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문화 - edo magbu munhwa

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조선 후기 사회

4-4단원 2차시

 

  • 저필자이영화(조원중 역사 교사)

    2.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에도 시대의 정치·사회적 특징

     에도 시대의 대외 관계

     에도 시대의 학문

    2.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1. 에도 시대의 정치 및 사회 특징


    2.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 막번 체제
        막부(쇼군 지배)와 번(다이묘 지배)으로 구성 → 중앙집권 강화천황과 귀족은 정치 간여 금지
    • 엄격한 신분제 확립
        소수의 무사 계급이 농민·수공업자·상인 지배무사 계급 내 주종관계 성립

    <출처 :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막번 체제
    에도 시대의 일본은 전국을 에도 중심의 막부 직할지와 260여 개의 번으로 나누고 각 번은 다이묘가 영주로서 세습 통치하는 지방분권제 국가였다. 그러나 쇼군은 직할지의 막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사실상 다이묘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어서 중앙집권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출처 :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주275]

    2.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2. 에도 시대의 대외 관계


    2.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 쇄국 정책 시행
        외국과 교류(외교와 무역) 금지천주교 포교 금지일본인의 국외 도항 금지
    • 제한적으로 외국과 교류 유지
        조선과 국교 회복(1607)나가사키 개방 → 네덜란드 및 청 상인과 교역 유지

    <출처 : 일본문명의 77가지 열쇠>

    에도 시대의 쇄국 정책
    에도 시대 일본은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약 2세기 동안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막부가 국민들에게 외국과의 자유로운 교역을 금지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인데, 이것이 쇄국 정책이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비록 쇄국이라는 대외 정책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외국과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에도 막부는 다이묘들이 해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이윤을 막부의 통제 하에 두려면 자유무역을 금지할 필요가 있어서 쇄국 정책을 내세웠지만, 쇄국 정책을 펴는 동안 규슈의 나가사키에 통상 항구를 설치하여 특정상인 집단에 의한 네덜란드, 중국과의 무역을 지속해 외부의 문물과 정보를 유입했다.
    <출처 : 일본문명의 77가지 열쇠>

    [주276]

    2.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3. 에도 시대의 학문


    2.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 후주자학 장려
        명분과 질서 강조 → 체제 유지무사 계급의 주종 관계 합리화
    • 양명학 유행, 고학 발달
    • 국학 성행
        일본의 전통 강조훗날 존왕양이 사상의 원류 형성
    • 난학 발전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의학·과학기술의 영향

    <출처: 일본인의 선택>

    난학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해 유입된 서구의 앞선 지식과 새로운 정보들은 일본인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일본에서 난학이라고 불리는 신학문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난학은 네덜란드 학문을 주로 하여 서양의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 받아들인 서양학문을 통칭한다. 그러나 일본은 막부 말기와 개항기에 영국과 프랑스 등의 학문을 폭넓게 접하면서 점차 서양의 자연과학이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학문이라는 인식이 발달하면서 난학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갔다.
    <출처: 일본인의 선택>

    3.조선 후기 사회

     조선 후기 정치·경제적 변화

     조선 후기 사회 변화

     조선 후기 사상의 변화

    3.조선 후기 사회

     1. 조선 후기 정치·경제적 변화


    3.조선 후기 사회

    • 조선 후기 정치적 변화
        17세기 중반 회복된 경제의 주도권을 둘러싼 붕당 간의 다툼 격화 → 탕평책 통한 왕권 안정
    • 조선 후기 경제적 변화
        임진·병자 전쟁으로 경지 및 인구 감소 → 전쟁 피해 복구 노력 → 집약적 농업 보급 확대 → 농업 생산력 발전, 상업과 수공업 발달

    3.조선 후기 사회

     2. 조선 후기 사회 변화


    3.조선 후기 사회

    • 부계 혈연 집단의 결합 강화, 동족 마을 증가
    • 신분제의 동요
    • 빈부 격차 및 계층 간의 갈등 심화 → 실학자 중심으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 대두

    <출처 : 한국사의 이해>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
    조선 후기 경제의 발달로 기존의 신분제가 변질되었다. 그래프의 대구 지방 뿐 아니라 울산 지방의 예를 보면 18세기 후반에는 전체 인구 가운데 1/3 이상이, 19세기에 들어서는 절반 이상이 양반신분으로 호적에 오르고 있다. 외형으로는 신분제 변동의 양상이 주로 하층신분에서 상층으로 이동하고 있는 형상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신분제도 자체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한국사의 이해>

    [주277]

    3.조선 후기 사회

     3. 조선 후기 사상의 변화


    3.조선 후기 사회

    • 청의 고증학 및 서학의 영향
    • 청의 실용적· 선진적 학문의 흐름 수용
    • 자연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대한 관심 심화 → 실학 등장, 북학파 형성

    <출처 : 위키 백과>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이 8촌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사절로 북경(당시의 연경)에 갈 때 따라가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이다.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를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수단의 미흡함이 조선이 빈곤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출처 : 위키 백과>

    [주278]

    동아시아 각국의 독자적 전통

     에도 시대의 일본

     조선 후기


    동아시아 각국의 독자적 전통

    • 막번 체제 성립 → 중앙 집권 강화
    • 무사 중심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
    • 쇄국 정책 시행, 제한적으로 네덜란드 및 청 상인과 교류 → 난학 발달


    • 붕당 간 대립 격화 → 탕평책으로 왕권 강화
    • 17세기 후반 이후 신분제의 동요
    • 청과 사대 관계 및 일본과 교린 관계 유지
    • 실학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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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에도시대의 특징

    에도시대란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군사적 최고권력자인 '장군'이 되어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라고 불리우는 정권을 확립하고 나서 1868년에 붕괴될 때까지의 약 260년간을 말합니다. 장군은 지방 무인가문의 영주인 '다이묘'를 줄곧 지배해 왔는데, 이에는 에도성 주변에 각 다이묘의 저택을 마련하여 그 가족을 인질로 삼아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장군에게 표경방문을 하도록 의무화시킨 제도가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기독교의 금지와 외국과의 교류를 네덜란드, 중국, 조선, 류큐(오키나와)로 한정하는 등, 폐쇄적 관리사회를 구축한 결과 약 260년간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져 독특한 사회와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에도시대와 일본 자본주의

    (사회학 특강 발표물)

    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일본의 근세를 1603년 에도막부의 성립에서 1868년 메이지유신이 일어날 때까지로 구분을 하며, 흔히 에도(江戶)시대 또는 도쿠가와 일본이라고 한다.1)

    문화라는 것이 과거로부터 연결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지만, 고대의 문화라는 것이 순수하게 현재에 이어지고 그 정신이 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현재의 남녀관, 예의를 비롯한 많은 전통과 풍속들이 거의 조선시대의 유산임으로 볼 때, 현재 문화에 남아있는 계보적 추적으로서 가장 적합한 시기가 중세에서 근세시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측면의 연구에 있어서 일본의 근세에 대한 관찰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며, 그렇기에 지금부터 에도시대의 사회, 문화가 현재의 일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당시의 시대적 흐름

      1192년 가마쿠라 막부의 우두머리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이이 다이쇼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이래, 역대 쇼군은 무신정권의장(長)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는데, 그것은 곧 막부의 주재자를 의미하게 된다. 즉 기존까지는 천황과 귀족세력에 의해 통치되던 일본이 본격적으로 무사집단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이 가마쿠라 막부시기인데,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가 되기 이전까지 무신정권이 계속되게 된다.

       에도시대를 살펴보면, 1467년, 무로마치의 8대 쇼군인 요시마사 대에 쇼군의 후계자 문제로 파가 갈린 장수들에 의해 11년 동안의 전쟁인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나면서 전개되는 전국시대라 불리는 분열의 시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평정되게 되고 그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는데, 이 시기는 즉, 100여 간 이어져온 분열의 시기가 극복되고 전국이 통일된 시기였다.

      그렇기에 이 시기는 안정을 요구하던 시기였으며, 또한 도쿠가와 바쿠후의 지배권 강화를 위해 비교적 폐쇄적인 측면을 보이게 된다. 특히 기존의 바쿠후 정권에 비해서 강력한 지배권을 구축하였고 이는 기존보다 사회적 시스템이 더 견고해지게 됨을 이야기한다.

    기존의 바쿠후가 사적·개인적 지배의 형태를 보였다면 도쿠가와 바쿠후의 경우 공적, 국가적 지배, 즉 국가 공권력으로서 성격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2)  

      즉 바쿠후가 강력한 공권력으로서 사회를 안정시키면서 교토·오사카·에도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소비중심의 도시문화가 발달되게 되며, 서민문화가 발달되게 된다. 또한 도시 상인층인 쵸오닌(町人)이 경제활동의 중심이 됨에 따라 문화의 담당층도 전시대의 상류무사나 승려중심에서 일반무사나 상류쵸오닌으로 옮겨가고 나중에서 일반 쵸오닌이 문화의 담당층이 되는데, 이러한 도시 상인들의 성장은 맑스적 측면에선 부르주아지 세력들의 성장과 유사하다고 하겠으며, 이는 조선과 같이 농업 중심의 체제와는 다른 발전의 방향을 보여주게 된다.

    이제부터 그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막부 체제의 경제

     신분적 직업의 고정

    일본의 공업화, 근대화, 비즈니스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에도시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에도시대에 형성된 사회경제적 기반이 일본 근대화의 성공에 결정적인 구성요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2세기 반에 걸친 평화적인 전통사회시대, 특히 후반기에 형성된 가치체계와 사회경제제도는 그 시대의 상공업자의 정신과 태도, 경영의 관습, 관행을 두드러지게 특징 지워 주며, 이후 근대에도 이어지게 된다.

      에도 막부는 기존의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의 실태를 교훈 삼아 도쿠가와 가의 영속적인 지배와 항구적인 평화유지라는 이중적 목적을 가지고 강력한 통치체계의 수립을 목표한다. 에도 막부의 경우 봉건적 지배체제는 유럽의 봉건제국과는 달리 봉건제후에게 독자적인 정체를 인정했지만 그들은 도쿠가와에 대해 절대적이며 영속적 신하관계를 유지케 하는 독특한 중앙집권지향의 봉건제도이었다.

      특히 이 시기 사·농·공·상의 세습적 신분제로의 구분과 신분에 따른 윤리적 역할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병농분리제가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무사와 농민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하게 되는데 전국시대까지의 농민은 무사화의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했으나, 이 시기에 와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이는 농민의 무사화와 신분적 상승의 가능성을 단절시킴과 동시에 무사계급의 토지·농민에 대한 직접적 지배권 역시 봉쇄당하게 된다.

    또한, 농민과 무사에게는 상거래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상거래는 상인계급의 배타적인 직분이 되었다. 이 결과 도시와 농촌은 분리되어 막번제적 분업체계를 갖추게 되며, 이로서 농민은 농촌으로, 무사와 상공업자는 도시로 강권적인 분리·고정이 완성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무사집단의 경우, 일종의 월급쟁이와 비슷한 도시 관료층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에 원리와 야쿠

       어떤 사회든 그 사회의 최소단위는 가(家)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인데, 일본의 가(家)는 이에라고 하며, 이 문화는 중국·한국의 종족(宗族)과 같은 순수혈연집단과는 기본적으로 차이점이 많다.

       즉 일본사회에 있어서 이에란, 부부와 그 혈연집단(가족)을 핵으로 한 인적집단을 그 담당자로 하고 부자(또는 양부자) 상속을 기본으로 한 혈연(또는 유사혈연-양자)의 선으로 계승되는 ‘경영체’를 말한다.

       일본의 이에는 가산(家産)을 기초로 가업(家業)을 경영하는 경영체, 대외적으로 가명(家名)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사회단체였다. 가족 내지 친족은 그 경영체의 담당자로서 위치지워졌다. 그러므로 생업·재산·성명(명성)은 모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에의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바쿠후라는 개별적, 국가적 영주권력은 막번체제하의 사회를 지배함에 있어서, 이러한 이에적 지배관계의 유지를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에 내부의 주-종(主-從), 친-자(親-子) 관계는 다른 사적 사회관계와는 구별되는 공적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내부의 가장은 영속되어야 할 이에를 당대의 그 시점에서 맡고 있는 책임자로 여겼기 때문에 가부자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러한 이에 원리는 병농분리제를 매개로 해서 신분제로서 제도화되고 농업·상업·수공업을 가업으로 하는 이에가 있는 한편, 국가적 통합통치와 관련되 일을 가업으로 하는 이에가 존재함으로써 가업을 직분으로 한 신분집단이 고정화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큰 저항이 없이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 역사적 배경 가운데 중요한 것이 야쿠(役)라는 관념의 존재였다. 야쿠란 사회에서 개인이 담당하는 역할과 그 역할에 따른 책임을 의미하였다. 이 야쿠는 봉건적  주종관계하에서 종자측이 갖는 봉사 의무의 수행과 동일한 듯 하지만, 그 내용이 주군의 사유물이 아니라는 면에서 즉 전체적으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로 정의된다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측면은 코쿠타카제로서 대표적으로 보여지는데, 코쿠타카란 무사에게는 군역 등 군사·행정상의 야쿠를 부담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기초의 크기, 농민에게는 공조와 부역이라는 야쿠의 부담의 크기, 쵸오닌에게는 직종에 다른 기술적 노동의 봉사, 노동생산물의 공납이라는 야쿠의 부담 정도를 각기 산출하기 위한 계량적 기준이었다. 그리고 이 야쿠 관념이 도쿠가와 사회의 조직 원리였던 것이다.

      이런 원리로서 일본 사회에서 천황과 쇼군을 정점으로 전사회적으로 조직된 야쿠의 체계 속에서 무사·농민·쵸오닌이라는 3개의 신분이 구별되는 동시에 각 신분 내에서도 복잡한 계층의 구별이 있어, 개인 차원에서 볼 때 주어진 직업, 사회적 지위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관념으로 고정화 되었다.

      야쿠 체계로서의 사회질서는 이에를 단위로 한 사회구성에 실로 적절한 것이었고, 이에의 특질 중 하나가 가업이라는 형태로 사회적 기능을 분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가업을 전사회적 규모로 크게 조직화한 것이 곧 야쿠 체계로서 막부체제이며, 이는 사회적 분업화의 양상을 볼 수가 있다.

       사회 문화적 측면(종교, 사상)

      에도시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전파되면서 정체적 이념에 유학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그것은 중국의 주자학처럼 단일한 사상체계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즉, 사농공상과 같은 신분제적 확립과 막부의 정치적 체계에는 유교적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지만 그 외적 측면 역시 작용했던 것이다. 특히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일본인들의 현세성이다. 섬나라인 일본의 경우, 해양과 대륙으로부터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들의 유입과 그로인한 접촉은 서로간의 영향과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자.

      가토 슈이치3)에 따르면, 일본이 문화를 받아들일 경우의 반응으로서

     첫째, 외래의 세계관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경우, 둘째, 토착세계관을 발판으로 한 거절 반응, 셋째, 가장 많이 일어난 외래사상의 일본화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세 번째 경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경우, 일본화의 방향은 언제나 추상적이며 이론적인 면을 잘라 버리고 포괄적인 체계를 해체하고 그 실제적인 특수한 영역으로 환원하였으며, 초월적인 원리를 배제하는 방법을 취한다. 따라서 피안적인 체계를 차안적으로 재해석하고 체계의 배타성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현세적 성격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서 일본의 종교를 보면, 초월적인 신이 없고 무수한 신이 공존하는 일본의 전통신앙인 신도가 보여주듯 외래사상에 배타적이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외래사상의 초월적 가치는 일본 안에서 해체되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면만 남게 남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지기도(加持祈禱)4)와 우지데라(氏寺)5) 같은 현세 이익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일본의 불교를 보면 대부분 혼인을 인정하고 그 세습 역시 인정되고 있다. 기독교 역시도 종교적 교리 자체보다는 기독교를 통한 서양문물에 대한 수용의 의미이며, 호기심의 발로였다. 그 결과 오늘날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극히 낮다.

       유교의 경우에도 조선처럼 관념적이고 체계적인 성리학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현실사회 안정의 수단으로서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성향 속에서 무사도나 신유습합(神儒習合)6)과 같은 독특한 측면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은 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유사성을 찾을 수가 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벨라라는 학자는 ‘도쿠가와 시대의 종교, 문화 통해서 일본의 근대화의 성공의 원인을 찾기도 하였다.

       조선이나 중국 같이, 관념적 측면을 중시하는 유교가 지배하는 경우에선 부의 축적이나 상공업이 천시되며, 명분 등이 강조되면서 실용적 학문들이 태생되기 어려웠지만 일본의 경우, 유연한 문화적 특성 덕분에 전문적 직업과 산업의 발달과 자본의 축적이 원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근대화와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에 있어서도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 유연한 일본인의 문화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일본은 근대적 자본주의화의 초기의 경로를 에도시대에 겪고 있었으며, 사회적 분업은 전문화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에 문화의 경우, 이후 일본의 기업들에서 볼 수 있는 공공 경영적 성격, 즉 기업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일봉의 봉공(奉公)이었다. 일본의 재벌과 한국의 재벌을 비교해볼 경우, 한국사회에서의 가(家)와 일본의 이에(家)의 차이점이 확연히 들어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국 등에 있어서도 은행을 제외한 일반 기업들이 우수한 대학졸업생을 채용하는 일이란 드물었던 시대에 일본의 실업계는 그 초창기부터 제국대학(현재의 도쿄, 쿄토 등)과 상법강습소, 게이오 대학 등의 우수한 졸업생들을 끌어 들었던 것이다.

       나오며,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의 근세 에도 문화는 일본의 현재의 모습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전세계적 자본주의 체제가 완성되어 있는 현재에 있어서, 과거의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변화되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라 하겠다. 하지만 사회적 문화라는 것은 집단에게 있어서 하나의 유전자와도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영향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일본 사회와 일본 경제를 특징짓는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라 본다.

    출처 : 19세기 일본의 근대화 / 서울대학교 출판부

              일본문화의 이해  / 학문사

              일본문화의 이해 / PU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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