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존경하는 인물 - hangugsa jongyeonghaneun inmul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21세기는 새로운 세기(100년)일 뿐 아니라 인류역사상 두 번째 밀레니엄(1000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여는 전환점이다.

「NEWS+」는 지난 1000년을 되돌아보고 다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전문가 10명과 함께 「한국사 1000년을 만든 100인」을 선정했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와 내일을 내다보는 혜안을 배울 수 있다. 한국사를 이끌고 만들어 온 이들 100인의 행적을 통해 최근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한민족이 세계무대에 우뚝 설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기를 기대한다.

♣ 100대 인물 선정에 참여한 전문가(가나다순) ※ 민현구(고려대 교수·조선전기)

※ 서중석(성균관대 교수·현대사)

※ 신용하(서울대 교수·사회학)

※ 이만열(숙명여대 교수·근대)

※ 이태진(서울대 교수·조선후기)

※ 임형택(성균관대 교수·고전문학사)

※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장·미술사)

※ 정창열(한양대 교수·조선후기)

※ 진덕규(이화여대 교수·정치학)

※ 하현강(연세대 교수·고려사)

※예비후보 선정 및 집필=김경택(연세대 박사과정·한국사)

한국사의 과거 1000년은 고려의 민족재통합에 이어 조선왕조를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이 본격적으로 민족공동체를 형성 발전시켜온 중요한 시기였다.

인물 선정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저명학자 10명을 선정위원으로 위촉, 도움을 받았다. 「NEWS+」는 우선 「역사신문」(사계절출 판사 간) 제작을 총괄한 소장연구자 김경택씨(연세대 박사과정·한국사)와 함께 100대 인물에 뽑힐 만한 예비후보 200명을 추렸다.

예비인물군은 지난 1000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그 시대의 경향이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을 망라했다. 선정 위원들에겐 이 명단에서 중요도에 따라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를 매겨주도록 부탁했다.

인물에 대한 평가에선 「민족국가 형성 및 발전에 기여한 정도」를 가장 중요한 선정원칙으로 적용토록 했다. 전문가들의 선정순 위에 가중치를 두어 합산, 최종 순위를 정했다.

관심의 초점 가운데 하나인 1위 인물로는 조선조 제4대 국왕으로 한글창제 등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진 세종대왕이 압도적 점수 로 꼽혔다. 2위에는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들어 왜군을 격퇴한 이순신장군이, 3위에는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 김구선생이 각각 선정됐다.

세종, 이순신, 김구 등이 일반적으로 위인의 대명사로 존경받는다는 점을 볼 때 이들이 상위순위를 차지한 것은 상식적인 선정으로 볼 수 있다. 이어 10위 안에는 정약용 이이 신채호 최영 이승만 박정희 정도전 등이 들었다.

김일성(24위) 박헌영(63위) 등 북한정권 창립 주역들이 일부 포함되긴 했지만, 해당 시대의 형성과 운용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하더 라도 역사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아온 인물들은 거의 선정되지 않았다.

100대 인물을 분야별로 나눠보면 민족운동가가 2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정치가가 19명, 학자 18명, 국왕 9명, 군인과 예술가가 각각 6명, 종교인 5명, 의병장 4명, 문인 3명, 민중운동가와 과학자가 각 2명이었다. 생존 및 활동시기별로는 근현대(1876년 개항이후) 가 37명으로 가장 많았고 조선전기(임진왜란 전) 24명, 조선후기 23명, 고려 16명 순으로 집계됐다.

현재와 가까운 시기의 사람들의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중에는 신사임당이 유일하게 87위에 선 정됐다. 고종 정인보 윤선도 최시형 송시열 김만중 등은 근소한 차이로 100대 인물에 들지 못했다.

이같은 100대 인물들을 활동분야 별로 구분해 소개한다. 요즘같은 어려운 시기를 넘어가는 지혜를 배우는 것은 물론 초중고교생들 이 한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로도 활용될 것을 기대한다.

김차수 기자

◇ 전문가 10인이 뽑은 과거 1000년의 한국 100대 인물
순위 이름 주요업적 분야
1 세종 문물정비로 조선왕조 기틀 마련 국왕
2 이순신 임진란 때 거북선제작 왜군 대파 군인
3 김구 임시정부 주석으로 항일운동 주도 민족운동가
4 정약용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 학자
5 이이 기호학파를 형성한 성리학 거두 정치가
6 신채호 민족사관 역사연구로 독립항쟁 민족운동가
7 최영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 격파 군인
8 이승만 항일투쟁후 초대 대통령 취임 정치가
9 박정희 쿠데타로 집권후 경제개발 추진 정치가
10 정도전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에 기여 정치가
11 이황 성리학의 거장으로 주리론 제창 학자
12 정조 학문 예술 장려로 문예부흥 유도 국왕
13 전봉준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혁명 주도 민중운동가
14 유형원 토지제도 개혁을 제창한 실학자 학자
15 박지원 북학론 선구자로 양반전 등 저술 학자
16 강감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 대파 군인
17 이익 실학자로 신분제도 등 개혁 주장 학자
18 태조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 개창 국왕
19 강감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 대파 군인
20 여운영 해외독립운동 후 건준 결성 정치가
21 안중근 하얼빈에서 이등박문 사살 민족운동가
23 김정희 금석문 연구와 추사체 정립 예술가
24 김일성 북한정권 수립 및 북한체제 고착화 정치가
25 정몽주 조선 건국 반대한 고려말 충신 정치가
26 허준 조선후기 명의로 「동의보감」저술 과학자
27 대원군 고종 대신 섭정하며 쇄국 고집 정치가
28 박은식 한말 언론인으로 항일의식 고취 민족운동가
29 최제우 동학 창시하고 민중운동 주도 종교인
30 조광조 훈구세력과 맞서 개혁정치 추진 정치가
31 문익점 목화씨 들여와 의생활 개선 정치가
32 김종서 북방6진 개척과 고려사절요 편찬 정치가
33 김정호 지도제작에 헌신, 대동여지도 완성 학자
34 정선 독자적 필법의 진경산수화 개척 예술가
35 김홍도 해학 익살의 풍속화 대가 예술가
36 최무선 고려 최초로 화약제조 왜구 격퇴 군인
37 홍경래 평안도에서 민란 주도 민중운동가
38 일연 신화 설화 등 수집 삼국유사 편찬 학자
39 안창호 흥사단 조직 등 독립운동 참여 민족운동가
40 장영실 자격루 측우기 수표 등 기구발명 과학자
41 유성룡 임진왜란 때 전쟁 지휘한 명재상 정치가
42 주시경 한글 연구로 우리말 글 체계화 학자
43 홍대용 청나라 통해 서양과학기술 도입 학자
44 곽재우 임진왜란 때 의병 일으켜 저항 의병장
45 안재홍 신간회 결성해 항일운동 민족운동가
46 채제공 정조를 도와 개혁정책 추진 정치가
47 최한기 천문 지리관련 책 다수 저술 학자
48 최충 고려말 유학 진흥에 진력 학자
49 유길준 개화파 이론가로 서유견문 저술 민족운동가
50 김좌진 북로 군정서 이끌고 청산리대첩 민족운동가
51 손병희 동학3대교주로 3·1운동 민족대표 민족운동가
52 김육 조선후기 재상으로 대동법 실시 정치가
53 의천 고려 불교 통합과 진흥기틀 마련 종교인
54 김성수 「동아일보」설립과 언론 교육운동 민족운동가
55 홍명희 신간회 결성과 소설 「임꺽정」저술 민족운동가
56 문종 고려 중앙집권체제 완성 국왕
57 서재필 「독립신문」발간 등 애국계몽운동 민족운동가
58 송진우 「동아일보」사장으로 언론활동 민족운동가
59 태종 조선의 중앙집권체제 정비 국왕
60 조봉암 조선공산당 가담, 진보당 결성 민족운동가
61 영조 위민정책으로 문예부흥 이룩 국왕
62 허균 양반비판소설 홍길동전 저술 문인
63 박헌영 조선공산당 창설 후 북한 부수상 정치가
64 홍범도 봉오동전투 등 항일의병 투쟁 의병장
65 이동휘 상해임정 국무총리로 망명 투쟁 민족운동가
66 한용운 3.1운동 불교계 대표로 시 저술 민족운동가
67 조소앙 임정 건국강령 마련 등 독립운동 민족운동가
68 조만식 물산장려운동과 3.1운동 주도 민족운동가
69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승병일으켜 저항 종교인
70 지눌 조계종 창시하고 불교진흥 종교인
71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서 일본군 폭사 민족운동가
72 세조 조선 문물제도 정비와 왕권확립 국왕
73 김규식 독립운동과 남북협상 참여 민족운동가
74 서유구 농업기술 토지제도 등 연구 학자
75 안정복 조선 실학자로 동사강목 저술 학자
76 김원봉 의열단 조선의용대 결성 무장투쟁 민족운동가
77 유정 임진왜란 때 승병일으켜 투쟁 종교인
78 이승훈 교육자로 3·1운동 민족대표 참여 민족운동가
79 이제현 고려말 성리학 연구 보급에 기여 학자
80 권율 행주대첩으로 임진왜란 승리 유도 군인
81 유인석 의병일으킨뒤 만주서 독립군 양성 의병장
82 이상재 독립협회 등 항일사회운동 주도 민족운동가
83 서경덕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 학풍 형성 학자
84 광해군 전후복구 주력한 조선 15대 왕 국왕
85 김부식 유교이념에 입각해 삼국사기 저술 학자
86 김두봉 국어학자로 조선독립동맹 결성 민족운동가
87 신사임당 여류 문인 서화가로 작품 다수 예술가
88 성삼문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 학자
89 이항복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로 활약 정치가
90 최익현 의병 일으켜 을사조약에 항거 의병장
91 황희 세종 때 왕권과 신권 조화에 기여 정치가
92 묘청 서경천도 주장하며 반란 주도 정치가
93 공민왕 권문세족 축출 자주적 개혁 단행 국왕
94 이수광 서학 도입하고 지봉유설 저술 학자
95 김홍집 외교통으로 갑오개혁을 이끎 정치가
96 박연 아악 정리와 궁중음악 체계화 예술가
97 이규보 대서사시 동명왕편 등 저술 문인
98 정철 관동별곡 등 가사문학작품 남김 문인
99 장지연 항일논설 시일야방성대곡 집필 민족운동가
100 신윤복 조선후기 풍속화 다수 남김 예술가
◇ 국왕

※ 가로숫자는 종합순위임<예 (1)>

(1) 세종(世宗 1397~1450)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유교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제4대 국왕.

그의 통치 목표는 「위민」(爲民)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또 백성들의 삶을 안정 시키기 위해 조세제도를 합리적으로 운영했고 농업생산을 장려했다. 당시 농사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천제관측과 강우량 측정을 위한 혼천의, 측우기 등 과학기술이 발달한 것도 이런 권농정책의 산물이다. 이와 함께 그는 「삼강행실도」「주자가례」 등을 보급해 사회적으로 유교질서를 내면화하려 했다.

한글창제도 백성들을 유교적으로 교화시키고자 하는 의욕의 산물이었다. 그는 또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각종 문화유산을 정리하여 유교적 문치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세종의 이런 업적은 선왕인 태종이 셋째 아들인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로 뛰어난 그의 천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반영한 것이었다. 14세 기 고려말 이래 사회적 갈등과 변화의 요구를 유교적 질서와 윤리의 확립을 통해 안정시킴으로써 고려와는 다른 새 시대를 열어가 는 역사적 기틀을 마련했다. 이름은 도(도), 자는 원정(元正)

(12) 정조(正祖 1752~1800)

조선 제22대 국왕으로 치열한 당쟁 속에 왕권을 확립하고 민의 지위를 향상시킨 계몽군주.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껴 탕평책을 추진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백성들의 여론을 청취하고 서얼차별의 폐지와 노비해방을 추진하는 등 혁신 적인 개혁정책을 폈다. 또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 속에 각종 서적을 발간하고 학문을 장려해 문화 예술이 크게 발전하는 문예부흥기 를 이루었다. 이름은 산(산), 호는 홍재(弘齋).

(18) 태조(太祖 1335~1408)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을 무찌른 장군이자 조선왕조를 개창한 조선 초대 국왕. 고려말 위화도 회군으로 권 력을 장악하고 1392년 정도전 등 개혁파 사대부 세력과 연합해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해 조선시대를 열었다.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유교적 이상국가를 표방하며 고려말의 여러 폐단를 개혁하는 등 일대 쇄신책을 단행했다. 본명은 이성계(李成桂).

(56) 문종(文宗 1019~1083)

고려 제11대 왕. 고려 전기 제반 문물제도를 정비했으며 불교와 유교를 진흥-발전시키고 미술 공예 등도 장려해 문화전반에 큰 발전을 이룩했다. 송나라와 친선을 도모, 문물교류를 확대해 고려의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이름은 휘 (徽).

(59) 태종(太宗 1367~1422)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그를 도와 조선 건국에 핵심 역할을 한 인물. 두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 지방제도를 정비하 고 국왕이 직접 행정권을 장악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는 등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름은 방원(芳遠).

(61) 영조(英祖 1694~1776)

조선의 제21대 국왕.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쟁의 폐단을 막고자 했으며 신문고를 부활하고 균역법을 실시 해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이는 등 위민정치를 실현했다. 학문을 좋아해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했고 문화-예술을 진흥시켰다. 이름 은 금(昑).

(72) 세조(世祖 1417~1468)

조선 제7대 국왕. 조선왕조의 기틀이 될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고 변방에 성을 쌓는 등 문무제도의 정비에 주력하고 왕권의 확립을 위해 힘썼다. 집권 과정에서 단종, 안평대군 등의 많은 종친과 김종서 성삼문 등 세종 이래의 명신 들을 죽였다. 이름은 유(유).

(84)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조선 제15대 국왕.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돼 전란 수습에 힘썼고 즉위 뒤 대동법 실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등 전후 재건에 나섰으며 명(明) 과 후금(後金)에 대한 양면외교로 전란 방지에 주력했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많은 희생을 초래해 폐위됐다. 이름은 혼 (琿).

(93) 공민왕(恭愍王 1330~1374)

고려 제31대 국왕.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하고 정치적 간섭을 배제했으며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 한편, 친원세력을 숙청하는 등 개혁 정책을 단행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했다. 그림에도 뛰어난 화가여서 「천산대렵도」 등을 그렸다. 이름은 전(전).

◇ 민족­민중운동가

(3) 김구(金九 1876~1949)

항일독립의 성취와 민족분단의 저지에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우리나 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했던 그는 상해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키며 일제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또 그는 해방된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정치협상을 추진하는 등 민족분단의 저지에 최후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가 독립운동 전선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2년 그의 지휘로 윤봉길 의거가 성공하면서부터 다. 이를 계기로 임정은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복군을 조직해 일제와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진보세력과의 대동단 결에 소극적이었고, 해방정국 속에서도 우파 세력의 일각을 이루었다.

민족의 완전한 통일독립을 추구했던 그의 족적은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했던 그의 외침에 서려 있다. 호는 백범(白凡).

(6)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민족주체의식의 확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내외의 적과 끊임없이 싸운 역사가이자 독립투사.

불의와는 타협을 모르는 타고난 선비였던 그는, 한말 이래 일제의 침략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의 타협적인 세력에 대해서도 가차없 는 비판을 가한 민족지성의 사표였다. 상해 임정에서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위임통치 청원을 통박하며 임정을 박차고 나온 일은 유 명하다. 또 나라를 되찾는 길은 민족정신의 확립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역사연구에 몰두해 근대적인 역사관과 역사방법론을 수립하 고 일제의 식민사관을 분쇄할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혁명선언」에서 우리가 세워야 할 나라는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나라」임을 천명한 그의 투 철한 시대정신은 우리사회의 지표가 되고 있다. 호는 단재(丹齋).

(13) 전봉준(全琫準 1854~1895)

근대민족운동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혁명가.

외세의 침략과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했던 19세기 말의 민족적 위기 속에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 아래 농민군을 이끌고 일어나 반 제 반봉건 투쟁의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다. 고부농민들의 항쟁을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시켜 전주성까지 점령했지만 끝내 일본군과 개화파 정부군의 무력 앞에 패배하여 형장의 이슬로 스러졌다. 일명 녹두장군.

(19) 김옥균(金玉均 1851~1894)

한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운동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은 근대화를 추진해 야 한다는 생각에서 박영효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감행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청국과 수구세력의 반격으로 삼일천하로 막 을 내렸다. 그가 추구했던 근대화는 소수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의 힘을 빌어 위로부터 추진하려 했던 것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21)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일제의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애국의사.

을사조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두만강 유역에서 직접 일본군과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을사조약을 강압했던 이토가 1909년 하얼빈에 올 것을 탐지하고 하얼빈 역에서 그를 사살했다. 1910년 여순감옥에서 순국.

(28) 박은식(朴殷植 1859~1926)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한말 「황성신문」과 계몽운동 단체를 통해 민족의식의 계몽에 힘썼고 합병후 중국으로 망명, 독립전쟁 기관으로 신한혁명 단을 조직했으며 1925년 분열된 상해 임정을 수습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또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역사연구에도 매진하여 「한국 통사」「민족운동지혈사」 등을 저술, 민족주의역사학을 발전시켰다. 호는 백암(白巖).

(37) 홍경래(洪景來 1771~1812)

조선후기 평안도 농민전쟁의 지도자. 몰락양반 출신의 지식인으로 세도정권의 전횡과 조선사회의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농민봉기를 일 으켜 한때 평안도 일대를 장악했다. 그는 평안도 일대의 지식인, 부호, 지방관리, 농민들을 규합해 변란을 일으켰으나 농민들의 요구 를 수렴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39)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청년학우회, 흥사단, 수양동우회 등을 조직해 문명개화와 민족정신의 고취에 힘쓴 민족운동 지도자. 우리 민족의 독립은 항일투쟁을 통해서가 아 니라 자본주의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 그래서 민족 모두가 자기 직분에 충실하는 무 실역행의 점진주의를 민족운동 노선으로 채택. 주로 미국과 중국에서 활동했다. 호는 도산(島山).

(44)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임진왜란 때의 유생 출신 의병장. 왜군이 침입해오자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령 합천 창녕 영산 등 여러 고을을 수복했으며 정암진 싸움에서 왜군의 호남진출을 저지했다.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화왕산성에서 왜군을 막았다. 전후 관직에 나갔다가 정치 가 어지러워지자 다시 낙향했다. 홍의를 입고 싸워서 「홍의장군」으로 불렸다.

(45) 안재홍(安在鴻 1892~1965)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연합전선을 위해 분투한 민족운동가이자 정치가. 일제하에 조선일보 주필, 사장으로 좌우익세력의 단결에 의한 신간회 결 성과 활동에 노력했다. 해방후 국민당을 조직하여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이념 아래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다. 또 신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는 등 역사연구에 몰두한 사학자이기도 했다. 호는 민세(民世).

(49) 유길준(兪吉濬 1856~1914)

한말의 개화운동가이자 정치가. 갑오개혁의 근대화정책을 입안한 핵심인물로 지주, 부르주아에 의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일찍이 일본 및 미국에 유학,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귀국후 서양사정을 소개하는 「서유견문」을 써서 개화를 역설했다. 아관파천이 일 어나자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 귀국했으나 그 이후엔 일제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50)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만주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 독립군 양성에 힘써온 그는 1920년 홍범도부대와 연합한 2000여 병력으로 항 공기까지 동원한 2만여명의 일본 정규군을 맞아 6일간의 격전 끝에 대승리를 거뒀다. 그뒤 독립운동기관인 신민부와 한족연합회 등을 통해 항일역량 강화에 힘쓰다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피살당했다.

(51) 손병희(孫秉熙 1861~1921)

3·1독립선언을 이끈 천도교 지도자. 1차세계대전 이후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맞아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던 그는 최린에게 독립선언의 준비작 업을 지시, 각계 인사 33인이 연합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토록 지도했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한 천도교 교주.

(54)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일제하 민족의식의 발전에 힘쓴 민족운동가이자 정치가. 1919년 경성방직을, 1920년에는 동아일보 등을 설립해 민족자본과 민족언론을 육성했고,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을 세워 인재양성에도 앞장섰다. 해방후 한민당을 창당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앞장섰고 제2대 부통령에 당 선됐으나 이승만의 독재에 반발해 사임했다. 호는 인촌(仁村).

(55) 홍명희(洪命熹 1888~?)

한일합병 때 순국한 홍범식의 아들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자. 좌우합작을 추구하여 신간회 탄생에 산파역을 했고, 근대문학의 큰 봉우리 인 「임꺽정」을 지었다. 해방후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협상에 참여했고 북한에서 부수상을 지냈다. 호는 벽초(碧初).

(6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포수 출신의 의병장이자 봉오동-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1907년 차도선 등과 포수-농민들을 모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을 격파하고 만주로 망명, 대한독립군 총사령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차례로 섬멸했다.

(65)이동휘(李東輝 1873~1928)

무관 출신으로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독립운동가. 합병후 연해주로 망명해 한국인 최초로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상해임정의 국무총리가 됐으나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임정에서 탈퇴,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지도하여 민족혁명의 무장투쟁을 추구하다 병사했다.

(66)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승려로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3·1운동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했고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청년운동을 벌였다. 신간회에도 참여했던 그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해 뜨거운 민족애를 서정적으로 노래했다. 일제말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저항했다.

(67) 조소앙(趙素昻 1887~?)

삼균주의를 제창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임정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독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를 제창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기반을 마련했다.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남북정치협상에 참여했고 2대 국회에 진출했으나 6·25때 납북됐다.

(68) 조만식(曺晩植 1882~?)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 오산학교에서 오랫동안 민족교육에 헌신했고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평양지역에서 물산장려운동과 민립 대학설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신간회에도 참여했다. 해방후 북한에서 조선민주당을 결성,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71) 윤봉길(尹奉吉 1908~1932)

민족해방을 위해 일신을 초개같이 내던진 독립운동가.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요인들을 폭사시켜 한민족의 독립혼을 드날렸고, 사분오 열된 독립전선이 단결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부터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중국정부의 후원을 받아 활발해졌다.

(73)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민족의 통일단결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탄원서를 제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임시정부의 요직을 맡았던 그는 해방후 좌우합작운동과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협상에 온 힘을 기울였다. 6·25때 납북.

(76) 김원봉(金元鳳 1898~?)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에 대한 테러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엔 후반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 민족혁명당과 조선의 용대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폈다. 해방후 민전 의장을 지내고, 민족분단을 반대해 남북정치협상에 참여한 뒤 북한에서 활동했다.

(78) 이승훈(李昇薰 1864~1930)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유기상으로 큰 재산을 모았던 그는 민족교육을 위해 오산학교를 세웠다.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3·1운동에는 민족대표로 활약했다.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81) 유인석(柳麟錫 1842~1915)

한말의 성리학자로 서양문물과 일제침략에 철저히 저항했던 의병장. 1876년 개항에 반대해 유생들을 이끌고 반대상소를 올렸고, 민비시해와 단발령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연해주에서 13도의군 총재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결사보국의 포고문을 발포했다.

(82) 이상재(李商在 1850~1927)

한말 일제하의 민족운동가. 독립협회운동을 주도하다 투옥,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기독교청년운동에 헌신.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YMCA)를 조직해 청년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1920년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했으며 신간회의 초대 회장에도 추대됐다.

(86) 김두봉(金枓奉 1889~?)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주시경 밑에서 한글연구를 했던 국어학자로 3·1운동후 망명해 상해임정에 참여했고, 1942년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에 추대됐다. 해방후 북한에서 활동, 북로당 중앙위원장으로 남북정치협상에 나섰고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90)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외세 침략에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일관한 한말의 유학자이자 의병장. 이항로의 제자로 개항을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단발령에도 반대하 다 투옥됐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돼 유배지 대마도에서 단식끝에 아사했다. 호는 면암(勉庵).

(99) 장지연(張志淵 1864~1921)

한말의 언론인이자 계몽운동가. 「황성신문」의 주필과 사장으로 민중계몽을 위한 논설을 집필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해 전민족의 울분을 격동시켰다. 대한자강회에 참여했고 한때 연해주에서 「해조신문」의 주필이 되기도 했다.

(57)서재필(徐載弼·1866~1951)

한말의 계몽운동가.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 그곳에 귀화해 의사가 됐다. 1896년 귀국해서 독립신문을 발 간하고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해 민중계몽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5년에는 범태평양회의에 참석, 한국의 실 정을 널리 알렸다.

(58)송진우(宋鎭禹·1889~1945)

민족운동가이자 정치가. 3·1운동 준비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이후 동아일보 사장, 고문 등으로 민족언론을 이끌었 고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기성운동 등 민족주의 운동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해방후 한민당을 결성해 수석총무로 정치활동에 나섰으나 암살당했다.

◇ 학자

(4)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후기 실학을 근대사회를 향한 개혁사상으로 집대성한 조선시대 최대의 개혁사상가. 그는 무너져 내리는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들과 그 속에서 새롭게 싹트는 시대적 요구를 통찰하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조선사회의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은 신분 제도 철폐에 의한 평등사회 실현과 지주제도 개혁에 의한 농민층 육성에 있었다. 이는 시대적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에 대한 방향과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조선사회가 자생적으로 근대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 다. 남인계열의 학자인 그는 이익(李瀷)을 사숙함으로써 실학의 학풍을 배웠으며 관료로서 정조의 개혁정치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노론세력으로부터 천주교도로 몰려 강진에 유배되었고, 18년 동안의 유배생활 속에서 자신의 개혁사상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호는 다산(茶山).

(11)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킨 대학자. 그의 성리학의 핵심은 이(理)의 역할을 보다 풍부하게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주리론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원리적 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추구했던 그는 이(理)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하는 최종적 본체로 규정했다. 이런 그의 사상은 영 남학파의 이론적 토대가 되어 영남과 기호 남인 실학자들의 철학적 바탕이 됐고, 일본 주자학의 성립에도 큰영향을 미쳤다. 호는 퇴계(退溪).

(14)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조선후기 실학자.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동요하는 조선사회를 농민층의 안정을 위해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한 개혁사상가. 그의 개혁사상은 국가의 세금, 과거, 교육, 군사, 신분제도 등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으나 핵심은 땅없는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줄 것을 제안한 균전론(均田論)이었다. 그의 사상은 이익, 정약용 등에게 계승-발전되어조선후기 실학의 학풍을 이루었다. 호는 반 계(磻溪).

(15)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양반사회의 허례허식을 통렬하게 풍자하며 조선사회의 개혁을 주창한 실학자. 양반가문 출신이었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분방한 생활을 하 며 고루한 양반들의 세계를 비판하고, 이용후생의 생산발전에 나설 것을 역설했다. 특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멸시하는 고루한 생각 을 버리고 그 우수한 문물을 수용하자는 북학론을 제기했다. 또 신분차별의 철폐와 민생안정을 위한 토지제도의 개혁도 그의 지론 이었다. 호는 연암(燕巖).

(17) 이익(李瀷 1681~1763)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을 크게 일으킨 대학자. 그는 지주들의 토지소유를 제한해 빈한한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족쇄를 철 폐할 것을 주장했다. 요컨대 그의 이상은 수직적인 봉건사회를 수평적인 사회로 전환하려는 것이었다. 또 이중환 안정복 권철신 등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 조선후기 실학이 역사학 지리학 경세론 등으로 폭넓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호는 성호(星湖).

(33) 김정호(金正浩 ?~1864)

평생을 조선의 지도제작에 바친 지리학자. 가난 속에 갖은 역경을 딛고 지도제작에 전념, 조선 팔도 전국 방방곡곡의 지형과 거리를 세밀하게 압축 시킨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조선 지리학계에 가장 큰 유산을 남겼다. 이런 그의 업적은 조선의 수준높은 지도제작 기술을 종합 함으로써 가능했던 것. 1834년의 「청구도」도 그의 작품이다.

(38) 일연(一然 1206~1289)

대선사. 국사의 지위에까지 오른 승려이자 100여권의 저서를 남긴 학자. 그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 고대 역사서의 쌍벽이다. 「삼국유사」는 각종 문집과 금석문 외에 민간설화와 전설까지도 수집하여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를 내세워 축소시켰던 고대사와 불 교사 전통문화를 복원시켜 몽고의 압력에 대항할 민족의 저력을 부각시킨 명저다.

(42) 주시경(周時經 1876~1914)

한글연구로 민족의식 일깨운 국어학자. 「독립신문」을 순한글로 발간해 민중계몽에 노력했고, 말과 글이 나라 독립의 근간이라고 생각해 한글 연구에 몰두하여 1910년 「국어문법」, 1914년 「말의 소리」 등을 지어 한글을 체계화했다. 또 조선광문회에서 국어사전 편찬작업을 시 작했으며 최현배 신명균 권덕규 등 후진을 양성해 조선어학회의 뿌리를 만들었다.

(43) 홍대용(洪大容 1731~1787)

조선후기 실학자의 한사람으로 특히 천문학 등 자연과학에 조예가 깊었다. 청국을 통해 과학지식을 배워 이미 지구 자전을 알고 있었다. 또 노 론 가문 출신이었지만 박지원 박제가 등과 실학사상을 연구, 균전제의 실시를 통한 농민생활의 안정을 주장했고 신분철폐와 학식 과 재능에 따른 직업선택, 교육의 보편화 등 혁신적인 사회개혁론을 제기했다. 호는 담헌(湛軒).

(47) 최한기(崔漢綺 1803~1879)

조선말기의 실학자.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계승-발전시켜 근대적 개화사상으로 연결시킨 인물. 천문 지리 농학 의학 수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박식했으며 서양학문과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외국과 왕래하면서 그 나라의 문물제도를 취사선택해 문명을 이룩해 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특히 상공업의 발전을 역설했다.

(48) 최충(崔沖 984~1068)

고려의 학자이자 재상. 고려의 숭불정책으로 유학이 부진하고 관학인 국자감의 교육이 쇠퇴하자 사학(私學)인 구제학당을 세워 유학 보급과 인재양성에 힘쓴 인물.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이 관직에 진출했다.

유학진흥의 공로로 해동공자로 불렸다. 그는 또 목종 이후 4대에 걸쳐 관직에 올라 서북지방 백성들을 편안케 했으 며 동여진의 국경침입에도 대비했다.

(74) 서유구(徐有구 1764~1845)

정약용과 함께 조선후기 실학계열의 농업개혁론을 대표하는 학자. 몰락농민의 균산과 안정을 위해 국영농장을 설치하자는 둔전론 등 사회전반의 개혁론을 제시했다. 농촌경제에 대한 깊은 연구 끝에 조선 후기 최대의 농서인 「임 원경제지」를 저술했다.

(75)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조선후기 실학자. 특히 역사연구에 치중했던 그의 저술 「동사강목」은 철저한 사실 고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계통을 정통론에 입각해 독자적인 체계로 구성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서 가운데 하나다. 그는 또 점진적인 사회개혁론도 제기했다.

(79) 이제현(李齊賢 1287~1367)

고려말의 정치가이자 성리학자. 백이정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원나라 만권당에서 중국학자들과 교 유하면서 성리학의 대가로 성장, 성리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1344년 충목왕에게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출했다.

(83)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체계를 완성해 조선 성리학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성리학자. 그 는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보고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로 설명했다. 그의 학설은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 향을 미쳤다.

(85)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고려의 유학자이자 정치가. 그는 보수적이고 특권적인 고려 문벌귀족의 대표적 인물로 서경 출신 신진관료들의 서경천도론을 배격하고 묘청의 난을 진압했다. 그는 또 신화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유교적 윤리관과 합리주의에 입각해 고대사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88)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조선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이자 학자.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신숙주 등과 함께 음운연구를 해 한글창제에 큰 공헌을 했다. 그가 죽은후 신원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 숙종17년에 관 작이 회복됐다.

(94) 이수광(李수光 1563~1628)

조선의 학자이자 정치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으며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들여와 처음으로 서학을 소개했다. 또 일종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저술해 사변적인 학문경향을 비판하고 실학적인 학풍을 추구했다. 호는 지봉(芝峰).

◇ 정치가

(5) 이이(李珥 1536~84)

조선 성리학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대학자이자 국가와 사회체제의 일대 개혁을 주장한 정치가. 그는 이황 과 달리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에서 일원론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펴 경험적 현실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수립 했다. 또 이런 철학적 입장하에 과감한 사회개혁론을 전개했다. 그는 16세기 후반 동요하기 시작하는 조선의 국가체제와 사회질서 를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해 새롭게 안정시키려 했으며, 이를 위해 정부기구 간소화와 낭비 근절을 통해 국가재정을 넉넉히 하고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줄여 공평하게 하려 했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 향약을 보급, 유교 윤리와 가치관을 주입시켜 양반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한편 그는 양반사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자 서인편에 섰지만 시시비비를 가려 함께 국사와 민생문제 해결에 힘쓸 것을 강조했 다. 주기적(主氣的)인 그의 사상은 이후 서인, 노론계열에 의해 계승되었다. 호는 율곡(栗谷).

(8) 이승만(李承晩 1875~1965)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후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섰으며 대한민국의 1~3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일찍이 독립협회운 동에 참여했던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다 3·1운동 직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해 물의를 일으켰고, 상해 임정의 대통령에 추대 됐으나 결국 이 문제로 탄핵당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자신의 지론인 외교노선에 의한 독립을 표방하며 미주에서 활동 했다. 해방후 좌우대립 속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선도하며 반공국가 수립에 앞장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통령이 돼 영구집권을 획책하다 4·19혁명으로 망명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자라는 평가와 함께, 독선과 권력욕의 화신으로 민족분단을 초래한 독재자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9) 박정희(朴正熙 1917~79)

낙후된 한국 경제를 크게 성장시킨 장본인이자, 개발독재를 통해 영구집권을 꿈꾼 군인출신 정치가. 5·16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국가권력과 재벌기 업에 의한 경제개발을 추진, 한국사회를 오늘날의 산업사회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특정지역과 특권층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체제 가 형성돼 한국사회의 민주적이고 균형있는 발전에 장애를 초래했다.

또 그는 남북간의 대결구도 속에 1인 영구집권을 노린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일체의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철권통치를 강행했다. 이로 인해 학생층과 지식인을 비롯한 대중의 광범한 저항에 직면했고 결국 핵심측근인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됐다. 일제하에서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했던 그는 해방후 대한민국의 육군장교로 변신했고 한때 사상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최근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10) 정도전(鄭道傳 1337~98)

고려말과 조선초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조선왕조 건국의 일등공신. 그는 고려말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신진 사대부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다. 권문세족의 전횡과 농장확대로 인한 고려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새 왕조의 이념과 제도 의 기틀을 놓았다.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사대부가 「민본」(民本)의 유교이념에 따라 백성을 다스려 국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게 그 의 주장이었다. 이를 위한 기반으로 토지제도의 개혁을 단행했고, 국왕이 수령을 통해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관료체 제의 정비를 역설하여 조선 통치구조의 기본 틀을 정했다. 그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 속에 방석의 편에 섰다 태종이 된 방원에 의 해 숙청됐다. 호는 삼봉(三峰).

(20) 여운형(呂運亨 1885~1947)

민족해방과 통일조국 건설에 매진하다 쓰러진 민족운동의 지도자.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상과 종교의 차이를 떠나 온 겨레가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 패망 즉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건국사업에 나섰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의 대 립을 극복하는 길은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에 있음을 역설하고 이의 실현에 매진하다 흉한의 총탄에 쓰러졌다. 호는 몽양 (夢陽).

(24) 김일성(金日成 1912~94)

항일투사이자 북한을 50년간 통치해온 정치가. 청년기 항일빨치산으로 만주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그는 해방후 북한에 진주하여 북한 정 권을 수립, 50년간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이끌며 분단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70년대 들어 주체사상을 지배이념으로 유일지배 체제를 확립한 그는 북에서는 「어버이 수령」으로 남에서는 「붉은 독재자」로 평가됐다.

(25) 정몽주(鄭夢周 1337~92)

고려 왕조에 충절을 바친 성리학자이자 정치가. 고려말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의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를 도와 공양왕을 옹립하고 권문세가의 전횡을 개혁하는데는 동참했으나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켜 끝내 조선왕조 개창 에는 반대하다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호는 포은(圃隱).

(27)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98)

고종의 생부로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10년 동안 집권하며 안동김씨 세도정치 타파, 탐관오리 척결, 서원 철폐 등 과감한 개혁정치로 조선말의 어지러운 정국을 혁신시킨 정치가. 쇠약해진 왕실의 부흥과 민생 안정이 그의 정책의 핵심. 또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취 해 서양의 침략을 격퇴했으나 서구문물 수용과 근대화에는 장애를 초래했다.

(30)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도학정치를 주장한 정치가. 김굉필에게 성리학을 배운 신진 사림의 대표 인물. 도덕적 이상정치를 꿈꾸며 영남 사림 을 이끌고 정계에 진출, 중종의 총애하에 훈구세력의 비리를 공박하며 중종에게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다 중종 및 훈구세력의 미움을 사 처형됐다. 그의 도학정신은 조선 유학의 기본성격을 생성했다. 호는 정암(靜庵).

(31) 문익점(文益漸 1329~98)

고려말의 학자이자 문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수출금지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했고, 몽고 승려에게 서 씨아와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면포 생산을 가능케 해, 우리민족의 의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문신이던 그는 공양왕 때 개혁파 사대부 세력의 토지제도 개혁에 반대하다 벼슬에서 쫓겨났다.

(32)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조선초 세종 문종 단종 대의 재상. 함길도 절제사로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을 설치, 국경을 두만강 유역까지 넓혔다. 그 공로로 중용되기 시작 해 「세종실록」 편찬의 총재관이 됐고 「고려사절요」의 편찬도 담당했던 문무겸전의 재상이다. 문종으로부터 단종 보호의 유촉을 받 고 그의 왕위를 지키다 두 아들과 함께 수양대군에 의해 주살됐다.

(41)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도체찰사로 임진왜란의 전쟁을 총지휘한 명재상. 이황의 제자인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선조와 함께 의주로 파천했고 도체찰사로 서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 군비 확충에 힘을 기울여 이순신 권율 등 뛰어난 장수들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상비군을 키우 기 위해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병법서인 「기효신서」도 풀이했다.

(46) 채제공(蔡濟恭 1720~99)

정조의 개혁정치를 보필했던 조선 후기의 명재상. 영조 때에는 노론의 공격으로부터 사도세자 보호에 진력했고, 정조가 즉위하자 그를 도와 왕권 강화를 뒷받침했던 남인계의 거두. 노론세력과 시전상인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자유상업을 허용하기 위해 「신해통공」을 실시했 으며 천주교에 대해 온건정책을 취해 박해가 확대되지 않도록 막았다.

(52) 김육(金堉 1580~1658)

현실감각과 개혁정신을 겸비하여 경제정책에 뛰어난 식견을 발휘한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학자. 나라경제의 형편을 감안, 효종의 북벌정책을 반 대하고 대동법 실시를 통한 민생안정을 역설했다. 또 청나라의 수레와 화폐의 이점을 배워 경제를 윤택하게 할 것도 주장했다.

(60) 조봉암(曺奉岩 1898~1959)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정치가. 일제하에서 조선공산당원으로 민족해방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전향,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52년과 56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이승만에 도전했고 대중정당인 진보당을 결성했다가 간첩혐의로 처형됐다.

(63) 박헌영(朴憲永 1900~55)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정치가. 일제하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해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해방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극좌노선에 입각하여 남로당을 이끌었으며 월북해서는 북한정권의 부수상을 지냈으나 6·25 이후 미국의 간첩혐의로 숙청됐다.

(89)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임진왜란 극복에 활약한 조선의 명재상.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했고 명나라에 신속한 구원 요청을 주장했다. 또 병조판서 로 군의 정비에 나서 전란 극복을 이끌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를 반대하다 귀양지에서 병사했다. 호는 백사(白沙).

(91) 황희(黃喜 1363~1452)

세종 재위 중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조선의 명재상. 높은 정치적 식견과 인품으로 조선 건국 초의 험난한 정국 속에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힘썼 고 농민경제의 안정과 국방에 진력했다. 또 청렴하여 청빈한 생활을 마다지 않아 조선조 관리의 모범이 되었다.

(92) 묘청(妙淸 ?~1135)

고려의 승려이자 정치가. 개경 문벌귀족들의 전횡과 금나라에 대한 저자세에 반발, 정지상 백수한 등 서경출신의 신진관료들과 풍수도참설을 활용해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을 주장하다 1134년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 등 개경세력에 의해 진압됐다.

(95) 김홍집(金弘集 1842~96)

한말의 정치가. 개항 이후 외교관계를 담당했던 관료출신으로 갑오개혁 때에는 친일내각의 총리대신으로서 근대화정책을 추진했던 핵심인물. 을미 사변 후 단발령 시행 등 과격한 개혁정책을 실시하다 아관파천으로 실각했고 성난 군중에 의해 살해됐다.

◇ 군인

(2) 이순신(李舜臣 1545~98)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왜적의 침략을 예측하고 전쟁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 전란 초반부터 적 수군 을 궤멸시킴으로써 전쟁을 사실상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고 각종 화포를 정비해 우세한 화력 하에 뛰어난 전법을 구사, 개전 초부터 일본 수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한산도대첩으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고 거제도 서쪽의 제해권을 장악해 전라도지역을 왜적의 침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켰다. 연이은 전공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으나 모함에 휘말려 하옥돼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다 원균의 대패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불과 12척의 전함을 수습해 서해로 진출하려는 적선 200여척을 명량에서 저지함으로써 왜군의 서해진출을 결정적으로 막아 전쟁의 국면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총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맞아 총력전을 펼치던 끝에 진중에서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사후 1643년 충무(忠武) 라는 시호가 추증됐고 1706년 유생들의 발의로 아산에 현충사가 세워졌다. 그는 뛰어난 전공과 함께 일관된 우국충정과 고결한 인격 으로 길이 겨레의 사표가 되고 있다.

(7) 최영(崔瑩 1316~~88)

고려말의 내우외환 속에 외적의 방어에 힘쓰고 고려 왕조의 수호에 진력하다 이성계에 의해 숙청된 고려 최후의 명장. 여러차례의 왜구 토벌로 두각 을 나타낸 그는 공민왕의 반원(反元)정책에 따라 압록강 서쪽지역을 공략해 옛 영토를 회복했고,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자 이를 격퇴해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이어 1363년 김용 일당의 공민왕 시해음모를 분쇄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한때 신돈에 의 해 유배되기도 했으나 그의 실각후 다시 군문에 복귀해 홍산전투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군비를 튼튼히 해 외적 방어에 힘썼다. 1388 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고 북변 일대를 요동으로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추진, 압록강까지 진격토록 했으나 이성계의 위화 도 회군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이성계에 의해 처형됐다.

(16) 강감찬(姜邯贊 948~1031)

거란의 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찌른 고려의 명장. 993년 고려를 침공했던 거란은 서희의 담판으로 물러난 뒤 1011년 조공관계를 요구하며 다시 침공했고 1018년에는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상원수 강감찬은 이들을 맞아 흥화진에서 일대 타격을 가했고 개경을 노리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섬멸시켰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화친관계를 맺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 번영을 구가했다.

(22) 윤관(尹瓘 ?~1111)

고려 중기 여진족을 무찌른 장군이자 재상. 태조의 건국을 도운 삼한공신 윤신달의 자손으로 숙종의 왕권강화 노력을 도운 핵심 측근이다. 그는 1104년 여진 정벌에 실패했으나 별무반이라는 특수부대를 조직, 1107년 동북지역에 진출해 이듬해 여진을 크게 무찌르고 함흥 일대에 9성 을 쌓았다.

(36)최무선(崔茂宣 ?~1395)

고려 말의 장군으로 화약 제조법을 배워 왜구의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인물. 원나라 사람 이원에게서 염초제조법을 배우고 조정에 건의해 화통도감을 설치, 화포 석포 화전 등 각종 화기와 전함을 만들었다. 1380년에는 금강 어귀에서 화포 화통 등을 처음 사용하여 왜구의 배 500 여척을 전멸시키는 등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웠다.

(80) 권율(權慄 1537~99)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거두는 등 군사작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 광주목사였던 그는 전라도 군대를 모아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고 북으로 진 군,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그 뒤 도원수가 돼 전군을 지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 문인·예술가

(23)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학자. 청나라에서 금석학을 접하면서 글씨란 옛 비석의 졸박(拙朴)한 맛이 있어야 한다는 서예론을 수용하고 조선 선비 특유의 문기(文氣)를 가미해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해 조선 서예의 극치를 이루었다.

매화와 난을 치는데도 능했던 경학과 금석학의 대가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자세를 견지했다. 호는 추사(秋史).

(34) 정선(鄭敾 1676~1759)

조선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화가. 중국 산수화를 모방하던 화단의 관행을 깨고 우리 자연을 자신의 눈으로 재구성해 독특한 조선의 아름다 움으로 형상화해낸 진경산수의 대가다.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하고 흑백의 강한 대조를 통한 조화 속에 그 실체가 여실히 드러 나도록 한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그의 화풍의 결정판으로 꼽힌다. 호는 겸재(謙齋).

(35) 김홍도(金弘道 1745~?)

조선 제일의 풍속화가. 조선의 문기(文氣)와 풍토, 정취가 넘치는 독창적인 그림세계를 열어 중국 그림의 모방을 일삼던 조선화단에 새로운 화풍을 일으켰다. 자유로운 예술혼을 타고난 그는 특히 조선 후기 서민들의 약동하는 삶과 정서를 해학과 익살로 형상화시켜 풍속화의 새 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영조와 정조의 어진도 그의 작품이다. 호는 단원(檀園).

(62) 허균(許筠 1569~1618)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문인. 봉건사회의 신분차별과 빈부 격차에 대해 비판의식이 강렬했던 지식인이기도 하다. 그가 지은 「홍길동전」은 그 런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한 한글소설이다. 일찍이 관직에 나갔으나 서얼 출신들과 자주 어울려 국가변란죄로 참수됐다.

(87)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51)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자 서화가. 시 그림 글씨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히 안견의 영향을 받은 그림은 부드럽고 세밀해 조선 제일의 여류화가로 꼽힌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다.

(96) 박연(朴堧 1378~1458)

피리의 명수였던 세종 때의 음악가. 소리를 듣는데도 뛰어났던 그는 편종과 편경을 새로 만드는 등 아악을 정확한 음으로 연주하도록 정리했고, 궁 중음악과 종묘악을 새로 정비해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왕산악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린다.

(97)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린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 그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대 몽 항쟁기에 민족적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었고 그밖에 「동국이상국집」「백운소설」 등도 지었다.

(98) 정철(鄭澈 1536~93)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문인. 강직하고 청렴했으나 동서 붕당의 와중에서 서인으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유배생활을 자주 했다. 그런 생활 속에 문학 적 재능을 발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뛰어난 국문시가를 남겨 우리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00) 신윤복(申潤福 1758~?)

조선 후기의 새로운 시대 풍경을 담아낸 대표적인 풍속화가.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는 달리 가늘고 유연한 필체와 아름다운 색채로 감각 적이고 선정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한량과 기녀들의 연정과 같은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주된 소재로 삼았다.

◇ 과학자

(26) 허준(許浚 ?~1615)

인술(仁術) 실천에 평생을 바친 조선 최고의 한의학자. 임진왜란 후 질병이 만연하자 일반 백성들이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의학서적 보급에 힘썼다. 또 조선사람의 병은 조선 땅에서 나오는 약재로 치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의학 연구에 몰두, 17년만에 「동의보감」을 완성해 조선의 학을 집대성했다. 내의원 어의(御醫)로 왕실 진료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40) 장영실(蔣英實 ?~?)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타고난 재능과 기술로 조선 전기 과학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인물. 1433년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를 완성했고 이듬 해 자동시보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어 표준시간을 운용했다. 이밖에도 각종 해시계를 완성하고 금속활자의 제작 등을 감독했으며 1441년 측우기와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를 완성해 농업발달에 크게 공헌했다.

◇ 종교인

(29) 최제우(崔濟愚 1824~64)

동학의 창시자.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조선 말기의 사회혼란 속에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코자 유교 불교 선교를 통합하여 민족 고유종교인 동학을 창시했다.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교리 하에 양반 상민 구별없는 평등의식을 포교해 상민과 천민 사이에 신도들이 급격히 늘어났 다. 이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그를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경상감영에서 처형했다.

(53) 의천(義天 1055~1101)

천태종을 창시한 고려의 승려. 숙종의 동생으로 송나라에서 화엄과 천태교리를 배운 뒤 교종과 선종을 통합해 천태종을 창시, 숙종의 왕권강화를 뒷받침했다. 국가경제의 강화를 위해 숙종에게 화폐사용도 건의했다. 또 각국에서 불경을 모아 「속장경」을 간행했다.

(69)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조선의 승려이자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에 전국의 승려로 의병을 일으켜 명군과 함께 서울을 탈환했다. 그 뒤 사명당에게 승 병을 맡기고 묘향산에 은거했고 선종과 교종의 통합에 노력했다. 호는 청허(淸虛).

(70) 지눌(知訥 1158~1210)

고려 불교의 혁신과 통합운동을 전개하고 조계종을 개창한 승려. 무신정권하에서 중앙 불교계가 타락하자 이를 비판하며 송광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결 사운동을 전개, 침체된 선(禪)을 부흥시키고 9산 선문을 조계종으로 통합하는 등 불교 개혁에 앞장섰다.

(77) 유정(惟政 1544~1610)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거병, 평양성 탈환작전과 한양 부근의 전투에서 활약했 다. 1604년 일본에 건너가 강화를 맺고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명을 데리고 귀환했다. 호는 사명당(四溟堂).

Toplist

최신 우편물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