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현재 위치 - golindo hyeonjae wichi

그리스지역

고린도  I

바울 당시에 고린도 성읍의 인구는 자유인이 약 250,000명, 노예가 400,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숫자상으로 고린도는 헬라의 중심 도시였다.

  1. 상업 -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의 바로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들과 상인들의 교차로였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었다. (1)하나가 겐그레아로서, 사론 만(Saronic Gulf) 동편 7.2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2)또 하나는 레기움(Lechaiom)으로서, 고린도 만 서편 2.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상품들은 디올코스

(Diolkos) 지협을 통해 운반되었는데, 작은 선박들은 짐을 가득히 실은 채 도로 위로 지협을 가로질러 운반되었으며

(길 위에로 당겨져 옮겨졌음), 큰 선박들의 짐들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수레에 실려 운송되었다.  이탈리아와 서바나

(스페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이송되었으며, 소아시아와 베니게(페니키아)와 애굽

(이집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동쪽으로 이송되었다.

  2. 문화 - 물론 고린도가 아덴(아테네)과 같은 학문적인 도시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는 전형적인

                헬라 문화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 시민들은 헬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3. 종교 - 고린도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신전들이 바울 당시에 모두 사용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 신전들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 중 하나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는데, 이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매음행위를 자행하곤 하였다. 고린도에 있는 극장의 북편으로

                약 400m 쯤에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서 있고, 주전 6세기에는 도시의 중앙에 아폴로 신전이 서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하나의 회당을 세웠는데 글자가 새겨진 회당의 인방 돌이 옛 고린도의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4. 고린도 성의 부도덕성 - 당시 큰 상업 도시가 그러했듯이, 고린도 성읍도 개방적이고 무절제한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더구나 아프로디테 여신의 숭배로 말미암아 매음행위가 종교의 미명하에 더욱 성행되고 있었다. 한때는

                1,000명의 성별된 창녀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린도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성적 부도덕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 교회에 많은 성적인 문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

                                            NIV Study Bible 서론 고린도전서 서론 중에서. 

고린도운하

고린도지역이 중요한 이유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아시아로 항해할 때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에 와서 약  6km의 지협이 가로막고 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이 지협으로 작은 배를 끌어 올려 해협을 지나도록 함으로

무역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베스피안은 68년경 유대인 죄수 6,000명을 네로가 시작한 운하

건설을 지원하려 보냈으나 실패하고 근대(1881-1893)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겐그레아 항구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의 바로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들과 상인들의 교차로였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었다.

(1)하나가 겐그레아로서, 사론 만(Saronic Gulf) 동편 7.2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2)또 하나는 레기움(Lechaiom)으로서,

고린도 만 서편 2.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사역을 끝내고 에베소로 가기 위해 겐그레아에 갔다. 그곳에서 서원이

있어 머리를 잘랐다. 이 곳은 여사역자인 뵈뵈의 고향이기도 하다(롬 16:1).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행 18:18)

고린도 II


그리스의 펠로포네스 해안에 위치한 고린도(북위 35도56분, 경도 22분 56분)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려고 18개월을 머물렀던 도시이다(행 18:1-18)

   가. 지리적 배경

   첫 번째 정착민들은 물이 풍족하고 주변지역에서 우뚝솟아 기름진 평야지대를 감독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 해변에서 203km 떨어진 바위산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번성한 고린도는 해안 평지

       에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지역(Acrocorinth, 575m)까지 두 개의 계단식 평지에 형성되어 4km2정도의 넓이를 가진다.

       이 도시는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오는 지협(地峽)에 의하여 동서로 경계지어진다. 10km의 성벽은  그 가장자리를

       따라 지어져 최적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 의해 단단히 묶여져 있다. 건물이 지어진 지역은 결코

       성벽을 넘어서지 않았고 여분의 공간은 위험 시기에 사람들에게 거주공간과 식량을 제공하였다.

       고린도의 첫 번째 항구는 레기움으로 고린도 시와 그 항구인 레기움을 연결하는 긴 성벽은 전체길이가 2.5km이고 각

       성벽이 1.2km로 평행으로 지어져있다. 인공적으로 바다를 두른 항구(double port)의 넓이는 460,000m2고 부두의 길이는

       7km 이다.  지금은 항구의 아주 일부분이 발굴되어있다(Roux 1958: 103). 고린도의 두 번째 항구는 겐그레아이다. 고린도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론 만에 위치한다. 인공적인 이 항구는 30,000m2정도 되며 큰 건물들이 북쪽 방파제위에 우뚝

       솟아있고 네 개 구역으로 된 저장 창고들은 남쪽의 인공 방파제 안쪽을 따라서 정렬되어있다.

       (Sacraton, Shaw, and Ibrahim 1978: 14, 41).

       이 두 항구를 차지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펠로포네스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6km의 넓은 지협을 실질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고린도를 고대 세계의 중요한 교차로로 만든 것이다(Strabo 8.6.20). 평지 가장자리의 경사지는

       전통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함께 부유함으로 유명하고 또한 동서와 남북 무역을 통한 세금 징수를 통하여 고린도의 금고는

       항상 가득 찼었다. 호머의 시대부터 고린도와 함께 한 수식어는 ‘부유한’이었다. 오늘날 고린도는 고린도 운하의 서쪽 2.4km에

       위치한 고린도만의 펠로포네스 해안의 작은 도시가 되었다. 현 유적지는 1858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대도시의

       남서쪽 5.6km에 위치한 ‘모든 그리스의 빛’이었던 고린도가 지금ㅊ  은 아가야 고린도지방의 가난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나. 발굴역사

        첫 번째 발굴은 독일 고고학 연구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886). 1896년 아테네의 고전 연구의 미국인 학교(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가 그 장소에 대한 책임권을 따내 계속적인 발굴을 이끌었다. 서론적인 연구는 American

        Journal of Archeology 와 Hesperia에 나오고 최종보고는 ‘고린도’(1930-)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부터의 전시대 유물이 나왔다. 고린도 외의 주요 발굴은 지협(1952-60과 다시 1967-1978)과 겐그레아(1963-68)에

        대하여 행해졌다. 협곡에 대한 최종 보고는 겝할드(Gebhard, 1973)와 브로닐(Broneer 1971; 1973)에 의해 출판되었고

        스크란톤(Scranton)과 솨우(Shaw), 이브라힘(Ibrahim)은 겐그레아에 대하여 보고하였다(1978).

   다. 고린도의 역사

        고린도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분은 주전 146년 말까지 온 그리스도시와 줄리아스 시이져(주전44년)에

        의해 설립된 로마식민지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500만년전의 도시의 기원과 그 연속되는 역사에 대하여는 살몬(J. P. Salmon)이 정리하였다(1984). 오랜 세월 고린도는

        변화를 반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변화를 희구하는 뛰어난 경영과 한편으로 예외적으로 다양하고 생산적인 경제 때문에

        색다른 사회적, 정치적인 안정을 누려왔다. 고린도는 유명한 고린도인의 청동제품에 더하여 세라믹과 직물, 조선, 건축술이

        유명하다. 동서 무역의 발전을 위하여 고린도와 사론만(Saronic gulfs)의 연결 운하는 주전 6세기 일찍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효화되었을 때 페리안델(Periander 주전 625-585)은 가벼운 배가 한 쪽 바다에서 포장된 잘린 홈을

        따라 달려서 다른 쪽 승강장으로 잡아당겨 옮겨지도록 하는 해협 포장도로(dilkos)를 만들었다. 해협의 서쪽에서 길이

        460m되는 하나의 부두(dock)가 발굴되었다. 넓이는 3.4에서 6m로 다양하고 그 홈은 별도로 1.5m가 된다. 많은 횟수에

        걸쳐 수선된 이 길은 적어도 주후 9세기까지 상품을 운송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편의시설은 상인들이 ‘말레를 지날 때는

        네 집을 잊어 버리라“고 할만큼 위험하기로 이름난  말레 곶(Cape Maleae) 주위를 항해하는 것을 피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성공은 상대적으로 그들의 위치가 요충지가 아니고 그들이 거주지가 산업적이 아닌 이들의 질투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주전 5-4세기 아테네 작가들은 고린도를 상업화를 사랑하는 상징적인 도시로 언급하였다.

        아리토파네스(Aristophanes)는 ‘간음하다’라는 동사를 가지고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내었다.

        필레타에루스(Philetaerus)와 폴리오쿠스(Polichus)는 고린디안테스(Korinthiates), '매춘부와 노는 사람‘이라는 연극을

        썼다. 플라톤은 매춘부를 의미하는 고린디아 코레(Korinthia Kore), '고린도 소녀’라는 용어를 썼다 (Rest. 404d). 그러나

        이런 신조어들은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실제로 고린도는 그 동시대에 그렇게 나쁘지도 썩 좋지도 않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드려진 도시도 아니었고 1000명의 성스러운 창녀들?에 관한 스트라보

        (Strabo)의 이야기는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Conxelmann 1967).

        와이즈만(1979: 450-62)은 146년 고린도의 멸망으로 이끄는 사건에 대하여 잘 요약하였다. 로마가 두 번째 마게도야

        전쟁 (주전 200-196)후 그리스의 도시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양한 동맹 안에서 연합하는 것까지 허용하였을지라도 후에

        이것은 로마에게 위협이 되었다. 고린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아가야 동맹을 깨고자한 로마의 시도에 대해 아가야 동맹은

        주전 146년 스파르타를 징계하는 전쟁을 함으로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메텔루스(Metellus)가 세 아가야 군대를 패배시킨

        후에 북쪽으로부터 해협으로 도달할 때 그는 사령관이라고 추정되는 루시우스 뭄미누스(Lucis Mummius) 집정관의 퇴각과

        합세 하였다. 아가야의 보루인 고린도는 노예들로부터 징집된 훈련되지 않은 14,000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로마의

        23,000의 보병과 3,500의 기병 그리고 원군에 대항하여야 했다. 전쟁결과는 예상되는 대로였다.

        도시의 전리품은 목격자 폴리비우스(Polybius)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주전 79-77년 사이에 고린도를

        방문한 키케로(Cicero)에 의해 확인된 것같이 도시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사람들이 멸절되거나 하진 않았다(와이즈만 1979:

        494-95). 고린도는 비록 완전히 부셔졌더라도 천연적인 상업 중심지였고 뭄미우스는 재해을 피해 피하였던 시민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 확실하다.

        로마 식민지로서의 설립은 많은 고전 작가들이 줄리아스 시이져에 의한 공이라고 하며 아피안(Appian)은 카르타고의 약탈

        후 102년째 주전 44년이라고 정확한 연대를 말하였다. 비문들은 그 새 도시의 이름을 Colonia Laus Julia Corinthiensis

        라고 보여준다. 그 도시가 로마에대한 위협 없이 1세기 넘게 평화를 되찾았기에 로마 시이져의 관심은 더 이상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린도의 경제적인 잠재성은 로마에도 잘 알려졌고 이것이 해협을 통과하는 운하를 만들려고까지

        한 계획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새로운 이주민의 대부분이 자유가 된 노예들이라는 스트라보의 주장은 그들을 ‘아포로이’-기회 부족으로 어떤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닫혀짐 느끼는 이들을 말할 때 쓰는 형용사-라고 부른 아피안(Appian)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인

       들이 아니라 그리스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일 것이다. 새로운 식민지에서 그들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멀리 이제

       의미 없는 전 주인과 연결을 했을 것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아래 바울은 분열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라고 말한다 2) 많은 믿는이가

       아직 종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고전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3) 출신이 안좋을수록 출신을 더욱따지기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더욱 강조해야했다 ”고후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 종, 자유인, 상인, 농업인등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고 이들의 기독교를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하여 많은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 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집단행정에 있어서는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기술, 재정, 행정 집단이 있었다.  그들의 기업과 공업은 비록 그들이 무덤을 약탈

      하는 것부터 시작하였을 찌라도 그들이 발명한 청동 그릇과 적갈색(테라코타) 부조를 가지고 로마에 수익성 있는 상점을 빨리

      만들어 번영 꾀하였다. 전에 것에 대한 많은 수요는 약삭빠른 식민지 사람들에게 청동기 생산을 재개하도록 자극하였고 다른

      전통적인 공업들은 곧 재개되었다.

      식민지가 안정된 기반을 다졌을 때 그리스와 지중해 동쪽의 주요 지방 기업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주요 상업적인 상황하에

      새로운 수도로 되고자하는 고취들은 더 많은 부를 산출하였고 설립된 지 50년도 안되어 고린도의 많은 시민들은 무시하지

      못할 의미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 확실한 증거는 주전 7년에서 주후 3년사이 첫 번째 재개된 지협(地峽) 경기들

      (Isthmian Games)의 위원장으로 추정되는 L. Castricus Regulus를 기념하는 비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한 세기동안 중지

      되었던 그 경기를 다시 재개하였고 고린도 모든 시민들에게 잔치를 배설하였다. 상업적인 발전은 금융의 편익을 요구하였고

      주후 1세기 중반에는 고린도가 중요한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부유하면서도 꽤나 인색하였던 듯하다 “ 고후 11: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 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 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마게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가운데서 연보를 풍성히 한 것을 알리면서 부유한 고리도는 그 체면에 맞는 보다 많은 헌금을 할

      것을 요구한다. “고후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도시 확장은 그 도시가 얼마나 번영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초기 식민지 정착자들은 옛 도시의 중심을 고대 경주장이 아직도

      넓은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성전의 남쪽으로 옮겼다. 그 것은 공공 집회장소(forum)로 되었다. 남쪽 스토아, 글라우스의 우물,

      피레네 샘(Peirene Fountain)같은 많은 고대 요소들은 통합되었고 새로운 구조물들이 급속히 등장하였다. 10개의 기념 건물

      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끝나기 전에 세워졌고  6개의 건물이 그의 승계자 티베리우스의 긴 치세동안 더하여졌다. 폐허가

      된 성벽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나 단지 돌을 떠내는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된 시기에 성을 수선한다는

      것은 완전히 비능률적인 투자로 보여졌다.

      남쪽 스토아(시민들이 편안하게 모여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긴 복도형식이 일반적이다)에는 달리기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을 올려 놓은 출발 표시가 있다. 이 때문에 이 말씀은 고린도가 주최한 지협경기들과 연계하여

      고린도인에게 자연스럽게 교훈되었을 것이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많은 거물이 세워진 때를 같이하여 바울은 건축에 관계된 말씀을 자주 사용한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이 알았던 고린도는 로마의 베스피안 황제 때인 주후 77년에 지진에 의해 손상된 고린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국의 도움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었는데 이것에 감사하여 그 도시는 Colinia Julia Flavia Augusta Corinthiensi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주후 2세기 초기에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하드리안에 의한 세금면제는 주후 2세기 중반에 건축 붐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은 Pausanias의 ‘그리스 묘사(Descripgion of Greece)'에 잘 묘사되었다.

       고린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주거의 지역이며 휴양지는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의 낮은 경사지위에 있는 Craneum의 부근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 곳은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Diogenes)가 그의 통안에 살았고 알렉산더가 그에게 오는 햇빛을 막았을 때

       한 쪽으로 조금 움직여 주기를 요구했던 곳이라 한다.

 ***휴양시설 대해서는 위의 버금가는 지역은 북쪽 성벽 안쪽에 있는 아스클레피온(Asclepieion- 치료의 신)과 Lerna 복합건물

      이다. 후기에 지어진 식당들은 고린도전서 8장 10절-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않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에 나오는 배경을 제공한 반면에 후에는 좋은 수영장

      들이 많이 지어졌다.  아스클레피온 신전에는 그 신이 자신의 아픈 부위를 고쳐주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지체 조각품들이

      실제 몸을 대신하여 드려졌다 (예: 손, 발, 눈, 유방, 머리 등) 이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배겨을 제공한다

     “고전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 . .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아가야가 주전 27년 상원의 지역으로 편성되었을 때 고린도는 이 지역 수도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나 어떤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주후 15년 티베리우스는 아가야와 마케도니아를 모에시아의 제국 지역으로 편성하나 아가야는

       주후 44년 글라디우스에 의하여 원로원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로마는 6월1일부터 다음해 5월 30일까지 1년 임기직의

       총독을 보냈다. 최고로 유명한 총독은 갈리오(Lucius Iunius Gallio)이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특징이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 18장 12절에 그 이름을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추정을 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임기를 마치기 전, 51년 여름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시정(市政)은 로마 공화정의 축소판이었다. 12종족으로 나눠져 있는 시민 선거인들은 4년직의 행정관을 뽑았고 퇴임자는

       시의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 회의는 자유인에게 개방되었다. 상원의 행정장관들은 duoviri iure dicundo였고 58명의

       년대(年代)가 알려졌다. 법률상의 의무들에 덧붙여 그들은 도시의 최고 행정장관이 된다. 매 5년마다 선출된 이들은

       duoviri quinquennales로 알려지고 인구조사를 하고 도시 의회의 새 구성원으로 불리며 부가적인 임무들을 수행한다.

****그 상원 행정장관(duoviri)은 두 조영관(造營官 aediles)에 의하여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도시사업 관리자 역할을 담당하고

       상업과 재정 소송에 대한 업무를 맡는다.

       주후 1세기 중반 것으로 보이는 극장 동쪽 포장구역의 비문에 에라스투스라는 이름의 조영관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에라스

       투스는 바울이 편지를 썼을 때 저급 공무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롬 16:23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 .).

       만약 그렇다면 그의 기독교 개종은 그의 출세에 큰 장해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린도가 수여하는 가장 큰 영예는 포세이돈의 성전이 있는 지협에서 매 2년 봄마다 열리는 지협(地峽) 경기의 의장(長)이었다. 범 헬라권에서 두 번째로 큰 이 경기는 주전 146년 시키욘(Sicyon)으로 넘어갔으나 새로운 식민지는 시작부터 고린도의 전통적인 권리임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큰 경제적인 이익이 거대한 군중들로부터 흘러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가 agonothetes라는 지협경기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사무소가 생길 만큼 고린도가 부유해 졌을 때 이루어졌다.

  ***바울은 주후 51년 이 경기에 참여하였는지 모른다; 고린도에 보낸 편지(고전 9:24-27)에 경기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그 장면을 묘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지협경기의 승리자가 시들은 셀러리(celery)로 된 관을 받는 사실은 바울로 하여금 영원한 면류관을 받은 구원을 생각하도록 자극하였을 것이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공무원들과 수혜자들의 공급하는 정보들에 대해 사무적인 글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켄트는 하드리안 시대(117-38)의 104 비문을 정리하였는데 그 중 101개는 라틴어로 단지 3개만이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 후에는 39개가 그리스어로 17개가 라틴어였다. 라틴어가 사무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을 찌라도 그 것은 사무용어일 뿐 교역과 상업용어는 헬라어였고 인구가 팽창할수록 구어(口語)는 헬라어가 되었다. 그러나 사무적 용어로서의 장려는 주후 2세기까지는 계속된다.

   고린도의 종교적이고 종족적인 다양성은 유물들에 의하여 잘 그려져 있다. 제국의 의식은 광장(forum)바로 옆 성전에서 이행되었을 뿐아니라 지협 경기들과 관계되어있다. 가이사랴에서도 행해진 4년마다 열리는 경주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열리게되었는데 티베리우스 치하에는 제국적인 경기도 등장하였다. 많은 성소들이 그리스의 신들인 아폴로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스클레피오스, 데메텔, 코레, 팔라이몬, 시시푸스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집트의 영향으로 인해 이시스와 사라피스를 숭배하기도 하였다. 

   **유대인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후에(아마 주후 4-5세기)에 나타나고 불충분하다; 단지 한 대리석 아치(홍예)굽에 lulab와 etrog에 의해 분리된 세 촛대(메노라)가  새겨져 있고 상인방으로 재 사용된 처마를 장식하는 돌에 [sina]goge hebr[aion] (ΣΥΝΑΓΟΓΕ ΗΕΒΡΑΙΟΝ 회당 유대인)이 쓰여져 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유대인들의 유적이 완전히 전무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필로는 고린도에 크고 활발한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아마도 주전 146년 시기온(Sicyon)으로 도망했을 것이다(마카비전서 15:23). 그렇다면 그들은 새로운 식민지의 거주민 중에 합세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가 주후 19년 티베리우스에 의한 로마로부터 유대인 축출로 인해 이익을 보았는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사도행전 18장 2절 글라디우스의 칙령(주후 41년)에 의해 유대인들이 고린도에 왔다는 누가의 힌트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취급된다(Murphy O'Connor 1983a: 130-40). 유대인 사회는 주후 67년 이후로 급속히 성장한다; 요셉푸스에 따르면 베스피안은 유대인 죄수 6,000명을 네로가 시작한 운하건설을 위하여 보낸다. 그들 대부분은 비록 많은 양의 일을 이루었을 찌라도 운하건설이 결국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기에 결국 자유인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유대인들은 유대인 제 2차 반란 때(132-35)에 왔다.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고린도 시민과 동등하지는 않아도 politeuma라 불리는 시민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8: 4절에 “안식일마다 바울이 (고린도)회당에서 강론항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고 한 점을 보아 많은 유대인과 회당이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작가들은 식민지인 고린도의 도덕성을 주전 4세기 아테네의 작가들이 헐뜯은 말을 그대로 수용하려한다. 만약 우리가 크리소스톰이 단지 아덴의 상황이 더 악하다고 지적한 언급과 뱀파이어의 올가미에 있는 소년의 단순한 이야기 같은 논쟁이 되는 증거들을 배제한다면 남는 것은 연극을 위해 그려볼 만한  아풀리우스(Apuleius)의 당나귀와 성교하는 음탕한 여인 이야기만 남는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소설도 아니었고 고린도가 그렇게 음란에 특별한 문제를 가진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스트라보는 ‘모든 사람은 고린도로 항해하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성적인 문제와 연결을 시켰지만 호라스(Horace)는 그 진정한 뜻은 처녀성을 잃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급격히 커지는 도시의 흉악한 경쟁에 자신의 내의를 잃어버릴 위험을 말한다고 명백히 설명하였다.

   *****바울이 살기에 쉽지 않은 도시를 그의 주요 선교센터를 삼음에 있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대한 약점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신뢰를 주장한다(고후 7장).  사실 고린도는 여러 위험들을 능가하는 이익들을 제공한다.  편리한 교통, 엄청난 수의 방문객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복음을 개종하여 복음을 전파할 가능성가지고 있었다.  아테네는 비교적 교통이 뜸한 지역임에 반하여 고린도는 열려있었으며 그곳 사람들은 따지기를 좋아했다; 바울당시 기독교 사회와 바울간의 관계가 충분히 말해 주듯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려하지 않았고 수동적이지도 않았다.

* 유적과 관련된 성경의 교훈 *

장소/물건

교훈

관련성구

청동거울

고전 13장 “ 지금은 너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 . .”

아고라

(장터)

성역과 대조적으로 속세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일반인들이 생활하는 교역과 모임 장소로 상점, 공방 주택등이 있었고 대분분의 토론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행 17:16  “... 또 장터(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고린도는 이 장터 주변에 7개 이상의 신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고기와 많은 물건들이 우상에게 드려지고 판매되었다. 그러기에 고기등 음식은 먹는에게 꺼리끼는 것이었고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고전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행 17:6

고전 10:25-28

신전

바울은 너무 많은 신전 때문에 우상에대한 문제 우상(고전 8장, 10장)과 관계된 음란(고전 5장)과 성만찬이 우상의 전(殿)에서 먹고 마심의 자리같이 되는(고전11:21) 같은 악영향을 고린도서에서 많이 다룬다.

고전 5, 8, 10

고전 11:21

바마

(심판석)

1) 바울이 유대인의 모함에의해 심판을 받았던 장소이고(행 18:11-17)

2) 고린도 교회에 교회에 관한 송사는 세사에 맡기지 말라고 한다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행 18:11-17

고전 6:1-

스토아

달리기 출발점 (위 내용 참고)

고전 9:24-27

극장

에라스도 이름이 도로에 기록됨

롬 16:23

The Anchor Bible Dictionary I권 1134-39쪽에서 발췌함.

아덴

아덴(Athens)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Piraeus)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북쪽으로는 파르네스 산, 동쪽으로는  펜텔리쿠스 산, 남동쪽으로는 히멧투 산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테네(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리클레스(B.C.495-239)에 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아울러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수스 전쟁(B.C.431-404)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빌립보

빌립보는 그리스의 북쪽 네압볼리(Neapolice; 신도시)에서 로마로 가는 고대도로인 에그나티아(Egnatia)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레카니스(Lekanis) 산에 위치한 옛 마게도냐의 수도이다. 원래 크레니데스(Κρηνiδες; ‘샘’)로 알려진 드라게(Thrace)사람들이 주를 이룬 마을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 왕 빌립 2세가 이 도시에 사람들을 이동시키면서(주전 358-57)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빌립 2세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은 알렉산더 대왕은 도시를 증축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주전 167년 헬라가 로마에게 넘어간 후 빌립보는 로마의 한 도시로 편성되었다가 주전 42년, 빌립보에서 큰 전쟁이 발발한다. 율리우스 시이져를 암살한 부르터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충돌한다. 결국 빌립보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었다.

   빌립보 시민은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많은 시민들이 로마군을 제대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시민들은 변방에 있는 땅을 수여받고서 그 대가로 전방 지역 성읍에서 군사 임무를 수행한 퇴역 장병들과 로마전역에 용맹한 군인으로 이름이 나있던 드라게인(Thracian), 주변지역에 살던 헬라인,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온 그리스인(예; 두아디라의 루디아)들이었다. 퇴역군인 및 정치적인 영향으로 라틴어가 많이 이용되었지만 주 언어는 헬라어였다고 추정된다. 역사가 람세이(Ramsay)는 의사 누가가 빌립보 출신이라고 하였다.

   빌립보 성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1,956m인 팡게오(Pangeo) 산에 있는 금광을 생산한 도시로 유명하였다; 빌립 2세는 이 곳에서 년간 1,000달란트 이상의 금을 채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시대 특히 옥타비아누스 시대에는 로마가 바로 정복하였던 북쪽지역을 방어하기위한 군사도시로 또한 동방, 비쟌티움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에는 다이아나(헬라의 아데미 신; 사냥의 신)와 관련된 드라게인의 바쿠스(Bacchus; 헬라의 디오니수스 신; 술의 신)과 말탄 영웅이 대표적인 우상이었다. 주후 1세기에는 시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수입된 값비싼 대리석으로 치장된 이집트 신들을 섬기는 장소가 세워졌다. 또한 에그나티아 길의 남쪽 400m지점에 위치한 목욕탕건물에서 나온 다섯 개의 비문에의하면 그 곳이 주후 1세기경에는 바쿠스신과 그와 관계된 리벨( Liber), 리베라(Libera), 헤라클레스(Herculus)를 섬기는 장소였음을 나타내 준다.

성경의 역사

행 16: 12-15    두아디라의 자색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 예수믿게하다(유럽의 최초 기독교인)

행 16: 16-40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간수와 그의 가족을 예수 믿게하다.

빌 1:1 -         바울의 옥중서신

역사, 지리적 성경해석

1. 유럽의 첫걸음

주전 42년, 빌립보 전투(바쿠스와 옥타비아누스); 로마를 왕정으로 바꾸며 아구스도를 탄생시켰다.

   로마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장소는 주후 49년, 복음전파 차원에서 유럽 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2. 바울의 후원자들

행 16:14        . . .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신지라.

빌 4:3         또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을

                돕고 . . .

 빌립보의 첫 신자는 여인이었고 그 여인들은 바울의 복음전파에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마게도냐 교회 특히 빌립보 교회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때(빌 4:16)와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바울을 물질적으로 후원(고후 11:9)하는데 아마 그 중요한 후원자는 루디아와 같은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3. 로마 시민권

행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 .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인임을 스스로 자랑했고, 로마인의 옷을 입었으며, 종종 라틴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틀림없이 이것은 바울이 신자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언급한 말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이었다.  그리고 빌립보 성이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그곳에 그다지 유대인들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곳에 회당이 설립되지 않았고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구약을 인용하지 않은 사실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4. 바울과 빌립보 감옥

행 16:34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한 사람들 중 간수와 그의 가족이 제일 큰 구성원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자신의 매인 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함을 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전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 말씀을 담대해 전하게되었다(빌 1:14)”고 하였다.

   바울은 유럽에 이르러 빌립보에서 첫 번째로 옥에 갇혔고 이제는 로마, 유럽의 마지막 감옥에서 첫 번째 감옥이었던 장소에 편지를 쓴다. 옥에 갇혀있던 바울은 빌립보 감옥을 생각하며 더욱 용기를 얻었을 것이고 물질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는 그들이 대견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옥중서신과 달리 빌립보서는 옥 중에 있으면서도 빌립보서에는 큰 기쁨 담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암비볼리(Amphipolis)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데르마 만의 갑(岬)에 위치한 부산한 항구도시였다. 데살로니가 성읍은 유명한 에그나티아 가도와 북쪽으로 다뉴브에 이르는 대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으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성읍의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마게도냐의 최대 도시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패하면서 수도가 암비볼리(Amphipolis)로 되었다가 주전 146년부터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데살로니가 교회의 배경은 행 17:1-9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한 것을 볼 때, 이 새로 설립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일부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0, 행 17:4은 이 교회의 주된 구성원들이 이방인이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베뢰아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1998. 8.                                                                          이문범 제공

밧 모 섬(Patmos)

지리적 배경

도데까니스(Dodecanese)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밧모섬은 북쪽으로 이카리아(Icaria)와 사모스(Samos)가, 동쪽으로는 레입소이(Leipsoi), 남쪽으로는 레로스(Leros)가 자리잡고 있다. 길게 늘어진 섬은 길이가 12.5km로 약간 굽은 리본모양을 가지고 에게해를 향해 뻗쳐있다. 이러한 모양을로 인해 바닷물이 섬깊숙히 들어오면서 셀 수 없는 만(灣)을 형성한다. 꾸불꾸불한 모양의 해안을 모두 편다면 전체 길이가 65km나된다. 폭이 가장 좁은 부분은 중간 부분으로 섬을 거의 갈라 놓을듯하다. 가장 높은 산은 남쪽에 위치한 해발 269m의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fitis Ilias)산이다.

현재의 밧모섬은 19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그린 책에 나오는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 섬 전체가 제주도와 갈릴리 바다근처와 같은 검은 회갈색의 현무암으로 되어있고 약간의 풍화된 토양을 제외하고 섬 전체가 완만한 능선을 가진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언덕과 바다 사이에 있는 약간의 녹지는 지형을 부드럽게 만든다. 아데미의 열열한 사랑을 받던 셀레네(Selene; 그리스이 달신)의 섬인 밧모는 거의 일년내내 생명의 빛을 발하는 태양을 맞으며 그 몸을 바다에 담그고 있다. 좋은 일조량으로 밧모는 겨울 동안에도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여룸에는 북풍의 영향으로 시원하고 상쾌하다. 보다 작은 섬이 점점이 흩어져있는 동쪽에는 에게해의 검붉은 물결이 흰 파도를 일으킨다. 현대의 건축물들은 코라(Chora)와 스칼라(Skala)에 집중되어있다. 성 요한 수도원은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밧모섬의 주요 특징은 고요함이다. 수도원의 종소리와 승객을 태운 뱃고동만이 이따금 섬의 정적을 깬다.

밧모섬 면적은 34km2이고 주민은 약 3,000명정도이다. 교회적으로는 세계관구(Ecumeical Patriarchate)에 속하고 성 요한 수도원의 대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이다. 밧모섬에서 아테네의 항구 삐레아까지 뱃길은 163마일이고 배는 레로스, 칼림노스, 코스, 로도스, 사모스를 연결한다.

밧모섬은 지중해성 기후 영향으로 강우량이 적은 편이다. 전체 섬이 얇은 풀과 다양한 관목, 크고작은 나무들로 덮혀있다. 소나무, 싸이프러스, 아루부투스(철쭉과), 유카리스, 위성류와 석류같은 과일나무들도 존재한다. 농가에서는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감귤류가 많이 재배되고 스칼라 항구와 섬 이곳저곳의 작은 정원에서 포도도 재배된다.

역사

신화: 신화에 따르면 라트모스(Latmos) 산근처에 있는 카리아(Caria)에 방문한 에데미는 셀레네가 바다에 비추는 빛을 보고 반하였다. 셀레네는 해저에서 섬을 올려 줄 것을 아데미에게 요구했고 아폴로와 제우스가 달(셀레네 신)을 빛을 보며 사랑에 빠진 아데미를 위해 이 섬을 해저 깊은 곳에서 올렸다. 태양(헤리오스; ηλιος)은 이 섬을 말리고 그곳에 생명력을 주어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트모스라는 이름에서 밧모(Patmos)라는 이름이 유래하였고 한다.

또하나의 신화와 관계하여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이고 푸리에스에게 쫓기던 오레스테스는 이곳에 피신하였다. 피신한 오레스테스는 현재 수도원이 있는 장소에 아데미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원주민인 카리안, 레레기안, 펠라스기안들이 주전 3,000년경에 와서 주변 섬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섬의 진정한 거주자들은 이오니안을 뒤따라 온 도리안이었다. 주전 4세기에 이오니안은 이곳에 발전된 문명을 만들고 마을과 카스텔리(Kasteli)위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 섬을 수출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 때 12,000-15,000의 주민이 거주하며 제우스, 아폴로, 아데미, 디오니소스 신전도 있었다.

로마시대: 로마시대 밧모는 로마에서 에베소로 오는 정규항로 근처에 있었을지라도 잘 이용되지 않았다. 주후 2세기 로마인들은 밧모섬을 귀양지로 만들었다.

(요한의 밧모 유배)

요한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주님께서 요한을 부른 뒤 그는 베드로, 야고보과 함께 제자들 중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중요한 사건(야이로의 딸을 살림, 변화산, 겟세마네 기도)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별된 인물로 대접받았다. 물에 익숙하였던 요한은 예수님이 갈릴리 주변을 옮겨다니며 전도하실 때 유능한 노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교통수단인 배를 수배하고 운전하였을 것다. 그래서인지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점과 아버지가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였다는 것을 보면 요한이 어느정도 유력한 집안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요 18:15)

그러나 그의 성격은 매우 과격하여 형제 야고보와 함께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하루에 5,000명이 넘는 사람을 전도할 만큼 큰 능력을 얻었으나 그는 곧 슬픈 소식을 접한다. 그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이런 소식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한 조가 된 요한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확고히 하는 등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베드로와 따로 행동하던 요한은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후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곳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데려와 모시고 살면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1-3서)를 기록하였다.

주후 81-96년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기간 사도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요한은 그의 제자 프로코로스와 함께 ‘계시의 동굴’에서 있을 때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썼다. 또한 요한의 가르침으로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9)

96년 도미티안 박해가 끝나 새 황제 네르바에의해 풀려난 요한은 에베소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99세까지 장수하다가 104년에 하나님 곁으로 갔다. 지금도 그의 무덤이 에베소 요한교회에 남아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5월 8일에 그를 기념하고 9월 26일 그의 변화(metastasis)를 축하한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 이후 순례지가 된 밧모는 7세기 비잔틴과 사라센의 갈등 속에 약탈당하기도 했다.

주후 6-9세기까지 밧모섬은 다른 주변 섬들과 마찬가지로 해적들의 침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잔틴: 주후 11세기에 호시오스 크리스토둘로스가 여기 도착하였고 그는 주변의 고요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요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계속되는 아랍인들의 공격과 터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터키시대 - 현재: 16세기에 이르러 밧모는 새로운 번영의 전기를 맞았다. 스칼라는 주 항구가 되었다.  저장소가 지어졌고 코라에 더 튼튼한 성채가 세워졌다. 주민들은 증가했고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유명한 파트미안 학교가 설립되었다. 얼마후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다른 도데카네스 섬들과 같이 밧모는 1948년 3월까지 이탈리아 영에 들어갔다.

밧모의 성화

그리스 정교회 최고의 성화들이 밧모에 있다. 사도 요한과 요한 수도원 설립자, 호시오스(축복된) 크리토둘로스의 성화는 밧모의 전통유산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을 따라다니며 그의 생활과 기적을 기록하였던 프로코로스(Prochoros)에 관한 성화도 중요한 것이다. 프로코로스는 후에 니코메디아의 감독이 되었다.

문화

1. 파트미안 학교

마카리오스 칼로엘라스(Makarios Kaloyeras) 보제신부에 의하여 수도원 내부에 설립된 파트미안 학교는 18세기 이 곳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이 학교는 계시의 동굴 바로 위에 위치한다. 1713년 계시의 수도원 건물에서 시작한 이 학교의 명성은 급속히 퍼져 그리스뿐아니라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 왔다. 이 학교는 그리스어와 정교회 신학을 가르치는 헬레니즘에 명성있는 학교가 되었다. 1912-1947년 이 지역이 이탈리아에게 점령되어 잠시 학업이 중단된 것외에는 많은 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 헬라문명을 배웠다. 많은 정교회 지도자, 학자, 과학자등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최고의 인물이 피리키 에태리아(Philiki Etaireia)의 세 설립자 중 한명인 한토스(Emmanuel Xanthos)이다.

2. 부활절

부활절에 갖는 정교회의식은 비잔틴 전통을 잘 이어받은 밧모의 가장 큰 있는 의식이다. 예식은 매일 저녁 9시에 시작하여 적합한 본문을 읽으며 수시간 계속된다.

부활절 주간 화요일 오전 11시에 한토스 광장에 ‘의식 대야’가 운반된다. 예수님의 고난의식을 가지려 할 때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이에 참석하기 위하여 온다. 예루살렘에서도 행해지는 이 의식은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세족식이 거행되고 성경을 낭독하면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의 의식을 가진다. 수도원장이 예수님 역할을 하고 수도원의 가장 젊은 수도승이 가룟 유다 역할을 한다. 수도원장이 겟세마네 기도를 마치면 파티미안 신학교 학생들은 찬양한다.

목요일에는 복음서들을 읽다 십자가 행진부분에서 끝난다.

금요일에는 십자가 강하(降下)의식을 가지고 부활을 준비한다. 수도원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장미꽃잎을 뿌리며 종려나무 관으로 의식장 주변을 꾸며 놓는다.

토요일은 부활절 초를 준비하고 자정에 불을 밝힌 후 ‘예수 부활 되셨네‘(χριστος ανεστη)라고 인사한다. 이때 박수갈채와 징을 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부활절의식들(찬송, 낭송, 크리소트톰의 문답식설교, 식탁의 교제)이 행하여지며 부활의 즐거움을 함께한다.

계시의 동굴

밧모섬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섬이다. 항구 스칼라에서 코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계시의 동굴이 있는데 현재는 계시 수도원으로 덮혀이다. 이 동굴은 또한 정교회와 천주교간의 우호적 대화가 있었던 장소이다.

동굴로 내려가다보면 내부 정원을 통과하여 몇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때 만나는  오른쪽에 만나는 예배소가 성 알테미오스(18세기) 예배소이다. 계속 내려가다 교회 앞 넓은 홀(나르텍스)의 오른 쪽 돔과 성 안나 종탑을 왼쪽에 보게된다. 더 내려가면 성안나 교회 입구와 동굴에 이른다. 입구에 있는 비문은 인상적이다.

“이 장소가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전이다”

앞으로 곧장 들어가면 성 안나 교회에 이른다. 전통에 따르면 11세기에 이곳에 온 호시우스 크리스토둘로스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할 뿐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 또 자기를 밧모를 가도록 도와 준 당시 황제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한 것이라한다.  교회 오른 쪽에 고대 동굴의 경사진 천장이 있는데 시작하는 천장 부근에 3가닥으로 갈라진 틈이 있다. 이것은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이 방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1:10)

계시를 들을 때 요한은 동굴이 좁아지는 쪽 한 홈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한의 초상화를 보면 이마에 굳은 살이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기도후 일어설 때 짚었다는 홈이 머리를 두던 홈 오른 쪽에 남아있다(요한은 분명히 오른 손잡이였을 것이다!). 오른 쪽을 쳐다보면 사람이 서서 책을 둘 만한 천연 장소가 있는데 전통에 따르면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 프로코로스가 그의 선생이 지시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고한다.

생각해 볼만한 지리적 성경해석

1. 요한은 섬에서 갈리리 바다모양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수양처를 만들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이 갈릴리와 같은 현무암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기억하라.

2. 일곱교회에 편지를 쓸 때도 밧모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7교회 이름을 언급하였다. 사사기의 배열과 연결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3. 자주 나오는 보석들의 색깔등은 백옥같은 바다의 색깔을 연상케한다. 여러 표현들이 현장을 반영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한다.

4. . . . ?

이문범 제공

니고볼리(Nicopolice; 현재명 Smytoula)

니고볼리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그레코로만 시대에 헬라어를 사용했던 지역에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많은 지도자들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 이름을 많은 도시에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 니고볼리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이름으로 불렸던 도시들은 에피루스, 소아시아, 이집트, (유대)에서 발견된다. 주후 63년에서 65년경에 사도 바울은 디도를 니고볼리(이들 도시중 하나)에서 만나기를 원한다(디도서 3:12). 사도 바울이 말한 니고볼리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곳이 겨울을 나기에 좋은 곳이며 또한 서신서를 기록하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다.

   본도(Pontus)의 니고볼리는 주전 66년 폼페이 장군이 미드리닷(Mithridates)을 이긴 장소로 로마 교통의 중심지이며 주후 1세기에 번창하였다(Strabo 12.555). 그러나 그것은 그레데 섬으로부터 그리고 바울의 알려진 여정과는 너무 멀다.  비시니아(Bithynia)나 실리시아(Cilicia)의 니고볼리는 겨울을 나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이다(Pliny HN 5.150; Strabo 14.676). 이집트의 델타(Delta)지역의 알렉산드리아근처, 니고볼리는 가이사 아우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고(요세푸스 고대사 5.11.15)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기후를 제공하나 바울의 알려진 여정 속에 넣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바울시대 이후에 로마 지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니고볼리라는 도시들이 있으나 이것은 디도와 바울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장소이다.

   가장 적합한 장소를 추정한다며  에피루스(Epirus)의 니고볼리이다; 이 니고볼리는 아가야의 니고볼리로도 알려져 있다. 이 다른 이름은 프톨레미가 에피루스의 니고볼리라 부른(Geog. 3.13) 반면에 타키투스(Ann. 2.53)가 그 것을 아가야 사람의 도시로 묘사한데서 유래했다. 이 두 용어- 에피루스와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스의 큰 지방들을 가리킨다. 이 도시는 그리스 반도의 서쪽,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서 바다건너 북위 39도 2분, (경도) 20도 44분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악티움(Actium) 만의 협부에 지어졌다. 주전 31년에 아우구스도는 이 만에서 안토니(Mark Anthony) 장군과의 접전하여 승리한 뒤 이 도시를 세웠다. 그러므로 이는 명백히 로마의 식민지로 되었고 주전 29년 니고볼리의 주요 걸작품은 넵튠(해신(海神),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에 해당함)과 마르스(군신(軍神), 그리스신화의 아레스에 해당함)에게 헌납되었다. 그 기념물에는 해전(海戰)에서 포획한 뱃머리에 있던 수양의 머리가 조각되었다. 이 니고볼리는 그 근방의 무역을 주관하였고  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의 개최지이기도 하였다. 아우구스도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던 헤롯대왕은 많은 공공 건물을 그곳에 세웠을 뿐아니라 그곳 신전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다(요세푸스, 고대사 16.5.3). 주후 89년에 이 도시는 망명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의 거처가 되기도 하였다(Aulus Gellius Attic Night 15.11.5). 이 장소에는 오늘날 그리스 도시 스밀투라(Smyltoula) 자리잡고 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난 뒤 니고볼리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한 의도는 그가 복음전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음 시사한다. 바울은 밀레투스(Miletus)와 고린도를 들른 후 그가 한 번 잡혔고 다시 잡힐 로마- 당시 네로는 로마에서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시키고 심한 핍박을 가하고 있었다-로 가기 위하여 니고볼리로 향하였다.

   알렉산드리누스 사본(Codex Alexandrinus)은 디도서가 니고볼리에서 보내졌다고 언급을 하나 이 언급은 다른 고대 사본들과 부합하지 않는다. 디도서 3장 12절은 바울이 니고볼리가 아닌 니고볼리 근처에 있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디도서는 고린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다.

로버트( Robert W. Smith)

The Anchor Bible Dictionary IV권 1108쪽에서 발췌함.

그레데

지리

그레데는 그리스 남쪽 지중해 상의 가장 큰 섬중 하나로 길이가 256km 넓이가 64km정도 된다. 그레데는 에게해와 리비아해를 경계지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를 구분하는 점이된다. 많은 섬들과 깊은 계곡이 있고 계곡사이에는 기름진 기름진 토양이 형성되었다.  이 계곡 중사마리아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계곡으로 대자연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지역마다 변화무쌍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곳이 황량하다 싶으면 다른 곳은 숲이 우거져 온화함을 더해준다.

마을들은 과일나무와 채소로 가득채워져있다. 올리브나무, 오렌지, 포도원, 각종 채소들이 자란다.

오래된 돌로 지어진 농가, 수도원 산능선의 마을들, 성채, 경사지에 남은 교회들의 잔재같은 것이 그레데의 시골 풍경이다. 해안은 때때로 험하여 사람들이 접근 못한 바위들로 되있기도 하지만 끝없는 모래와 자갈로 된 해안이 많이 존재한다. 그레데는 여러 야생식물로 유명하다. 밤나무, 상수리, 싸이프러스, 야자나무, 상수리나무 숲이 이곳저곳 위치한다.

바위가 많은 지역에는 각종 약초와 그레데 염소라 불리는 ‘크리크리’가 자란다.

역사

위에서 언급한 환경을 기초로 그레데가 최고로 번성한 시기는 미노아 문명(그레데 문명) 때이다. 주전 2800-1150년 동안 그레데는 지중헤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을 이루었다. 미노아인들은 궁전들을 지었는데 유명한 크노소스, 파이스노스, 말리아, 자크로스가 그 당시(주전 1700-1450) 지어졌다. 그들의 벽화와 도자기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명은 주전 1450년 산토리니에서 발생한 화산폭팔로 끝을 맺게된다. 그러나 이 것이 끝은 아니었다. 배를 이용한 상업은 계속이루어졌다. 페니키아, 시리아, 이집트인은 그들의 주요 무역대상이었다. 아가야인(미케네 문명)과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신도시인 라토와 압테라가 세워졌다. 라토(Lato)는 주전 7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로마가 다스리 시기(주후 69-330)에는 골틴(Gortyn)이 특출난 도시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일찍이 이 곳에 전파되었다.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던 이 곳(행 2:11)에 누가 복음을 전했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디도를 보낸 것을 보아 바울이 전한 장소가 아닌가한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 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Kali Limenes)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44행 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행 27:7 -14)

바울은 로마로 호송될 때 그레데를 거쳐서갔다. 그래서 아직도 미항근처의 산능선에는 바울을 기념한 교회가 위치해 있다. 오래된 교회는 세련되지 않고 지붕도 없는 상태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곳에 바울이 잠시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레데인의 특성은 바울이 디도서에 편지을 보내며 에피네니데스(주전 6세기)의 말을 인용하여 부정적으로 얼마를 썼지만 그레데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잔자키스등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디도의 사역으로 어느정도 변화된 사람들이 있어나 보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딛 1:12-13)

잊지 말하야할 역사적 사실 중 하나는 그레데인의 최초의 조상(미노아 문명)은 헬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 이주한 것은 함족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창 10:6)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창 10:13-14)

이 함족은 고고학 증거에의해서도 밝혀졌던 서부 셈족언어를 사용하였다. 미노아 문명이 쇠퇴하고 해양민족이 이동할 때 그레데(그렛사람, 갑돌사람)인들은 이동하여 가나안까지 들어왔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것을 증명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 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암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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