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챙기는 이유 - 100il chaeng-gineun iyu

남한에서 생활하는 청년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들어보는 <청춘만세> 저는 진행자 윤하정입니다.

먼저 이 시간을 함께 할 세 청년을 만나볼게요.

클레이튼 : 안녕하세요, 클레이튼입니다. 미국에서 왔고 서른한 살입니다.

예은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러시아에 갔다 여러분 뵈려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취업준비생이고, 스물일곱 살입니다.

서형 : 안녕하세요, 스물두 살 김서형이고요. 평안남도에서 왔습니다.

클레이튼은 남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요. 남한에서 태어난 예은 씨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형 씨는 3년 전에 탈북해서 지금은 남한 대학생이에요.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자라온 세 청년과 함께 지난 시간부터 남한에 있는 연인들의 각종 기념일에 대해 얘기 나누고 있습니다.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라고 해서 여성이 좋아하는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고,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라고 반대로 남성이 좋아하는 여성에게 사탕을 줍니다. 이밖에도 생일이나 성탄절 등 크고 작은 기념일이 많은데요. 우리 청년들은 이 기념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계속해서 들어보시죠.

진행자 : 서형 씨는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가 있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요?

서형 : 저는 좋은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상업적이다, 돈 벌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것도 청년 문화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요. 남녀가 만나서 즐기는 데 사탕을 주는 건 밝고 순수한 마음도 담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예은 : 저도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까지는 좋거든요. 그런데 남한에는 매달 14일마다 기념일이 있어요. 4월 14일은 블랙데이라고 해서 솔로들, 연인이 없는 사람들이 검정 옷을 입고 자장면을 먹어요(웃음). 5월 14일이 장미를 주고받는 로즈데이, 6월 14일이 키스데이요.

진행자 : 달마다 있기는 해요. 그런데 거기까지는 다 챙기지 않는데, 요즘은 블랙데이, 그러니까 4월 14까지는 챙기는 것 같아요. 연인들만 해도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챙겨야 하고, 서로 생일 챙겨야 하고, 크리스마스도 챙겨야 하고.

서형 : 아, 이게 은근히 부담이 될 수도 있겠네요.

진행자 : 아까 사탕이나 초콜릿이 얼마나 한다고 그랬잖아요. 연인이 되면 그것만 선물하지 않습니다. 그건 상징적인 것이고, 옷이며 신발,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굉장히 돈이 많이 듭니다.

예은 : ‘투투’라고 해서 학생들이 많이 챙기는 기념일인데요. 학생들은 보통 100일 넘기기도 힘드니까 22일을 기념하는 날이 있어요. 또 만난 지 50일, 100일, 200일, 300일, 1년, 2년을 챙기기도 하고. 그래서 100일 날에는 친구들이 100원을 주기도 했어요.

진행자 : 저도 100일에 선물을 받았는데 제가 3개월 동안 만나면서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을 상자 안에 담았더라고요. 음반이나 책 같은.

예은 : 저도 100일이 좀 뜻 깊은 날이었어요. 아무래도 100이라는 숫자가 크게 와 닿잖아요.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선물도 주고받았어요. 남자 친구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푸슈킨이라는 러시아 작가의 전집을 선물해주면서 자필로 편지를 써줬어요. 그걸 받고 무척 좋아했는데 제가 뭘 해줬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웃음).

클레이튼 : 미국에서는 이렇게 많이 챙기지 않습니다. 1년 기념일은 챙기는데, 22일이나 100일은 말도 안 돼요.

진행자 : 북한에서는 그들만이 챙기는 기념일이 있나요?

서형 : 생일이요. 남한에서는 아빠가 생일인데 일을 하시더라고요. 남한에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북한에서는 생일에 일을 안 하거든요. 회사에 말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어요. 청년들 같은 경우는 생일에 친한 친구들을 다 초청하는데 거기에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있는 거죠. 다 같이 주인공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기타 치면서 노래도 부르고, 연인이 있으면 둘이 노래도 부르게 하고(웃음).

예은 : 그럼 그런 기념일에 서로 주고받는 선물은 주로 뭐예요?

서형 : 일단 편지를 써주고, 저는 작은 인형을 받은 기억밖에 없어요. 열쇠고리를 많이 가지고 다니거든요. 남한처럼 비밀번호로 문을 여는 게 아니라서 열쇠에 다는 예쁜 인형을 선물 받았어요.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계속 보니까(웃음).

진행자 : 그렇지만 생일을 제외하고 다른 기념일을 챙기는 문화는 없어요?

서형 : 없어요.

예은 : 남한에는 결혼기념일도 있거든요. 결혼한 날짜에 1주년, 2주년 해서 서로 축하하거나 자녀들도 선물을 하는데 북한에는 그런 게 있어요?

서형 : 결혼기념일은 모르겠는데, 북한에 남녀평등의 날이라고 있어요. 그날은 엄마가 밥을 안 하고 아빠가 밥을 하고 엄마한테 모든 걸 다 해줘요. 제가 모를 수도 있는데 저희 가족은 그랬어요.

클레이튼 : 미국에서는 남자가 결혼기념일 잊어버리면 큰일 나요(웃음).

진행자 : 듣고 보니까 북한에 비해 남한에 연인이나 부부가 챙길 기념일이 훨씬 많은데요. 미국에 비해서도 많네요.

클레이튼 : 남한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진행자 : 그런데 남한에서 연인을 사귀려면 대부분 챙겨야 하는 거잖아요?

예은 : 그런데 다 돈이 들어서 청년들에게는 많은 부담이 되기 때문에 오래된 연인들은 ‘서로 챙기지 말자, 우리 생일만 챙기자!’ 이런 식으로 합의를 보고 사귀는 연인들도 많다고 해요.

진행자 : 남한에 왜 이렇게 기념일이 많죠?

클레이튼 : 돈 더 많이 벌려고, 상업적인 거 아닐까요.

진행자 : 여러분도 다 챙기고 있나요?

서형 : 아니요, 저는 몰랐어요.

진행자 : 알게 되는 순간 고통이 시작됩니다(웃음). 클레이튼도 처음에 남한 왔을 때는 몰랐죠?

클레이튼 : 다 몰랐죠. 남한 사회 좀 이상하네요(웃음). 왜 이렇게 기념일이 많은지.

진행자 : 왜 이렇게 많을까요? 어떻게 보면 대학생들, 아니면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 시작하는 친구들도 있죠. ‘그 친구들에게 재밌는 게 없나?’라는 생각도 해봐요. 남한에서 연인이 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잖아요. 영화 보고, 찻집 가고, 밥 먹고, 놀이동산 같은 곳에도 가지만 ‘뭔가 재밌는 일이 없어서 자꾸 기념일을 만들어내나?’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서형 : 그런 쪽에서 말씀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서양에서는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독립을 하기 때문에 독립 이후에 남녀가 둘 만의 공간을 꾸려갈 수 있는데 남한은 아직 보수적이고,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남녀가 할 수 있는 건 기념일을 챙기는 거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더라고요. 그런 특별한 날을 만들어서 ‘나를 좋아하나?’ 계속 확인하려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진행자 : 그렇죠, 미국에서는 대학생만 돼도 남녀가 함께 여행가는 게 자연스럽죠?

클레이튼 : 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 가서 부모님과 텔레비전 본 적도 많습니다. 그런 게 자연스럽죠.

예은 : 남한에서 고등학생들이 연애했는데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거나 그 집에 가서 노는 건 사실 좀 불가능하고 부담스럽죠.

진행자 : 요즘은 대학생 연인들도 여행을 많이 간다고 하지만 표면적으로 그렇게 많이 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예은 : 그래서 어찌 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기념일을 더 즐기는 것이 아닌가.

진행자 : 그렇게 생각하면 북한은 남한보다 더 보수적이고 더 할 게 없는데 그런 기념일이 많이 생겨나지는 않네요?

서형 : 네, 그런 것 같아요. 아예 놀러 못 가는 건 아니에요. 계곡이나 공기 좋은 곳이 따로 있잖아요. 단 둘이서 여행가는 건 없고, 대부분 북한에서는 6~7명의 친구들과 모이는 경우가 많아요. 돈이 있으면 자동차를 대여해서 같이 계곡에 가서 맥주 마시고 고기 먹고. 이렇게 노는 경우는 있죠.

진행자 : 어쨌든 클레이튼도 남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서형 씨도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니까 아마도 남한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를 사귈 가능성이 높잖아요. 그러면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 문화를 이해해줘야 서로 사귈 수 있는 거잖아요.

클레이튼 : 만약에 여자 친구 생기면 생일, 밸런타인데이만(웃음).

진행자 : ‘우리 만난 지 100일 됐어!’ 이러면 어떻게 해요?

클레이튼 : 축하해! 한 잔 하러 가자(웃음)!

진행자 : 여자 친구가 삐칠 텐데.

클레이튼 : 그래서 여자 친구 없습니다(웃음).

진행자 : 서형 씨는 어때요? 걱정이 많이 될 것 같은데.

서형 : 저는 (밸런타인데이에)초콜릿을 만들어 줄 거예요. 화이트데이에 당연히 사탕 받고 싶고, 100일, 200일, 300일은 챙겨보고 싶어요.

진행자 :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서형 : 오래 가지 못하는 연인들이 많더라고요. 북한에서는 그렇게 빨리 헤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대부분 신중하게 만나서 결혼까지 가는 친구들이 많은데 남한은 드물더라고요. 한 달 사귀다 헤어지는 친구도 있고. 그런데 나는 신중하게 만나서 100일, 300일, 몇 주년 챙기고 싶어요.

진행자 : 남한에서 짧게 만나는 연인들이 많아서 그렇게 100일, 200일을 챙기는 거예요?

예은 : 네, 투투까지 있다고(웃음).

진행자 : 왜 그렇게 빨리 헤어지는 거예요?

예은 : 모르겠어요, 사회가 빨리 돌아가다 보니까 여러 사람을 만날 기회도 많아지고 해서 마음이 안 맞다 싶으면 빨리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지 않나 생각해요. 남한에서는 여자들끼리 하는 말로 ‘연애를 많이 해야 상대를 보는 눈이 좋아진다’고 하거든요. 북한에서는 보통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많이 안 하나요?

서형 : 그렇죠. 그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사회적인 문화가 아닐까 싶어요.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긴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오히려 많은 남자를 만나면 시집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아서 처음 연애할 때부터 드러내지 않아요. 대부분 조용하게 사귀다 나중에 얘기하고, 좀 많이 참는 편이에요. 싫어도 한 번 맺은 인연은 계속해서 인내하면서 감내하기 때문에 오래 가는 편인데, 지금 좀 많이 변하고 있기는 해요. 이혼도 많아지고 달라졌지만 아직까지도 이성을 많이 만나는 건 부정적으로 봐요.

진행자 : 지금 남한에서 3년 정도 생활했는데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서형 : 변한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은 하는데 20년을 북한에서 살다 보니까 아직까지 연애를 못하는 이유가 신중하게 만나서 오래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클레이튼 : 저도 3년차 솔로인데요(웃음).

진행자 : 청취자 분들이 ‘남한에서는 다 그렇게 짧게 사귀나’ 오해하실 수 있는데 다 그런 건 아닙니다. 클레이튼도 굉장히 보수적인 미국인이고요.

클레이튼 : 네, 사실 미국 사람도 보통 짧게 사귀는데 저는 깊이 사귀는 걸 좋아합니다. 진행자 : 저도 신중한 편이라서. 이건 사람의 성향 차이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짧게 만나는 친구들은 어쩌면 이 기념일을 챙기고 싶어서, 기념일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만나기도 해요(웃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소개팅을 많이 하거든요.

예은 : 아, 크리스마스가 100일이 되도록 크리스마스 100일 전부터 사귀는 사람들도 있어요.

진행자 : 극히 일부예요!

클레이튼 : 사람들이 진짜 개념 없어요(웃음)!

진행자 : 저희가 오늘 재밌는, 말하면서 절로 웃음이 나오는 얘기들을 했는데 30대 중반만 넘어가도 대부분 결혼을 하게 되니까 이런 기념일을 거의 안 챙기는 것 같아요. 돈 낭비 같고, 뭐 이런 것까지 다 챙기나 하는 것들도 어떻게 보면 20대, 30대 초반 청년들이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추억들이 아닐까 싶어요. 봄도 다가오는데, 좀 싱그러운 분위기가 북한 청취자 여러분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마지막 인사드리죠.

다함께 :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진행자 : 지금까지 진행에 윤하정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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