양상은 두 사람의 사이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와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 사이까지 견원지간이어서 젊은 황태자와 총독 겸 고문의 관계 개선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는 19년 초 이집트를 티베리우스의 허락없이 방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로마 최고의 곡창지대인 이집트는 전임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황제 개인영지가 된 이래, 황제와 이집트 장관의 허락없이는 누구라도 입국이 금지된 땅이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이 문제로 티베리우스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리아 총독인 피소가 이 문제를 꼬투리삼아 게르마니쿠스를 비난하고 딴지를 걸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해졌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게르마니쿠스를 평생 인기 있게 했고, 사후에도 오랫동안 추앙받게 한 특유의 인격이 발휘되었다. 게르마니쿠스는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피소가 자신을 대놓고 깎아내리며 누명을 씌우는 상황에서도, 전혀 화내거나 반론하는 일 없이 묵묵히 다 듣고 참으면서 견디는, 그 나이 치고는 믿을 수 없는 인내심을 보였고, 이후에 피소의 지시를 바로잡을망정 절대로 면전에서도 그렇고 피소가 없는 자리에서도 그를 욕하지 않았다. 이러니 피소에 대한 여론은 더욱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평가만 올라갔으며, 이는 피소가 더욱 더 그를 미워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때문에 결국 피소가 항명성으로 상관 게르마니쿠스를 떠나버리는 사상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현대인 입장에서 보기에도 그 나이와 입장에 비해선 불가사의해보일 정도로, 높이 갈고 닦은 인격과 자제심이었다.

2.4. 사망[편집]

피소 부부가 떠난 직후, 게르마니쿠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심각한 두통과 고열을 호소한 뒤 쓰러졌고, AD 19년 10월 10일 안티오키아에서 열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당시 건강하던 게르마니쿠스가 급사하자 사람들은 피소가 평소 오리엔트 주술 등에 관심있어 하던 자기 아내 플랑키나를 시켜 그를 독살했다고 생각했다.

3. 게르마니쿠스 신화[편집]

게르마니쿠스는 소아시아에서도 바른 행동과 겸손한 처신으로 뭇사람의 인기를 끌어모았으며, 이 점이 파르티아 왕실에도 깊은 인상을 주어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파르티아 왕이 한동안 사냥을 삼가면서 조의를 표했을 정도였다.[14]

인기가 많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놓고 독살설까지 나돌았으나, 현대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설이 대세이다.

게르마니쿠스의 유해는 오늘날 터키 남부에 위치한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로마로 향했다. 이때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와 여동생 리빌라의 남편이자 평소 그와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가 좋던 양형제 소 드루수스가 임지 일리리쿰에서 로마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테라치나까지 미리 마중나와 게르마니쿠스 가족들을 정중히 맞이하며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때 티베리우스가 보낸 원로원 의원들과 집정관 등 국가 대표들도 이들과 함께 대 아그리피나와 그 자녀들을 위로했으며, 운구 행렬을 따라 로마로 귀환했다. 게르마니쿠스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진행됐으며 이는 고인의 동생이자 매제이며 친사촌형제인 소 드루수스가 참석해 직접 추도사를 읽고 고인을 추모했다. 아울러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의 보호자가 됨과 동시에, 성년식을 치룬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공식 후견인이 되었다.

당시 민간에서 떠돌던 독살설 배후에는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있다고 주장되는데, 오늘날에는 설득력이 굉장히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동생의 아들이며 친조카, 양자이자 후계자인 게르마니쿠스를 아끼고 있었다. 또한 이 당시는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 같은 주변 인물을 이용해 공포 정치를 펴던 시절도 아니었다. 친할머니 리비아 역시 친손자를 독살할 이유가 없었다. 리비아는 결점 없는 친손자 게르마니쿠스를 굉장히 아끼고 있었고, 굳이 견제할 이유도 없었다. 당시 아들 티베리우스와 대립 중이던 상황에서 리비아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차기 황제로 정해버린 게르마니쿠스는 오히려 빨리 요절하면 안 되는 카드였다. 더해서 리비아는 남편 아우구스투스와 차남 드루수스가 살아있던 당시, 자신의 친아들 중 한명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집착했던 사람으로 매우 유명했다.[15]

하지만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당시,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던 민중은 원래부터 거만하고 차가운 티베리우스에 대한 반감[16]

과 티베리우스의 긴축 정책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시켜서 조카를 죽였다”며 반감을 표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로마 원로원은 시리아 총독인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이라는 중죄로 고발했는데, 워낙 증거가 넘쳐난 까닭에 재판에서 유죄를 확정받았다. 재판 내내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이자 고발인으로 재판에 매일 출석한 티베리우스는 피소의 죄목에 대해 날카롭게 공격을 퍼부었고, 게르마니쿠스의 친구 비텔리우스[17]

등은 열변을 토하며 피소의 만행을 폭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 독살 음모의 주범으로까지 몰리자 송환을 압둔 피소는 재판 결과가 내려진 당일 압박감에 못 이겨 스스로 목을 자르는 방법으로 자살해버렸다.

이때 피소 부부와 함께 독살설의 주범으로 의심받던 티베리우스는 평소 성격처럼 민중들에게 적극 해명하지도 않았고, 원로원에서는 죽은 후계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음에도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쓰러진 소 안토니아와 리비아를 병간호하기 위해 참석하지 못했다. 이를 변명으로 치부한 민중들은 잔정없고 차가운 티베리우스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불참 사유를 믿지 않았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게르마니쿠스 장례식 불참은 본인 스스로 일을 크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쓰레기를 신들의 제단에 쳐박거나 혹은 아예 쳐부수어 그를 죽인 운명에 대한 분노를 애꿎게 표출하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또한 남편의 독살설을 믿고 있었어도 지나가는 소문 정도로 생각하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는 이때부터 티베리우스가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해 반티베리우스 연합을 만들어 티베리우스와 집안팎에서 대립했다.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이렇게 시작돼, 그의 아내와 두 아들 및 며느리 등이 티베리우스 치세 도중 비극 속에 사망하면서 완성됐다. 그리고 이는 살아남은 막내아들 칼리굴라가 즉위할 때 절정에 이르렀다. 4년만에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쿠스의 측근 출신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에게 암살된 이후 그 직계가 끝나게 됐지만, 민중들 사이에서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경모의 염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드루수스의 살아남은 아들로 칼리굴라 암살 직후, 게르마니쿠스 신화를 선전 전략으로 삼아 제정을 공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사후, 네로 시대에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여전했고 강력했는데, 게르마니쿠스의 살아남은 유일한 딸 소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와 권신 세네카, 부루스와 권력투쟁을 하면서 이를 적극 활용했다. 그리고 이 후광은 클라우디우스의 아들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조카가 되는 브리타니쿠스가 대중들에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일한 직계손, 게르마니아 정복자 드루수스의 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조카"라는 이름으로 공식석상 데뷔를 하면서 네로 내각이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절정을 찍게 된다. 그러나 소 아그리피나의 게르마니쿠스 신화 활용은 오히려 그녀와 브리타니쿠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모두 네로 손에 살해당하는 비극으로 연결됐다. 네로가 몰락할 당시에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반기를 든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와 그를 제압한 레누스 일대 병사들에게 다시 회자됐다고 한다. 따라서 네로가 국가의 적으로 탄핵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는 그가 생전 활약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여전히 살아남았다. 실제로 최소한 기원후 3세기까지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라인 강과 오늘날의 서독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일대 주둔 군단들과 도시들에서는 계속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아버지 드루수스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4. 가족[편집]

외외종조부이자 아내의 외조부인 아우구스투스가 짜놓은 복잡한 친인척 구도 탓에 상당히 복잡한 가족 관계 구성을 가지고 있다. 외동딸 율리아 외에는 자녀가 없던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18]

의 두 아들, 친누나 옥타비아[19]

의 자녀들과 외손주들, 외동딸 율리아의 자녀들간의 결혼, 입양 등을 통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만들어냈다.

이런 까닭에 게르마니쿠스 역시 일찍부터 몇몇 인물들과는 가족관계가 상당히 복잡하게 됐다. 2살 아래인 사촌동생 소(小) 드루수스가 이런 가족관계의 대표적인 예인데,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에 따라 두 사람은 성년식을 마친 직후 모두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면서 혈연적으로는 사촌형제이지만 법적으로 입양형제가 됐고, 소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와 결혼해 형님과 매제 사이가 됐다.

  • 아버지 대(大) 드루수스(친아버지) / 티베리우스(큰아버지, 양부)
  • 어머니 소(小) 안토니아
  • 배우자 대(大) 아그리피나
  • 동생 리빌라, 클라우디우스(친형제자매) / 소(小) 드루수스(사촌동생, 입양동생, 매제)

아내 대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얻었는데, 이중 3남 3녀만 성인으로 성장했고 두 아들 중 셋째아들은 유년기때, 넷째아들은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 요절했다. 추가로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대개의 로마인들이 그렇듯 본래의 가문에서 자신의 조상들이 많이 쓰는 이름을 지어줬다. 따라서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답게 율리우스 가문에서 많이 사용한 루키우스라는 가문에서 꺼렸던 이름을 아들에게 븥여주지 않은 반면, 조상 대대로 많이 사용한 프라이노멘이나 씨족 분파성씨(코그노멘)을 아들의 프라이노멘으로 지어줬다. 그래서 그는 첫아이이자 자신의 장남에겐 본가의 코그노멘이자 아버지의 이름 중 하나인 네로를 붙여주고, 두번째 아이인 차남에게는 아버지의 이름 중 드루수스를 지어줬다. 그리고 유년기에 요절한 삼남에게는 큰아버지의 개인이름이자 친할아버지의 이름을, 막내아들에게는 클라우디우스 네로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의 프라이노멘이자 율리우스 가에서도 많이 사용한 가이우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정했다. 또 그는 세 딸에게도 자신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의 이름을 나눠 지어줬는데 대개의 경우처럼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사용한 이름이자 본인의 가문 율리우스의 여성형 이름을 세 딸에게 모두 지어줬다.

  • 아들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이그노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20], 가이우스(칼리굴라)
  • 딸 소(小) 아그라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비아

5. 평가[편집]

로마인들로부터 전쟁 영웅 그 이상으로 평가받은 사람이다. 공화정, 제정 시대 전후 로마인 중 로마 민중들과 군인 모두에게 높은 도덕성과 육체적, 정신적인 측면 모두에서 "가장 이상적인 로마인"으로 찬사를 받은 아이돌이자 영웅이었다. 이는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인 이유 때문에 벌어진 우상화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생전 인품과 재능, 그리고 게르마니아 전쟁, 오리엔트 일대에서 보여준 헌신, 열정, 고결, 상호존중 등이 당대 로마인들과 속주민, 해방노예와 노예, 심지어 레반트 일대와 아르메니아 등 동맹국, 적국 파르티아에게 모두 찬사받은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르마니쿠스의 성격은 로마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덕목을 모두 충족하는데, 그 개인의 인격과 성격도 흠잡을 데 없었지만 그가 한 일들이 봉사와 헌신이라는 점에서 로마인들에게 매우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봉사와 헌신은 공공과 국가(Res Publica)에 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개인의 이익보다 부모, 가족, 씨족, 신들을 위하는 일을 가리키는 신실함(Piety)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는데 로마인들은 이것을 매우 중시했다. 게다가 그의 커리어는 로마인들이 공공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성공적 군 경력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한마디로 그 어떤 면에서든 로마인의 이상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고, 상식이 있는 로마인이라면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게르마니쿠스의 신화는 대중에게는 음험한 인물로 비친 티베리우스나 그와 다투다 그를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은 총독 피소 등 악역을 맡은 인물이 있었기에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게르마니쿠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았던 제정시대 대표적인 공화정회귀주의자 타키투스 등 지식인들에게도 "동시대 어떤 로마인들보다 도덕적, 신체적으로 위대하고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았다. 특히,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쿠스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젊은 정복군주 이상으로 숭배된, 알렉산드로스 3세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이 평가는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후세 로마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데, 분명한 것은 게르마니쿠스가 인성 면에서는 친족들과 친구들을 죽였을 정도로 잔인성도 보여준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압도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고,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도 전통적인 로마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기 때문에 타키투스같은 안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엘리트들에게 공적인 삶, 사적인 삶 모두 찬사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태도는 타키투스 이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자체를 혐오한 수에토니우스 역시 비슷했다. 이때 그는 칼리굴라에 대해서는 근거없는 온갖 소문과 악담을 뇌피셜까지 만들어 써 놓으면서도, 게르마니쿠스에 대해서는 그가 해줄 수 있는 찬사를 모두 적을 정도로 게르마니쿠스를 높게 평가했다.

이런 후세의 평가 외에도 이탈리아와 그가 생전 자랐거나 활약한 갈리아, 게르마니아 일대에서의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평가는 당대부터 절대적이었고, 그 파급력은 자발적이고 대단했다. 특히,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의 무대가 된 오늘날의 라인 강 서쪽 일대에서의 평가는 찬사 그 자체였는데, 그 위상도 엄청났다. 그래서 대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부자를 위해 게르마니아의 라인 강 일대에서는 최소 3세기 후반까지도 소속 병사들과 퇴역병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이들 부자를 기리는 제사를 치렀고, 두 사람의 인간됨과 업적을 기리는 책은 꾸준히 읽혔으며 이들 부자를 기리는 탑을 한 바퀴 도는 기념식이 매년 개최됐다.[21]

그러나 로마인들이 평했듯 게르마니쿠스는 뛰어난 정신과 육체를 갖고 있던 로마인들이 말하는 고결한 로마의 아이돌이었어도, 그 역시 결점이 전혀 없던 황태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타키투스 등 로마지식인들이 말했듯 고결하고 따뜻한 성품의 능력이 뛰어난 차기황제이자 장군, 외교관, 행정가이지만 게르마니쿠스 신화의 근간에는 큰아버지 티베리우스 시대에 대한 불만과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에 더 돋보였다. 따라서 수에토니우스를 제외한 다른 로마 지식인들은 게르마니쿠스를 뛰어난 장군이며, 사생활적으로는 뚜렷한 결점이 확실히 없던 도덕적인 로마인이라고 말했음에도, 과거 로마의 위대한 장군들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이상의 장군 또는 압도적인 군공을 세운 전쟁영웅으로는 찬양하진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타키투스와 동시대 사람으로 학자이며 장군 프론티누스의 《전술에 대하여》에서, 게르마니쿠스는 여러 그리스-로마 장군 중 그 전술의 특별함이 기술되지 않은 로마 장군이었다. 따라서 인품과 정치가, 행정가, 외교가로서 재능이 훌륭하고 군사적 재능이 있음에도 그가 타키투스의 극찬처럼 전술까지 뛰어났던 장군이라고 고평가하면 안 된다.

6. 여담[편집]

  • 선남 선녀였던 친부모와 젊은 시절 미녀로 유명한 할머니, 외할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아서 키가 컸으며 굉장한 미남이었다.[22] 또 그의 성격과 인품은 아버지 대 드루수스를 그대로 빼닮아서 어릴 때부터 인기가 상당했고 그를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말들은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뒤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나오면서 나온 말이 아니었고,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어린 시절부터 쾌활하고 낙천적이었으며, 상대를 잘 배려하는 성격인데다 신분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차별을 두지 않고 진심으로 예의바르게 대하는 등 전체적으로 매력이 상당했다. 또한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장남으로서의 책임감도 상당해, 죽기 전까지도 홀어머니 안토니아의 자랑이었으며, 몸이 불편해 가족 대부분과 귀족 또래들에게 놀림당하고 구박받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의 몇 안되는 보호자이자 친구이며 아버지같은 버팀목이었다고 한다.[23]

  •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게르마니쿠스는 의외로 새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몰라도 게르마니쿠스는 상당히 닭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닭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무서워했고, 닭 울음소리 역시 무서워하고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마니쿠스는 젊은 시절 군 경력을 쌓는 중에 틈틈히 새들의 비행과 그 패턴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신의 뜻을 이해해 전투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그는 이디스타비소 전투 당시, 독수리 8마리가 숲 위를 날아가자 부하들에게 “이는 신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뜻이다”라고 말해 사기를 끌어 올렸다.

  •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에서 게르마니쿠스를 단순한 치기 어린 열정맨으로 치부하며 저평가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시오노에게 저평가받을 정도로 열정에만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 사가들로부터도 게르마니쿠스 신화로 알려진 사후 이미지 이상으로 한 개인의 역량이나 평가가 아주 좋았고, 인품이나 그 매력은 오늘날에도 "고결하다"고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먼저 장군으로서 게르마니쿠스는 분명히 천재는 아니었어도, 로마군을 이끈 사령관들 사이에서는 분명 유능한 군사적인 역량이 있었다. 특히,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대 드루수스의 후광 효과, 본인의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더라도 과거 스키피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이 한 개인으로서 묘하게 부하들을 매료시키는 재주가 탁월해 자연스레 일개 병사들까지 따를 정도로 매력도 상당했다. 또 장군이나 정치가의 자질에서 꼭 필요한 카리스마와 추진력, 협상 능력이 탁월했고, 문제의 핵심을 제 힘으로 파악해 해결하는 재능도 유능했다. 혈통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매사 공평무사에 적재적소가 신조였던 티베리우스가 그저 게르마니쿠스에게서 군공 세울 기회를 앗아가서 엿먹이려고[24][25] 그를 대파르티아 전선에 외교 임무를 맡도록 보내고, 또 군통수권까지 모두 부여한 게 결코 아니다. 즉, 그는 사후 고평가받긴 했다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로마군을 이끈 사령관으로는 두루 유능했고, 결단코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본인의 재능을 드높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 제국 동방으로 파견되기 전인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부터 심리전 활용과 외교전술 활용에도 상당한 재주가 있었다. 게르마니아 전쟁 중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는 날아가는 독수리 등을 이용해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승리하기도 했고,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큰 상처를 준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도 게르마니쿠스의 순간적인 기지와 심리전으로 로마군이 매복공격 등으로 고전하다가 위기를 넘기거나, 패배의 순간에 승리를 거둔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게르마니아 전쟁 기간동안 아르미니우스의 친동생 플라부스[26]는 로마군 장교였고, 로마군 사령관 게르마니쿠스의 부장 중 한명이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전투 전에 의도적으로 로마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부장 플라부스를 아르미니우스 앞에 내보내 서로 설전을 벌이게 해 양 군대 앞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망신시키기도 했다. 플라부스는 전투 전 의도적으로 자신을 내보낸 게르마니쿠스의 뜻을 알아차리고 형과 말싸움을 벌였는데, 플라부스는 칼을 내밀고 자신의 손을 뻗은 뒤 아르미니우스의 아들과 아내가 그의 주장과 달리 행복하게 로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숨기고 싶어 했던 아르미니우스를 도발했고, 그의 평정심을 흐트려 놓았다.

  • 로마인들에게 단순히 사랑을 받은 사람 이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랫동안 복무하면서 명성을 떨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는 주둔 군단병, 퇴역병 및 그 가족들에게 그 인기가 사후에도 엄청났다. 따라서 황제나 원로원, 로마 정부 차원에서 먼저 요청하지 않았어도 이곳에서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은 무려 300여년이나 계속됐고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를 위한 제사, 기념식은 연례행사처럼 계속 되었다.

  •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도 등장한다. 작중 주변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당하는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가족들중 유일하게 생각해주는 형이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조차 무시하는 자기 동생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무시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암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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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그노투스(Ignotus)라고도 부르는데, 아주 어릴 때 사망했다고 한다.[2]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 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가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이 이름들은 아내 아그리피나의 오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삼남 칼리굴라의 이름이다.[3] 당시 로마인들은 대개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이나 가족의 이름을 그대로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게르마니쿠스와 친동생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본명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경우 할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에 아버지 드루수스가 공적으로 얻은 게르마니쿠스만 더해진 이름이다.[4] 모친 리비아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할 당시 임신 중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일 것이라고 수군거렸다.[5]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지만 얼마 안 가 홀로 된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를 자신의 양손자이자 티베리우스의 외아들인 그와 결혼시켰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복잡한 입양관계를 통해 사촌동생이자 매제인 그와 형제관계가 되었다.[6] 정확히는 다섯 아들 중 막내아들이다.[7] 꼬마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어머니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아버지의 토가 자락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8] 당시 로마 상류층 귀족들이나 황실 여성들은 살면서 평균 3번 정도 결혼했으며, 자녀를 낳은 경험이 있는 젊은 상류층 부인들은 재혼상대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아우구스투스도 조카딸인 소 안토니아(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재혼을 명령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부언니들과 달리 자녀들을 홀로 키우겠다면서 모두 거절한 채 70대의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자녀들과 손주들을 키우며 홀로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이부언니들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경우, 각각 2번, 3번의 결혼을 했다.[9] 보통 로마 귀족이나 상류층 남성 중 공직 생활을 하게 된 남성치고는 빨리 결혼하게 된 편이라고 한다. 이 당시 보통 게르마니쿠스 또래 상류층 남성의 경우, 10대 중후반 결혼하는 상류층 여성들과 달리 평균적으로 20대 중후반에 결혼했다.[10]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와 아그리파의 막내 아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인 대 아그리피나의 동생이므로 처남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성년식을 마치고 18세가 되자 그의 매형 게르마니쿠스처럼 명예로운 공직을 경험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포스투무스는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워낙 난폭하고 주변에서도 더이상 통제불가 상태였다. 따라서 할아버지이자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서 이 문제를 건의해 상속권 박탈 및 입양관계 파양 후, 외딴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다가 티베리우스가 승계하기 전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유배지에서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때 맨손임에도 힘이 장사여서 그를 죽이러 온 백부장들이 쉽게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우려대로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포스투무스의 해방노예 클레멘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벌어졌다.[11] 아우구스투스의 이 조치는 과거 카이사르 가문의 두 후계자 가이우스 카아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부여했던 방식과 똑같았다.[12] 게르마니쿠스의 성격과 성품은 아버지 드루수스와 비슷했다. 드루수스는 본래부터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데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매우 사랑했고, 두 사람의 사이도 친부자 관계보다 돈독했다고 한다.[13]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는 사촌동생이자 양형제지간이며,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의 남편이었는데 민중들은 두 사람을 라이벌 정도로 생각했지만 둘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돈독했다.[14] 이는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의 첫 번째 남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비교되는 부분인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방 속주 파견 내내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소란스럽고 오만한 행동으로 인망을 잃고 소란을 벌이다 다툼에 휩싸여 부상을 입고 요절했다.[15] 리비아는 남편의 여자조카 중 소 안토니아를 일찍부터 드루수스의 아내로 점찍고 아우구스투스에게 매일 어필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두 사람이 결혼적령기가 되자마자 리비아의 바램처럼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결혼을 확정짓고 결혼시켰다. 또한 리비아는 이들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결혼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16] 티베리우스는 아부를 굉장히 싫어해서 자신의 가마 주변으로 원로원 의원조차 오지 못하게 했고, 미남임에도 차가운 파란눈과 과묵함 탓에 원로원 내에서도 거만해보인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역시 유아기 때부터 키운 티베리우스의 몇가지 행동은 안 좋아했지만,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티베리우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열심히 변호했다.[17] 네로 사후 황제에 오른 비텔리우스의 아버지.[18] 게르마니쿠스에게는 친할머니이다.[19] 게르마니쿠스의 외할머니이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태생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가까운 남자친족 중 한명이 되며,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는 외외종조부가 된다.[20] 바로 아래 남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통칭 칼리굴라)와 같은 이름이라는 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름을 지어줄 8일 전에 사망해 편의상 이그노투스라고 부른다.[21]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칼리굴라, 친동생 클라우디우스는 게르마니쿠스 후광 효과를 그가 생전 활약한 일대에서 계속 누렸고,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초 이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이 병사들의 자발적인 반란 참가 거부로 인해 지나칠 정도로 싱겁게 끝나는 일도 벌어졌다.[22] 아우구스투스 일가에는 당시에도 미남, 미녀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동시대 사람들 모두에게 굉장한 미남이라고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유명한 미남이었는데, 게르마니쿠스의 친할아버지와 친아버지 드루수스, 백부 티베리우스도 상당한 미남으로 유명했다. 이런 까닭에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 역시 당시 로마인들에게 상당한 미녀로 유명해서 로마의 한 시인은 그녀를 신화 속의 여신이라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또한 장애를 가지고 있던 남동생 클라우디우스도 말을 더듬고 고개가 흔들리는데다 침을 흘리는 결점이 있었음에도 키가 크고 잘생겼다고 한다.[23]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게 클라우디우스를 아끼고 챙기던 또 다른 황실 식구는 아우구스투스였다. 이런 까닭에 클라우디우스는 형과 외외종조부를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다.[24] 타키투스, 그리고 당대의 일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25] 또한 티베리우스의 입장에선 게르마니아에서 군공을 쌓아 지나치게 인기가 높아가는 게르마니쿠스에 대해 어떻게든 조치를 취할 필요도 있었기에,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에서 거둔 전공을 확실히 확립하기 전에 소환할 개연성도 충분했으며 이는 타키투스는 물론이고 이후 역사가들도 거론할 빌미를 주고 만다.[26] 이름인 플라부스에서 알 수 있듯이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형과 마찬가지로 로마군에 입대해 로마 시민권을 따고 에퀴타스에 편입된 사람이지만, 그는 친형 아르미니우스의 편을 들지 않고 로마인으로 살았으며, 로마군 장교로 복무해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렀다.

분류

  • 로마 황족
  • 집정관
  • 군인
  • 기원전 15년 출생
  • 19년 사망
  • 아우구스투스 영묘 안장자
  • 말라리아로 죽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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